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건 비밀인데, 제 첫사랑이 여기 있거든요. 여러분만 아셔야 해요.’

‘백현씨라고 그러잖아. 왜 존댓말 하고 그래?’

‘네가, 좋아. 다시 만나서 좋아.’



제게 콕 틀어박힌 시선이 무엇을 뜻하는지 경수라고 모를 리가 없었다. 회장을 뒤덮던 플래시들은 웃음과 함께 사그라졌지만 웃을 수 없었다. 너 왜 그래? 직접 묻지 못해 흩어졌던 질문은 이제 뒤섞인 감정으로 어지러웠다. 너, 어쩌려고 그래. 묘하게 마주친 눈빛, 시선 끝 네가 참으로 낯설었다. 제 기억 속의 백현과는 너무도 달라서. 그래서 경수는 그대로 등을 돌렸다. 



“어.”

“왜 그러시죠?”

“하하. 긴장했나 봐요.”



제가 회장을 벗어나자마자 백현이 벌떡 일어난 듯 해보였으나 걸음을 멈추지 않았다. 조금 울고 싶어지는 기분이었다. 첫사랑. 저라고 왜 설레지 않았겠는가. 재회의 순간 다시금 품은 봄 같던 마음을. 그러나 잠시였다. 십년 전 과는 상황이 많이 달라졌으니. 대외적으로 백현과 경수는 말 한마디 건네어 보지 못한 ‘동창’ 이 맞다. 언제나 도망만 가는 제 자신이 경수는 무척 미웠다. 남들처럼 쉽게 손앞에 둔 것을 쥐었으면, 잡을 수 있는 용기가 있었으면 참으로 좋았을 것이다. 그때도, 지금도.



‘경수야, 내가 너를 아주 많이 기다렸어. 그거 알아?’

‘드디어 네 앞에 마주보고 섰어. 참 오래 걸렸다.’


“그게 이런 뜻이었나.”


벽을 등지고 선 경수의 두 눈이 감겼다. 생각의 늪에 푹 가라앉고만 싶다.




ON AIR 

[의심 . B]




[그 여름 -]



“아, 더워.”



빳빳하게 잘 다린 하복 셔츠를 펄럭인 백현이 붉은 입술 새로 담배를 물었다. 막 불을 붙이려는 찰나 제 눈앞으로 내밀어진 주먹이 아니었다면 이미 후우- 연기를 내뿜고 있었을 것이다. 방해받은 기분에 눈썹을 찡그린 백현이 주먹을 잡아 내리며 옆을 돌아보았다. [도경수] 습관적으로 훑은 명찰. 단정한 얼굴에 꽤 잘 어울리는 이름이라고 생각하며 입술이 슬며시 벌어지는 순간 잡힌 손 안으로 바스락 거리는 것을 한 주먹 내려놓더니 아슬하게 걸린 담배를 재빨리 앗아간다.


손 안을 물끄러미 살펴보니 새하얀 박하사탕이었다. 제게서 담배를 앗아간 녀석은 뻔뻔스럽게도 고개를 갸웃이며 담배를 제 주머니 속으로 홀랑 넣어버린다. 어이없어진 백현이 ‘뭐야.’ 낮게 뱉자 경수가 손을 들어 흔들었다.



“안녕. 나 너랑 같은 반 도경수.”

“...그걸 물은 게..”

“뭐냐고 물었잖아. 아니야?”



참, 그거 나 먹으려고 챙겨 둔 거니까 버리지 말고 꼭 너 먹어.

웃어 보인 경수가 그대로 기지개를 쭉 켰다. 그런 경수의 입 안으로 봉지를 깐 사탕을 하나 집어넣은 백현이 손바닥을 펴 경수에게 내밀었다. 



“줘.”

“뭘?”

“네가 뺏어간 거.”

“난 너한테 뺏어 간 게 없는데?”

“뭐?”

“사탕이랑 바꿨잖아.”



내가 박하사탕 중에 얘를 제일 좋아해. 얘는 맵기만 한 게 아니라 달잖아.

입 안에서 사탕을 굴리며 난간 앞에 선 경수가 말했다. 허. 백현은 계속해 제 어이가 달아나려는 것을 간신히 참아냈다.



“너, 나 몰라?”

“....혹시 너도 연예인 병 걸린 거야?”

“뭐?”

“아님 말고.”



밉지 않게 혀를 쏙 빼며 낮게 웃는다. 으쓱거린 어깨가 눈을 깜박이며 바람을 맞는 모양새가 퍽 자연스러워 보였다.



“자주오나 봐? 너 공부 안 하지.”

