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두들. 잠깐 내 이야기 좀 들어줘."




 뭔데?

 평소같이 느긋하고 평화로운 석영고원에서 목호가 모두의 이목을 집중시켰다. 라프라스의 속눈썹에 내려앉은 서리를 다듬어주던 칸나가 가장 먼저 관심을 보였다. 무슨 일이야? 갑자기 그렇게 진지한 표정을 짓고? 칸나의 물음에 내내 관심이 딴 세상으로 가있던 시바와 국화도 목호에게 시선을 집중했다. 칸나의 말 마따나 표정이 꽤 심오했다. 




 "진부한 표정이구나, 목호. 어쩐일로 재미없는 모습일까?"

 "그런 말씀 마세요, 국화씨. 난 저 녀석이 심각한 표정 지을때마다 오금이 저린다고요."




 저건 분명 쓸데 없는 일을 꾸미고 있다는 전조일겁니다. 

 국화의 그림자에서 눈만 깜빡이던 팬텀이, 지팡이로 진 그늘을 따라가 목호의 그림자로 옮겨갔다. 두터운 드래곤 조련사 전용 부츠의 밑창을 뚫고도 느껴지는 서늘한 고스트타입의 압력에, 목호가 다리를 꼬아버렸다. 그 바람에 더 고민 많고 사연 많아보이는 모습이 되어버렸다. 괜히 무릎 뒤쪽을 꾹꾹 누르며 몸서리를 치는 시바에 국화가 어깨를 으쓱였다. 말썽을 부려준다면 나야 환영이지. 


 진심이세요, 국화씨?




 "국화씨께서 자꾸 그러시니까 목호 버릇만 나빠지잖아요. 평소에 멀쩡한듯 굴면 뭐해요? 뒤에서 온갖 바보짓은 다 하는데! 뭐라고 말씀 좀 해주세요, 국화씨."

 "칸나 너도 나이 좀 먹어보렴. 인생 지루해서 죽을 맛이란다. 목호가 앞장서서 재롱 떨면 그것만한 요기거리도 없지. 내 취미생활을 뺏지 말아주렴."




 아아, 국화씨...!

 흘러내린 안경을 올리며 칸나가 괴로워했다. 하지만 진심이었다. 목호가 하는 짓을 구경하는 건, 국화의 소소한 취미 생활이다. 하는 짓도 생긴 것도 상견례+면접+입국심사를 프리패스하도록 멀끔하게 생긴 목호는, 종종 상상치도 못한 바보짓을 툭툭 내보내곤 했다. 쟤 사람한테 파괴광선 쓰는 거 봤을 때부터 알았어야 했는데. 멀쩡한 듯 굴지만 정말 묘하게 엉뚱한 놈이었다, 목호라는 놈은. 언제는 연분홍 시티에서 진행된, 망나뇽 이벤트 카페에 불쑥 출몰해서 sns에 난리가 났었다. 멀끔한 모습으로 망나뇽 팬케이크에 단호박 휘핑이 가득 올라간 라떼의 인증샷을 찍는 모습은 국화가 가장 좋아하는 것이었다. 


 내 인생에 다신 없을 우울증 치료제. 멀쩡해 보이지만 군데군데 나사가 다 빠진, 그런... 그런 사람이다, 목호는. 사천왕 가오 다 죽었네- 가뜩이나 도전자 받기가 반년에 한 번 꼴인 석영고원인데, 가오까지 죽이면 어떡하니. 입을 열기도 전부터 온갖 공격을 받던 목호는 머쓱한듯 뒷목을 긁적였다. 


 나는... 이벤트 카페.. 가면 안 돼...?


 어딘가 좀 시무룩해 보인다. 저러는 거 보면 참 멀쩡해 보이는데, 왜 가끔씩 그런 말도 안 되게 멍청한 모습을 보일까? 하지만 그걸 목호 본인이 알겠는가? 태어났을 때부터 이랬는데, 나한테 왜 그래...? 목호는 새삼 자신에게 요구되는 기준이 유난히 높다는 불평을 늘여놓았다. 그의 서러움이 이해가 안 가는 건 아니었지만, 공감해줄 수 없었다. 결국 목호의 단정하고 신뢰감 가는 얼굴을 탓할 수 밖에 없다. 네가 그렇게 잘 생기지나 말던가...


 결국 계속되는 다굴에 미묘하게 삐진 목호의 입술이 비죽 튀어나왔다. 그제서야 공격은 멈췄다. 




 "야, 화내지 마. 미안해..."

 "그... 미안, 진심은 아닌 거 알지...? 너 성격 좋아서 좋다는 뜻이었어...!"




 목호는 대답이 없었다. 한발짝 뒤에서 그 모습을 구경하던 국화가 결국 웃음을 참지 못하고 터뜨려버렸다. 호쾌한 웃음소리에 목호의 그림자에 스며들어있던 팬텀도 들썩이며 웃었다. 그에 진땀을 빼는 칸나와 시바를 대신해 국화가 목호에게 물어봤다. 




 "목호, 그나저나 진지하게 하고 싶은 이야기가 있다고 하지 않았니? 말해주지 않으련?"

 "...! 맞아! 말해 줘! 궁금하다!"

 "사실 나도 궁금했어!"

 "...."




 다들.. 그렇게 궁금하다면야.

 묘하게 표정이 샐쭉 풀린 목호에 칸나와 시바가 속으로 한숨을 돌렸다.




***




 "글쎄, 아무튼... 오늘 아침에 석영고원에서 그런 일이있었거든. 그래서 제안하러 온거야."

 "그렇군요? 저야 뭐, 재미있어 보이니까 참여할게요!"

 "고마워, 이슬아... 사람 한 명 살리는구나."




 칸나님 부탁이면, 당연히 들어 드려야죠!

 정오의 햇살이 뜨거운 블루체육관에서 칸나와 이슬의 수다가 길어졌다. 블루시티의 풀장에서 헤엄을 치는 라프라스를 느긋하게 바라보던 칸나가 곧 터져나오는 헛웃음을 참지 못했다. 내 입으로 부탁하고 다니는 거지만, 진짜 바보같은 부탁이다. 수차례 이슬에게 이상한 부탁을 들어줘서 고맙다고 한 칸나에, 이슬은 아니라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목호 제안이죠? 참, 저는 걔가 제일 웃기다니깐요?"

 "나도 그래. 석영고원이 체육관들보다 업무가 없어서 이러나봐. 자꾸 이상한 생각을 한다니까?"

 "근데, 이번 일은 사실 저도 묘하게 궁금해서... 좀 기대 된다면 저도 목호한테 옮은걸까요?"




 찬 각얼음이 찰랑이는 냉커피를 빨대로 휘저은 이슬이 킥킥거렸다. 




 "아무튼... 레드 귀에만 안 들어가면 되는거죠?"

 "응, 맞아."




 좀 자신 없지만 노력해볼게요.

 귓가를 긁적인 이슬의 말에, 칸나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 후로, 이슬에게 관장전이 들어오기 전까지 수다는 끊이지 않았다. 일을 하기 위해, 아쉽게 일어서는 이슬에 칸나도 자리에서 일어났다. 나도 일 하러 가야지.




 "다른 체육관도 들르시는 건가요?"

 "응. 민화랑 초련한테 가서 같은 제안을 해야 해."

 "하하, 다른 분들도 같은 상황이신거죠?"

 "말해 뭐하니? 웅이랑 마티스는 시바가 고생하러 갔고, 강연씨랑 독수씨는 국화씨가 가셨어."

 "그린은요?"

 "그 애는 제일 까다로울 것 같아서, 목호가 직접 갔지."

 "아하?"




 그린이 까다롭긴 하죠? 근데 설득이 될까요? 레드 관련 일이면 세상에서 제일 예민하게 구는 그린인데. 

 글쎄, 그건 목호가 알아서 해야지. 

 골이 아픈듯 이마를 꾹꾹 누르던 칸나가 블루시티 체육관을 나섰다. 




***




 "어이가 없네. 지금 그걸 말이라고 해?"

 "생각해봐, 그린. 궁금하지 않아?"

 "바보같고 쓸데없어."




 어쩜 넌 늘 그렇게 말을 심하게 하니?

 늘 한결같이 상처 받은 목호가 멀끔한 표정으로 그린을 나무랐다. 그런 말을 들으면 어느 누구라도 상처를 받을거야, 그린. 너도 참, 이제 체육관 관장씩이나 됐으면 사회성을 길러보는 노력을 하는 게,




 "상처받으라고 한 말 맞다, 이 멍청아. 너 바보야? 이건 또 어디서 나온 발상인데? 철 없는 새끼, 네가 그러고도 어른이야?"

 "그린, 흥분하지 말고 내 말 좀 다시 들어봐."

 "닥쳐! 네가 한 제안이 레드 따돌리겠다는 소리가 아니면 뭔데?!"

 "아니야! 달라! 그런 건 나도 원하지 않아!"




