침대 위에서 물을 따르다가 그만 컵을 넘어뜨려 버렸다. 금방 컵을 다시 세우고 수건으로 매트리스를 덮었다. 톡, 톡 찍어 내린 수건이 물을 흡수한다. 그러나 매트리스는 이미 축축하게 젖어 들었다. 많지 않은 양이었고, 분명 금방 닦아 냈는데도 엎지른 물은 순식간에 매트리스를 적셨다.


그런 것이다. 내가 이 사람을 사랑하게 된 것도 마치 이 물과 매트리스 같았다. 나는 분명 좋아할 생각이 없었는데 어떤 계기로 인하여 내 가슴속이 순식간에 이 사람으로 젖어 들고 만 것이다. 간단하다. 애써 수습하려 꾹꾹 눌러 놓은 얇은 수건 한 장을 치워 보면 내 가슴은 온통 그 사람의 색으로 물들어 있는 것이다. 그럼 당황한다. 이미 젖어 버린 매트리스를 볼 때와 같이 말이다. 하지만 어쩔 수 없다. 이미 젖어 버린 걸 어떡하겠는가. 


그러나 단 하나 차이점이 있다면, 젖은 매트리스는 금방 마르지만 젖어 버린 가슴은 너무 깊은 내부에 있어 잘 마르지 않는다는 것이다. 가슴은 빨아 쓸 수도 없다. 물들어 버린 그 사람이 얼룩덜룩 남아 있게 되거든.


시작은 원나잇이었고 그 관계가 이어져 섹스 파트너가 됐다. 뒷구멍에 꽂아 본 적만 있지 뚫려 본 적은 없는 내가 그에게 뒤를 내준 게 시작이었다. 그러니까, 모든 게 물 흐르듯 흘러갔다. 술에 취해, 분위기에 취해, 어쩌다 보니, 얼떨결에. 그런 관계가 지금까지 이어져 온 것이다. 


첫 경험한 어린애도 아니고 처음을 내줬다고 해서 딱히 어떤 큰 의미를 두는 것은 아니다. 그러니까 정말 그냥 어쩌다 보니, 가슴에 덮어 두었던 수건 한 장을 치워 보니 온통 그 사람으로 가득했다는 뻔한 이야기다.



“깼어?”



적당히 가무잡잡해 건강해 보이는 탄탄한 상반신이 눈에 들어왔다. 이제 막 욕실에서 나와 수건으로 하반신만 가린 그가 젖은 머리를 털며 나왔다. 그가 나와 스킨을 바르고 휴대폰을 확인하고 옷을 입는 모습을 팔을 머리에 괸 채로 지켜보았다. 나는 알몸을 얇은 이불 하나로 가리고 있는 상태였고 침대 밑은 말라붙은 콘돔으로 어지러웠다.


우뚝 솟은 코가 사람을 더 날카로워 보이게 했다. 운동을 해도 마른 근육만 잡히는 나와 다르게 알이 꽉 찬 탄탄한 팔을 눈으로 훑었다. 남자는 관능적이었다. 벗은 몸은 그리스의 신을 본뜬 조각상 같았다. 지금은 머리를 내리고 있지만 반듯하게 손질하고 몸에 딱 맞는 정장을 차려입으면 금방 냉철한 이성으로 점철된 금욕적인 얼굴이 된다. 그가 섹스를 할 때의 표정과 서류를 훑을 때의 표정은 확연하게 다르고 나는 그런 갭을 알고 있다는 것에 만족한다.


그렇다고 해서 딱히 그의 외모에 반했다는 건 아니다. 수려한 외모는 물론 플러스 요인이 되지만 애초에 내 취향은 아니었다.



“구멍이 너덜너덜해질 때까지 박았다고 생각했는데. 눈으로 그렇게 조르는 거 보면 아직 멀쩡한가 보지?”



솔직히 말하면 성격도 그리 좋은 건 아니다.


나는 그가 셔츠를 입고 넥타이를 매는 모습을 지켜보았다. 젤을 발라 머리칼을 반듯하게 세우자 완벽한 어디 그룹의 이사님이 된다.


