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헤어진 건 꽤 늦은 시간이었다. 

"안 데려다 드려도 되겠어요?"

"고마워요. 하지만 바로 근처라 괜찮아요. 제헌 씨야말로 제가 안 데려다 드려도 괜찮겠어요?"

"네. 뭐, 전 안전해서요. 그래도 시간이 늦었는데 혼자 가시면……."

제헌이 어스름 어두운 골목길을 흘깃거렸다. 그들이 막 빠져나온 술집 앞에는 인적이 나름 있었지만 그 주위만 벗어나면 바로 으슥한 골목이었다. 민지의 시선도 거기를 따라갔다가 제헌을 보았다. 그녀가 오른손을 들어 올리고, 왼손을 차례로 들어 올렸다. 제헌은 그녀의 오른손 깍지 사이에 뾰족뾰족 튀어나온 열쇠들을 본 뒤 왼손에 들린 작은 회색 스프레이 병을 보고 다시 민지의 얼굴을 보았다. 민지가 왼손에 든 호신용 스프레이를 까딱거렸다. 휴대를 고려한 깔끔한 디자인의 금속 용기는 얼핏 향수 공병 정도로 착각할 법한 깜찍한 모습이었다. 민지의 손 안에 다 감싸이진 않을 정도 길이긴 했지만 일신의 안전을 걸기에는 좀 많이 부족할 것 같았다. 민지는 그 시선에 웃었다.

"화만 돋우는 용이 아니고 불법으로 분류된 최루액 스프레이니까 제헌 씨도 맞아보면 그런 얼굴 못 할 거예요. 혼자서 집으로 걸어 돌아가는 것조차 못 한다면 사람이 어떻게 제정신으로 살 수 있겠어요? 이 근방은 안전한 루트도 알고 있어요. 제가 갱들 영역은 꿰고 있거든요. 그러니까 안 어울리는 걱정은 하지 말고 본인 몸이나 챙겨요." 

"제 몸은 진짜로 안전하니까 민지 씨나 안 어울리게 배려하지 않으셔도 되거든요. 누가 보면 친해지기라도 한 줄 알겠네요."

"저랑 보고 가는 길에 무슨 일이라도 생기면 제가 무사하지 못할 것 같아서 하는 말이에요." 

"아버지의 이름을 걸고 제 안전을 확신합니다. 저는 알아서 잘 갈 테니 배웅하게 해주세요."

내용과는 별개로 진심을 흉내 내는 시도조차 찾아볼 수 없는 톤이었다. 민지가 어처구니없다는 듯 제헌을 한 번 흘겨보았지만 그에 대해 구태여 말하지는 앉았다. 대신 이렇게 말했다.

"집에 배웅까지 해줬다고 하면 정말로 이상한 소문이 날 거예요. 전 그런 짓 두 번은 못 해요."

"그런 짓이라뇨?"

"예전에 다녔던 곳에서 일이 좀 있었어요. 그래서 여기까지 온 건데…… 아무튼, 늦었어요. 내일 아침에 뵐게요."

"예, 사지 멀쩡하게 내일 봐요."

민지는 코웃음도 치지 않고 드문드문 어둠이 깔린 골목길을 걸어 나갔다. 제헌은 그 뒷모습을 물끄러미 보다가 몸을 돌려 반대 방향으로 걷기 시작했다. 

커다란 자물쇠로 잠긴 셔터 위에 화려하게 그려진 그라피티를 지나 가로등 외에는 별다른 빛도 없는 적적한 길이 이어졌다. 제헌은 새벽의 홍대 거리를 떠올렸다. 가로등 빛으로는 하늘을 밝힐 수 없듯 깨어있는 소수의 사람이 내는 소음은 밤이 내려앉은 도시의 고요를 깰 수 없었다. 적당히 술에 취한 채 밤의 적막 속에 어둑한 길거리를 걷는 건 상념을 피워올리기 좋은 환경을 조성했다. 사람의 의도와 무관한 환경의 영향은 언제나 개인의 의지를 무시하곤 했다. 제헌은 묵묵히 걸었다.

도로 위로 노란 택시와 승용차들이 한적한 길을 지나다니고, 주차된 차들은 잠든 새처럼 웅크리고 있었다. 제헌은 반소매 아래로 문신이 드러난 커다란 문지기가 서 있는 클럽 앞을 지났다. 화려하게 차려입은 사람들이 입구 주위에 서 있었다. 사람들 사이를 지나는 내내 발밑으로 쿵쿵거리는 진동이 느껴졌다. 몇 번의 갈림길을 지난 끝에 제헌이 멈추어 섰다. 두리번거려봐도 잃은 방향을 명확하게 되찾을 수가 없다는 것만이 명백해지고 있었다. 

제헌은 머뭇거리다 갑자기 길을 건너 바로 코너를 돌았다. 몇 걸음 가지 않아 제헌이 뒤로 몸을 홱 돌렸다. 덕분에 바로 뒤에서 반쯤 뛰다 싶은 걸음으로 코너를 돈 행인과 거의 부딪힐 뻔했다. 제헌은 그리 놀라지도 않고 말했다.

