각인은 두 사람의 세포를 깁는 일이다. 해윤은 제 왼쪽 손목 안쪽에 생긴 붉은 반점을 바라보았다. 새끼손톱보다 작은 크기의 점은 일주일 뒤 사라질 예정이었다.

섹스가 일이 된 시대에서 초능력자 한 사람을 개인에게 구속하는 행위는 로맨틱의 마지막 발악 같지만, 뜻밖에 그 시초는 강한 에스퍼를 더 강하게 만들기 위함이었다.

초능력은 우연의 산물이나 각인은 인간의 발명이다. 이능을 발휘하는 일이 에스퍼에게 부담을 준다는 사실을 알아낸 관리소는 그들을 좀 더 오래 사용할 수 있는 방법을 모색했다. 매칭률이 높은 가이드를 에스퍼에게 묶어놓는 발상을 성공시켰다.

독립적으로 존재하는 유기체를 보이지 않는 실로 엮는 행위에도 불구하고 이 반점은 운명의 붉은 실 같은 것이 아니다. 그냥 조그만 나노로봇이 몸속에 들어왔다가 나간 흔적이었다.


각인이 끝나고 해윤은 다시 집에 갇혔다. 도영은 사흘 동안 집에 돌아오지 않았다. 그가 어디서 무얼하고 있는지 알아내는 방법은 쉬웠다. 인터넷 창에 도영의 이름을 검색하기만 하면 뉴스 기사부터 익명 사이트까지 많은 사람이 그의 근황을 실시간으로 공유해주었다.


[S급 에스퍼의 무차별적이고 상습적인 살인]


그리고 지금 해윤이 보고 있는 기사가 도영이 며칠째 귀가하지 못하는 이유였다.


해윤이 각인 당한 날, 그곳에 있던 기자는 죽었으나 카메라는 부서지기 전까지 돌아가고 있었다. 대량학살의 풍경이 전파를 타고 고스란히 생중계 됐다. 그 배도영이라도 중징계라도 피할 수 없을 것이다. 고작 며칠 보여주기에 불과한 처벌일지라 하더라도 말이다.


포털 댓글란은 엉망이었다. 원색적인 비난과 욕설이 난무했다. S급 에스퍼를 엄벌에 처하라는 사람과 그러게 왜 에스퍼의 심기를 거스르냐는 사람. 여러 의견이 뒤섞여 아수라장인 가운데 댓글 하나가 압도적인 추천을 받아 상단에 걸려 있었다.


'불쌍하다. 저 기자들은 무슨 죄냐.... 왜 반항을 해서 민폐를 끼치는지. 얌전히 각인 받으면 될걸. 그 에스퍼에 그 가이드 수준.'


딩동.

별안간 들리는 초인종 소리에 해윤은 소스라치게 놀랐다. 그는 또 거실 소파 한쪽에 구겨져 있었다.

뒤돌아본 얼굴이 뒷덜미까지 뻣뻣했다. 잘못 들은 것일까. 생각을 읽기라도 한 양 밖에서 한 번 더 벨을 울렸다.


집주인도 없는데 난감하다.

해윤은 망설이다가 조심히 노트북을 덮었다. 노트북 위에 두 손을 올려놓고 숨을 눌렀다. 인기척을 내지 않으면 그냥 갈지 모른다고. 스리슬쩍 피어오른 희망을 세 번째 벨소리가 가차 없이 잘랐다.


그는 발소리를 죽인 채 인터폰으로 다가갔다. 뜻밖에 문밖에 서 있는 것은 중년 여성이었다. 흑백 모니터 속에서 여자가 인내심 있게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조심스럽게 짐작하건대 선량한 인상이었다.

고민 끝에 해윤이 현관으로 향했다.


“안녕하세요. 저는 신인류 관리소 초능력자 복지부 소속 상담사에요.”


불안에 떨고 있었던 것을 알기라도 하는지, 여자는 바로 신원을 밝혔다. 통통한 얼굴에 만개한 미소가 무척 온후한 사람이었다.


해윤은 자기보다 머리 하나는 작은 상담사를 피해 문 뒤에 바짝 붙었다.

상담사라니. 생각지도 못한 방문객이었다. 그런 사람이 찾아올 것이라는 연락은 받지 못했는데. 혹시 도영이 정기 검진 같은 것을 받고 있었던 것일까?

고위험군에 속하는 직업이다 보니 관리소에서는 초능력자를 대상으로 상담 서비스를 제공했다.


