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래를 재생해주세요>



살랑살랑 바람이 나부낀다. 따듯한 햇살이 포근하게 지상을 덮기 시작한다. 사람의 속살까지 파고들던 추위와 모든 것을 하얗게 만들던 눈은 더 이상 내리지 않는다. 완전한 봄이다. 아니 어쩌면 조금 초여름과 초가을 사이에서 어느 쪽에 들어갈지 고민하고 있는 날씨인듯 하다. 따스한 햇살에 속속들이 피어나는 꽃들이 보고 싶지만, 사랑하는 사람과 맞닿았을 때의 열기와 바깥의 열기가 끈적하게 섞여버리는 것은 조금 사양하고 싶어 어찌 할 줄모르는 듯한 날씨이다.


 새벽의 바람은 이렇게나 차가운데, 낮의 햇볕은 이렇게나 따사롭고 뜨겁다. ...우선. 날씨에 대한 감정들은 잠시 치워두고 본제로 들어가볼까. 말하기 조차 떨리지만, 아니 생각하는 것 조차 피해왔던 것들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사람 마음이라는게 뜻대로 되는 것이라곤 하나도 없는지라, 어느새 생각하고 또 그것들을 마음속에 쌓아버리고 말았던 것이다. 하지만 그것들을 말로 내뱉기 이전에 내가 해야만 할 것들이 있다.


 그것은, 나에 대한 것. 그녀에 대한 생각과 마음과 이 기분나쁜 것들을 뱉기 이전에 우선 나의 망설임과 생각을 이야기해야 하지 않을까. 입이 턱 막힌다. 이 말을 내뱉어본지 얼마나 오랜 시간이 지났을까. 목 끝까지 차오른 그 말을 혀에 굴리고, 또 굴려서 혀위에서 녹아버린 그 말을 억지로 삼킬 수 있게 되게까지 얼마나 오랜 시간이 걸렸을까. 그리고 그녀를 만나며 그것이 점점 가시를 갖게 되어버리게 되게까지는 얼마나 짧은 시간이 걸렸던가. 말 한마디를 삼키는 것 따위가 이렇게나 쓰고 고통스러웠던 적이 있었던가. 그 한마디를 뱉어내지 못해서, 그 한마디에 솓아난 가시들에 걸려 함께 쓸려내려가버리는 감정들에 이렇게나 비통함을 느낀 적이 있던가.


...전부 그녀를 만나면서, 처음으로 느끼게 된 것들이다.



"있죠, 저 할말이 있어요."



 부디 들어주었으면 좋겠어요. 그대는 내가 어떠한 생각을 가지고 살아왔는지 잘 모를테니까. 그대는 내가 어떠한 과거에서 비롯되어, 어떻게 삐뚤어져버린 인간-아니 인간은 아닐텐데-인지. 있죠. 저는 궁금해요. 누나가 저 이전에 사랑한 사람, 함께 지냈던 사람들, 누나와 함께했던 과거의 사람들과 지금 친한 사람과 또 저와도 함께 즐겁게 다닐 수 있는 사람들은 누구일지. 하지만 그러려면 우선 저의 이야기를 하는 것이 맞는 것이라고 생각해요. 그렇죠? 그러니까 저는 말할거에요.



"당신을 사랑하게 되기 전에, 사랑한 사람이 있었어요."



 이것은, 그대도 알고 있을 이야기. 본래라면 연인에게는 해주어선 안 되는 이야기. 하지만 나는 이것을 이야기한다. 나의 기억들을 풀어낸다. 그 한마디를 향하기 위해서.



"그 사람이 있었기에 사랑이라는 것을 깨닫고, 누군가에게 사랑하고 사랑받는 다는 것에 기쁨과 행복을 느꼈어요. 그가 있었기에 당신에 대한 사랑도 깨달을 수 있었어요."



