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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t.4 재회(再會)

     

    



  

20xx년. 7월 23일. 수요일. 날씨 맑음.

     

이런 상황에서 일기를 쓴다는 것 자체가 이상한 일일지도 모르겠지만, 

이런 거라도 하지 않으면 정말 정신이 어떻게 될 것 같아서 써본다. 

아니면 내가 무슨 일로 인해서 죽는다면, 적어도 이것이 내 회고록이 되어주겠지.

혹시 누군가 봐준다는 전제하에….

나는, 내 이름은 로키 오딘슨이다.

나중에 리버티 대학에서 명단을 찾아보면 나올 것이다. 

내가 지금 일기 아닌 일기를 쓰는 이유는-. 

나의 어머니가

(공백)



신은 대체 어디 있지?? 아니면, 벌을 주기 위해 괴물들을 보낸건가?

     

     

20xx년. 7월 24일. 목요일. 날씨 흐림.

     

일기니까 정확히 써야 할 것 같아 다시 적는다.

나는 18일 금요일, 해변 가의 어머니 소유 레스토랑에서 일을 하던 도중 해일을 목격했다.

그리고 자동차를 타고 귀가와 동시에 대피를 하던 도중, 검은 물고기 떼와 같은 것에 휘말려 정신을 잃었다. 깨고 보니 저녁이었고, 처음으로 검은 것들을 마주했다.

괴물이라고 밖엔 설명 안 되는 것들을 피해, 도움을 주는 사람을 만났고.

이름이, 나타샤라고 하는 여자와-. 그 외의 사람들. 그리고 스티브를 만났다.

발목을 다쳤던 탓에 스티브라는 남자의 도움을 받아 집으로 왔었다. 

     

스티브는 좋은 남자였다. 경찰관 지망생이라고 했었다.

내가 집으로 돌아오는 길목의 카페에서 일을 하는데 날 자주 봤었다고 했다.

그리고 날 좋아하는 것 같았다.

중요하지 않은 내용은 지운다. 어쨌든 도움을 받고 집으로 도착하니 어머니는 이미 괴물에게 당했고, 스티브도 괴물에게 당했다. 

나는 어떻게 해서인지는 기억이 잘 안 나지만, 괴물을 처리해서 살아남았다. 

팔목에 염산 같은 것이 닿았을 때처럼 살점이 타있기도 했다. 

그리고 뒷마당에 어머니와 스티브를 묻었다.

(공백)


일주일이 지난 지금, 상처는 많이 아물었다. 발목도 거의 나아져가고 있고, 다행이 아직까지 전력이 통하는 덕에 TV로 가끔 바깥세상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확인할 수 있었다. 

정부에서는 지금 당장 구조대를 보내기 힘들다고 했다.

버티라고 이야기를 하는데, 솔직히 많이 의심스럽다. 

냉장고의 음식들이 점점 줄어가는 게 눈에 보였다. 

어떻게든 미리 준비를 하지 않으면….

  

   


  

20xx년. 7월 26일. 토요일. 날씨 맑음.


 

길거리로 ‘검은 것’들이 돌아다니게 된 지도 거의 10일째다. 

그것이 무엇인지, 왜 이곳에 왔는지 아무것도 모른다. 

아는 것이라곤 그것들이 사람은 물론이고 작은 동물들 까지도 전부 삼켜버린다는 것. 

이제는 창밖의 나무를 볼 때 점점 시들어가는 것을 보니 식물도 흡수를 하는 것 같다. 

말 그대로 살아있는 것이라면 모든지 먹어 치우는 듯….

빛에 민감하고, 시력도 둔하며 불에 녹는 듯 보여도, 작은 액체가 돼서 생명체를 공격한다.

팔목의 상처를 보면 산 같은 것을 내뿜는 것이 아닐까 생각도 든다.

     

지금으로서는 집안에 은신하면서 집안 틈새나 구멍을 막는 것으로 괴물들의 침입을 막는 것이 최선이었다. 소리를 내지 않고 빛을 없애니, 여태까지 괴물들이 침입하는 일은 없다. 

어쩌면 괴물이 사라진 것일까 생각하지만, 가끔 밤중에 사람 비명 소리 같은 것이 들리니 그건 아닌 것 같다.

