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날의 인어는 로잔나에게 물었다.

너 한 사람과 백 사람이 있다면 누굴 살릴래?

로잔나는 백 사람이라고 답했다.

인어는 물었다. 너 나와 백 사람이 있다면 누굴 살릴래?

로잔나는…….

 

심장을 담은 함

이야기와 동화의 차이

높게 나는 용

담아 올린 마음

 

 

 

1. 心腸을 담은 함

 

사르디나에는 유독 살아 숨 쉬는 전설들이 많았다.

그건 아주 오래간 통령의 자리에 머무른 로잔나 데 메디치에 관한 것이기도 했고, 달 없는 밤 갈라져 열린다는 사르디나의 앞바다에 관한 것이기도 했으며, 이제는 없는 푸른 용에 관한 전설이기도 했다.


어머니가 그 딸에게, 딸이 또다시 그녀의 딸에게. 입을 타고 전해져 내려오며 소실된 것도, 크게 원전과 달라진 것도 존재했지만 기이하게도 사르디나에는 입에서 입으로 구전되는 이야기가 많았다.

 

바닷사람의 이야기란 대체로 그런 것이었다. 파도를 타고 속삭이듯 밀려 들어왔다, 혹여나 바다가 들을까 빠져나가 버리는.

 

거친 바닷바람과 폭풍우와 한 치 앞도 보이지 않는 비바람을 뚫고 살아남는 이야기들은 대체로 자극적이고 거칠었으며 허무맹랑하기 그지없었다. 밍밍한 이야기들은 하얗게 일어난 파도 거품처럼 스러져 버리기에 그랬다.

그러나 모든 이야기가 그러하듯 진흙탕 속에는 진주가 숨어있기 마련이다. 언제나.

 

그러니 오늘은 이런 이야기를 펼쳐 볼까.

저 먼지로 가득한 책장을 보라. 자칫 만졌다간 손이 조약돌처럼 희고 검어질 것만 같다. 아주 오래전에는, 우리가 태어나기도 전에는 저 책장 또한 고급스러운 원목으로 만든 귀중하고 아름다운 가구였겠지. 세월이 그것을 좀먹기 전까지는.

 

이제 빛바랜 아름다움이지만 그것이 중요한 것은 아니다. 두 번째 칸을 보라. 아래서부터 두 번째가 아니다. 위에서부터 두 번째 칸이다. 손으로 그 칸을 짚으면 먼지가 풀풀 날릴 테지만 잠시간은 참아 주기를 바란다. 자, 가장 왼쪽에 세워 놓은 도서로부터 첫째, 둘째, 셋째, 넷째. 손에 걸리는 것이 있는가? 바로 그 책이다. 오늘의 이야기는 그로부터 걸어간다.

 

잔뜩 덮인 두꺼운 먼지를 툭툭 털어내고, 표지를 보라. 커다란 푸른 심장이 그려진 책을 펼쳐 들고, 차를 한 잔 타 오도록 해라. 오늘의 이야기는 짧지 않을 테니 목을 축일 것을 가져오는 편이 좋을 것이다.

준비되었다면 숨을 들이쉬고, 책에 배어든 짜디짠 바다 내음을 느껴 보도록 하자. 그리고 생각해 보자. 달 없는 밤, 바다가 열리고 온갖 금은보화가 가득할, 바다 및 동굴을.

오늘의 이야기는 짭짤하기 그지없으니. 입을 달래기 위해 단 간식을 챙겨 오는 것 또한, 나쁘지 않은 선택이다. 일단 한번 시작하면 멈출 수 없다. 모든 이야기가 그렇듯이.


 

2. 이야기와 동화의 차이

 

사르디나에 떠도는 모든 이야기의 시작은 이렇다.


“옛날 옛날, 아주 먼 옛날, 아직 용과 인간이 친우가 될 수 있고 인어가 앞바다를 헤엄쳐 노래하던 그 시절에…….”

 

그러나 뒤에 올 이야기는 늘 다르다. 그것이 이야기의 묘미다. 같으나 다르고, 다르나 또 같은 것들이 한데 모여 만드는 새로운 것들. 

아마 이번 이야기는 이렇게 시작할 것이다.

 

“……아름다운 바닷가를 끼고 생긴 하얗고 아름다운 나라에, 인어의 친구가 살았답니다.”

 

로잔나 데 메디치를 표현하는 수식어는 한 손에 꼽을 수 없을 정도로 많았다.

 

사르디나의 수호자. 사르디나의 종신 통령. 인어의 친구. 수평선의 항해자……. 고작 한 사람에게 붙이기엔 거대하다면 거대한 수식언들. 그러나 한 사람만을 수식하는 것들. 사르니다의 로잔나 데 메디치는 누구보다 거대하고 강인한 자기에 이것을 모두 짊어졌다.