 그에게 느꼈던 감정을 당신에게도 느낀다. 그에게 들었던 생각을 당신에게도 하게 된다. 그리고 그것에 더 나아가서, 당신에게는 그때보다 더 잘 대해주고 싶다는 마음과 그 사람이 느꼈을 좋지 않은 감정들을 당신에게도 겪게하고 싶지않다. 그러니까 나는 당신에 대해서 알고 싶다. 당신이 살아온 삶을 차분히 듣고싶다. 그렇기에 여기서부터 시작이다.



"그녀석, 아직도 제 곁에 있어요. 아니, 그를 아직도 사랑하고 있다는 건 아니에요. 오히려 지금은 싫은 쪽의 감정이 더 커요. 누나와 함께 있을때, 즐거울때, 혼자 사색에 잠길때. 계속해서 그와 함께했던 기억과 행동을 끄집어 내거든요."



 하지만 알고 있다. 내 기억속의 그와 지금 내곁의 그는 전혀 다른 사람이라는 것을. 이 사람을 만나기 전이라면 그것에 동요했을 나지만 이젠 그렇지 않다. 나도 모르게 이 사람은 나에게로 다가와서, 나의 불안정하고도 한심한 부분들을 따스하게 어루만지고 가는 것이었다. 얼마나 사랑스럽고, 또 아름다운 사람인가. 그렇기에 나는 이야기해야만 한다. 성난 가시를 품은 단 하나의 말을, 하지만 이 가시를 풀어내는 것은 나의 이야기가 전부 끝난 뒤여야만 한다.



"하지만 누나와 함께 있다면 그런것에 얽히지 않아요. 누나는 이게 얼마나 대단하고, 또 엄청난 것인지 잘 모르죠?"



 그대는 나에게 준 상냥함을 잘 모르겠지, 그대가 나와 함께 함에 따라서 내가 느끼는 것들을 모르겠지, 그대가 곁에 있으므로써 알게되는 것들조차 그대는 모를테다. 그러므로 더욱더 말하고 싶었다. 모든 것을 담아서 뱉고 싶었다. 그 말을, 단어를. 이게 대체 무엇이라고 나를 이렇게까지 옭아매어버린 걸까.



"혼자 있으면, 무서워요. 그가 자신을 사랑하지 않았냐고 계속해서 제게 말을 걸거든요? 아니 사랑하지 않았냐는 말 뿐만 아니에요. 누나와의 관계마저 부정하려고 하고 또 제가 떠올리고 싶지 않은 기억과, 아니라고 부정해왔던 제 심정을 들 쑤시고 있으니까요. 그래서 저는, 정말로 사랑했을터인 그 사람이 너무나도 미워졌어요. 하지만..."



 그렇게 그와 이야기 하면, 결국 깨닫는 것은 같았다. 그가 미워 미쳐버릴것만 같아도, 그라는 나의 망집이 내뱉는 말들이 사실 내가 속으로 삼켜버린 한마디 한마디라는 것을.  그녀에게 하는 모든 행동이 너와의 일들을 투과해서 나타나고 있다는 것을. 순간적으로 들이킨 숨이 심장속에서 멈춰, 그 고동과 함께 어렵사리 꿈틀거린다.



"그렇게 미워하면서도, 존재 자체를 부정하고 싶어 하면서도 결국에는 저는 그 사람을 상처 입히는 것은, 할 수가 없었어요. 그 사실에 절망하고, 또 자기 자신을 부정해버려서 그냥 역시 이대로 내가 죽는 편이 낫지 않을까 하고 생각하면, 누나가 떠오르는 거에요."



 결국 내가 가장 싫어하고 혐오하는 것은 나 자신이다. 알고 있다. 내가 사랑했던 그 사람의 말을 빌려 왔다는 것을, 내 자신의 모습을 부정하고 싶어서 일부러 마음에 들지도 않는 차림새를 하기 시작했다는 것을, 그리고 그 모든 것이 그저 사랑받고 싶다는 바람에서 나왔다는 것도. 그리고 그런다고 사랑 받을 수 있지 않다는 것도 사실은 알고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그럼에도 그 웃기지도 않은 연기를 계속 해온 것은 역시나 사랑받고 싶다는 마음과 내 본래의 모습으로는 사랑받을 수 없을 것이라고 확신했기 때문이다.



