필수 BGM | Blue Foundation - Eyes On Fire (반복 O)
















39



“이렇게 속전속결로 진행될 거라곤 상상도 못했네요. 이게 전부 우리 사부인께서 힘써주신 덕분 아니겠어요? 오호호호.”

“어머, 제가 뭘 한 게 있다고. 좋은 남편, 좋은 사위 맞으려면 여자 쪽에서 맞추는 게 당연한 거죠. 안 그러니, 인형아?”



매트한 분홍빛 입술이 부드러운 선을 그리며 올라갔다. 줄곧 입가에만 은은한 미소를 머금고 있던 인형이 커다란 눈을 휘며 웃자 사랑스러움이 주변 공기에 향수처럼 녹아든다. 격조 있는 자세로 앉아 조용히 대화를 경청하던 인형의 시선이 앞에 나란히 앉은 세 사람을 느긋하게 훑었다. 귀에 달린 오팔 귀걸이는 그녀와 완벽히 동화된 상태로 달랑거리며 다채롭게 반짝였다. 



“그럼요, 온유 씨 스케줄에 전부 맞추기로 이미 오래전에 이야기를 끝냈는걸요.”



그녀의 시선은 곧 맞은편에 앉은 예비 신랑에게서 멈췄다. 살짝 내리깐 눈을 게슴츠레 뜨며 은근한 눈빛을 보내는 인형으로 인해 온유는 한겨울임에도 타는 듯한 열기를 느끼는 중이었다. 그토록 원하던 인형이 눈앞에 있다니. 온몸이 지끈거리고 입안이 바싹바싹 마르는 통에 그는 오른손으로 타이트한 넥타이를 느슨하게 풀었다. 그녀의 깊은 눈동자에 자신이 담길 때마다 주변 공기의 농도가 옅어지는 것 같았다. 호흡이 곤란해질 정도로. 양가 부모들이 주거니 받거니 사탕발림 공작을 이어가는 와중에도 두 사람은 지독한 속박에 걸린 듯 서로에게서 눈을 떼지 못했다. 








.


.


.








“고마워요.”

“···.”



“아무것도 묻지 않고 날 다시 받아줘서.”



새 차 티가 폴폴 나는 국내 H사의 고급형 세단 안. 조수석에 앉아 비 내리는 차창 밖을 응시하던 인형이 나지막이 조근거렸다. 만면에 미소를 띤 온유가 자상하게 웃으며 깍지 낀 손에 힘을 주었다. 



“내가 더 고마워요, 인형 씨.”

“···.”



“다시 돌아와 줬잖아요. 그것만으로도 난 좋아요.”

“난···.”



“···.”

“무서웠어요.”



적색 신호를 보고 브레이크를 밟은 온유의 귓가에 물기 어린 음성이 흘러 들어왔다. 그의 시선은 자연스레 옆좌석에 앉은 제 반쪽에게로 향했다. 그녀를 얻기 위해서 얼마나 많은 고난을 겪어야 했던가. 머리부터 발끝까지, 얼굴과 몸매는 물론이고 순하고 차분한 성격에 여성스러운 몸가짐마저 제 이상적인 취향을 빼다 박은 인형은, 말 그대로 보고만 있어도 즐거운 상대였다. 게다가 마음은 또 어찌나 여린지. 애틋함에 마음 한편이 찡하면서도 잇새로는 자꾸만 행복한 웃음이 새어 나왔다. 


우는 얼굴마저 황홀한 나머지 달래줘야 한다는 것을 알면서도 방관하고 싶다는 욕구가 자라났다. 헛웃음을 흘리며 제 욕구를 겨우 억누른 온유가 느릿하게 신호를 넣고 갓길에 차를 세웠다. 투명한 눈물 줄기가 뽀얀 뺨을 타고 흘러내리는 것을 지켜보던 온유가 조수석 쪽으로 손을 뻗어 인형의 눈가에 맺힌 눈물을 훔쳤다. 



“인형 씨.”

“흡···, 아무리 오래 떨어져 있었어도 친구는 친군데··· 내가 너무 늦게 알게 돼서···. 안된다고 생각하면서도 온유 씨를 놓을 수가 없어서···. 어떡하면 좋죠···? 앞으로 여주 얼굴을 어떻게 봐야 할지···.”



“인형 씨.”

“···.”



“인형 씨. 나 좀 봐요.”

“···.”



“우리 약속했잖아요. 지난 얘기는 더 하지 말기로. 그리고 무엇보다, 우린 그 애한테 죄책감 가질 일 한 적 없어요. 인형 씨가 왜 울어요? 내가 누구보다 떳떳하다는데. 인형 씨랑 정식으로 만나기 시작했을 때 난 이미 그쪽이랑은 깔끔하게 정리한 후였는 걸.”



파르르 떨리던 가는 어깨가 일순 딱딱하게 굳은 것을 눈치채지 못한 온유가 인형의 보드라운 볼을 진득하게 쓰다듬으며 말을 이어나갔다. 



“게다가 여주랑은 그저 플라토닉한 관계였으니까···.”

“···.”



“다른 걱정도 할 필요 없고.”



눈물이 멎은 두 눈동자가 비가 갠 뒤의 하늘처럼 맑게 빛났다. 순백한 인형의 시선을 사랑스럽다는 듯 마주하던 온유가 그녀의 눈두덩에 잘게 입술을 부딪쳤다. 조금씩 아래로 내려오던 입술이 제 입술을 덮기 전, 인형의 고개가 창가 쪽으로 살짝 틀어졌다.



“··· 빨리 출발해요.”



부끄럼 많은 열여덟 소녀마냥 양 볼을 붉게 물들이는 인형에 온유의 얼굴이 다시금 헤실하게 풀어졌다. 근래 들어 말도 많고 탈도 많던 온유의 인생에 단비처럼 찾아온 인형은 그에게 더없는 행복을 안겨주는 존재였다. 처음 만났을 때만 해도 앙칼진 고양이처럼 날을 세우던 그녀가 자신에게 이리도 고분고분해질 줄 그 누가 알았을까. 묘한 정복감에 휩싸인 온유가 눈꼬리를 길게 늘리며 미소 지었다. 



인형은 분명 다 잡은 물고기나 다름없었다. 다시 만나자마자 일사천리로 진행된 결혼 준비. 놀라울 정도로 적극적인 인형 덕에 2주 만에 모든 것이 이루어졌다. 3대째 금융권에 종사하는 재력가 집안의 금지옥엽 귀한 영애답게 예단이다 식장이다 문제없이 척척 결제를 마치는 모습을 보며 그의 부모님조차 입에 침이 마르도록 감탄할 정도였다.



그럼에도 미미한 불안감이 그의 마음 한구석에 싹텄다. 중요한 디펜스를 앞두고 무리해서 식을 진행하는 이유 또한 그 때문이었다. 한번 잠적했던 전적이 있는 그녀가 또다시 자신을 떠나버리면 어떻게 하나. 그래. 법적으로 옆에 묶어두면 더 이상 떠날 생각 같은 건 할 수 없겠지. 이토록 극심한 소유욕을 불태우게 만드는 존재가 생긴 것도 오랜만이었다. 룸미러를 흘끗거리며 타이밍을 보던 온유가 은근슬쩍 손을 뻗어 인형의 목을 안마하듯 주무르기 시작했다. 그러거나 말거나, 인형은 차창에 부딪친 거센 빗줄기가 유리를 타고 미끄러지는 것을 말없이 바라볼 뿐이었다. 








*








웅장한 예식장은 신랑 측과 신부 측 하객들로 인산인해를 이루었다. 한자리도 빠짐없이 꼼꼼히 들어찬 식장을 보며 머릿속으로 계산기를 두드리던 온유의 모친이 즐거운 듯 콧노래를 흥얼거렸다. 결혼식 일정이 예상보다 많이 앞당겨졌기에 미리 하객들을 초대해 둔 것은 신의 한 수였다며 가슴을 쓸어내리기도 여러 번.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은 아들이 어느 날 결혼할 여자라며 인형을 데려왔을 땐 갑작스러움에 의구심부터 가졌으나 지금 생각해보면 참으로 복덩이가 따로 없었다. 외모나 학력, 재력은 둘째치더라도, 온유에게 잘하고 시가에 순종적인 것이 딱 원하던 며느리상이랄까. 기꺼이 주례를 맡아 준 아들의 전임 교수 앞에 나란히 선 훤칠한 두 남녀의 뒷모습을 흐뭇하게 바라보는 것은 비단 자신뿐만이 아닐 것이다. 여자는 뭉클함에 가만히 눈물을 훔쳤다. 



“신랑 최온유 군은 여기 있는 신부 김인형 양을 아내로 맞아 기쁠 때나 슬플 때나 사랑하고 존중하고 배려하면서 일생을 같이 할 것을 맹세합니까?”

“네, 맹세합니다.”



“신부 김인형 양은 여기 있는 신랑 최온유 군을 남편으로 맞아 기쁠 때나 슬플 때나 사랑하고 존중하고 배려하며 일생을 함께 할 것을 맹세합니까?”

“···.”



“신부. 맹세 하겠습니까?”

