블루밍 타임 12




지민은 우연히 학교 식당에서 남준을 만나 같이 식사했다. 알파여서 1m 거리 유지를 해야 했지만 이미 식판을 들고 코앞에서 바로 만났는데 거절할 수가 없었다. 아무래도 저만큼 젊은 교수가 거의 없다 보니 빠르게 가까워지기는 했다. 


남준과 밥을 먹다가 따가운 시선을 느낀 지민이 젓가락을 문 채 고개를 들었다. 거기에는 밥을 먹으려고 줄 서서 기다리고 있던 정국이 있었다. 저번처럼 분노의 페로몬을 내보낸 것은 아니지만 꼭 보이지 않는 레이저라도 쏘고 있는 것 같았다. 진짜 쟤 왜 저래. 지민이 그만하라는 듯 바깥쪽으로 턱짓했다. 그만 쳐다보고 밥이나 받으라는 뜻이었다. 지민이 턱을 세게 흔들자 앞에 있던 남준이 왜 그러냐고 물었다. 아니에요. 지민이 아니라고 했지만 굳이 돌아본 남준은 정국과 눈이 마주치곤 안경을 고쳐 썼다.


돈가스를 받은 정국이 성큼성큼 이쪽으로 걸어왔다. 밥을 먹다 말고 또 느껴지는 기운에 지민이 옆을 돌아봤다. 정국이 돌진해 오고 있었다. 식판을 든 상만이 정국을 불렀다. 야 어디 가! 얼결에 상만이 정국을 쫓아왔다. 지민은 못 본 척하며 고개를 숙여 김치볶음밥을 퍼먹었다.


탁. 정말 지민의 옆자리에 놓인 정국의 식판에 지민은 그대로 일어설까 생각했다. 그러기에는 아직 밥이 반이나 남아 있었고 같이 먹는 남준의 식사도 꽤 남았다. 남준의 옆에 식판을 놓은 상만이 왜 교수 옆에 앉냐는 듯이 정국을 쳐다봤다. 


“자리가 없어서.”


대답은 상만에게 했지만 정국의 시선이 향한 곳은 지민이었다. 점심시간이라 혼잡하긴 했어도 자리가 없는 건 아니었다. 이미 교수 옆에 자리를 잡았으니 가기도 멋쩍어진 상만이 인사하며 앉았다. 남준이 젠틀하게 말했다. 그래 많이 먹어라. 지민은 얼른 먹고 일어나야 할 것 같아서 숟가락을 들었다. 그러나 밥을 뜰 때마다 정국의 왼팔과 자꾸 부딪혔다. 너무 딱 붙어 앉아서 그런 것이었다. 지민이 발을 들어 슬쩍 정국의 다리를 툭툭 쳤다. 그러자 정국이 홱 돌아봤다. 할 말 있냐는 듯한 표정이었다. 


아니 몰래 눈치 준 건데 그렇게 티 나게 돌아보면 어떡하니. 지민이 말을 삼키곤 할 수 없이 자신이 더 옆으로 의자를 옮겼다. 멀어지는 지민을 보며 정국은 따라가려고 했지만 그럴 수 없었다. 지민이 오지 말라는 듯이 팔을 엄청 크게 해서 밥을 퍼먹었기 때문이었다. 자칫하다가는 지민의 팔꿈치에 정국이 맞을 듯했다. 그 모습을 앞에 앉은 남준과 상만이 잠깐 쳐다봤고 지민도 시선을 느끼곤 다시 얌전히 밥을 먹었다. 학교에서는 아는 척하지 않고 조심하기로 한 터라 그저 침묵했다. 정국이 그나마 남준이 알파라는 사실을 모르는 것 같아 다행이었다. 알면 또 떨어지라고 할 게 분명했다. 동그라미는 정말 희한한 알파였다. 다른 알파와 있다고 알파 냄새 묻는 것도 아닌데, 결벽증이 심해도 너무 심했다.


지민과 남준의 식사가 먼저 끝났다. 지민이 일어섰다. 정국은 문득 느껴지는 기운에 남준을 쳐다봤다. 아주 잠깐이었지만 알파의 기가 느껴졌다. 베타라고 생각했는데 김교수는 알파인 모양이었다. 남준의 수업을 수강하지만 맨 뒷자리에 앉아서 이렇게 가까이 있었던 것도 처음이라 몰랐다. 정말 찰나여서 지민은 아예 눈치채지도 못한 얼굴이었다. 실제로 지민은 전혀 감지하지 못했다.