“내가 너야?”

“...야.”

“야 아니고 도경수.”


난간에서 몸을 떼며 제 앞에 선 경수에게 청량한 박하향도, 사탕의 단내도 나는 것 같아서 백현은 제 손에 남은 사탕을 입에 까 넣어 굴렸다. 어쩐지 큰 눈이 더 커진 채 반짝이는 듯 대답을 종용하는 것 같아서 느릿하게 눈을 깜박인 백현이 고개를 돌리며 더듬었다.


“마..맛있네.”

“그치?”

“....생각해보니 아닌 것 같기도 하고.”

“야.”

“야 아니고 변백현.”

“와, 너 나 따라해?”

“아니거든.”


마주보며 키득거리곤 입 안의 사탕을 깨물었다. 첫 만남이었다. 



*



잠시 눈을 감았을 뿐인데 기억 속 아득한 그 여름이 떠올라서 경수는 입술을 깨물었다. 가깝지도 멀지도 않았던 어중간한 사이. 그 무엇도 무섭지 않던 햇살 같은 시간. 잡히지 않아 조각나버린 파편들이 퍼즐처럼 꼭 들어맞았다. 모른 척 하고 싶었는데, 몰랐으면 했는데. 기어코 새어나와 한 번 깨어버린 감정은 쿵쿵, 다시금 심장을 뛰게 했다.


“망했어.”


아직도 네가 너무 좋잖아.

발갛게 변한 귀 끝을 감추지도 못하고 어쩌지 못한 표정을 한 채 으아- 아무 소리나 뱉어낸 경수가 손바닥에 제 얼굴을 푹, 감추었다. 도망가고 싶어.



*



매번 밀어놓고 애써 부정하던 것을 인정하고 나니 백현의 행동 하나하나가 크게 다가와서 경수는 부쩍 백현을 피해 다니고 있었다. 물론 제가 피한다고 피할 수 있는 것은 아니었지만 있는 힘껏 최선을 다해 촬영장을 요리조리 숨어 다녔다. 소품을 정리하다가도 반대편에서 백현의 목소리가 들리면 괜히 세트 점검을 핑계로 자리를 뜨기도 하고 배우들에게 대본을 나누어 줄 때에도 백현의 것은 매니저를 통해 전달했다. 이에 백현이 심통 난 것은 두 말 할 것도 없어서, 말 없는 숨바꼭질이 시작되었다.



“그럼 이것도 사적인 친분일까.”



문득 제 자리에 의문이 일었다. 작게 피어난 의심이 스멀스멀 크기를 더해간다. 갑작스런 이적, 국장님의 제안, 제가 있어도 그만 없어도 그만. 명확하지 않은 포지션의 연출도 작가도 아니지만 막내작가가 된 도경수. 좀 이상하잖아. 아무리 그래도 스텝 뽑는데 입김이 그렇게 크게 작용도 하나? 



“자의식 과잉.. 도경수 자의식 과잉..”



큰 동작으로 고개를 도리 저어도 뭉게뭉게 생각이 멈추지 않는다. 타이밍이 너무 이상했으니까. 제 앞에 백현이 나타난 것도, 제가 연도 없는 드라마국에 들어 온 것도 전부 다. 왜 이제껏 제대로 의심해보지 않았을까 하는 그런 마음이 경수에게 물보라를 일으킨다. 



“정말.”

“여기서 뭐해.”

“..어?”


멍하니 생각에 빠졌던 경수가 들려온 목소리에 화들짝 놀라 뒤를 돌았다. 일순 날이 선 듯 한 눈빛을 보인 백현이 시선을 갈무리하곤 발치로 다가온다. 신경이 곤두서있는지 자꾸만 날카로워지려해서 잔뜩 예민해진 백현이 제 머리칼을 헝클었다. 제작 발표회 이후 제대로 된 마주봄이었다. 어찌나 보기 힘들던지. 자그마하니 동그란 머리가 시야에 잡힐 법하면 쏙 사라지고 손을 뻗을 거리에 있는가 하다가도 쓱 사라져서 잔뜩 골이 나 있는 중이었다.


“백현아.”

“많이 바빠? 누가 너 괴롭혀? 일 많이 시켜?”

“아냐. 그런 거.”

“그럼..”


그럼 왜 이렇게 촬영장에서 보기가 힘들어.