“지금……. 집에 없는데요.”

“네. 알아요. 가이드분 만나러 온 거예요.”


해윤은 차마 도영의 이름을 말하지 못하고 얼버무렸다.

상담사는 조금도 당황하지 않고 온화한 미소로 받았다.


“드릴 게 있어요.”


해윤은 여자를 집안으로 들였다. 마땅히 대접할 게 없어 깨끗하게 씻은 컵에 따뜻한 물을 담아왔다. 소파 테이블에 내려놓자 상담사가 고맙다고 또 미소지었다. 얼마 만에 만나는 친절함인지. 해윤은 몸 둘 바를 몰라했다.


소파를 차지하고 앉은 상담사는 저를 피해 바닥에 앉은 해윤을 빤히 바라보았다.

해윤은 상담사가 저를 보고 있는 줄도 몰랐다. 그는 넓은 소파를 두고 러그 위에 앉아 상담사에게서 반쯤 몸을 돌린 채였다. 왜 자신을 보러온 것인지 짐작 가는 바가 없었다. 무지는 불안을 낳고 무의식중에 불편한 마음이 밖으로 표가 났다.


이때 상담사가 의미심장한 질문을 건넸다.


“배도영 에스퍼랑 사는 일이 쉽지 않죠?”


가만히 러그의 털을 쥐어뜯고 있던 해윤이 화들짝 놀라 상담사를 보았다. 제가 쳐다보기 전부터 저를 관찰하고 있던 눈과 정면으로 마주쳤다.


“아무래도 험한 일을 많이 겪다 보니 고등급 에스퍼들은 알게 모르게 정신적 외상을 호소하는 경우가 굉장히 많아요.”

“…….”

“배도영 에스퍼의 문제는 그게 아니지만요.”

“네?”


앞으로 무슨 이야기를 할지 대강 가닥이 잡혀가던 찰나 엉뚱한 반전이었다. 해윤은 벙쪄 상담사를 바라보았다. 변함없이 인자한 미소의 상담사가 설명을 덧붙였다.


“천성적인 사이코패스예요. 배도영 에스퍼.”


방 안에 어색한 정적이 흘렀다. 사이코패스. 해윤은 그 다섯 글자가 '초능력자'보다 더 비현실적으로 느껴졌다.

얼이 빠진 해윤을 두고 상담사는 설명을 계속했다.


“13살에 각성했고 그때 보호자가 죽는 바람에 관리소에 와서 정신적인 케어를 일절 받지 못했어요.”


나긋하면서도 단호한 목소리가 대본을 외운 것처럼 막힘없이 흘렀다. 어떤 부연도 없었지만, 해윤은 곧장 이 이야기가 기밀임을 눈치챘다.


“가뜩이나 이타심을 이해하지 못하는 아이가 S급이라는 이유로 다짜고짜 최전선에서 괴수와 싸우게 됐으니 지금의 가치관이 형성된 것도 무리는 아니죠.”


도영의 프로필이라면 그도 간단하게 알고 있었다. 이 집에 잡혀 있는 동안 도영이 하루에 한 가지씩 본인과 관련된 잡다한 정보를 들려주었기 때문이었다. 도영은 그것을 '힌트'라고 불렀다. 

더 이상 운명이나 우연에 기대는 것은 질린다고. 무엇에 관한 힌트인지는 알려주지는 않았다.


그 단서들과 상담사의 말을 종합해보면 이러했다.

도영은 8년 전 처음 통로가 생기기 시작했을 때 각성했으며, 보호가 필요한 신분이었음에도 불구 괴수의 대항마로 혹사당했다.

지금은 8명이지만 초창기에는 S급 에스퍼가 몇 명이었을까. 한 해에 한 명씩만 나타났다고 가정하면…….


더럭 양팔의 솜털이 삐죽 솟았다. 해윤은 자기도 모르게 몸서리를 쳤다.


그 몸짓으로 상담사는 해윤이 자신의 진의를 깨달았음을 알아챈 것 같았다. 이어 씁쓸한 목소리로 해명했다.


“그 사람이 아무 죄 없다는 건 아니에요. 그냥, 일이 이렇게 된 데는 관리소의 책임도 있다는 거죠.”


그리고 가방에서 두툼한 파일철 하나를 꺼냈다. 콕 집어 도영이 없는 시간에 해윤을 찾아온 이유였다.