남준이 알파라는 사실에 정국이 볼사탕을 물고 지민을 올려다봤다. 몰라도 문제인데 알고 있었어도 문제였다. 지민과 남준이 나란히 식판을 버리러 갔다. 정국의 시선이 불안하게 뒤를 쫓았다. 핸드폰을 꺼낸 정국이 지민에게 카톡을 보냈다. 김교수님 알파예요. 식판 정리를 끝낸 지민이 남준과 같이 가다가 폰을 보고 멈칫하더니 슬금슬금 또 옆으로 멀어졌다. 1m 거리를 유지하려는 듯했다. 지민이 떨어지는 모습을 본 정국이 만족하려는데 답이 왔다. 알고 있어. 모르고 있는 줄 알았는데 알고 있었다는 사실에 정국은 진짜 눈이 돌아갔다. 상만이 앞에서 너 혹시 박교수님 좋아하냐고 묻지만 않았어도 당장 달려갔을 것이다. 그나마 상만이 끼어들어 정국도 이성을 좀 찾았다.


지민은 남준에게 이만 먼저 가겠다고 말하곤 급하게 달아났다. 본능적으로 알파와 1m 거리 유지는 하는 편이지만 지금 같은 경우에는 무조건 피할 수는 없었다. 얼결에 정국이 정한 수칙을 따르면서도 지민은 가끔 저 자신이 어이없었다. 물론 더 어이없는 건 정국에게 다른 오메가와 자지 말라는 말 따위를 한 저였다.


알고 있었다는 말에 정국의 답장은 없었다. 삐쳤나 싶기도 했다. 그렇지만 굳이 몰랐다고 거짓말할 이유가 없어서 사실대로 말한 거였다. 지민은 저나 정국이 점차 몸정이 들면서 서로에게 과한 간섭을 하게 된 것 같아 걱정이었다. 우성 오메가로 발현하면 멈출 관계인데 어쩌면 적당한 거리 유지를 해야 하는 건 저와 정국일지도 몰랐다. 몸은 가깝되, 마음은 조금 떨어뜨려 놓아야 했다. 지민은 냉정해지려고 노력했다. 진짜 사랑에 빠질 것도 아니잖아? 어디까지나 지민은 정국을 사랑할 생각이 없었다. 우선은 너무 어렸고, 어릴 때부터 쭉 봐왔기 때문인지 연인이 된다는 가정조차 할 수 없었던 것이었다. 그러나 요즘 들어 조금은 미묘해지는 관계에 지민은 저와 정국이 지금 뭘 하는 건가 싶을 때도 있었다.


지민이 울리지 않는 휴대폰을 내려다봤다. 아 진짜 신경 쓰이네. 









학과 수업을 마치고 지민은 학교 도서관에 들렀다. 시험 기간이라 학생들로 북적였다. 원하는 책을 빌린 지민이 퇴근하려다가 휴대폰을 봤다. 오늘 낮에 학교 식당에서 그렇게 헤어진 게 자꾸 마음에 걸렸다. 알고 있었다는 제 말에 꼭 답장해야 할 의무는 없었다. 어찌 보면 대화가 끝난 거나 마찬가지여서 답하지 않은 것일 수도 있는데, 지민은 오늘 틈틈이 카톡이 왔는지 확인했었다. 이런 제 행동이 바보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가는 길에 과 사무실에 들른 지민은 아희와 이야기하다가도 두 번 정도 휴대폰을 봤다. 눈치 빠른 아희가 누구 기다리는 중이냐고 물었다. 아니라고 대답한 지민이 하던 이야기를 계속하려는데 누군가 들어왔다. 낯선데 낯이 익다 했더니 전에 정국과 단둘이 밥을 먹던 여학생이었다. 조교인 아희에게 여학생이 몇 가지를 질문하고 사무실을 나갔다.


“쟤 우리 과였어?”

“아 선배 모르시는구나. 쟤 몸이 안 좋아서 2년 정도 휴학했었거든요.” 


