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자극적인 요소가 있습니다.


Kailee Morgue - Siren

슈갈님 :)

09




   석진이 천천히 여주 쪽으로 걸어왔다. 여주는 그 보폭에 맞춰 뒷걸음질 쳤다. 또 보네요? 석진이 반갑다는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분명 파에톤에서 디와 함께 앉아있던 남자였다. 에르메스, 진. 둘이 함께 디를 끌어내리려고 하는 건가. 디는 모르고? 여주가 머리를 굴리는 사이 석진은 코앞까지 다가왔다. 여주가 잠깐 숨을 참고 그를 올려다봤다.



"여기서 보니까 반갑네요. 그때 지아린에서 디랑은 어땠어요? 내가 일부러 자리 비켜줬잖아."

"…그게 일부러였어요?"

"우리의 조커잖아요."



   그 말에 여주가 인상을 썼다. 또 알아듣지 못 하는 말이었다. 왜 조커냐고 물어보려 막 입을 떼려던 찰나였다.



"뷔 어딨는지 알아요?"

"..."



   그의 입에서 생각지도 못한 이름이 나왔다. 굳어버린 여주가 석진을 올려다봤다. 석진은 한눈에 봐도 비싸 보이는 손목시계를 거추장스럽다는 듯 풀어냈다.



"그 새끼가 잡혀야 하는데 생각보다 도망을 잘 가서 말이지. 애인이었다면서요. 연락 안 오나?"

"그게 무슨 소리예요?"

"피아오. 얘기 안 했어?"

"说那些个劳什子做什么? 그런 시시한 말 해서 뭘 해?"



   피아오가 웃으며 중얼거렸다. 여주가 충격받은 표정으로 피아오를 돌아봤다. 설명해 줘요. 여주가 화난 목소리로 말하니 석진이 웃음을 터트렸다. 정말 들어도 괜찮겠어? 피아오가 마치 배려해 주는 사람처럼 되물었다. 당장 말해요. 여주가 이를 악물었다.





"사장을 죽이라고 한 것도, 뷔에게 덮어씌우라고 지시한 것도 전부 쟤가 한 짓이야."



이제 시작인 거지. 석진이 조금 전보다 더 크게 웃기 시작했다.








   러시아는 미국의 제재를 풀어준 디에게 무한한 신뢰를 보였다. 깨질 뻔했던 홍콩과의 관세 동맹을 유지했고, 카르마와의 무기 거래도 활발히 시작했다. 러시아는 그들의 리스크를 최소화하기 위해 대체 투자처로 중화권 펀드에 관심을 보였다. 총리의 속셈을 이미 파악한 디는 에르메스를 소개해 주었다. 그 덕에 에르메스는 금융허브 타이틀을 사수하고 싱가포르에 은행업과 자산운용업 예비인가까지 순조롭게 받아냈다.

   러시아는 무기 거래를 시작한 덕분이라고 생각할 거고 에르메스는 싱가포르의 땅을 넘긴 덕에 얻어낸 결과라고 생각하겠지만 모두 틀렸다. 그들은 디의 손바닥 안에 있었다. 디가 유리장에서 위스키를 꺼냈다. 레오가 얼음을 꺼내려고 하자 디는 손만 까딱였다. 스트레이트로 마실 거라는 뜻이었다. 레오가 제자리로 돌아왔다.



"현재 러시아 쪽으로는 중장기적 시각 계속해서 유지 중이고, 과도한 주가 하락이 보이면 언제든 분할 매수 진행할 준비는 끝마쳤습니다."

"파에톤은."

"피아오 이사님이 러시아에서 들여온 LSD의 반응이 좋습니다. 뷔랑만 거래하던 VVIP 고객들이 점차 돌아오고 있어요."

"수고했어. 나가봐."



   호석이 엘리베이터를 타고 내려갔다. 너도 마실래? 손안에서 잔을 굴린 디가 레오를 쳐다보며 물었다.



"저는 괜찮습니다."

"뷔는 아직 안 잡혔어?"

"마카오 현지 경찰이 대대적으로 수색 중이라 잡히는 건 시간문제입니다."