「미안해요. 길을 잃어버리는 바람에.」

행인은 제헌을 빤히 보았다. 그러더니 반쯤 체념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냥 얘기를 해주십쇼. 갑자기 튀어 나가면 위험합니다.」

「그러려고 했는데 자꾸 피하셔서 어쩔 수 없었다고요.」

「저는 눈에 띄지 않게 밀착 경호를 해야 하니까요. 그리고 반대 방향입니다. 제가 앞장서죠.」

「고맙습니다. 그런데 나란히 걷는 게 낫지 않을까요? 어차피 일행처럼 보일 텐데.」

이왕 눈에 띄지 않는 일이 망해버린 거 더 방해랄 것도 없었다. 제헌은 가책 없이 수다 상대로 스노우가 붙여놓은 경호원을 당첨시켰다. 천천히 걸어달라느니 속이 안 좋다느니 하는 소리로 업무 중인 사람을 괴롭히던 제헌은 남의 집 계단에 쭈그리고 앉아 버렸다. 음, 뉴요커 다 됐군. 현명하게도 헛소리를 속으로만 하며 제헌은 쭈그려 앉은 자신 앞쪽에 서서 길 끝을 주시하는 경호원을 보며 담배를 꺼냈다.

「어쩌다 이 일을 하게 됐어요?」

 주머니에 넣어둔 담뱃갑이 구겨져 있었다. 불을 붙이고 느직느직 라이터를 주머니에 넣으며 제헌은 다시 질문을 던졌다.

「흡연자예요? 재떨이는 있어요?」

경호원은 제헌을 힐끔 보고 말했다.

「재떨이는 없고 꽁초를 버릴만한 건 있습니다.」

「그래요? 이름은 뭐예요? 아, 관심 있어서는 아니고 대화라도 안 하면 토할 것 같아서요.」

「에일린입니다.」

제헌이 고개를 끄덕이며 담배를 피웠다. 노란 가로등 불빛만 흐리게 번진 밤 중에 빨갛게 불씨가 반짝였다. 에일린이 인이어 손을 올리고 작게 몇 단어를 말한 뒤 손을 내렸다.

「어머니께서 추천하셨습니다. 조건이 맞아서 여기서 일하게 됐습니다.」

「어머니께서 어쩌다 여기를 추천하셨는데요?」

「이곳의 경호 책임자로 계십니다.」

「그럼 낙하산?」

에일린은 제헌을 노려보지는 않고 그냥 힐끔 보았다. 뒤로 묶은 더티블론드가 에일린 본인 대신 고개를 절레절레 젓는 것처럼 흔들거렸다.

「사관학교 졸업 후 2년간 파병을 다녀오고 일을 찾던 중에 추천을 받았습니다. 사측에서 제시한 모든 테스트를 통과했으니 어머니 입김만은 아닐 겁니다.」

「음, 미안합니다. 기분 나쁠 소리를 했네요.」

「아닙니다. 이런 얘기를 들으면 경호 받는 입장에선 불안하게 느끼실 수도 있죠. 자연스러운 겁니다. 하지만 우려하시는 일은 없을 겁니다. 저희 업체는 엄격한 기준으로 인원을 선별하고 모든 인력이 프로 의식에 입각해 최고의 경호 서비스를 제공하는 곳이니 믿고 안심하셔도 됩니다.」

「그러고 보니 LA에서도 여기서 경호를 섰던가요? 그쯤에 봤던 건 기억하는데 정확하게는 모르겠네요.」

「중간에 저희 업체로 바꾸신 걸로 압니다. 병아리들한테서 인계받았죠.」

「병아리요?」

에일린은 조금 머뭇거렸다. 

「그쪽 업체에 책임자로 있는 사람이 있던 부대가 검독수리 문장을 썼습니다. 저희 쪽과 사이가 좋지 않아서……. 사석에서 쓰던 호칭인데 실언했습니다.」

제헌은 하하하 웃었다. 맑은 웃음소리가 노랗게 물든 빈 도로를 짧게 울렸다.

「그래서 그 '병아리들'의 공식적인 이름은 뭔데요?」

「지로 시큐리티라고 합니다. 피에르 뒤솔리에라는 사람이 대표로 있습니다.」

「이상한 이름이네요.」

제헌은 다 피운 꽁초에 남은 불씨를 꾹꾹 짓눌러 끈 뒤 자리에서 일어났다. 에일린은 제헌에게서 담배꽁초를 받아 입고 있는 검은 가죽 재킷 주머니에 넣고 인이어에 출발을 알렸다. 제헌은 적당한 말을 찾지 못했고 이대로 걸으면 15분 뒤에 도착할 것이라며 안내를 시작한 에일린의 뒤를 그냥 얌전히 따랐다. 그들은 12분 뒤에 호텔에 도착했다.