무용과라도 전공이 다른 데다 2년 전이면 지민이 강사로 오기 전이었으니 모를 만도 했다. 지민은 얼마 전에도 꼭 여학생과 카톡하는 것 같던 정국의 모습을 떠올렸다. 내 카톡에는 답도 없고 매번 단답형으로만 답하는 놈이, 그땐 아주 길게도 적어 보냈다. 지민이 볼을 부풀렸다. 정국이 그날 과제에 대해 답하느라 길게 적었다는 것을 지민이 알 리가 없었다.


정말 저 여학생과 썸이라도 타는 건가? 하긴 오메가와 만나지 말라고 했지 베타를 만나지 말라고는 안 했다. 지민은 얼마 전 했던 자신의 엄포가 상당히 멍청하게 느껴졌다. 지민이 정국에게 저와 이런 관계를 유지하는 동안 오메가를 만나지 말라고 했던 건 정국의 조건을 저도 똑같이 내건 것이었다. 또한 이왕이면 극우성 알파의 페로몬을 이 기간에 자신만 오롯이 받는 것도 좋을 것 같기도 했다. 베타는 어차피 페로몬 영향도 없을 테니 상관없을 텐데, 지민은 왠지 정국이 저 베타 여자와 만난다고 생각하자 썩 마음에 들지 않았다.


그런 생각을 하던 지민이 제 뺨을 살짝 부여잡았다. 마음에 안 든다니, 뭐가? 정국의 연애 상대로 저 여학생이 마음에 안 든다고 생각한 게 우스웠다. 지민이 고개를 털었다. 전적으로 정국을 오래 알고 지낸 좋은 형 입장에서 생각하면 잘못된 일도 아니었다. 팔은 안으로 굽는다고 우리 동그라미가 더 아까웠다. 왠지 시어머니 관점 같았지만 정국에게는 베타보다 우성 오메가가 어울릴 듯했다.


“요즘도 학교 띄엄띄엄 나오던데, 그 정교수님 교양 있잖아요. 그거 전정국하고 쟤가 같은 조였는데 강의 몇 주 안 나와서 전정국 고생 좀 했을걸요? 나였으면 맨날 나와서 밥 사 주고 잘생긴 얼굴 구경했을 텐데, 어쩜 저래요? 애인 있어서 그런가.”


아희는 원래 쓸데없는 잡다한 정보까지 다 전해 주는 타입이었다. 함께 있으면 무용과뿐만이 아니라 학교가 돌아가는 사정까지 알 수 있다는 장점이 있었지만, 가끔은 TMI 파티라 다 듣기 피곤할 때도 있었다. 지금도 잡다한 가십에 불과했으나 지민에게 아주 TMI는 아니었다. 저 여학생이 정국과 조별 과제를 했고 애인은 따로 있다는 정보를 알게 된 것이었다. 그동안에도 아희는 정국과 여학생의 과제 이야기를 하고 있었는데, 아마도 정국과 단둘이 같은 조를 하고 싶었던 다른 학생들의 시기가 엄청났던 모양이었다.


지민이 과 사무실을 나왔다. 오늘 아희에게 들은 내용의 수확이 나쁘지는 않은 것 같았다. 돌아가던 길에 상만을 마주쳤다. 지민은 문득 저도 모르게 묻고 말았다.


“정국이는?”


말하고 큰 실수 했다는 것을 깨달았지만 이미 나가 버린 말은 어쩔 수가 없었다. 조금 전까지 정국을 생각하고 있던 데다, 늘 붙어 다니던 정국이 안 보여서 실수로 묻고 말았다. 내내 카톡을 기다렸으니 실수할 만도 했다.


“수영장에 있어요.”


그러고 보니 무용실이 있는 복도는 수영장으로 가는 길목에 있었다. 어디 있는지 알았다고 한들 보는 눈이 많은 학교에서 찾아갈 수는 없었다.


“수영장에 정국이 혼자예요. 시험 치고 다 나가서.”


상만이 굳이 안 해도 될 말까지 하는 것을 본 지민은 아무래도 낮에 밥 먹을 때 뭔가를 눈치챈 것 같다고 생각했다. 아희 같은 경우는 저와 정국이 같이 있는 걸 본 적 없다지만, 남준도 그렇고 저와 정국이 함께 있는 모습을 본다면 누가 봐도 티 날 것 같았다. 원래 아는 형 동생 사이라는 것 말이다.


상만이 가고 지민도 퇴근하려다가 발길을 돌렸다. 수영장 방향이었다.


