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



배우는 연기를 했다. 텅 빈 곳에서 마치 제가 누구인지를 완전히 잊어버린 것 같은 얼굴로 타인의 삶을 잘도 이야기했다. 저보다 한참 어린 사람도 되었다가, 시한부가 되기도 하고 이미 죽은 이가 되어 보편의 삶을 이야기하기도 했다. 그 중 어느 것도 진짜 배우의 얼굴은 아니었다. 제가 아닌 허구의 타인을 연기하는 배우의 진짜 얼굴을 아는 이는 어쩌면 단 한 명도, 없을 수도 있다. 큰 스크린 속의 얼굴은 연신 미간을 구기며 가슴을 쥐어뜯었다. 감당할 수 없는 고통에 휩쓸린 것 같았고, 당장이라도 죽을 것 같아 보였다.


“..온다며.”


영수였나. 화면 속의 얼굴을 심드렁하게 바라보고 있던 나는 이내 죽은 듯 꿈쩍도 않는 휴대전화를 휙 집어 들고 노려보다 이내 그것을 다시 던지듯 푹신한 러그 위로 던져버리고 손에 들고 있던 팥 아이스크림을 입안으로 밀어 넣었다.


“아니 내가 오라고 했어? 자기가 온다며, 자기가.”


영수는 그렇게 한참을 펑펑 엉엉 울고 있었다. 이미 돌이킬 수 없는 인연을 그리워하며 당장 어쩌지 못하는 상황을 헤매며 진저리치는 얼굴을 보고 저것이 평화롭다고 말 할 수 있는 사람은 단 한 명도 없다는 것을 나는 알고 있었다. 영수는 고통스럽고, 영수는 아팠고, 영수는 괴로웠다.


“이럴 거면 온다는 말은 왜 해, 어? 아주 입만 살아 가지고.”


스물 여섯의 영수는 지옥이었다. 그리고 그 영수의 껍데기였던 최민기의 스물여섯은 더할 나위 없이 찬란했고 반짝거렸다. 내가 아닌 영수의 삶을 살았던 순간의 기억을 스치듯 떠올리며 거실 한쪽 벽을 전부 채운 하얀 스크린을 빤하게 들여다보던 나는 이내 느리게 손에 들고 있던 것을 이로 깨물었다.


“...연기 잘하네.”


김종현과 함께 하기로 마음먹은 순간부터 내가 감당해야 할 몫이었다. 영수도, 스물여섯의 최민기도 아닌 지금의 나를 제대로 마주하는 것, 그래서 내가 가장 잘할 수 있는 얼굴을 찾는 것, 지금의 최민기는 온통 까만색이었다.


“뭘 저렇게 잘해.”


숨이 턱 막혔다는 것이 맞는 표현이었다. 당장 김종현의 손에 들린 대본을 보자마자 그것이 내 것이 된다는 보장이 없으면서도 무언가가 목을 조르는 것 같은 느낌에 나는 괜히 태연하고 의연한 척을 했다. 실패가 분명한 길을 선택한다는 것은 용기가 아닌 각오가 필요했다. 나를 이 길로 끌어들인 사람을 원망하지 않을 각오, 또 한 번 실패해도 나를 버리지 않을 각오, 나를 버려야 하는 순간이 와도 최대한 아름답게 소멸할 각오. 그 많은 것을 선뜻 감당하기에 나는 아직 세상을 마주할 각오가 되어 있지 않았고, 세상 앞에 내밀 얼굴이 준비되지 않은 상태였다.


“.....”


거울을 들여다봐도 보이는 얼굴은 결국 무방비의 최민기였다. 그런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무엇일까 가만히 텅 빈 공간을 돌아다보던 나는 부러 외면한 것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굳이 마주하고 싶지도 않았던 순간의 앞에 주저하며 주저앉았다. 내가 가장 잘하고 있던 시절, 충분히 예쁘고 멋졌던 시절, 그 순간의 최민기는 도대체 어떤 얼굴이었는지 돌보지 않아 먼지가 내려앉은 기억을 끄집어내서 마주하던 나는 차갑게 입안을 채우다 녹아버린 아이스크림의 단 맛에 괜히 입술을 깨물었다.


“아니 근데 이 인간은 진짜.”


뭐든 해야 했기에 선택했던 하나의 행위가 당장 내 얼굴을 바꿀 수 없다는 것은 알고 있었다. 뭐가 그렇게 슬픈지 눈물을 펑펑 쏟고 있는 영수가 될 수도, 그 영수와 한 몸이 된 것처럼 영혼을 팔아 연기했던 그때의 최민기가 될 수도 없었다. 그저 그때는 그랬는데, 지금은 이렇다는 현실 자각이 더 빠르고 쉬운 인간이 되어버린 것을 모르지 않았다. 그래도 뭐라도 하려고 한 건 단순한 이유였다.


