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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밤의 등불 ‘루드(Luode)’가 마법행정부와 신전을 지나 어둠의 숲에 머무는 시간이 되었다. 행성 글리아에서 가장 많은 자리를 차지하는 곳은 ‘어둠의 숲’이고, 마법행정부를 중심으로는 글리아인들의 도시가 꾸려져 있다. 신전은 마법 행정부와 어둠의 숲에 비하면 아주 작은 수준이었다. 그러니 행성은 마법행정부와 신적, 즉 인간들의 도시가 반, 어둠의 숲이 반을 차지하는 것으로 볼 수 있다.

 

밤이 지나고 루드가 ‘어둠의 숲’을 뒤덮으면, 이미 루드가 지나간 도시에 사는 인간들이 숲을 볼 땐 늘 어두웠기에 ‘어둠의 숲’이라 불리게 되었다. 또한 어둠에 숲 속에는 인간이 아닌 생물들이 살고 있어 위험한 곳이기도 했다. 이를 모르는 어린아이나 호기심 많은 인간들이 그곳에 발을 들였다가 문제가 발생할까 하는 염려에, 신전에서는 이곳을 두렵고 가서는 안될 금기의 구역이라는 인식을 심었다. 아예 출입이 통제된 구역은 아니지만 평범한 사람이라면 그 누구도 그곳에 발을 들이지 않는다.

 

그렇게 어둠의 행성이 루드를 가져가고 도시에는 아침이 밝았다. 불의 신 프로테메스가 이 행성을 관장하게 된 이후로 붉게 물들었지만, 루드가 금방 사라진 아침은 주황빛이 돌아서 붉은 빛이 물든 저녁보다는 밝았다.

 

행성 글리아의 중심가에는 각양각색의 상점들이 즐비하게 늘어져 있다. 그 중에서도 가장 많은 지분율을 차지한 상점은 단연, 마법 상점들. 마법학교의 새 학기가 시작되면서 마법 상점들 또한 바빠졌다. 아직 이른 시간임에도 가장 좋은 마법 아이템을 먼저 쟁취하기 위해 줄 선 아이들이 북적북적 모여 있었다. 서로 어떤 아이템을 살지 앞다투어 이야기하느라 정신이 없었다.

 

개중에 친구 없이 혼자 조용히 서서 서적을 읽으며 상점의 오픈시간을 기다리던 한 아이가 순간 바뀐 공기의 흐름에 움찔하며 주변을 두리번댔다. 이 아이 말고는 아무도 느끼지 못한 것인지 주변은 여전히 시끌벅적 했다. 조금 더 자세히 보기 위해서 얼굴에 걸친 안경을 고쳐 쓰며 중심가의 길 끝을 바라보았다. 

그곳은 사람들의 발길이 잘 닫지 않는 ‘어둠의 숲’이었다. 아이가 숲을 유심히 쳐다보자 갑자기 두 형체가 나타났다. 시력을 올려주는 마법 안경의 기능을 가장 높은 단계로 올리며 그 두 형체를 자세히 관찰했다. 너무 먼 곳에 있어서 마법 단계까지는 잘 보이지 않지만 왼쪽 가슴 부근에 배지를 달고 있는 것을 보니 한 형태는 마법사인 것 같았다. 그리고 그 마법사 보다 덩치가 큰 옆에 있는 자는…

 

“...! 프로테메스님…?”

 

나머지 한 사람, 아니 신의 모습을 봐 버린 아이는 읽고 있던 서적을 떨어트렸다. 떨어진 책의 표지에는 [현존하는 신들: 시초 신편]이라는 글이 쓰여 있었다.

금방 책에서 본 신이, 그것도 시초신이 바로 내 눈에 비치고 있다는 사실에 놀란 나머지 신의 이름을 말해 버렸다. 다행히 주변 사람들은 이 아이에게 관심을 가지지 않았기에 아무도 듣지 못한 것 같았다. 책에 삽입된 입체 사진과 똑같이 붉은 기가 도는 주황색의 불이 프로테메스를 감싸고 있었고, 프로테메스의 ‘신복’은 책에서 본 것보다는 단조로웠다. 그것이 오히려 프로테메스를 더욱 돋보이게 했다.

 

“흠흠- 지난 밤엔 네 기력을 조금이라도 보충하고자 잠시 신계에 다녀왔었다.”

“예.”

 

찬열이 백현의 침실을 떠나고 잠을 청해보아도 이런저런 생각에 한참 동안 잠을 이루지 못했으니, 그가 글리아에 없었다는 것쯤은 알고 있었다.

찬열은 계속 백현을 바라보며 이야기하고 있었지만 백현은 앞만 바라보며 답하고 있었다.

 

“어제 결계를 보수하느라 몸이 상했을 텐데… 평소처럼 끼니 거르지 말고, 이젠 든든하게 먹어야 해.”

“예.”

“하기야 오늘부터는 내내 나와 함께 일 테니 큰 걱정은 하지 않아도 되겠지.”

“…예.”

 

찬열은 시작될 여정에 들떠 보였다. 서로 다른 발걸음의 두 사람은 상점가를 향해 걸었다. 여전히 신복을 입고 주변에 불꽃을 휘날리는 찬열을 힐끗 본 백현이 드디어 입을 뗐다.

 

“인간들이 있는 도시에 그런 모습으로 가실 겁니까.”

“아아, 그래 이 모습으로 갈 수는 없지.”

 

찬열이 상반신이 훤히 드러나는 신복에서 평범한 후드 집업에 롤업된 청바지로 모습을 바꿨다. 주위를 맴돌던 불꽃들도 사르르 사라졌다.

 

“어떠냐?”

“뭐가 말입니까.”

“내가 이런 모습으로 바꾸면 네가 나에게서 친밀감… 이라는 게 느껴지지 않을까 해서 말이다.”

“…"

“아주 조금이라도.”

