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주님. 일어나셔야죠.”

 

출근 준비를 다 끝낸 우진이 대휘의 이마를 쓰다듬고 입을 맞추자 대휘가 우진의 겨우겨우 눈을 떴다. 밤새 우진의 허리짓을 받아느라 허리가 끊어질 것 같았다.


“벌써 일어난 거야?”

“우리 공주님. 오늘도 바쁘다고 미세스 문 아주머니가 스케줄표 놓고 가셨어요. 일어나야지.”

 

끙차 하고 일어나는 대휘는 아직도 아기수달처럼 뽀둥하기만 한데...

 

“헉. 어떻게 혀엉...”

 

목부터 쇄골, 가슴이며 팔, 허벅지에 다리까지 온몸이 울긋불긋해진 대휘는 벙찌고 말았다. 우진 저도 할 말이 없기는 매한가지였다. 나름 참는다고 참았는데도 이정도이니...그래도 대휘를 안으면, 대휘가 오직 저만 바라보는 걸 아는데도 대휘의 몸 안팎으로 제 것이라고 각인하고 싶었지만 우진은 늘 참고 제 페로몬을 마킹하는 걸로 만족했다. 보기와 다르게 구식인 탓에 우진은 정식으로 결혼한 후 대휘가 원할 때 각인을 하고 싶었다. 이렇게 참는데도 대휘의 달콤한 살냄새만 맡으면 미치는 것이다.

 

아침 7시 식사 시간에 늦지 않기 위해 빛의 속도로 씻고 미세스 문이 코디해놓은 옷을 입고 다이닝룸으로 뛰어 내려갔다. 우당당탕 뛰어내려오는 소리에 다이닝룸에 먼저 도착한 혜경의 인상이 살짝 찌푸려졌다. 대휘는 최대한 빨리 인사하고 의자에 앉았다.

 

“죄송합니다.”

 

혜경이 눈빛으로 저를 책망하는 것 같아 어깨가 움츠러든 대휘가 일부러 활짝 웃으며 말했지만 아직도 얼얼한 엉덩이 때문에 대휘의 얼굴이 살짝 찡그려졌다.

 

“미세스 문. 대휘, 다른 옷이 없나? 답답해 보이는데.”

 

목까지 올라오는 캐시미어 니트를 입은 대휘를 보던 혜경이 미처 가려지지 않은 목덜미의 진한 키스마크를 보더니 우진을 노려보았다. 저 녀석이...그 아버지의 그 아들이니 우진의 힘이 대단할 거라는 건 한눈에도 알 수 있었다. 혜경 저 역시 처음 신혼 때는 남편과의 잠자리가 끝나면 하루종일 일어나지 못했으니까. 누가 봐도 우성 알파의 넘치는 성욕을 당해내기엔 대휘는 너무 여린데 아무리 제 아들이라도 걱정이 앞섰다. 저러다 대휘가 부서지기라도 하면 어쩌려고. 소중하고 예쁜 것들은 그만큼 부서지기 쉬운데. 혜경은 속으로 혀를 찼다.

 

주방 찬모가 오색 고명을 얹은 전복죽과 미역국을 제 앞으로 서빙해주자 대휘의 눈이 동그래졌다. 혀엉...시선은 우진을 향해 있는데 대답은 혜경이 했다.

 

“미세스 문. 대휘 먹이게 보약 한 재 지어와요.”

“전하의 약도 같이 지을까요?”

“부대로 돌아갈 건데 그 힘을 어디다 쓰게.”

 

말해놓고도 혜경의 얼굴이 빨개지고, 혜경의 말에 대휘의 귓불도 다시 빨개졌다. 첫날밤을 치룬 후 먹는다는 전복죽을 우진이 주문했을까...아니면 밤새 저와 우진의 격한 정사에 본가 전체가 다 들썩인 걸까. 나름 소리 안내려고 입을 틀어막았지만 몰아붙이는 우진의 힘에는 소용이 없었다. 몸이 뽀개지지 않는 걸 고맙다고 해야 하나.

 

“오늘은 왕후폐하와 공주님과 함께 국립어린이병원개원식에 참석하십니다. 왕세자 전하의 약혼자이신 채령양도 도련님도 같이 동행하십니다. 다음엔 다문화가정아동센터 방문하시구요 오후엔 여성기업인들과의 모임에 참석하셔야 하구요. 이상입니다.”