걸어가면서 지민은 왜 안절부절못하고 있는 건지 이해할 수 없었다. 지민은 우선 제 마음을 확실히 해야겠다고 생각했다. 이쯤 되면 자신이 정국을 좋아하는 건가 싶었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그건 아닌 것 같았다. 살면서 두 번의 연애를 해봤다. 호감이 자연스럽게 발전된 경험도 있지만 뭔가 이런 느낌은 아니었다. 어떤 느낌이냐면 한 마디로...


내가 전정국을 좋아한다고?! 아닌 것 같은데. 이렇게 결론이 났다. 동생으로서 아끼고 좋아하는 건 맞지만 사랑하고 연애하고 싶고 그런 감정은 없는 것 같았다. 자신이 우성 오메가로 완전히 발현하고 나면 이 관계를 정리할 생각이었다. 집에서도 내보낼 계획이다. 이용하는 것 같았지만 어쨌든 정국도 이 부분에 관해서는 합의했고, 기꺼이 도와주겠다고 했다. 아무리 늦어도 여름이 지나가기 전에는 발현하지 않을까 싶었다. 여름 방학이 되면 자연스럽게 정국도 부산으로 돌아갈 듯했다.


걷다 보니 어느새 수영장이었다. 정말 정국이 혼자 수영하고 있었다. 입구 반대편을 향해 헤엄치는 정국은 당연히 지민이 온 줄 몰랐다. 지민이 천천히 물 앞까지 걸어갔다. 수영 과목 중간고사가 끝나서인지 정말 다 나가고 아무도 없었다.


정국이 맨 끝에서 부드럽게 턴을 했다. 돌아오던 정국은 저 끝에 서 있는 조그만 인영이 지민이라는 것을 알아챘다. 순간 헛것이 보이나 싶었지만 정말 지민이었다. 정국이 있는 힘을 다해 앞으로 나아갔다.


점차 가까워졌다. 물리적 거리가 좁혀질수록 지민은 왠지 정국과 저의 보이지 않는 거리도 좁혀지는 것만 같았다.


어느새 지민의 앞까지 헤엄쳐 온 정국이 물속에서 고개를 들었다. 수경을 벗고 젖은 머리를 털며 정국은 지민을 올려다봤다.


“어쩐 일이에요?”

“그냥.. 상만이가 너 여기 있대서.”

“형이 그냥 나 만나러 올 사람이었던가..? 할 말 있어요?”

“어... 아까 네가 답장을 안 해서.”

“그게 답장해야 할 이야기였어요?”


남준이 알파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고 하니까 정국도 더 할 말이 없었다. 왜 알면서도 같이 밥 먹었냐고 따지고 싶었지만 그건 정국이 생각해도 과한 것 같았다. 그래서 답장하지 않은 건데 지민이 그걸 여태껏 신경 쓰고 있었을 줄은 몰랐다. 사실 정국에게 지금 남준은 경계 대상 일 순위로 떠오른 상태였다.


지민이 시선을 약간 멀리 뒀다. 정국이 상의를 안 입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수업 때 입었을 래시가드는 저 멀리 놓여 있었다. 혼자 남은 정국이 갑갑해서 벗어 버린 듯했다. 지민이 그쪽으로 걸어가자 정국도 물속에서 천천히 지민을 따라갔다.


“이제 김교수님하고 밥 먹지 마요.”

“뭐?”

“이런 답장을 원한 거예요?”


지민이 멈춰 서며 내려다봤다. 물속에서 정국이 새실새실 웃고 있었다. 웃는 게 얄미운 데 왠지 귀엽게 느껴지기도 했다. 지민은 이성적인 사고를 하려고 노력했다. 섹스 파트너 같은 관계라고 생각했는데 왠지 연애 놀음을 하는 것 같기도 하고... 저도 정국도 둘 다 착각 속에 빠진 게 아닐까 싶었다. 그렇다면 빠져나와야만 했다.


“우리 딱 여기까지만 해.”

“뭘요.”

“네가 나 도와주는 동안에 내가 지켜야 할 건 그거 하나고, 너도 마찬가지야.”


지민이 또 선을 그었다. 아무도 없었지만 혹시 몰라 정확한 주어 언급은 피했다. 서로가 지켜줘야 할 건 다른 알파나 오메가와 섹스하지 않는 것이었다. 가뜩이나 넓은 공간이라 소리가 울리는 것 같았다. 지민이 다시 걸어가면서 말했다.