“아···.”



“인형 씨.”

“··· 아뇨?”



생뚱맞은 대답에 온유가 미간을 좁혔다. 얼빠진 얼굴들을 보며 픽, 웃음을 흘리던 인형은 잡고 있던 팔을 미련 없이 놓고서 하객석을 향해 몸을 돌렸다. 맹세의 언약을 거부하고 불만이 가득한 얼굴로 하객석을 찬찬히 훑던 아름다운 신부가 면사포를 벗어 부케와 함께 바닥에 내동댕이치자 하객들 사이에서 작은 탄성이 흘러나왔다. 대다수는 이 흥미진진한 구경거리가 어떻게 막을 내릴지 궁금하다는 얼굴로 눈동자를 빛내고 있었다. 혼란스러움에 헛웃음을 뱉어내던 온유가 정신을 다잡고서 다시 한번 입을 열었다. 



“인형 씨? 지금 이게 무슨···.”

“안 합니다, 맹세.”



시니컬함을 넘어 싸늘하기까지 한 인형의 목소리는 마치 타인의 것처럼 낯설었기에 온유는 그녀에게로 내딛던 걸음을 멈출 수밖에 없었다. 



“별것도 아닌 또라이 새끼가 신경을 거스르고 말이야···.”

“···?!”



“뇌세포에 블루 스크린이 떴나? 망상도 정도껏 하셔야죠, 최온유 씨.”

“하. 뭐?”



욕설을 뱉는 잔잔한 음성이 천박하기는커녕 고상하게 들린다니 이런 모순이 또 어디 있을까. 찬물을 끼얹은 듯, 잠시 동안 찾아온 고요의 끝에서 신랑 측 하객들의 웅성거림이 점차 커지기 시작했다. 온유의 모친만이 조가비마냥 입을 꽉 다문 채 당황한 얼굴로 의자 손잡이를 꽉 붙들었다. 결혼 예단으로 받은 진달래 빛깔의 고운 비단 한복을 입고 새벽 단장을 할 때부터 만면에 가득하던 함박웃음이 사그라드는 것은 한순간이었다.



“너처럼 여자관계 문란한 인간이랑 내가 정말 결혼이라도 하려고 그랬겠니?”

얘!!! 너 지금 그게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야!!!”



부들거리며 자리에서 일어난 온유의 모친이 악을 쓰며 소리쳤다. 제 아들의 대학교, 대학원 동기들부터, 잘 보이려는 생각에 초대한 교수진들까지 있는 자리에서 더 이상의 논란거리를 만들 수는 없었다. 



“어머나. 모르고 계셨어요, 어머님? 이 사람, 제가 아는 여자만 해도 한 트럭이에요. 핸드폰에 저장된 민혁이는 민희, 수혁이는 수진이, 재혁이는 재연이 등등. 어쩜 그리 단순한지. 난 처음에 혁자 돌림 친구들만 골라 사귀는 줄 알았다니까?”

“김인형. 당신 정말 왜 이래. 여자관계라니. 대체 누구한테 무슨 소리를 들은 거야?”



안 그래도 희멀건 얼굴이 더욱 하얗게 질린 온유가 인형의 어깨를 우악스럽게 부여잡으며 낮게 뇌까렸다. 힘 하나 들이지 않고 가볍게 그 손을 털어낸 인형이 온유에게만 들리도록 아주 조용히 속삭였다. 



“왜 이러냐고?”

“···.”



“먼저 내 인내심을 살살 긁었으니까.”

“도대체 언제. 뭐 때문에 이러는 건지 알아듣게 말해. 설명해 주면··· 내가 고칠 테니까 제발,”



“은근히 경고했다고 알아 처먹지를 못하니, 원. 최온유 씨가 정석대로 박사과정을 마친다면 그것만큼 통탄스러운 일은 이 세상에 없겠네. 넘볼 걸 넘보셔야죠. 정신 상태 하나하나까지 미지의 심해 오징어처럼 생겨먹은 새끼가 감히 나의 여주를 넘봐?”



매혹적인 미소를 얼굴 가득 띠운 인형이 나긋한 목소리로 답했으나 그녀의 유일한 청자인 온유의 얼굴은 점점 더  일그러질 뿐이었다.



“··· 그, 그럼···, 처음부터······.”



인형은 더 말할 가치도 없다는 듯 코웃음을 치며 얼어있는 온유에게서 등을 돌렸다. 벙찐 하객들의 시선이 자신에게 집중되자 그녀가 기품있게 미소 지었다. 



“축하를 위해 귀한 걸음 해주신 분들께 폐를 끼치게 되었네요. 오늘 결혼식은, 신랑의 불미스러운 전적으로 인해 영구 취소됨을 알립니다. 식후 뷔페는 그대로 제공될 예정이니 여유롭게 식사를 즐기신 후 나가시는 길에 축의금을 받아 가시면 되고, 모바일로 송금하신 축의금은 주말 내로 들어갈 겁니다. 그럼.”



살포시 웃으며 우아하게 드레스 자락을 걷어 올리는 인형을 분노에 가득 찬 눈으로 노려보던 온유의 모친이 고함지르며 단상을 향해 달려 나갔으나 그녀에게 닿지는 못했다. 신부 측 하객석을 채우고 있던 검은 수트 차림의 사내들이 하나둘 자리에서 일어나 단상 앞을 가로막은 탓이었다. 혼란에서 벗어나지 못한 온유의 시선은 여전히 인형에게 고정되어 있었다. 



'내가 도대체 뭘 잘못한 거지? 어제까지만 해도 내게 사랑의 말을 속삭이던 그 인형 씨가 맞는 건가?' 



뭔가가 단단히 잘못 돌아가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으나 정신적 충격으로 인해 증발한 현실감각은 도무지 돌아올 생각을 하지 않았다. 애초에 인형이 자신에게 접근한 이유가 여주 때문이었다니. 믿고 싶지 않았다. 그러나 더 나아가 온유의 말문을 잃게 만든 것은 이제껏 그가 알던 인형의 모습이 현재 눈앞에 있는 인형과 조금도 일치하지 않는다는 점이었다.



온 세상이 무너져내리기라도 한 것처럼 절망에 빠져있는 애처로운 온유의 시선이 인형에게 닿았다. 한심하기 짝이 없는 자태를 영혼 없이 지켜보던 인형이 혀를 차며 그에게 다가섰다. 이전과 마찬가지로 청자가 단 한 명뿐인 냉랭한 음성이 노래를 부르듯 높고 낮은 음률을 만들었다.



“자, 최온유 군. 그럼 이제 맹세하세요.”

“···.”



“허튼짓은 절대로 하지 않을 거라고.”

“···.”



“지금 이 시각 이후로 네놈 때문에 그 애가 힘들어하는 게 보이거나, 힘들어한다는 얘기가 내 귀에 단 한 번이라도 들어온다면 그땐,”

“···.”



“그 쓸모없는 늑골을 뽑아다가 더 높아지기도 힘든 내 콧대 세우는 데에 아낌없이 활용해 보려고 하니까.”

“···.”



“왜 대답이 없을까?”

“······ 이럴 거였으면, 애초에 잘 만나고 있던 우릴 왜 깨뜨린 거야?”



“···.”

“지금 이거··· 충분히 명예훼손으로 고소할 수 있는 사안이야. 당신.”



깔깔깔. 무척이나 재밌는 이야기를 들은 것처럼 한참을 시원하게 웃어대던 인형의 표정이 삽시간에 굳어졌다.



“온유 씨.”



불과 몇 시간 전 들었던 나긋한 목소리로 제 이름을 부르는 인형에 일말의 희망을 품었으나,



“아시겠지만, 저희 집안은 꽤 오랜 시간 금융권에 종사하고 있어요.”



이어지는 그녀의 말은 온유에게 청천벽력과도 같았다. 



“제3금융권에.”

“···!”



“고소를 하던 뭘 하던 난 눈도 깜빡 안 할 텐데 어쩌나. 아, 하지만 본인 몸은 본인이 알아서 사려야 할 거예요. 울 아빠랑 삼촌들이 하는 일은 금융 관련업 뿐만이 아니거든.”



말을 마친 인형은 닭 쫓던 개가 된 온유와 얼이 빠진 그의 부모를 하객들과 남겨둔 채 흰 장미 꽃잎이 뿌려진 새하얀 융단 위를 걸어 유유히 식장을 빠져나갔다.
















39

Behind



'이래서 난 비 오는 날이 싫어. 신발. 개발. 새발.'



숨 쉬듯 욕지기를 내뱉던 수영이 우산을 털며 바 안으로 들어섰다. 지옥철에서 내린 후 장대비를 뚫고 걸어오는 동안 구두와 바지 밑단을 적신 빗물이 금세 온 몸을 꿉꿉하게 만들었다. 망할 편집장에게 갈굼이란 갈굼은 모조리 받으며 열을 축적하고 있는 중에 인형에게서 걸려온 전화는 더도 말고 덜도 말고 딱, 개떡 같은 내용이었다. 화딱지가 나서 돌아가시기 전에 마시고 죽자는 생각으로 바를 찾았다. 