 

찬열이 백현의 대답을 요구했지만 백현은 입을 열지 않았다. 대답할 가치를 느끼지 못한 것 같았다. 백현은 상점가를 향해 발걸음을 빨리했다. 그 덕에 백현과 거리가 벌어지자 찬열이 목소리를 키워 말했다.

 

 “그리 빨리 갈 필요 없다-! 바티와 약속한 시각은 아직 많이 남았으니!”

 

벌어진 거리를 빠르게 좁히며 찬열이 백현의 바로 뒤까지 따라붙었다. 그리곤 또다시 쉴 새 없이 백현에게 말을 걸었다. 마치 백현의 친구 바티가 키우는 앵무새처럼 백현을 귀찮게 했다.

 

“저번에 레카가 말하길 아벤느 가는 길에 아주 맛있는 음식점이 있다고 하던데 그곳에 들르는 건 어떠냐?”

 

 앞서가던 백현이 갑자기 뒤를 획하고 돌았다. 그 탓에 백현의 뒤꽁무니를 따라가던 찬열과 살짝 부딪혔다. 가까워진 두 사람의 거리에 백현은 찬열을 올려다봤다. 찬열의 시선에 들어오는 백현의 눈빛은 그다지 찬열의 제안을 수긍하는 것 같지 않았다.

 

“아니면 간단하게 음료…?”

 

찬열이 머쓱하게 웃으며 말하자 백현은 한숨을 푹 쉬곤 고개를 가볍게 내저었다. 조잘조잘 떠들 때는 새 같더니 이렇게 말꼬리를 내리는 걸 보니 영락없이 강아지다. 다른 이들과 함께 있을 때는 세상에서 가장 무엄한 동시에 다정한 시초신 행세를 잘만 하더니 백현과 단둘이 있을 땐 차가운 백현의 태도에 쩔쩔매는 것이 다반사였다. 백현의 부모님이 돌아가시기 전에는 주로 백현은 질문을 던지고 찬열은 대답해주는 쪽이었지만 어느 순간부터 찬열이 질문을 던지면 백현이 무시하는 관계로 뒤바뀌었다. 그러다 보니 자연스레 찬열이 백현에게 대화를 시도하는 일도 잦아들었는데, 무슨 바람이 들었는지 소환 신이 갑자기 자꾸만 귀찮게 말을 건넨다.

 

“저는 배 안 고픕니다.”

“내가 배고프다고 하면?”

“프로테메스님은 신이잖습니까! 신은 욕구가 없다 배웠습니다.”

 

조금 언성이 높아진 백현의 말에 찬열은 잠시 눈을 크게 뜨고 눈을 두어 번 깜박였다.

 

“…맞다, 네 말이 맞아.”

 

이번엔 찬열의 인정으로 가라앉은 분위기에 백현의 눈썹이 움찔거렸다.

 

“한데 욕구가 없는 것일 뿐 감정이 없는 건 아니다. 그러니 백현이 네가 맛있는 음식을 먹었으면 좋겠고.”

“예? 그게 도대체 무슨,”

“맛있는 걸 먹으면 네 기분이 좋아질 테고, 그럼 내 기분도 좋아진다는 말이다.”

“그러니까 그게 무슨 말입니까! 매번 이렇게 돌려 말하지 말고 알아듣게 얘기해주십시오!”

“그래, 이렇게 매번 못 알아들으니 다행이지.”

 

찬열은 백현을 향해 활짝 웃었다. 그리곤 호탕한 웃음소리와 함께 백현을 지나쳐 걸어갔다. 잠시 어안이 벙벙해져 있던 백현이 됐습니다!! 안 궁금해요!!- 하고 소리치고는 벌써 꽤 멀리까지 간 찬열을 향해 잔걸음으로 달려갔다.

평소 생활하는 신전이나 어둠의 숲과 달리 시끌벅적한 상점가는 백현의 마음을 들뜨게 하기에 충분했다. 아주 잠시 찬열이 말했던, 아니 레카가 추천했다던 그 맛있는 음식점에 가자고 할까 하고 고민할 정도로 말이다.

 

 

 

 

*

 

 

 

 

 백현의 친구 바티가 세우고 운영하는 마법 상점 ‘아벤느’는 글리아에서 최고의 마법 상점으로 평가받고 있다. 아벤느는 여느 다른 상점이나 건물들과는 다른 모습이었다. 고층의 건물 겉에는 마법 효과가 걸려있는데 마치 하나의 거대한 불꽃을 보는 것 같았다. 이 마법은 찬열이 바티에게 선물로 걸어준 것이다. 사실 그 속엔 바티가 찬열에게 필요할 때마다 마법 아이템을 무한하게 지급, 개조해 주기로 했던 일련의 협상이 있었다. 신에게 아이템이 어찌 필요하겠는가. 하지만 바티의 말솜씨가 훌륭하여 얼결에 수락해 버린 찬열은 이 협상 이후로 바티를 ‘협상의 귀재’라고 부른다.

아벤느의 입구에서부터 그 끝이 잘 보이지 않을 정도로 길게 된 줄을 선 사람들이 있었다. 백현과 찬열이 아벤느 입구에 다다라서 출입을 지키는 경호원에게 백현이 품속에서 신관증을 꺼내어 보였다. 그러자 경호원이 예를 갖추며 인사했다.

 

“안녕하십니까! 그렇지 않아도 대표님께서 기다리고 계십니다!”

 

군기가 바짝 든 경호원이 가지고 있던 출입증으로 문을 열었고 찬열과 백현이 안으로 들어가기 위해 발을 내디뎠다.

 

“잠깐만요!!”

 

거의 문을 지나치려던 찰나에 갑자기 한 아이가 둘에게 달려와 찬열을 붙잡았다. 경호원이 그 아이를 떼어내려고 하자 찬열이 괜찮다며 그를 말렸다. 그리고 아이에게 무슨 일이냐 물었다.

 

“저… 혹시 프로테메스님이세요…?”

 

너무 작은 아이의 목소리가 주변 소리에 묻히는 탓에 찬열에게 들리지 않았다.

 

“잘 듣지 못했다. 다시 한번 말해주겠느냐?”