     

오늘 샤워를 하다가 검은 것이 흘러나오는 것을 보았다. 

물을 계속 트니까 하수구로 곧바로 사라졌다.

혹시 앞으로도 물에서 검은 것이 나올 가능성이 있어서 집안의 물병이란 물병에 모두 물을 따로 담아뒀다. 

     

일단 현재 식량이 며칠 분이 되는지를 확인했다. 하루에 한 끼를 먹고 전기가 끊어지지 않는다 치면, 적어도 3개월은 버틸 수 있는 분량이었다.

     

적어도 그 안에는 구조대가 오겠지.

어쩐지 불안한 기분이 든다.

     

     

20xx년. 7월 27일. 일요일. 날씨 맑음.

 


뒷마당의 잔디가 노랗게 변했다. 

앞마당의 나무가 반나절 만에 하얗게 질리더니 곧바로 도로 쪽으로 쓰러졌다. 

쓰러진 나무 밑 둥에서 검은 것들이 보였다.

     

길거리에 썩는 냄새가 진동한다. 창문을 닫았지만 여전히 숨 쉬기가 곤란하다.

     

     

20xx년. 7월 28일. 월요일. 날씨 맑음.

     

오늘 싱크대에서 컵에 물을 따라 마시려는데 검은 것이 들어있었다. 

한참을 물을 틀고 있었던 터라 아무 생각 없이 그대로 마실 뻔했다.

     

수도꼭지를 돌리면 이제 반은 물, 반은 검은 게 흘러나왔다. 

욕조에 물을 담아놓은 것에도 군데군데 검은 것이 떠다녔다.

아까웠지만 모두 하수구로 흘려보냈다. 

병 안의 물들은 그대로였다.

     

아무래도 수도가 오염된 것 같다.

     

     

20xx년. 7월 29일. 화요일. 날씨 흐림.

     

밤이 되면 가끔 비명소리 같은 것이 들린다. 

진짜 사람 소리일까? 

아니면 내가 만들어낸 환청일까?

     

너무 조용하다. 

     

     

20xx년. 7월 30일. 수요일. 날씨 흐림.

     

할 일이 없으니 잠자는 시간만 늘어난다. 

물이 오염 되서 화장실에서 용변도 볼 수가 없다.

소변은 그냥 하수구에 누고, 큰 것은 비닐봉지에 볼일을 보고 뒷마당에 묻는 걸로 어떻게든 처리했다.

     

TV에서는 여전히 기다리라고 한다. 

어처구니가 없네.

대체 뭐가 시민들을 위해서야?

 

   

20xx년. 7월 31일. 목요일. 날씨 비옴.

     

비가 오니 냄새가 덜 하다. 

괴물들이 모두 비에 떠내려가서 바다로 사라졌으면 좋겠다.

비가 오다보니 검은 것들이 떠다니는 것이 보였다.

볼일을 본 봉투는 일단 화장실에 뒀다.

     

아버지도 어머니도 모두 죽었는데, 토르는 어떻게 됐을까?

배를 타고 다니니까, 괜찮겠지?

     

     

20xx년. 8월 1일. 금요일. 날씨 비옴.

     

비가 계속 내린다.

빗방울이 창문을 치는 소리가 듣기 좋다. 

창문 밖에 양동이를 걸어두고 빗물을 받았다.

     

가족들이 모두 함께였을 때가 그립다.

토르가 보고 싶다.

     

구조대는 여전히 오지 않는다.

점점 지쳐간다.

     

     

20xx년. 8월 2일. 토요일. 날씨 맑음.

     

전기가 끊겼다.

도시의 비상전력이 다했나? 

아니면 비가 온 것 때문에 그런가? 

TV가 켜지지 않는다. 라디오에서도 아무것도 들리지 않는다.

     

냉장고의 전원도 꺼졌다. 큰일이다.

     

지하 창고에서 아이스박스를 가지고 와 냉장고의 음식들을 최대한 옮겨 담았다.

한 달 정도도 안 되는 음식들 밖에 옮기지 못했다.

부디 냉장고 속의 다른 음식들이 최대한 안 썩길 바란다.

하지만 여름이니 날이 더워서 내가 생각하는 것보단 더 빨리 썩을 것 같다.

