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엘이 마지막으로 기억하는 건 웃는 얼굴로 맥주를 내밀던 크리스였다. 마틴과는 같은 동네에 살아서 종종 동선이 겹치곤 했는데, 그 날은 펍에서 그와 마주쳤다. 사람이 별로 없는 한적한 펍에서 만난 크리스는 뭔가 고민이 심각한 표정이어서 얘기를 들어봤더니, 웬걸, 그가 짝사랑을 하고 있다지 뭔가. 그 콜드플레이의 크리스 마틴이? 네가 고백하면 다 넘어올걸! 노엘은 축 쳐진 크리스의 어깨를 두드리며  격려했고, 크리스는 조금 더 울상을 지었다.

'아니에요, 노엘. 제가 이상해요.'

'그건 또 무슨 소리냐?'

'받아들여질 자신도 없는데, 벌써 그 사람을 독점하고 싶어서 미칠 것 같아요.'

그리곤 그 큰 손에 얼굴을 파묻고 진짜 훌쩍이는 소리를 내는 게 아닌가. 평소 멀쩡한 정신의 노엘같았으면 그건 좀 위험한 발언이라며 선을 그어줬겠지만, 아무튼 둘은 펍에 있었고 노엘은 반즈음 취해 있었다는 게 문제였다. 노엘은 자신감 없어보이는 후배의 양 어깨를 꼭 붙들고, 그와 눈을 마주친 채 아주 굳건한 투로 근거 없는 확신을 주고 말았던 거다.

'그 정도는 다 느끼는 거다. 자연스러운 일이니까, 닥치고 가서 씨발 저지르기나 해!'

자기가 무슨 소리를 하는 줄도 모르고...

그 얘기를 들은 크리스 역시 덩달아 대단한 자신감을 얻은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네, 저지를게요!'

그리고 둘은 두어 시간을 좀 더 마셔대다, 크리스가 건네준 맥주 한 잔을 마시는 것으로 노엘의 기억이 끊겨버렸다는 얘기다.


***


그러면 다시 지금으로 돌아와서, 노엘은 진짜 어리둥절하고 당황스러운 상황에 직면해 있었다. 여기가 어딘지 잘 모르겠다. 낯선 벽지, 침대, 낯선 바깥 풍경... 취한 다음에 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거야? 유일하게 좀 익숙하게 느껴지는 것이 방 안 냄새인데, 이걸 어디서 맡아봤더라..., 그렇게 생각하는 순간 발치의 문이 열렸다.

"아. 이거 네 냄새구만?"

"므, 음??!"

크리스다. 크리스가 양손에 머그컵과 접시를 들고, 입에는 토스트를 문 채 걸어 들어온다. 나타나자마자 냄새 운운하는 노엘 탓에 크리스는 좀 놀란 표정이었다. 그러거나 말거나, 낯선 곳에서 아는 얼굴을 본 순간 불안함이 싹 가신 노엘은 마음 속 평온함을 되찾았다. 그럼 여긴 크리스네 집인 모양이지...

"속은 좀 어때요, 노엘."

"멀쩡한데... 내가 취해서 너희 집으로 데려온거냐?"

크리스가 건넨 컵에는 노란 오렌지주스가 찰랑거린다. 음주 후 갈증엔 또 이만한게 없지. 노엘은 크리스의 대답을 기다리며 주스를 크게 한 모금 들이켰고...,

"아뇨. 제가 노엘한테 약 먹여서 여기로 납치감금한 건데요."

"?"

"당신 말대로요, 노엘. 제가 저질렀어요."

"???"

이어지는 크리스의 말에 그것들을 죄 뱉어내야 했다, 뭐 그런 얘기다.

...근데 저 새낀 씨발, 뭘 잘했다고 헤죽헤죽 웃고 있는 거야?!


***


놀랍게도, 크리스는 농담을 하는게 아니었다. 뱉어낸 오렌지주스가 들어간 컵을 자기 걸로 바꿔준 크리스는 정말 진지한 표정으로 이 모든게 진짜라고 말했고, 노엘은 멍청한 표정으로 계속해서 '뭐 씨발?'을 반복하기만 했다. 그러다 크리스가 건넨 주스를 홀짝거리는 순간 그가 말하길, '뭐가 들었을 줄 알고 자꾸 그렇게 냉큼 마셔요. 고작 어제 일이 그랬는데, 벌써 까먹었어요?'