"잡히면 적당히 돈 들여서 빼내."



   디의 말에 레오가 얼굴을 찌푸렸다. 누명을 씌운 진의 속셈을 알고 있으면서도 뷔를 추적하고 있는 게 이해가 되지 않아서였다. 게다가 인터폴에 정보를 찔러 디를 압박해온 것도 다 알고 계시면서. 그러나 레오는 입을 꾹 다물었다. 디는 언제나 상상 이상이었다. 가장 유리한 순간에 원하는 정보를 이용해 사람의 목을 죄어가는데 능숙했다.



"궁금한 얼굴이네, 레오."

"..."

"넌 얼굴에 다 티가 나."

"죄송합니다. 보스께서 뷔를 빼내시면 피아오나 진이 모를 리도 없고, 좀 위험한 게 아닌가 싶어서,"

"그 정도로 날 걱정해 주는 줄은 꿈에도 몰랐는걸."



   디는 카르마를 제외한 그 누구도 홍콩에서 마약 거래를 하지 못하게 만들었다. 무기 밀매도 마찬가지였는데, 러시아와의 거래를 튼 이후로 그의 힘이 더욱 세질 건 불 보듯 뻔한 일이었다. 파에톤 사장 살인사건도 매한가지였다. 피아오와 진의 짓이라는 걸 알고 있어도 모른척하는 데에는 이유가 있을 거였다. 경찰에 잡힌 뷔를 빼내어 그들이 사실을 알게 된다 하더라도 디에게는 훨씬 앞을 내다보는 시야가 있었다.



"네 말대로 내걸 빼돌렸잖아, 레오. 고작 살인 정도로 죗값을 치르게 두면 안 되지."



   레오는 뷔의 장부를 떠올렸다. 그리고 숨 쉬는 것조차 디의 눈치를 봤다. 디는 카르마에 피해가 가지 않는 방향으로 천천히 모두의 목을 졸라 가고 있었다. 오직 하나의 목적을 위해서.








   필로테스는 전보다 붐볐다. 파에톤에서 살인사건이 난 이후로 홍콩의 젊은 남녀들이 유흥의 목적지를 바꾼 덕이었다. 파에톤이나 필로테스 둘 다 디의 소유였으니 결과적으로 카르마에 큰 타격은 없었다. 그러나 피아오 입장에서 필로테스는 그가 직접 일궈낸 결과물이었으니 말이 달라졌다.

   몇 주 전 디의 요구로 러시아를 다녀온 피아오는 에르메스가 원하는 거래를 성사시켰다. 석진은 카르마가 러시아에서 기반이 탄탄한 게 전적으로 피아오 덕분이라고 생각했다. 디의 사업 수완은 그 누구도 따라갈 수 없었으나, 피아오가 아니었다면 분명 카르마는 러시아에서 그만큼 날개를 펼칠 수 없었다.

   석진은 홍콩 주권 반환 당시를 똑똑히 기억했다. 홍콩 총독부의 유니언 잭이 내려오고, 국기 하강식이 열릴 때쯤엔 장대비가 억수같이 퍼부었다. 석진은 아버지인 제임스의 옆에 서서 검은 우산을 쓰고 식을 지켜봤다. 어거스트의 카르마와 제임스의 에르메스가 홍콩을 장악하기 시작한 역사적인 날이었다.

   불법 시장이 모두 몰락할 때도 에르메스는 힘을 잃지 않았지만 지금은 아니었다. 홍콩은 물론이고 한국과 러시아까지 손안에 넣고 가볍게 주무르는 카르마에게 적의가 생긴 지는 오래였다. 석진은 그래서 피아오에게 접촉을 시도했다. 디를 향한 무한한 반감을 가진 피아오는 그 기회를 덥석 물었다. 카르마 마약 거래의 주요한 장소인 파에톤을 망가뜨린 것도 그래서였다. 석진은 차근차근 디의 것들을 하나씩 짓밟아갔다. 아직 시작일뿐이었다.



"마카오에서 잡혔다고?"