 구라 치지 마!

 작성중이던 서류를 목호의 얼굴로 집어던지며, 그린이 잔뜩 씨근거렸다. 그딴 이상한 생각이나 할거면, 네 윗대가리한테 가서 체육관 운영 지원금 좀 늘리라고 설득이나 해봐라! 그린의 말에 뼈를 맞은 목호가 잠짓 타격이 큰 듯 헛기침을 했다. 단단히 오해를 사버렸나봐. 그런 의도가 아니었는데도, 레드에 관련 된 이야기다 보니 그린의 반응이 민감했다. 하지만 정말 오해인데...


 목호의 제안은 어떻게 보면 좀 유치한 구석이 있는 발상의 시작과 그 연장선이었다. 


 목호는 어느 날 불현듯 생각했다.


 '레드가 없으면 관동에서 누가 제일 강하지?'


 레드의 챔피언 데뷔 이후로, 관동의 트레이너 랭크는 몇 년째 동결이었다. 발단은 이것에 있었다. 마침 관동 내 특별한 이벤트도 없이 무료한 나날이 이어지던 때였고, 적은 도전자로 늘 지루함이 가득하던 석영고원 꼭대기에 챔피언의 문을 가로막던 천진한 용이 시답잖은 생각에 불을 붙인것이다. 레드 없이 관동 트레이너들 끼리 토너먼트가 이루어지면 알 수 있지 않을까?더불어 순수하게 궁금해졌다. 진짜 누가 이길까?


 역시 아무래도 나 아닐까?


 드래곤 타입은 엄청 강하고 세니까?


 머릿속으로 열심히 분석을 하면서 토너먼트를 꾸리던 목호가, 결국 계획을 견고하게 짜고서 입을 턴 것이었다. 아니, 근데 진짜 궁금하지 않아? 어? 나만 궁금해? 처음엔 그딴게 왜 궁금하냐고 핀잔을 주던 칸나와 시바도, 곧 말이 없어지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생각해 보니, 좀 궁금하기도 했다. 누가 트레이너 아니랄까봐, 그 와중에도 '당연히 내가 제일 강하지 않나?' 같은 생각을 품고있는 게 눈에 훤했다. 어딜, 최강은 내 거다. 불이 붙어버린 사천왕들이 빠르게 토너먼트 파티원들을 모으러 떠났고, 제 1회 레드 없는 관동 최강 트레이너 토너먼트가 계획되고 있었다. 은밀하고 추진력 있게, 더 나아가서는 빠른 속도로 말이다. 


 그린이 던지는 서류더미를 온몸으로 맞으며, 목호가 진동이 울리는 휴대폰을 확인했다. 칸나와 시바, 국화에게 온 문자 였고, 성공적으로 맡은 바 인원들을 확보했다는 소식이었다. 그린만 남았다. 얼굴에 뭉텅이로 날아오는 서류더미를 낚아챈 목호가 진중한 표정을 지었다. 진짜, 진짜 오해야, 그린. 




 "너도 알다시피 레드가 챔피언에 오른 이후로 관동 랭크는 변함이 없어."

 "그게 왜."

 "잘 들어봐, 그린. 레드를 따돌리려는 목적이 아니라, 가시적으로 관동 트레이너들의 수준을 체크해보고자 하는 마음으로 기획한 일이야."




 토너먼트에 레드가 있는 것 하나로, 과정은 천차만별 바뀌는데도 최종 우승자는 늘 변함이 없지. 준우승자는 레드랑 가장 덜 마주친 트레이너가 차지하던 지난 토너먼트들의 결과값을 기억하고 있어, 그린? 최종 우승자를 가려내는 것에 초점이 잡혀진 기존의 토너먼트 형식으로는 절대 기존 트레이너들의 수준을 가늠할 수 없어. 포켓몬 배틀이 아닌 일반 스포츠에는 체급이라는 게 있다더라. 비슷한 피지컬의 선수들끼리 붙어서 기술적 우위를 점하는 거지. 레드만 없으면, 우리들은 나름의 체급들이 비슷하다고. 그럼 제대로 비교해볼 수 있는 거야. 




 "관동의 트레이너 수준도 올라갈 수 있는 스터디 즈음이라고 생각해 줬으면 좋겠어."

 "....."




 등줄기로 식은땀을 흘리면서도, 멀쩡한 안색으로 목호는 설득을 마쳤다. 하지만 그린은 여전히 마음에 들지 않아 보이는 눈치였다. 




***




 비밀리에 석영고원에서 진행된 <제 1회 레드 없는 관동 트레이너 토너먼트>는 이름 그대로 레드가 없다. 배틀광인 레드가 알면 진심으로 소외감과 서운함을 느낄것을 염려한 목호의 제안이 있었다.


 레드 귀에는 들어가지 않도록 하자.

 하긴 나같아도 나 빼고 너네들 끼리만 배틀한다고 하면 존나 서운할 것 같긴 해.

 무덤까지 안고 가야 한다?


 그렇게 잘 아는 놈들이 이딴 기획을 하냐고 그린이 뭐라뭐라 험담을 했지만, 결국 그린도 이 황당한 잔치에 참여한 사람들 중 하나였다. 공식 토너먼트전 외 사적으로 진행된 경기는 오랜만이라며 여기저기서 들뜬 목소리도 들렸다. 넓은 석영고원의 배틀필드 관객석에, 각 체육관 단원들이 플래카드와 현수막을 흔들며 응원을 보냈다.




[짱돌남자 웅이_이 곳 뚝배기 다 깨버리다_]

[여기 다 쓸어버려 이슬아!!]

[전력으로 10만볼트]

[히히 풀독이나 올라라]

[후딘 숟가락은 쇠숟가락_초련 숟가락은 금숟가락]

[독수의_맹독_레시피_공유_pdf.]

[♡내 마음 속 방화범♡]




 "다들 정신이 나갔군."




 정신 나간 플래카드가 흔들리는 걸 본 그린이 질색을 했다. 같이 구경하던 목호가 은근히 그걸 부러워해서 더 어이가 없어졌다. 아니... 소속감 있어 보이고, 좋아보여서... 묘하게 쭈굴해진 목호가 머쓱해 하던 순간, 목호 뒤로 초록색 플래카드가 펄럭이기 시작했다.




[오박사님이 보고 계셔]




 상록의 힘을 보여 줘!

 어디서 들고 온 건지 북까지 치며 열나게 응원하는 상록단원들은 입사 이후로 가장 신이 나 보였다. 초연하게 보고 넘기지 못한 그린의 눈빛이 살벌하게 꽂혔으나, 이미 짬밥이 찰만큼 찬 단원들의 두려움을 긁어내진 못했다. 관동 마지막 체육관 가오가 있지. 꼭 이기세요, 관장님! 꽃가루까지 뿌리며 해맑게 웃는 것에 그린만 열이 받았다. 


 곧이어 어딘가 싱글벙글한 이수재가 나타나 호루라기를 불었고, 토너먼트 규칙준수를 설명하기 시작했다.




 "안녕! 심판을 맡은 이수재야! 사람 많은 건, 딱 질색이지만 이번 건 재밌어 보여서 특별히 시간을 내봤지! 다 배우신 분들이니까 디테일한 규칙준수는 따로 더 말씀드리진 않을게!"

 "심판이란 놈, 말하는 꼬라지 좀 봐."

 "예의가 없군."

 "아아! 앞담 까지 마!"




 삑-!

 호루라기를 불며 그린과 목호에게 경고를 보낸 이수재가 설명을 이어갔다. 




 "본 경기는 토너먼트 형식으로 진행됩니다. 본인 상대는 대진표를 확인해 주시구요! 배틀 시간은 각각 전반 후반 15분씩 진행됩니다. 3:3 경기이며, 도구사용은 포켓몬이 소지한 도구에 한해서만 사용 가능! 추가 사용 안 됩니다!"




 형식적인 설명을 듣던 그린은 갑자기 현타를 맞고 한숨을 푹 내쉬었다. 




 "전력으로 배틀하세요! 우승 트로피는 없지만, 명예와 우승 리본은 제작되어 있어요! 아! 그리고 가장 중요한 거!"




 입가에 손을 가져다 댄 이수재가 소곤소곤 속삭였다.




 "오늘 있던 일은, 레드에게 절대 함구!"




***




 경기 시작 전까지, 3분에 한 번 꼴로 현타를 맞이하던 그린은 정작 경기가 시작되고서는 매섭도록 집중력이 올라가 버렸다. 그럴 수 밖에 없는 이유는, 수준에 맞는 배틀을 하는 게 오랜만이라서 그랬다. 그간 관동의 미래가 걱정 될 정도의 새내기 트레이너들의 도전을 받아주던 나날들이 떠올랐다. 이러다 관동과 석영고원이 쥐도 새도 모르게 폐망하는 게 아닐까 싶었는데, 관동 땅의 리그가 아직도 주목을 받는 데에는 이유가 있었다. 좁은 시골 땅 주제에, 관동에는 강한 트레이너들이 참 많았다. 