「……아무리 ……해도 완벽하다는 건 존재할 수 없어요. 탱크를 타고 다녀도 내부로 수류탄을 까 넣거나 미사일을 쏘아 바닥에서 터지면 끝장입니다. 지금 하고 있는 경계 수준이면 거의 전시 태세라고 해도-」

「나중에 다시 하죠. 오늘은 그만 돌아가세요.」

스노우가 말을 끊자 맞은편에 앉아있던 사람이 스노우의 시선을 따라 제헌을 보았다. 제헌은 그의 짧게 친 더티블론드와 딱딱한 눈빛을 보내는 회색 눈동자를 보며 복사 붙여넣기를 한 것 같은 그의 딸을 떠올릴 수밖에 없었다. 그는 문간에 선 제헌에게 눈인사를 하고 방을 나갔고 제헌도 고개를 까딱하고 말았다. 있는 듯 없는 듯 지나쳐 서로가 있던 공간이 바뀌었다. 

"친구분이랑은 잘 만나고 왔어요?"

그렇게 말하며 스노우가 싱긋 웃었다. 그는 언제나처럼 부드럽게 미소지으며 제헌을 맞이했다.

"그냥 같이 일하는 거지 무슨 친구야. 나보단 네가 더 친한 거 아니야?"

"빈말로라도 친한 사이라고는 못하는 정도인걸요. 제 얘기를 들었나 봐요."

"그럼. 아주 많이 했지. 궁금해?"

"말해줘요."

제헌은 스노우의 허벅지 위에 올라탔다. 그리고 마주 앉은 채 양손으로 옅은 금빛 머리카락을 매끈한 이마 뒤로 마구 쓸어넘겨 엉망으로 흩트리며 얄밉게 웃었다. 

"비밀이야. 비밀인데, 예전 얘기를 들으니 너한테도 어처구니없던 어린 시절이 있을 거라는 생각이 들어서 웃기더라고. 십 대 시절에도 여드름 하나 안 났을 것 같은데. 너한테도 질풍노도의 시기라는 게 있긴 있었냐?"

"파티에서 과음하고 잠을 제대로 못 잔 다음에 트러블로 고생한 적은 있어요. 호르몬 영향도 있었겠죠."

"재미없는 범생이인 줄로만 알았더니, 완전 잘못 짚고 있었잖아."

"당신은 어땠어요?"

스노우의 물음에 제헌은 모이를 쪼는 새처럼 스노우의 입술을 쪼던 것을 멈추고 잠시 회상에 빠졌다. 무슨 생각을 하는지는 몰라도 낯빛이 별로 좋은 기억을 떠올리는 것 같지는 않았다. 제헌은 기억을 더듬는 것처럼 생각에 빠진 얼굴로 스노우의 매끄러운 뺨을 감싸 쥐고 엄지로 핏기가 도는 부드러운 입술을 매만졌다. 그는 콧잔등을 찌푸리면서도 여전히 농담처럼 가벼이 말했다.

"어머니가 나 때문에 피부과랑 관리실에 쓴 돈이면 고향 땅에 아파트 하나는 살걸. 크니까 나아지긴 했지. 살이 빠져서 그랬는지 성인이 되어서인지는 모르겠지만."

제헌은 장난처럼 스노우의 얼굴을 잡아 볼살을 눌렀다. 그리고 동그랗게 짜부라진 스노우의 입술에 조금 전보단 확연히 느긋하게 쪽쪽쪽 입을 맞추었다. 

"취했어요."

"맞아. 나 취했어. 침대로 데려다줘."

"당신이 원한다면 그렇게 할게요."

"그럼 씻기고 먹이고 입히고 재우는 것도 해주라."

스노우는 낮게 웃었다. 그는 부드러운 입맞춤의 끝으로 제헌의 아랫입술을 살짝 빨았다. 그리고 자신에게 엉겨드는 제헌의 몸을 안아 들었다. 

"오늘 기분 좋아 보여요."

"취한 거겠지."

"그렇다면 그런 거겠죠."

제헌의 시야 속에서 대리석을 깐 바닥과 그 위를 덮은 러그가 빙글 돌아 멀어졌다. 스노우가 제헌의 엉덩이 아래를 받쳐 들고 안아 드는 것과 짊어지는 것 사이의 어느쯤으로 제헌을 옮기고 있었다. 몸을 숙이고 있었더니 다시 금방 토기가 올라왔다. 제헌은 이대로 토하는 꼬락서니가 되고 싶지 않아 목구멍에 힘을 꽉 주고 스노우의 어깨와 목덜미를 팔과 팔꿈치로 마구 짓누르며 고개를 들었다. 나름대로 필사적인 심정이었으니 스노우는 이해를 해야 했다. 

곧 벽이 휙 돌아가더니 좀 떨어진 거리에 서 있는 두 사람의 모습이 눈이 들어왔다. 제헌은 팔꿈치로 스노우의 뒤통수를 눌러대며 한 손을 흔들었다. 에일린은 무시해야 하나 조금 고민되는 것 같았으나 고개를 살짝 끄덕여 답을 했다. 스노우와 제헌의 신변 안전에 대한 책임을 맡고 있는 사람도 이쪽으로 돌아보는 것이 보였다. 데칼코마니처럼 닮았지만 헷갈릴 일은 없어 보이는 모녀의 모습이 방문이 닫히며 사라졌다. 푹신한 침대에 제헌의 등이 무사히 안착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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