 

   

20xx년. 8월 3일. 일요일. 날씨 맑음.

     

일단 냉장고 안에서 먹고 싶은 과일들을 배불리 먹었다. 

그리고 하루 종일 책을 읽었다. 

     

구조대는 여전히 오지 않았다. 

 

   

  

20xx년. 8월 4일. 월요일. 날씨 맑음.

     

구조대가 오지 않는다. 

     

     

20xx년. 8월 5일. 화요일. 날씨 맑음.

     

사람들 목소리를 들었다. 

창밖을 보니 아무도 없었다.

     

     

20xx년. 8월 6일. 수요일. 날씨 맑음.

     

냉장고 안의 음식들이, 맛이 이상해지기 시작했다.

     

     

20xx년. 8월 7일. 목요일. 날씨 맑음.

     

오, 하나님. 

내가 미친 것일까?

     

     

20xx년. 8월 11일. 월요일. 날씨 맑음.

     

며칠째 계속 꿈에서 토르가 나온다.

꿈속에서 토르와 내가-.

(공백)

분명 혼자 있는 여파로 인해서 그런 꿈을 꾼 거겠지.

수치스럽다.

     

     

20xx년. 8월 13일. 수요일. 날씨 맑음.

     

덥다. 

물이 점점 줄어드는 게 보인다. 

냉장고 속의 음식들이 전부 썩어서 냄새가 진동한다.

     

아이스박스의 음식들을 먹기 시작했다.

     

구조대가 안 온다.

     

     

20xx년. 8월 14일. 목요일. 날씨 맑음.

     

오랜만에 어린 시절 있었던 일을 꿈꿨다.

가족들이 전부 함께 모여 내 생일파티를 축하하던 그 때의 꿈이었다.

     

아버지는 뒷마당에서 그릴에 햄버그를 굽고, 

어머니는 샐러드와 빵을 가져오시면서 미소지으셨다.

     

나는 토르와 함께 테이블에 앉아서 케이크를 자르는 것 가지고 싸우고 있었다.

결국 토르가 내게 나이프를 줬었는데-. 

     

나는 꿈속에서 플라스틱 나이프로 케이크를 자르는 감촉까지 생생하게 느낄 수 있었다.

(공백)

     

토르가 보고 싶다.

     

     

20xx년. 8월 15일. 금요일. 날씨 맑음.

     

할 일이 없어 다니던 대학교 친구들 이름을 떠올려 보았다.

     

생각해보니, 나는 친구가 없었다.

토르 빼고는….

(공백)


구조대가 없다.

     

     

20xx년. 8월 16일. 토요일. 날씨 맑음.

     

물이 이제 몇 병 안 남았다. 

아이스박스의 음식도 점점 줄어든다.

     

구조대가 오지 않는다.

힘들어.

토르가 보고 싶다.

     

     

20xx년. 8월 19일. 화요일. 날씨 맑음.

     

이제 물병이 2개밖에 안 남았다.

식량은 통조림 다섯 개 정도. 

압도적으로 물이 부족한 상태다. 

     

구조대가 오지 않는다. 오기는 하는 걸까?

토르는 뭘 하고 있을까?

     

     

20xx년. 8월 20일. 수요일. 날씨 맑음.

     

사람은 쉽사리 죽지 않는다. 

그러나 살아남는다는 것은 어려운 일이다. 

지금 그것이 뼈저리게 느껴진다.

     

이제 통조림은 4개. 물은 한 병 반.

     

이대로 기다리다간 아사하거나 탈수 증세로 먼저 죽을 것이다.

     

…구조대는 여전히 오지 않는다.

     

     

*

     

  로키는 전날의 일기를 살펴보다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밖으로 나가 음식과 물을 구해서 생존을 확보하고, 도시로 탈출할 계획을 짜거나- 아니면 이 상태 그대로 극한의 상황까지 자신을 몰아서 구조대를 기다리거나.

  하지만 밖으로 나가면 한밤중에 끝도 없이 밀려드는 검은 괴물들로부터 스스로를 보호해야 하고, 식량과 물을 확보할 수 있다는 보장도 없었다. 그러나 언제 올지 모르는 구조대 때문에 집안에서 기다린다면 몸이야 위협에서 안전하지만 빠르게는 3일, 늦게는 일주일 정도 음식과 물이 부족함으로 인해서 천천히 죽어갈 것이었다. 