사람 구경 하기 좋은 탁 트인 공간에서 인형을 찾는 것은 식은 죽 먹기보다 쉬운 일이다. 흑심 가득한 남자들의 시선을 따라가면 되니까. 수영은 오늘도 예외 없이 단번에 인형을 발견할 수 있었다. 얼굴만 한 양주병 하나를 앞에 둔 채로 크리스탈 잔을 빙빙 돌리며 홀로 앉아있는 뒷모습이 보였다. 까만 오프숄더 미니 드레스가 모델처럼 쭉 뻗은 새하얀 팔다리를 부각시켰다. 손도 대지 않은 듯한 접시 위의 생과일. 반 정도 비워진 독한 양주병. 일순, 낮에 짧게 했던 통화의 내용이 샅샅이 떠오르자 수영은 진심으로 인형의 뒤통수를 세게 후려치고 싶었다.



“존나 에바 중에 상에바야.”

“엉. 왔어?”



“정신 나간 짓 하고 나니까 혼자 청승 떨고 싶어지디? 이 또라이야. 넌 니가 미친 거 알고는 있냐?”

“오자마자 왜 또 싸우려고 하실까.”



“대체 왜, 아니, 대체 뭘 믿고 그런 짓을 벌인 건데?!”

“나야 뭐, 넘치는 게 돈이고 빽인데. 그때 너한테 육하원칙 다아- 설명했거든? 말 꺼내자마자 내 머리끄댕이 잡고 늘어진 주제에 기억 안 난다 하면 양심 없는데.”



“지랄맞은 장난인 줄 알았으니까 머리채부터 잡았겠지, 이 등신아?”

“박수영. 넌 내가 그런 진지한 문제 가지고 장난할 사람으로 보여?”



핸드백을 던지듯이 바 위에 내려놓은 수영이 살벌한 시선으로 인형을 노려보다 옆자리에 털썩 앉았다.



“그러다 최온유 그 개또라이 새끼가 여주한테 해코지라도 한다고 나서면.”

“내가 설마 그런 생각도 안 해봤을까봐. 그럴 일, 절대 없을 거야. 나도 다 생각이 있다고.”



“이렇게 해서 네가 얻는 게 뭔데. 정말 고백이라도 할 생각이야?”

“후후. 그럴 리가.”



내내 손에서 놓지 않던 크리스탈 잔을 차가운 대리석 위에 탁 소리가 나도록 내려놓은 인형이 자조적인 웃음을 흘렸다. 얇은 입술이 호를 그리며 새침하게 올라갔으나 진심에서 우러나온 미소는 결코 아니었다. 보기만 해도 씁쓸해지는 미소에 수영이 허탈한 목소리로 대꾸했다. 



“도대체가 너란 인간은 알다가도 모르겠다. 병 주고 약 주는 거야, 뭐야? 진짜 웃기는 짬뽕이라니까.”

“이렇게 안 했으면,”



“···.” 

“내가 이렇게까지 안 했으면 여주는 결국 그 새끼랑 결혼했겠지?”



“···.” 

“있잖아, 난 그렇게 생각하면 마음이 편해.”



“그니까 김인형 이 띨빡아. 그게 걱정됐던 거면 처음부터 그냥 말렸어야지. 대체 어떤 정상인이 너처럼 행동하겠냐고.”

“넌.”



“뭐?”

“그러는 너는 그동안 한 번도 안 말린 거야? 아닌데, 박수영. 너도 쭉 반대했었잖아.”



“···.”

“그것 봐. 말려봤자 소용없었으니까 그 둘이 그렇게 오래 만났겠지.”



“너···.”

“그렇게 보지 마. 나 여주한테 바라는 거 하나도 없거든. 예전에도 없었고, 앞으로도 없을 거야.”



“···.”

“좋은 친구로 옆에 남아있고 싶은 거. 그게 다야.”



크리스탈 잔 안에 반쯤 녹아버린 얼음을 물끄러미 응시하는 인형의 얼굴이 애처로워 보이는 것은 착각이 아니었다. 안쓰러운 마음이 차올랐음에도 수영은 괜히 못마땅한 얼굴로 제 앞의 잔을 채웠다.
















필수 BGM | 식샤를 합시다 OST - Behind (반복 O)
















40



어릴 적부터 몸 하나는 오지게 건강했던 내 인생에 입원이라고는 딱 한 번뿐이었다. 재작년 겨울, 회사 업무와 팔자에도 없는 남자 뒷바라지로 이 한 몸 불사르다 과로로 쓰러졌을 때 딱 한 번. 그닥 좋은 기억은 아니었기에 눈뜨자마자 보이는 희끄무레한 풍경과 병원 특유의 쌉쌀한 냄새는 다시 정신을 잃고 싶다는 간절함을 가지게 만들었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 호텔 로비에서 대자로 엎어지던 참상이 떠오르자 정신이 번쩍 들었다. 맞다. 나 분명··· 무릎이 형편없이 으깨졌었지···. (어디까지나 여주의 생각) 진짜 아팠는데···. 이불 안에 감춰진 다리의 상태에 대해 상상의 나래를 펼치는 것만으로도 눈물이 차올랐다. 



극도의 불안감 속에서도 그 잘난 남자의 얼굴이 내 의식의 중심부에 당당히 자리하고 있다는 사실은 꽤 애달프고 짜증 나는 일이었다. 박지민 그 나쁜 거짓말쟁이 쉐리. 자기만 믿으라며 말만 번지르르하게 해놓고서, 사람 무르팍이 아작이 났는데 (어디까지나 본인의 생각) 아직도 안 나타났다 이거지. 됐어. 지금 나타난다고 해서 내가 받아줄 줄 알고? 흥, 턱도 없네요. 쌔끈한 약혼녀랑 한가롭게 딥 키스나 하면서 평생 잘 먹고 잘 살라 이 말이야! 


오여주의 참된 도덕성은 박지민이 저와 맞는 급의 여자를 만난 것을 축하해 줘야 한다며 빵빠레를 터뜨리고 있었지만, 오여주 본체는 그 정도의 도덕성을 담기엔 너무 작은 그릇을 가진 듯하다. 아까 본 그의 뒷모습만 그려도 이렇게 서글픈데 내가 어떻게 맨정신으로 축하를 하고 응원을 하겠어. 



서러움이 북받쳐 엉엉 울다 보니 주변 배경은 점점 아득해져만 갔다. 어디선가 나타난 흰 가운을 입은 의사 선생님이 침대 가로 다가와 휴지 곽을 내밀 때까지 오열에 오열을 거듭하다 끅끅거리며 울음을 그쳤다. 뒤쪽에 심각한 얼굴로 서 있는 김남준이 보였다. 쯔아식, 걱정 많이 한 얼굴인데. 



“오여주 씨?”

“네···.”



도무지 진정할 수가 없었다. 뼛조각에 신경이 손상되어 다시는 뛸 수 없다던가 무릎 뼈가 아작나서 파편 제거 수술을 해야 한다고 하면 어쩌지···? 아직 그런 얘기를 들을 마음의 준비는 안 됐는데···. 



“오른쪽 발목 인대가 부분 파열됐습니다. 수술은 필요 없지만, 인대가 완벽하게 회복될 때까지는 착실하게 목발 보행을 하셔야 돼요. 다음 주 토요일에 약속 잡아놨으니까 통증이 악화되지만 않는다면 그때 경과보고 물리치료 스케줄을 짜봅시다.”

“네에···?!”



“왜 그러시죠?”

“저··· 무릎에는 아무 이상이 없나요?”



“멍든 데 바르는 크림도 소염진통제랑 같이 처방해드렸으니까 꾸준히 바르시면 됩니다. 부러진 손가락이랑-”



부러진 왓···? 시선을 내리자 오른손 중지에 거대하게 끼워진 캐스트가 보인다. 어이가 없어 실소가 절로 터져 나왔다. 가운뎃손가락 골절이라니. 부러져도 꼭 뭣 같은 곳을···.



목발을 짚고서 일 인실 안을 무리 없이 배회하고 다니는 나를 보며 고개를 끄덕이던 의사는 몇 가지 상식적인 주의사항을 준 후 병실을 나섰다. 욱신거리는 삭신을 얼추 추스른 후 밖으로 나가려고 보니 왼발에 신을 신발이 마땅찮았다. 멀쩡했던 왼쪽 굽을 떠올리며 병실 구석구석을 뒤져봤지만 어디에서도 찾을 수가 없었기에 결국 포기하고 두툼한 병원 양말만 신은 채 문을 열었다. 


병실 밖으로 발을 내딛기도 전에 툭, 하고 발치에 떨어진 것은 새것으로 보이는 삼선 슬리퍼 한쪽이었다. 신을 생각도 하지 못하고 앞에 놓인 슬리퍼를 멍하니 바라보고만 있자, 얕은 한숨 소리와 함께 방금까지 시야에 들어오지 않았던 이가 내 앞에 무릎을 굽히고 앉았다.



"발 들어봐. 중심 못 잡겠으면 내 어깨 잡고."

"어, 나 멍 때리고 있었어. 미안. 내가 할게."