“뭐 얼마나 대단한 걸 물어오나 보자, 진짜.”


올게요. 금방 올게요. 무방비한 얼굴이라도 보러 오겠다는 사람이 있다는 걸 알아서 뭐라도 해야만 했다. 도무지 가능할 것 같지 않은 실패가 뻔한 길에 돈까지 쓰며 달려드는 인간에게 가지는 측은지심일지도 모르는 감정이었지만, 그래도 일단은 나를 위해 뭐든 하겠다는 김종현에게 보이는 최소한의 성의 같은 것이었다.


“거짓말쟁이.”


언제 올건데요. 금방 온다던 사람의 시간치고 이틀은 너무하다 싶었다. 오늘 안와요? 단순하게 물었던 질문에 일이 많아 늦어질 것 같다는 말을 남긴 것이 전부였던 메시지창을 빤히 바라보던 나는 보내지 못한 채 남겨 놓은 메시지를 빤하게 바라보다 이내 그것을 지워버리고는 다시 키패드를 두드렸다.


“...짜증나, 진짜.”


그냥 없던 일로 하죠. 같이 살기로 한 거. 짜증이 다닥다닥 들러붙은 손으로 키패드를 두드리고 이내 손가락을 옆으로 넘겨 전송 버튼을 누르려던 나는 곧 그것도 다시 지워버리고는 그대로 휴대전화를 소파 위로 대강 집어 던졌다.


“너무 기다리는 거 같잖아.”


뭐 그렇게 되게 기다리는 건 아닌데. 이 문자를 보내면 너무너무 기다리는 것 같아 보일거고 그러면.


“내가 진짜 되게 을 같잖아?”


생각의 흐름을 중얼중얼거리며 굳이 보지 않아도 알고 있는 장면들을 노려보던 나는 곧 리모컨을 집어 들어 가로줄이 나란히 두 개 놓인 버튼을 꾹 눌렀다. 하여튼 아주 종류별로 가지가지 마음에 안 들어. 아무것도 안 하고 그저 학업에 매진 중이라는 말로 잘 포장하면 그만이었던 삶을 이렇게 하루 아침에 뒤집어 놓고 금방이라는 시간을 제멋대로 재단하는 김종현을 가만히 떠올리던 나는 곧 그대로 자리에서 박차고 일어났다.


“오기만 해 진짜, 내가 가만 안 둘 거야.”


아주 그냥 이 집에 발 한 짝도 못 들이게 한다, 내가.


“아! 깜짝이야!”


입에 남은 마지막 달달함을 씻어버리고 싶어 그대로 쿵쾅거리며 부엌으로 가 냉장고 문을 벌컥 열었던 나는 막 생수를 집어 들자마자 들려오는 초인종 소리에 그대로 고개를 돌리며 가슴께를 부여잡았다. 그리고 잠시 멍하게 서있다 이내 전속력으로 걸음을 옮겨 인터폰은 확인도 않고 벌컥 현관문을 열어젖혔다.


“아, 왜 이제!”

“어?”

“...와! 내가 너 얼마나 보고 싶었는데.”

“우리 어제도 봤는데, 민기야?”


1분도 못 간 다짐이 모래알이 되어 부서지는 순간, 눈앞에 보이는 얼굴을 향해 순간 뱉어 낸 말을 주워 담을 생각 다신 아무 말이나 덧붙였던 나는 양손 가득 무언가를 든 채 의아한 얼굴을 하고 있는 황민현을 바라보다 곧 어색하게 미소를 머금었다.


“어제 봤어도 또 보고 싶을 수도 있지.”

“뭐야, 되게 누구 기다렸는데 내가 나타나서 아쉬운 사람 같은 얼굴은.”

“누가? 내가? 아닌데?”

“그래, 아니면 다행이고.”


일단 이것 좀 놓고. 그런 내 얼굴을 얼마간 더 들여다보다 그저 담담히 집 안으로 들어서는 황민현의 뒷모습을 가만히 바라보고 있던 나는 이내 놀라다 못해 멈춰버린 것 같은 가슴께를 손바닥으로 몇 번 내리치고는 곧 잡고 있던 현관문을 잡아 당기며 바깥 풍경을 슬금 훔쳐보았다.


“뭐야, 또 아이스크림만 먹었어?”

“간식으로.”

“밥은.”

“나 다이어트 해야 해.”

“다이어트 하면서 깐도리는 왜 먹어?”


깐도리는 죄 없어, 살 안 쪄. 단호하게 중얼거리는 나를 보며 마뜩잖은 얼굴을 하고 있던 황민현이 곧 냉장고 문을 벌컥 열고는 미간을 가늘게 찌푸렸다.