그러는게 아닌가. 아예 무표정도 아니고, 잔잔한 웃음기가 깔린 그 서늘한 낯에서 노엘은 여느 때보다 짙은 진심을 읽었다. 등줄기를 따라 으스스한 오한이 돌았다. 주스 다시 뱉을까?

그러자 그는 그런 노엘의 머릿속을 들여다 보기라도 한 것처럼 또 다른 대답을 했다.

'이번엔 아무것도 없어요, 그냥 마셔요.'

그래도 노엘이 믿지 않는 눈치자, 자기가 직접 주스를 마셔보이기까지 한다. 그제야 마음을 놓은 노엘이 시원한 주스를 홀짝거리길 약 2분 가량..., 지금 내가 이 상황에 주스나 마시고 앉았을 입장인가 생각할 때까지는 약 3분이 더 들어갔다. 내가 원래 이렇게까지 멍청이는 아닌데. 노엘이 납치당한 사람 답잖은 정중한 태도로 크리스에게 컵을 넘겨주며 묻는다.

"그래서? 내가 씨발 지금 네 집에 갇힌거다, 그 말이냐?"

빌어먹을 수갑도 차고 벽이나 긁으면서 바깥 햇살을 그리워하게 될 거라고? 결국엔 미쳐서 너나 나 둘 중 하나가 죽고?

감금 하면 흔히 떠오르는 클리셰를 읊어가며 손가락을 접는 노엘의 모습이 크리스의 파랗고 반질반질한 눈동자에 낱낱이 담기고 있었다. 선한 눈매가 곱게 휘어지는걸 보니 조잘조잘 떠드는 노엘이 귀여워 죽을 것 같은 모양이었다. 여지껏 눈치 없이 굴었던 노엘도 그건 삽시간에 알아보고서 날카로운 욕지거리를 뱉어낸다. 씨발, 지금 진지하게 이 지랄 하는 거냐니까?

"아뇨, 수갑같은거 없어요, 노엘."

"그럼 뭐, 목줄이라도 채우냐?"

"헐. 그런 취향이었어요?"

노엘도 참. 크리스가 수줍게 웃었다. 그리고 그 긴 손가락을 복잡하게 얽어가며 대답하길, 당신을 가두는 것도 아니고, 수갑을 채우지도 않을 거고, 창문을 죄 걸어 잠그지도 않을 거라고 말한다. 그래서 노엘은 갈수록 표정이 이상해졌다.

"날 여기 가두는 것도 아닌데."

"그렇죠."

"근데 감금은 맞다고?"

"아, 진짜 제대로 이해했네요."

이젠 이 상황에 대한 공포보다 어이없음이 더 앞선다. 이게 대체 무슨, 무슨 민트 없는 민트초코같은 소리냐?

"지금 내가 일어나서 집으로 가도 이상할 거 없는 상황인 거 알지."

"알죠. 당신 카드도 뒷주머니에 그대로 있어요."

"근데, 지금 뭘 어쩌자고 말장난이냐?"

숙취로 머리가 지끈거린다. 관자놀이를 꾹꾹 눌러가며 한숨을 내뱉는 노엘의 손을 크리스의 커다란 손이 감싼 뒤 힘을 줘 꽉 눌러왔다. 이대로 진짜 뭐 수갑이나 그런걸 채우려고 그러나 싶어 슬그머니 손에 힘을 주자, 노엘의 손목에는 차가운 금속 대신 말랑하고 따뜻한 그의 입술이 와 닿는다.

이건 또 뭐하는 짓인가, 고개를 숙인 채 눈만 들어 어린 또라이를 올려다보자 약속이라도 한 것처럼 시선이 똑바로 마주친다. 파란 눈이 밤 비행 중 내려다봤던 바다보다 더 깊게 보였다. 속이 울렁거린다. 이건, 이건 숙취 탓이 아닌데...

"사랑해요."

"야, 씨팔..."

"사랑해요, 노엘."

너 지금 그깟 말로 날 가둬보겠다고. 크리스의 고백을 듣자마자 노엘은 그런 생각을 했다. 하지만 그게, 그 말이 도무지 입 밖으로 나오질 않는다. 이새끼 진짜 미친거 아냐? 노엘이 말을 잃고 입만 헤 벌리고 있자 크리스는 이제 울 것 같은 얼굴이 됐다. 눈 앞이 아주 어찔하다. 