 "아악-! 게임 더럽게 하지 마, 그린!"




 이슬과 그린의 경기를 시작으로, 어딘가 이상한 토너먼트의 신호탄이 울렸다. 나시의 잎사귀에 쓰러진 갸라도스를 몬스터볼로 돌려보낸 이슬이 이를 부득 갈았다. 그린은 속이 너무 시원했다. 지난 나날동안, 그녀에게 놀림받던 순간들을 떠올려보니, 시원함이 배가 되었다. 곧바로 에이스 포켓몬인 아쿠스타를 꺼낸 이슬이 눈을 매섭게 떴다. 이젠 안 봐준다. 평소의 장난끼는 싹 빠진 기세로 눈빛이 흉흉하게 번뜩였고, 관장의 기세에 덩달아 승부욕이 오른 블루단원들의 응원이 쩌렁쩌렁 울렸다.




 "이슬아, 가자-!"

 "물줄기로 풀이든 전기든 다 쓸어버려-!"




 응원에 염원을 받은 만큼, 어마어마한 규모로 불어난 거대한 파도타기와 함께 넓은 배틀필드에 소나기가 쏟아졌고, 흠뻑 젖은 경기의 열의는 절정으로 치닫기 시작했다. 강한 수압에 풀잎이 곪아 찢겨간 나시가 비틀거렸고, 그린은 그제서야 잠시 나가있던 정신을 되돌렸다. 눈 앞에 이어지는 경기는 산만하고 짜증나는 이슬과의 다툼이 아니라, 명망높은 물타입 짐리더와의 배틀이었다. 내공이 비치는 거대한 규모의 파동을 마주하고서야 그린은 그것을 마주하게 되었다. 집나갔던 집중력이 돌아오기 시작했다. 




 "관장님! 믿고 있어요!"

 "저희가 가오가 없지, 실력이 없습니까?!"




 나시가 몬스터볼로 돌아가자, 이번엔 상록단원들이 있는 관객석에서 열띤 응원이 터져나왔다. 어지간한 국제경기 뺨 치는 장내 분위기에, 심판을 보던 이수재가 해설위원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아직도 멀뚱하게 어버버 거리는 저 해설 위원들은, 혹시라도 정보가 밖으로 흘러나갈까봐, 오늘 급하게 빌려온 오박사 연구소의 연구원들이었다. 아직 상황파악이 안 되는듯 멍하게 경기를 구경하던 그들에게, 이수재가 눈치를 주기 시작했다. 




 -어, 어어... 아, 안녕하세요... 이번 비공식 토너먼트전 해설을 맡게 되었습니다... 소속은 관동 오박사 연구소의 전국도감 연구팀이고요..

 -어, 어어... 네, 저도 오박사 연구소 소프트웨어 개발팀에 소속되어있습니다.. 아, 잘 부탁드립니다...

 -허허, 해설은 학사 졸업한 이후로 오랜만이네요.

 -저도 부족한 게 많지만, 모쪼록 성심껏 해설하겠습니다.




 제법 만족스러운 스포츠 사운드가 형성되고서야 이수재는 만족스럽게 전반전 종료를 외쳤다. 서로간 포켓몬은 2:2 상황. Hp는 상대적으로 이슬쪽이 말린 상태지만, 후발로 나온 그린의 후딘은 아쿠스타의 파동에 의해 혼란상태에 빠져있다. 




 -지금같은 상황에서 조금 더 악재를 꼽으라면, 역시 상태이상이겠죠?

 -네, 그렇습니다. 상록의 그린 씨의 후딘같은 경우 폭발적인 공격력이 돋보이는 스타일인데, 그에 반하는 내구가 약한 타입이라.. 운 나쁘면 스스로 때릴수도 있죠. 

 -아하! 그린씨가 걱정이 많겠네요. 이미 패널티가 적용된 후딘의 정신력을 믿어보느냐, 아니면 이슬씨보다 먼저 세번째 카드를 드러내는 방법밖엔 없을텐데...

 -맞습니다. 최근 블루의 이슬 씨의 경기운영이 더 치밀해졌다는 평가가 주를 이루는 추세인데, 그런 상황에서 먼저 세번째 카드를 까는 것은 꽤나 도박인 셈이죠. 아. 말씀 드린 순간, 후반전이 시작되었습니다. 




 후반전의 링이 울리고, 이슬의 몬스터볼에서 아직 건재한 아쿠스타가 선출로 나왔다. 턱을 문질거리며 생각에 잠겨있던 그린의 몬스터 볼에서도 후발 선출 포켓몬이 튀어나왔다. 그린의 몬스터 볼에서 나온 포켓몬은 피죤투였다. 




 -아앗! 그린 씨께서 먼저 세번째 카드를 까셨습니다! 후발주자는 피죤투 입니다!

 -노말 비행 타입인 피죤투와 물타입 전력의 배틀의 장이 마련되었습니다! 일반적인 배틀 환경에서는 물타입 포켓몬들 앞에 비행타입 포켓몬들을 자주 대치시키진 않죠?

 -네, 그렇습니다. 물타입의 경우 자속보정은 못 받더라도 얼음타입 기술을 배우는 경우가 많아, 괜히 긁어 부스럼이 될 수도 있는지라... 일단 공개된 기술배치로는 이슬 씨의 아쿠스타에겐 얼음타입 기술배치가 없던 것으로 판별 났습니다. 그렇다면, 이 또한 전면전 때 알 수 있겠군요!




 피죤투의 바람결에 아쿠스타가 은신하던 물구덩이에 회오리가 일어났다. 강한 비바람에 물리 데미지가 누적된 아쿠스타가 쓰러졌고, 어딘가 짜증난 표정을 짓던 이슬이 툭 쏘아붙였다. 




 "짜증나, 너. 다 알고 한 거지?"

 "뭐가."

 "모르는 척 하지 마. 피죤투, 다 알고 꺼낸 거잖아. 여우같은 새끼..."




 혀를 쯧 하고 찬 이슬의 몬스터볼에서 마지막 포켓몬이 나왔다.




 -아! 계획이 있었네요, 그린 씨는!




 이슬의 마지막 포켓몬은 젖은 땅의 진흙을 뚫으며 나타난 누오였다. 나름 고심한 파티였건만. 운 나쁘게 피죤투가 선발 되어 나왔을 줄 누가 알았겠는가. 




 -이슬 씨의 마지막 포켓몬은 누오 였네요! 땅 물타입인 누오의 높은 자속보정 지진공격은 꽤 무섭죠. 느린 스피드에 비해 준수한 물리 내구와 물리 공격력이 관건인 포켓몬입니다. 하지만, 상대가 비행타입이라니! 큰 장점이 상쇄되어 버렸네요!

 -정말 아쉽게 되었네요! 오늘 땅 한 번 갈라지나 싶었는데! 공식 월드 토너먼트전 때도 보여주지 않았던 새로운 파티구성을 보여준 이슬 씨! 이 토너먼트에 얼마나 진심이신지 알 수 있는 부분입니다!




 아 말렸다, 말렸어.

 가장 자신 없는 전기타입 포켓몬들 견제를 고려해서 설정한 파티였다. 운도 더럽게 없지. 처음부터 그린을 만날 게 뭐람. 연구 많이 했는데, 다 뒤집어졌네. 이슬의 표정에 심통이 잔뜩 내려앉으며 역사적이 첫 경기가 막을 내렸다. 




"승자는 상록의 그린!"




 으아아아악! 관장님!

 승전보와 함께 상록단원들이 모여있는 객석에서 비명과 환호가 터져나왔다. 이제 겨우 12강 전인데, 꽃가루까지 터져나오는 지경이라 그린이 온갖 질색팔색을 했다.




***




 조잡한 이유로 결성된 경기 치고, 경기의 퀄리티는 어나더로 치고 날아올랐다. 공식전과 국제대회급 토너먼트에서도 볼 수 없었던, 연구가 돋보이는 파티구성과 전략들이 판을 치고 있었다. 




 "마티스 폼 미쳤다-!"




 강연의 날쌩마의 머리위로 튀어오른 라이츄의 전기주먹이 그대로 뚝배기로 날아갔다. 긴 목이 직각으로 꺾인 날쌩마는 한 방에 K.O 되었고, 후발로 나온 나인테일의 도깨비 불에 휩싸여갔다. 




 -교육자료로 쓰여도 좋을 모습이었습니다. 라이츄의 도약 거리가 이정도로 방대할 줄 누가 알았겠습니까?

 -공감하는 바 입니다. 라이츄의 운동능력을 가장 잘 이해하는 트레이너로 갈색의 마티스 씨를 꼽는다 해도 과언이 아니죠. 

 -그렇습니다. 진화로 인해 탄력성이 올라간 뒷다리는, 트레이닝으로 갈고 닦으면 저정도의 점프력이 나온다는 것이니, 이 얼마나 트레이너로써 매력적인 모습입니까?

