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민] 트윈파파_w. 제철망개



5월은 어린이집 선생들에게 잔인한 계절이었다. 가정도 없는데 그놈의 가정 때문에 내가 바빠 죽을 가정의 달 5월. 어린이날을 시작으로 어버이날, 스승의 날이 이어지고 월말에는 그런 기념일에 대한 보고서 제출까지. 선생들에게는 결코 달갑지 않은 5월이 되었다.


- 최쌤. 요새 정민이랑 샐리 엄청 친하지 않아?

- ㅇㅇ 샐리가 정민이를 더 챙기는 거 같아요.

- 역시 전정민 마성의 6세.

- 저번에 기린 반 누구더라, 거기도 키 크고 시원하게 생긴 애 있잖아.

- 아, 승훈이? 걔 키만 보면 거의 초등학생이잖아요.

- 걔도 샐리한테 마음 있는 거 같던데, 샐리가 칼같이 잘라내는 거 보고 내가 피날 뻔.

- 앜ㅋㅋㅋㅋㅋㅋ 양쌤 땜에 미쳨ㅋㅋㅋㅋㅋㅋㅋㅋㅋ


정민이와 샐리는 유포리아 선생들의 눈에 보일 정도로 말랑한 사이가 되어갔다. 약간이지만 편식을 하던 정민이가 샐리와 함께 앉아 밥을 먹기 시작한 뒤부터 채소를 먹게 되었다거나 운동을 하러 갈 때 정민이가 샐리의 손을 놓지 않는 장면은 지친 선생들에게 보기 좋은 힐링이 되었다. 최선생은 그런 기분 좋은 변화를 빠짐없이 키즈노트에 기록했고 정민이의 편식이 줄었다는 소식은 정희에게도 전해졌다. 어린이날을 며칠 앞 둔 어느 날이었다.

매년 돌아오는 어린이날은 남준과 정희, 정국이 정민이를 데리고 어린이 뮤지컬을 보거나 교외로 나가 캠핑을 했지만 올해의 정국은 지민과 약속을 잡았다. 남준과 정희를 쉬게 해주고 싶기도 했고 사정이 비슷한 지민과 만나는 것이 마음이 편해진 탓도 있었다.


“정국이 어린이날 지민씨랑 어디 가기로 했다는데.”

“…정민이 데리고?”

“어, 그날 촬영 뺐대. 넷이 갈 건 가봐.”

“둘이 많이 친해졌나 보네.”




지민은 전날 저녁부터 당일 아침까지 도시락을 준비하느라 바빴다. 샐리가 잘 먹는 것과 정민이, 정국이 좋아할 것들을 함께 만들었다. 더 자도 되는데, 제 오빠를 따라 일찍 일어난 샐 리가 제 손안에 겨우 쥐어질 방울토마토의 꼭지를 따놓으면 지민이 작게 잘라 샐러드를 만들었다. 모형 과일과 장난감 칼을 가지고 소꿉놀이를 할 나이의 샐리는 오빠가 요리할 때 돕는 것을 가장 재밌어 했다.


정국과 정민이의 도시락은 정희의 할 일이 되었다. 정희는 햄을 큼지막하게 썰어 넣은 김밥을 말고 두툼한 떡갈비를 굽고 삶은 계란과 치즈가 잔뜩 들어간 샌드위치도 만들었다. 만드는 도중에 불쑥 튀어나와 자꾸만 재료를 집어 먹으려는 정민에게 으름장을 놓고 요리는 잘 할 줄도 모르면서 굳이 뭘 해보겠다는 정국을 보며 정희는 속에서 불이 났다.


“야, 이만큼 했으면 됐지, 뭘 또 해.”

“내가 할 줄 아는 게 뭐겠어. 히히.”

“…아이고, 네, 네…. 박쌤이 잘 드셨으면 좋겠네요.”


한 끼 먹을 양이라기엔 지나치게 많은 양의 도시락을 실은 정국의 차가 지민의 집 앞에 다다랐다. 정민이는 노란 원피스를 입은 샐리에게 다가가 덥석 손부터 잡았다. 정국은 하늘색 셔츠에 말갛게 웃는 지민을 보고 잠시 멍해졌다가 빨리 가자며 빽빽대는 정민이의 목소리에 정신을 차렸다. 날씨는 이보다 더 좋을 수 없었고 도착한 곳은 걱정했던 것만큼 사람이 많지 않았다. 놀이기구보다 동물을 보고 싶어 했던 정민이와 샐리는 작은 동물에게 채소를 먹이는 것을 좋아했다.