왜냐면, 씨발 왜냐면 난 이걸 아예 모르지 않았으니까.... 하지만 일이 이렇게까지 될 줄 누가 알았겠는가? 크리스가 이걸 알았다고? 내가 아주 손톱만큼 쓴 마음을 눈치챘다고?

"사랑해요."

"잠깐. 잠깐, 잠깐, 잠깐. 이건 아니지."

"사랑해요, 노엘. 난 이 말로 감히 당신을 잡아둘 겁니다."

사실, 당신도 알았잖아요.

조용히 속삭이는 그의 한마디에 노엘은 결국 입을 꾹 다물었다. 하도 어처구니가 없으려니, 평소에는 잘만 놀리던 혓바닥이 뻣뻣하게 굳어 움직이질 않았다. 그냥 계속 눈꺼풀만 깜빡깜빡깜빡, 그러면 크리스는 그 모습을 세상에서 가장 달콤한 솜사탕 조각이나 뭐 그런걸 보는것처럼 바라보는 것이다. 노엘은 그 시선만으로도 속이 달큰할 지경이었다. 크리스는 진심이다. 얜 진짜, 정말 이런 말로 날 여기 잡아둘 수 있다고 생각하는 거라고.

"아, 얘기는 좀 있다 마저 하구요."

"...."

"앞마당에 점심 차려놨어요. 날씨가 너무 좋아서요, 우리 오늘은 밖에서 먹어요."

"나 참, 진짜 씨발, 참 나...."

노엘의 얼을 쏙 빼놓은 이 연하의 납치범은 노엘이 뭘 더 생각할 시간조차 주지 않았다. 그는 무슨 가벼운 이불뭉치를 들듯이 노엘을 양 팔로 안아 들어올렸고, 그대로 집 문을 열고 앞마당으로 나가버렸던 거다. 그 과정에서 노엘은 진짜 넋이 나가버렸고, 크리스가 노엘을 의자에 앉힌 뒤 푹신푹신한 정원용 슬리퍼까지 신겨준 뒤에야 가까스로 한마디를 할 수 있었다. 야, 야 이, 이...,

"이 미친새끼야!!!"

"으하하, 화내지 마요!"

어차피 걷기 귀찮았을 거 아녜요! 그렇게 말하는 크리스의 뒤켠 멀지 않은 거리에 이 집의 대문이 보인다. 장담컨대 저 문은 열려있을 거다. 당장 달려가서 손으로 살짝 밀기만 하면 여기 둘 모두를 놀리기라도 하듯 스르르 열리겠지. 하지만 노엘은..., 씨발, 진짜 이상한 일이었다.

여기서 달려나가면 크리스도 노엘을 잡을 순 없다. 하지만 크리스는 아무런 걱정도 없는 것처럼 노엘 몫의 팬케이크나 썰고 앉아있고, 노엘 역시 양 발을 그 자리에 못박힌 것처럼 꼼짝을 할 수 없었으니까. 이게, 씨팔, 씨팔 진짜 이게 무슨 일인가? 내가 언제부터 이렇게 멍청했지?

크리스가 진심인걸 안다. 이 착하고 잔인한 놈은 진심으로 날 자기 집에 잡아두고 싶어 한다. 왜냐면 나한테 느끼는 감정이, 씨발.... 네 감정이 차라리 질척질척하고 더러운 집착이기만 했어도.

스스로 말하긴 민망하지만 어쨌든, 노엘은 로맨틱한 사람이었다. 여기에 난장판인 셀러브리티 사회를 겪으며 늘어난 눈치까지 더해지니, 남들의 감정이 어떤 식인지는 누구보다 빨리 눈치챌 수 있는 사람이 돼 있었다. 노엘은 그게 살아가는데 제법 유리하다고 생각했다. 아니, 그러니까... 생각했었다. 정말은 불과 어젯밤까지만 해도 그랬던 것 같다. 

하지만 이게, 씨발, 이 눈치로 크리스가 이쪽을 보는 감정이 어떤 것인가 알아차린 뒤부터는 이게 좀 스스로를 좆되게 만들었다는 생각이 가시질 않고 있다. 마음속 깊은 곳에서부터 터져나오는 탄식은 노엘의 눈을 질끈 감기게 만들었고... 아직 머리가 아프냐 묻는 크리스의 말에 대답도 않고 한참을 더 눈만 감고있던 노엘이 돌연, 시선을 크리스와 마주친 채 조금 화난 것 같은 목소리로 한마디를 했다.