“저…”

 

아이가 주변을 의식하며 말하지 못하고 우물쭈물하였다. 그 모습을 본 찬열은 아이에게 가까이 다가가 허리를 숙이고 눈을 바라보며 말했다.

 

“사람들이 들으면 안 되는 이야기인가 보구나. 이 정도 거리면 되겠느냐?”

 

찬열의 친절에 아이가 작은 미소를 띠곤 찬열의 귀에 입을 가까이 가져다 대며 말했다.

 

“프로테메스님 맞으시죠?”

 

그 말에 찬열이 놀란 마음에 아이를 바라봤다. 대부분의 인간들이 그렇듯 신을 처음 마주해 환희에 찬 얼굴이었다. 자신을 어찌 알아봤는지는 모르지만 간만에 마주한 그러한 인간의 표정이 반가웠고 가슴에 마법 뱃지가 달린 마법학교 유니폼을 입고있는 걸 보아하니 학생인 듯 싶어 경계를 풀었다. 그리고 아이가 품 안에 안고 있는 신들에 관한 서적이 눈에 띄었다.

 

“혹시 그 책을 보고 나를 알아본 것이냐? 그렇다면 그 책의 저자에게 상을 줘야겠는 걸. 내 미모를 그림에 담았다니.”

 

찬열이 능청스럽게 자신의 미모를 뽐내는 말을 내뱉자 백현이 찬열을 쳐다봤다. 아까부터 찬열이 유독 평소와 다른 모습을 보인다. 백현이 차갑게 내치면 더 첨언하지 않고 그만두는 찬열이었는데 오늘따라 백현에게 끈질기게 말을 걸어오더니 또 지금은 갑자기 답지 않게 과시행동이라니... 마치 20년 전 궁금한 것들 투 성이었던 백현의 옆에서 이것저것 다정하게 대답해주던 그때의 찬열 같았다. 당시 찬열은 장난이 가득하면서도 능글맞은 말과 행동들로 어린 백현을 까르르 웃게 만들곤 했다. 그때처럼 행동하는 찬열을 보면서 백현은 아주 잠시, 아주 오랜만에 과거의 저와 찬열을 추억했다. 그리고 애써 가라앉힌 마음이 백현도 눈치채지 못할 만큼 조금씩 제멋대로 붕 뜨기 시작했다.

 

“그러게나 말입니다! 어찌 프로테메스님의 형용할 수 없는 찬란한 외모를 한낱 그림으로 담았을까요! 놀랍습니다!”

 

찬열의 장난에 잠시 정적이 찾아왔던 분위기를 깨고 경호원이 경쾌하게 웃으며 찬열에게 아부를 떨어 댔다. 이 자는 찬열이 보기에, 동경하는 신에 대해 환희 가득한 아이와 달리 신을 향한 경외심에서 비롯된 두려움이 얼굴에 서려 있었다. 찬열을 잘 알지 못하는 인간이니 찬열의 장난이 과시하길 좋아하는 신으로 보였을 것이다. 그러니 맞장구를 쳐 주어야만 한다고 생각한 것이겠지.

 

“아, 저는 책에 나와 있는 형상 그림을 보고 프로테메스님을 알아본 것이 아닙니다! 사실 조금 이상한 느낌이 들어 어둠의 숲을 보았다가 두 분을 우연히 보게 되었는데 그때는 지금과 달리 이 책에 나온 것과 비슷한 신복을 입고 있으셔서… 그리고 주변에 불꽃들도 막 보였어요! 그래서 알게 된 것입니다!!”

 

“하하- 그랬구나. 그런데 어떤 이유로 나를 찾아왔느냐? 혹 소원이 있느냐?”

“저.. 혹시... 괜찮으시다면… 사인해 주실 수 있으신가요?”

 

꽤 머뭇거리던 아이가 꺼내 놓은 대답은 찬열이 물었던 ‘소원’치고는 소박한 것이었다. 찬열은 이런 아이의 대답에 미소를 지었다.

 

“물론이지. 하지만 나에게는 사인이랄 것이 없다. 혹시 내가 너의 이 책에 작은 흔적을 남겨도 좋으냐.”

 

찬열이 아이의 품에 있던 책을 가리키며 물었다. 아이는 잽싸게 책을 찬열에게 내밀었다.

 

“네!! 좋습니다! 좋아요!! 그리고 저는 마법 학교에 다니고 있는 피온 루브니스 입니다!”

 

아이의 이름을 들은 찬열은 바로 아이의 책 모서리에 작은 불씨로 문구를 새겼다.

 

 “신의 축복은 인간에게 효력이 있지. 어때, 마음에 드느냐.”

 

문구를 확인한 아이가 찬열의 물음이 채 끝나기도 전에 이미 함박웃음을 지었다.

 

“너무도… 너무도 마음에 쏙 듭니다! 감사합니다. 프로테메스님!”

“프로테메스님. 이만 들어가시죠.”

 

아이가 기뻐하는 모습을 아무런 표정 변화 없이 바라보고만 있던 백현이 찬열에게 들어가자 말하고 먼저 뒤돌아 갔다. 그러자 이번에는 아이가 백현을 따라잡으며 급히 백현을 불렀다. 이미 건물 안에 들어선 백현을 따라간지라 아이도 어느새 건물 안으로 들어갔다.

 

“야!! 너는 지금 들어가면 안 돼!!”

 

경호원이 아이에게 소리치며 달려가려고 했다. 하지만 또 찬열이 그를 저지했다. 주변은 백현을 따라 들어간 피온 때문에 줄 서 있던 학생들이 소란을 피우고 있었다.

 

“프로테메스님…! 아무리 그래도…! 지금 밖에서 한참을 기다리던 학생들이 저기 저 피온이라는학생이 들어가는 걸 보고 난리 칠 거에요, 저 정말 잘못하면 해고될 수도 있단 말입니다…!”

“바티에게는 내가 잘 말하마. 그리고 이 아이도 머지않아 나갈 것 같으니 그대는 잠시 여기서 상황 정리를 하고 있게.”

