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어나도 참 엿같은 곳에 태어나서." 


고가도로 위에서 케이아가 중얼거린 말이었다. 자정이 가까운 늦은 밤, 다리 밑으로 쌩쌩 달리는 것은 야밤에도 바빠보이는 물류트럭과 승용차 몇 대 말고 없고, 구경할 것도 없는 도로 밖으로 몸을 쭉 내민 소년의 모습은 다른 어른이 보았다면 즉시 기겁하여 끌어당기거나 경찰에 신고할지도 모를 모습이었다. 물론 케이아는 이대로 밑에 몸을 던져 머리가 깨져죽을 생각은 없었다. 


새로 태어난 곳은 꿈에서도 본 적 없던 별세계였다. 원체 호기심 많은 성격이라 즐겁다면 즐겁게 느꼈으리라. 하지만 그것도 즐길 수 있는 환경이 받쳐줘야 할 때의 일이다. 기껏 두 번째 삶을 주면 뭐하나, 아비는 강간마에 어미는 도박꾼인데. 케이아는 새삼 다시 짜증이 치밀었다. 제 딴에는 그냥 박혀줄 거라 생각했는지 몰라도―그리고 케이아 본인도 정조나 정절에 큰 의미를 두지 않는 성격임에도―올해로 열 살이 되는 케이아가 아무 미련도 없이 홀홀 집안에서 뛰쳐나온 것은 소름끼치는 역겨움과 수치 때문이 아니라, 그저 풀 곳 없는 답답함과 일말의 짜증이 충동적인 선택을 하도록 이끌었기 때문이다. 


하나뿐인 아들이 사라졌는데도 경찰에 신고 한 통 넣치 않는 부모의 무관심 덕분에, 케이아는 무사히 다른 지역의 보육원에 정착하여 큰 미련 없는 삶을 이어갔다. 그러나 집안 고르는 운세만큼은 여전히 남아있어, 일년 채 되지 않아 케이아는 그 바닥 모두가 알아주는 부잣집 영감의 손주로 입양되어 들어갔다. 


짚고 넘어가자면, 적적한 노인네 한 명과 공원에서 말벗 노릇 해주던 것이 이런 결과로 돌아올 줄은 그도 몰랐다. 구태여 좋은 환경을 거절할 이유도 없으므로 보육원 생활을 관두고 노인과 가정부가 한 명 씩 있는 텅 빈 집에 발을 들였다. 노인과 소년이 함께 고목나무 굽듯 늙어가는 모습이 남들 보기엔 퍽 우습겠다 싶었다. 


그리고 그 조부가 죽었다. 사인은 노환이었다. 근 2년 새 갑작스레 상태가 나빠져, 저 혼자 수발 드는 것도 그만두고 병실에 입원한 것이 반년 전의 일이다. 그만큼 집안 사람들 모두가 예상하고 있던 죽음이었다. 혼란은 없었다. 자식들보다 케이아가 노인과 함께 있어준 시간이 더 길었던 만큼, 죽기 전 몇 시간 만큼은 피 이은 자식들에게 자리를 내어주었다. 유언장에는 지나가듯 케이아가 성인 때까지 잘 돌보라 당부하는 말 한 줄이 적혀있을 뿐이었다. 그네들은 케이아를 가족으로 취급하지 않고 백안시했으나, 그렇다고 당장 호적 파고 나가라고 상중에 고래고래 소리친 것도 아니라, 적당한 집 한채를 받고 케이아는 독립했다.


그리고 물밀듯이 밀려오는 외로움에 그는 잠겨갔다. 


전생에는 자신 쪽에서 걸리는 것이 많아 상대를 먼저 밀쳐냈다. 스스로 날을 세우고 벽을 둘러서 상대가 자신을 들여다보지 못하게 했다. 죽는 날까지 평생을. 이젠 그럴 이유가 없다. 조금 신세 딱한 어린애가 뭐가 그리 무서워 사람들을 멀리하겠는가? 하지만 습관인지, 천성인지, 케이아는 아직도 사람들을 사귀지 못한다. 주변에선 사교성 좋은 인간 평을 듣지만 진솔하게 마음을 터놓고 사랑할 대상이 있는가는 다른 문제였다. 그는 소년의 모습을 한 노인이었고 가지 못할 고향을 그리는 방랑자였다. 친구처럼 지냈던 늙은이마저 죽고, 천애고아 외톨이가 된 기분에 젖어사는 것은 확실히 어린 몸의 정서에 좋지 못했다. 만성적인 우울함에 만사가 다 귀찮고 짜증스럽다. 조금은 붕 뜬 기분. 물결에 잠긴 채 이리저리 둥실둥실 떠다니는 일상. 부표는 어디 있지?


그때는 날 미워하지 않을 사람을 찾아헤맸다. 네가 날 미워할 거라고 생각했으니까. 그것이 나의 성대한 착각이었음은 죽기 직전에서야 알았다. 어떤 미사여구도 없이 단지 날 사랑한다는 그 말, 그 말 하나를 잊지 않기 위하여 나는 이번 생에도 너를 기억하고 있는 것이다. 이건 널 불신하고 널 배신한 나에 대한 벌이다. 영원히 너만을 생각하게 만드는 것. 막 죽고 다시 태어났을 땐 그저 네게 미안했고, 홀로 너 없는 유년기를 반복하는 동안은 네가 그리웠으며, 외로운 생활을 반복하고 있는 지금, 이제는 날 사랑한다 말한 너를 꿈에서라도 보고 싶어 앓는다. 다시 만난다면 꼭 물어보고 싶은 게 있어. 아직도 날 사랑해, 다이루크?