 

 

혜경과 함께 국립 어린이 병원 개원식 참석을 위해 어린이 병원에는 도착한 대휘는 안쪽에 마련된 대기실에서 왕후와 채령이 오기를 기다렸다. 왕후를 직접 알현하는 건 처음이라 대휘는 살짝 긴장됐다. 수행한 시종이 왕후의 도착을 알리면 배운대로 일어나 자리에 앉을 때까지 목례를 하고 있어야 한다. 인사는 시종이 소개를 한 후 왕후의 허락이 있을 때 그 앞에 가서 목례를 먼저 하고 손을 내밀면 가볍게 악수한다. 악수가 끝난 후 눈을 맞춘다. 대휘는 속으로 몇 번이나 되뇌었다.

 

“참고로 말하면 오메가가 왕실의 가족이 된 경우는 니가 처음이야. 이전에 후궁인 경우는 있었지만 지금은 일부일처제라. 물론 너도 알다시피 숨겨진 애인으로는 오메가가 많았지만. 공식적인 반려는 니가 처음이야. 무슨 말인지 알지?”

 

속사포 랩을 쏟아내는 듯한 혜경의 말에 대휘는 다시금 긴장이 됐다. 조금 전까지는 단순히 왕실의 안주인이자 만인의 우상인 왕후를 알현한다는 사실에만 고무되어 있었다면 지금은 가장 높은 자리에 오르는 최초의 오메가라는 사실이 더 긴장되었다. 게다가 왕후와 혜경 각자의 외아들의 짝들이 같이 자리하는 것이다. 비록 저쪽은 공식적인 약혼녀고 대휘 자신은 아직 윤허를 받지 못한 정혼자라는 차이가 있지만.

 

이내 밖이 부산스러워지면서 대휘의 상념은 지워졌다.

 

왕후폐하와 채령양이 듭십니다.

 

문이 열리고 시종이 들어와 고하자 대휘가 먼저 자리에서 일어나고 결혼 전엔 자신 앞에서 눈도 제대로 들지 못했던 왕후가 도착했다는 말에 혜경은 무심한 얼굴로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어서 왕후와 채령이 들어왔다. 혜경보다 더 아름답고 고급지게 치장한 두 사람이 들어서자 살짝 목례만 하는 혜경과 달리 훗날 우진과 결혼하더라도 품계가 아래인 대휘는 왕후가 자리에 앉을 때까지 고개를 숙인 채 였다.

 

“우진 공작의 정혼자인 대휘군입니다.”

 

시종의 안내로 인사를 윤허한 왕후의 앞으로 가 인사를 했다.

 

“이대휘라고 합니다.”

 

왕후가 대휘의 인사를 받고 손을 내밀었다. 대휘 저와는 비교도 안되게 물 한 방울 안 묻혔을 것 같은 하얗고 가늘고 긴 손을 대휘는 두 손으로 공손하게 맞잡았는데...

 

“오호. 그 유명한 신데렐라로군요. 국립대학교 의대생이라고 했나요? 아직 어린데 왕실 가족으로 잘 해낼 수 있을까?”

“아주 영특한 아이입니다. 국립대학은 아무나 들어갈 수 있는 곳이 아니지요. 게다가 의대 입학할 때부터 과탑을 놓치지 않은 아이입니다.”

“누가 뭐래요? 공주께서 어련히 알아서 고르셨으려구요. 처음 제가 왕세자비로 간택됐을 때 왕실에서 걱정했던 게 그거 아니었나요? 개나 소나 다 가는 호주유학 다녀온 게 대수냐고 하셔서.”

“개나 소나라니 당치도 않습니다. 당시 정부에서 학생들의 무분별한 도피성 유학이나 조기유학을 우려한 것이지 왕후폐하의 호주유학과는 경우가 다르지요. 왕후폐하가문 덕분에 많은 경제인들이 해외에서 활발하게 기업활동을 하고 있지 않습니까? 또한 국립대학의 위상이 여타의 해외대학과 비교해서 절대 밀리지 않는다는 말씀을 드린 것 뿐입니다.”

“그런가요?”

 

왕후의 손과 맞잡은 채 대휘는 왕후와 혜경의 신경전의 한가운데 놓여 있었다. 현세기 유일한 공주지만 귀족의 아내가 된 혜경과 기업가 집안이라도 평민의 딸로서 왕실의 최고의 안주인이 된 왕후와의 보이지 않는 알력이 느껴지는 순간이자 현장이기도 했다. 이 두 사람 가족 아니었나. 이쯤에서 놓아도 되나 왕후는 왜 손을 빼지 않는 걸까. 저 혼자 진땀이 흐르는 걸 두 사람은 아는지 모르는지. 때마침 시종으로부터 행사가 시작한다는 말에 대휘도 얼른 손을 빼낼 수 있었다.

