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을 거야. 이번에야말로.


리히는 입에서 단 맛을 느꼈다. 턱끝까지 차오른 숨에 부족한 산소는 머리 쓰는 것을 방해했다. 자꾸만 꺾이는 무릎을 바로 세우며 걸어나갔으나, 등 뒤에서 들리는 개 짖는 소리는 시시각각 가까워 지는 듯 했다. 피냄새를 쫓도록 훈련받은 군견들은 그 어떤 추적장치보다 효율이 좋았다. 사람 키 만큼 자란 들풀을 헤치고 나아가면서, 리히는 극한의 공포를 느꼈다. 안개가 짙은 와중 하늘 높이 달이 떠 이정표가 되어 주었다. 서쪽으로. 서쪽으로. 국경선만 넘으면 비무장지대가 나온다. 거기까지 닿을 수만 있다면. 그녀는 도망길에 올라 있었다. 빈사의 쌍둥이 자매를 등에 업고.


들판에는 늪의 썩은 내, 알 수 없는 비린 향기, 축축한 안개 냄새가 났다. 늪에서 풍겨오는 유황냄새가 군견들의 추격을 방해했다. 축 늘어진 라이를 추슬러 올리며, 리히는 볼을 타고 줄줄 흐르는 눈물을 차마 닦을 생각도 못한 채 걸어 나갔다. 훈련된 군견에게 잡히면 그대로 끝이야. 훈련소에서 선배들이 겁주며 하는 말은, 이후 정식 군인이 된 뒤 국경 순찰 업무에서 발견한 물어뜯긴 사체를 통해 여실히 증명되었다. 리히가 잡히면, 그 시체와 똑같은 꼴이 될 것이 분명했다. 등에 업은 라이까지도. 땀은 비 오듯 나고, 입은 바짝바짝 마르는데, 수통이라고는 리히의 허리에 맨 가죽부대가 전부였다. 그마저도 양손 다 라이를 들처 업는 데 써서 남는 손이 없었다. 라이는 리히가 들썩일 때마다 간간히 입 사이로 신음을 내뱉을 뿐, 영 힘을 주지 못해 리히의 등에 매달려 있는 것조차 하지 못하였다. 축 늘어진 사람을 어떻게든 추슬러, 리히는 축축한 바닥에서 억지로 발을 뗀다. 왜 이런 꼴이 된 걸까? 앞만 보고 나아가야 함에도 그는 끊임 없이 상념에 빠져든다.

-

라이가 연락이 되지 않은지 보름.  발을 동동 구르던 리히에게 치안부는 묵묵 부답이었다. 직장에서 잡혀간 언니는 우습게도 치안부 가장 안쪽의 기밀을 다루는 정보부 상급직이었다. 유일한 가족이라는 이유로 군부대에서 근무하던 리히 역시 연행되어, 3일을 연장 조사 받고 풀려났음에도, 리히는 무엇이 어떻게 돌아가는 지 알 수가 없었다. 라이가 타국에 기밀을 팔았다고 했다. 하! 리히가 제 쥐꼬리만한 월급에 맹세하길, 라이는 타국에 기밀을 팔아 넘길 바에는 스스로 혀 깨물고 죽어버릴 것이다. 그러나 군사국가에서, 특히 대규모의 혁명이 겨우 한 세대 전에 일어나 여전히 뒤숭숭한 국가 분위기에, 나라의 배신자 낙인은 너무나 치명적이었다. 리히는 어느순간부터 라이의 사형소식을 기다렸다. 그 소식이라도 듣고 싶었다. 

보름째 되던 날 밤, 리히의 집에 들이닥친 것은 리히의 직속 부하였던 이었다. 무뚝뚝하나 제법 좋은 사람으로, 리히 역시 몇 번 본적 있는 이었다. 그는 부숴져라 문을 두드려 뜬눈으로 밤을 새우던 리히를 일으키고, 집안으로 밀고 들어와 그의 손에  USB와, 리베르탈리아의 돈뭉치가 든 손가방과, 리볼버 한 자루를 쥐어주고는, 다음날 자정, 집 앞으로 오는 트럭에 올라타라고 속삭이고는, 도망치듯 떠났다. 인터넷을 끊고 연결한 USB 속에는 리베르탈리아와 관련된 몇 가지 기밀 정보와, 그 직속 부하, 리오나의 짧은 메세지가 들어있었다. 라이가 기관 내에서 정치적으로 실각했고, 조만간 연좌제가 적용되어 그의 모든 친인척에 대한 체포와 일괄적인 사형이 집행될 거라고. 라이의 친인척은 리히 뿐이었다. 리베르탈리아로 망명하십시오. 메세지는 이렇게 끝났다.

