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른 블로그에 게재했던 옛날 글이 문득 불쌍하다는 생각이 들어 다시 싣습니다.


흔히 '질서'라고 하면 반대로 '무질서'나 '혼돈'이라는 말이 뒤따른다. '질서'라는 말은 평온하지만 '혼돈'이나 '무질서'는 그렇지 않다. 이는 아마도 '낮'과 '밤'의 관계와 같을 것이다. 사람은 낮에 공포를 느끼지 않는다. 환한 태양이 빛을 비추는 낮에는 모든 것이 명백해서, 알 수 없는 곳이라고는 고작해야 우리 발치에서 솟아나오는 그림자 정도이다. 그러나 밤은 어떠한가. 먼 옛날로 돌아가 원시인이 되었다고 생각해보자. 빛이 사라지면 눈이 보이지 않고 적을 낮처럼 재빨리 판별할 수도 없다. 지금도 그 흔적은 남아, 인류는 어둠을 무서워한다. 사람이 두려워하는 것은 빛이 아니다. 그림자나 밤처럼 빛이 없는 세계, 질서가 없는 세계야말로 공포의 핵심적인 원천이다. 하지만 여기에서 우리는 질문을 던져볼 수 있다. 정말로 그것만이 공포의 원천일까? 우리가 예상하지 못한 다른 곳에서도 공포의 원천을 찾을 수 있지 않을까?

『붉은 뱀』은 일본의 공포만화가 히노 히데시가 1983년에 발표한 작품이다. 그는 이미 전작인 『지옥도』에서 극한의 무질서로 인한 공포를 그려낸 바 있다. 『지옥도』에서 주인공 화공은 자신의 체험을 바탕으로 그린 지옥도를 소개하며 이야기를 시작한다. 그러나 그 이야기들은 뒤로 갈수록 점차 현실성을 잃어가며 실제로 일어난 일인지 지옥도를 그리다 미쳐버린 화공의 공상인지 알 수 없게 된다. 그러한 이야기가 거듭되다, 결국에는 지금까지 나온 이야기의 등장인물조차 화공이 만들어낸 허상일지도 모른다는 사실이 밝혀질 때, 화공은 사람을 미치게 한다는 지옥의 붉은 열매를 먹고 자신을 가로막던 담장을 부순 후 혼돈의 끝을 보게 된다. 모든 것이 산산이 부서지는 종말 대지옥이 오는 것을 예감하며 그는 일갈한다.


"너는 죽는다!! 당신도 죽는다!! 그대도 죽는다!! 자네도 죽는다!! 네녀석도 죽는다!! 네놈도 죽는다!! 네년도 죽는다!! 그쪽도 죽는다!! 저쪽도 죽는다!! 전부 다...!! 죽는다~!!"


화공이 던진 도끼가 독자를 향해 날아오며 만화는 끝난다.

이 자리에서 짤막하게나마 『지옥도』의 줄거리를 소개한 것은 이 작품이 『붉은 뱀』과 강한 연관이 있으면서도 대조적이기 때문이다. 후기에 따르면, 작가 히노 히데시는 『지옥도』를 마지막으로 공포만화가로서의 생활을 끝내고 보통 사람 '호시노 야스시'로 돌아가려고 했다고 한다. '지옥 화공'이라는 세간의 이미지와는 달리 실제 '호시노 야스시'는 평범한 사람이다. 그런 그에게 공포만화를 그리는 작업은 자신의 내부에 끊임없이 '찐득함'을 채우고 비워내는 불쾌한 일이었다고 한다. 그러나 그는 『지옥도』를 그리고 난 다음 본작 『붉은 뱀』을 발표했고, 현재도 '히노 히데시'로서 만화를 계속 그려내며 진정한 자신이 누구인지 답을 찾지 못했다. 즉 『붉은 뱀』은 후기에서 간략하게 밝힌 바와 같이, 『지옥도』에서도 다 담아내지 못한 '찐득함' 혹은 '응어리'를 마저 풀어내는 작업이었다. 그렇다면 『지옥도』와 『붉은 뱀』은 얼마나 닮았을까.

전체적으로 박력이 넘치는 『지옥도』와는 달리 『붉은 뱀』은 매우 조용하고 잔잔한 만화이다. 변태적이고 비정상적인 등장인물의 관계나 작중에서 묘사하는 폭력의 강도를 생각하면 결코 그렇지 않은데도, 이 작품을 읽다보면 정갈하게 잘 쓴 시를 읽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몸에 난 종기에서 7가지 색의 고름이 흘러나오는 병에 걸린 바보 화가의 이야기를 담담히 그려낸 데뷔작 『죠로쿠의 기묘한 병』과 더 유사한 느낌이 들 정도이다. 그렇다면 『붉은 뱀』은 진보가 아니라 퇴보이고 답습이며 자가복제일 뿐일까?

결론부터 말하자면 『붉은 뱀』은 과연 『지옥도』의 뒤를 이을 만한 작품일 뿐만 아니라, 『지옥도』가 나온 이상 필연적으로 나올 수밖에 없던 작품이다. 『지옥도』가 극한의 무질서와 혼돈이 만들어내는 공포를 그린 작품이라고 한다면 『붉은 뱀』의 공포는 극한의 질서와 정체가 만들어내는 공포를 그린 작품이다.