 

로잔나의 이름이 역사책에 등장한 것은 200년도 더 전이다. 훗날의 역사가들은 ‘로잔나’라는 이름 자체가 통령직과 함께 계승되었다고 해석하겠지만, 사르디나의 사람들은 알고 있다. 그들은 알고 있다. 그들은 보았기 때문이다.

 

그들의 어머니가 소녀였을 적부터 노인이 될 때까지. 노인의 무릎에 앉아 발을 동당이던 어린 소녀가 다시 어머니가 되고, 그 어머니의 딸의 딸이 다시 딸을 낳을 때까지도 통령은 언제나 같은 모습이었다. 바다 위 부서지는 노을을 닮은 머리칼과 누구보다 깊은 눈동자를 지닌 소녀.

 

그들이 사랑하는 통령은 언제나 영원했다.

 

누가 감히 달이 지리라 여기겠는가?

누가 감히 태양이 떨어지기를 바라겠는가?

 

그들의 통령은 달과 같이 영원했으며 태양과 같이 찬란했다. 하여 영원한 존재다. 떨어지지 않는 태양과 끝없이 출렁일 바다를 닮은.

 

로잔나에게 쌓인 세월과 함께 이야기가 수도 없이 만들어지고 사라졌다. 늙지 않는 자에 대한 선망과 질투와 의혹을 가득 담고. 호기심이 고양이를 죽인다고 하던가, 그러나 어떠한 인간도 호기심 없이 살아갈 수는 없었기에.

 

‘로잔나 데 메디치는 밤마다 아이들의 피로 목욕을 즐긴다네.’

‘밤이 되면 인어로 변해 바다를 헤엄치며 노래한다고 하던데.’

‘통령님이 밤거리를 거니는 것을 본 적 있나?’

‘통령님이 심장을 빼 바닷속에 숨겨 놓았다는 게 사실일까?’

 

 

어른에게서 아이로, 아이에게서 어른으로. 노인이 젖먹이에게, 뱃사람이 상인에게. 발 없는 이야기는 파도를 타는 돌고래처럼 끝없이 튀어 오르고 가라앉고. 술잔을 타고 빙글 돌았다, 곧 눈 시커먼 문어처럼 바닷속으로 가라앉고.

 

로잔나의 발걸음 뒤로 진득하게 따라붙는 것은 이야기다. 언제나. 소문이란 것은 발 없는 것들이므로 실재하는지 아닌지도 알 수 없다. 부정할 자 없으나 긍정할 자 또한 없으니. 그것은 죽어 있는 동시에 살아 움직였다.

 

살아 움직이는 것 중 가장 차가운 것이 이야기가 아니던가?

그러나 더없이 서늘하여 심장이 일절 뛰지 않으니, 그것이 어찌 살아있는 것인가?


“어느 날, 폭풍우가 치는 날 밤에……,”

 

너무 밋밋한 표현이다. 코를 질질 흘리는 어린아이들이나 이 대목에서 숨을 꿀꺽 삼킬 것이다. 그러나 지루하다 하품하는 대신 한번 상상해 보자.

 

달 없는 밤이다. 별 한 조각도 보여주지 않으려는 듯 하늘은 촘촘히 먹구름으로 짜여 있다. 출렁이는 파도는 제 몸뚱이 위에 아무것도 올려놓고 싶지 않은 모양인지 꿀떡꿀떡 배를 집어삼킨다. 그야말로 절망의 밤이다. 뱃사람들의 악몽 속에는 꼭 이러한 바다가 등장하곤 한다지. 너무 거대하여 인간을 한없이 무력하게 만드는 바다가.

 

그런데 출렁이는 바다, 휘몰아치는 해류, 소용돌이가 이는 이끼 낀 바위들 틈새를 보라. 조금 더 가까이. 조금 더 가까이. 감았던 눈을 살그마니 뜨고서.

 

바위들 틈새로 깊숙이 들어가고, 또 들어가 보자. 저기 외롭게 우뚝 선 작은 동굴을 보라. 해초가 드리워져 기이한 빛이 새어 나오는…….

그 안에는 도대체 무엇이 있는가?

 

“……수정으로 가득 차 아름답게 빛나는 동굴 안에서, 인어와 소녀는 만나게 되었습니다.”


로잔나는 찻잔을 들어 올렸다.

 

장미 향이 코를 간지럽혔다. 아직은 젊던 용기사도 따라 찻잔을 들어 올렸다. 찻잔이 덜그럭거린다. 용기사의 손 또한 덜그럭거린다. 팔에도, 몸통에도, 얼굴에도 상처와 붕대가 칭칭 그 용기사를 동여매고 있다. 그러나 그 어떤 상처도 상실보다 깊지는 않았을 것이다.