"너 씨발, 이걸 다 알았군. 그렇지?"

앞뒤 맥락이 다 잘린 말인데, 그 사나운 시선을 정면에서 받아낸 크리스는 그걸 다 알아듣기라도 한 것처럼 고개를 끄덕이며 기쁘게 웃는다. 아니 사실 그는 정말, 정말이지 노엘이 그걸 알아차려 행복하다는 낯이어서 노엘을 두 번 아연실색하게 만들었다. 황홀이라는 단어를 표정으로 빚으면 꼭 저런 모습이겠지.

"그래서 당신이 좋았는데요. 난 이게 나쁘다고 생각 안 해요."

절대로. 웃음기가 섞인, 그러나 소름끼칠 정도로 낮게 깔린 목소리로 속삭인 크리스가 노엘의 손에 체온으로 미지근해진 포크를 쥐어준다. 더 식기전에 먹어요, 그러는데 이제 무슨 말을 더 할 수 있단 말인가?

"...저 대문 안 잠겼지?"

"네. 근데 누구 잘 안 들어와요."

"미친새끼."

"헤헤...."

세상에서 제일 무해하게 웃는 납치범의 낯에 노엘은 더이상 화를 내는것도 버거울 지경이었다. 무슨 말을 해도 햇살까지 녹여 먹을 듯한 표정으로 이쪽을 바라보는데 계속 열 올려봐야 힘만 빠질 거다.

그러니까 그래, 일단 여기 점심이나 먹고, 낮잠 좀 더 자다 생각해보자. 대충 현실과 타협한 노엘이 먹기 좋은 크기로 조각난(정말 딱 노엘의 한 입 크기로 잘라져서 좀 소름돋는)팬케이크를 입에 쑤셔넣기 시작했다. 빌어먹을 새끼, 요리는 왜 또 이렇게 잘하냐. 팬케이크는 적당히 달았고, 끼얹어진 시럽은 달큰한 버터와 메이플 향이 난다. 머그컵에 담긴 밀크티는 말할 것도 없이 요크셔 레드로 진하게 탄 제대로 된 차였다. 디저트는 빨간 토마토와 슬라이스한 바나나, 블루베리.... 노엘은 이제 크리스에게 궁금한게 하나 늘었다.

너 설마 씨발 내 집 부엌에 도청기나 씨씨티비라도 설치했냐? 하는, 지금 상황에 묻긴 정말 무서운 한마디가 그것이다. 그래서 노엘은 그 질문을 입 속에 넣은 바나나 조각과 함께 냠냠 씹다가 꿀꺽 삼켜버렸다. 목넘김이 아주 훌륭하다. 씨발. 더이상 내가 졸도할만한 정보를 늘리진 말자고.

"그만 쳐다봐."

"오, 미안해요. 지금 이게 너무 꿈같아서...."

"나도 이게 씨발 꿈이었으면 한단다."

그럼 일어나서 너한테 별 좆같은 꿈을 다 꿨다고 전화할 수 있잖아. 속에 능구렁이가 들어앉은 애새끼한테 말도 안되는 감금을 당하는게 아니라. 이 말 역시 팬케익과 함께 노엘의 목구멍 아래로 사라지긴 했으나, 적당히 찌그러진 노엘의 얼굴표정이 대충 그 의미를 전달하고 있었다. 근데 저 해맑은 또라이는 그것도 좋단다. 

크리스는 거의 울 것 같은 표정으로 노엘의 머리칼에 손을 뻗었다가 또 제 풀에 화들짝 놀라 팔을 거둔다. 그리곤 한다는 말이, 허락 없이 만지려고 해서 미안해요..., 그런 식이니 노엘의 어이가 또 없어질 수밖에야.

"넌 씨발 약 먹여서 납치까지 해놓고 내 머리카락도 못 만지냐?"

애새끼 납치도 술김에 한거 아냐? 만져졌으면 만져지는대로 기분이 더러웠을 것 같지만, 어쨌든 할 말은 해야 했다. 크리스는 정확히 요점을 찌른 노엘의 말에 잠깐 한숨을 내쉰다. 

"좀 거친 방법으로 초대하긴 했지만... 난 절대 당신을 함부로 대하진 않을 거에요."