나 참, 동네 창피하게 왜 이래. 한쪽 발목이 나가리가 됐다 한들 슬리퍼를 신는 데 도움 따윈 필요 없다고! 그러나 김남준은 조금도 개의치 않고 세심한 손길로 내 발을 슬리퍼 안에 끼워 넣었다. 김남준과 '세심함' 이라니. 진짜 안 어울리잖아? 눈치 없이 터져 나올뻔한 웃음을 가까스로 눌러 참은 것은 극도로 무게를 잡는 김남준 때문이었다. 



발에 꼭 맞는 슬리퍼가, 신발만 신기고서 곧바로 일어나 저만치 앞서가는 김남준의 등이, 내게 묘한 감정을 안겨주었다. 서로에게 잔소리 폭격을 쏟아내는 것이 일상과도 같은 저 녀석과 나 사이에 분명히 자리하고 있는 이 낯선 무게감의 정체는 뭘까. 희한할 정도로 차분한 김남준의 태도 역시 폭풍전야의 경고등 같았다.



그래도 내가 양심은 좀 갖춘 편이라 '대체 왜 화가 난 거야?'라는 뻔뻔한 발상은 떠오르지 않았다. 입장 바꿔 생각하니 진짜 성가셨을 것 같긴 하네. 창립 기념일 행사 준비하는 동안 팀장이라고 번거로운 일들 이것저것 가장 많이 도맡아 했는데 정작 그 공을 치하하는 자리에 참석하지 못한 거잖아. 나 때문에. 하필이면 그때 부상당한 나를 발견할 게 뭐람. 



게다가 정신을 잃기 전, 걱정으로 크게 일렁이던 녀석의 눈동자가 떠올라 고개가 절로 수그러졌다. 그러고 보니 쟤한테도 별 흉한 꼴을 다 보인다. 후···. 한심하다 한심해. 시도 때도 없이 주변에 민폐나 끼치고 이게 뭐냐 오여주. 익숙지 않은 목발 보행을 하다 보니 어느새 김남준과의 거리가 많이 벌어져 있었다. 김남준 쫓아가다 뱁새 다리 찢어지겠네. 젖 먹던 힘까지 내어 목발을 짚은 채로 파워 워킹을 시도했다. 이 정도면 그래도 좀 좁혀졌겠지? 고개를 드니 예상보다 훨씬 가까운 곳에 멈춰서서 나를 가만히 바라보는 김남준이 보였다. 



“왜 그렇게 서둘러. 그러다 넘어진다.”



저기요···? 당신 쫓아가려고 이러는 거잖아요. 이 씨. 다리 길이 이메다면 다냐? 조심스럽게 김남준에게 반박하려는데 김남준이 빨랐다. 



“수납은 이미 했으니까 그냥 가면 돼.”

“어? 네가?”



“회사 카드.”

“아.”



그렇군. 이러나저러나 근무시간에 다친 거니까 회사에서 커버해 주는 거였구나. 큼직하고 쾌적하던 일 인실의 전경을 떠올리며 가슴을 쓸어내렸다. 부담감이 덜어지자 내 표정은 한층 더 편해졌으나, 무심코 올려다본 김남준의 얼굴은 여전히 심각하게 굳어져 있었다. 



“김남준아. 너 얼굴 좀 펴라. 지나가는 애기가 보고 놀라겠다.”

“···.”



“근데 우리 근무지 이탈은 아니지? 난 어떡하냐. 일단 넌 들어가야 되겠고,”

“···.”



의식의 흐름을 그대로 생중계하는 동안 대꾸 없이 느릿느릿 발을 옮기던 김남준이 걸음을 멈췄다. 뭐냐는 얼굴로 녀석을 올려다봐도 아무 반응이 없었다. 그렇게 꿋꿋이 정면만을 응시하던 녀석이 별안간 나를 향해 몸을 틀더니 양어깨를 강하게 붙잡았다.



“에이씨, 간 떨어질 뻔했네. 왜 이래?”

“오여주.”



“어.”

“··· 너 제발 조심 좀 해라.”



“아······. 나 땜에 네가 고생 많았지. 미안. 앞으로는 진짜- 진짜- 조심해서 다닐게.”



정직한 대답과 함께 쿨한 미소를 날렸지만 녀석의 얼굴은 좀처럼 풀릴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얼굴만 보면 물 없이 정로환 세 알은 씹어 삼킨 줄 알겠네. 듣고 싶은 대답 들었으면서 왜 계속 붙잡고 있냐고 이 진지충아. 위압감이 느껴질 정도로 심각한 얼굴의 김남준은 적응하기 어려웠다. 그도 그럴 것이, 단순히 업무용 무표정과는 거리가 있는, 사연이 잔뜩 묻어있는 녀석의 얼굴은 내게도 익숙지 않아서였다. 하지만 내가 먼저 눈을 피한 이유는 '어색해서' 따위가 아니었다. 소중한 목 근육을 지키기 위해서지. 이 멀대 같은 녀석하고 제대로 눈을 맞추려면 내 가련한 목은 90도 가까이 젖혀져야 한단 말이야. 



“조심할 테니까 이제 좀 순순히 놓아 주시죠?”

“여주야.”



“응?”

“내가 너무 힘들어서 그래.”



이런 공감 능력이 극 상타치를 찍는 친구 좀 보게. 다친 건 난데 왜 네가 힘드냐. 김남준, 이 바보 소리 들을 정도로 인성이 좋은 녀석.



“친구야, 다친 사람은 나니까 아파도 내가 아프고 힘들어도 내가 더 힘들겠지? 확실히 좀 불편하긴 하지만 너까지 힘들어할 정도는 아니야. 그러니까,”



말을 마치기도 전에 내 어깨를 감싸고 있는 커다란 손이 잘게 떨려왔다. 다시 고개를 들자 불안정하게 흔들리는 눈동자 한 쌍이 보였다. 줄곧 저런 눈으로 나를 보고 있던 건가. 툭 건드리면 금방이라도 눈물이 떨어질 듯, 짙은 슬픔이 담긴 눈이었다. 



“힘들다. 너 힘들어하는 거, 네가 아픈 거 보는 게.”



녀석의 말을 듣기 전까지, 난 김남준의 이상 행동이 칠칠찮은 친구를 안쓰럽게 여기는 마음에서 비롯된 거라 단정 짓고 있었다. 하지만 이건···. 갑작스레 위화감이 밀려왔다. 그러고 보니 얘 눈이···. 지금 하는 말이 꼭······. 아니겠지? 침을 꿀꺽 삼키고 최대한 능청스럽게 웃으며 농담조로 입을 열었다.



“아하하, 얘가 뭐래? 그런 낯간지러운 멘트는 네가 짝사랑한다는 그 여성분한테나 가서 치거라. 아주 반응이 뜨거울 테니까.”



눈치 빠르기로는 어디서든 다섯 손가락 안에 드는 나였기에 지금이 아니었더라도 언젠가는 깨닫게 되었을 것이다. 떠보는 건 나쁜 거지만, 눈치챘으면서 모른 척하는 건 더 나쁘니까. 더 직접적으로 물어봐야 하나. 김남준, 너 혹시 나 좋아하냐? 네가 짝사랑한다는 사람이 혹시 나냐? 그래. 툭 까놓고 물어보자. 김남준에게서 어떤 대답이 나오든 간에 놀라지 마. 절대 놀라지 말고 덤덤하게, 그냥 덤덤하게···.



"그거 너야."

"······ 어?"



"이것저것 많이 준비해놨었는데 결국 이렇게 멋없이 얘기하게 됐네."

"···."



"친구로서 걱정하는 거 아니야."

"···."



"좋아하는 여자라서. 그래서 노력하는 거야."

"··· 남준아. 난···."



모든 것이 확실해진 지금에서야 지난번 녀석이 했던 말이 떠올랐다. 



“ 고백은 왜 안 했냐면, 그 사람은 계속 만나는 사람이 있었어. 내가 처음 만났을 때부터. ”



거기다 대고 침이 마르도록 열렬한 응원의 말을 쏟아낸 건 분명 나였지. 덤덤하게 반응하고 싶지만, 얘랑 나 사이에 이런 상황이라니. '덤덤하게'가 가능할 리가 없잖아. 어떤 대답을 듣게 될 지 알고 있는 사람처럼, 김남준은 충혈된 눈으로 희미한 미소를 지었다. 부담을 덜어주려는 의도였겠지만 오히려 역효과를 내고 말았다. 김남준의 씁쓸한 웃음을 본 순간 자책감마저 들었으니까.



"네 마음에, 아직 내가 들어갈 여유가 없다는 거 알아.”

“···.”



“부담 갖고 나 대하는 것도 싫긴 한데, 그래도, 내가 이런 마음으로 네 주변에 있다는 것까지 숨기면··· 그건 너무 비겁한 짓이잖냐."

“···.”



지금의 나로서는 김남준의 마음을 받아줄 길이 없었기에 사고 회로엔 제동이 걸렸다. 최온유와 헤어진 후 곧바로 이 애의 마음을 알았다면 어땠을까, 하는 생각이 잠시 스쳐 지나갔지만 확실한 건 현재. 그리고 중요한 건 현재였다. 지금 이 순간에도 내 의식의 대부분을 차지하고 깊숙이 들어앉아 있는 사람이 있으니까. 박지민과 함께할 수 없다는 건 어쩌면 이미 기정사실이 되고 말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김남준을 내게 묶어둘 생각은 없었다.