"...다른 그 누구도 아닌 누나가, 떠오르는 거에요. 저 따위는 어떻게 되던 상관없다고 생각했어요. 그런데 다치면 걱정하는 얼굴이, 겁을 먹을 때면 좋아한다고 다독여주는 목소리가, 제가 거짓을 보고 있는 것은 아닐까 두려워지면 붙잡았던 손이, 끌어안았을때의 온기와 뺨을 맞대었을때의 감촉이 떠오르는 거에요. 그리고 그러면서 느꼈어요."



 천천히 숨을 들이킨다. 이것 하나를 위해 나는 얼마나 많은 꽃을 죽여왔을까. 얼마나 많은 나 자신을 부정하고 살아왔을까. 이것을 위해서 생전의 나는 모든 것을 참고 있었다. 가족들에게서, 이것만을 바랐기에 참고 견디고 있었다. 그리고 가족이 아닌 다른 사람에게 얻었다고 생각 되었을 때에는, 곧 사라져버렸다. 하지만 당신이 나에게 주었다. 



"나, 사랑받고 있구나..."



 사람을 정말로 좋아했다. 지금도 사람들이 좋다. 누군과 이야기하는 것이 좋았다. 누군가와 웃고 떠드는 것이 좋다. 사람들 사이에 '나'라는 조각이 어긋나지 않고 자연스레 끼어져 있는 것이 좋았다. 사람들 속에 섞여 있는 것이 좋다. 나는 그래서 사람을 싫어할 수가 없었다. 모두가 너무나도 좋았다. 모두가 너무나도 좋다. 그러니까 나는 나를 쓰레기 취급한 아버지도, 나를 원망한 어머니와 여동생도, 나를 두고 가버린 너도, 나를 죽게 만든 사람들도, 나를 '수절원사'라는 죽음으로 만들어버린 그녀도 진심으로 싫어할 수가 없었다. 



"정말로 사랑받고 있구나."



 그들에게, 사랑받고 싶었다. 누군가에게 간절하게 사랑을 바랐다. 그들을 너무나도 좋아하고 또 사랑했기 때문에 사랑받기를 바랐다. 그러기 위해서 나의 모습을 짓밟고 거짓말을 두르고, 괜찮은척 가면을 끼워 이런 나를 사랑해달라 애원하고 있었다. 본래의 모습의 나에게 그들이 바라는 모습을 덧그리고, 이런 나를 사랑해달라 매달리고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그 웃기지도 않은 고약한 버릇은 아직 여전해서, 사랑하는 사람의 모습으로 내 모습을 덧씌웠다.


 그는 이렇게 행동했어. 그는 이렇게 이야기했어. 그는 그 사람은 내가 사랑했던 사람의 모습은, 내가 싫어하는 나의 모습은. 아니 내가 아닌, 그들이 싫어했던 나의 모습은 감춰야해. 그들이 싫어했던 나의 모습에, 내가 사랑했던 그 사람의 모습을 넣어서...


  하지만 이젠 그 모든것이 무슨 소용일까. 나를 사랑해주는 사람이 있다. 내 본래의 모습을 사랑하는, 누구보다 내가 가장 마음을 품은 사람이 나의 모든 것에 숨결을 불어 넣어준다. 나는 그러니까 말해야만 한다. 아니 말하고 싶었다. 어째서 여태 말하지 않은 것인지 내 자신이 한심하고 또 싫어서. 삼킨 말과 한숨이 가슴속에 파고 들어 새로운 가시를 만드는 것만 같았다. 상처에 익숙해졌다고 생각하고 그 말을 집어 삼키면그것은 새로운 가시를 들고와 전과 다른 상처를 깊게 파고 저 안으로 들어갔다. 가시를 내리는 것을 잊지 않은 채 호시탐탐 나를 노리고 있었다.



"그러니까, 제가 하고 싶은 말은..."