 

혜경은 혜경대로 속이 시끄러웠다. 평민을, 그것도 내세울 거라고는 국립대 의대 재학생이라는 것 외엔 비빌 언덕 없는 고아를 반려로 인정할 때부터 각오는 했지만 매순간 이렇게 대휘를 커버쳐야 한다 생각하니 화도 나고 짜증도 났다. 제 오라비인 왕세자와 결혼하기 전까지는 감히 제 앞에서 눈도 제대로 못 뜨던 평민이었던 왕후였다. 사실 말이 유학이지 재벌가의 자제들 다 가서 받아오는 MBA를 수료한 것도 아니고 호주에서 학위를 받아온 것도 아니면서 유학파라고 생색내는 주제에 우진의 짝으로 점찍어두었던 채령마저 왕세자에게 빼앗겼고 그나마 재벌가의 딸인 서윤마저 놓치고 얻은 게 고아 대휘라 생각하니 비우자 생각했던 마음에 화가 쌓이는 것 같았다. 그러나 어쨌듯 저는 공주지만 왕후는 퍼스트레이디였다. 상황이 바뀐 것이다.

 

국립어린이병원 본관 앞에 준비된 행사장으로 가기 위해 대기실을 나서서 앞장 선 왕후와 혜경의 뒤를 따라 나란히 걷는 대휘와 채령은 겨우 5분 전 인사만 겨우 나눈 사이였다. 현 총리의 딸이라는 채령의 집안 역시 공작으로 세습귀족이었고 채령은 한눈에 반할 만큼 예쁜 여자였다. 우진을 만나지 않았다면 살면서 절대 만날 일 없는 귀한 신분의 사람들이었다.

 

“우진이..아니 우진공작이 쉬운 사람이 아닌데 어떻게 그 마음을 잡았어요?”

 

채령의 말에 대휘의 온 몸의 촉이 섰다. 우진이...우진을 그렇게 부르는 사람이라면 일단 경계심이 앞섰다. 예전 강서준도 그랬지.

 

“잘 아시는 사이세요?”

“세습 귀족은 몇 안되니까요. 어릴 때부터 친했기도 하고.”

“아...”

“대답 아직 안했어요.”

“우진이형 쉬운 사람은 아지니만 더 없이 착한 형이예요. 우진이형 좋아하는 사람들은 모두 그렇게 말하죠.”

 

대휘의 말에 채령의 얼굴이 살짝 굳어지더니 피식 웃고 다시 앞으로 고개를 돌렸다.

 

복도를 빠져나와 본관 앞 행사장앞으로 나오자 기자들이 기다렸다는 듯이 플래시가 터지기 시작했다. 아직은 익숙하지 않아 기자들과 카메라에 울렁증이 있는 대휘는 심호흡을 하는데 혜경과 왕후, 채령은 익숙한 듯 천천히 손을 흔들며 여러 방향으로 시선을 맞추며 화답하곤 단상에 마련된 자리로 가 왕후와 혜경을 중앙에 두고 대휘와 채령이 각각 그 옆에 앉았다.

 

단상 아래 의자에는 의료진들과 입원한 어린이들, 보호자들이 앉아있고 미처 자리를 잡지 못한 사람들은 서서 일생 일대 한번 볼까말까한 왕후와 왕실가족을 보기 위해 안간힘을 쓰고 있었고 기자들은 그런 왕후와 왕실가족을 취재하느라 정신없었다. 재단이사의 감사인사를 하는 동안 미처 자리를 잡지 못해 목발을 양 겨드랑이에 낀 채 서서 단상을 응시하는 소년에게 시선이 간 대휘는 가만히 주변을 둘러보았지만 누구 하나 소년에게 자리를 양보하는 사람은 없었다. 보다 못한 대휘가 가만히 자리에서 일어나 소년에게 다가갈 때까지도 화려하고 아름다운 왕후에게 집중되어 있었던 카메라들은 일제히 대휘가 소년을 데리고 단상으로 올라와 자신의 자리에 앉히고 그 옆에 서서 다시 재단이사에게 집중하는 그 일련의 모습을 경쟁적으로 카메라에 담기 시작했다. 사람들의 웅성임에 시선을 옮겼을 때 소년에게 다가가는 대휘를 보고 놀랐던 혜경은 당황한 기색의 왕후와 채령의 표정을 보곤 이내 의기양양한 미소를 지었다.