   필로테스의 룸에서 술을 마시던 석진이 비서의 보고에 고개를 들었다. 란타우섬에서 하루를 보내고 마카오에 몰래 숨어든 뷔를 찾아냈다는 소식이었다. 석진이 웃음을 터트렸다.



"최대한 많은 것을 불게 해. 어떤 방법을 동원해서라도. 그러라고 내가 너한테 돈 주는 거니까."



   파에톤의 중책을 맡고 있었으니 뭐라도 나오겠지. 不是吗?안 그래? 석진이 제 옆에 앉은 여자에게 말했다. 비서가 여자를 흘끔 쳐다봤다. 여자가 술을 따라주려는 제스처를 취하니 석진의 얼굴에 짜증이 묻었다. 비서가 눈짓으로 나가라는 신호를 보냈다.

   삼합회가 양지에서 활동을 못 하게 된 이후, 그들은 대부분 중국으로 도망치거나 합법적 사업을 했다. 카르마가 대표적인 예였다. 홍콩 경찰들의 염원은 카르마를 갈기갈기 찢는 것이었지만, 불법 거래의 흔적을 전혀 남기지 않는 디 때문에 사실상 불가능한 일이었다. 뷔가 잡혔으니 경찰한테 조금의 실마리는 제공해 주지 않겠어. 석진이 비웃음을 흘렸다.



"그런데 피아오는 왜 이렇게 안 와?"

"그게..."

"뭔데. 말해."

"집으로 가셨답니다."

"..."

"꼭 가셔야 한다고 그랬다고, 집에서 누가 기다린다고."





"미친 새끼."



   그러니까 내가 그 자식을 반만 믿는 거야. 석진이 중얼거리며 얼마 남지 않은 술병을 한 번에 비웠다.








  여주가 거울을 보며 목에 난 붉은 자국을 매만졌다. 피아오가 조른 흔적이었다. 곧 멍이 들것 같았다. 한두 번 맞아본 게 아니었기에 금방 알았다. 방문 밖에서 소란스러움을 느낀 여주가 황급히 옷깃을 끌어 목을 가렸다. 피아오가 방 안으로 들어왔다.



"…왔어요? 일찍 왔네요."

"뷔가 잡혔어. 바로 조사 들어갈 거야."

"..."

"보고 싶은가? 네 애인이?"

"…아니요."



   여주의 답에 피아오가 만족한 듯 입꼬리를 끌어올렸다. 그 표정을 읽은 여주가 고개를 잠깐 떨궜다. 순식간에 드러난 단순한 얼굴을 보고 비웃은 걸 들킬까 염려되어서였다. 다행히 피아오는 여주의 표정을 보지 못했다.



"누명이면 금방 풀려나겠네요."

"그 누명이 진짜가 될 거야. 그건 시간문제니까."

"…힘이 대단한가 봐요. 그 진이라는 사람."



   피아오가 고개를 끄덕이며 이불을 매만졌다. 여주가 천천히 다가가 그의 옆에 앉았다. 당신은요? 여주의 물음에 피아오가 느릿하게 눈을 깜박였다.



"디를 끌어내리면 카르마를 갖는 거예요?"

"그렇게 단순한 문제가 아냐."

"그럼 에르메스랑 나눠 갖는 건가."

"被信任的斧头砸了脚."

"…속담 같은데. 나 그 정도로 광둥어 잘 못해요."

"진을 너무 믿으면 안 된다고."

"같은 편이라면서요."



   피아오는 답을 하지 않았다. 잠깐의 정적에 여주도 생각을 정리했다. 디를 끌어내리려는 둘의 계략을 눈앞에서 마주하는데도 어쩐지 의심이 갔다. 진은 어떨지 모르겠지만, 피아오는 진을 믿고 있지 않았다. 허공을 보며 생각에 잠겨있던 여주는 허리를 감싸는 느낌에 정신을 차렸다. 저를 안아 들어 침대에 눕힌 피아오는 지난밤과 다를 것 없는 눈을 하고 있었다. 여주는 그를 받아들이면서도 생각의 끈을 놓지 않았다.



"……그럼 이제, 제가 조커일 필요는 없겠네요."



