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0편 이후의 특별 외전

*1~2편을 묶었습니다! 




§


권 교수는 며칠 전 부터 기분이 좋지 않았다. 아끼지는 않지만 그래도 꽤나 전도유망할지도 모르는 한 제자에게 실전을 보여준다고 사고로 인해 오른팔을 잘 쓰지 못해 퇴직한 유망주, 옛 후배 이현의 사적인 업무에 투입시켰는데, 사흘이 넘도록 아무런 답이 없었다.

실종 사건에 대한 조사라 외지인인 제자는 타깃 될 확률이 적었고. 현 후배는 그 팔을 제외하고 몸 관리를 착실히 하고 있었다. 실질적인 범인을 눈앞에서 보는 것이 아닌 이상, 그냥 간단하게 실전 분위기가 어떤지 알아보라고 보내놓은 건데 답도 없고, 현 후배의 전화도 답이 없었다. 뭐가 꼬여도 잘못 꼬였다는 뜻이었다.

그래도 분명 무슨 사건이 터져서 경찰이 출동했다면 자신에게 바로 연락이 왔을 터인데 그거까진 아니고……. 불안을 감추려 권 교수는 자기합리화를 시작했다. 현 후배는 뭔가 하나, 꼬리를 제대로 잡았다 싶으면 아닌 척 하면서 끝까지 물고 늘어졌으니까. 사건의 실마리를 잡아서 그런 게 아닐까? 물론 그 환상은 일주일 뒤에 와르르 무너졌다.

김상화는 종강 직전에 나타난 이변을 보고는 눈동자를 이리저리 굴리고 있었다. 자신의 일은 아니지만 분위기가 이렇게 이상하게 흘러가는 건 자신에게도 불안을 일으키기 쉬웠다. 다만 그것이 자신에게 직접적으로 타격이 오지 않을 거라는 예감 덕에 막 잠이 안 올 정도로 불안정한 건 아니었다.

무슨 학교가 장례식장도 아니고 머리부터 발끝까지 시꺼멓게 입고 온 남자가 학교에 등장했다. 안 그래도 무표정이면 인상이 꽤나 험악한데, 밝은 인상은커녕, 누구 죽일 듯이 성큼성큼 걷는 폼이며, 잔뜩 날이 선 눈썹과 눈 하며. 온 경찰행정과 학생들이 그 기세에 눌려 눈조차 마주치지 못했다.

다만 상화는 학과의 근로 장학 학생이었고, 자신의 담당 교수가 권 교수였다는 점이 가장 큰 문제였다. 그 이현이란 남자는 권 교수의 손님이다. 씁. 다과를 준비하면서 상화는 작게 욕을 읊조렸다. 이럴 줄 알았으면 오늘 치과 간다고 뻥칠걸.

잠깐 보기만 했는데도 생기라고 해야 할 지, 살기라고 해야 할 지, 아니면 상실감이라 해야 할지 모르는 저 분위기가 담긴 무표정은 날카롭고 깔끔하게 잘 생긴 얼굴을 인지 못하게 막고 있었다. 그래, 잘 생기긴 했는데. 했는데……. 장신도 장신이거니와 엘리트 경찰 출신이라는 그 튼튼한 몸이 주는 위압감에 상화는 바로 뒤에 호랑이가 있는 토끼마냥 속수무책으로 도망치고 싶었다. 물론 그런 생각은 상화만 하는 게 아니었는지, 체력과 완력 하나는 날고 긴다는 경찰행정과 남학생들도 쪽을 못 쓰고 슬금슬금 피하며 웅성거리고 있었다.


“서아는 저걸 어떻게 견딘 거야?”

“돈 주니까 견디는 거 아니겠어?”


저게 돈 준다고 견딜 수 있는 사람인가? 신서아, 배짱 하나는 두둑하다. 상화는 창밖으로 움직이는 이현을 보고 신서아가 말 한 그 사람이 맞는 지 고민했다. 몇 번이고 상기하는 거지만, 저 사람 경찰 안 했으면 경찰이랑 척 지는 직업 했을 거 같다는 둘 사이의 중론이었다. 상화와 서아의 친구, 하윤은 따뜻한 커피를 마시며 어깨를 으쓱이곤 상화의 등을 두들겼다.

눈 마주치기 전에 빠르게 테이블 세팅만 하고 도망치자, 상화는 그리 생각하며 후다닥 권 교수의 연구실 문을 두들겼다. 아, 느림보 교수님, 빨리 답해라. 물론 그 염원은 이현이 먼저 도착하면서 깨졌다.