“정민아, 너 토끼 닮았어.”

“…아닌데, 나는 표범이 좋은데.”

“정민이 아빠도 토끼 닮았어.”

“응, 아빠 토끼 닮았어.”


정국과 지민은 지나가는 사람마다 젊은 아빠, 혹은 삼촌이 어린이날 봉사하러 온 거냐며 물어오는 게 퍽 고역이지만 그럴 때마다 정국은 지민과 마주보며 웃어 넘겼다. 적당한 그늘 밑에 캠핑용 간이테이블을 깔고 꺼내 보인 각자의 도시락은 그 양이 참 많기도 했다. 지민은 다 먹을 수 있을까 걱정됐지만 정국의 먹성을 보고 곧 안심됐다.


“어… 맛탕?”

“아, 제가 잘 하는 거라서요, 드셔보세요.”

“잘 먹을게요, 근데… 이거 안 떨어지는….”

“아, 그… 맛탕이 접착력이 중요해서요!!”


집으로 돌아오는 차 안에서는 지친 정민이와 샐리가 쌕쌕대는 소리를 내며 잠이 들었다. 정국은 잔잔하게 울리던 어린이 동요를 자신이 좋아하는 팝으로 바꿔 틀었다. 지민도 듣기에 좋았는지 바뀐 음악에 입꼬리가 살짝 올라갔다. 정국은 처음으로, 어중간한 저녁시간 귀가를 서두르는 차들로 꽉 들어찬 도로도 나쁘지 않다는 생각을 했다. 조금 더 신호가 길었으면, 앞차가 계속 끼어들기를 했으면, 하고 바랄 정도였다. 보내기 아쉬운 시간은 지민과 샐리를 집까지 무사히 바래다 주게 했다. 지민은 아직 잠에서 덜 깬 샐리를 안아들었다.


“감사해요. 피곤하실 텐데, 얼른 들어가세요.”

“저… 우리 다음에 또 놀아요. 애, 애들 데리고.”

“…여자친구가 삐지는 거 아니에요?”

“…에?”

“데이트, 하셔야죠.”

“어, 없는데요, 여자친구.”

“…저도요.”




*




“박쌤- 여기요.”

“안녕하셨어요, 작가님.”


지민은 오늘 정희와 협업작가로써 만날 약속을 가졌다. 정민이와 샐리를 등원시킨 후 이른 점심시간, 아파트 단지 근처에 새로 생긴 카페에서 지민과 정희는 그동안 짜놓은 스토리와 대강의 콘티를 검수할 겸, 육아에 대한 지식과 정보도 공유하기로 했다. 일에 있어 서로의 고집이 세다거나 의사소통이 잘 되지 않으면 어쩔까 고민했던 게 바보 같았을 정도로 두 사람은 일의 진행방식과 표현의 감성이 잘 맞아떨어졌다.


“샐리 덕분에 정민이 편식이 많이 줄었어요.”

“와, 잘 됐네요.”

“그 자식 카레 해주면 당근이랑 양파는 안 먹으려고 엄청 버텼는데, 요새는 작게 잘라주면 다 먹더라구요.”

“저희 샐리도 요즘 작가님 얘기 많이 해요. 정희이모 또 보고 싶다고.”

“…정말요?”

“네. 어린이날에도, 정희이모 같이 왔으면 좋은데. 했어요.”

“저… 박쌤 괜찮으시면….”

“네?”

“제가 샐리 데리고, 목욕탕 다녀와도 될까요?”

“…목욕탕요?”

“박쌤만 괜찮으시면, 한 달에 한 번 정도는 제가 데려가고 싶은데.”

“…저는 괜찮은데, 작가님 너무 귀찮게 해드리는 것 같은데요.”

“아니에요, 저 딸이랑 목욕탕 가는 거, 너무 해보고 싶은데 딸이 없어서.”

“샐리도 좋아할 거예요. 얘기 해볼게요.”

“고마워요, 박쌤.”

“아니에요, 제가 더 감사하죠.”



아이가 없는 남준과 정희는 남이 보면 조카를 맡아 키우느라 고생이 많겠다고 했지만 속사정은 그렇지 않았다. 어린 동생에게 갑작스럽게 생긴 아들이 처음에는 반가울 수 없었지만 지금은 정민이가 없었다면 어땠을까, 할 정도로 제 자식만큼의 애정을 쏟고 있었다. 아이를 원하지만, 아이가 생기지 않는 남준과 정희는 정민이를 끔찍이도 아꼈고, 비록 내 애가 아니어도 동생인 정국과 함께 정민이를 잘 키워보자는 욕심도 있었다. 그러던 와중에 나타난 샐리는 정희가 그토록 그리던 이상적인 딸아이였다. 남준과 정희는 예전부터 아이를 가진다면 딸을 가지고 싶어 했고 그런 정희에게 샐리는 자꾸만 눈이 가고, 헤어지면 보고 싶은 존재가 되었다.