   여주가 달뜬 숨을 뱉으며 물었다. 피아오는 여주의 온몸을 탐하느라 정신이 없으면서도 한마디를 던졌다. 조커 하기 싫어? 여주가 냉큼 그 말을 물었다.



"하기 싫죠. 진도 그렇고, 나만 모르는 얘기를 하는데."

"怎么办? 어쩌지? 그건 내가 해결해 줄 수 있는 게 아닌데."

"그럼 알려라도 줘요."



   그 말에 피아오가 침대 아래에서 고개만 들어 여주를 올려다봤다. 한참이나 노려보던 피아오는 답 없이 여주의 배에 입을 맞췄다.

   피아오는 분명 엄청난 사람이었다. 만약 피아오를 먼저 만났더라면 여주는 그에게서 느껴지는 아우라에 정신을 차리지 못했을 거였다. 태형과 관계를 가질 때와는 또 다른 느낌이었지만, 피아오의 호흡에 일부러 박자를 맞췄다. 차근차근 쌓아 올려 나쁠 건 없었다.

   홍콩의 중심에는 디가 있었다. 피아오와 진이 그 정도의 얄팍한 신뢰로 과연 디를 끌어내릴 수 있을까? 여주는 열이 오른 표정을 지으면서도 머릿속으로는 계산을 끝내지 않았다.



"알고 싶어?"

"..."

"네가 왜 조커인지."



   수십 분이 흐르고 피아오가 땀에 젖은 여주의 머리카락을 떼어내며 물었다. 여주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 이유라도 안다면 앞으로의 행보가 달라질 것 같았다. 피아오의 옆에서 지금처럼 지낼지, 아니면 다시 태형에게 돌아갈지. 혹은 진일 지도 몰랐다.



"끝까지 모른척하는 거야? 아님 정말 모르는 거야."

"…정말 몰라요. 처음 만났을 때부터 그쪽이 하는 말, 반도 못 알아들었어요."



   피아오가 의심스러운 표정으로 여주를 쳐다봤다. 한참을 눈을 맞춘 피아오가 바람 빠지는 웃음을 흘렸다. 모른 척인지 정말 모르는 건지 알 수는 없었으나 그건 별반 상관없는 일이 되었다. 어찌 되었든 간에 디를 제 손으로 끌어내릴 날이 얼마 남지 않았다.



"그 새끼가 너 사랑하잖아."






Melanie Martinez - Mrs. Potato Head

꼬오옥 틀어주세요





   우리 만나요. 피아오가 밖을 나간 틈을 타 여주가 숨겨둔 디의 명함을 찾아내 전화를 걸었다. 수화기 너머 답이 없는 상대방을 향해 말을 뱉은 지 한 시간도 채 되지 않았을 때였다. 여주는 제 방문 앞에 서 있는 남자를 보고 말문이 막혔다.



"…여기 어떻게 들어왔어요?"





"..."




   레오는 어떤 거창한 말조차 덧붙이지 않았다. 여전히 침대 위에서 놀란 표정을 짓던 여주가 황급히 일어나 입고 있던 가운을 벗었다. 옷을 갈아입을 때까지 뒤돌아있던 레오는 여주가 콕콕 찌르고 나서야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여주는 그 와중에도 디에게 참 잘 어울리는 부하라고 생각했다.

   피아오의 집 앞에 주차된 페라리 라페라리를 본 여주가 의아함에 뒤를 돌았다. 그렇게 쫙 깔렸던 직원들이 여기까지 나오는 동안 한 명도 보이질 않았다. 어떻게 된 거냐 물어도 레오는 입도 뻥긋하지 않았다.



"…설마 다 죽인 건 아니죠?"

"..."



   레오가 말없이 여주를 노려봤다. 아니면 아닌 거지. 여주가 입술을 삐죽이며 차에 올라탔다. 까맣게 선팅 된 창밖으로 보이는 홍콩의 야경이 오랜만이었다. 여주가 저도 모르게 바깥을 넋 놓고 바라봤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구룡반도에서 가장 번잡스러운 파에톤에 있었는데.