 -또 마티스 씨의 라이츄는 펀치류의 물리기술을 자주 사용한다는 특징이 있죠?

 -네, 맞습니다. 이 또한 연구의 산물이라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진화를 하면서 손가락이 퇴보하게 된 라이츄의 주먹은 말랑해 보이지만 꽤 단단한 전기주머니를 품고있죠. 그것을 증폭시킨 번개펀치는 누가봐도 강력한 타격률을 보여줍니다. 내리칠때마다 일어나는 벼락이 보이시나요?

 -정말 대단하군요!




 화상을 달고도 미쳐버린 폼을 뽐내던 라이츄와 마티스는 승리를 거머쥐었다. 




"승자는 갈색의 마티스! 곧 이어 노랑의 초련과 사천왕 시바의 경기가 진행!"




 체육관 단원들과 전력으로 하이파이브를 나누는 마티스의 뒤로, 초련과 시바가 입장했다. 초련의 입장과 동시에 어마어마한 기백으로 일어난 노랑단원들이 커다란 현수막을 흔들며 응원가를 부르기 시작했다.




 "에스퍼 레이디! 절대 우승!"

 "최종우승 하는 거, 미래예지로 다 봤다!"




 긴 머리를 찰랑이며 몬스터볼을 공중에서 굴리는 초련에 객석이 한 번 더 자지러졌다. 노랑체육관은 회색체육관 만큼이나 단원들의 충성도가 높은 체육관이다. 그 절정의 응원을 함께 눈 앞에서 마주한 시바가 당황한듯 눈치를 봤다. 그런 시바를 뒤에서 지켜보던 목호가 안타까운 표정을 짓더니 큰 소리로 시바를 불렀다. 




"너무 기죽지 마! 우리가 응원 하고 있으니까!"

 "우리? 우리라니?"




 바로 옆에서 칸나가 금시초문이란 표정으로 되물었고, 당황한 목호가 국화의 눈치를 살피자 그녀 역시 고개를 살래살래 가로 저었다. 시바만큼 등줄기로 식은땀을 흘린 목호가 잠시 머쓱한듯 있더니 되려 결심을 마치고 큰 소리로 외쳤다.




 "...나, 나라도 끝까지 응원할테니ㄲ-...!"

 "필요 없어!"




 결국 못 참고 시바가 윽박을 질렀다. 어수선한 상태로 경기는 진행이 되었다. 




 - 격투타입과 에스퍼타입의 경기입니다. 이번 경기에 서는 어떤 점에 주의를 기울일 수 있을까요?

 - 역시 상성이 걸리는 사천왕 시바 씨의 경기 운영 방식에 집중을 하지 않을 수가 없는데요. 

 - 상성... 절대 무시 못하죠.

 - 그럼요, 절대 무시 못합니다. 

 - 여러 난항이 예상되는 가운데, 경기가 시작되었습니다! 격투타입 무예가 답게, 역시 선빵은 사천왕 시바 씨의 공격이 들어갑니다! 시바 씨의 선출은 홍수몬! 위협적인 냉동펀치가 정확히 날아갑니다!

 - 초련 씨의 선출은 마임맨입니다. 아! 선공이 들어가기 전, 간발의 차로 마임맨의 리플렉터! 이로써 물리공격 주력의 시바 씨께서 고전을 보이실 것 같습니다!




 투명하고 견고한 벽을 내세운 마임맨을 보며, 시바의 지시가 이어졌다. 주먹을 굳게 쥔 홍수몬은 구령이 떨어지자 마자, 눈을 번뜩이며 기세좋게 튀어나가 리플렉터 벽을 향해 주먹을 내질렀다. 땅이 울릴 만큼의 굉음이 울리며 견고하던 벽에 삽시간 금이 퍼져갔다.




 - 역시 사천왕! 결코 호락호락하지 않습니다! 이같은 상황을 예상이라도 하고 계셨던 걸까요? 홍수몬의 깨트리기! 절대 무너지지 않을 것 같던 거대한 장벽을 무너뜨립니다!




 깨져나간 리플렉터를 보며 기운차게 기합소리를 낸 홍수몬의 번개펀치가 마임맨에게 돌진했다. 그대로 유효타를 허용하게 된 상황에, 내내 무표정하던 초련의 얼굴 근육이 꿈틀거려왔다. 




 - 예로부터 이런 말이 있죠. 선빵필승! 과연 그 말이 이번에도 적용될지 귀추가 주목되어가고 있습니다.

 - 역시 사천왕 폼은 어디 안 가는군요. 상대가 평범한 에스퍼 타입 전문가였다면 이미 끝난 게임일 수도 있습니다.

 - 맞습니다.

 - 하지만 우리가 주목해야 할 점은, 바로 그녀가 평범한 에스퍼 타입 전문가가 아니라는 점이겠죠? 초련 씨는 최근 가장 매서운 상승세를 보이는 트레이너인데요.




 수세에 몰리자 얌전하던 초련의 표정이 점점 살벌하게 가라앉기 시작했다. 홍수몬의 펀치기술이 속사로 쏟아지고, 허망하게 첫 빈사상태를 허용하게 된 초련의 눈빛이 승부욕으로 번뜩였다. 그 모습을 보는 노랑 단원들의 객석에서 기합이 쏟아져 나왔고, 터져나온 싸이코 에너지가 초련의 긴 머리카락을 공중으로 떠오르게 만들었다. 코스믹 호러틱한 모습을 눈앞에 두며, 시바는 기싸움에 밀리지 않으려 정신을 바짝 차렸다. 후발로 나온 포켓몬은 시바의 시라소몬과 초련의 야돈킹이었고, 이때를 기점으로 초련의 연계가 매서워지기 시작했다. 치열한 공방을 이루어 가던 때, 전반전이 종료되고, 후반전에서는 서로 마지막으로 남은 1:1 에이스 포켓몬 맞다이가 시작되었다. 




 - 후반전이 시작되었습니다. 사천왕 시바의 괴력몬과 노랑의 초련의 후딘. 굉장히 상징성이 짙은 각 선수의 에이스 포켓몬들인데요.

 - 그렇습니다. 초련 씨의 에스퍼 위상은 역시나 대단하고, 시바 씨는 역시 사천왕이다 싶은 경기가 진행되고 있습니다. 말씀 드리는 순간 후딘의 사이코 키네시스! 필드채로 괴력몬을 집어 삼킵니다!

 - 아아! 언제 봐도 경이롭습니다! 꽤나 많은 데미지를 허용하게 된 상황에서 괴력몬의 반격이 시작됩니다!

 - 무너진 필드채로 괴력몬의 스톤에지가 후딘을 덮칩니다! 높은 물리데미지로 서로간 큰 데미지를 허용하게 된 상황입니다!

 - 후딘쪽의 상황이 더 괴로워 보이는 걸 보자면, 아마 급소공격을 맞은 것으로 추정 되는데요. 

 - 그렇네요. 넓은 광역기술에 급소 조준까지 섬세하게 계산한 것을 보면, 노가드 특성의 괴력몬일 것이라 추측해봅니다. 

 - 노가드에 스톤에지! 궁합이 좋은 기술배치군요! 가벼운 그로기 상태에 빠진 후딘에게 뒤이어 탁쳐서 떨구기! 후딘의 도구, 휘어진 스푼을 떨궈냅니다!

 - 초련 씨 측 상황이 좋지가 않네요. 객석도 난리입니다. 시바 씨 께서 사천왕의 위용을 떨치고 있는 가운데, 후딘의 HP회복! 레드라인까지 떨어졌던 HP를 그린라인 까지 끌어 올립니다! 이제 서로간 기술배치가 어느정도 노출이 된 가운데! 더 치밀한 공방전이 예상됩니다!




 심드렁하게 앉아 단원이 가져다 준 팝콘을 씹으며 그린이 경기를 구경했다. 




"관장님! 잘 보고 대비하셔야죠!"

 "맞아요! 좀 더 집중 하시라구요! 그러다 쪽팔리게 6강도 못 가시면 어쩌시려고 그러세요!"

 "뭐야, 이기면 되잖아. 왜 너네가 난리야."

 "경기 보니까 좀 불안해진단 말이에요!"

 "여기 미친놈들 밖에, 아, 아니, 미친 분들 밖에 없는 것 같아요!"




 완전 괴물들! 다 무너져가는 필드 위에서 후딘의 명상이 이어졌고, 곧바로 어마어마한 위력의 염동력 덩어리가 괴력몬에게 쏟아졌다. 히엑. 타격감에 놀란 상록 단원들이 같이 먹던 팝콘을 툭 떨어트렸고, 그린만 여전히 심드렁하게 팝콘을 오물오물 씹어먹었다. 초련이 이 경기 때문에 최근 수련을 했다던데. 특수공격의 노력치가 더 올라간건가? 건조하게 생각하며 짭짤한 소금맛이 가득한 팝콘을 와작이던 순간 상록단원들이 울상을 지었다. 