그리고 당신도 알잖아요. 그가 테이블 위로 몸을 숙여 노엘을 올려다 본다. 커다란 덩치에, 드물게 서늘한 빛으로 반짝이는 그의 눈동자가 밑에서부터 치고 올라오자 그 기세가 무섭기까지 했다. 잠깐 눈을 피하거나 감았다간 순식간에 삼켜질 것 같은... 하지만 개중에 가장 오싹했던건 그의 눈빛이나 목소리가 아닌, 웃음기 섞인 채 내뱉어진 말 한마디였다. 단 한마디, 아주 낮게 가라앉은 목소리로 크리스는 그렇게 말했다.

"납치는 당신한테도 필요한 단계였다는 거."

고맙단 인사는 됐어요, 지금은요. 그리고는 다시 아무일도 없었던 것처럼 접시 위의 토마토를 서걱서걱 잘라낸다. 노엘은 식욕이 죄 사라졌다.


***


이 감금 아닌 감금생활은 그러나 노엘의 입맛에 맞춘 듯한 만족스러움이 있었다. 그래서 노엘은 아주 당황했다. 아니 씨발, 이렇게까지 편할 일인가? 느즈막한 아침, 침대 위로 운반된 밀크티와 샌드위치를 해치운 노엘은 이제 배가 빵빵해진 채로 크리스의 마사지를 받는 중이었다. 안그래도 손 큰 놈이 귀신같이 뭉친 곳만 골라 꾹꾹 누르고 주무르는데 이게 진짜 시원하고 기분 좋다. 

노엘은 지금 자기 몸을 막 주무르는 이 커다란 놈이 납치범이라는걸 알고는 있었지만, 제정신이 박혀있으면 이 따위로 계속 곁을 내줘선 안된다는걸 진짜 잘 알긴 했지만, 그 어떤 악의도 묻지 않은 그의 시선을 마주할 적이면 그냥 전부 손을 놓게 된다. 이건 자기방어의 근태나 현실 감각의 마비와는 또 다른 맥락의 방임이었다. 뭐 괜찮겠지, 크리스는 자길 보는 사람들이 이런 생각을 하게 만드는 능력이 있다. 지금 등줄기를 주무르는 저 손이 그대로 타고 올라와 목을 움켜쥔대도 노엘은 그냥 그렇게 하도록 버려둘 거다. 크리스잖아, 쟤 눈좀 봐. 씨발 괜찮겠지. 진짜 아무런 근거도 없는 주제에 마음을 푹 놓고…. 노엘 갤러거, 존나 미친 새끼. 

"윽."

"아, 아파요? 너무 세게 눌렀나? 미안해요."

"그건 아닌데… 거긴 성감대야, 크리스." 

잔뜩 굶은 사냥개 앞에 왜 날고기를 들이밀고 깔작대냐고? 

"헉." 

"신음소리가 섹시하지 않아서 미안하게 됐다."

"아니, 자, 잠깐만, 잠깐만요. 저 물 한 잔만 마시고 올게요."

"더 안 만져줘?"

"노엘!"

왜긴, 입에 갖다 쑤셔도 못 먹을 거 아니까 그러는 거지. 침대에  늘어진 노엘이 입도 틀어막지 않고 크게 하품하며 방 밖으로 뛰쳐나가는 크리스의 뒷모습을 바라본다. 방금 이건 일종의 심술이었다. 노엘 갤러거를 꽉 닫힌 결말의 멍청한 로맨스 스릴러 영화 초입부에 밀어넣은 일에 대한 심술. 그것도 씨발 나보다 열 살은 더 어린 놈이 말이야.


***


해가 높이 뜬 한 낮에도 노엘은 아주 평온했다. 납치당한 사람이 겪을 법한 험한 일은 일어날 낌새조차 보이지 않았다는 거다. 노엘을 마사지하다 얼굴이 시뻘개져 화장실로 갔던 크리스는 그 뒤부터 노엘과 거리를 반 미터 정도 더 벌리게 됐지만, 그렇다고 노엘의 곁에서 영영 떠날 생각을 하지도 않았다. 여전히 침대 위에서 뭉개던 노엘에게 기타를 안겨준 그는 책 한 권을 가지고 와 침대 맡 의자에 앉았고, 노엘은 크리스가 지켜보거나 말거나 기타 줄만 되는대로 튕겨대고 있었다. 커다란 창으로 새어 들어온 노란 볕이 노엘의 무릎께를 죄 덮고 있어 언뜻 보기엔 동화책 속 한 장면처럼 평온한 광경이다. 좀 더 자세히 파고들면 이게 동화책이 아니라 이상한 범죄 소설이라는 걸 알게 되겠지만. 딩딩딩, 노엘은 말도 안 되게 코드를 뒤섞다 옆에 앉아 이쪽을 힐끔거리는 크리스를 마주 쳐다본다. 딴에는 책 읽는 척을 한 모양인데… 아까부터 책장을 한 번도 안 넘기잖아. 제목은 또 왜 저런가? 오만과 편견? 야, 누가 다아시야? 아니 그것보다도….