“민현아, 너 열 받을 거 같은데.”

“우리 집 냉장고가 아니니까 참긴 하는데 열은 받는다.”

“그러니까 왜 열어, 열기를.”

“누구는 열고 싶어서 열었어? 강동호가 하도 난리라서 별 수 없이 열었지.”


강동호가 왜. 몰라서 묻느냐는 듯 들고 온 것들을 차근차근 냉장고 안에 채워 넣는 것을 바라보던 나는 곧 나를 힐끗 올려다보는 시선에 눈만 깜빡였다.


“강동호가 그래도 친구라고 너 밥은 잘 챙겨 먹나 신경 쓰였나 보더라.”

“내가 밥 못 먹을 일이 뭐가 있다고.”

“김 대표랑 같이 사네 마네 하면서 너 되게 현타 맞았었잖아.”

“..내가?”

“그럼 나겠어? 김 대표랑 이래저래 피곤하겠다고 걱정된다고 너 좀 챙기래.”

“하여튼 유난은.”


그 유난 누가 말리겠어. 너 분명 관리할 거라고 안 먹을 거라고 해도 굳이 챙겨줬으니까 먹는 시늉이라도 하라며 엉망으로 아무렇게나 텅 비어있던 냉장고 안에 순식간에 밑반찬들을 정리 해놓은 황민현이 곧 다른 종이가방을 뒤적이며 자리에서 몸을 일으켰다.


“이건 당장 먹을 샐러드랑 과일.”

“이건 강동호 작품이 아닌데?”

“당연하지, 이렇게 세심한 게 강동호 작품이겠어?”

“오, 황민현.”

“아침이랑 점심은 밥 먹고, 저녁은 이걸로 해. 필요하면 말하고.”


걱정 말라는 듯 대강 고개를 끄덕이는 나를 바라보며 손에 들고 있던 것을 마지막으로 냉장고에 정리하고 돌아선 황민현이 이내 먼저 거실로 걸음을 옮겼다. 그 뒤를 따라 걸음을 옮긴 나는 이내 지방에서 올라온 시어머니마냥 집 안을 둘러보는 황민현의 눈치를 보며 바닥에 아무렇게나 떨어져 있던 쿠션을 서둘러 집어 소파 위에 재빨리 올려놓았다.


“최민기.”

“어? 어, 왜.”

“너, 또.”

“아, 청소 할 게. 해.”

“그게 아니라, 너 꿈꿨어?”


그저 둘러보는 것 같은 건성 같은 시선 끝에 걸리지 않을 리 없는 아이스크림 막대기를 손에 집어 드는 황민현을 보며 아차 하는 마음에 입술을 꽉 깨물었던 나는 그 순간 돌아서며 나를 향해 쏟아지는 낮은 목소리에 반사적으로 대꾸했다.


“어?”

“꿈꿨냐고, 또.”

“..아니?”

“근데 저건 뭐야?”


그런 나를 향해 그게 아니라는 듯 재빨리 표정을 바꾸는 얼굴을 물끄러미 응시하던 나는 곧 황민현의 턱 끝이 가리키는 곳으로 시선을 돌렸다가 벽 한 쪽을 채우고 있는 스크린 속의 영수를 보고는 곧 볼을 긁적거리며 가볍게 미소를 머금었다.


“그냥, 복귀한다고 생각하니까.”

“심란해?”

“뭐, 심란하기도 하고 뭘 어떻게 해야 할지도 모르겠고.”

“...진짜 꿈은 안 꾼 거고?”

“아니야, 진짜. 그리고 알잖아, 나 꿈꾸면 아예 밖으로 나가버리는 거.”


그럼 다행인데. 굳이 다음을 말하지 않는 얼굴은 여전히 걱정이 가득한 얼굴이었다. 진짜 아니라는 듯 고개를 절레절레 젓는 나를 향해 할 말 많은 얼굴을 하고 서 있던 황민현은 곧 주변을 휘익 한 번 둘러보고는 곧 표정을 바꾸었다.


“근데 이래서 화면이 보여?”

“뭐가?”

“아니 보통 스크린 내려서 영화를 보면 주변을 좀 어둡게 해야 하지 않아? 커튼도 안 치고.”

“아, 그게.”


김종현 이 인간이 언제 올까 문득문득 창밖을 돌아보느라 그랬다는 말은 차마 할 수가 없었다. 온다고 해놓고 올 생각이 없는, 금방이 이틀인 인간을 기다렸다는 말은 할 수가 없어 인중만 긁적거린 나는 곧 뭐 그럴 수도 있겠지, 취향이니까 하며 금세 거실 한 켠의 휴지통을 향해 걷는 뒷모습에 입만 꾹 다물었다.