 "관장님 저분들 너무 센데, 어떡해요?"

 "내가 더 세."

 "관장님 센 건 알죠. 그래도 실수로라도 질 수 있잖아요. 관장님 지시면 저희 쪽팔려서 얼굴은 어떻게 들고 다니죠...? 관장님이 이 가운데에서 압도적으로 강하지 않으시다면, 저희 상록체육관은 더이상 메리트가..."

 "나 레드보다 약한 놈들한텐 안 져."




 재수 없는 소리나 하고 말이야. 그린의 주먹이 단원들의 머리통에 꿍 하고 떨어졌다. 




 "자신감은 여전하구나, 그린."




 불쑥 나타난 목호가 그린이 먹던 팝콘을 한웅큼 집어가 옆에 풀썩 주저앉았다. 짜증이 난듯 눈썹을 꿈틀거리자, 곧바로 보란듯 와작거리는 소리가 터져나왔다. 양 옆에 맘에 안 드는 거 투성이네. 




 "네 말대로 될지 결승이 궁금해지는구나. 역시 이 토너먼트를 진행하길 잘한 것 같아. 모두 즐거워 보이잖아."

 "심심풀이로는 좋긴한데, 역시 난 별로야. 레드녀석 귀에 들어가기라도 하면..."

 "에이! 그럴 일 없다니까! 여기에 레드가 상처받길 원하는 사람 한 명도 없어!"




 그와의 배틀은 물론 너무도 즐겁지만, 가끔 트레이너들은 정상을 찍으려는 마음을 상기시켜야 하잖아. 그래야 성장할 수 있는거고. 




 "레드랑 하는 배틀은 뭐라 해야하나. 져도 분하질 않아서 문제라면 문제지?"




 분하질 않으면 성장할 수 없어. 




 "레드랑 배틀하면 징징거리기만 하던 이슬이도, 너랑 배틀하고 지니까 엄청 짜증냈잖아. 다음 토너먼트 때는 분명 몇 배는 더 강해질거야. 트레이너들은 그 분함을 각성제로 성장하는 사람들이니까."




 말이나 못 하면.

 콧방귀를 뀐 그린이 목호와 나란히 경기를 관람하며 팝콘을 씹었다. 그러는 사이, 미친듯이 유효타를 주고받던 용호상박의 결전이 막을 내렸다. 빈사 직전, 객석까지 귀를 먹먹하게 만드는 사이코파워를 끌어모은 후딘의 사이코키네시스가 한 발 빠르게 쏟아졌고, 이 악물고 버티던 괴력몬이 먼저 쓰러져버렸다. 




 "승자는 노랑의 초련! 필드 재정비 후 경기 재개!"




 아주 신명나게 다 부숴놨네! 이수재가 궁시렁거리고 필드 스탭들이 정비를 위해 필드로 올라왔다. 텅빈 눈으로 한참을 버티던 후딘은 승패가 갈리자 풀썩 쓰러져버렸고, 초련도 주저앉아 버렸다. 객석은 눈물바다였다. 같이 팝콘을 먹던 목호가 박수를 치며 일어나 시바에게 다가갔고, 그린은 전광판에 떠오르는 대진표를 살펴봤다.




***




 6강 그린의 상대는 사천왕 칸나였다. 손발을 달달 떨던 상록단원들의 걱정과는 다르게, 그린은 승리를 거머쥐었다. 




 - 역시 상록의 힘은 저명하군요. 에이스 선출 윈디와, 대탈출동 이브이, 10만볼트 후딘의 활용이 인상적이었는데요.

 - 역시 그 중에서도 자속보정 없이도 낭낭했던 10만볼트 화력에 집중하지 않을 수가 없네요. 

 -맞습니다. 폭 넓고 활용도 높은 기술배치를 보여주셨는데요. 12강에서 블루의 이슬 씨를 꺾고 올라온 그린 씨가, 12강에서 독수 씨를 꺾고 올라온 사천왕 칸나 씨와의 6강전에서 승리하셨습니다.




 걱정이 무색하게 이기고 돌아온 그린이 다시 얌전이 앉아 팝콘만 씹어대자, 단원들은 머쓱해졌다. 머리 좋고 강한 거 빼면 시체인 그린인데, 최근 배틀하는 모습을 자주 못 봤어서 그걸 잠시 까먹었던 듯 했다. 그냥 머리 좋고 싸가지 없는 게 그린이 아니라, 머리 좋고 싸가지도 없고 배틀도 잘 하는 게 그린이었던지라.




 - 경기의 열기가 점점 뜨거워지고 있습니다! 이어서 갈색의 마티스 씨와 사천왕 목호 씨의 경기입니다! 요즘 마티스 씨 폼이 그렇게 장난이 아니라던데, 이번 경기에서 그 활약상을 기대하지 않을 수가 없는데요?

 - 맞습니다! 상대는 사천왕 최강이라 불리는 목호 씨! 전기에 반감인 드래곤 타입인지라 꽤 까다로운 고전을 보일 것으로 예상됩니다!




 옆에서 팝콘을 뺏어먹던 목호가 손을 탈탈 털며 일어났고, 단원들과 넘치는 기합을 주고받은 마티스도 필드에 올랐다. 




 - 이거 장관이군요! 필드 위에 비바람에 낙뢰가 쏟아지고 있습니다!

 - 호연의 날씨 연구소가 견학을 와도 좋을 정도네요!




 에레브의 전기 공격을 맞아주던 망나뇽이 번개를 쏟아내기 시작했고, 곧 몰려든 먹구름에서 빗방울이 쏟아졌다. 곧바로 강한 화력과 스피드 있는 연쇄가 인상적인 망나뇽의 역린이 쇄도했고, 승리는 목호의 쪽으로 기울어졌다. 




 "사천왕 목호 승리!"




 곧이어 초련과 국화의 경기가 이어졌다. 승리는 국화의 것이었다. 6강전이 끝난 후, 패자부활전 경기가 진행이 되었다. 팝콘이 물려버린 그린은 에너지 드링크를 홀짝이며 경기를 구경했고, 잠깐의 재정비 후 4강전이 진행되었다. 패자부활전에서 미쳐버린 전투력을 보여주던 민화가 4강전에 진출하게 되었고, 목호와의 경기가 배정되었다. 그린의 상대는 국화였다. 보라타운의 기억 때문에 고스트타입을 썩 좋아하지 않는 그린은 선출로 갸라도스를 내보냈다. 선공으로 허공을 이리저리 날아다니는 골뱃의 날개죽지를 얼음엄니로 물어 뜯었다. 




 - 역시 4강전! 시작부터 보여주는 물리 난투극이 치열합니다!

 - 상록의 그린 씨와, 사천왕 국화 씨의 경기로 4강전이 시작 되었습니다! 모두 상당한 내공의 트레이너들 이시구요! 

 - 날개를 물린 골뱃의 초음파! 갸라도스의 결정력에 상당한 타격을 주었습니다! 갸라도스, 혼란상태에 빠져버렸군요! 과연! 살을 내어 주고, 뼈를 취하는 전략인 것일까요? 

 - 이어진 갸라도스의 폭포오르기! 가벼운 타박상만 남기는 선에서 그칩니다!

 - 혼란상태가 크게 작용하네요! 빨리 상태이상에서 벗어나지 않는다면 곤란할 것으로 보입니다! 이어서 골뱃의 흡혈 후 선수교체가 이루어집니다! 교체 포켓몬은 아보크네요!

 -혼란이 걸린 상태에서 독찌르기! 정확히 들어갔습니다!




 손톱을 물어 뜯으며 경기를 초조하게 지켜보는 상록단원들과 다르게, 그린의 표정은 내내 시큰둥했다. 




 "오박사의 손자야. 영 집중을 못 하는군. 경기가 재미 없는거냐?"

 "그냥 그렇네."

 "허, 예의 없는 것도 그와 똑 닮았구나."

 "잘도 내가 제일 싫어하는 말을..."




 눈살을 찌푸린 그린이 바닥에 발을 한 번 크게 굴렀다. 쿵 하는 소리에 혼란에 빠져있던 갸라도스가 정신을 번뜩 차리고 제대로 위협을 뿜어냈다. 그린의 표정이 좋지 않았다. 가벼운 도발이었을 뿐이지만, 그린은 이런 것에 잘 말려들었다. 하지만 평점심을 잃지 않고, 밀려오는 분노와 짜증만큼 효율성을 올리는 판단을 하는 것은 그린이 가장 잘 하는 것이다. 


 역시 그와 닮았어.


 그린에게서 오박사를 비쳐보는 국화의 눈동자에, 팬텀을 휘어감는 윈디의 화염이 보였다. 공기중으로 흩어졌던 팬텀이 그림자에 눌어붙어 기절한 것으로 경기는 종료가 되었다. 




 "상록의 그린 승리!"