“경찰행정과 학생인가요?”

“예? 네, 네!”

“여기 권 교수님 연구실 맞죠?”

“아, 아. 네……. 그, 이현……. 오신다는 말씀 들었는데, 그 잠시만 기다려 주세요!”


그제야 문 너머에서 들어오라는 권 교수의 목소리가 들렸기에, 상화는 서둘러 들어갔다. 조금만 대화 하는데도 저 시꺼먼 옷을 두른 남자의 옆에 있고 싶지 않았다. 신서아 이 미친놈, 진짜 어떻게 저런 사람을 형이라고 부르고 막 그러는 거야? 정치 한번 하면 죽여줄 듯. 후다닥 다과를 테이블 위에 올리고 나가자 이현이 그녀를 보고 있었다.


“신서아 학생 아나요?”

“네? 네. 친구인데요…….”


그는 오른손에 들고 있던, 김이 따듯하게 오르는 종이컵 음료 하나를 상화가 들고 있던 쟁반 위에 올렸다. 문고리를 턱 잡고는 짧게 말했다.


“마셔요. 뭐 안탔어요. 요 앞 카페에서 파는 핫초코에요.”

“네?”

“서아가 신세 좀 지겠대요.”


잘 부탁해요. 상화는 저 남자가 미묘하게 자신에게 미소 지었다는 것을 알아채지 못하고 홀연히 연구실로 들어가는 이현에게 아무런 말도 하지 못했다. 혼란스러운 머리를 뒤로 하고 상화는 과사무실로 돌아왔다. 조교는 쟁반 위에 든 핫초코를 보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차리라는 다과는 안 차리고 커피 사왔어?”

“아, 아뇨. 그, 이현이라는 사람이 줬어요. 서아 친구라면서.”

“서아? 입원해서 그런가. 그거 때문에 온 거 같은데.”

“네?”


그 천하의 신서아가 입원을? 그 전에 자신이 이 소식을 왜 여기서 듣는가? 친구라면 조교보다 더 먼저 소식 들어야 하는 거 아닌가? 상화는 얼어붙어서 한참 과사무실에 서 있었다. 조교는 충격 받은 상화를 보며 자신이 혀를 잘못 놀렸다는 걸 알아채고 서둘러 상화의 짐을 챙겨 그녀의 손에 달아줬다. 오늘은 일찍 가라며.

등 떠밀리며 과사무실에서 내쫓긴 상화는 어리둥절한 얼굴로 털레털레 학관을 나왔다. 건강한 몸 빼면 시체인 신서아가 입원해? 뭔 일로? 그녀는 주머니를 뒤져 휴대전화로 그녀의 전화번호를 찾아 전화했다. 이런 일 있으면 연락 좀 해 달라고, 그러려고 했는데. 막상 전화를 받은 상대가 신서아가 아니었다.


“야, 신서아!”

“신서아 아닙니다. 무슨 일이신지요?”

“앗, 서아 휴대폰 아니에요?”

“서아씨는 지금 안정을 취해야 해서. 대신 받았습니다. 용건 있으십니까?”

“아……. 서아 친구인데요. 안부 전해주세요.”


그렇지, 입원했다면 안정을 취해야지. 상화는 버럭 전화를 건 자신의 잘못을 생각했다. 뭔 일이 있었던 거지? 걱정이 됨에도 접근 할만 한 정보가 하나도 없다는 점에서 탄식만 나오고 있었다. 아, 이하윤은 이거 아나? 그러며 다시금 휴대전화를 꺼냈을 때, 학관 쪽에서 쩌저적하며, 뭔가 갈라지는 소리가 났다.

그것도 자신이 담당하는 권 교수 연구실 쪽에서, 상화는 서둘러 나서던 발걸음을 돌려 후다닥 연구실로 달려갔다. 명색에 경찰행정과 학부생인데 이걸 모른 척 하고 넘어갈 수는 없었다. 발을 굴려 달리다 보면 테이블이 절반으로 쪼개져 그 위에 있던 물건들이 반파 나버린 연구실이 보였다. 이현은 아무렇지도 않게 손수건을 들어 제 손을 닦으며 일어났다.


“다음에 보시죠. 청구는 제 앞으로 하시면 됩니다.”

“현, 너. 대체 어디까지 아는 거지?”

“당신이 어디까지 아는가가 더 중요하다고 생각하는데?”