“영수네.”

“뭐야, 어떻게 바로 알아?”

“내가 저걸 어떻게 모르냐. 나 회사 들어가자마자 개봉한 영환데.”

“그랬어? 그건 또 몰랐네.”

“너 저 때 진짜 연기 잘했는데.”

“난 늘 잘했어.”


물론 안 그래도 그래서 보고 있었다고 말을 덧붙이자마자 공부가 되긴 되겠다며 동조하듯 중얼거린 황민현이 슬그머니 나를 향해 다시 입을 열었다.


“진짜 복귀 할 거야?”

“그럼 가짜로 하겠냐?”

“할 수 있겠냐고 묻는 거야.”

“못 할 게 뭐가 있어. 하면 하는 거지.”

“김 대표는 믿을 수 있겠어?”


러그 위에 앉아 소파에 앉아있는 민현을 가만히 올려다보던 나는 곧, 잘 모르겠다는 듯 고개를 가로저었다. 믿는다는 것이 어떤 것인지 가장 믿었던 것들이 나를 밀어낸 순간부터 알지 못하는 내가 함부로 누군가를 믿을 수 있다 말 할 수는 없었다. 그저 보이지 않는 것을 끊임없이 의심하는 것보다는, 눈에 보이는 것을 그냥 전부라고 생각하는 것이 가장 편하고 괴롭지 않다는 것을 알기에 굳이 다른 것을 생각하지 않는 것 뿐이었다.


“그냥 계산을 해 본 거지.”

“....”

“그 사람이 나한테 얻을 이익과 내가 감당해야 할 손해가 그다지 다르지 않다면.”

“....”

“한 번 해보는 것도 나쁘지 않겠다 싶어서.”

“.....”

“혹시 모르잖아. 어쩌다가 되게 잘 될 수도 있고.”


어쨌든 평생 이렇게 살 수 없다는 건 나도 알고 있고. 내 말에 다른 대꾸 없이 그저 묵묵히 듣기만 하던 황민현은 곧 딱히 다른 방법이 없다는 것엔 역시 동의하는 듯 시선을 돌렸다. 그리고는 한참 무언가를 생각하다 이내 뜻 모를 미소를 내뱉었다.


“뭐야, 왜 웃어.”

“아니 나 혼자 이상한 생각을 좀 했어.”

“무슨 생각?”

“김 대표 잘 생겼잖아, 혹시 얘가 얼굴에 홀려서 계약을 했나.”

“뭐라고?”


그래서 말했잖아. 이상한 생각이라고. 아무리 생각이라도 그런 생각을 왜 해? 이해를 할 수 없다는 듯 펄쩍 뛰며 눈을 부라리는 나를 향해 진짜 잠깐 했던 생각이라며 두 손을 들고 맹세를 하는 황민현을 있는대로 노려보던 나는 곧 드르륵 울리는 휴대전화 소리에 그대로 팔을 뻗었다.


“하긴 네가 당한 게 얼만데, 내가 실수했어.”

“알면 됐어.”

“1년만 잘 버텨, 네 말대로 잘 되면 좋은 거고 아니어도 그 사람 손에 있는 거 없앨 수 있는 기회니까.”

“.....”

“그러고 나면 안 볼 수 있는 사람이니까 너무 싫어하지는 말고.”

“.....”


좋은 땅이 있으니 관심 있으면 연락이 달라는 메시지를 확인하자마자 울컥 치밀어 오르는 감정에 순간 미간을 있는대로 구겼던 나는 최민기, 하며 나를 부르는 목소리에 그대로 고개를 끌어올렸다.


“그렇게 싫어? 말만 들어도?”

“어?”

“뭘 그렇게 인상을 써.”

“아, 그게 아니라.”


늦어질 것 같다는 말만 해놓고 코빼기도 안 보이는 김종현인 줄 알았던 메시지가 스팸문자인 것을 확인하자마자 치밀었던 감정이 고스란히 얼굴에 드러난 것을 깨달은 나는 순간 표정을 바꾸며 이내 휴대전화를 대강 입고 있는 바지 속으로 밀어 넣었다. 그런 나를 보며 어차피 하기로 한 거 좋게 해, 하는 선비 같은 말을 덧붙인 민현이 손목에 찬 시계를 확인하고는 그대로 자리에서 몸을 일으켰다.


“벌써 가려고?”

“가야지, 가게 가는 길에 잠깐 들른 거야.”

“그럼 내가 가지러 갔어도 되는데.”

“누가 하도 가져다주라고 난리를 쳐야 말이지.”


넌 좋겠다, 너 그렇게 끔찍하게 생각해주는 친구 있어서. 현관으로 걸음을 옮기며 중얼거리는 황민현의 어깨를 붙잡은 채 같이 걸음을 옮긴 나는 곧 그 친구가 네 친구도 되잖아 하고 말을 이었다.