집에 돌아온 정민이에게 ‘오늘 재밌었어?’ 하고 묻던 질문이, ‘오늘은 샐리랑 뭐 했어?’ 라고 바뀌게 되고, 조카에게 먹일 새로운 메뉴를 찾다보면 ‘이것도 샐리가 좋아해?’ 라고 어린 정민이에게 샐리에 대한 정보를 요구하는 일도 생겼다. 백화점에서 남준에게 입힐 셔츠를 고르다가도 샐리 또래의 여자아이 사이즈의 원피스를 보면 ‘아, 저건 샐리한테 어울리겠다.’ 하며 마치 딸이 있는 척, 키즈브랜드 매장으로 들어가서 가격을 보고 신발까지 만지작거리다가 나온 일도 있었다.



샐리는 목욕탕에 같이 가고 싶다는 정희의 소식에 긍정적이었다. 언제 가는 거냐고, 빨리 가고 싶다는 샐리를 보며 지민은 웃기만 했다. 샐리가 너무 어릴 때 떠나버린 엄마의 존재감은 샐리에게 미지의 영역이었다. 분명 나에게도 엄마가 있었지만 더 이상 볼 수 있는 존재가 아니란 것을 깨닫고 울 때도 있었지만 울어도 소용없는 일이었다. 엄마가 있으면 어떤 기분인지, 엄마와 같이 장을 보고, 엄마가 해주는 밥은 어떤 맛인지, 누릴 수가 없었기에 오빠에게 떼를 쓰지도 않았다. 오빠도 어쩔 수 없는 부분이라는 건 이미 나이에 비해 속이 깊은 샐리는 일찍이 이해하고 있었다.

그런 샐리에게 정희는 가장 엄마와 흡사한 존재로 다가왔다. 아침마다 제 머리를 능숙하게 땋아주는 오빠의 손길보다 정희는 확실히 서툴렀지만 처음 정민이의 집에서 하루 종일 놀고 집으로 돌아온 날은 정희가 어설프게 땋아준 머리를 오래도록 풀지 않았다. 잠이 들 때까지도 풀지 않았다가 아침이 되어서야 엉망이 된 머리를 아까운 듯이 풀어낸 샐리였다. 지민은 그런 샐리를 보고 정희와 샐리가 가까워지면 좋겠다고 생각하면서도 그게 혹시 민폐일까, 함부로 샐리의 상태를 정희에게 언급하지 않았다.


“나도 갈래!!! 나도!!!”

“이놈 새끼가, 다 커가지고, 어딜 같이 가!!”

“쒸… 나도오… 모격탕… 흐엉….”




*




정희가 샐리를 데리고 목욕탕을 가기로 한 토요일 아침이었다. 소식을 들은 정민이는 나라를 잃은 듯, 아침부터 본때 있게 울어재꼈다. 아니 분명히, 얼마전만해도 고모는 나를 데리고 버젓이 여탕에 갔었는데 이제 와서 안 된다니, 이 상황을 받아들이지 못하는 정민이에게는 세상 억울한 일이 아닐 수 없었다.


“아들, 목욕탕은 아빠랑 가야지, 고모랑 가는 거 아니야.”

“아 왜!! 지석이는 엄마랑 가는데!!”

“그건 지석이가 잘 못 하고 있는 거야. 다음에 다 같이 수영장 가면 되잖아.”

“…언제.”

“여름에. 더 더워지면. 그때 샐리네랑 다 같이 가자. 어?”

“…약쏙, 빨리. 여기 손가락 걸어.”



여름에는 꼭 샐리네와 함께 수영장이든 바다든 함께 가겠다는 약속을 받아 낸 정민이는 코를 훌찌럭 거리며 정희가 차려놓은 밥을 겨우 한 숟갈 욱여넣었다. 목욕탕에 같이 데려가지 않으면 밥을 먹지 않겠다고 떼를 썼지만 사실 밥에는 고기가 들어있어서 무척 먹고 싶긴 했다.






***


딸이 생기면 어떤 것을 하고싶은지 알려주신 므ㅏ므ㅏ님 감사합니다

저의 좋은 관찰대상이 되어주신 저의 조카 박쮛쮛군 코마워용


제철망개님의 창작활동을 응원하고 싶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