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시나리오 이후의  이야기



1.

 유중혁은 언젠가 인어에 관한 시나리오를 깼던 적이 있다. 정확한 시나리오의 순번까지는 기억나지 않지만 - 잘 기억나지 않는 걸 보면 히든 시나리오일 법도 했다. - 시나리오를 깼던 기억만큼은 확실했다. 유중혁과 함께 시나리오를 깼던 사람은 김독자였고, 유중혁은 김독자와 함께했던 시나리오의 내용은 절대 있지 않았다. 유중혁이 이미 까마득하게 흘러가버린 시나리오의 디테일도 잊지 않고 짚어줄 때면 김독자는 가끔 속을 알기 어려운 얼굴로 웃었다. 너도 작가 특성이 있는 건 아닐까, 하고 속삭이며 웃을 때면 그렇잖아도 희멀건한 얼굴이 더욱 희어 보였다. 속삭이는 목소리 속에는 숨겨진 행간이 많았지만 유중혁은 그저 입을 다물었다. 웃으니 되었다. 꾹 다문 입 속에서 맴도는 말은 삼키며.

 

2.

 시나리오의 클리어 조건은 간단했다. 조그만 바위섬에 일정 시간마다 나타나는 인어를 죽이는 것. 보상은 좋았고 정해진 기간은 없었다. 패널티가 ???로 표시 되는 것은 어느 시나리오에서든 언짢은 일이었으나 정해진 기간이 없으니 크게 문제될 일은 아니었다. 다만 문제가 있다면,

 

3.

 유중혁은 난감한 얼굴의 김독자를 보았다. 희멀건한 얼굴은 종종, 혹은 자주 속을 알기 어려웠지만 난감함이 느껴지는 것은 드문 일이었다. 김독자의 드문 표정을 조금 더 오래 들여다보지 못한 것은 단지 유중혁 역시 비슷한 표정을 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어떻게 하지, 한숨처럼 가벼운 목소리가 흘렀다. 초월자가 아니었다면 바람소리라 착각했을 만큼 옅은 목소리였다.

 유중혁은 흑천마도를 쥔 손에 힘을 주었다 풀기를 반복했다. 시나리오의 클리어는 명확했다. 인어를 죽이는 것.

 다만 일반적인 방법으로는 인어를 죽일 수가 없었다. 인어도 불사의 종이었던가. 다진 고깃덩이와 다를 것 없는 상태로 뭉개어도 어느 새 다시 바위 섬 근처를 헤엄치는 꼬리가 보였다. 김독자는 수면 위로 어룽거리는 꼬리와 빈 스마트폰 화면을 오랜 시간 들여다보았다.

 인어가 죽기 위해서는 익사하는 방법 밖에 없는데... 말끝이 뭉개지는 것을 따라 흑천마도가 바위를 내리그었다. 죽어도 죽지 않는 인어. 수면아래서 헤엄치는 인어와 인어를 익사시키는 방법. 김독자는 여전히 난감한 얼굴이었다.

 

4.

 결과적으로 유중혁은 김독자가 어떻게 인어를 익사시켰는지는 모른다. 다만 인어를 껴안은 채로, 아주 오랫동안 가라앉았다는 사실만을 알고 있다. 한참 후에야 물 위로 떠오른 김독자는 희게 질린 얼굴에서 온통 물을 뚝뚝 떨어뜨렸다. 속눈썹 위로 한 움큼 고인 바닷물에서는 유독 짠 내가 났다.

 네가 익사하는 줄 알았다. 폐가 쪼그라든 것 마냥 가쁜 숨을 내쉬는 등을 거칠게 두드리자 김독자는 그저 웃었다. 유중혁은 입을 다물고 두들기던 손에 힘을 뺐다. 김독자는 매번 그렇게 유중혁의 불친절한 행간을 죄다 읽어내는 사람처럼 굴었다.

 얼굴만큼이나 희게 질린 손바닥이 눈앞으로 불쑥 다가오자 유중혁은 그제서야 눈을 가늘게 떴다. 작은 산호 장식과 진주 몇 알, 소라껍데기 하나. 시나리오 보상은 아니었다. 유중혁은 그것들의 출처를 묻는 대신 김독자의 물기를 닦기 시작했고 김독자는 몸이 전부 마르고 나서야 입을 열었다. 이건 인어의 유품이야. 간결하고 불친절한 대답이었다.

 

5.

 몇 알 되지 않는 진주는 비유가 가지고 놀다가 제 털 속에 숨겨두곤 했다. 작은 산호장식은 신유승의 옷자락에서 달랑거리기 시작했다. 소라껍데기만이 김독자에게 남았다.

 김독자는 잊을 만하면 소라껍데기를 귓가에 가져다대곤 했다. 유중혁은 그런 김독자의 옆을 묵묵히 지켰다. 중혁아, 여기선 인어의 노래가 들려. 유중혁은 김독자가 제게 소라껍데기를 가져다 댈 적이면 어깨는 움찔거릴지 언정 얌전히 귀를 기울였다. 어디의 언어인지도 모를 노래를 하릴 없이 듣고 있노라면 어깨 위로 머리 하나 분의 무게가 느껴졌다. 

 

6.

 그리고 시나리오가 전부 끝난 후에도 김독자는 알 수 없는 노래를 듣는다.

 

7.

 마당이 있는 서울 외곽의 주택은 조용하고 햇살이 잘 들었다. 햇살이 내리쬐는 창가에 반쯤 엎드린 자세로, 영어도 불어도 아닌 가사를 흥얼거리며 손가락을 늘어뜨리는 것은 김독자의 하루 일과 중 하나였다. 가끔 노래가 끊기는 이어폰을 귀에 꽂고 본인도 제대로 된 가사를 모르는 노래를 들었다. 햇살을 받아 유독 희게 빛나는 얼굴을 들여다 볼 때면 유중혁은 가끔 익사하는 인어를 떠올렸다. 그럴 때마다 숨을 참았다. 손바닥으로 입이며 코를 막고 더 이상 참지 못할 때까지. 초월좌를 벗어난 지 오래지만 보통 사람보다는 월등히 뛰어난 신체 덕에 유중혁은 아주 오래 동안 숨을 멈출 수 있었다. 그러다 견디지 못할 만큼 폐가 한껏 쪼그라들면 그제 서야 긴긴 숨을 뱉었다. 언젠가의 김독자처럼.

 그러고 나서야 햇살 아래 엎드린 이에게로 다가간다. 김독자, 하고 이름을 부르면 하얀 얼굴이 파르르 떨렸고 그건 유중혁이 하루 중 가장 즐거워하는 시간의 서막이었다. 뭐가 그렇게 재미있어, 중혁아. 김독자는 매번 그리 물었지만 유중혁은 매번 입을 닫았다. 그저 알 수 없는 노래를 듣는 김독자의 이어폰 한 쪽을 나눠 끼고, 하얀 뺨을 붙잡았다. 그리고는 별이 스민 눈을 오래도록 바라보는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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