“이거, 둘이 사는데 도움이 될까 해서 가져왔어요.”


해윤은 경계하다가 파일철을 받아들었다. 슬쩍 펼쳐보니 안에 서류가 빼곡하게 차 있었다.


“배도영 에스퍼가 저질렀던 역대 사고랑 같은 장애를 앓고 있는 사람들의 행동 양식을 분석해서 사이코패스에 어떻게 대응해야 하는지 엮은 거예요.”


서류 위를 돌아다니던 해윤의 눈동자가 어느 한 단에 가서 멈췄다.

'반사회성 성격장애'

상급 에스퍼라고 해서 모두 인간성이 말소된 것은 아니다. 그런데 도영은 왜 저 모양일까, 고민했던 것의 답이 바로 여기 담겨 있었다. 어쩌면 그에게서 자신을 지킬 수 있는 생존법까지.

완전히 몰두하여 서류를 읽고 있을 때 상담사가 말했다.


“힘내세요.”


해윤은 할 말을 잃었다. 어이가 없었다.




손님이 다녀간 뒤 해윤은 본격적으로 거실에 파일을 펼치고 앉아 자료를 읽었다.

상담사는 우울한 산타클로스쯤 되지 않을까. 선물을 주고 갔지만 그것이 유용한 것인지는 활용해보기 전까지는 알 길이 없고, 내 문제를 근본적으로 해결해주지는 못하지만 잠깐이나마 고통스러운 상황을 잊을 수 있게 해주는 마취제 같은 사람.


도영과는 도무지 말이 통하지 않았다. 이 파일을 통째로 삼켜서 그와 대화다운 대화를 할 수 있게 된다면 그것만으로도 큰 소득일 터였다.


‘20XX년 애틀랜타 공항 사태. 사상자 수……. 역겨워.’


해윤은 청소년기의 도영이 날려 먹은 땅덩어리와 무고하게 희생당한 사람들의 통계를 헤아리다가 멀리 치워버렸다. 서류를 한참이나 건너뛰어 '사이코패스의 화술에 휘말리지 않는 법'을 쥐었다. 피로가 쌓인 몸이 옆으로 쓰러졌다.


눈을 감은 기억도 없이 눈을 떴을 때 집은 어둠에 잠겨 있었다. 해윤은 귓가에 닿는 서늘한 감촉에 본능적으로 숨을 들이켰다. 강풍에 안개가 날아간 것처럼 잠이 달아났다. 두려워서 차마 진실을 두 눈으로 확인할 엄두도 내지 못했다. 머리맡에 도영이 앉아 있었다.


“깼어요?”


아무 말도 하지 않았지만 들키고 말았다. 애석하게도 해윤에게는 제 심장 박동을 컨트롤 할 수 있는 능력이 없었다.

사실이 명백한지라 도영은 굳이 대답을 강요하지 않았다. 그는 해윤이 잠들었을 때부터 하고 있던 손장난을 계속했다. 도영의 굵은 손가락 사이에서 해윤의 검은 머리칼이 사르르 빠져나갔다.


“형 심심했나보다.”

“…….”

“웬일로 집을 어질러 놨네요.”


해윤은 난데없이 가슴에 찬물을 맞은 것 같았다. 서류. 상담사가 주고 간 도영의 병증에 관한 서류를 살피다가 까무룩 잠이 들었다. 지금 저희 주변에는 그 문서들이 어지럽게 널려 있었다.


본의 아니게 도영의 뒤를 캐다가 들킨 꼴이었다. 게다가 그 서류 중에는 도영을 컨트롤하고 싶은 욕망이 노골적으로 투사된 것들이 섞여 있었다.


좆됐다. 비단 도영이 아니더라도 인간이라면 누구나 기분 나빠할 만한 상황이었다. 그럼에도 도영이어서 특별히 더 좆된 상황임은 맞았다.


해윤은 천천히 상체를 일으켰다. 도영과 눈높이가 같아졌다.


“난…….”


간신히 서두를 열었지만, 한참 말을 잇지 못했다. 겁을 한 움큼 집어 문 입술이 바르르 떨렸다.

도영은 잠자코 해윤을 기다려주었다.


“밥은, 먹었어?”


제기랄. 떠오르는 말이 이런 것밖에 없다니.

하나 도영은 해윤의 허접한 수작에 기꺼이 넘어가 주었다.


“안 먹어도 되는데. 형 배고파요?”

“아니…….”