"그냥 편하게 보지 그러냐?"

"네, 네?"

"못 알아들었으면 됐고."

놀리는 짓도 처음 한 번이나 재밌지, 두 번부터는 그냥 그렇다. 심드렁한 표정으로 기타에 시선을 되돌린 노엘이 장난치듯 오아시스 노래 몇 곡을 대충 쳐보다가 B 코드를 짚는다. 그리고 바로 이어서 F#6, Emaj7……. 여기에 맞는 가사를 흥얼거리고 있자니 크리스가 이제 대놓고 이쪽을 바라보기 시작했다. 그래, 방금 이게 너네 노래긴 해. 완전 탐나고 잘 쓴 노래. 노엘은 여전히 Yellow를 자기가 썼어야 했는데 따위의 미련을 남기고 있었다. 그런 이유로 연주한건 아니었지만 부르고 보니 모양새가 우습긴 하다. 납치범 네 침대 위에서 납치범이 쓴 노래를 부르고 있다니. 괜히 멋쩍은 기분에 슬그머니 손을 내린 노엘이 다시 고개를 돌려 크리스를 쳐다본다. 그리고 진짜 아주 많이 당황했다.

"너, 너… 왜 우냐?"

"저 지금 우나요?"

어리둥절한 표정의 납치범이 손을 들어 자기 눈가를 훔쳐낸 뒤 당황스런 얼굴이 된다. 저 진짜 우네요. 그러는 본인이 어리둥절한 낯이니 저 입으로 이유를 듣기는 글렀지만, 그러거나 말거나 노엘은 너털웃음을 터뜨렸다. 이게 대체 어떻게 된 일인지 본인도 모를 까닭을 이쪽은 알 것 같아서였다. 참 나. 진짜 참 나….

"내가 그렇게 좋냐."

자기 입으로 말하기 아주 계면쩍은 말을 기어코 하게 만든다. 노엘의 말을 들은 크리스는 그제야 자기가 운 까닭을 깨달은 듯 말갛게 웃었고, 정면에서 그걸 본 노엘은 암담한 한숨을 내쉬었다. 머리가 지끈거린다. 네가 바란 게 아마 이런 거겠지. 그래 씨발, 쭉 곁에만 있으면 결국 나도 너한테 시선을 줄 수밖에 없다는 걸 정말 잘 알아서 이딴 일들을 저지른 거겠지. 노엘은 그러나 이게 죄 크리스의 계획에 들어있음을 알면서도 그에게 손을 뻗을 수밖에 없었다. 이 똑똑하고 멍청한 납치범의 눈에서 눈물이 계속 떨어지고 있는 까닭이다. 노엘의 엄지손가락이 크리스의 눈가를 문질러 줄줄 흐르는 물줄기를 닦아냈다.

"그만 울어라. 내가 뭐 때리길 한 것도 아닌데."

"죄송해요…, 훌쩍, 저, 저 때려도 되는데요……."

"누굴 깡패로 아냐? 안 때려, 새끼야. 듣기 지겨우니까 사과도 그만 좀 하고."

뭐만 하면 죄송하고 미안하다 그런다. 진짜 미안한 짓 한 거엔 사과 한마디 안 했으면서. 노엘이 크리스의 티셔츠에 눈물로 축축한 손을 문질러 닦을 즈음엔 크리스도 꾸역꾸역 울음을 그쳤다. 울음을 그친 납치범은 한참 자기 티셔츠를 행주 대신으로 쓰고 있던 노엘의 팔을 낚아채 그 손목에 입을 맞춘다. 허락 없인 안 만진다더니, 노엘은 속으로 불만스런 말을 툴툴거렸지만 그걸 굳이 입 밖에 내진 않았다. 어쨌든 지금은 이걸 허락하고 싶은 기분이기도 했으니까.

"좋아해요. 노엘이 너무 좋아요. 많이 좋아해요…."