『붉은 뱀』에서는 주인공 가족이 사는 '고옥(古屋)'으로 대변할 수 있는 공간이 나온다. 이 안은 비정상적이지만 나름대로 체계가 잡힌 질서가 지배한다. 아버지는 '계란의 방'에서 매일 닭을 치며 계란을 모으고 미친 할머니는 그 알을 품는다. 아름다운 어머니는 아침마다 계란을 들고 할아버지의 방에 찾아가 턱에 난 혹에서 고름을 빼낸다. 그런데 이 과정을 그려내는 작가의 시선이 기묘하다. 성행위를 암시하는 듯한 모습을 군데군데 끼워넣은 것이다. 이 장면을 읽으면 아버지와 할머니의 관계도 다시 보인다. 이 작품에서 닭과 계란은 단순한 물체가 아니다. 할머니는 남편에게 미쳤다고 괄시를 받을 때 이 알은 모두 내가 낳은 것이라 주장하고, 할아버지는 어머니에게 너는 항상 귀엽고 예쁜 알을 낳는다며 칭찬한다. 즉 계란은 여성만이 지닌 생산 능력의 은유로, 닭은 그것을 대신 생산해내는 존재이다. 아버지가 닭을 치는 이유는 자신의 어머니가 생산 능력을 잃어버렸기 때문이다. 할머니를 대신해 계란을 모은다는 것 자체가 두 사람 사이의 비정상적인 애정 관계를 암시한다. 한편, 주인공의 누나는 벌레를 무서워하는 주인공과 달리 벌레를 가지고 노는 것이 취미이다. 작중에서 벌레가 닭의 모이로 나온다는 점을 감안할 때 이는 누나가 주인공과 달리 성에 눈을 떠가는 소녀임을 의미한다.

주인공은 철이 들 무렵부터 집과 가족을 무서워하지만 아무리 노력해도 그곳을 빠져나가지는 못한다. 분명 시간의 흐름이 있을 터였지만 변하지 않는 일상이 지배하는 공간, 그곳이 바로 작품의 무대이다. 집을 지키고 봉인하는 '거울'은 그 질서의 상징이다. '거울' 너머에는 '지옥의 방'이 숨어 있어서 누군가 그 너머를 보게 되면 무시무시한 일이 벌어진다고 한다. 그러나 어느 날 주인공은 꿈에서 거울 너머의 세상을 보게 된다. 그 이후로 지옥의 사자이자 표제이기도 한 '붉은 뱀'이 나타나며 비틀렸지만 유지되던 질서는 붕괴한다. 누나는 붉은 뱀에게 매일 밤마다 피를 빨리고, 그를 보충하기 위해 계란의 방에 몰래 숨어들어 닭의 피를 마시던 누나에게 할아버지는 발목을 잘린다. 어머니는 할아버지의 턱에서 발목으로 옮겨간 혹을 주무르다 그만 피고름을 얼굴에 뒤집어쓴다. 그 고름은 어머니의 얼굴을 태워버릴 뿐만 아니라 기형아를 임신하게 만든다. 할머니는 커다란 알로 변이하고 아버지는 그 알을 정성스레 품어 마침내 자신의 어머니를 부활하게 한다. 이렇게 괴이한 변이를 거듭하던 가족은 마침내 잇달아 목숨을 잃는다. 언제나 그 자리에 버틸 것 같던 집 또한 붕괴한다. 혼자 살아남은 주인공은 붉은 뱀을 피해 무시무시한 귀신이 들끓는 집안을 헤맨다. 그러나 주인공은 결국 붉은 뱀에 붙잡혀 피를 빨리며, 가장 무섭고 불길하다고 하는 지옥의 방을 다시 엿보게 된다. 감미로운 졸음과도 같은 죽음 속에서 주인공은 다시 깨어난다.

그렇다면 죽음을 앞두고 주인공이 본 지옥이란 대체 어떤 모습일까? 사람마다 각자의 지옥이 있다. 어떤 사람에게 지옥이란 히노 히데시가 앞서 『지옥도』에서 그려냈던 혼돈과 무질서의 극한일 것이다. 그러나 무질서는 진정한 지옥을 완성하지 않는다. 절대로 변하지 않고 그 자체로 완전한 질서만이 참다운 지옥을 완성한다. 우리가 흔히 떠올리는 종교적인 '지옥'의 면면을 찬찬히 살펴보면, 얼핏 보기에 무질서하게만 보이는 그 안에도 나름대로의 질서와 체계가 잡혀있음을 알 수 있다. 각각의 죄에는 죄와 벌을 다루는 원리에 따라 당시 사람들이 그에 합당하다고 여기던 처벌이 따른다. 지옥을 떠올릴 때 우리는 흔히 무질서의 극한을 연상하지만 실제 사람들이 상상했던 지옥은 그 나름대로의 질서가 영구적 혹은 반영구적으로 기능하는 공간이다. 끝나지 않는 질서야말로 폭력이나 처벌보다 더 중요한, 지옥의 핵심적인 속성이다.