재력에 반한 것도 아니다. 그에 비하면 턱도 없는 수입에 서민 신분이지만, 하루 벌고 하루 쓰는 소모적이고 쾌락을 추구하는 인생을 살면서 미래에 대한 설계나 기대 따위는 한 적이 없다.


그를 만나기 전까지 나에겐 남자도 여자도 끊이지 않았다. 나도 어디 가서 빠지지 않는다는 얘기다. 그러니까 그런 내가 그의 어디에 반했냐면.



“예, 지선 씨.”



얼마 전 그는 선을 봤고 아직까지 그 여자와 만남을 이어 가는 중이다. 그는 결혼 적령기였고 어디 그룹의 이사님이시니 당연한 일이다. 상대 여자도 어디 그룹 회장님의 막내 따님이시라나.



“네. 오늘 가능합니다. 저녁에 뵐까요.”



부드러운 음성이 그의 입술 새로 나와 수화기를 타고 흘러간다. 그리고 그 여자에 귀에 닿아 달콤하게 녹아내리겠지. 머리를 괸 팔이 저려오기 시작하지만 꼿꼿하게 자세를 유지했다. 전화를 받는 그의 널찍한 등을 보고 있는데, 그가 문득 뒤를 돌아봤다.



“예. 알겠습니다.”

“이번엔 잘돼 가나 보네. 결혼하겠어.”

“질투해?”



그가 휴대폰을 내려놓고 손목에 시계를 차며 나를 향해 묻는다. 입에 걸린 미소가 얄미워 나는 마찬가지로 한쪽 입꼬리를 삐뚜름하게 올렸다.



“우리가 무슨 사이라고 질투를 해? 섹스 파트너 주제에.”

“귀엽게 굴라니까.”



그가 낮게 혀를 차며 중얼거렸다. 그는 언제나 내게 ‘귀엽게’ 굴기를 원하지만 나는 그것이 어떤 건지 알지 못한다. 알고 싶지도 않다. 내가 왜 그에게 그런 식으로 굴어야만 한단 말인가. 웃기지도 않은 말이다.



“계속 여기 있을 건가?”

“응. 좀 더 자다 갈 거야.”

“그렇게 해, 그럼.”



옷매무시를 다듬은 그가 뒤도 돌아보지 않고 방을 나선다. 쾅. 문이 닫혔다. 텅 빈 방 안에 고요한 진동이 울렸다. 우우우웅―. 나는 멍하니 눈을 깜빡이다 팔을 내리고 몸을 일으켜 침대 헤드에 등을 기대고 앉았다.



“읏……!”



팔이 저리다. 왈칵 울음이 터져 나왔다. 불쾌한 물줄기는 수습할 새도 없이 터져 나와 볼 위에 물길을 낸다. 나는 손바닥에 눈을 묻고 무릎을 세웠다. 손바닥이 뜨겁게 달아올랐다. 몸통을 역류하는 뜨거운 물줄기에 어깨가 들썩거렸다.


덜컹. 불현듯 문이 열린다. 나간 줄로만 알았던 그가 문을 열고 들어섰다. 그가 미간을 좁히고 나를 본다.



“왜 혼자서 울고 있어.”



모른다. 그에게 반한 이유 따위 모른다. 반하지 않았으면 좋았을걸. 사랑하지 않았으면 좋았을걸. 물을 따르지 않았으면 좋았을걸.


그가 성큼성큼 걸어와 침대 위에 무릎을 꿇고 나를 안았다. 나는 팔을 뻗어 그를 밀쳤지만, 내 품을 안은 그의 힘이 더 강했다.



“그러게 귀엽게 굴면 되잖아.”



책망하는 어조에 다정한 음성이 깃든다. 그가 내 관자놀이에 입을 맞추더니 내 입술에 자신의 입술을 맞물렸다. 물컹한 혀가 입술을 살살 핥는다. 부드러운 달램에 나는 눈을 감았고 그는 속삭였다.



“밥 먹자. 오늘 저녁에.”




BL 작가 선명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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