 뒤 이어 민화와 목호의 경기에서, 민화는 통곡의 벽을 마주했고 결승이 코앞으로 다가왔다. 울상으로 필드에서 내려가는 민화를 보던 이수재가 어디선가 주워온 책자를 둥글게 말아 입가에 가져다 대었다. 




 "아아-! 최종 결승만 남았네! 예상보다 열정적인 경기에 감동했지 뭐야! 너네들의 열정이 개박살낸 배틀필드 수리정비 후에 최종 결승을 이어갈게요!"




 자리에 돌아온 그린의 뒤로 단원들이 달라붙어 어깨를 주무르기 시작했다. 




 "관장님, 까짓거 진짜 최종우승 가봅시다."

 "그래요. 목호씨라고 뭐 별 거 있겠어요? 그래봤자 트레이너죠."

 "망나뇽 세마리나 데리고 다니고 졸라 짱 쎈 사천왕이긴 하지만, 그 전에 레드씨보다는 약하니까요! 당연히 이기시겠죠? 네? 관장님?"




 참나. 

 당연하지. 


 근자감으로 느껴질 수 있지만, 그린은 정말 자신이 있었다. 살면서 자기보다 강하다고 느낄 사람은 단 한 사람 밖에 없었기 때문에.




***




 "경기 시작!"




 목호의 선출 갸라도스와 그린의 선출 나시의 전면전이 이어졌다. 어마어마한 기세로 위협을 뿜어내는 갸라도스였으나, 딱히 그린에게 까지 위협적으로 다가오지 않았다. 




 - 드디어 최종 결승전입니다. 관동 마지막 체육관장 상록의 그린과 사천왕 최고라고 평가 받는 목호의 대결. 과연 승패가 어떻게 날지 집중을 하지 않을 수가 없는데요.

 - 맞습니다. 저 역시 이런 어마어마한 순간에 함께 할 수 있다고 생각하니 영광입니다. 거물급 선수들의 대결인 만큼, 대단한 열기가 장내에 퍼지고 있습니다. 

 - 물리 데미지 절감 특성인 위협 갸라도스의 선출을 예상 한 것일까요? 그린 씨의 특수 어태커 선출이 인상적입니다.

 - 그렇습니다. 덕분에 별다른 디버프 없이 경기가 진행되고 있습니다. 말씀 드리는 순간, 갸라도스의 선제공격! 용의 파동 입니다! 




 강렬한 파동을 맞은 나시가 눈을 게슴츠레 뜨고는 그린을 힐끔 쳐다봤다. 마찬가지로 내내 시큰둥한 표정이던 그린이 머리를 탈탈 털며 나시와 눈을 마주쳤다. 한참 말 없이 눈을 마주치길 몇 분. 쭈그려 앉아 턱을 괸 그린이 바닥을 손가락으로 두번 툭툭 쳤고, 곧바로 잎사귀를 바짝 세운 나시가 최면술을 시도했다. 귀가 먹먹해지며 사위가 진공에 빠진듯 혼란과 나른함이 밀려왔고, 곧바로 위협적이던 갸라도스의 눈이 슬슬 풀려왔다. 최면에 걸린 갸라도스의 비몽사몽한 꿈을 야금야금 갉아먹으며, 나시의 일방적인 공격이 쏟아졌고, 난감한 표정을 짓던 목호가 포켓몬을 교체했다. 




 "운이 나빴네. 뭐, 운도 실력이지."

 "... 여전히 배틀할 때 예의가 없구나, 그린."




 그린의 콧방귀가 대답 대신 날아왔고, 목호는 교체 포켓몬으로 프테라를 내보냈다.




 - 그린 씨의 도발과 동시에 목호 씨의 포켓몬이 교체되었습니다. 단단한 기상이 인상적이군요! 교체 포켓몬은 프테라 입니다!

 - 그린 씨의 포켓몬은 교체 없이 진행되는 듯 합니다. 선수 교체 후, 프테라의 스톤에지! 역시, 굉장한 스피드입니다!




 가파르게 비상한 프테라의 포효와 함께, 갈라진 필드의 바위가 솟아 올라 나시를 덮쳐왔다. 밀려온 타격에 오만상을 찡그린 나시의 머리 세 개가 동시에 그린을 쳐다봤고, 한숨을 푹 쉰 그린이 지시를 내렸다.




 - 선공을 맞은 나시의 반격은, 아! 트릭룸! 트릭룸이네요! 빠른 스피드와 강한 공격력이 주력이던 프테라와 비교적 낮은 스피드를 지닌 나시의 스피드가 다섯 턴 동안 뒤바뀝니다!

 - 좋지 않네요! 역시 상록의 그린! 전략과 지략이 대단하다고 평가 받는 트레이너 답습니다!

 - 그는 늘 수와 상황을 읽는 것이 남들보다 빠르다는 평을 받고 있죠! 그 배틀 스타일이 가장 잘 나타나는 현장인 것 같습니다! 대비도 확실하고, 판단도 빠릅니다.

 - 역시 저희 연구소 출신!

 - 역시 똑똑하다, 그린 씨!




 학연 어필하지 마!

 해설을 듣던 이수재의 경고가 날아왔고, 흥분을 가라앉힌 두 해설이 머쓱한듯 헛기침을 했다. 다섯 턴 째 이어지는 트릭룸 상황에서 우위를 선점하는 듯 보였으나, 높은 프테라의 공격에 누적 데미지가 쌓여가던 나시는 마찬가지로 데미지가 쌓였던 프테라와 동시에 쓰러져 버렸고, 전반전은 종료가 되었다. 




 - 대단한 경기의 현장입니다! 빅매치라고 칭송하지 않을 수가 없군요!

 - 현재 필드는 재정비 중이고, 곧 경기가 재개 될 예정입니다. 과연 최종 승자는 누가 될지! 월드 토너먼트전을 방불케 하는 응원의 열기가 뜨겁습니다!

 - 재정비 중 쉬어가는 타임으로 잠시 객석 인터뷰를 진행하도록 하겠습니다. 전광판에 잡히시는 체육관 단원분들은 배치된 마이크를 들고 인터뷰에 응해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자, 시작하도록 하겠습니다. 




 미친듯한 열기를 뿜어내는 객석을 비추던 카메라가, 생수를 흩뿌리며 광란의 치어리딩을 선보이는 블루 체육관 수석 단원을 담았다. 




 - 안녕하세요! 자기소개 부탁드립니다!

 "네, 안녕하세요! 블루 체육관 수석 단원입니다!"

 - 활기차군요! 이번 토너먼트 최종 결승을 어떻게 관람하고 계신가요?

 "솔직히 우리팀 탈락해서 그 이후로는 관심 1도 안 갔었는데, 강한 놈들끼리 치고박고 싸우는 거 보니까 재밌네요! 즐겁게 보고 있습니다!"

 - 재미있게 즐기시고 계시는군요! 응원하는 선수는 누구입니까?

 "우리 이슬이 발라버린 게 마음에 들지 않지만, 그래도 이왕이면 상록이 이겼으면 좋겠습니다!"




 그래야 우리가 좀 덜 쪽팔리잖아요! 그렇게 말하자 블루 단원들이 단체로 생수를 뿌리며 동의했다. 




 - 열정적인 인터뷰 감사드립니다! 다음 인터뷰 모셔볼까요? 안녕하세요! 자기소개 좀 부탁드립니다!

 "어어엉? 엉? 나야? 진짜?"

 - 예! 너 맞습니다! 자기소개 한 번!




 치킨 다리를 뜯던 회색 체육관 단원이 엉거주춤 자리에 일어나 마이크를 잡았고, 주변 단원들이 휘파람을 불기 시작했다.




 "에, 어, 아, 안녕하세요..? 회색체육관 단원입니다..!"

 - 네! 반갑습니다! 경기는 잘 즐기고 계신가요?

 "아이고, 예! 덕분에요!"




 닭다리를 흔들며 해맑게 대답하는 것에 옆에 있던 단원들도 치킨을 흔들며 환호했다. 




 - 가장 인상 깊던 배틀이 무엇이셨나요?

 "저희 관장님 배틀이요!"

 - 충성심도 깊어라! 제외 하고는 어떤 배틀이 기억에 남으시나요?

 "으음...! 갈색체육관이랑 홍련체육관 배틀이요!

 - 그렇군요! 이유를 여쭈어봐도 될까요?

 "내기했는데, 져서 5만원 날렸거든요!"




 유후!

 양 옆에서 만원짜리 지폐 다섯 장이 공중에 날렸고, 객석에서 웃음소리가 터져나왔다.




 - 안타깝군요! 마지막으로 하고 싶은 말씀 있으신가요?

 "예! 관장님! 치킨 잘 먹을게요! 사랑합니다!"




 회색 체육관에 뼈 묻을게요!