 

이 사진은 실시간으로 포털사이트를 점령하기 시작했다. 이어 왕후의 축사와 리본커팅이 시작되었다. 보라색과 핑크색의 하늘색의 리본을 병원장과 대휘, 혜경과 왕후, 채령과 재단이사의 리본 커팅이 끝나고 의료진과 환아들의 기념촬영이 끝나자 아이들의 어깨에 손을 올리고 사진을 찍었던 왕후와 채령은 방금 전까지 상냥하게 웃던 미소를 지우고 얼른 아이들의 몸에서 손을 떼낸 후 지저분한 걸 만졌다는 듯 손을 톡톡 털며 다시 건물로 들어서려는데 다시금 기자들이 웅성거리고 밝은 웃음소리가 들리기 시작했다. 기자들이 선 곳엔 어느 새 잘린 긴 보라색 리본을 버리지 않고 그대로 제 목에 둘러 리본으로 맨 대휘를 에워싼 채 대휘의 손에 들린 리본을 얻으려는 아이들이 있었다.

 

- 리본으로 매신 이유는 무언가요?

- 이 리본 하나도 세금이잖아요. 한번 쓰고 버리면 안 되죠. 예쁜데.

 

인터뷰하는 사이에도 아이들의 손목에 일일이 보라색, 핑크색, 하늘색 리본을 묶어주는 대휘의 모습은 그대로 기자들에 의해 포털사이트를 뒤덮었다.

 

<소탈하고 상냥한 어린이의 친구 미래의 공작부군>

<센스있고 사랑스런 공작의 정혼자>

 

다음 날부터 거리엔 보라색 리본을 모티브로 한 머리핀과 헤어밴드, 귀걸이와 키링을 한 사람들이 폭발적으로 늘어나면서 패션업계에서도 관련 상품들을 런칭하기 시작했다. 바야흐로 왕세자비가 될 채령을 능가하는 대휘의 인기였지만 혜경은 그마저도 마음에 들지 않았다. 너무 평민적이어서 소박한 대휘였다. 그래도 결혼하면 귀족인데 언제까지 저렇게 친평민적 모습만 보이려는지.

 

 

“어제 왕실 전용 의상실에서 맞춘 옷도 많은데요...”

 

다문화가정 아동센터 방문과 여성 기업인 모임까지 모든 스케줄이 끝난 후 집으로 가나 했더니 혜경과 대휘를 태운 차가 도착한 곳은 백화점이었다. 혜경이 쇼핑하나 싶어 뒤따라가니 정비서의 안내에 따라 명품관이 아니라 국내 브랜드매장에서 대휘의 옷이었다.

 

“언제까지 누더기 옷을 입은 신데렐라 코스프레 할 거니? 이젠 마법을 써서 무도회에 간다고 아무도 널 비난하지 않아.”

 

입으로는 웃고 있었지만 아직도 대휘 자신에게 못마땅한 게 있는지 여전히 차가운 혜경의 말에 대휘는 입을 다물고 매니저가 권해주는 옷을 들고 피팅룸으로 들어갔다. 늘 보세옷이나 SPA브랜드에서만 옷을 사 옷에 대해 잘 모르지만 키가 크진 않아도 팔다리가 길고 비율이 좋은데다 머리도 작고 각진 어깨와 곧은 등과 다리, 가는 허리가 고르는 모든 디자인을 잘 소화했고, 하얀 얼굴은 모든 컬러를 다 소화해내 샾 매니저들의 손길이 바빠졌다. 마치 인형에 옷을 갈아입히듯 대휘를 피팅룸으로 보내 선을 보이며 극찬을 하기에 바빴다. 늘 선 굵어 지극히 남자다운 옷을 즐겨 입는 우진만 보다 선이 가는 대휘의 미친 의상 소화능력에 지켜보던 혜경의 눈도 동그래졌다.

 

도련님께서는 모델을 하셔도 되겠어요.

 

살면서 이렇게 옷 많은 곳도 처음이고 옷 많이 갈아 입어보는 것도 처음인데 몇 개의 매장을 방문하느라 대휘는 어느새 지치고 말았다.