해윤은 스스로 바보라고 자책했다. 이렇게 대화가 금방 끝나면 기껏 화제를 돌린 보람이 없었다. 한 번 밀려났다가 다시 돌아온 정적은 전보다 더 거세게 해윤의 등살을 떠밀었다.

이렇게 할 말이 떠오르지 않는 것은 결국 하고 싶은 말이 따로 있기 때문이다.

해윤은 빠르게 인정하고 진짜 궁금증을 털어놓았다. 목소리가 다 떨릴 정도로 겁에 질린 것에 비해 완성된 질문은 다소 저렴하였다.


“뭐래? 다른 사람들이.”


좀 더 정확한 호칭을 구사할 수 있었으면 좋았겠지만, 해윤은 신인류 관리소는 물론 국제 사회의 높으신 분들에 관해 일절 알지 못했다. 에스퍼가 이렇게 큰 물의를 일으켰을 때 누구에게 불려 가는지. 누구에게 재판받는지. 누구에게 용서받는지. 하나도 아는 게 없었다.


“사흘 뒤에 영국으로 떠날 거예요.”

“……뭐?”

“형도 같이 가는 거예요. 자택 근신 끝나면 바로 현장으로 출발할 거니까 준비하고 있어요.”


현장이라 하면 점點이 발발한 곳일 터였다. 이미 사흘 전부터 심상치 않은 동태가 관측됐다고 했으니 너무 이른 출발은 아니었다.


갑자기 홍수처럼 몰아치는 상황에 해윤은 황망할 따름이었다. 그는 눈꺼풀을 깜빡이는 일도 잊고 도영을 바라봤다.


딱히 정의가 구현되기를 기대했던 것은 아니었다. 두 번이나 당해놓고 그만큼 순진하지 않았다.

그래도 그렇지. 이렇게 아무렇지 않게 일상으로 넘어가다니. 믿기지 않았다.


넋이 나간 해윤의 뺨에 도영이 제 손을 올렸다. 손바닥의 우묵하게 팬 곳에 흰 뺨이 폭 감겼다.


“거기 가면 내 옆에 붙어 있어요.”

“…….”

“그게 가장 안전하니까.”

“원래 그렇게 사람을 함부로 죽여?”


방안에 서릿발 같은 침묵이 내려앉았다. 내내 덤덤하게 행동하던 도영도 이번에는 멈칫했다. 해윤의 허망한 절규가 어둠 위에 떨어졌다.


“그래도 돼?”


온갖 복잡한 감정이 거실 바닥에 떠다녔다. 검은 바다를 출렁출렁 자맥질하는 것들이 손에 잡힐 듯 선명했다.

이윽고 도영이 움직였다.

그는 주변을 둘러보더니 해윤의 발치에 떨어져 있던 종이 한장을 집었다. 무슨 내용이 적혀 있는지 확인하고는 표 하나를 콕 짚어 물었다.


“이게 뭔지 알아요?”


그것은 잠들기 직전 해윤이 한쪽으로 치워놨던 애틀랜타 공항 사태 피해 기록이었다. 도영이 괴수를 진압할 때 생긴 가이드와 민간인 희생자의 기록. 해윤은 잔뜩 날을 세운 채 대답했다.


“사망자 수.”


도영이 종이를 내려놓았다. 그는 평소와 같은 무기질적인 태도로 해윤의 대답을 보충했다.


“합성어의 본질은 대개 뒤에 있어요.”

“…….”

“악법도 법이고 위선도 선인 것처럼요.”


그렇기에 올바른 정답은,


“이건 숫자數에요.”

“…….”

“내가 더 많은 숫자를 확보하는 이상, 괜찮아요.”


그 순간 해윤의 눈앞이 아득해졌다.

도영과 같이 사는 일이 가능키나 한 일일까?

어차피 저도 그에게는 더하고 뺄 수 있는 숫자 '1'에 불과할 텐데.


이때 도영이 해윤의 손목을 잡았다. 아프지 않게 비틀어서 그 위에 입술을 묻고 음미하듯 속삭였다.


“보고 싶었어요.”


해윤은 찰나 비명을 지를 뻔했다. 손목에 화상을 입은 것 같았다. 정확히는 반점이. 각인이 남긴 붉은 흉이 타들어 가는 것 같았다.





***


다음화는 성인편입니다.

도영이랑 해윤이가 아직 초면이나 다름 없는 상태니까요. 아프고 힘들 것으로 예상됩니다8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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