 깜찍한 다짐과 함께 선수석에 앉아있던 웅이 함박웃음을 지으며 손을 흔들어 주었다. 주변에선 오올 하며 웅의 옆구리를 찔러왔고, 곧 전광판 화면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 자! 마지막 인터뷰 진행하겠습니다! 안녕하세요!

 "..! 어...! 안녕하세요!"

 - 네, 반갑습니다! 자기소개 부탁드려요!

 "안녕하세요! 상록체육관 수석 단원 입니다!"




 베테랑 트레이너가 팝콘을 뜯어먹다가 엉거주춤 일어났다. 주변에서 실실 웃으며 그 모습을 휴대폰으로 동영상 찍는 모습이 함께 담겼고, 어딘가 수줍을 표정을 짓는 그에게 질문이 다가왔다.




 - 최종 결승! 어떻게 보고 계신가요?

 "아, 예, 뭐, 저희집 안방 처럼 편안하게 보고있습죠. 허허."

 - 대단한 자신감이시군요! 이유를 여쭈어봐도 될까요?

 



 하도 물어 뜯느라 망신창이가 된 손을 등 뒤로 숨기며 그는 괜한 허세를 부렸다.




 "저희 관장님이 가장 강하시기 때문에, 이유 있는 자신감이라고 말씀 드리고 싶습니다. 또, 챔피언 출신 관장은 관동의 상록이 유일무이하다고 알고 있습니다.

 - 그렇죠! 이유 있는 자신감이군요! 

 "예예, 그럼요."




 이열

 객석에서 술렁이는 소리가 들리자 그는 되려 당당하고 뻔뻔한 태도를 유지했다. 




 - 자! 결승을 앞 둔 관장님께 영상편지 가봅시다!

 "... 관장님. 믿고 있습니다. 관장님이 강한 거 빼면, 저희 체육관은 남는 게 없습니다. 어유, 물론 어렵지 않게 이기시리라 늘 믿죠... 관장님이 입으로 뱉으신 말씀도 못 지키실리도 없고... 레드씨도 없는데, 설마 관장님이 지시겠습니까...? 그쵸? 믿습니다. 사랑합니다. 경기 끝나면 저희 소고기 사주세요. 감사합니다."

 - 네! 믿음과 욕망이 가득한 응원 잘 들었습니다!




 허 참. 

 선수석에서 구경하던 그린이 기가차단듯 헛기침을 했다. 참나. 당연하지. 내가 질리가 없지.




 - 후반전 시작합니다!




 한바탕 인터뷰가 지나가고, 기지개를 쭉 핀 그린이 다 마신 이온음료 병을 구기며 필드에 올랐고, 재개된 경기에 고양감은 삽시간에 끓어올랐다. 




 - 후반전 그린 씨의 선출은 윈디군요! 언제봐도 수려합니다! 목호 씨의 선출은... 아! 최면에 빠져있던 갸라도스군요! 두 물리몬의 위협이 서로의 공격력을 저하시킵니다! 

 - 그린 씨의 윈디는 강한 물리공격력과 상응하는 특수공격력도 높게 평가받는 쌍두형 에이스 포켓몬이죠.

 - 맞습니다. 높은 공격력을 품은 선공기 신속은 그 위력의 명성이 자자합니다. 아직 최면에 빠진 갸라도스가 과연 잘 헤쳐나갈지가 관건이군요! 말씀 드리는 순간, 윈디의 신속! 갸라도스의 HP를 레드라인까지 떨어트립니다! 위험하군요!




 아직도 비몽사몽해 보이는 갸라도스탓에, 그린은 손쉽게 기점을 잡았다. 여전히 심드렁해 보이는 그 눈동자에는 강한 자신감이 비쳐보이기도 했다. 


 백날 해봐라.

 레드도 없는데.

 내가 질 것 같아?




 - 아! 윈디의 와일드 볼트! 허를 찌르는 기술이 4배 약점 갸라도스를 쓰러트립니다! 마지막 포켓몬만 남은 목호 씨! 에이스 망나뇽이 드디어 모습을 드러냅니다!




 "이거 참, 면목이 없구나."




 망나뇽과 마주한 윈디의 위협이 뿜어져 나왔고, 장내의 분위기는 더욱 고조 되었다. 강한 포켓몬의 등장은 늘 사람의 마음을 흥분시킨다. 하지만 그린은 아까부터 지금까지 계속 마음이 일정했다. 쉽게 흐트러질 수 없었다. 눈을 번뜩이며 내지르는 망나뇽의 역린을 맞은 윈디가 입에서 불기운을 뿜어내며 달려들었고, 살벌한 맹수들의 투기에 경기의 절정이 더 강하게 이어졌다.




 - 역시 에이스 망나뇽! 강합니다!

 - 그린 씨의 윈디, 두번째로 이어졌던 역린의 데미지가 강하게 작용한듯 동작이 점점 느려지고 있습니다! 선공기 신속 이후로 이렇다 할 공격의 선점을 잡지 못하고 있는데요!

 - 하지만 망나뇽도 데미지가 많이 누적되었습니다. 결코 낮지 않은 공격력을 주고받는 피지컬 싸움이 인상적이군요! 오늘 내내 강한 화력을 보여주던 윈디! 망나뇽의 HP를 절반 이하로 깎아내며 쓰러집니다!

 - 이로써 망나뇽의 상황이 많이 좋지 않게 되었군요! 강한 화력의 공격 한방이면 쓰러질 수 있으니, 그린 씨의 마지막 포켓몬이 무엇인가에 따라 승패가 결정날 것 같습니다.




 윈디가 들어온 몬스터볼을 문질거린 그린이 손에 눈을 지긋이 감았다 뜬 후, 몬스터볼을 내던졌다.




 - 아! 그린 씨의 마지막 포켓몬은 피죤투군요!

 - 경기가 다시 진행되고 있습니다! 망나뇽이 파괴광선을 모으고 있는 것을 보니, 목호 씨는 한 방으로 배틀을 끝 낼 생각인 것 같습니다!

 - 과감하군요! 공격적이고 터프한 전략입니다! 상공을 배회하는 피죤투! 트레이너와 시선을 교환하고 있는 모습이 자주 포착 되는데, 무언가 노리고 있는 것이 있는 걸까요?




 큰 날개를 펄럭이며 그린과 시선을 주고받던 피죤투가 유려한 비행을 선보이며 망나뇽을 살펴보았다. 비행의 진행이 정지한 순간, 눈을 빛낸 망나뇽의 입에서 천문학적인 에너지를 쌓아올린 파괴광선이 필드 전체를 들썩이며 상공의 피죤투에게 쏟아졌다. 대 역전극 각인가? 어마무시한 화력에 제대로 맞았다면 K.O가 불가피한 모습이었다. 


 하지만 그린은 늘 피죤투의 빠른 스피드를 초점에 두고 트레이닝을 진행했었다.


 미묘한 날개짓으로 궤도를 바꾼 피죤투에 아슬한 차이를 두고 파괴광선이 빗나가 버렸고, 피죤투는 순식간에 기점을 차지하게 되었다. 얼이 빠져 당황한 목호가 반감기를 견디는 망나뇽에 아차 싶던 순간이었다.




 - ..! 아! 피했네요! 망나뇽의 파괴광선을 피했습니다!

 - 언제봐도 경이로운 비행능력과 스피드 입니다! 이게 가능하다니! 눈으로 보고도 믿기지 않는 현장입니다! 




 곡예에 가까운 피지컬 컨트롤에 객석에서는 환호성이 터져나왔고, 그린과 눈맞춤을 이어간 피죤투의 은혜갚기가 망나뇽을 쓰러트렸다. 육중한 몸이 땅을 울리며 쓰러졌고, 그린의 어깨에 날아와 앉은 피죤투에, 이수재의 호루라기 소리가 얼이 빠진 장내 분위기를 깨웠다.




 "망나뇽 경기 불가능! 따라서 제 1회 관동 비공식 토너먼트 최종 우승자는 상록의 그린!"





 객석에서 환호성이 터져나왔고 허탈한듯 허망한 웃음을 지으며 다가온 목호와 그린이 악수를 하며 토너먼트전의 막이 내렸다. 




 - 감동적이군요! 대단한 경기들의 연속이었습니다!

 - 이런 경기를 차후 몇 년간 또 볼 수 있을까요? 놀랍습니다! 수준 높은 트레이너들의 경기! 이게 비공식전이란 게 아쉬울 따름입니다!

 - 최종 승자는 상록의 그린 씨! 영광스럽습니다! 현재 그린 씨는 체육관 동료들과 축하를 나누는 모습이군요! 역시! 그의 라이벌 챔피언이 없는 한, 관동 최강의 체육관장을 막을 수 있는 사람은 없는 걸까요!

 - 그가 정말 장점이 많은 트레이너임을 확인할 수 있던 경기였습니다! 분석과 상황 판단능력! 내리는 결정들도 실속있고, 더불어 파트너 포켓몬들과의 유대감이 담긴 모습들까지! 이런 실력있는 트레이너가 있다는 것이 관동의 축복으로 다가오는 시점입니다! 