그의 마음을 받아줄 수 없음에 미안했다. 그럼에도 미안하다는 말을 하고 싶지는 않았다. 상대를 비참하게 만들 수 있는 말이라는 것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기에.



"난··· 정말 복이 터졌나 보다. 김남준이 좋아하는 여자가 누굴지 엄청 궁금했었는데···."



어중간한 대답에도 내 말의 요지를 정확히 파악한 김남준은 고개를 끄덕이며 보조개가 쏙 들어가도록 예쁘게 미소 지었지만 씁쓸함을 담고 있는 두 눈동자까지 숨길 수는 없었다.



"정말 그렇게 생각한다면, 나 밀어내지 말고 평소처럼 대해줄래?"

“··· 노력해볼게."



“착하네.”



내 어깨를 잡고 있던 커다란 손이 위로 올라와 내 머리를 담백하게 쓱쓱 쓰다듬었다. 평소 같으면 “내가 너네 집 개냐!” 라고 소리치며 녀석의 발목을 걷어차거나 발을 밟거나 했을 텐데 말이지. 상황이 상황인 만큼 그딴 와일드함은 접어두라며 바짓가랑이를 잡고 늘어지는 일말의 양심 덕에 난 때아닌 폭력 성향을 접어두고서 얌전히 있을 수 있었다. 



“뭐야, 오여주. 노력한다면서. 평소였다면 나 이미 발로 걷어차이고도 남은 거 아냐?”

“그런 거 아냐, 이 미친놈아···. 나, 나 지금 목발 짚고 있잖아.”



소심하게 투덜대자 김남준은 우습다는 듯 프흐흐 웃었다. 연기도 지지리 못하는 게 그렇게 웃어봤자 하나도 안 괜찮아 보이거든. 그러니까 괜히 더 미안해지잖아. 시선을 바닥에 고정하며 얼른 화제를 돌렸다.



“너 들어가 봐야 하는 거 아냐? 요직을 맡고 있는 사람이. 잠깐, 지금 몇 시지? 아, 뭐야. 벌써 끝났겠네. 뒷정리하고 있을 것 같은데.”

“어. 늦게라도 가서 얼굴 안 비치면 아버지한테 왕창 까일 것 같긴 한데.”



쯧. 나이가 몇인데 회사 땡땡이친 것 가지고 아버지한테 까이냐 그래. 애잔하다 애잔해. 너무 애잔해서 내가 다 착잡해질 정도야.



“에라, 몰라. 이래도 까이고 저래도 까일 거면, 그냥 안 가고 까이지 뭐.”

“저기요···? 팀장으로서의 책임감과 리더십은 얻다 팔아드셨어요?”



“그건 잘 모르겠는데,”



김남준이 씩 웃으며 손가락으로 내 이마를 톡톡 두드렸다. 이건 뭐···? 설마 자기 고백 거절했다는 이유로 고도의 심리전을 거는 건가?



“여기 내 변명거리 있고.”



그리고는 주머니에서 차 키를 꺼내 눈앞에 흔들어 보인다. 



“여기 내 운송 수단도 있네.”



이어서 녀석이 해맑은 얼굴로 덧붙인 제안까지 거절했다간 정말로 미안하다는 말이 육성으로 터져 나올 것 같아서,



“이렇게 시간 빈 것도 간만인데 나랑 가까운데 드라이브라도 갈래?”



그러겠다 고개를 끄덕였다.








*








저녁놀이 붉게 물들기 시작한 시간인데도 근교의 호수 공원엔 가족 단위로 온 사람들이 많이 보였다. 주말이라 늦게까지들 노는 건가. 윈드 실드 너머로 펼쳐진 호수와 그 주변을 빙 두르고 있는 가지각색의 조명들이 한 폭의 예쁜 풍경화를 이루었다. 이 자리가 바로 명당자리였네. 밖에 나가서 봐도 이 정도로 완벽한 뷰는 찾기 쉽지 않을 거야, 암. 익숙지 않은 목발을 짚고서 사람들 사이를 요리조리 피해 다닐 자신이 없었기에 “내릴래?”라고 묻는 김남준에게 근엄한 얼굴로 거절 의사를 내보였다. 운전석과 조수석 문 두 짝을 활짝 열어놓으니 상쾌하고 시원한 바람이 솔솔··· 아니, 사실은 영하를 밑도는 겨울 밤바람에 몸이 오스스 떨렸다.



“나 이쪽 문 닫아도 돼? 좀 춥다.”

“아, 그래야지. 그러자. 많이 춥지. 미안.”



“아니, 네가 미안할 필요는 없는데,”

“당분간 안정 취해야 하는 애 괜히 데려왔나 싶다.”



“하이고, 됐네요. 누가 들으면 엄청 크게 다친 줄 알겠네. 그리고 오랜만에 바람 쐬러 나오니까 좋은 걸, 뭐.”

“역시 그렇지? 야경도 기대한 것 이상으로 괜찮다. 여기가 야경이 그렇게 끝내준다고 다들 그러더라고.”



“얼씨구. 답정너냐?”

“우리 저녁 먹고 들어가자.”



“에?”

“오늘 밥 사기로 한 거 안 잊었지?”



누가 빈틈없이 철저한 김남준 아니랄까 봐. 분명 몇시간 전에 그런 약속을 하긴 했었지. 기억은 나는데 말이야···. 그때랑 지금이랑 상황이 많이 다르지 않니? 병원에서의 고백을 기억하는 건 나뿐이야? 평소와 다를 바 없는 태도로 나를 대하는 김남준이 좀 많이 당황스러웠다. 밥 사기로 한 거 잊지 않았냐고? 너털웃음과 함께 그 질문을 던지는 넌 무슨 생각을 하고 있을까. 내가 지금 어색함 반, 미안함 반으로 너를 대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는 있을까. 어색함이 짙게 깔린 생소한 공기에 압도되었다는 것을 티 내고 싶지 않아 부러 무뚝뚝한 얼굴로 입을 열었다.



“아픈 사람 등골을 그렇게 꾸역꾸역 빼 먹어야 속이 시원하겠냐.”

“지금쯤 너 배고플 시간 됐을 거 아냐. 뭘 먹긴 해야 하니까 겸사겸사 가보자.”



실은, 배꼽시계가 울리기 시작한 지는 꽤 됐다. 배고프단 말을 입 밖에 내기에 적당한 타이밍이 아닌 것 같아 참고 있던 것뿐이지. 집에 도착하자마자 밥을 먹을 생각이었지만··· 가만 생각해보니 이 꼴로 집에 들어서는 순간 밥 먹기 전 한 시간 정도는 오롯이 엄마에게 뺏길 것이 분명하다는 결론이 나왔다. 좋아. 어차피 언젠가는 사줄 밥, 고마워할 일들이 넘쳐나는 오늘이 디데이라 인정하면 답은 금방 나왔다. 



“후···. 순댓국 괜찮지?”








.


.


.








머리를 맞대고 맛집으로 소문난 근방의 순댓국 집들을 탈탈 털어낸 끝에 최종 목적지로 정한 식당은 차로 20분 거리에 위치한 50년 전통의 할미 해장국집이었다. 극악의 주차환경과 다 쓰러져가는 식당의 외관을 보며 흐뭇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이니 김남준이 의아하다는 눈빛을 던졌다.



“원래 이런 데가 숨겨진 맛집이거든. 봐봐, 이렇게 동떨어진 곳에 숨겨져 있는 식당이 맛 좋다 입소문 날 정도면 얼마나 잘하겠어. 대박 기대된다. 가자.” 

“넌 노후에 푸드파이터 같은 거 하면 잘하겠다.”



진지한 얼굴로 허튼소리를 뱉어내는 김남준을 핵주먹으로 응징한 후 조심조심 SUV에서 내렸다. 목발을 꺼내 짚고 식당 입구를 향해서 신나게 발을 떼자 뒤에서 "천천히 가!"라는 김남준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쳇. 누가 보면 물가에 어린애라도 내놓을 줄 알겠어. 이리 쿵 저리 쿵 하는 게 일상인 김남준 녀석에게 이런 일로 걱정을 끼친다는 것 자체가 불명예스럽기도 하고, 내가 그리 병약한 인간은 아니라는 것을 우회적으로 보여주고 싶기도 해서 일부러 속도를 늦추지 않았다. 



자, 인생사에서 삐딱선을 타도 괜찮을 때가 있고 안 괜찮을 때가 있는데, 방금 그 상황은 후자였다. 식당 문까지 다섯 걸음도 채 남지 않은 거리에서 목발이 휘청 미끄러진 순간, 나는 진심으로, 15초 전 삐딱선을 타던 오여주의 뒤통수를 아주 세게 갈겨주고 싶었다. 걱정했던 것보다 덜 다쳐서 다행이라며 눈물을 닦아낸 지 반나절도 채 지나지 않은 시점이었다. 오여주의 사나운 일진은 아직 계속되고 있었던 거야.