다시 뵙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그의 말에 권 교수는 아무런 말도 하지 못하고 어안이 벙벙해 서 있기만 했다. 이현은 한숨을 푹 쉬면서 자신의 코트를 툴툴 털어내고는 아무렇지도 않게 뚜벅뚜벅 걸어 나갔다. 다른 이들에게 인사하지 않고 단 하나, 상화에게만 옅게 고개를 끄덕인 그는 저 멀리 사라졌다.

상화는 원목으로 된 테이블을 바라봤다. 누군가 내리찍어서 절단면이 불안정하게 갈라진, 이젠 대형 목재 쓰레기를 바라보며 이현을 번갈아 눈동자를 굴리던 그녀는 숨을 가다듬었다. 못 해도 5cm는 될 저 두꺼운 원목 테이블을, 앉아서 반으로 갈라버리는 저 인간은 인간이라 부를 자격이 있는가?

신서아, 아무래도 잘못 얽힌 거 같은데.

상화는 떨리는 손으로 자신과 서아의 친구인 하윤의 전화번호가 적힌 화면을 바라봤다. 다시 서아한테 전화를 해야 하는 걸까? 아니면, 아니면……. 그런 고민에 휩싸여 멈춰 있다 보면, 먼저 정신 차린 권 교수에 의해 이 반파 난 연구실을 청소하라는 말을 들어버리고 좌절해버릴 뿐이었다. 아 씨, 그냥 바로 외면하고 토낄 걸.

다만 신서아는 그 다음 날부터 제대로 얼굴을 들이밀었다. 입원 했었다는 말이 무색하게, 평소의 신서아의 모습을 보였다. 다만 일주일동안 어디 있었냐? 라고 학우들이 물을 적이면. 그녀는 웃으며 대충 넘기곤 했다.

그런 머쓱히 넘기는 모습을 보자 한다면. 상화는 그 눈이 기억나는 거였다. 문득 새파랗다 할 정도로 쨍한 초록의 홍채가 있었다는 합리화가 들었다. 이상하다. 그 사람 분명 머리부터 발끝까지 새까맸는데.


§


신세 지겠다더니, 신서아. 이런 걸 말 하는 거였나!

상화는 평일 낮, 점심시간이라 사람들이 다글다글한 카페 구석에 앉아 멍하니 혼을 빼놓고 있었다. 화원카페라고 그랬나. 곳곳에 가득 배치된 화분들을 보며 마음을 안정시키려 했다. 다만 맞은편에 앉은 사람이 더 불안해하고 있어서 그러진 못했지만. 이진은 튼튼한 종이상자를 들어다가 테이블 위에 올려놨다.


“무거울까요?”

“아, 아뇨. 이 정도쯤은 거뜬합니다.”


거창하지만 저희는 힘도 써야 하는 학과입니다. 긴장해서 아무런 말이나 다 튀어나왔지만 무릇 경찰이라면 어느 상황에서나 약자를 구할 그런 최저한의 힘이 있어야 하지 않겠는가. 만족스런 답이었다고 속으로 생각한 상화는 이진의 안절부절 못하고 이리저리 왔다 갔다 하는 눈을 보고는 주변을 돌아봤다. 뭐, 대다수가 이 마을의 터줏대감들 위주였고, 특이하게 연두색 머리인 종업원 남자 하나. 아무튼 뭐 별 거 없어 보이는데. 상화는 기이하게 떠는 이진을 보곤 속으로 의문을 피웠다. 이진은 고개를 도리질 치더니 종이상자를 상화 쪽으로 밀었다.


“죄송해요. 그 날에는 제가 도저히 일을 뺄 수가 없어서요. 휴가라도 내고 싶었는데 깜빡하고 미리 휴가를 쓰기도 했고…….”

“아뇨, 괜찮아요. 저도 종강하고 나서 신서아 걔가 갑자기 휴학계 냈다 그래서 놀랐거든요.”


갑자기 취직해서 더 놀랐고. 상화는 머쓱히 웃으며 답했다. 그럴 수 있지. 서운하긴 하지만 그래도 급하게 들어갔다 그랬던 거 같은데 축하는 해 줘야겠고. 이렇게 된 김에 선물이라던가 챙겨가도 되고. 상화는 상자를 들고는 일어났다.


“그럼 먼저 일어나겠습니다.”

“그래요. 도와줘서 감사해요.”