 

찬열은 살려 달라는 표정으로 애원하는 경호원의 어깨를 툭툭-두드리고 백현과 피온을 따라 아벤느 안으로 들어갔다. 찬열이 들어가자 문이 닫혔고 밖에 남은 경호원은 건물 근처 군데군데 배치된 경호원들에게 무전을 치고 점점 거세지는 학생들의 불만을 진정시키기 시작했다.

 

한편 백현은 건물 안까지 따라와서 자신의 옷자락을 그러잡고 있는 아이를 가만히 내려다보고 있었다. 화를 내지도 반기지도 않는 이도 저도 아닌 백현의 무미건조한 표정에 아이는 조금, 아니 많이 떨렸지만, 용기 냈다.

 

“대대손손 대마법사 집안에서 태어나셨지만, 상성은 현재 금지된 빛의 능력, 하지만 뛰어난 두뇌로 8세에 최연소로 Y 배지를 달았고! 같은 해에 불의 신 프로테메스를 소환하여 마법 학교 조기졸업 후 바로 R 배지 취득 후 대마법사 등극! 그리고 성년이 되자마자 첫 글리아의 빛의 상성 신관으로 임명받으신,!”

“뭐 하는 거지?”

 

피온이 백현에 관한 것을 숨도 쉬지 않고 쭉 읊었고 무미건조하기만 했던 백현의 표정이 일그러졌다.

 

“신관님…아니신가요…?”

“맞아. 하지만 나에 관한 정보가 그리 많지 않을 텐데… 어떻게 나를 알아봤지?”

“아, 그런 거라면! 그 신관님이 행성주민들 앞에 나서시는 분도 아니고, 사진도 한 장 없어서 외모는 알 수 없지만, 그저 제가 프로테메스님 옆에 계신 걸 보고 추측해 보았습니다! 게다가 신관복정도는 마법학교에서 배웠구요! ‘신관의 이해’ 파트 부분에서요!!”

 

백현의 나름 무시무시한 질문에도 피온은 기죽지 않고 당차게 답했다. 그런 피온의 모습에 백현은 잠깐 주춤했다. 되레 백현 자신이 기죽는 것 같았다. 하지만 눈치를 보고 있는 것은 피온 이였다. 그도 그럴 것이 겨우 마법 학교에 다니는 뭣도 아닌 학생이 신을 붙잡은 것도 모자라서 신관의 옷자락까지 쥐었으니 경우가 없어도 한참 없는 일이다. 피온은 아직도 자신이 신관님의 옷을 손으로 구기고 있다는 것을 상기하고 앗 죄송해요!- 라고 말하며 급히 손을 공손히 모았다.

 

“그... 제가 너무 이렇게 막 신관님을 불편하게 해드려서 죄송합니다… 하지만 신관님을 이렇게 뵐 기회가 다시는 없을 거라는 생각에 저도 모르게… 정말 죄송해요…”

 

방금의 그 당차던 모습은 어디로 갔는지 피온은 그새 위축되어있었다.


“사과는 됐다. 그저 나에 대한 정보가 어디서 교류되고 있는가, 하는 의구심에 질문한 것뿐이야.”

“신관님의 정보는 학교 서적에 실린, 제가 아까 읊었던 그 내용이 전부이니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그래, 그렇구나. 그래서. 나에게도 용건이 있는 건가? 나또한 사인 같은 건 만들지를 않아서.”

“괜찮습니다! 아니 사실 아쉽긴 하지만, 그렇다고 많이는 아니고 아주 조금이요! 아 그러니까 그게,!”

 

피온이 횡설수설하였지만 백현은 그가 하고 싶은 말을 온전히 할 때까지 기다렸다.

 

“실은… 저는 아직 상성 발현이 일어나지 않았어요. 올해로 마법 학교 5학년에 열여섯 살인데두요… 상성은 없어도 기력이 남들보다 뛰어난 덕분에 겨우 버티고 있긴 하지만요, 신관님도 아시다시피 이제 5학년은 상성의 특기를 살리는 학년이에요. 발현 시기가 한참 지난 저는... 매일이 너무 괴로워요. 부모님이나 주변 사람들 모두 저는 마법사가 될 수 없으니 포기하라고 하지만…”

 

고해성사하듯이 자신의 이야기를 술술 터놓는 아이의 눈에는 이미 슬픔이 서려 있었다.

 

“저는, 저는! 절대 이 꿈을 포기할 수가 없어요! 수업을 듣고 공식을 외우고 수도 없이 연습한 끝에 마법이 저의 것이 되는 그 순간이 가장 행복한걸요…!”

 

피온의 말들은 마치 백현의 과거를 알고 이야기하는 것 같이 백현의 어린 시절과 닮아있었다. 금지된 마법의 상성으로 태어난 자신, 하지만 포기할 수 없었던 꿈. 그렇게 프로테메스를 소환한 일. 백현의 머릿속에서 유영하던 기억들이 조금씩 뭉쳐지고 있었다.

 

“그래서 신관님은 제 유일한 희망이세요! 사용할 수 없는 상성으로도 이렇게 신관까지 되셨으니 말이에요!”

 

슬픔이 보였던 피온의 눈에는 어느새 희망이 가득 담겨있었다. 절망의 상황에서 끝까지 희망을 염원하는 이 아이를 보고 있으니 백현은 머리가 지끈 아팠다.

 

“그래서 말인데요... 저도 신을 소환할 거에요! 물론 같은 행성에 두 명의 신을 소환하는 일은 전례가 없던 일이지만 그래도,”

“그만!”

 

백현의 귓가에 무리에게 둘러싸여 신을 소환하리라 외치던 여덟 살 백현의 어린 목소리가 이명처럼 들렸다.

 

“신을 소환한다고? 발현도 되지 않았다는 네가 무슨 수로? 그 마법이 얼마나 위험한 줄은 아느냐? 마법사는커녕 네 부모님은 더는 너를 볼 수 없게 될 수도 있어! 남는 자의 슬픔은 쉽게 생각할 문제가 아닐뿐더러 설령 운이 좋아 소환한다고 해도…! 그 신이 네 편일 것 같으냐?”