  빠르게 죽을 것이냐, 느리게 죽을 것이냐- 그의 눈으로 본 질문은 그러했다.

  로키는 선택해야 했다. 

     

  로키는 집안에서 한참이나 서성였다. 그리고 어느 순간 서성임을 멈추고서는 곧 그의 배낭에 빈 물통과 남은 음식들과 물들을 챙겼다.

  다리는 이제 제자리에서 높이 뛰어도 괜찮을 정도로 나았고 팔의 상처도 흉터가 있긴 하지만 완전히 다 나았다. 조심만 한다면, 괴물에게 따라잡히지 않도록 도망갈 수 있을 듯 했다.

  로키는 햇볕이 그의 정수리에 도달하는 때, 지도와 다용도 칼과 손전등을 허리춤에 챙기고 한 손에 식칼을 든 상태로, 한 달 만에 집밖으로 향하는 현관문을 열었다.

     

  잔뜩 경계한 채 문을 연 것에 비해 밖은 맥이 빠질 정도로 조용했다. 그러나 사방에서 몰려오는 조용함이 로키를 더욱 불안하게 만들었다. 괴물을 마주할지 모른다는 불안감과는 다른, 스스로를 마주하게 만드는 침묵이 로키에겐 버거웠다. 

     

  그는 애써 스스로의 발자국 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바싹 마른 아스팔트를 걸을 때 나는 소리가 마치 골프공이 모래에 떨어졌을 때 나는 소리와 비슷했다. 로키는 그의 발걸음 속도를 생각하며 그가 가야할 대형마트까지의 거리를 생각했다. 최대한 해가 떨어지기 전에 다녀와야 된다 생각이 들었지만, 다른 한 편으로는 자신과 같은 이들이 그곳에 있지 않을까란 생각도 했었다. 그리고 대피소에 봤던 다른 사람들의 생각도 들었다. 그들은 어떻게 되었을까? 아직 구조대와 연락이 안 됐을까? 아니면 이미 구조되었을까? 로키는 부디 후자가 아니길 바랐다. 그는 이 도시에 혼자 남겨지는 것이 두려웠다.

     

  한참을 걸어가다 레이븐 사거리의 푯말이 세워져 있는 것을 보고 로키는 잠시 걸음을 멈췄다. 그는 스티브가 있었을 때 지나갔던 지름길을 찾으려 했으나, 환한 낮인 상황에서 찾아보려하니 어딘지 알 수가 없었다.

  낭패였다. 대형마트로 가는 길목은 헤이스트 사거리로 향하는 길에 있었고 레이븐 사거리 쪽에는 대형의 물체가 길을 가로 막고 있으니 갈수가 없었다. 다른 길을 찾아야했다. 

  로키는 곧 머릿속으로 주변의 지리를 떠올렸다.  

오른쪽 - 동, 왼쪽 - 서, 위쪽 - 북, 아래쪽 - 남



 다른 블록의 업타운을 몇 번밖에 가본 적이 없어 확신 할 수는 없었지만, 그쪽으로 가면 분명 길이 연결되어 있었을 것이다. 성인 남성의 키를 훌쩍 넘는, 구간을 나누는 담벼락만 어떻게든 넘어간다면- 로키는 곧바로 서쪽을 향해 방향을 틀어 걸어가기 시작했다.




Act.4 재회(再會)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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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업타운의 도로와 주택들은 깨끗했다. 자동차가 부서져 있거나 하는 흔적도 없었고, 그저 집안으로 향하는 현관문이 활짝 열려있거나 창문이 깨져있거나 하는 정도뿐이었다. 잔디는 노랗게 변하고, 가로수들이 바짝 말라 쓰러진 것만 빼면 그저 아무도 이사 오지 않은 빈집들처럼 보였다.

  로키는 그 안으로 들어가 식량을 찾아볼 생각을 잠깐 했지만, 문가로부터 검은 액체가 꾸물거리며 햇빛을 피해 내부로 사라지는 것을 보고 그런 마음이 싹 가시는 것을 느꼈다.