나오려는 물음을 꾹 삼켰다. 지금도 손 안에 쥘 수가 없는데 자꾸 도망가게 하면 어떡해. 이번에야말로 치고 나갈 자신이 있었는데, 그 날 성급했던 제 발언에 회장을 벗어나는 경수를 보고 백현은 경수가 퍽 부담스러워 하는 것 같았다. 떨어져 있던 시간이 길었던 만큼 그 간격을 빨리 줄이고 싶었던 건데, 경수에게는 버거웠던 걸까. 제 속도가. 어렵네. 괜히 서러워지려고 해서 입술을 꾹 깨물곤 부러 밝게 웃는다.



“안 피곤해? 밥은, 밥은 먹었어?”

“응, 괜찮아.”

“경수야 셔츠 카라 뒤집어졌다. 잠시만.”



한 번 마주치고 나니 혹여 또다시 놓칠 새라 누가 배우인지 모를 만큼 백현은 촬영 중 잠시의 쉴 틈이 생기면 곧장 경수를 찾아 시선을 돌리며 졸졸졸 따라다니기 바빴다. 집요하게 따라붙는 시선도, 제 메이크업을 수정해야한다 코디가 따라 붙어도 상관없다는 듯 경수의 뒤를 쫓았다. 몇 번 이 같은 일이 반복될 무렵 앞서가던 경수의 걸음이 우뚝 멈춰 서자 ‘조금 쉬자고 할까? 경수야 좀 덥지?’ ‘끝나고 밥 먹을래?’ 좀 전까지 재잘거리던 말을 멈추었다.



“왜 그래? 어디 불편해?”


정말 몰라서 물어보는 걸까.

경수의 표정이 삽시간에 굳어졌다. 몸을 돌려 똑바로 백현을 바라본다.



“너, 너 때문이잖아.”

“...내가 뭐 잘못했어..? 기분 상하게 한 거야?”


난 정말 아무것도 몰라요. 의 눈빛을 쏘아 보내는 백현을 바라보니 한마디 하려던 경수의 맥이 탁 풀려버렸다. 네가 졸졸 쫓아다니는 바람에 집중된 집중되며 따라붙는 스텝들의 시선이나 제발 수정 메이크업 좀 받게 해주세요. 눈빛을 보내는 코디가 보이지 않니. 땅이 푹 꺼질 정도로 큰 한숨을 내쉰다.



“백현아. 나 좀 가만히 나둬.”

“...어?”

“동정도 하지 말고, 챙기려고 하지도 말고 그냥 혼자 생각 좀 하게 해 줘.”



다 좋았다. 드림팀이라는 이 드라마에 모두들 천금 같은 기회라며 제 등을 밀었을 때에도, 모르는 분야라 새롭게 배워가는 기쁨도, 눈앞의 이 말간 톱스타의 얼굴도. 그런데 못내 마음에 걸리는 것들이 한 두가지가 아니었다. 지난 일로부터 경수를 덮쳐오는 새카만 감정의 늪 같은 것이 꼭 그랬다. 아무래도 답은 백현에게 있는 것 같았다. 필시 백현과 저의 이런 모습들이 부담스러운 작용을 하고 있는 것이리라. 경수는 상상의 나래를 펼쳤다. 모든 상황은 구태여 경수의 괜한 걱정에서 비롯된 것이었음에도 서로의 직업에 관해 진정한 대화를 해 본적이 도통 없으니 사소한 오해가 쌓이고 쌓여가는 것이겠지. 꾹 다문 입을 다시금 열 생각이 없어 보이는 경수를 보며 백현 또한 이 상황을 인지하지 못해 어렵기는 매 한가지였다.



“내가 널 왜 동정해? 무슨 소리 하는 거야.”

“내 힘으로 천천히 자리 잡고 싶어. 네 도움 아니었으면 해.”

“그러니까 알아듣게 이야기 해.”

“주변 돌아 본 적 있어? 다 날 어떻게 보고 있는 것 같아?”


백현이 눈을 깜박인다.

변백현 친구. 동창. 운 좋아 합류한 친구 잘 문 케이스.


“도경수.”


백현의 말문이 턱 막혔다. 뭐든 붙여 달라고, 제게 달라도 생떼를 부리려고 했지만 제작진의 영역은 손 댈 수 없다며 매니저 형에게 쓴 소리 잔뜩 듣지 않았던가. 말을 꺼내어 볼 새도 없이 온전히 제 능력으로 얻게 된 자리라는 걸 설마 경수는 모르는 걸까. 그러니까 애초에 경수의 합류는 제가 간절히 바랐음은 부정할 수 없으나 이미 경수의 힘으로 차지해 끝난 얘기나 마찬가지였던 거다. 도대체 어디서 이렇게 깜찍한 오해를 하기 시작 한 거지. 합류가 절차 없이 너무도 빠르게 이루어졌나. 경수가 이렇게 오해 할 일이 아닌데.