"어어, 그래. 그래 보인다."

"그냥, 크응, 내 침대에서 내 옷 입고 내 노래 부르는 당신이 너무… 저기, 예뻐서… 아얏! 사, 사랑스러워서요…. 보자마자 눈물이 났는데, 훌쩍…, 저도 놀랐어요."

제가 제 생각보다도 훨씬 많이 당신을 좋아하나봐요. 혼잣말 하듯 내뱉은 마지막 한마디가 뜨거운 숨과 함께 터져나온다. 그 숨이 아직 크리스에게 잡혀있던 손목에 닿아 흩어지고, 노엘은 눈을 깜빡이며 자기 살갗이 델 것 같다는 말도 안되는 생각을 했다.

 

***

 

"있잖아요."

"뭐."

"Yellow 마저 불러주면 안돼요…?"

"또 울면 나 집에 간다."

"……."


***


상황은 갈수록 우스워만 졌다. 책 읽기도 기타 치기도, TV 보기도 질린(마침 맨시티 경기가 없었다) 노엘이 짜증내며 모바일을 켰을 적에, 때마침 리암의 전화가 걸려왔더랬다. 리암은 너 집에도 없고 대체 씨발 말도 없이 어딜 갔냐며 괜히 짜증을 부렸고, 목청 좋은 보컬의 욕지거리 섞인 말들은 여전히 노엘 옆에 딱 붙어 앉은 크리스의 귀에까지 들어갔다. 아마 그 자리에서 노엘이 '나 크리스네 집인데, 감금당했어.' 따위의 말을 했다면 리암은 망설일 것 없이 곧장 크리스의 집까지 쳐들어왔을 거다. 노엘은 거의 확신했고 크리스는 그 가능성에 불안해 했다. 골든 리트리버는 십 년 전 잃어버린 주인을 바라보듯 노엘을 바라봤고, 노엘은 한숨쉬었다. 그렇게 불안하면 여기서 내 전화를 뺏어도 될텐데 말야…. 지척에서 쏟아붓는 불안함과 사랑이 복잡하게 뒤섞인 감정에 속이 메슥거릴 지경이었다. 그래 괜히 큰 일 낼 필요는 없지.

'어, 나 잠깐 휴가 왔어.'

'뭐? 말도 없었잖아. 어딘데?'

'…있어, 새꺄. 스케쥴에는 안 늦게 갈테니까 며칠 냅둬라.'

'뭐 별일 있는 거 아니지? 감이 좆같이 안 좋았단 말야.'

이 새낀 가끔 지나치게 촉이 좋다니까. 손을 뻗어 크리스의 뺨을 가볍게 톡 두드린 노엘이 낄낄 웃었다.

'별일은 무슨. 나중에 봐, 끊어.'

옆에서 적나라한 안도의 한숨소리가 들려왔다. 그는 정말로 이쪽 말 한마디에 곧장 죽거나, 혹은 열 개의 목숨을 가진 사람이 되거나 한다. 이 전까진 이걸 잘도 숨겼다 싶을 정도였다. 아, 씨발. 이게 귀엽게 보이면 나도 아마 얘랑 친구로 끝내기는 글렀단 소린데. 전화를 툭 끊은 노엘이 아주 복잡한 표정으로 이쪽을 바라보는 크리스를 마주본 채 혀를 쯔 찼다. 새끼, 기왕 정신 나갈 거였으면 좀 더 젊고 잘생긴 놈 찾지….

"하여간 너도 웃기는 놈이야."

"노엘은 안 그런가."

"어쭈?"

이게 이젠 틱틱 짜증도 부린다. 기실 그게 이쪽을 보고 벌벌 떠는 것보다는 훨씬 낫다. 노엘은 그렇게 생각했다. 내내 그 상태 그대로라면 이놈은 키스했을 때 통곡할 가능성이 아주 높으니까 말야. 노엘은 도저히 참을 수 없는게 몇가지 있었는데, 그 중에서도 곡소리를 참아주기가 가장 곤혹스러웠다. 싫은 건 아니고 진짜 뭘 어떻게 해야할 지 난감하다고. 눈 앞에서 울음을 터뜨리는 팬이나, 아니면 키스하고서 자기 감정에 버거워 통곡하는 남자친구, 뭐 그런 거. 아니, 아니지 씨발, 남자친구는 무슨 남자친구야? 지금 얘 때문에 그렇게 생각한건가?


변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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