“그 친구가 내 친구 아니고, 네 친구인데 나랑은 아는 사람.”

“뭘 또 그러냐. 나보다 둘이 더 절친이잖아.”

“뭐가 절친인데. 나 걔랑 너 없을 때는 되게 어색해.”

“되게 어색해서 막 밥도 주고 그러나보다?”

“밥은 동정심이야, 어디서 혼자 밥도 못 먹는 게 짠해서.”


그렇게 말하면 좀 편하냐? 믿을 만한 소리를 하라는 듯 눈을 가늘게 뜨는 나를 보며 곧 빙그레 웃어 보인 황민현이 이내 정말 가야겠다는 듯 서둘러 돌아섰다.


“샐러드 다 떨어지면 말해.”

“걱정 마, 필요하면 가지러 갈 테니까.”

“다 떨어지기 전에 말해, 저거 며칠 못 먹어.”

“아, 알았어. 잔소리 좀 그만하고 좀 가.”

“나오지마, 나 간다.”


안 나갈 거니까 제발 좀 가라는 듯 황민현의 등을 떠밀었던 나는 곧 잠금장치를 푸는 손길에 손을 흔들어 인사할 준비를 했다.


“잘 가, 민현..”

“.....”


그리고 그 인사와 함께 돌아서 문을 열고 나서려던 민현은 그보다 먼저 보이는 얼굴에 반사적으로 몸을 뒤로 빼내며 나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김종현씨가 여기 어쩐 일이에요?”

“...그걸 몰라서 묻습니까?”

“네?”

“우리 같이.”

“아, 맞다! 우리 같이 의상 보러 가기로 했었는데!”


뭐야, 너 약속 있었어? 꼭 그런 시선으로 나를 바라보는 황민현을 보며 어색한 미소를 짓고 있던 나는 막 초인종을 누르려다 먼저 열린 문에 의아한 얼굴을 하고 있는 김종현을 보며 빠르게 고개를 저었다.


“일정 있었어?”

“어, 그랬는데 내가 깜빡했네.”

“하여튼 너는.”

“그러게, 나는 진짜 한결같지?”


황민현의 뒤통수에 숨어 제발 아무 말도 말라는 듯 눈을 깜빡이던 나는 곧 나를 향해 고개를 돌린 황민현을 바라보다 곧 서둘러 김종현을 향해 다시 입을 열었다.


“나 5분이면 돼요, 나갈 테니까 기다려요.”

“늦으면 안 되니까 서둘러요.”

“네, 알았어요.”

“모자 챙기고.”


그럼 다음에 보자는 듯 민현을 향해 고개를 숙이고 돌아서는 김종현의 뒷모습을 바라보던 나는 곧 뭐해? 하는 민현의 목소리에 그대로 의아한 얼굴을 했다. 가서 준비 안 해? 기다리잖아. 그 말과 함께 아, 하며 어색하게 손뼉을 치며 미소를 머금은 나는 곧 그대로 뒷걸음질쳤다.


“나는 그러면 준비를 할 테니, 너는 잘 가길 바랄게.”

“스케줄 놓치지 마. 저 사람은 나처럼 너 그런 거 다 봐줄 사람 아니니까.”

“어, 알았어.”

“괜히 트집 잡히지 말고. 안 그럼 맘껏 싫어하지도 못한다.”

“...알았다고.”


그럼 나 진짜 간다. 그 말과 함께 현관문을 열고 나서는 황민현을 바라보던 나는 곧 드레스룸으로 걸음을 옮기다 이내 고개만 슬쩍 빼 거실 창밖의 풍경을 바라보았다.


“하여튼 타이밍 하고는 진짜.”


세수도 못 했는데 이게 무슨 난리야. 비상등을 켜고 있는 김종현의 차 옆으로 황민현의 차가 부드럽게 빠져나갔다. 그 광경을 두 눈으로 확인하고 나서야 손에 잡히는 아무 모자나 집어 머리에 끼워 쓴 나는 곧 그대로 걸음을 옮겨 닫힌 문을 열고 나섰다.


“.....”


좁지도 넓지도 않은 아담한 마당을 지나 낮은 대문을 열고 나서자마자 보이는 자동차를 잠시 물끄러미 응시하던 나는 곧 그대로 손을 들어 조수석 창문을 두어번 두드렸다.


“내려요.”

“의상 보러 가자면서요.”

“그게 진심이겠어요?”

“.....”

“아, 왜요.”