   태형의 바이크를 타고 홍콩의 새벽을 만끽했을 때 카르마를 본 적이 있었다. 침사추이, 아니, 구룡반도 전역을 돌아다녀도 그만큼 위압감이 넘치는 건물은 없었다. 저긴 어디야? 지난날 여주의 물음에 태형은 웃으며 머리를 쓰다듬었다. 디가 사는 곳. 여주는 태형의 등허리를 끌어안으면서도 카르마의 높은 건물만을 쳐다봤다.

   옛날 기억을 잠깐 더듬은 여주의 눈앞에 그때의 카르마 건물이 나타났다. 여주가 얼이 빠져 창밖으로 카르마를 올려다봤다. 갑자기 나타나 문을 여는 레오가 아니었다면, 그곳이 목적지라는 것도 영원히 까먹었을 뻔했다. 카르마 입구를 지키는 직원들은 레오를 보고 한 번에 비켜섰다. 여주는 레오의 뒤에 꼭 붙어 따라갔다. 피아오의 저택을 처음 마주했을 때와는 또 다른 기분이었다.

   레오의 홍채를 인식한 엘리베이터가 40층에서 내려오기 시작했다. 여주는 그제야 카르마가 40층밖에 되지 않았다는 사실에 조금 놀랐다. 겉으로 보기에는 빅토리아 타워보다 높아 보였는데. 카르마 건물에서 느껴지는 위압감은 층수가 아닌 디에게서 뿜어져 나왔다는 걸 그제야 깨달았다.

   펜트하우스는 피아오의 저택과는 비교할 것도 없이 엄청났다. 건물의 꼭대기에 위치해 여느 호텔 방과 다를 것 없다고 생각한 건 여주의 착각이었다. 입구부터 박물관을 연상케 하는 조각상과 함부로 걸을 수도 없는 고급스러운 카펫에 여주가 쉽사리 걸음을 떼지 못했다. 레오는 엘리베이터에서 내리지 않는 여주를 이상한 표정으로 내려다봤다.





"왔네."



   그리고 펜트하우스 안쪽 통유리창에 서 있는 디의 모습에 여주가 숨을 들이쉬었다. 무작정 만나자고 해놓고 막상 닥치니 겁이 났다. 심장이 너무 세게 뛰어 그대로 폭발한다 해도 이상할 게 없었다.

   디는 평온한 얼굴이었다. 여주에게 먼저 연락할 수 있는 핸드폰을 넘긴 것도, 여주의 빚을 갚아준 것도 본인이면서. 아무렇지 않게 내뱉는 말투에서 그는 관계의 우위권을 잡았다. 뒤에서 들리는 기계 소리에 여주가 고개를 돌렸다. 엘리베이터 문이 닫혔고 레오는 없었다. 펜트하우스에는 여주와 디. 둘뿐이었다.



"의외네. 먼저 만나자고 할 줄도 알고."

"…줄 게 있어서요."



   여주가 짐짓 아무렇지 않은척하며 걸어 나가 가져온 통장을 내려놓았다. 여주의 얼굴을 빤히 보던 디의 시선이 천천히 통장으로 향했다. 한마디 말도 없었지만 여주는 그게 뭐냐고 묻는 디의 목소리를 들었다는 착각을 했다.



"오십만 홍콩 달러예요."

"..."

"아직 원금의 십분의 일이지만,"

"한국의 빚까지 합치면 그것보다 더 될 텐데."

"…십분의 일도 안 되는 금액이지만."



   여주가 금세 말을 정정하니 디의 입가에 웃음기가 묻었다. 처음 보는 생기 있는 표정에 여주가 말을 잃었다. 남들과 비교하자면 그건 생기 있는 축에도 끼지 못하는 거였지만, 그 상대가 디라는 것을 감안한다면 확실한 표정 변화였다.



"피아오가 줬나 보지."

"..."

"몰래 온 거라 겁도 나는 것 같고."



   디는 모든 것을 꿰뚫었다. 어떻게 알았어요? 여주는 물어봤자 답을 듣지 못할 거라는 걸 알았다. 그러나 의외로 디는 넓은 책상을 돌아 나와 걸터앉은 채 여주를 똑바로 보며 입을 열었다.