난 그런데.


3, 2, 1……. 기다리던 버스가 도착하고, 저보다 몇 살은 더 어려보이는 아이가 홀로 버스에서 하차했다. 외진 곳이었기에 이맘때면 저 버스를 타고 내리는 승객은 저 아이 한 명 밖에 없었다. 이리저리 돌아다니는 취미가 있는 케이아가 며칠 전 발견한 그, 다이루크였다. 제법 먼 지역이다. 그나마 같은 나라 안인 것을 다행이라 생각해야 하는지……. 


어린 아이가 다니기에는 늦은 시간이지만, 꽤 멀리 떨어진 학교에 다니고 있으니 어쩔 수 없는 일이다. 등에 맨 배낭의 크기만 봐도 알겠지만 다이루크는 현생에서도 제법 우등생 축에 속했다. 아무리 질 낮은 집안에서 자랐어도 결국 그는 여전히 그였다. 완벽하고 뛰어나고 위대하고 고귀한. 감히 질투의 감정조차 불러일으키지 못할 만큼. 아무리 낮은 곳에 머물러도 바람 슬라임처럼 자연스럽게 위로 떠오르는, 존재함으로서 승리하는 나의 라겐펜더.


해묵은 의문을 가지고 있었다. 이것은 사랑일까, 덧 없는 향수일까? 다시 만난다 해도 나는 여전히 너를 다이루크라고 여길까? 


그 답은 몇 달 전 알아냈다.


벤치에 드러누워 있던 케이아의 초점 흐린 시야 사이로, 헤진 운동화가 눈밭에 발자국을 뽀득뽀득 남기며 다가왔다. 눈동자 하나만 데굴 굴려 위를 바라보니 그곳에는 집으로 돌아간 줄 알았던 다이루크 라겐펜더가 서있었다. 작은 체구와 안 어울리는 듬직한 자세로.


"너."


케이아를 빤히 바라보던 다이루크가 툭 내뱉은 말이었다. 제 딴에는 눈에 부릅 힘주고 노려보고 있는 것이겠지만 케이아의 눈에야 그저 같잖고 귀여웠다.


"그렇게 아무데나 널브러져 있지마. 옷도 얇게 입고서."


꼰대 기질은 여전하네. 케이아는 속으로 그리 생각하면서도 순순히 몸을 곧추세우고 똑바로 앉았다. 첫만남부터 혼나는 것은 사양이었기에. 케이아는 싱긋 웃으며 다이루크를 향해 안부인사를 건넸다. 


"그동안 잘 지냈어, 다이루크?"

"난 널 처음 보는데."


케이아는 뭉근 웃음만 짓고 말았다. 짐작하고 있던 바이니 따로 충격받을 이유가 없었다. 느물거리는 케이아의 반응이 마뜩치 않았는지, 다이루크는 한층 더 크게 눈을 홉뜨곤 버릇 없는 목소리로 물었다. 


"스토커야?"

"맞춰봐."

"반년 동안 날 지켜봤지. 말이라도 걸 줄 알았는데 멀리서 꾸물거리기만 하고. 나 같은 거지한테 눈독들이기에, 글쎄, 넌 매번 다른 새 옷을 입고 왔잖아."

"눈썰미 좋네. 멀리서도 잘 알아봤구나."

"대답해. 너 뭐야?"


그건 네가 알잖아.

케이아가 생각했다.

이번에도 날 사랑한다고 말해줘. 

그걸로 충분해.








"―케이아."


떠나는 내게 달려와 내 팔을 붙잡는 다이루크를 돌아보는 내 눈은, 한심하게도 다소 젖어있었다. 전생 현생 다 합쳐 마흔을 바라보는 나이였지만 나이와 눈물은 아무 상관관계가 없는 일이었다. 공원 한복판부터 입구까지 냅다 뛰어온 듯 다이루크의 숨은 가쁘게 오르내리고 있었다. 진정한 그가 차가운 숨을 토해내며 나를 똑바로 바라보았다. 


그의 반응은 나의 기대를 덜도 말고 딱 반 정도만 꺾었다. 다이루크는 잔뜩 당황한 기색이었고, 자기도 자기가 무슨 말을 했는지 모르겠다는 멍청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마침내 나의 이름을 떠올린 그가 믿지 못하겠다는 듯 몇 번이고 내 이름을 곱씹고, 중얼거리고, 스스로의 귀에 새겼다. 나는 그 모습을 바라보며 풍선 터지듯한 웃음을 터뜨렸다. 눈물이 맺힐 정도로 깔깔거리며 웃은 뒤, 겨우 웃음을 가라앉힌 내가 그에게 말했다.


"그거 알아? 이번엔 내가 두 살 형이거든. 조금 더 싸가지 있게 구는 게 어때?"


다이루크의 얼굴이 괴상하게 일그러졌지만, 나는 온전히 기억을 찾지 못한 그에게 아직 모든 걸 설명해줄 마음이 없었다. 


그러니까 2년 뒤엔 너도 따라죽었다 이거지. 서로 끽해야 서른도 못 채웠다. 뭐가 그리 아쉬워 우리는 일찍 죽은 연인이 되었을까. 그 이유를 내가 듣기까지 네 옆에서 몇 년을 기다려야 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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