 

몰아붙이는 백현은 흡사 백현에게 절망을 말했던 그 교사를 떠오르게 했다. 피온의 눈은 다시 슬퍼졌고 눈물을 한가득 머금고 있었다. 그리고 둘의 대화를 뒤에서 계속 듣고 있던 찬열은 백현의 마지막 질문에 고개를 숙였다. 그런 찬열을 본 백현은 아랫입술을 꾹 깨물었다. 해서는 안 될 말을 해버린 자신이 한심했다.

 

“하… 어서 나가.”

 

백현은 차갑게 뒤돌아 갔다. 뒤에 남겨진 피온은 목놓아 울지도 않고 그저 끅끅대며 울음을 참으려 애썼다.

 

"흑... 흐윽...."

“울지 마라. 진심이 아닐 테니 담아두지 않는 것이 좋겠구나.”

 

백현이 시야에서 완전히 사라지자 엉엉 눈물을 흘리며 우는 피온에게 찬열이 위로의 말을 건넸다. 그런 찬열의 말이 피온에게는 들어오지 않았다. 이제 어떻게, 어떤 마음으로 살아야 할지 막막했다. 길을 잃은 것 같았다.

 

 

 

 

*

 

 

 

 

백현은 바티의 연구실이 있는 지하로 향했다. 가는 그 짧은 시간 동안 백현의 머릿속에는 온통 자신이 피온에게 했던 마지막 말이 맴돌아서 복잡했다. 자신과 닮은 피온을 보며 기분이 묘해졌고 자신과 같은 길을 걸으려는 그 아이에게 자신도 모르게 화를 내버렸다. 게다가 신에 대한 불경까지 저지르다니 백현답지 않았다.

 

“하…”

 

백현이 한숨을 푹 쉬며 친구 바티의 연구실에 들어섰다. 앉아서 작업하던 바티가 그런 백현을 보고 백현에게 걸어갔다.

 

“뭐야? 왜 오자마자 한숨이야, 이제 나 볼 생각만 해도 한숨이 나냐?”

“그건 원래 그랬고.”

“와 말하는 것 봐! 우리 엄청 오랜만에 보는 건데! 바티 완전 마음에 상처야, 마상 마상!”

“야! 너는..! 그 이상한, 말 줄이는 것 좀 안 하면 안 되냐?”

“왜~ 백, 현이현이~ 이게 바티의 시-그-니-처-인 거 알면서~ 현이 현이~”

 

바티가 촐랑대며 백현을 놀려 댔다. 아이템 연구계에서는 이름을 날리다 못해, 최단 시간 내에 마법 상점을 행성 최고의 마법 상점으로 성장시킨 명성 높은 연구가 겸 사업가이지만 실상은 매번 백현의 치를 떨게 만드는 유일한 이가 바로 바티 워스(Vati Wrth)였다. 백현 외에도 주변 이들에게 모두 들이대고 보는 것이 특기인 바티는 사업에 관한 일에서 만은 진중하고 단호하게 처리하는 면모를 보였다. 아마 이런 양면의 모습이 바티를 이 자리까지 이끌고 온 것이 아닐까.

 뭐, 친구 백현에게는 오로지 '이해 안되게 촐랑대는 징그러운 놈' 정도의 평판이지만 말이다.


“아! 징그러우니까 하지 마라.”

“치... 바티 정말 속상해! 정속 정속!”

“하,!”

 

백현이 기어코 코웃음을 날렸다.

 

"네놈 억지 봐주는 것도 거기 까지다. 아이템이나 내놔.”

“나 참, 아이템 맡겨 놨냐? 하나뿐인 친구 장난도 안 받아주는 자식한텐 줄 아이템이 없어요~”


실컷 장난친 바티가 백현에게 훠이훠이 손짓하는 그때, 찬열이 바티의 연구실에 들어왔다.

 

“장난 안 받아주는 친구한테는 없어도 나한테는 있겠지, 바티?”

“프로테메스님!”

“우리가 한 이야기가 있는데 말이야. ”

 

찬열이 바티에게 의미심장한 미소를 짓자 바티는 당황하며 황급히 대답했다. 그 대화를 듣고 있던 백현은 둘이 협상한 사실을 알지 못했기에 둘이 주고받는 눈의 대화를 이해할 수 없었다. 협상한 사실을 알면 분명 그 협상을 거두라고 말할 백현이기에 바티는 찬열을 향해 말하지 말아 달라는 무언의 표시를 보내며 빠르게 대화 주제를 돌렸다.

 

“그럼요! 뭐든 지요! 아, 우선 그, 저번에 맡기셨던 화혼검(華婚劍)부터 드리겠습니다!”

 

바티가 아이템을 보관하는 연구실 한쪽에 있는 방에 들어갔다 나왔다. 하지만 ‘검’을 주겠다던 말과 다르게 찬열에게 돌아온 바티는 빈손으로 보였다.

 

“검의 축소형을 귀걸이 형태로 바꿔봤습니다.”

 

빈손인 줄 알았던 바티가 오른손을 펴자 손바닥 위에 작은 검 모양의 귀걸이 하나가 보였다. 검은색의 귀걸이는 정말 하찮아 보였다. 고작 이 작은 것이 나뭇잎 하나라도 벨 수 있을까 싶을 정도로 작고 무해해 보이는 게 일반적인 장신구 같았다.

 

“이 귀걸이에 사용하겠다는 뜻을 전하면 원형으로 확대될 겁니다. 한번 사용해 보시겠습니까?”

 

바티가 찬열을 바라보며 권하자 찬열은 미간을 좁히며 고개를 저었다. 애초에 아이템은 찬열이 백현을 위하여 개조해달라고 바티에게 맡겼던 것이니 백현이 사용해 보는 것이 옳았다.

 

“아차차, 백현이 네 것이니까 네가 써봐야지.”