어쭙잖은 변명거리를 하나 던져보자면, 붉은 기조차 사라져 어둑한 하늘과 식당 입구로부터 끝판왕 수준으로 멀찍이 떨어져 있는 가로등으로 인해 난 문 주변에 깔린 회색 타일 바닥을 보지 못했다. 설상가상으로 그 타일 바닥 위가 물바다였던 것이 이 사달을 내고 만 거지. 내 손에서 벗어난 목발이 공중으로 붕 떴다가 챙그랑, 소리를 내며 타일 바닥에 떨어졌다. 중심을 완전히 잃은 몸은 내가 제어할 수 있는 범주를 벗어난 지 오래였다. 뒤통수를 강타할 충격을 기다리며 눈을 질끈 감았을 때 뒤에서 날 붙잡아준 김남준이 아니었더라면 난 이미 바닥에 대자로 누워 하늘 구경을 하고 있었을 거란 생각에 온몸의 털이 쭈뼛 섰다.



“제발 이상한 걸로 승부욕 불태우지 좀 말라니까. 조심하라고 했잖아. 너 정말 2차 부상당하고 싶어서 이래?”

“아니, 난 여기 타일 깔린 걸 못 봤지···. 잘 안 보이니까···.”



만약 [ 물청소한 바닥 조심! ] 이라는 주의 문구라도 있었다면 더 조심할 수 있었을 거야, 라는 말은 삼켰다. 열받지만 이건 앞을 제대로 안 보고 조심성 없이 다닌 바보 천치 오여주 탓이 큰걸. 고개를 푹 숙이고 반성의 태도를 보였지만 김남준은 내 오른팔을 단단히 붙잡은 채로 잔소리를 이어갔다. 



“네가 아무리 기민한 움직임을 가졌다고 해도 장난은 상황을 봐 가면서 쳐야지.”

“··· 됐어. 나 그냥 집에 갈래. 오늘 일진이 안 좋아, 아까 낮부터···.”



공복을 해소할 수 있다는 생각에 들떠있던 기분이 끝을 모르고 곤두박질치기 시작한 이유가 비단 김남준의 잔소리 때문만은 아니었다. 초라함의 끝을 달리는 오여주의 하루가 극으로 치달을수록, 구질구질한 내 하루와 상반되게 삐까뻔적 화려하던 호텔에서의 약혼식이 떠올라서, 내 두 눈으로 직접 담아 더욱 생생한 박지민의 뒷모습이 또다시 의식 한편에 아른거리기 시작해서였다. 바짝 잡고 있던 정신이 조금만 느슨해져도 그 틈을 비집고 들어와 나를 괴롭히는 두 사람의 인영에 사로잡혀 금방이라도 눈물이 떨어질 것 같은데, 내가 얼마나 더 태연자약한 척을 할 수 있을까. 그래, 괜히 기분 전환한다고 여기저기 싸돌아다니지 말고 그냥 집에나 가자. 비빔밥을 양푼 째로 떠먹으면서 박지민까지 잘근잘근 씹어준다면 그보다 더한 별미는 없을 거야. 



“내 어깨 잡아.”

“어? 어··· 야!”



혼자만의 생각에 푹 빠져있던 중 갑작스럽게 몸이 붕 떠올랐다. 깜짝 놀라 반사적으로 앞에 있는 녀석의 재킷 깃을 버스 손잡이 잡듯 꽉 붙들었다. 양팔로 거뜬하게 나를 들어 올린 김남준의 손에는 어느새 내가 놓친 목발까지 쥐어져 있었다. 집에 가고 싶다는 내 말에 귀 기울여 줄 생각인 건지, 무척이나 다행스럽게도 녀석의 발걸음은 식당이 아닌 차 쪽으로 향했다. 그리고는 조수석이 아닌 트렁크를··· 아니, 아무리 내가 귀찮았기로서니 설마 나를 짐짝처럼 트렁크에 떨구어 놓을 셈이야? 불안하게 흔들리는 동공을 녀석에게 고정했다. 덜그럭거리는 마찰음이 들렸다. 작게 한숨을 내쉰 김남준이 손에 들려있던 알루미늄 목발을 트렁크 안에 던져 넣은 것이다. 



“모, 목발 내려주는 김에 나도 같이 내려줘.”



내 말을 들은 김남준은 픽 웃으며 그대로 차를 지나쳤다. 녀석의 발걸음은 분명 정면에 있는 식당으로 향해 있었다. 돌아버리겠네. 공주라도 된 것처럼 외간 남자 품에 안겨서 순대 국밥집에 입성했을 때 내가 감당해야 할 쪽팔림도 부디 헤아려 준다면 좋으련만. 내려 달라는 말은 귓등으로도 듣지 않는 김남준의 역대급 인성 짓에 반쯤 해탈한 상태로 식당 문턱을 넘어서자 카랑카랑한 호통이 귓전을 때렸다.



“니미럴 염병, 지랄 똥 싸고 앉었어! 예가 느그 집 안방이여?”



그러게 말입니다 할마님. 이 정신 못 차리는 김남준 녀석한테 욕 좀 몇 바가지 더 퍼부어 주세요. 달갑지 않은 것을 목격 한 식당 주인 할머니와 손님들의 기분을 십분 이해하면서도 어쩐지 억울한 기분이 들었다. 민망한 듯 실실거리는 김남준의 어깨를 퍽퍽 두드리며 작게 속삭였다. 



“그니까 내가 내려달라고 그랬지.”

“할머니, 이 친구··· 다리가 많이 아파서요.”



김남준의 절절한 (척 하는) 목소리에 "으메, 저 저 써글 것들." 이라며 혀를 끌끌 차던 할머니는 다른 손님들의 이동 경로에서 벗어난 구석 자리로 우리를 이끌었다. 



김남준과 마주 앉아 주문한 음식이 나오길 기다리는 시간은 고역이었다. 아무리 속없는 사람일지라도 자기 고백을 거절한 사람이랑 마주 보고 앉아있는 맘이 편할 리가 없다. 마찬가지로, 고백을 거절한 내 맘 역시 편할 리가 없다. 전에 없이 어색한 기분에 계속해서 이런저런 말을 붙이긴 했지만 제정신으로 한 말은 아무것도 없을 정도였으니 말 다했지, 뭐. 



고딩 때였다면 모를까, 혼기가 꽉 찼다고들 하는 나이에 웬만한 동성 친구 이상으로 편하게 지내던 애한테 받은 고백이라서 그런가, 확실히 더 신경 쓰이는 것도 있고. 얘랑 나랑 스물셋에 처음 만났으니까 햇수로 따지면 이제 거의 7년 가까이 되어 가는데 대체 언제부터 나를 좋아했던 건가 궁금하기도 하고. 무엇보다, 주변에 여자가 그렇게 없었나, 라는 의문도 심심치 않게 들었다. 김남준의 마음이 부담스럽지 않다면 거짓말이겠지만 고심 끝에 나왔을 그 애의 고백을 그저 불편한 상황으로 치부해 버리고 싶진 않았다. 내가 김남준에게 해줄 수 있는 건 아마 딱 한 가지. 이 애가 부탁한 대로 평소처럼 대하는 것 정도일까. 



[ 물은 샐프 ] 라고 커다랗게 쓰여진 냉장고에서 물통 하나를 꺼내와 내 컵에 먼저 따라주던 김남준이 다시금 보조개 웃음을 지으며 큭큭거렸다.



“큭. 진짜 웃겨 죽겠다.”

“흠···. 이왕이면 나도 좀 함께 웃고 싶은데.”



“상상도 못했거든.”

“뭘?”



“이 시간에 너랑 이러고 있을 거라는 건.”

“··· 김남준이 사람 또 급정색하게 만드네. 야, 솔직히 양심에 손을 얹고 그게 그렇게 웃을 일이야?”



“오늘 창사 기념일 행사 끝나면 근사한 데서 밥 먹으면서 고백하려고 했어.”

“···.”



“그런 얼굴로 보지 마라. 그냥 그랬다는 거야. 밑져야 본전이니까. 근데 그거 물 건너가고 지금 해장국집에서, 크흑.”

“미안.”



쉣. 방금 내 입에서 ‘미안’ 소리가 나간 건 아니겠지? 내가 뱉은 말에 놀라 동공이 절로 확장되었다. 침착하자. 인생은 타이밍이야. 김남준이 무언가를 말하기 전에 나의 '미안'에 대한 해설을 주면 돼. 손바닥을 이마에 갖다 대며 우렁차게 덧붙였다. 



“아니! 내 말은, 더 좋은 맛집을 찾지 못해서 미안하다는 얘기였어!”

“여주야.”



김남준의 웃음기 어린 시선이 아래로 떨구어졌다. 대화할 땐 언제나 상대의 눈을 보며 이야기하고 경청하는 애가 멋쩍은 듯 시선을 피하는 것까지 전부 내 잘못인 것 같아 마음은 더 어수선해졌다.



“너한테 부담 줘서 미안하다. 맘은 그러고 싶지 않은데, 나도 사람이라 어쩔 수가 없나봐.”