 그말은 또 다시 나의 목끝까지 올라와서, 가시의 따가움에 온 몸에 소름이 돋기 시작한다. 말할게, 말할거야. 너를 그녀에게로 풀어줄게. 가시를 내리고 날개를 달아서 그녀의 귓가에 살포시 내려 앉아줘, 그녀가 상처받지 않도록. 내가 너에게 상처 받은 만큼 내 마음이 그 사람에게 닿을 수 있도록 부드럽고 수려하게, 초려했던 네 허물은 뱉어내고 그 사람에게로,



"사랑해요."



 웃어보인다. 내가 지을 수 있는 가장 환한 미소를 짓는다. 눈꼬리와 입꼬리로 호를 그리며 사랑한다는 말을 바람에 싣는다. 고백한 이후로 몇번이나 말하고 싶었던 말, 두려워서 내뱉지 못했던 겁쟁이인 나를 더욱 더 겁쟁이로 만들어버렸던 말. 



"저,  누나를 정말로 사랑해서, 누나에 대해서 더 알고 싶다고 생각해요."


"...그래서, 누나에 대해서 알고 싶었지만 그 이전에 저에 대한 이야기를 해야하지 않을까 싶어서... 아니. 그리고 그것보다 더 이전에 제가 누나에게 가장 먼저 해드려야할 말이 있다고 생각했어요."


 그 말을, 힘차게 꺼내보인다. 가장 가슴 안쪽에서부터 응어리가 되어 딱딱해진 그 말은 이제 목소리에 실려 꺼내진다. 그렇게 오랫만에 떠오른 그 말은, 상쾌한 바람을 맞으며 밖으로 뛰쳐나와 그녀의 귓가에 나의 마음을 속삭여줄 것이다.


"사랑해요. 정말로."


뒤에 숨기고 있었던 것은, 그대에게 받치는 자그마한 꽃다발. 본래 고백할때 드렸어야했는데 왜 이제서야 드리게 되어버린 걸까. 누구보다 사랑하기로 마음먹었으면서, 누구보다 사랑받는 사람이 되게하고 싶다고 생각 했으면서. 나는 너무나도 부족한 사람이다. 나는 이 말을 이 사람에게 몇번이나 되뇌어야 이 사람이 나에게 준 것을 되돌려 줄 수 있을까. 아마 그것은 수 백번, 수 천번, 수 만번을 반복하여도 부족할 것이다.


"...이제서야 표현해서 죄송해요."


 아아, 여전히 들쭉날쭉한 날씨가 이어지고 있다. 새벽의 공기는 매섭게 차고 대낮의 햇볕은 눈부시게 뜨겁다. 참으로 이상한 날씨다. 하지만 이깟 날씨가 뭐 대수라고. 지금 내 앞에 있는 사람의 소중함은 그런 것 따위 신경조자 쓰이지 않을 정도로 가벼운 것이다.


"그래도 저는 언제나 누나를 사랑하고, 또 사랑하고 있어요."


 수줍은 꽃다발과 수줍은 마음을 건낸다. 그대를 닮은 꽃. 핑크빛으로 곱게 물들어 사랑을 표하는 꽃들. 당신을 향한 꽃은 꺽이지 않겠죠. 당신이 피운 나의 꽃은 절대로 시들지 않을거야. 가위의 날도 이젠 전부 망가져 버렸으니까, 더 이상 잘려나갈 사랑도 없을 것이다. 아, 당신이 나에게 피운 꽃은 그저 '사랑'이라는 꽃이 아니야. 그것 말고도, 당신이 나에게서 피워준 것들은-....


"차분하게, 조금 더 메르디아에 대해서 알아가고 싶어요"


핑크빛으로 물든 꽃다발과 뺨과 당신에 대한 시선이 나를 채운다. 당신에게 꽃들과 마음을 건낸것일 터인데, 왜 나는 받는것만 같은 느낌인걸까.


"천천히, 기다릴게요. 가장 사랑하는 나의 사랑."


사랑합니다 그대를. 사랑해요 그대.


 당신이 꽃피운 것은, 당신과 나의 사랑 뿐만이 아니라. 나라는 존재의 꽃도 포함되는 것이었어요.

잡덕 그냥 ㅁ뭐 잡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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