  하기야, 지금 괴물의 공격 탓에 비어있는 집들 속에 검은 것들이 도사리고 있는 것은 당연한 것이다. 괴물들은 빛을 피하고 살아있는 것들을 먹으러 돌아다니는 습성을 가지고 있었으니 말이다.

  로키는 길을 걸어가다가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조용하다. 여름이라 그런지 햇볕은 너무도 뜨거웠다. 로키는 물이 말라버린 어항 속 금붕어처럼 숨이 턱턱 막혀오는 것을 느꼈다. 물을 마시고 싶은 열망이 점진적으로 솟아올랐다. 그는 배낭 속에 들어있는 한 병의 물을 떠올렸다.

  자신이 가지고 있는 유일한 물.

  꿀꺽.

  애써 입안의 마른 침을 삼키며 로키는 다시 발걸음을 재촉했다.

 

 

  서쪽으로 한 2km를 걸어갔을까? 저 멀리서 작은 구릉과 함께 구역을 분할하는 담벼락이 보였다. 그의 키와 엇비슷한 장벽을 향해 걸어가던 로키는 문득 소름이 돋아 팔을 문질렀다. 아이러니한 일이었다. 날은 이렇게나 뜨거운데도 몸의 온도는 점차 떨어지는 기분이라니. 로키는 회색으로 이어진 콘크리트 담벼락에 한 손을 올렸다. 그림자가 드리워져선지 차갑고 촉촉한 느낌이 드는 콘크리트 벽을 만지다, 그는 고개를 번갈아 양 옆으로 돌려 시선을 던졌다. 중간 중간 세워져 있는 나무를 빼고 회색의 경계선은 좌우, 그 어디서도 끝이 보이지 않았다. 주택과 주택의 경계를 가르는 담은 동쪽과 서쪽의 왕래가 불가능하게 만들었다.

 

  담이 만들어진 이유는 서로의 프라이버시를 존중하기위해서, 또는 접촉이 불필요했기 때문이라는 이야기도 있지만, 한편으로는 다운타운에 있는 자들의 침입을 미리 경계해서 만들었다는 이야기도 돌았었다. 다운타운에 있는 자들은 거지들이 대부분이었으니 부자들 입장에서는 충분한 이유였으리라.

  그러나 만들어진 이유가 무엇이건, 지금의 로키에게는 하나의 장애물에 불과했다.

 

  로키는 두 손을 뻗어 담의 끝에 손을 대보려고 했다. 그러나 3미터가 넘는 담벼락은 그가 까치발을 들고서 손을 뻗어도 닿지 않았다. 로키는 몇 번이고 점프해서 담의 끝에 손을 뻗었다. 점프를 할 때마다 손가락의 끝이 미세하게 담 끝에 걸렸다. 조금만 더 하면 올라갈 수 있을 것 만 같았다. 로키는 애가 타는 심정으로 이번에는 구릉의 뒤편으로 조금 물러서서 도움닫기를 시도했다. 팍팍- 잔디와 흙이 튀는 소리가 귀로 들리고, 로키는 있는 힘을 다해서 담벼락에 양손을 뻗었다.

 

[퍽-!]

 

  로키의 몸이 담벼락에 부딪혔다. 그의 손끝은 갈고리처럼 담 끝에 걸려 파르르 떨리고 있었다. 로키는 손에 힘을 주고, 발끝으로 벽을 밀며 담을 기어올랐다. 애써 숨을 참고 없는 힘까지 쥐어짜 로키는 간신히 담에 상체를 넘기고 한 쪽 다리도 넘겨, 승마를 하듯 담에 올라탔다.

 

-후! 하….


  로키는 한동안 집에서 몸을 사리고 있다가 갑자기 무리하게 움직여선지 바로 옆에서 누군가 그의 귀에 종을 치듯 이명이 울리는 것이 느껴졌다. 미약한 어지러움이 올라와 로키는 상체를 숙인 채 담을 끌어안아 숨을 골랐다. 그리고 조금 후에 나머지 다리도 담의 반대편으로 넘겨 천천히 담을 내려갔다.

  로키는 담을 내려와 숨을 고르며 주변을 둘러보았다.