그 손길에 부드럽게 내려간 창문 너머로 시선을 던지는 듯 마는 듯 딴청을 피우며 중얼거린 나는 곧 나를 가만히 바라보기만 하는 김종현을 향해 퉁명스럽게 대꾸했다. 그리고는 잠시 허공을 응시하다 조수석 문을 열어젖힌 나는 곧 안전띠도 하지 않은 채 조금도 운전할 의지가 없는 모양새로 앉아있는 김종현을 바라보았다.


“왜 그렇게 봐요.”

“몰라서 물어요?”

“모르겠는데.”

“모르겠는데? 그걸 지금 말이라고 해요?”


내 얼굴이 구체적으로 어떤 모양이었는지는 알 수 없지만, 어쨌든 내 얼굴을 확인한 김종현의 첫 마디는 의구심이었다. 어처구니없는 목소리에 정면을 보고 있던 몸을 틀어 앉은 나는 여전히 잘 모르겠다는 듯 평온한 표정을 하고 있는 얼굴을 바라보다 이내 입술을 삐죽였다.


“내가 갑자기 나타나서? 근데 같이 살자고 한 건 내가 아닌데?”

“누가 그 말 해요 지금?”

“그럼 무슨 말인데.”

“금방이라면서요, 그쪽한텐 금방이 이틀이에요?”

“.....”


고스란히 이틀을 금방 온다는 말과 늦는다는 말로 대신해버린 김종현을 향해 왜 원망스러운 마음이 드는지는 나도 알 수 없었다. 새삼스러웠다는 게 맞을 수도 있었다. 아무도 나를 찾는 사람이 없는 시간에 익숙해진 내게, 누군가를 기다리는 일은 낯설고 어색한 일이 되었다. 나를 원하지도, 찾지도 않는 세상에서 무언가를 목적 없이 기다린다는 것은 비참하고 서럽기만 해서 아무것도 기다리지도 기대하지도 않았던 내가 아주 오랜만에 무엇인가를 기다리고, 무언가를 기대하고 있었다.


“금방 온다면서, 온다고 했으면서.”

“....”

“온다고 하지나 말던가.”

“.....”

“내가 그래서 그쪽이 싫은 거예요. 사람 이렇게 자꾸 바보 만드니까.”


나를 찾으러 오는 사람이 있다는 것은, 내가 정말 필요한 사람이 되는 것 같은 기분이라 무엇이라고 하고 싶게 만들고, 가만히 있으면 안 될 것처럼 만들어 주었다. 묻어 두었던 기억을 꺼내게 만들고, 가장 찬란한 순간을 마주하는 것이 괴로우면서도 혹시나 하는 설렘에 떨리기도 했다. 아주 어쩌면 다시 저 시간의 나로 돌아갈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헛된 희망도 각오 없이 가능했다.


“많이 기다렸나 보네.”

“그럼 온다고 했는데 안 기다려요? 온다고 하지나 말던가.”

“미안해요.”

“.....”

“바로 올까 하다가, 일이 새벽에 끝나서 그건 너무 실례인 것 같고.”

“.....”


짐도 좀 챙겨야 했고, 그리고 또. 기대가 클수록, 기다림이 길어질수록 결국 다시 보이는 현실에 조금씩 지쳐버렸던 내 눈 앞에 겨우 나타난 김종현을 보자마자 터진 원망이 아무렇게나 공기 속에 섞여들었다.


“뭐라도 하나 들고 오고 싶어서.”

“....”


이렇게까지 징징거릴 건 아니라는 것을 알면서도 제어하지 못하고 터트린 감정을 비난 대신 담담한 목소리로 받아주는 김종현을 가만히 바라보던 나는 곧 뒷좌석에 아무렇게나 쌓여 있는 서류들과 대본 비슷한 것들에 그대로 입을 다물었다.


“근데 그렇게 기다렸으면서 왜 아닌 척 했어요?”

“내가 언제요?”

“방금, 황 사장 앞에서.”

“...아, 그거.”

“....”


그걸 설명하자니 순간 말도 안 되는 어색한 연기가 떠올라 순간 발가락이 간질거렸다. 오그라드는 사지를 겨우 붙잡은 채 짧게 숨을 내쉰 나는 곧 그대로 주변을 괜히 한 번 휘익 둘러보고는 이내 그대로 조수석 문을 열고 차에서 내렸다.


“당분간은 비밀로 해요.”

“뭘요.”

“뭐긴 뭐예요, 그쪽이랑 같이 사는 거지.”

“왜 그래야 하는데요?”

“왜긴 왜예요! 쪽팔리니까 그렇지!”


그걸 몰라서 묻냐는 듯 막 운전석에서 내리는 김종현을 건너편에서 바라보던 나는 차 뒤쪽으로 걸음을 옮기는 것을 따라 시선을 옮겼다. 그리고는 곧 트렁크를 여는 김종현을 묵묵히 기다리다 곧 캐리어 하나만을 덜렁 꺼내 나오는 꼴을 빤히 바라만 보았다.