 

갈 곳 없는 용기사. 갈 곳 없는 상실. 갈 곳 없는 마음. 갈 곳 없는 몸뚱이. 그리고 무표정한 사르디나의 통령. 그 무엇도 가볍지 않았다. 그 무엇도 확실한 것이 없다. 하여 헬가는 고개를 들지 않았다.

 

무엇을 본단 말인가, 무엇을 보려고? 보여주고 싶은 것은 이미 없는데. 함께 풍경을 나눌 이도 밤중 창공을 가로지를 이도 등 뒤를 든든히 지켜줄 이도.


 3. 높게 나는 용


로잔나는 깍지 낀 손 위로 턱을 올렸다.

 

“너, 네 몸뚱이 하나 누일 곳 없구나. 불쌍하게도.”

 

답은 돌아오지 않았다. 로잔나는 아랑곳하지 않았다.


“너는 인류를 위해 싸웠으나 평생의 동료를 잃었지. 너는 수많은 사랑하는 이들을 살렸지만 정작 네가 사랑해 마지않는 가족은 잃어버리고야 말았어.”


 답을 바라고 건네는 말이 아니었으니까. 


“네게 선택권을 주마. 우리는 친구였으니까 말이다. 한없이 자비로운 것임을 명심하도록 해. 네게만 건네는 거야. 키를 네 손에 쥐여 주는 거라고. 한 배의 선장이 건네는 키야.”


 이는 그저 애도였으며 공감이었다. 동시에 내미는 손이었으니. 


“너 내 밑에서 다시 사람들이 사랑하는 이들을 잃지 않도록 싸울 테냐? 영원토록? 아니면 조금 쉴 테냐. 네가 잃은 사랑을 애도하면서.”

 

헬가 슈미트, 용을 잃은 용기사는 로잔나 데 메디치와 눈을 마주쳤다.

 

텅 빈 눈동자는 어느 쪽이었지? 누구의 것이었지? 알 수 없었기에, 헬가는 눈을 감았다. 알고 싶지 않았기에, 옅게 숨을 내쉰다. 짭짤한 공기다. 바닷바람을 타고 부풀어 오르는.


“……인어와 소녀는 사이좋은 친구가 되었습니다. 그러나 소녀는 자주 아팠기에, 동굴에 점점 드물게 찾아가게 되었습니다.”

 

투명한 수정에 굴절된 달빛이 부서져 내렸다.

동굴의 깊은 곳 축축한 이끼를 조심조심 밟아 길을 찾으면 커다란 물웅덩이가 하나 있다. 아마 바다로 통하는 물웅덩이지 않을까. 인어는 그 웅덩이를 출입구처럼 사용했으니까.

금발의 소녀는 웃고 있었다. 인어도 웃고 있었다. 인어는 물속에서, 소녀는 물 밖에서. 인어는 바다로, 소녀는 육지로.

 

인어와 소녀는 사이좋은 친구가 되었다고 하였던가? 실제로 그랬다. 인어와 소녀는 둘도 없는 친구가 되었다. 서로가 서로에게 한없이 소중한.

 

어린아이들에게 종종 친구란 목숨과도 같은 존재여서.

제 심장을 내어놓는대도 망설임 없이 행하도록 하였다. 오로지 순수한 선의로.

 

“인어는 마음이 아팠습니다. 왜냐하면, 소녀는 인어의 소중한 친구였으니까요.”


인어는 속삭인다.

있잖아, 우리 심장을 바꾸어 끼우자.

 

더없는 선의. 순수한 애정. 옛날 옛날 아주 먼 옛날에, 인어와 심장을 맞바꾼 소녀가 있었다. 인어는 소녀의 심장을 품고 바닷속으로 돌아가려 했지만, 육지의 심장은 깊은 심해로 갈 수 없었다. 인어는 고향으로 돌아가야 했다. 인어는 너무 오랫동안 육지와 가까이 지냈다.

 

심장이 뛰는 인어는 불사의 존재이므로, 심장을 친구에게 떼어 준 인어 또한 여전히 불사의 존재다. 인어의 시간은 인간의 시간과 다르게 흐르므로, 심장 없는 인어는 고향으로 돌아갔다. 언젠가 돌아오리라. 친구에게 돌아오리라 여기면서.

 

푸르게 변한 소녀의 심장을 숨겨 놓고. 달 없는 밤에만 열리는 동굴에 꼭 숨겨 놓고.

 

이미 그것은 인어의 심장이었다.

인어의 심장을 가슴에 밀어 넣은 소녀는 심장을 잃었다.




 회지로....내려고....했었으나.....이런저런 사정으로 펑된 글입니다. 언젠가 마무리지어서 발행해보고 싶지만 일단 완성도 덜 된 글이고 해서 백업해놓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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