 

바티가 백현에게 손을 내밀었다. 백현이 미심쩍은 눈빛을 바티에게 보내자 바티가 손을 백현에게 한 번 더 내밀었다. 백현이 바티의 손에 있던 작은 것을 가져와 자신의 손바닥 위에 올려놓고 천천히 눈을 감고 숨을 들이쉬었다가 내뱉었다. 그러자 검이 조금씩 꿈틀대더니 웅-하는 소리와 함께 커졌다. 백현의 손에는 어느새 백현의 몸체보다 긴 검이 쥐여 있었다. 검이 강하게 진동하는 탓에 백현의 인상이 찡그려졌다. 검을 쥔 손에 힘을 주고 버티자 검의 진동이 잦아들었고 이내 붉은 빛이 검을 휘감았다. 검을 보고 있는 백현의 얼굴에 붉은빛이 비쳤다. 백현의 눈에 붉게 빛나는 화혼검(華婚劍)이 담겼다.

 

“최소한의 기력을 흡수하고 최대한의 힘을 출력하도록 개조했으니까 쓸 만 할 거야.”

“바티? 네가 개조해서 쓸 만해진 게 아니라, 내가 애초에 잘 만든 거다.”

 

피온과 경호원 앞에서 능청맞게 자신의 미모를 뽐내던 것과 비스름한 표정을 한 찬열이 바티에게 한마디 던졌다. 그의 말에 잠깐의 정적이 흘렀고 바티는 뭐라고 대답해야 할지 머리를 굴렸다. 바티에게도 이런 모습의 찬열은 익숙하지 않았다. 바티에게 프로테메스는 대화 자체를 필요 이상으로 하는 신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백현은 ‘뭐 하자는 거지?’ 하는 듯한 눈빛으로 찬열을 빤히 바라보았고 바티의 얼굴에 당황한 기색이 역력했다.

 

“그, 그렇죠! 저는 그저 완벽한 프로테메스님의 신물에 아주 미천한 짓을 조금 했을 뿐입니다!... 아아! 그리고!”

 

바티가 또다시 급하게 아이템 보관 방에 들어가더니 이번에는 우당탕-하는 소리가 났다. 거기서 또다시 당황한 티가 여실히 느껴져서 찬열과 백현이 눈을 마주치며 작게 실소를 터트렸다. 자신도 모르게 풀어진 자신의 모습이 낯설게 느껴진 백현은 금세 웃은 적 없다는 듯이 정색을 하곤 시선을 괜히 다른 곳으로 돌렸다. 백현의 그런 모습이 또 귀여워서 찬열은 차마 밖으로 꺼내지는 못하고 속으로만 간지러운 웃음을 연발했다.

 

"이것들은 기본적으로 챙겨 두면 좋을 물건들입니다! 기력회복제, 시야 확보 렌즈, 투명망토 등등 이미 두 분 다 알고 계실만한 것들이니 필요할 때 잘 사용하시면 되고, 지금은 다 축소해서 이 주머니에 넣어 놓았습니다."

 

"고맙네, 바티."

"고맙다. 잘 쓸게."

"하나뿐인 친구와 프로테메스님이신데 이정도야 어렵지도 않죠. 뭐!"

"백현아, 내 잠시 바티에게 받을 것이 있으니 먼저 나가 거라."

"...예."

 

찬열의 말에 바티는 놀라 눈이 동그래졌고 백현은 찬열이 말한 자신은 알지 못하는 '받을 것'이 뭔가, 하는 마음에 탐탁지 않은 눈을 하고 뒤돌아 출구로 향했다.

 

"야, 야! 친구한테 인사도 안 하고 가냐..!!"

 

프로테메스에게 잔뜩 움츠러든 상태에도 바티가 백현에게 인사를 요구했다. 백현은 뒤 돌은 그대로 오른손만 들어 몇 번 대충 흔들며 연구실을 나섰다.

"하하... 받을 것…. 이라 하심은 무엇을 일컬으시는지요...? 이번에 화혼검 이외에는 개조를 맡기신 게 없는데…"

"화혼검과 함께 맡긴 물건이 아니니 긴장 풀 거라. 혹, 내가 전에 부탁했던 화혼링(火婚) 기억하느냐? 이제 10년 조금 넘은 듯한데."

 

"십 년…? 화혼링…? 아! 예! 저와 백현이가 성년이 되던 해에 맡기셨던 그 반지 말씀이십니까? 그거야 프로테메스께서 제가 이 아벤느를 차리기도 전에 부탁하셨던 거라 잊지 않았지요! 제가 받은 첫 개조 아이템이어서 제게도 의미 있는 물건인지라 소중히 보관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프로테메스께서 필요하다고 말씀하시기 전까지는 비밀에 부쳐달라 하여... 아, 혹 지금 필요하신 겁니까?"

"그래. 나도 누군가에게 부탁받은 신물인데... 아마 그것을 나에게 부탁했던 자가 지금을 대비하여 나에게 맡긴 듯하다. 받을 수 있겠나?"

"네, 그럼요!"

 

아까와 달리 바티는 연구실 안에서 갈 수 있는 또 다른 지하로 내려갔다 왔다.

 

"이게... 금기 능력이 담기 아이템이기도 하고, 제가 특별히 안전하게 보관하고자 일반 아이템들과는 차별된 곳에 보관하였습니다. 특별히 손댄 곳은 없고, 오랜 시간이 지나면서 낡은 부분들을 튼튼하게 수리했을 뿐이라 별로 달라진 부분은 없을 겁니다. 기능 자체도 공격이나 수비 같은 게 아니어서요."

"그래, 고맙다."

 

바티가 찬열에게 작은 상자를 건넸다. 찬열이 상자를 열어보니 특별해 보일 것 없는 반지가 하나 들어있었다.

 

"아닙니다. 제가 해야 할 일을 한 것인데요. 그런데... 오늘 떠나시는 여정이 이렇게나 만반의 준비를 해야 할 정도로 심각한 일인가요?"