“그런 거 아니야. 네가 잘못 알고 있..”

“그냥 지금은 너 안 보고 싶어. 그래도 될까.”


지쳐 보이는 표정이, 돌아 선 등이 너무 시렸다.

안 그래도 제게 마음이 활짝 열린 상태가 아닐텐데, 귀도 닫고 맘도 꼭꼭 걸어 잠궈 버릴까봐 겁이 났다. 붙잡으라고 섣부른 오해가 더욱 커지기 전에 설명하고 설득하라고 마음은 아우성인데 제게 그럴 자격이 있는 것인가 머릿속에서 경각심이 울리자 백현은 그 자리에 멈춰 한 발자국도 움직일 수 없었다.




*



“컷, 잠깐 쉬었다 다시 가시죠.”



잔뜩 구겨진 표정으로 찬열이 제작진과 배우들을 향해 말했다. 짧은 휴식 후 복귀한 백현이 중요한 장면을 앞두고 연달아 NG가 난 덕분에 심기가 불편한 까닭이었다.



“야. 너 충분히 쉬지 않았어? 왜 안하던 짓을 해?”

“..몰라.”

“뭐야. 왜 이래. 얼른 끝내고 집에 좀 가자 변백현아. 평소에는 칼퇴를 그렇게 외치면서 지금 몇 번째냐. 대사 실수 자꾸 내고. 붕어냐 네가?”

“박PD야.”

“뭐.”

“지금 이 부분 말이야.”

“그래, 단독 몇 분이나 잡아먹는 네 절절한 고백 신.”

“대사를 좀 바꾸면 우리 김작가, 종대가 내 머리채를 잡을까.”

“...네가 어떻게 맘에 들게 하느냐에 따라 다르겠지.”



잠시 찬열의 앞에서 호흡을 가다듬던 백현이 제 뺨을 톡톡 두드렸다. 입술을 자꾸 깨물어대니 코디가 상처난다 말리는 통에 입 안을 잘근거린 통에 볼 안으로 감각이 예민하게 섰다. 볼을 한 번 더 잘근거리며 마음을 가다듬었다. 찬열이 잘해보자는 듯 백현의 등을 천천히 토닥였고 슬레이트 소리와 함께 이내 촬영은 다시 시작되었다. 


앞서 NG를 낼 때에는 쉼 없이 흔들리던 백현의 눈동자가 흔들림 없는 시선으로 진득하니 짙어졌으며 그에 주변의 모든 소음마저 멎은 듯 조용해졌다. 백현의 시선은 모두를 아우르며 분위기를 장악하는 힘이 있었다. 제게 여럿 향하는 카메라 앵글을 미묘하게 피하며 저 멀리 민석의 곁에서 자신을 바라보는 경수를 향해 눈을 맞춘 백현의 입이 열렸다. 쥐 죽은 듯 조용한 촬영장에서 상대배우에게 대사를 치는 백현의 목소리만이 울려 퍼진다.


“어떤 말이 더 필요할까. 지금 내가 네게 무슨 말을 더 하겠어. 변명은 부질없는 걸.”


긴 대사의 서두였다. 텀을 두고 숨을 고른다.


“너와 행복할 수 있는 운명인지 아닌지 그건 내가 모른다면 너도 알 수 없잖아. 다만 이제껏 너를 마음에 품은 것이 가장 가치 있는 행복이라는 걸 잘 알아.”


이어지는 대사에 스텝들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손에 쥔 대본엔 분명 ‘그러니 이제 그만 내게 와 줘.’ 명확한 사랑고백이어야 했다. 그러나 백현의 입에서 나온 것은 조금 달랐다. 언뜻 보면 지나치게 절절한 사랑고백인 듯 해 보였다. 속내는 처절한 애원에 가깝다.


“모든 순간에 감사하고 있어. 네가 날 싫어하게 될가봐 미친 듯이 불안하고 초조해. 이제야 네 앞에 마주 선 나를 제발 버리지 마.”


[미소 지으며.]

옅은 미소만을 지을 것을 지시한 지문이었으나 백현의 뺨 위로 떨어지는 눈물과 함께 부서질 듯한 미소가 걸렸다. 시선은 여전히 경수의 두 눈을 향한 채였다. 허공에서 부딪힌 눈빛을 피할 수도 없어서 경수는 손에 들린 대본만 꾹 쥐었다. 


나 버리지 마. 도경수.


제게 하는 말이었다.




잠기고 싶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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