그렇게 가벼운 목례 정도만 나누고는 상화가 사라지자 이진은 테이블에 눕다시피 엎어졌다. 아이고, 나이 서른 가까워서 이게 무슨 일이야. 그제야 주변에 있던 사람들이 한 둘 일어나 이진의 테이블에 모였다. 일반적인 카페로 보이기 위한 머릿수 채우기였음이었다.


“엄마……. 아니 이거 엄마가 벌인 일이잖아!”

“아이고, 아가씨. 힘들어?”

“저 진짜 잘 모르겠어요.”


이렇게 해도 되나? 싶긴 한데 별 중요한 일은 아니니까 크게 피해입진 않겠다만. 난 연기도 못하고, 온 동네 긴장한 거 다 보이는 그냥 회사원인데. 그녀의 생각이 온 동네에 다 들렸는지. 다들 안타까이 그녀를 바라보고 있었다. 유리 주전자를 든 손이 그녀의 잔에 간섭했다.


“식물들이 이진씨를 위로하고 있네요. 저도 이거 빼고는 딱히 별 거 없는걸요.”

“이루씨?”

“정말로요. 저도 얼마 전까지 서아씨랑 같이 혼수상태였거든요.”


근데 서아씨는 진짜 대단해요. 어떻게 멀미를 한 시간만 하고 말았지. 이루는 턱을 만지작거렸다. 주전자에 든 노란색 꽃잎 찻물이 그녀의 잔으로 떨어졌다.


“저희 집안 조상 중 하나는 저한테는 아저씨인 이현이 형네 세계에서 온 존재에요. 위로 몇 대였더라, 아무튼 자식이 다 자랐을 적에 그 조상은 아저씨가 데려갔어요.”


그래서 산호씨가 애매하게 섞였다고 저를 안 좋아하는 것도 있는데, 하하. 그의 말에 이진은 고개를 들었다. 거품처럼 한 둘의 인간이 퐁, 퐁. 사라졌다.


“그 시절의 자식들은 생각을 해야 했죠. 다만 그들은 저쪽에는 연이 없고. 이쪽에는 연이 없으니까 여기에서 조용히 살아가겠다고 말했대요. 문제라고 한다면, 저희 집안이 어떻게 아저씨네 세계 사람들을 끌어들이는 힘이 있나 봐요.”

“아, 설마.”

“네, 그쪽 세계 사람들이 선조인 경우가 꽤 있어요. 제 대쯤 되면 일반 인간이나 다름없어야 하는 힘이 자꾸만 섞이고 섞여선 제 반의 반은 저쪽 세계와 연관이 있어요.”


제일 마지막에 섞인 게 숲정령 계열이었죠. 그는 처음 이현을 만난 날을 상기했다. 연한 녹색의 머리카락을 가진 어린 자신을 바라보는 그 살벌한 눈동자와 제 아버지보다 젊어 보이는 할아버지에게 잔뜩 화가 난 얼굴을 말이다.


“정말 그때 저희 집안 통째로 저쪽 세계로 가는 줄 알았다니까요.”

“아하.”

“부동산 문제도 있고, 제 수명이 예상으로는 이백년도 못돼서 기각되긴 했지만요.”


콜록! 이진은 차를 뱉을 뻔 했다. 첫째로 송이루가 자신의 수명을 알아서 놀란 것이며, 또 그 수명에 대해 아무렇지도 않게 담담히 말해서 더더욱 놀란 것이었다. 도리어 그는 웃고 있었다.


“제 수명을 말 하는데도 아무렇지도 않아서 놀라셨나요?”

“약간, 그런 거 아닌가요? 시한부 인생?”

“글쎄요. 저는 제 친구들보단 두 배 이상의 삶을 사는 거니까요.”


노화도 그만큼 느리고요. 그의 말에 이진은 눈썹을 까딱였다. 비눗방울처럼 방울방울 퐁퐁 터져 사라지는 자신의 창조물들을 두고는 그를 향해 고개를 치들뿐이었다. 이변에 익숙한 모습, 자신에 대해 누구보다 잘 안다는 저 담담한 모습에 이진은 입술을 움직였다.


“그럼, 지금이 떨리진 않으세요?”

“당연히 떨리죠. 우리는 죽을지도 몰라요.”


현 인류가 증명한 그 모든 지식과 정의들보다 큰 미지의 것들이 몰려온다. 연한 녹색의 머리를 가진 아이가 그 아저씨를 처음 만났을 때 든 생각이었다. 저 초록의 눈동자가, 찢어진 듯 길게 난 동공이 자신을 바라본다면 세상의 정의를 받쳐 주던 어떤 문장들이 쏟아져 무너질 것 같아보였다.