 

“한곳에서 사면 안 되나요?”

“귀족들도 국산 브랜드를 애용한다는 모습은 왕실의 이미지에 큰 도움이 되니까.”

 

대휘는 다시금 기자들 앞에 드러나는 모습은 모두 컨셉이라던 미세스 문의 말이 떠올랐다.

 

“내수경제 활성화 효과와 국내 브랜드의 해외 마케팅에도 도움이 되구요.”

 

혜경이 제법이라는 듯 웃어 보였다. 다 괜찮은데, 평민이라는 것도, 오메가라는 것도, 국립대 의대 예과 시절부터 4년 내내 과탑 유지할만큼 똑똑한 것도, 나름 귀염성 있고 못 생기지 않은 것도, 이제껏 본 적 없는 모습으로 이슈가 되는 것도 다 좋은데 고아라 취향 저렴한 건 정말 싫었다. 차라리 싸가지 없어도 있는 집 평민 가문이었다면 이 모든 게 다 커버될 텐데. 힘들다. 차 한잔 마시자. 혜경의 말에 마침 목이 마르던 참이라 대휘는 환하게 웃으며 이 또한 미리 섭외가 끝난 듯 정비서가 익숙하게 안내하고 그 뒤를 따라 걸을 때였다.

 

저 앞에서 걸어오던 외국인 부부의 아이가 기침을 하며 하얗게 질린 얼굴로 쓰러진 건.

 

Oh my god!

 

외마디 소리와 함께 오가는 사람들의 웅성거리는 소리에 대휘와 혜경까지 걸음을 멈추었다.

 

My baby doesn’t breathe. Help me!!

 

엄마인 듯한 여자의 목소리는 울음으로 바뀌어 있었다. 영어를 못 알아듣는데도 대충 위급한 상황이라는 건 알 수 있었다. 대휘가 뛰어가자 옆에 있던 혜경까지 쫓아왔다. 대휘가 다가와 살폈을 때 여자의 품에 안겨 쓰러진 아이의 얼굴은 하얗다 못해 입술까지 파랗게 질려가고 있었고 호흡 상태를 봤을 때 숨을 쉬지 못했다.

 

지난 학기 때 배웠던 응급의학강의가 떠올랐다. 산소부족으로 인한 전형적인 청색증이었다. 아이의 손엔 사탕조각이 남은 막대가 쥐어져 있었고 입가엔 사탕 부스러기가 남아있었다. 아마도 깨물어 먹은 사탕조각이 기도를 막은 것 같았다. 사람들 틈에서 대휘를 지켜보는 혜경과 정비서의 얼굴도 당황한 상태였다. 하인리히 구급법. 더미와 동기들 끼리 연습만 해봤지 실제로는 해본 적 없었다. 아니 배웠던 모든 응급구조법을 실제로 이용해본 적이 없었다. 저는 고작 본과 2년생이었고 병원에서의 임상실습은 3학년부터 시작이니까.

 

그러나, 고민할 시간이 없었다. 지금 119나 백화점 의무실에 연락을 해도 최소 5분 이상은 걸릴 것이고 응급구조에서 심정지의 골드타임은 5분, 기도 막힘은 4분이내였다. 그 골드타임을 놓치면 사람은 빠르면 10분, 늦어도 2주 안에 사망에 이른다. 아이의 부모뿐 아니라 주위를 둘러싼 모든 사람들이 대휘 저 만을 바라보고 있었다. 생각이 많아질수록 대휘의 머릿속은 오히려 차분해졌다. 우선은 119에 신고를 해야 한다. 막연하게 누가 119에 신고해주세요라고 말하는 게 아니라 구체적으로 한 사람을 지정해서 말해야 한다. 불특정다수에게 부탁하면 서로 미루다 전문 구조원의 도착이 늦어진다. 저가 하는 건 말 그대로 응급처치일 뿐 아이의 숨통이 트이면 아이를 병원으로 옮겨 진찰받을 받게 해야 한다. 응급처치는 산소공급까지만 이었고 산소공급을 시키는 목적 때문에 다른 곳에 상처를 입는 경우도 있다. 심폐소생술을 시행 도중 늑골에 골절을 입거나 화상을 입는 환자들도 있고 하인리히 구급법 시행으로 식도나 기도에 상처가 나는 경우도 있어 병원으로의 이송은 필수였다.

 

“공주마마. 119에 얼른 신고해서 여기 위치를 정확히 알려주세요.”