  서쪽의 업 타운은 로키가 있던 동쪽과는 조금 다른 모양새였다.

  마치 소형 빌라 단지와 같은 것들이 주를 이루었는데, 표현하자면 도시의 축소판 같았다. 구릉에 있던 잔디와 나무, 가로수를 제외하곤 초록의 풀들을 찾아볼 수가 없었다. 그래서인지 전체적으로 딱딱한 인상이었는데, 마치 전쟁이라도 났었던 것처럼 빌라 단지의 유리창은 깨져있고 내부 가구들이 끄집어내져 옷가지 같은 것들이 사방에 떨어져 있었다. 쓰레기통은 쓰러져 도로에는 폐지 같은 것들이 굴러다니고, 건물 한 블록 당 배치된 편의점은 유리가 깨지고 안에 진열되어있던 물건들이 전부 사라져있었다. 다만 건물 외벽 자체에는 흠이 간 것이 없었으니 분명 인간의 짓임이 분명했다. 로키는 점점 엄습해오는 불안감에 담을 넘을 때 가방에 넣어두었던 식칼을 다시 꺼내 손에 쥐었다.

 

  로키는 비어있는 건물들을 조심스레 살펴보고, 혹시나 편의점 안에 무엇인가가 남아있을까 싶어 인도의 가장자리를 따라 걸어갔다.

 

  편의점 안은 쑥대밭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가판대는 물론 현금 인출기 등등이 쓰러져 나뒹굴었다. 물론 그 안에 든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로키는 혹시라도, 만에 하나라도 무엇인가 있을까 싶어 음료수 병들이 들었었을 냉장고와 창고를 뒤져보았다. 하지만 역시나 텅텅 비어있었다. 로키는 작게 이죽거렸다.

 

-제길…. 하나도 없네….

 

  혹시나 하는 생각에 카운터의 선반 아래를 샅샅이 뒤져도 아무 것도 나오지 않았다. 이런 중형 편의점에서 먹을 것이 다 떨어졌다면, 대형매장 정도여야 뭔가가 나올 것 같다. 로키는 그렇게 생각하며 카운터 아래에서 몸을 일으켰다.

 

[끼리릭-]

 

  도저히 익숙해지지 않을 기묘한 소리가 로키의 귀로 들렸다. 로키는 천천히 소리가 들리는 쪽으로 시선을 던졌고, 어디서 나왔는지 모를 생선을 닮은 괴물이 창고 귀퉁이에서 보였다. 작은 괴물은 붉은 눈알을 굴리며 창고의 가장자리에 서있었다.

 

[키릭, 키릭-]

 

  맞지 않는 열쇠로 억지로 자물쇠를 열었을 때 나는 소리 같은 것이 괴물의 입에서 들려왔다.

  무서우리만치 무거운 중압감이 로키의 몸을 짓눌렀다. 그리고 그는 카운터 너머로 천천히 몸을 움직였다. 괴물은 다행이도 편의점 안으로 들어오는 햇빛 탓에 로키에게 쉽사리 다가오진 못했다.

  무언가 남아있을 것이란 생각에 뒤졌던 것과 달리 남은 것은 괴물뿐- 두려움은 얼마 되지 않았으나, 허탈감이 로키의 마음을 비집고 들어왔다.

  지금이라도 집으로 돌아가는 것이 나을까?

  포기를 종용하는 마음의 소리가 들렸다. 로키는 주먹을 쥐고 괴물을 보다 편의점 밖을 보았다. 이곳 말고도 다른 가게들이 더 남아있었다. 아직 포기하기엔 일렀다.

  로키는 유리가 깨진 편의점 문 밖으로 나갔다.

  햇볕이 다시금 로키를 비췄다. 뜨겁게 달궈진 아스팔트 냄새와 공기 중에 미약하게 섞인 역한 썩은 내에 저절로 미간이 찡그려 졌다. 덜한 줄 알았던 냄새가 갑자기 강해지다니- 로키는 주변을 살폈다.

  달라진 것은 없어보였다. 아니, 자세히 보니 마구잡이로 부서져있는 서쪽 구역의 대형 게이트 쪽으로 어떤 무리가 보였다.

  설마 구조대일까? 아스팔트에 올라오는 아지랑이 탓에 사람의 무리라는 것을 제외하고는 제대로 보이지가 않았다.