자신의 세계가 무너졌던 이 여자를 봐서도 말이다. 회사원으로 평범하게 삶을 이어가던 그녀가 강제로 연차까지 쓰면서 어떻게든 이 상황을 이겨내려는 모습을 말이다. 아직 충격이 가시지 않았을 텐데 이렇게 서아의 친구에게 창조예정인 작품들을 건넨 것인지.


“근데 우리가 사는 곳은 여기잖아요. 아저씨에게 부탁하면 우리가 살만한 땅도 줄 수 있겠지만, 모든 인연들이 여기에 있는데, 도망치듯 이주할 수는 없죠.”


물론 뭐 여기 지구는 환경 파괴라던가, 매연 때문에라도 먼저 해먹을 거 같긴 한데. 그는 분위기를 풀기 위해서 덧붙였다. 그의 말에 이진은 눈을 감고 작게 미소 지었다. 맞는 말이었다.


“여전히 잘 모르겠어요. 엄마는 우리가 도울 수 있는 거라면 얼마든지 도운다고 했지만. 저는 엄마보다 더 늦게 능력을 알았다고요. 심지어 한이 이놈은 군대에 있고 말이죠.”


전쟁이라도 난다면 먼저 차출된다고요. 평화로운 시대에 태어나 그 소중함을 망각한다지만 그래도 정보화 시대라 온 세계의 진행중인 전쟁을 보고, 또 간접적으로나마 피와 살육이 남기는 그 지독한 결과물을 아는 이진은 다시 굳은 표정을 이었다.


“그래도 말이죠, 걱정되는 건 인간 마음이잖아요. 우리는 재해 앞에 한없이 작고. 그걸 다스릴 힘은 없죠.”

“그러니까요. 이건, 솔직히 말하자면 재해보다 더 큰 거 아닐까요? 우리는 왜 세계의 존폐를 막기 위해 이쑤시개를 들어야 하는 걸까요?”


얽히기도 싫었는데. 이진은 그나마 풀어졌는지 어깨에 잔뜩 들어갔던 힘을 풀고는 창밖을 바라봤다. 날도 추운데 하늘은 시퍼렇게 맑고 난리였다. 비눗방울들이 햇빛을 받아 터져가기 전에 내뱉는 무지개들이 저들을 잠깐씩 위로했다.


“아무튼 저는 전투에는 특화된 사람이 아니라 이렇게 후방에서 쉬이 말할 수도 있는 거겠죠.”

“아, 그래서 그런가요. 여유가 넘친다 했어.”

“그래도 잘 하실 거예요. 진씨도 지금 갑자기 떨어진 일인데도 휙휙 다 쳐내고 있잖아요.”


쳐내는 건지 던지는 건지 모르겠지만요. 그녀는 다시금 테이블에 고개를 콱 박고는 저 밖을 바라봤다. 그래도 빛을 받아들이고 굴절시키는 비눗방울들이 예쁘게 보이는 게 얼마인가, 적어도 지금 그렇게 생각할 여유가 있다는 게 얼마인가.


“저희 일 끝나면 어디 놀러가죠.”

“그거 완전 드라마에서 나오는 유언 같은 거 아시죠?”

“아는데요. 이렇게라도 회피 안 하면 죽을 거 같아요.”

“좋아요. 어디 좋아하세요? 저는 제주도 가서 녹차랑 귤 밭 보고 싶은데.”


이 뼛속까지 녹즙인 사람. 이진은 깊은 한숨을 내뱉고는 다시금 따듯한 잔을 잡았다. 송송이 올라오는 국화향기가, 어떻게든 마음을 가라앉힐 수 있게 도와줬다.


“근데 제주도 가서 귤 보는 건 그렇다 치는데, 녹차 밭은 당장 조금만 가도 많잖아요.”

“그래도요. 귤 보러 가기도 하고, 말도 보고.”

“그거 다 보려면 박으로 가야 할 거 같은데…….”

“아저씨가 문 열어 줄 거예요. 세계에서 가장 좋은 교통수단!”


그가 말을 가로채듯 꺼내고 먼저 터지듯 웃었다. 그 웃는 모습에 이진도 덩달아 웃었다. 잘 해결 되면 말이지만 말이다. 지금은 그런 말이라도 꺼내고 싶었다. 잘 될 거야. 비눗방울들이 속삭이는 느낌이었다. 지금은 지금 당장을 생각하자. 그나저나, 이한이 이놈은 이 사실을 알라나?

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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