“그게 다예요? 짐이?”

“당장 필요한 것만 챙기면 되니까.”

“그래도 너무 간단한 거 아니에요?”

“나랑 오래 같이 살고 싶어요?”

“...아니요?”


그런데 왜 그러냐는 듯 나를 바라보는 김종현을 덩달아 물끄러미 바라보던 내가 먼저 낮은 대문을 발로 뻥 차고 들어섰다. 그리고 그대로 터벅터벅 정원을 가로지르던 나는 곧 그대로 걸음을 멈춰 몸을 휙 돌려 섰다.


“내가 쪽팔립니까?”

“.....”


할 말은 내게 있었다. 그래서 얼마나 같이 살 거냐고, 그 물음을 하려 했는데 돌아서자마자 내 뒤에서 나타난 얼굴이 나를 향해 먼저 물었다. 그 물음에 순간 입이 막힌 내가 눈만 깜빡거리자 나를 가만히 응시하고 있던 김종현의 입이 다시 열렸다.


“안 쪽팔리게 할게요, 당신.”

“.....”

“적어도 내가 당신 옆에 있는 동안에는 당신 쪽팔리지 않게 할테니까.”

“.....”

“최민기씨도 지금처럼 내 말 잘 들어줘요.”

“.....”


그 말과 함께 모자 쓴 머리를 가만히 누르듯 쓰다듬고 먼저 걸음을 옮기는 김종현의 뒷모습을 향해 느리게 몸을 돌려선 나는 낮은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쪽팔린 건 난데..”


그런데 네가 그런 말을 하면 나는 정말로.


“......”


최선을 다하고 싶어질 수밖에 없는데.


“뭐해요, 문 안 열어줘요?”

“......”


최선을 다하면, 결국 또 실망할 수밖에 없는데.


“최민기씨.”

“가요, 좀 기다려요.”


그럼 또 아픈 건 난데, 알면서도 나는 뚜벅뚜벅 걸음을 옮겼다. 김종현을 향해.







뭐라고요? 막 강동호가 가져온 밑반찬의 뚜껑을 열려던 나는 거실에서부터 들려오는 소리에 그대로 소리를 내질렀다. 다음 주에 뭘 찍는다구요? 그 말에 막 편한 옷으로 갈아입고 나오던 김종현의 얼굴이 나를 향했다. 피터 정 알죠. 익숙한 이름에 고개를 끄덕거린 나는 그 말 뒤에 달려 나온 말까진 예상하지 못했다. 그쪽 프로필 찍기로 했어요, 다음 주에.


“뭘 그렇게 놀라요? 프로필 처음 찍어요?”

“아니 그걸 다음 주에 어떻게 찍어요!”

“다음 주에 찍으면 안 되는 이유라도 있어요?”

“있죠! 내 꼴을 봐요! 지금 내 꼴을!”


내내 기다리던 사람이 나타나니 갑자기 허기가 밀려들었다. 그러고 보니 나 아침도, 점심도 안 먹었어. 깐도리 하나 먹었어. 그 결론에 이르기가 무섭게 탄수화물을 찾는 뱃속이 꼬르륵 소리를 내며 요동쳤다. 이러다 죽는다고, 강동호가 예지력이 있어서 그렇게 유난을 떨었나보다고 즉석밥을 꺼내 전자레인지에 밀어 넣었던 나는 동작 버튼을 누르기가 무섭게 들려온 소리에 이내 그대로 품에 안고 있던 반찬통을 식탁에 내려놓으며 거실로 걸음을 옮겼다.


“그쪽은 모르겠지만 배우한테는 입금 전과 입금 후 라는게 있거든요.”

“어디서 돈 받았어요?”

“프로필이 돈 받으려고 찍는거 거든요?”

“....”

“돈 받았을 때 보다 더 신중하고 완벽하게 찍어야 하는 걸 이렇게 준비 기간도 없이 찍으라구요? 그걸 말이라고 해요, 지금? 뭐라도 들고 온다는 게 이거였어요?”

“일주일 있는데.”


아, 진짜! 고작 그걸로 될 것 같냐고 방방 뛰는 나를 그저 가만히 바라보기만 하던 김종현이 곧 제 할 일을 마쳤다는 신호를 보내는 기계 소리에 그대로 부엌으로 향했다. 그 꼴을 빤히 바라보던 나는 이내 김종현이 가로 막고 서있는 전자레인지 앞으로 다가갔다.


“진짜 다 망했어요! 그쪽 때문에!”

“내가 뭘 어쨌다고.”

“아, 몰라요. 비켜요.”