“부 담 이 라 니-? 전 혀  그 렇 지  않 아.”



이런 젠장. 그냥 말을 하지 말라고, 이 똥멍청아! 누가 들어도 부담스러워하는 듯한 말투잖아! 머리카락을 쥐어뜯고 싶은 것을 가까스로 참아내며 앞에 있는 냉수를 벌컥벌컥 들이켰다.



“언제가 될지 모르겠지만 네 마음 완전히 비워질 때까지 기다릴 거야. 그때까지 나, 네 옆에 있게 될 가능성이 가장 높은 남자 사람 1 정도로만 취급해 주라.”

“아니, 기다리지 마.”



쾅,



“싸게싸게 처먹고 나가 들.”



타이밍 좋게도, 둔탁한 소리와 함께 팔팔 끓는 뚝배기 두 개가 대화의 흐름을 완벽하게 끊으며 테이블 위에 놓였다. 기다리지 마. 달갑지 않은 소리임을 알면서도 부득이 입을 연 까닭은 조금의 여지도 남기고 싶지 않다는 속마음이 배어 나온 탓일 것이다. 하지만 굳이 그 정도로 단호하게 얘기할 필요가 있었어? 막말로 쟤가 나한테 질척거리기를 했어, 뭘 했어. 고백 한번 받았다고 공주병 말기 환자 나셨네, 아주. 



뚝배기에서 나는 부글부글 소리를 제외하면, 김남준과 나 사이엔 더 이상의 대화 없이 적막만이 내려앉았다. 한번 맥이 끊긴 대화는 되살아날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뚝배기에 시선을 고정하고서 분주한 손놀림으로 팔팔 끓는 고기 국물에 부추와 들깨 가루를 넉넉히 집어넣었다.



“알겠어. 그럼 몰래 기다리지 뭐.”



줄곧 침묵을 지키던 김남준이 혼잣말하듯 덤덤하게 뱉어낸 말이었다. 그래, 이 청개구리 같은 녀석이 내 말을 곧이곧대로 받아들일 리가 없지. 순댓국을 젓던 숟가락에서 손을 떼고 고개를 들었다. 김남준도 그제야 나와 시선을 맞추며 말을 이었다. 



“내가 너한테 뭐 맡겨둔 것도 아니고, 네 맘이 가장 중요한 건 맞지만.”

“···.”



“한 번이라도 친구가 아닌 남자로 다가갈 기회는 줘라. 적어도 생초면인 맞선남보다는 내가 낫지 않겠냐.”

“그게 아니라··· 나, 좋아하는 사람 있어.”



“···.”

“···.”



“하지만 너···.”

“물론 그게 최온유 그 새끼는 아니야.”



“···.”

“그러니까, 기다리지 마. 내가 그 사람이랑 잘 되고 안 되고는 부차적인 문제야. 너한테 희망 고문하고 싶지 않아. 네 마음 갖고 저울질하기도 싫고. 너 같은 애가 기다리고 매달릴 만큼 대단한 사람도 아니야, 나.”



병원에서 고백을 거절당한 후로도 줄곧 반듯한 미소를 잃지 않던 김남준의 낯빛이 어두워졌다. 분명 누구의 잘못이라 콕 집어서 말하기 애매한 상황이었지만, 굳이 이렇게까지 단도직입적으로 말해야 했을까, 라는 생각에 자책했다. 마음을 대충 추스른 듯, 다시 밝아진 얼굴로 숟가락을 든 김남준이 말했다. “먹자, 얼른.” 그 애의 얼굴을 똑바로 바라볼 수가 없어서 고개를 숙인 채로 수저 가득 국물을 떠 입안에 넣었다.



“앗, 뜨, 뜨!”

“야! 넌 그걸 그렇게 막 떠먹으면 어떡하냐! 자. 여기 물. 물.”



눈물이 핑 돌 정도로 뜨거운 국물에 입천장이 다 까져 맨들거렸다. 바보 멍청이 오여주. 냉수를 두 잔째 들이키며 자기 비하를 이어가고 있을 때, 대놓고 큭큭거리며 나를 비웃던 김남준이 일순 목소리를 잔뜩 내리깔고서 물었다. 



“근데 혹시···.”

“···?”



“네가 좋아한다는 사람이,”

“···.”



“우리 팀 박 주임은 아니지?”



컥, 켁, 켁. 얼토당토않은 말에 사레가 들려 고개를 돌리고 얼굴에 열이 오를 정도로 기침을 해대자 이 희대의 넌센스 같은 녀석은 맞은편에서 또 말도 안 되는 상상의 나래를 펼치고 있다.



“우와···. 진짜?”

“그건 또 뭔 개소리야!”



“아니야?”

“아니지! 뜬금없이 인호 씨는 왜?”



“네가 아는 남자가 거기서 거기잖아.”

“하! 누구를 회사밖에 모르는 애사인으로 아나 본데, 나도 회사 밖의 삶이라는 게 있거든?”



“큭. 그래 알았어. 식기 전에 먹자.”



바보 같은 웃음을 흘리는 김남준의 모습에 나 역시 굳히고 있던 얼굴을 풀 수밖에 없었다. 방금 그 어처구니없던 질문도 실은 경직된 공기를 조금이나마 유하게 만들어 볼 심산으로 던진 것이 아니었을까.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필수 BGM | DAY6 - 예뻤어
















“됐다니까.”

“안기는 게 싫으면, 업힐래?”



“부축만 좀 해줘. 그니까 왜 남의 목발을 차에다 갖다 놔? 이상해, 진짜.”

“혼자 또 원맨쇼하다가 꽈당 넘어질까 봐.”



“와아, 실화냐? 살다 살다 김남준한테 이런 소리를 들을 줄은 몰랐네. 이거야말로 가문의 수치잖아?”

“너나 나나 덤벙대기로는 오십 보 백 보다. 내가 조금 더 낫긴 하지만.”



“얼척없네. 아까 목발 집어던질 때 양심도 같이 버리고 오셨나 봐요?”



식사를 마치고 밖으로 나왔다. 목발 없이 무슨 수로 차까지 돌아갈 수 있을까. 열 걸음 정도 걸어 코너를 돌자마자 나오는 골목 초입에 차를 대놨으니 거기까지 대충 깽깽이걸음으로 뛰어가면 되지 않을까? 내 주장을 들은 김남준은 경악을 금치 못했다. 먼 거리도 아니니 아까처럼 자신을 이용하라고 했지만··· 그건 싫다고. 근데 생각할수록 이상하네. 보통 고백이 흐지부지되면 아무리 친해도 얼마 동안은 거리를 두고, 뭐 그러지 않나? 얘는 어떻게 된 게 더 들이대는 것 같지? 내가 예민한 건가. 김남준이 씩 웃으며 나를 내려다볼 때마다 그저 착잡한 기분이었다. 



“여기서 밤새려고?”

“응?”



“깽깽이 말고는 별 뾰족한 수가 안 떠오르지?”



칫. 들켰나.



“눈 깜짝할 사이에 차까지 데려다줄게.”

“야, 잠깐만,”



“떨어지지 않게 꽉 잡아라.”



나직한 음성을 끝으로 김남준이 나를 번쩍 들어 올렸다. 녀석의 자세는 전보다 더 안정적이었으나 여전히 불안했던 난 녀석의 멱살을 양손 가득 틀어쥐었다. 아예 노선을 삐딱선으로 바꾼 건지, “확실히 밥을 먹고 나니까 훨씬 무겁네.” 따위의 상변태 같은 소리를 하길래 녀석의 팔뚝을 세게 꼬집었다. 외마디 비명과 함께 나를 바짝 당겨 안은 김남준이 예고 없이 달음박질을 시작한 순간, 나는 "으갹-!" 이라는 우스꽝스러운 감탄사를 내지르며 녀석의 목을 끌어안았다. 사실 '끌어안았다'라기보단 흔들리는 몸을 고정하기 위해 가장 가까운 지지대를 붙잡은 셈이긴 했지만. 얘가 키는 또 오질나게 커서 이 속도로 달리다 떨어지면 낙사까지도 가능해 보였거든. 차를 주차한 골목의 초입에서 속도를 줄이며 숨을 고르던 김남준이 유쾌한 웃음소리와 함께 한쪽 눈을 찡긋거렸다. 



“어때, 진짜 눈 깜짝할 사이에 왔지?”

“진심 방금 먹은 거 다 올라올 것 같으니까 말 걸지 마라.”



허술한 바보 웃음을 흘리던 김남준이 느릿한 걸음으로 코너를 돌자 주차해 놓은 은빛 SUV가 보였다. 그리고, 그 차 앞을 비스듬히 가로막은 처음 보는 스포츠카 한 대. 늘씬한 차체에 기대어 핸드폰을 만지작거리는 익숙한 실루엣이 눈에 들어왔다. 골목에 단 하나뿐인 가로등이 그려내는 선명한 그림자조차 극심한 자기주장을 펼치는 그 남자를 발견하자마자 난 고개를 돌려 김남준의 옷에 얼굴을 묻었다. 