  그래도 사람이라는 사실에 로키는 그 무리를 향해 두 팔을 들고 흔들었다.

 

-어- 이!!

 

  로키가 반가움에 소리치며 두 팔을 흔들자, 그 무리 쪽에서도 얼마지나지 않아 똑같이 소리쳤다.

 

[어- 이!]

 

  다행이다. 로키는 별 이상 없는 무리를 발견했다고 생각하고 그 자리에서 그들을 기다렸다. 그러자 상대 쪽 무리가 비정상이라 할 만큼 빠른 속도로 다가왔다. 로키는 그 덕에 자리에서 한발자국도 움직이지 않았지만 점점 가까워지는 그들의 모습을 자세히 볼 수 있었다.

  심하게 변색된 티셔츠들과 찢어진 옷들. 그리고 무기를 들고 짓는 괴이한 미소. 로키의 뒷목으로 식은땀이 흘러내렸다. 로키의 본능은 섬뜩함으로 그들이 위험한 존재라는 것을 알려주고 있었다. 로키의 선택은 빨랐다. 그는 바로 뒤로 돌아 도망치기 시작했다.

 

[어이! 어딜 가는 거야!!]

 

  뒤에서 그들의 고함이 들렸다. 로키는 심장이 터질 듯이 떨려오는 것을 느꼈다. 팔다리가 후들거리는 감각이 온몸을 지배했다. 그럼에도 로키는 계속해서 달렸고, 곧 그가 넘어왔던 담에 도착했다. 두 손을 재빨리 뻗어 담 끝에 점프했다. 그러나 긴장 탓인지 로키는 번번이 담 끝을 놓치고 말았다.

 

-젠장, 젠장!

 

  뒤에서 들려오는 발소리들이 점점 가까워졌다. 로키는 더 이상 도망치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식칼을 들고 몸을 돌려 그들을 위협했다.

 

-오지마!!! 가까이 오지마!!

 

-아하하, 당신이 우릴 불렀잖아?

 

  로키에게 제일 가까이 다가온 남자가 히죽 누런 이를 드러내고 웃으며 말했다.

  남자는 때가 덕지덕지 낀 손으로 로키를 가리키며 말했다.

 

-좋은 칼이군. 우리껀 거의 다 망가져서 말이야.

 

  너무 태연스럽게 말하는 터라 로키는 순간 그가 하는 말을 알아듣질 못했다. 로키가 미간을 찡그리며 못 알아듣겠단 표정을 짓자, 사내는 다시 말했다.

 

-그거 내놔. 안 그러면 다친다?

 

  협박 같지도 않은 협박이었으나, 다수인 무리를 앞에 두고 있으니 로키에게는 효과적인 위협이었다. 하지만 로키는 그의 무기를 순순히 내어줄 만큼 멍청하지는 않았다. 대신 좌우로 팔을 크게 휘두름으로서 그들과 자신의 거리를 벌렸다. 하지만 충분한 위협은 되지 않았는지 담을 등진 로키를 향해 아주 조금씩 조금씩 포위망을 좁혔다.

 

-오지마! 오지말라고!!

 

  로키는 칼을 막무가내로 휘둘렀다. 그리고 그가 한쪽으로 팔을 휘둘렀을 때, 무리 중 한명이 로키의 팔을 붙잡았다. 로키는 고함을 지르며 사내를 때어 놓으려 했으나, 곧바로 다른 한 쪽에서 날아오는 주먹에 얼굴을 맞고 말았다.

  연이어 큰 충격이 뒷머리를 강타했다.

  로키는 칼을 놓치고 바닥에 쓰러졌다. 뒤의 일은 너무도 빨리 끝났다.

 

-부자 새끼들은! 이래서! 문제라고!! 어?! 우리가 우습지?! 이 병신새끼야!! 

 

  무리의 대장으로 보이는 사내가 로키의 몸을 발로 걷어차며 소리쳤다. 로키는 머리를 감싸고 몸을 웅크려 고통을 최소화 시키려고 했다. 그러나 로키는 사내들의 린치를 견뎌내지 못했다. 로키는 그의 몸으로 사정없이 내려쳐지는 충격에 결국 기절하고 말았다.