“응? 뭐라고..?”

 

혜경은 이 상황이 당황스러운지 넋이 나가 아무것도 못하고 벙찐 채였다. 응급의학 교수가 말했었다. 누구나 할 줄 알지만 실제 상황에서 실행할 수 있을 만큼 숙련되어야 한다고. 보통은 혜경처럼 충격으로 허둥거리기 마련이었다. 심지어는 의대를 졸업한 인턴 중에서도 이런 일은 동기 중 꼭 한명은 있었기에 응급처치는 절대 한사람에게만 맡기지 않았다. 안되겠다.

 

“정비서님. 119에 얼른 연락해서 여기 위치 알려주세요..”

“네. 도련님.”

 

정비서가 전화하는 걸 보고 대휘는 가드에게 백화점 직원을 불러와달라고 부탁했다. 더 이상 벙찐 혜경을 신경쓸 겨를없이 대휘는 울부짖는 아이엄마의 품에서 아이를 받아 몸을 일으켜 세운 후 뒤에서 끌어안아 아이의 몸을 앞으로 숙이게 한 채 두 손으로 배꼽과 명치 사이의 복부를 오른손으로 왼주먹을 감싸고 마치 밀어내듯 압박했다. 풍선효과처럼 뱃속의 공기를 압박해 기도를 막은 물질을 밀어올리는 원리를 이용한 응급처치였다. 한번...두번...그리고 좀 더 세게 한 번 더.

 

켁!! 소리와 함께 제법 큰 사탕조각이 아이의 목에서 튀어나왔지만 새파랗게 질려있는 아이의 얼굴도 변함이 없었고 미동도 없었다. 시간을 확인한 대휘는 다시 아이의 코에 귀를 대 숨을 쉬는지 확인도 해보고 경동맥에 손을 대 맥이 뛰는지도 확인하고 안 되겠는지 아이를 똑바로 바닥에 눕혔다. 자동제세동기를 찾아올 시간이 없어 곧바로 심폐소생술을 시작했다. 가슴 중앙 아래쪽을 절반으로 나눠 왼쪽에 가까운 부위에 한쪽 손바닥을 대고 다른 손을 그 위에 포개어 깍지를 낀 후 팔꿈치를 곧게 펴고 저의 체중이 실리도록 수직으로 해서 강하고 규칙적으로 압박했다. 말은 쉽고 보기에는 쉬워도 직접 하는 사람의 온 힘이 들어가야 하는 힘든 응급조치였다.

 

속으로 하나, 둘, 셋...세어가며 흉부압박을 하던 대휘는 아이의 코에 다시 귀를 대보고 다시 시작했다. 하나, 둘, 셋...다시 코에 귀를 대보고...대휘의 온 몸이 땀투성이가 되고 다시 처음부터 시작하는 순간 아이가 헉 하는 밭은 숨을 내쉬더니 으앙 하고 울음을 터뜨렸다. 주위를 둘러싼 사람들이 안도의 환호성을 질렀다. 아이를 붙들고 울음을 터뜨리는 아이 부모를 보며 비틀거리다 엉덩방아 찧듯 자리에 주저 앉은 대휘 역시 울고 싶었다. 응급의학 첫 강의 때 교수가 했던 말이 떠올랐다. 누구나 알지만 숙련되있지 않으면 실제 상황에서 당황해 불의의 상황을 막을 수 없는 경우도 많다고.

 

겨우 정신을 차린 대휘가 돌아보니 혜경이 멍하니 저를 바라보며 울고 있었다. 아마도 이런 상황은 처음이라 놀란 건지 아니면 또 대책없이 나댄 자신 때문에 화가 난 건지 감이 오지 않아 후들거리는 다리로 겨우 일어나 혜경에게 다가가 차갑게 식은 두 손을 쥐었다.

 

“공주마마. 끝났어요.”

“끝나?”

 

혜경은 대책없이 나댄 대휘 때문에 화가 난 게 아니었다. 이 급박한 상황이 무서운데 놀랐던 것이다.

 

“아이 살았어요. 이제 걱정하지 않아도 돼요.”

 

아직도 공포와 충격이 가득한 눈빛으로 대휘를 바라보는 혜경은 눈물을 흘리고 있었다. 순간적인 공포와 충격에서 헤어나오지 못하는 혜경이 안쓰러워 대휘는 가만히 안아주자 혜경은 비로소 깊은 심호흡을 하며 중얼거렸다.