조금이나마 가려보겠다는 의지로 머리카락을 끌어와 얼굴 위에 흐트러뜨렸다. 말미잘처럼 오그라드는 내 몸을 고쳐 안던 김남준은 이제야 눈치챘는지 멈칫하며 내게 속삭였다.



“저 사람··· 박 셰프님 같은데? 맞지.”

“···.”



“잘나가는 셰프들도 이런 맛집을 찾아다니나 보네. 신기하다.”

“···.”



유명 셰프들도 이런 맛집들을 찾아다닐 수 있지. 맞아, 충분히 그럴 수 있다. 멀끔하게 턱시도를 쫙 빼입은 김남준도 이제껏 의상과 전-혀 어울리지 않는 순대국밥집에서 한 그릇 뚝딱 비우고 나왔는걸. 박지민이라고 그러지 않으리란 법은 없지. 주말 저녁 시간대에, 약혼식장에서 몸만 빠져나온 듯한 머리와 의상을 갖추고서 구수한 저녁 식사를 위해 50년 전통의 할매 국밥집을 찾았다니 그거 아주 그럴듯한 이야기네. 헛웃음만 흘러나왔다. 이거야말로 말도 안 되는 얘기다. 내가 몰랐다면 모를까. 박지민의 심복 이 비서님, 아니, 상하 씨가 오여주의 허울 좋은 경호원, 혹은 감시원 노릇을 하고 있다는 사실을 매우 잘 알고 있는 나로서는 혼란스러웠다. 



드디어 날 찾아줬구나.

안도감과,



이미 오래전에 알았을 거면서 왜 이제야 온 거야?

서운함. 



잘못된 판단을 기점으로 해일처럼 몰아치던 애정이 결국 날 이 지경까지 몰고 왔구나. 눈가림이 어려울 정도로 깊어져 버린 마음에 대한 후회. 의도하진 않았겠지만, 믿으라고 했으면서 뒤통수를 시원하게 후려갈긴 박지민을 향해 옅게 피어오르던 배신감. 그럼에도 온전히 그를 탓할 수만은 없었다. 내가 내린 결정 역시 우리의 관계에서 큰 축을 차지하고 있었으니까. 복합적인 감정들이 정제되지 않은 채로 충돌한 후, 남겨진 것은 결국 애증 뿐. 내 일거수일투족에 관한 것들을 일일이 보고받는 박지민은 모르겠지. 상황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아무것도 모르고 기다려야만 하는, 혼자선 아무것도 못하는 바보 천치가 된 것 같은 기분이 어떤지. 내가 가진 참담함의 농도가 얼마나 짙은지. 



그러나 간사하게도, 


내 안에서 박지민을 향한 '증'은 결코 '애'를 능가할 수 없었기에, 내 본심은 한달음에 달려 나가 그의 품에서 철없는 투정을 부리고 있었다. 



나, 난생처음으로 손가락이 부러졌어. 발목 인대도 파열돼서 당분간 계속 목발 짚고 다녀야 한대. 벌써 불편해 죽겠어.

쯧. 어쩌다가 그런 거야.



··· 넘어졌어.

내가 이래서 오여주를 혼자 둘 수가 없어. 



그거 다 너 때문이잖아. 

그게 어째서 나 때문이지?



네가, 네가······.



나도 그때 약혼식장에 있었다 말하면 넌 어떤 표정을 지을까. 솔직히 무서웠다. 무서워서 최대한 미루고 또 미루고 싶었다. 그 약혼식은 무슨 의미야? 이렇게 느지막이 날 찾아온 이유가 뭐야? 불과 몇 시간 전까지만 해도 '찾으러 오기만 해, 화 풀릴 때까지 말 한 마디도 안 붙일 거야.' 하고 장난스런 생각을 이어가던 나는 어느 순간부터 문득, 그가 나타나지 않길 바랐다. 왜? 



기분 나쁜 불안감이 스멀스멀 차오르는 게, 그간 내가 참 많이도 꺼냈었던 그만하자는 이야기가 마침내 그의 입에서 나올 것 같아서. 그래서였다. 박지민의 입에서 이제 그만해야겠다는 말이 나온다면 난 어떤 반응을 보일까. 아마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 망설임 없이 고개를 끄덕이지 않을까. 그가 마음을 먹는다면, 난 붙잡을 수 없다. 혼자서 속앓이 하는 것도 이젠 너무 지쳤으니까. 



이를 악문 채 잘은 숨을 쉬고 있는 내게 김남준은 더 이상 말을 걸지 않았다. 차에 가까워질수록 박지민과의 거리도 점점 더 좁혀지겠지. 김남준이 눈치껏 나를 조수석에 파묻어 주기만을 간절히 바랄 뿐이다-



“박 셰프님! 오랜만에 뵙네요?”



-는 개뿔. 야! 너 지금 뭐 하는 거야! 왜 먼저 말을 거냐고! 젠장맞게도, 김남준이 사업 파트너들에게 쓸데없이 호의적이라는 사실을 간과하고 있었다. 나를 짊어지고 그쪽으로 가지 마, 이 눈치력 제로 김남준아! 조급한 마음에 녀석의 단단한 팔뚝을 꼬집자 김남준이 씁, 하며 주의를 줬다.



“오여주. 너 자꾸 이러면 던져버릴 거야.”



그래. 차라리 던져버려. 기어서라도 집에 갈 테니까 최대한 멀리멀리 던져버리라고. 속으로 온갖 저주의 말을 퍼붓는 나를 알 턱이 없는 김남준은 역시 그냥 해본 소리였다는 듯 내 어깨를 안은 손에 더욱 힘을 주었다. 박지민과의 거리가 얼마나 좁혀졌는지 알 턱이 없었으나 그 남자라면 분명 어둠 속에서도 나를 알아볼 수 있을 것이란 확신이 들었다. 그니까 최대한 수그려서 꼭꼭 숨어있자. 절대로 들키면 안돼. 김남준의 가슴팍에 얼굴을 푹 묻은 채 잠시도 고개를 들지 않았다. 그때, 가까운 곳에서 낮게 깔린 미성이 들려왔다. 



“아, 김남준 팀장님. 그동안 신세가 많았습니다.”

“신세라뇨, 미리 철저하게 지시해 주셨던 사항들이라 일이 수월하게 넘어갔습니다.”



“식사하고 나오시는 길인가 보죠?”

“아, 네. 맛집이라고 하길래 와봤는데, 오우, 정말 맛집 맞더라고요. 셰프님도 식사하러 오신 겁니까?



“아닙니다. 전,”

“···?”



“돌려받을 게 있어서.”

“저한테요? 뭘···,”



두 사람이 대화를 시작한 바로 그 순간부터 내 머릿속에선 빨간 경보등이 울려대고 있었다. 이 정신 나간 대화가 대환장 파티로 이어지는 것은 시간문제, 그야말로 불 보듯 뻔한 일이다. 박지민이 언제까지 점잖은 컨셉을 밀고 나갈 지가 관건이다. 그가 설상가상으로 김남준 앞에서 주특기인 "우리 애기 3종 세트"를 시전한다면? 진심으로 지하 암반수에 머리를 처박아 버리고 싶어질 지도 몰라. 복잡한 것들을 따질 새도 없이, 우선 이 두 사람을 떨어뜨려 놔야 한다는 생각뿐이었다. 일단 김남준한테 엄살 부리면서 병원으로 돌아가자고 해 봐야 하나···.



“주시죠, 오 대리님.”

“예? 아, 이 친구한테 받을 게 있으셨던 겁니까? 못 알아보신 줄 알았는데.”



“이쪽으로 넘겨주시라는 얘깁니다. 오여주 씨를.”



망했다. 예상은 했지만 완전히 망해버렸어. 아니지, 상대적으로 정상적인 멘트라는 건 인정한다. 그나마 다행이라고 해야 하나. 한동안 골목길에 만연하던 정적을 깨뜨린 것은 머리 위에서 픽, 하고 바람 빠지듯 터져 나온 무미건조한 김남준의 실소였다.



“그렇게는 못하겠는데요.”



살가움을 걷어낸 무딘 음성과 함께 내 뒷머리를 제 품으로 끌어당기는 김남준의 태도에는 짙은 결연함이 묻어 있었다. 넘겨주는 것 따위는 애초에 선택지에 존재하지 않았던 것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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늦었지만

#HappyJiminDay

짐니 생일 맞춰서 올리지만 정작 짐니 분량은 한꼬집이라 눈치 왕 많이 보는 중...🙃


야호! 드디어 수정/재업이 끝났습니다😭😭 작년 지민이 생일 즈음 연재하기 시작했던 파나를 아직까지 연재 중이라니 정말 극악의 연재텀이네요 허허... 저를 포기 않고 함께해주시는 모든 별지기 님들 감사하고 사랑합니당💕 남겨주시는 댓글들 꼼꼼히 여러 번 곱씹으며 읽고 있어요. 비밀 댓글 기능이 없는 포타에서 용기 내어(!) 남겨주신 감상 댓글 덕분에 힘내서 재업할 수 있었어요! 


곧 완전 새로운 회차로 찾아올게요!😆😆♥️

별 헤는 밤 복사나무 꽃 아래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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