 

"아마... 어쩌면 이 여정이 끝난 뒤에는 네가 알던 네 친구를 다시는 볼 수 없을지도…"

"예?!"

"가보마. 몸조심하고."

 

바티가 그게 도대체 무슨 의미냐며 찬열을 채근하려 했으나 이미 찬열은 불꽃의 잔상만을 남기고 사라진 뒤였다.

 

 

 

 

*

 

 

 

 

아벤느에서 나온 백현은 먼 길을 떠나기 전 잠시 어머니의 서재에 들르기 위해 어둠의 숲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복잡한 머릿속을 정리할 시간이 필요했다. 오랜만에 행성 주민들의 모습도 들여다볼 겸 순간이동 마법을 사용하지 않고 걸었다. 백현이 8살, 찬열을 소환하던 날에 서재를 향해 내달렸던 그 거리였다. 그날의 감정이 백현의 마음을 슬금슬금 덮쳐왔다.

그날 자체가 백현에게 안 좋은 기억은 아니었다. 오히려 좋은 기억에 가까웠다. 자신의 한계를 넘고 신을 소환하는 쾌거를 이루었으니 어쩌면 백현의 인생 곡선에서는 절정을 찍는 순간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인생 곡선에서 가장 최하를 기록한 백현의 부모님이 돌아가신 그날을 기점 삼아 백현의 어린 시절은 모두 악몽으로 점철되었다.

 

백현의 부모님을 죽인 장본인은 '그자들'임에도 그 순간 아무런 행동도 하지 않았던 자신의 소환신 '프로테메스'에게 모든 책임을 떠밀어버렸다. 전지전능한 신이라면 그자들쯤이야 거뜬히 물리칠 수 있었건만, 어째서 그자들이 나의 부모님의 목숨을 앗아가도록 내버려 두었나- 하며 찬열을 원망하는 것밖에는 백현이 할 수 있는 것이 없었다. 하여 그와 관련된 어린 시절의 기억들은 전부 백현에게는 추억할 수 없는 과거가 되었다. 아니, 백현 스스로가 그렇게 만들었다. 찬열이 곳곳에 박혀 있는 행복했던 과거를 기억하다 보면 그를 미워할 수 없었기에 그랬다.

백현 자신이 애써 묻어두었던 것들을 하나하나 꺼내 보며 천천히 걷다 보니 어느새 어둠의 숲 입구에 다다랐다. 그리고 백현의 눈앞에 지금 이렇게 과거를 회상하게 만든 장본인인 '피온'이라는 아이가 다시 나타났다. 백현에게 부랴부랴 뛰어온 피온이 숨을 몰아쉬며 말했다.

 

"신관님! 제가 계속 생각해봤는데요! 저는 미래의 제 모습이 마법사가 아닌 건 상상할 수가 없어요. 그래서 저는,! 어떻게든 훌륭한 마법사가 될 거예요!"

 

얼마나 비벼댔는지 눈은 퉁퉁 부었고 단정했던 머리는 산발이 되었지만 피온의 목소리는 전보다 훨씬 당찼다. 많은 이들이 피온을 이해하지 못한다고 할지 몰라도 백현만큼은 이런 꼴로 이런 말을 하는 피온의 다짐을 헤아릴 수 있다. 백현은 이미 피온에게 모진 말을 할 때부터 자신이 틀렸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자신이 피온과 비슷한 상황에 놓였을 때 가장 간절히 원했던 말은 절망이 아니라 희망이었고, 그 과정을 겪고 결과로 존재하는 백현만이 그에게 가장 필요한 말을 해줄 수 있다는 것도 알았다.

 하지만 시작과 과정이 어찌 되었든 과거 백현의 마음과는 상관없이 현재 백현이 마주한 결과는 악몽이었다. 어쩌면 피온에게 했던 말은 백현 자신에게 하는 말이었을 지도 모른다. 사랑하는 가족을 잃어 괴로운 현실이, 그렇게 꿈꾸던 대마법사가 되었음에도 내일이 오지 않았으면 하는 이 지옥이, 모두 억지로 마법사가 되겠다고 마음먹었던 과거의 자신으로부터 시작되었다는 자책이 백현을 옭아매고 있었다. 그리고 이 악몽의 시작은 프로테메스를 만나고 나서부터라고 치부했었다. 그를 미워하고 멀리하는 것으로 자신을 벌하고 있었다. 부모님을 지키지 못했다는 죄책감이 백현을 혼자서는 벗어날 수 없는 감옥에 가두었었다.


하지만 그 감옥은 영원할 수도 영원해서도 안되는 것이다. 의외로 감옥에서 벗어나는 일은 어렵지 않았다. 

모든 과거를 사실 그대로 인정하고 받아들이는 것. 

이 여정을 시작하기 위해서는 우선 백현 자신이 어둡고 캄캄한 곳에서 나와야만 했다.

백현은 한쪽 무릎을 꿇고 피온의 시선에 맞췄다. 안경 너머에 있는 아이의 눈은 빛이 났다.

 

"그래. 꼭 네가 꿈꾸는 자가 되어라. 다만, 신을 소환하는 것은 안 돼. 배우고 싶은 것이 있다면 언제든 나를 찾아와라, 피온."

 

전혀 예상치 못한 백현의 말에 피온은 돌 마냥 굳었다. 어쩌면 더 모질고 아픈 말을 들을 각오를 하고 왔건만 격려라니. 거기다 자신의 이름을 기억하고 있었다. 이미 양껏 울은 눈에서 또 눈물이 흘렀다. 피온은 그 짧은 시간에 지옥과 천국을 오가는 기분이었다.

 

"네!! 네!! 절대 신을 소환하지 않겠습니다! 소환이라는 단어도 꺼내지 않을 겁니다!"

"상성이 발현되도록 실전연습을 늘리도록 해. 전투 상대가 필요하다면 신전에 와도 좋다."

"네!!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신관님!"

 

백현은 거듭 감사의 인사를 하는 피온의 흐트러진 머리를 살짝 정리해주고 일어났다. 그리곤 어김없이 백현의 뒤를 따라온 찬열을 바라보며 말했다.

