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날의 만남도 우연이 아니었구나. 그것을 깨닫는 순간 소경예의 마음은 찬란히 부서졌다.

 그에게는 아비가 둘, 어미가 둘이 있었다. 그의 아비 중 하나는 사씨 성을 가졌으며 다른 하나는 탁씨 성을 가지었는데 그의 성은 소씨였다. 그는 소씨 성을 가짐으로써 사씨 가문과 탁씨 가문을 잇는 다리가 되었는데 그것은 그가 어느 가문의 사람인지 알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는 두 부모와 두 가문을 가짐으로써 도합 넷의 기대와 사랑을 받았다. 때문에 그는 늘 자신이 받은 기대와 사랑만큼의 몫을 해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는 늘 기대만큼, 혹은 그보다 더 많은 것을 해내는 사람이었고 부모들에게 그것은 당연한 것이 되어 그는 늘 아등바등 거렸다. 그들에게 실망을 주지 않기 위해 양쪽 집안의 만족스러운 아들이 되기 위해 그는 늘 노력했다. 그것은 그가 그들을 사랑했기 때문이었다. 그는 그들을 사랑했다. 지독히도 사랑했기에 그 사랑은 끔찍한 고통이 되어 그를 뒤덮였다. 참혹한 진실만큼이나 밀려드는 배신감은 그의 순수를 잡아먹었다.

 여기서 그를 고통스럽게 만드는 것이 하나 더 있었다. 이 배신감은 누구로부터 밀려온 파도인가. 태어나는 순간 자신을 죽이려 든 아비인가 모든 것을 알면서도 눈을 감은 어미인가 그도 아니면 작금의 사태를 만든 벗인가. 벗, 아마도 매장소는 소경예의 벗이었다. 이름도 모르던 첫 만남을 지나 그의 호의를 받고 나이와 관계없이 우정을 나누었다. 소경예가 그간 매장소를 얼마나 존경하고 의지해 왔던가. 그의 학식과 그보다 깊은 성정에 감읍해 진정으로 그를 섬겼다. 그러나 이후 어찌되었는가? 진심은 결국 이렇게 보잘 것 없는 것이 되어 바닥을 뒹굴었다. 그보다 더 크게 그를 상심하게 만든 것은 그의 연심이었다. 그것이 그를 견딜 수 없게 만들었다.

 금릉을 떠나기로 마음먹은 날 밤 소경예는 매장소를 찾았다. 정확히는 그의 소택을 찾아 그 주위를 배회하다 밤을 지새우곤 집으로 돌아갔다. 미워하고 싶지 않았다. 원망하고 싶지 않았다. 부모세대의 일이 그의 탓은 아니었다. 그러나 가슴에 난 구멍이 메워지질 않았다. 언제고 이 상처가 메꿔지고 그를 다시 마주볼 수 있는 날이 올 수 있을지 소경예는 가늠할 수 없었다. 왜 그에게 금릉에 함께 가자 권하였던가. 그때는 말로 표현할 수 없으리만치 기쁘고 행복했었다. 자신의 권유에 응해준 그에게 혹 제 마음이 조금은 닿지 않았나 하는 헛된 생각에. 제 착각이 일을 이렇게 만들었는지도 모른다고 소경예는 그리 생각했다. 모든 것을 자신의 탓으로 돌리지 않고서는 견딜 수가 없었다. 그렇지 않으면 무언가에 잠식될 것만 같았다.


 “소선생.”


 스스로가 내뱉은 낯선 호칭에 어깨에 힘이 빠졌다. 소경예는 허탈한 웃음으로 매장소 앞에 섰다. 어쩌면 그가 마중 나오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하지 않은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마주 설 용기가 없었기에 오지 않기를 바랐었다. 매장소는 얼핏 감정 없는 사람마냥 서있었다. 그러나 마주친 시선에서 소경예는 느낄 수 있었다. 그는 흔들리고 있었다. 그 사실을 깨닫자 소경예는 어떤 희열 같은 게 느껴졌다. 매장소는 차분히 입을 열어 고백했다.


 “가장 잔혹한 방법으로 진실을 폭로하면서도 자네의 감정이나 우리의 우정을 고려하지 못했는데 나를 원망하지 않나?”

 

 말을 마친 매장소는 마치 어떤 말이라도 달게 듣겠다는 듯이 굴었다. “중요한 무언가를 위해 절 버리신 것은 선생의 선택이었지요. 절 선택하지 않은 선생을 원망하지는 않겠습니다.” 소경예의 말에 매장소는 떨리는 목소리로 자네의 진심을 외면했다 토로했다. 원망의 말이라도 들으면 마음이 편해질 것 마냥. 소경예는 그러고 싶지 않았다. 그러고 싶지 않았다.


 “소선생.”

 “경예.”

 “배웅해줘서 고맙습니다.”


 소경예는 돌아서며 웃었다. 미안하다는 말도 내뱉지 못할 만큼 그는 자신에게 마음을 쓰고 있었다. 그 사실을 알았기 때문에 웃음이 나왔다. 제 진심이 무엇인지 진정 선생이 아느냐 묻고 싶었지만 그 물음은 훗날에 다시 묻기로 하였다. 남초에서 돌아오는 날. 다시 그를 만날 날. 뚫려버린 가슴에 검은 덩어리가 가득 차는 것이 느껴졌다. 진심을 돌려받았더라면 좋았겠지만 그렇지 않은 들 어떠할까. 이제 더는 그의 진심을 바라지 않았다.

 도합 넷의 기대와 사랑에 질식할 것 같던 때가 있었다. 이제 더는 그 기대와 사랑에 부흥하지 않아도 됐다. 소경예는 문득 자신이 자유를 얻은 것이 아닌가 생각했다. 이제 더는 주위의 시선에 신경 쓸 필요가 없었다. 앞으로는 자신이 하고 싶은 것, 자신의 기대만을 충족하기 위해 앞으로 달려가리라. 그 끝에는 매장소가 있었다. 소경예는 웃었다. 다시 만날 날이 기대됐다. 그를 가지는 날이.



르체님의 창작활동을 응원하고 싶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