"내가 준 핸드폰으로 연락한 게 아닌 걸로 봐서 피아오에게 나와 연락한 걸 들켰고."

"..."

"생각보다 레오가 널 데려오는 게 느렸던걸 보니 귀찮은 일이 좀 많았던 것 같고."

"…진짜 다 죽이고 나 데리러 온 거예요?"



   여주가 충격받은 얼굴로 물었다. 입가를 씰룩이던 디는 점차 큰 소리로 웃기 시작했다. 소름 돋는 디의 모습에 여주의 등줄기를 따라 식은땀이 흘렀다.



"真是让人无语. 어이가 없네."

"..."

"네가 뭐라고 죄 없는 사람들을 다 죽이지? 본인이 그렇게 대단한 사람이라고 생각하는 건가. 재밌네."



   말도 안 돼. 여주가 중얼거리며 디를 쳐다봤다. 디는 전혀 알 수 없는 얼굴로 여주를 쳐다봤다. 뭐가 말도 안 되는지 궁금해하는 표정인지, 아니면 정말 네가 대단한 사람이라도 되는 거냐 궁금해하는 표정인지 전혀 알 수가 없었다. 살면서 처음 마주했고, 앞으로도 마주하지 못할 유형의 사람이었다.

   여주가 작은 협탁에 놓인 권총을 쳐다봤다. 단 한 번도 총을 잡아본 적 없었지만 여주는 홀린 듯 총을 잡았다. 디는 그런 여주의 행동을 구경만 하고 있었다. 달달 떨리는 손으로 총을 잡은 여주가 본인의 관자놀이에 총구를 겨눴다. 디는 여전히 표정 변화가 없었다. 피아오가 거짓말을 한 게 분명했다. 저 얼굴은 사랑하는 사람을 보는 것이 아니었다.



"쏘게?"



   여주가 심하게 떨리는 양손으로 총을 고쳐잡고 디를 향해 겨눴다. 디는 놀랄 만치 무표정이었다. 차마 디를 향해 방아쇠를 당길 용기가 없었던 여주가 총구를 돌려 유리창을 향해 쐈다. 찰칵거리는 소리는 났지만 귀를 찢을듯한 굉음은 없었다. 여주가 천천히 눈을 떴다.



"총을 쏘려면 눈을 뜨고 끝까지 표적을 봐야지."

"..."

"그래서 누굴 죽이려고 그래."

"나, 나는,"



   디가 가까이 다가왔다. 겁먹은 여주가 총을 떨어뜨렸다. 여주의 앞에 선 디가 떨어진 총을 주웠다. 총알이 들어있어야 할 곳이 텅 비어있었다. 조소를 흘린 디가 다시 협탁에 총을 내려놓았다. 피아오가 그랬어요. 여주가 말을 꺼내니 디의 행동이 멈췄다.



"내가 조커인 이유가 당신 때문이라고요."

"..."

"………진짜로, 나를 사랑해요?"



   잠시 굳었던 디가 크게 웃음을 터트렸다. 말도 안 되는 일이었다. 이 상황을 제대로 파악할 수 없었던 여주가 달달 떠는 손을 억지로 부여잡으며 디의 다음 말을 기다렸다.



"너. 왜 이 총에 실탄이 없었는지 알아?"

"..."

"내가 널 죽게 둘 거라 생각했어?"



   그럼 내가 이 총으로 자살 연극을 벌이려는 것도 알고 있었다는 뜻이에요? 여주의 물음에 디는 답을 하지 않았다. 말해줘요. 여주가 한 번 더 디를 재촉했다.



"생각보다 둔한 것 같아 실망이네."



   디의 말투는 꼭 평범한 날씨 이야기를 하는 것 같았다. 그의 뒤로 펼쳐진 홍콩의 야경과, 실탄이 빠진 채 협탁 위에 덩그러니 놓인 권총. 그리고 당장이라도 정신을 잃을듯한 여주와는 상반된 모습이었다.



"…정말로, 나를 사랑한다고요?"





"어."

"..."

"그게 무슨 문제가 되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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