리베르탈리아, 실패한 혁명자들의 땅. 공국의 썩은 부분을 도려내려던 이들은 우습게도 힘을 얻기 위해 마피아들과 손을 잡았으며, 일부 지역의 독립을 일궈냈다. 그러나 일장춘몽에 불과한 임시정부는 툭 친 도미노처럼 무너져 내려 마피아들에게 점령당하고, 그 땅을 지옥으로 변신시켰다. 치외법권이 된 리베르탈리아를 공국은 자치권을 보장하고 주변을 봉쇄해버렸다. 공국민은 그 땅에 대한 정보를 가진 것 만으로도 정보부에 잡혀간다는 것이 공공연한 사실이었다. USB를 받아든 리히의 운명은 그렇게 정해졌다. 리히는 컴퓨터 본체와  USB를 락스 담근 물에 통채로 밀어 넣고, 짐을 쌌다.

약속된 날 밤, 트럭 짐칸에 올라탄 리히가 발견한 것은 이불에 둘둘 말린 사람 시체였다. 아니, 사람 시체라고 생각한 것은 자신의 자매였다. 깡말라 안그래도 뼈 밖에 없는 사람이, 붓고 시퍼렇게 멍이 들어 망신창이가 되어 있었다.  가장 상태가 심각한 것은 그녀의 손이었다. 손톱이 있는 손가락이 하나도 없었다. 오른 손 검지 손가락에는 피고름이 잔뜩 묻은 붕대가 둘러져 있었다. 리히는 차마 이를 풀어볼 엄두도 내지 못했다. 영락 없이 죽은 줄 알았던 라이는 트럭이 출발하는 충격에 작게 신음을 내었다. 


"언니, 언니, "


울먹이는 목소리로 라이를 재촉한다. 몸을 흔들어 깨우고 싶어도 그 어디에도 손을 댈 수 없어, 리히는 몸을 낮춰 피비린내가 나는 제 자매의, 귓가에 속삭인다. 라이는 정신이 깨어나지 않은 것 같았다. 작은 신음을 끝으로 그녀는 다시 조용해진다. 대신, 트럭 운전석 쪽에서 목소리가 들려왔다.


"아직 약에서 못 깼을 거야. 그레타의 자백제는 효과가 좋은데, 지독하게도 한 마디도 안했다더라."

"자, 자백제요? 그거 그냥 마약 아닌가요? 아니, 누구야? 누구시죠?"

"누구인지 모르는 편이 나에게 안전하니 알려주지 않을거야. 비무장지대와 가장 가까운 도로에서 내려줄게. 거기서부터는 알아서 가야 해."

"알아서? 어떡해요? 거기로 가면 다 죽는댔어요."

"지금 여기에 있어도 죽어. 적어도 라이선배, 아니 네 자매는 무조건 죽을 거고. 사실 지금도 그닥 살 것 같진 않다만. 약에서는 깰 수 있으려나 모르겠다. 차라리 편하게 가라고 치사량만큼 재서 넘겨줬는데..."


목소리는 젊은 여성, 묘하게 억양이 외국인 같은 운전자는 알 수 없는 말을 중얼거리고는 이내 운전에 집중했다. 그는 정말로 한 도로 가에 트럭을 세우더니 리히와 그가 챙긴 짐을 끌어내리고는, 라이가 들어간 이불 뭉치까지 길바닥에 내려놓고 그대로 떠났다. 망연히 트럭의 전조등이 멀어지는 것을 바라보던 리히는 퍼뜩 정신이 든 사람 처럼 허겁지겁 모든 것을 챙겨 도로 옆 갈대 밭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이틀 째, 리히는 한 때 1차 방어선이었던 곳을 지나다 시야 저 멀리서 한 인영을 보았다. 바로 몸을 낮추었으나, 발각 된 것이 틀림 없었다. 국경 순찰대라는 것은 2시간도 지나지 않아 사방에서 들리는 사이렌 소리와 개 짖는 소리를 통해 알 수 있었다. 라이는 아직도 정신을 못차리고 그에게 업혀 있었다. 신조차 자신을 버린 것 같았다.


영원히 끝나지 않을 것 같던 도망길에도 끝이 보였다. 리히는 마침내 2m 정도 되는 철조망 앞에 마주섰다. 숨이 차올라 리히는 철조망에 이마를 기대로 잠시 그대로 섰다. 당장 이 곳만 넘으면 일차적인 위험은 뒤로 할 수 있다. 이 너머는 공영이었다. 국경수비대가 저 너머 까지는 따라 붙지 않으리라.  리히는 라이를 바닥에 잠시 내려두었다. 빈 등판에 찬 바람이 스며들어, 자신의 등이 땀으로 젖어 있었음을 느끼게 해주었다. 멀쩡한 곳이 없는 라이의 몸은 파랗게 질려, 형형하게 뜨고 있는 눈과 마주치지 못했다면 영락없이 시체라고 생각했을 것 같았다. 깼구나. 다시금 눈에 눈물이 차오르는 것을 필사적으로 참고 리히는 라이를 향해 실 없이 웃었다. 

지척에서 짐승 소리와, 기계 마찰음이 들렸다. 저 멀리서 지뢰 터지는 소리가 났다. 철조망에 닿고 나서야, 리히는 자신이 건너온 곳이 한 때 전장의 한복판이었으며, 아직까지도 불발탄과 묻어둔 지뢰들이 가득한 러시안룰렛과도 같은 땅이었음을 깨닳았다. 그러나 그것을 지금 아는 것은 이 철조망을 넘는데 도움이 되지 않는다. 