 

 

-

 

 

  어느 정도의 시간이 지났을까? 저절로 눈이 떠졌다. 그러나 한 쪽 눈은 부어올랐는지 잘 떠지지 않았고 나머지 눈은 시야가 흐릿했다. 아마도 집단린치의 결과리라- 로키의 자각은 곧 통증을 동반했다.

 

-크, 크윽.

 

  로키는 잇새로 작게 앓는 소리를 냈다. 그의 몸은 결박되어 있었고, 주변에서 나는 악취 때문에 숨도 못 쉴 지경이었다. 그나마 눈이 떠져 주변을 보니, 사방에서 물소리가 들려왔다. 그가 물소리가 들리는 곳으로 고개를 돌려 시선을 던지자 그곳에는 온갖 오물이 떠다니는 오수가 흐르고 있었다.

 

-웁- 우욱….

 

  로키는 먹은 것도 얼마 없음에도 구토가 치밀어 올랐다. 오수 속에는 기본적인 오물, 사람의 배변 같은 것들과 음식물 쓰레기- 또는 사람의 신체로 보이는 것들이 떠다니기도 했고 괴물의 전단계인 검은 액체 같은 것이 떠다니고 있었다.

  온갖 더러운 것들을 한데 모아 비리면서도 몇 년 동안 묵혀놓은 것 같은 썩은 내가 풍겼다. 로키는 간헐적으로 조금씩 숨을 들이쉬고 내쉬었다. 코끝을 아리게 만드는 악취 때문에 지금 당장 죽을 것 만 같았기 때문이었다. 로키는 살고자 몸을 비틀었다.

  

  하지만 팔과 다리가 각각 따로 묶여져 있었기에, 애벌레가 꿈틀 거리는 정도 밖에 전진하지 못했다. 로키는 그 사실에 욕지거리를 내뱉었다. 혹여나 가방에서 물건이라도 꺼낼 수 있을까 등을 벽에 밀착하자 로키는 가방이 사라져 있는 것을 깨달았다.

  정말 최악이라고 할 수 있는 상황이었다.

  로키는 그럼에도 포기하지 않고 무엇인가 날카로운 물건이 없을까 주위를 살폈다. 로키는 그의 근처로 무언가 작은 더미를 발견했다.

 

  로키는 곧 경악했다. 그것은 몇 가지 옷들과 사람의 정강이뼈와 두개골, 갈비뼈들로 만들어진 작은 더미였다. 자신을 때리고 결박시킨 무리가 한때는 인간들이었을, 저 뼈 무덤들을 만든 것일까 생각이 들자 로키는 등골이 오싹함과 동시에 절망감을 느꼈다.

  이렇게 죽는 것일까? 로키는 약한 생각이 들었지만 곧 마음을 고쳐먹었다. 절대로 이런데서 죽을 순 없었다. 포기할 수 없었다. 로키는 뼈 더미들 중에서 조금은 날카로워 보이는 부서진 조각을 보았다. 그리고 그쪽으로 천천히 몸을 굴려 기어갔다.

 

  뼈 무덤에 가까이 다가가자 살 조각 같은 것이 뼈들 사이에 붙어 있는 것이 보였다. 피가 마른지 얼마 되지 않은 것 뼈들도 있었다. 로키는 눈을 질끈 감고 입으로 부러진 뼈들 중 하나를 입으로 집어 들었다.

 

[덜그럭-]

 

  갑자기 뼈 무덤이 들썩거리며 움직였다. 로키는 입으로 뼈를 문 채 긴장된 눈으로 주변을 살폈다. 그러자 미처 보지 못했던 사람이, 뼈 무덤 뒤에 매트리스를 깔고 결박된 채 모로 누워있었다.

  로키는 혹시 자신과 같이 잡혀온 사람일까 싶어 흐릿한 시야로 그 사람이 누군지를 살펴보았다. 어쩐지 얼굴이 익숙한 느낌이 들었다.

 

  로키는 그가 누군지 알자 다시 한 번 경악하고 말았다.

 

  매트리스 위에 결박 돼있던 사람은 브루스 배너였다.

 

 

 

 

 

 

 

 

 

Act.4 재회(再會) En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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