 

"마음이 뒤숭숭하여 어머니의 서재에 가려던 참인데, 그냥 지금 바로 신전으로 가려고 합니다. 프로테메스께서도 바로 신전으로 오세요."

 

백현은 말을 남기고 사라졌고 찬열은 피온에게 다가갔다.

 

"진심이 아닐거라고 내가 말하지 않았느냐."


찬열의 입꼬리가 활짝 웃고 싶어 안달난 사람처럼 움찔거렸다. 


"흠흠- 지금부터 잠시 동안 신관은 신전을 비울 예정이다. 하여 신전에 찾아와도 신관은 없을 거야. 하지만 신전에는 신관 이외에도 출중한 신전 마법사들이 있으니 그들에게 배우고 있어라. 너의 책에 새겨준 나의 증표를 신전 마법사 중 '레카'라는 자에게 보이면 신전으로 출입할 수 있도록 말을 전해 놓겠다. 내가 본 너는 영리한 자이니 신전 입구까지는 알아서 찾아갈 수 있을 것 같아, 그 걱정은 하지 않으마. 그럼 나중에 또 보자."

 

찬열이 피온에게 온화한 미소를 남기며 떠났다. 피온은 품고 있던 책을 더욱 소중하게 끌어안았다. 그 책의 모서리에서 일전에 찬열이 새겨준 글씨가 빛났다.

 

{간절히 원하는 단 한 가지는 꼭 이루어지길 - 피온에게 프로테메스가}

 

 

 

 

*

 

 

 

 

신전에 돌아온 백현은 레카를 비롯한 신전 마법사들을 신관 사무실로 불러 모았다.

 

“오늘, 저와 프로테메스님은 잠시 글리아를 떠납니다.”

 

레카가 이미 마법사들에게 언질을 주었기에 모두 고개를 살짝 끄덕이며 수긍했다.

 

“기한이 어떻게 될지는 모르지만, 최대한 서둘러서 일을 해결하고 돌아올 겁니다. 그때까지 이 신전을 레카에게 맡기도록 하겠습니다. 가능하십니까? 레카?”

“예. 행성의 안전을 위해 최선을 다하도록 하겠습니다.”

“고맙습니다. 무슨 일이 생기면 바로 나에게 연락하고. 신전에서 해결하기 버거운 일이 생기거든 마법 행정부에 도움을 요청하세요.”

“예, 신관님.”

“모두.”

 

백현이 신전 마법사 모두를 바라봤다. 신관 임명 이후로 처음 신관이 신전을 비우는 것이라 다들 얼굴에 수심이 가득했다.

 

“제가 이 행성에 없어도 저는 언제나 행성의 안위만을 최우선으로 생각하고 있으니 다들 걱정하지 마시고 잘 계세요. 그럼 다녀오겠습니다.”

 

신전 마법사들에게 살가운 신관은 아니었을지 몰라도 십 년간 신전에서 생활했던 백현에게는 가족과도 같은 이들이었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한시 빨리 ‘그자들’을 찾으러 가야 한다는 조급한 마음이었는데. 정작 떠나려니 발걸음이 무거웠다.

 

“부디 몸조심하십시오, 신관님.”

 

레카의 걱정의 말에 백현이 고개를 끄덕이고는 사무실을 나갔다. 백현의 뒤로 레카를 따라 몸조심하라는 마법사들의 말들이 들렸다.

백현은 자신의 기력을 최대치로 열 수 있는 결계방으로 갔다. 문 앞에는 찬열이 기다리고 있었다. 찬열이 문을 열며 말했다.

 

“들어가시죠, 신관님.”

“예? 왜 갑자기 존칭을…”

 

백현이 뭐라고 더 말하기 전에 찬열이 백현의 등을 떠밀며 방 안으로 들어갔다.

 

“그냥, 그러고 싶어서. 자, 그럼 이제 가볼까? 지금 기력은 어때? 내가 느끼기에는 괜찮은 것 같은데.”

“예. 좋습니다. 뭔가… 한결 가벼운 마음이네요.”

“그렇다니 다행이구나. 자, 이리 오거라.”

 

찬열이 백현을 향해 두 팔을 벌렸다. 마치 안기라는 것 같이.

 

“어딜…말입니까?”

“내 품에 말이다. 순간이동을 해야 하지 않느냐.”

“순간이동을 하는 데 어째서 프로테메스님의 그…품,에… 제가 안겨야 합니까? 신체 일부만 닿으면 되는데요.”

 

백현이 질문을 하면서도 어떤 단어들을 말하기가 부끄러웠다. 동그랗게 뜬 눈과 발개진 귀가 퍽이나 귀여웠다.

 

“행성간의 이동은 쉽지 않아서 일부분의 접촉으로는 위험 가능성이 커진다. 그러니 어서 안기거라. 힘들다면 내가 업고 갈까?”

“아아- 아닙니다, 안아요, 안아! 안는 것이 뭐 그리 어렵다고…”

 

아무렇지 않다는 식의 말을 하는 백현의 귀는 점점 더 붉어졌다. 그런 백현을 보고 찬열이 참지 못한 웃음을 풉-하고 내뱉었다.

 

“왜 웃습니까?”

“아니… 귀여워서.”

“예?!”

 

안 그래도 커졌던 눈이 더 커지는 백현을 찬열이 잽싸게 안았다. 아니, 가볍게 포옹만 하기로 했지만 찬열이 저도 모르게 백현을 공주님 안기로 안아 들었다. 백현을 내려다보는 찬열의 얼굴이 너무 가까웠다. 성인이 되어서 이런 각도로 서로를 바라본 건 처음인지라 백현은 순간 숨을 헙-하고 멈췄다. 찬열이 백현을 향해 활짝 웃음과 동시에 찬열의 마음이 붕- 떠올랐다.

백현이 뿌리칠 새도 없이 찬열이 목적 행성에 있는 불을 찾아 이동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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