그리고 그것을 그대로 쓰레기통에 처박을 생각으로 김종현보다 먼저 팔을 뻗었던 나는 그보다 먼저 휙 돌아서는 얼굴에 반사적으로 몸을 뒤로 뺐다.


“곱창 말고 뭐 좋아해요?”

“...갑자기요?”

“같이 살려면 알건 알아야 하니까.”

“그걸 아는 사람이 일주일 뒤에 프로필을 잡아요? 그게 사람이 할 짓이야?”


그 밥은 네가 먹든지 말든지 마음대로 하라는 듯 포기하고 휙 돌아선 나는 이내 주린 배를 부여잡으며 다시 냉장고 문을 벌컥 열었다. 그리고 저녁용으로 채워놓은 샐러드와 과일을 꺼내며 여전히 전자레인지 앞에 서있는 김종현을 노려보았다.


“피터 아이돌그룹 화보 촬영 때문에 2주 뒤부터 스위스 스케줄이예요.”

“.....”

“찍으려면 다음 주가 마지노선이라고 해서 내가 그거 받았습니다.”

“.....”

“어영부영 아무나한테 당신 프로필 맡길 수는 없으니까.”

“그래도 그렇지 내가 준비할 시간은 줘야죠, 준비할 시간은.”


준비 없이 최고 작가한테 찍으면 그게 아무나한테 찍는 거보다 더 최악일 수도 있다는 걸 왜 모르냐고 소스도 없는 샐러드를 볼로 옮겨 담으며 중얼거린 나는 곧 내 앞에 자리를 잡고 앉는 김종현을 향해 그대로 눈만 치떴다.


“당신한테 약속한 시간 동안 나는 뭐든 할거예요. 적어도 당신이 내 손 잡은 걸 후회하지 않게.”

“.....”

“그래서 미안하지만 시간이 많이 없어요.”

“.....”

“최민기씨도 알다시피 일 년은 아무것도 못 하고 보낼 수도 있는 시간이니까.”

“......”


아무것도 하지 않고 보내길 바랐던 시간이었다. 그렇게 흘려보내고 김종현의 손에 있는 것을 돌려받기만 하면 그만인 시간이었다. 내가 김종현의 손을 잡았던 순간의 일 년은 그저 내 치부를 완전히 묻어버리기 위해 주어진 마지막 미션 같은 시간일 뿐이었다.


“최민기씨 기억 속에 나와의 일 년이.”

“.....”

“그렇게 아무것도 아닌 것처럼 지워버려도 되는 시간이 되는 건.”

“.....”

“나도 싫거든요.”

“.....”


이 시간만 지나면 나를 옭아매고 있던 하나의 족쇄에서 조금은 자유로워질 수도 있다는 생각, 그것 하나로 붙잡은 손에 조금씩 따뜻한 체온이 스미고 있었다. 살아있는 인간이라서 가질 수 있는 감각, 단지 실패를 향해 걷는 각오가 아닌 어쩌면 이 시간이 꽤 괜찮을지도 모른다는 희망과 비슷한 체온이.


“내가 말했잖아요, 당신 충분히 예쁘고 멋지다고.”

“.....”

“그래서 내가 질렀어요. 건방지게, 당신 믿고.”

“.....”

“그러니까 그쪽도 나 말고 스스로를 믿어요.”

“....”

“나는 쪽팔려도 당신은 근사하니까.”


물고기가 아니라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내가 물고기였다면, 그 체온에 질식했을지도 모르니까.


“김종현씨.”

“네.”

“좋아하는 게 뭐냐고 물었죠.”

“네.”

“나는 다정한 게 좋아요.”

“.....”


죽지 않고 살아 느낀 체온에 가만히 입 다물고 있던 나는 나를 바라보고 있는 김종현을 향해 천천히 입을 열었다.


“그리고 나한테 다정한 사람을 좋아해요.”

“....”

“그래서 상처를 받고.”

“.....”

“아프고.”

“.....”


우리가 함께 살기 위해 반드시 알아야 하는 것, 이 계약을 온전하게 끝내기 위한 어쩌면 가장 중요할지도 모르는 사실을 느리게 중얼거리던 나는 곧 길게 숨을 고르며 김종현과 똑바로 시선을 맞추었다.


“나한테 다정하지 말아요, 끝까지.”

“.....”


아무것도 아닌 일 년은 어쩌면 괜찮을 수도 있었다. 지워버려도 되는 일 년은 차라리 멋진 일일 수도 있었다.


“다정한 게 나는 제일 힘드니까.”

“......”


억지로 잊어야 하는 일 년이 되는 것이 가장 최악이다.






@

너무 늦었지요ㅠ^ㅠ 죄송합니다ㅠ^ㅠ


꿀잠님의 창작활동을 응원하고 싶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