인간과 동물의 우울증이 같다고 할 수는 없지만, 심리학 실험에서 쥐 같은 실험동물에게 인공적으로 우울증을 유발할 때 사용하는 방법이 두 가지 있다고 한다. 하나는 전기충격을 이용하는 방법이다. 반으로 공간을 갈라놓은 우리에 넣어놓은 쥐에게 전기충격을 가하면 쥐는 다른 공간으로 도망친다. 이때마다 전기충격을 가하면 쥐는 이윽고 어디로도 도망칠 수 없다는 사실을 알게 되고 무력감에 빠진다. 또 하나는 물을 사용하는 방법이다. 욕조에 물을 채워넣고 안에 섬 같은 것을 띄워놓은 뒤 쥐를 물에 빠트린다. 쥐가 섬에 다가갈 때마다 섬을 가라앉혀 다시 물에 빠트리면, 쥐는 달아날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닫고 결국에는 도망치기를 포기한다. 이 과정에서 중요한 것도 사실 폭력이나 처벌이 아니다. 폭력과 처벌이 끊임없이 질서정연하게 일어난다는 점이다. 전기충격이나 익사 위기는 1차적인 공포 반응을 일으키는 매개체일 뿐, 우울증을 유발하는 것은 끝없는 공포가 영원히 반복되는 그 질서정연함이다.

『붉은 뱀』에서 작가가 그려내는 공포는 바로 이러한 절대불변의 질서가 야기하고 완성하는 공포이다. 고옥의 질서는 불멸이다. 주인공과 주인공의 가족이 사망하고 집이 부서지며 완전히 파괴된 것처럼 보이던 질서는 언제 그랬냐는 듯 다시 살아나 이야기 전체를 지배한다. 아버지는 여전히 계란의 방에서 닭을 치고 할머니는 그 알을 정성스레 품는다. 어머니는 아침마다 할아버지의 혹을 주무르고 누나 또한 여전히 같은 생활을 한다. 주인공은 집에서 벗어나려 하지만 늘 그랬듯이 제자리로 돌아올 뿐이다.

변태적인 인간관계가 난무하고 기형아가 임신부의 배를 뚫고 튀어나오는 『붉은 뱀』을 읽으며 조용하고 잔잔하다, 심지어는 한 편의 시처럼 차분하고 미려하다고 느꼈던 것은 주도면밀하게 배치한 극한의 무질서가 폭주하고 날뛰다 종말을 맞는 『지옥도』와는 달리 완벽한 질서가 작품 전체를 지배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하나하나 뜯어보면 구역질나고 폭력적인 소재는 작가의 손을 거쳐 시적인 아름다움으로 재탄생됐다. 그 아름다움은 너무나도 완벽하게 통제되어서 절대로 변하지 않는다.

시간이 흐르지 않고 벗어날 수도 없는 곳. 그리고 그 안에서 영원히 같은 일을 반복하는 사람들. 작가 히노 히데시가 제시한 공포는 바로 이것이다. 참고 기다리면 언젠가 태양은 다시 떠오른다. 밤은 시간이 흐르면 낮으로 바뀐다. 혼돈은 그 안에 질서로 나아갈 가능성을 내포한다. 그러나 절대적인 질서가 다스리는 이 정체된 공간은 절대로 바뀌지 않는다. 바뀌는 것처럼 보이는 것도 찰나, 질서는 다시 사람들을 집어삼키고는 스스로의 완전무결함을 과시할 뿐이다. 진정한 지옥은 집어삼킨 사람을 뱉어내지 않는다. 영원히 변하지 않는 세계는 한 세계의 종말보다도 어느 면에서 더욱 끔찍하다.

공포는 불쾌하지만 진화적으로 꼭 필요한 감정이다. 만약 우리가 아무런 공포도 느끼지 않는다면 적을 감지하고도 도망치지 않을 것이다. 또한 공포는 개인을 집단으로 뭉치기 좋은 감정이기도 하다. 우리는 타인을 적으로 규정하고 공포의 대상으로 삼으며 내부의 결속을 다진다. 그렇기에 사람은 굳이 공포가 필요하지 않는데도 공포를 찾아다니는 것일지도 모른다. 공포란 다른 의미에서 생의 동력인 셈이다. 그러나 『붉은 뱀』을 읽고 나면 정말로 공포가 생의 동력인지 의문이 든다. 죽음이 만약 그저 무로 돌아가는 것뿐이라면, 히노 히데시가 『붉은 뱀』에서 보여준 공포는 삶이 아니라 죽음 그 자체이다. 무엇을 하더라도 아무것도 바뀌지 않는 세계를 '죽음' 이외의 그 어떤 말로 부를 수 있겠는가? 『지옥도』의 세계가 지옥이 오기를 기다리는 곳이라면 『붉은 뱀』의 세계는 이미 지옥이 강림한 곳이다. 극한의 질서가 지배하기에 언제까지나 정체된 채로 남아있을 수밖에 없는 곳, 바로 그곳이야말로 『붉은 뱀』의 세계이다. 이곳은 끝나지 않는 지옥이다.

장르소설을 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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