 

“그래...살았구나. 대휘 네가 살렸어.”

 

혜경의 목소리는 회한과 슬픔으로 가득했다.

 

 

“마마. 차 준비했습니다.”

 

최집사가 들고 온 차 트레이를 혜경의 테이블에 놓아주고 한걸음 물러났다. 의자에 앉아 큰 창으로 보이는 정원을 응시하는 혜경의 눈빛은 아련하고 회한으로 가득 찼다. 테이블 위의 태블릿에는 소녀를 구해낸 대휘의 사진이 실린 기사가 띄워져 있었다.

 

<우진 공작의 약혼자 대휘군. 백화점에서 어린 소녀 목숨 구하다>

<공작의 약혼자 대휘군이 구한 어린 소녀 상태 양호>

 

“기사 봤어?”

“도련님은 진실한 분입니다. 용감하시구요. 어리신데도 큰 일을 하셨지요. 생명을 구하는 건 쉬운 일이 아니예요. 한 사람의 구한다는 건 세상을 구하는 거라는 말도 있듯이.”

“.........”

 

딱히 최집사의 말에 부인하는 게 아니었다. 오히려 그 위급한 상황에서 침착하게 대처하던 어린 대휘가 대견스럽다 못해 자신이 부끄러워졌다. 뿐인가 태어나면서부터 타인의 시선을 의식해야하는 삶을 살아온 자신과는 달리 대휘는 모든 사람들을 있는 그대로 대했고 행동과 말에는 위선이나 거짓을 찾기 힘들었다.

 

“마마. 공작 전하의 일은 누구의 잘못도 아니예요. 국가와 국민에 대한 사랑만큼 책임감이 강하셨던 분의 죽음 앞에서 자책만 한다면 공작 전하는 서운해 하실 겁니다. 그분이 꿈꿨던 세상에서 감사하고 서로 사랑하며 행복하게 사는 모습을 더 보고 싶어 하실 겁니다.”

“그렇겠지...”

 

혜경의 눈이 촉촉하게 젖어들었다. 남편인 장관이 세상을 떠나고 10년...혜경도 우진도 겉으로는 내색하지 않았지만 그날의 슬픔에서 아직도 빠져나오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최집사는 모르는 게 없네.”

“장관님과 공작전하를 업어 키웠습니다. 송구스럽습니다만 공주님보다 더 오래 장관님과 생활했을 겁니다.”

 

그날 밤 혜경이 가만히 대휘의 방문을 열었을 때 대휘는 침대 옆에 책을 떨어뜨린 채 도롱도롱 잠든 채였다. 혜경이 떨어진 <응급의학>책을 주워 협탁에 가만히 놔두고 이불을 잘 여며주다 순둥하게 잠든 모습이 귀여워 이마에 헝클어진 머리카락도 정리해주었다. 이렇게 보니 우리 사윗감 오목조목 귀엽고 예쁘게 생긴 것 같기도 하고...입가에 희미한 미소를 띄우곤 스탠드를 꺼주고 방을 나왔다.

 

 

하얀 실크 셔츠와 하얀 정장바지, 붉은 실이 섞인 고급 트위드 자켓은 대휘의 작고 동그란 검은 머리, 하얀 얼굴과 붉은 입술에 잘 어울렸다. 마치 흠잡을 데 없는 예술작품을 본다는 듯 만족한 웃음을 지으며 대휘를 거울 앞에 세운 미세스 문이 혹시라도 부족한 곳이 없나 살피다 살구빛 글리터를 눈가에 톡톡 발라주고 살구빛 블러셔도 잊지 않았다. 이런 메이크업은 해도 해도 어색해서 대휘는 너무 진하다싶은 생각에 손으로 닦아내다 미세스 문에게 딱 걸렸다.

 

“그냥도 예쁘지만...조금만 꾸며도 어느 누구도 도련님을 고아라고 생각 못 할 거예요.”

“아주머니. 전 고아인 게 창피하지 않아요.”

“알죠. 도련님은 고아도 그냥 귀족도 아니죠. 걸어 다니는 요정이예요.”

 

미세스 문이 자몽빛 틴트를 들고 와 입술만으로 ‘아’하고 대휘에게 말했다. 그래도 미세스 문이 가장 편한 대휘인지라 미세스 문의 하라는대로 아 벌리는 대휘였다.

 

“공작 전하는 복도 많지. 이런 요정을 반려로 맞으시다니. 움파움파.”