 - 축하가 이어지는 가운데! 리본 수여식이 이어지고 있군요! 심판 이수재씨의 진행 하에 수여식이 진행되겠습니다.




 전광판에는 그린의 경기 플레이 영상이 송출되고 있었고, 비공식 경기인 주제에 화려한 시상식이 진행되었다. 고작 배틀 이긴 거 가지고 이정도라고? 이해가 가지 않는단듯 그린의 표정이 내내 그렇듯 뚱하게 가라앉았다. 




 "뭐야, 진짜 쓸데없어."

 "너어.. 는 진짜, 트레이너로써 자부심도 없니, 그린? 좀 더 기뻐해봐! 저기 봐. 네 체육관 단원들 파도타기하고 난리났는데?"




 뭐?

 단상의 이수재 앞에 올라 선 그린이 그가 가리키는 방향으로 시선을 돌리자, 승리의 포효를 내지르던 상록단원들이 지리는 세리머니를 선보이고 있었다. 이긴 건 난데, 왜 쟤네가 난리야. 이해가 안 가는 것 투성이다. 그냥 빨리 수여식 진행하고 튀어야지. 그런 생각을 하던 그린이 이수재를 재촉했다. 곧이어 비공식 토너먼트 승리 리본 치고는 과하게 화려한 리본이 시상대에 올랐고, 그린의 표정은 점점 굳어갔다. 


 과해. 


 존나 과해.


 비공식 경기 주제에 뭐 이렇게들 진심이야?




 - 강한 트레이너들의 배틀의 장에 걸맞도록 크고 화려한 우승뱃지가 시상대에 올랐습니다! 듣자하니 본 경기 주최자인 목호 씨께서 직접 사비로 제작하셨다는 소문이 있는데, 이게 사실인가요?

 - 예, 그렇습니다. 입수된 정보에 따르면, 목호 씨의 자금 조달과 함께, 디자인에는 사천왕 칸나 씨께서 팔데아지방에 외주까지 맡기셨다고 합니다. 요즘 가장 뜨거운 관심을 받고 있는, 보울 마을의 예술가 콜사 님의 작품이라고 밝히셔 더 큰 주목을 받고있습니다.

 - 역시 사천왕! 통이 크군요!




 "시발, 이게 뭐라고 외주까지 맡겨."




 장난 아닌 우승 리본의 스펙에 그린이 질린 티를 냈다. 돈이 썩어 나냐? 월드 토너먼트 리본도 이 정도는 아니야, 이 멍청이들아. 하지만 이상함을 느낀 건 그린만 해당되는 이야기였던 듯, 화기애애한 분위기로 시상은 진행되고 있었다. 리본 수여 준비를 마친 이수재가 목을 가다듬고 입을 열었다.




 "크흠! 제 1회 관동 비공식 토너먼트 최종 우승자는 상록의 그린! 축하드립니다!"




 으아아악! 관장님!

 어디서 빌려온 건지 대포카메라로 상황을 영상으로 담는 상록단원들의 비명소리가 장내 가득 터져나왔다. 진짜, 존나 기빨려. 걍 빨리 받고 튀어야지. 밀려오는 피곤함에 한숨을 푹 내쉰 그린이 리본을 받으려는 순간 이었다.




 "......"




 닫혀있던 경기장의 문이 끼익 열리고 부스럭거리는 인기척이 느껴졌다. 뭔가 싶던 모두가 기척이 느껴지는 곳을 향해 고개를 돌렸고, 순간 축제 분위기였던 장내 분위기는 마법에 걸린듯 차게 굳어버렸다. 경기장 문을 열고 나타난 사람은 레드였다.




 "엥?"

 "헉, 뭐야."




 얼어붙은 순간, 레드의 양 옆에서 그의 손을 잡고 있던금선과 심향이 머리에 물음표를 달고 경기장 내부를 살펴보았고, 레드 역시 혼란스러운 표정으로 내부를 힐끗 쳐다보았다. 레드의 눈동자가 플래카드가 잔뜩 설치된 관객석을 훑고, 해설석을 스쳐갔다. 평소에는 둔하던 레드의 눈치가 갑자기 열일을 하기 시작했고, 점점 그 덤덤하던 표정에 깊은 당황과 서운함이 물들어가기 시작했다. 레드보다 한 발 늦게 상황파악을 시작한 금선과 심향이 육성으로 터지는 황당함을 숨기지 못 했다. 금선의 눈이 배틀의 흔적이 역력한 필드와 대진표를 훑었다. 




 "... 헐, 진짜? 실화에요, 님들?"




 심향의 시선은 그린의 경기를 송출하고 있는 전광판에서 떨어지지 않았다. 




 "대-박. 진짜로? 이게 맞아요?"




 마지막으로 레드의 눈이 리본수여를 받는 그린에게 닿았다. 얼어붙은 그린이 꼼짝도 못 하던 순간, 내내 어떤 표정을 지어야 하는지 갈피를 못 잡던 레드가 식은땀을 뻘뻘 흘리며 금선과 심향의 손을 놓으며 뒷걸음질을 쳤다.




 "... ... ... ..."




 당황한듯 굳어져 식은땀을 흘리는 그 표정은 뭐라 설명할 수 없었지만, 명백한 서운함과 섭섭함을 한가득 담고 있었다. 처음보는 레드의 표정에 머리가 단체로 띵해진 상황에서, 레드가 뒷걸음질을 치다가 도망가버렸고 가장 먼저 정신을 차린 그린이 안색이 창백해져선 숨을 헉 들이삼키고 레드를 불렀다.




 "야, 야-! 레드-..! 기다려! 오해야! 내가 다 설명할게-!"




 시상이 이루어지지도 않은 상황에 단상에서 뛰어내린 그린이 문 너머로 사라진 레드를 붙잡으려 뛰어가기 시작했고, 뒤늦게 정신을 차린 목호가 그런 그린을 붙잡았다. 뭐지? 어떻게 된 거지? 목호 본인도 상황파악이 안 되는 지라 어영부영 그린을 붙잡았는데, 그 순간 그린이 목호의 손을 팍 뿌리치며 진짜 개빡친 표정으로 역정을 냈다. 




 "그러게 내가 하기 싫다고 했잖아-!!!"




 이보다 더 빡칠 수 없다. 존나 화난 그린이 금선과 심향을 지나쳐 사라진 레드에게 달려갔고, 그로부터 한참을 멍하니 굳어있고서야 목호가 금선과 심향에게 여기 어떻게 알고 왔냐고 물어볼 수 있었다.




 "... 그, 오늘 날씨가 많이 덥길래...."

 "레드 씨랑 먹으려고 아이스크림 잔뜩 사서 은빛산에 찾아갔거든요..."

 "어... 금선이가 최근에 열린 성도 이벤트전에 우승해서 상금이 쏠쏠한 상황이라... 그, 칭찬받고 싶은 마음에 무작정 담다보니 아이스크림을 너무 많이 사버려서..."

 "레드 씨가 같이 나눠먹자고... 그러셔서... 근데 체육관마다 오늘 다 휴무일이길래... 그래서 녹기 전에 석영고원 사천왕분들 부터 나눠드리려고 온거죠, 뭐..."

 "근데, 도착하고 보니까 너무 시끌시끌해서... 뭔가 싶어서 문 열어보니까."




 상황이 이러대요?

 아니, 님들이 그러고도 사람이에요?

 레드 씨가 얼마나 배틀에 진심인지 알면서.

 레드 씨 상처 받으셨잖아요, 님들. 어쩔거에요! 책임져요!


 말하다 보니 빡친 금선이 목호의 어깨를 짱돌같은 주먹으로 퍽퍽 내리쳤고, 심향은 살벌하게 내려앉은 표정으로 목호를 째려봤다. 차게 굳어있던 경기장은 점점 웅성웅성 거리는 게 들리기 시작했고, 가장먼저 웅이 휴대폰으로 레드에게 전화를 걸며 손톱을 물어뜯기 시작했다. 이슬은 레드를 쫓아 뛰쳐나간 그린에게 문자를 보내며 안절부절 못하고 있었고, 독수와 국화 강연은 심각한 표정으로 상황에 대한 의논을 시작했다. 


 야, 어떡해! 칸나와 시바가 금선과 함께 목호의 등짝을 때리며 땀을 흘렸다. 민화와 초련도 어쩌면 좋냐는 주제로 골머리를 썩히고 있었다. 마티스만 상황파악이 덜 되어 안절부절 못하고 있었으나, 레드가 상처받고 사라졌다는 것만은 잘 알고 있어서 더욱 초조해하고 있었다. 


 아, 이게 뭐야! 나 다음주에 레드랑 일곱섬에 조사 가기로 했는데!

 이수재가 절규하는 소리까지 울렸다. 

다시 시작하는 갬성

맹고님의 창작활동을 응원하고 싶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