그녀는 손바닥에 붕대만 칭칭 감아둔 맨손으로, 녹슨 철조망을 잡고 어떻게든 틈을 벌리려 애를 썼다. 오래된 국경선 중간중간 끊김이 있는 낡은 철조망은 지친 리히의 손에도 조금씩 조금씩 사람 하나 지나갈 만큼의 틈이 벌어진다. 그러나 제 발로 걸을 수 없는 라이를  데리고 나가려면 이 보다는 좀 더 커야 한다. 고리 하나가 걸려 영 끊어지질 않는데, 사방에서는 개 짖는 소리가 났다. 백 미터도 떨어지지 않은 곳까지 추적이 따라잡은 것이 틀림 없었다. 덜덜 떨리는 손으로 리히는 어떻게든 자신과 제 자매가 도망갈 길을 넓히려 애를 썼다. 


철컥, 총의 안전장치 풀리는 소리가 났다. 리히는 애쓰던 손을 멈추었다. 그들이 가진 총이라고는 라이의 직속 부하가 준 리볼버 뿐이었다. 라이의 손목에 묶어둔. 


나를 죽일 거야.


 리히는 차마 뒤를 돌아보지 못하고, 생각한다. 

우리는 살아 남지 못할 거야. 곧 군견에게 물어 뜯기겠지? 철조망 너머의 비무장 지대에 지뢰가 없겠어? 운 좋게 살아 남아도 다시 공국으로 끌려가 고문 당하다 교수형 당해 광장에 효수되리라. 도착한다고 살아갈 수 있을까? 실패한 혁명자들의 땅에서? 공국에서 그 나라에 대해 배운 것이라곤 무법지대의 마피아 소굴이라는 것 뿐이었다. 라이는, 라이는 그곳에 도착할 때까지 살아남을 수 있을까? 차라리 이럴 바에는 죽어버리는 게, 총에 맞아 죽는 게 제일 낫지 않나? 라이는 나를 먼저 쏘겠지? 리볼버에 총알은 충분히 있던가? 라이가 날 쏘고, 자살할 힘이 남아 있을까? 


그러나 총 쏘는 소리는 들려오지 않았다. 개 짖는 소리가 멀어진다.  아까 지뢰가 터진 곳으로 향한 것 같았다. 무슨 힘인지 몰라도, 리히는 다시 팔에 힘을 줘 철조망을 기어코 뜯어내고 말았다. 그는 다시 허겁지겁 축 늘어진 라이를 안아들고, 국경을 넘어 비무장지대에 발을 들였다.  


"라이, 라이 깼어? 정말 깬거야?"

"리히..."


속삭이듯 나온 목소리는 너무 작아서, 리히는 잠시 환청이 아닐까 의심한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금 상황에서 아이러니한 안도감이 그의 가슴에 차올랐다. 국경을 넘고, 추격 조를 따돌릴 수 있을 거라는 사실보다, 라이가 깨어난 것이 그에게는 더 와 닿는다. 살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희망. 어찌되었든. 혼자가 아니지 않은가. 

여전히 짙은 안개 속에서, 이제는 여명이 밝아 오는 듯 주변의 시커먼 어둠이 조금씩 선명하게 바뀌어 갔다. 


------------------------------


얘네 둘이 어쩌다 리베르탈리아로 오게 되었는가에 대한 이야기임.. 

해석...! 은 별거 없으. 

아테나에게 토사구팽 당한 라이가 취조실로 끌려갔고, 리오나의 도움을 받아 탈출했으며,

트럭 운전사는 나타샤임. 원래는 라이 밑에서 일하는 상태였고, 

고문실에 직접 들어가진 않았지만 물건을 준비하고 약을 재는 일을 하는 일종의 약사..? 자백제 관리하는 사람임. 그레타는 리베르탈리아의 마약소굴 걔 입니다. 라이가 차라리 죽는게 나을 것 같아 약을 치사량으로 준비해 넣었는데 라이가 살았고, 리오나가 끄집어 내는 걸 눈 감아주고 조금 도와 주기 까지 함. 아마 리오나도 나타샤도 라이가 복수하러 돌아오기 전에 다 죽었을 겁니다.. 아테나가 가만 둘리 없음.


리히 중심 서술이라 리히가 멋대로 생각하고, 극한의 상황에서 좀 극단적으로 생각한 게 맞음. 그렇게 보였음 좋겠고, 사실 리히 혼자 도망치는게 제일 좋은 선택인데, 리히는 애초에 라이를 버린다는 생각 자체를 못함. 어떻게든 아득바득 라이를 끌고 왔고, 그건 혼자되기 싫은 마음이 정말 커서 그랬을 것 같애. 어쨌든.. 네.. 그렇습니다.. 사랑합니다. 재밌었다!


망사랑만 보면 사족을 못쓰는 사람. 댓글 피드백 항상 감사합니다.

이쿠냑님의 창작활동을 응원하고 싶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