“아주머니. 움파움파.”

“네네. 도련님은 요정도 신데렐라도 아니라는 거죠? 그러나 포털 사이트 실검 1위는 늘 도련님이세요. 모두 도련님을 궁금해하고 어느새 왕실의 마스코트고 셀럽이세요.”

“어디 가서 그런 말 하지 마세요. 왕세자비가 되실 채령님이 계신데.”

 

대휘가 질색을 하거나 말거나 미세스 문은 대휘의 팔에 가는 금팔찌를 채워주었다.

 

“이 정도면 채령아가씨한테도 절대 꿇리지 않아요. 공작전하가 채령아가씨를 거들떠도 안 본 이유가 다 있다니까...”

“미세스 문.”

 

갑작스런 혜경의 말에 대휘도 미세스 문도 깜짝 놀라고 말았다. 언제 들어왔는지 대휘의 방에 오늘도 어김없이 아름다운 연한 라임색 오간자 드레스를 입은 혜경이 정비서를 대동하고 와 있었다. 미세스 문이 아차 싶어 얼른 입을 손으로 막고 물러나자 혜경이 정비서에게 눈짓을 했다. 정비서가 두 손에 든 벨벳상자를 들고 앞으로 나와 혜경과 대휘의 앞에서 뚜껑을 열었다. 그냥 상자가 아닌 주얼리 상자였던지 상자 안에는 초승달 모양으로 섬세하게 세공된 순금 팔찌와 브로치, 한눈에도 고가로 보이는 시계가 들어 있었다.

 

“이 팔찌는 다이아몬드로 장식된 순금 팔찌야. 내가 성인이 되었을 때 아버님이신 선대 황제께서 선물로 내린 거지. 귀걸이나 목걸이보다는 이 팔찌와 브로치가 더 어울릴 것 같아 주는 거야. 이 시계는 내가 태어났을 때 스위스 시계 장인이 직접 만든 수제 시계. 세상에 단 하나밖에 없는 시계야. 역시 금과 다이아몬드로 나의 별자리와 왕가문양이 장식되어 있어.”

“그런데 이걸 왜...?”

“우진이 짝이 생기면 주려고 했는데 그날이 오늘인 것 같다.”

 

대휘는 제 손목에 팔찌와 시계를 각각 채워주는 혜경을 보며 벙쪘다.

 

“그저 얼굴 하나 믿고 신분상승하려고 우진이를 유혹한 줄 알았는데...내가 오해한 거 같아. 너처럼 진실하고 용기있는 사람은 처음이야.”

 

자신이 그런 사람인 줄 몰랐다. 늘 고아라고, 오메가라고, 가난하다고 무시받을까 봐 믿을거라곤 머리 하나밖에 없어 매일매일 열심히 살아온 것 밖에 없는 저라서 저도 몰랐던 저의 좋은 모습을 찾아봐주는 혜경이 고마워 대휘는 할말을 잃었다.

 

“우진이가 청혼하면서 뭐 줬니?”

“음...사랑?”

 

우진이라는 이름만 나와도 좋아서 어쩔 줄 모르는 표정의 대휘를 보며 혜경은 어이가 없었다. 혜경의 표정에서 자신이 또 잘못했나 싶어 대휘는 괜히 주눅이 드는데,

 

“아무튼 이 집안 남자들은 사랑만 가지고 다니지.”

 

혜경이 대휘의 머리며 옷매무새를 다시 한번 봐주고 말했다.

 

“예쁘다. 다음엔 내 보석방 보여줄게. 왕후만큼은 아니지만 어머니인 태후마마께 받은 게 많아. 다 너 줄게.”

 

마치 친구 대하듯, 딸 대하듯 제 두 손을 붙잡고 상냥한 눈빛으로 말하는 혜경의 표정은 아이같이 맑아서 대휘도 고개를 끄덕였다.

 

문이 열리고 대휘가 방을 나와 아래 층 거실로 내려왔을 때 대휘를 기다리던 왕실정복 차림의 우진은 기품있는 대휘의 모습에 감탄하며 한쪽 무릎만 세운 채 바닥에 무릎을 꿇고 앉아 신을 숭배하는 눈빛으로 올려다보며 손을 내밀었다.

 

“내 사랑 이대휘. 나와 결혼해 주겠어?”

“혀엉...”

 

정식으로 청혼하는 우진의 손에는 다이아몬드가 눈부신 웨딩밴드가 들려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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