“나도 조심할게.”


뭐라도 된 것처럼 굴지 않겠다는 의미였다. 정국은 지민이 말하는 맥락을 알아들었다.


“전에 나한테 그랬죠. 뭐라도 된 것처럼 굴지 말라고.”


그 말을 하던 당시의 상황이 떠오른 지민이 멈칫했다. 그때도 선을 긋기 위해 한 말이었다. 어차피 정국도 저를 진지한 관계로 생각하지 않는 것 같아서 방어했다. 정국 역시 그 이상으로 발전할 생각은 없어 보였다. 아마도 소위 유사 연애 같은 것일 테다. 애초에 섹스만 한다는 게 말이 안 됐다. 저나 정국처럼 정이 많고 마음이 약한 사람들에게는 무리였다. 섹스하다가 감정이 생길 수도 있겠지만, 이게 진짜 사랑이 아닌 착각이라는 게 문제였다. 정국은 아직 어리니까 잠시 즐겨도 괜찮겠지만 지민은 그럴 수 없었다. 혼자만 진심이 되어 버리면 감정 소모가 클 것 같았다.


“뭐가 되면 어떡할 건데요.”


이어진 정국의 말에 지민이 물속의 정국을 내려다봤다. 젖은 머리카락 아래 자리한 눈썹이 단단해 보였다. 지민이 저도 모르게 정국의 얼굴을 한참 봤다. 그러면서도 머릿속은 복잡하게 돌아가고 있었다. 뭐가 되면? 뭐가 될 건데? 지민이 차마 묻지 못하고 말을 삼켰다. 이번에도 말한 건 정국이었다.


“사람 일 모르잖아요. 내가 형의 뭐가 되어 있을지 어떻게 알아.”

“...장난하지 마.”

“장난이 아니면요?”

“정국아. 넌 쉽겠지만 난 아니야.”

“나한테 형 쉬웠던 적 한 번도 없어요.”

“뭐?”

“그냥 지금 마음 가는 대로 하면 안 돼요? 자꾸 잘라내야 해?”


정국은 이제 지민이 저를 조금씩 의식하고 있다는 것을 눈치챘다. 계획대로 되어 가고 있는 것이었다. 그러나 완전히 저에게 마음을 준 것 같지는 않았다. 사랑하는 건 아니고, 그저 조금 신경 쓰이는 상대, 그 정도 같았다. 이제 정국은 작은 일에 상처받고 울적해지지는 않았다. 동그라미는 점차 더 단단해지고 있었다. 데굴데굴 굴러도 괜찮을 만큼.


지민이 한숨을 쉬었다. 마음 가는 대로 하자는 건, 정국이 저에게 호감이 생기고 있다는 신호 같았다. 저를 좋아하는 건 아니라던 알파가 섹스 후 소유욕을 보이기 시작하더니, 이젠 조금씩 감정까지 생기는 것 같아 보였다. 일반적인 상황이었다면 서로 본격적인 호감 단계로 돌입하는, 즉 썸이겠지만 저와 정국이 썸이라니 말도 안 됐다. 당황한 지민이 주춤했다. 그러다 급하게 발을 내디뎠는데 지민의 로퍼가 그만 물기 젖은 바닥에 미끄러졌다. 오른발이 제 의지와 상관없이 홱 밀리는 찰나 지민은 판단했다. 자신이 여기서 넘어지지 않으려고 괜히 다른 데 힘을 줬다가는 더 크게 다칠 수도 있다는 것을 말이다. 공연을 앞두고 손목이나 발목을 삐끗할 수는 없었다.


그래서 그냥 빠지기로 했다. 미끄러진 몸이 넘어가는 순간 지민은 수영장 쪽으로 몸을 기울였다. 유연하고 날렵해서 가능했다. 


풍덩! 지민이 물속으로 빠지는 찰나 조금 뒤로 물러선 정국이 지민을 받았다. 정국의 품에 안겼던 지민은 곧 몸이 뜨는 것을 느꼈다. 얼굴이 물속에 잠길 정도였다. 눈을 뜬 지민이 숨을 참으며 몸을 돌렸다. 부력으로 인해 떠 있는 몸이 부드럽게 돌아갔다. 물속에서 지민은 정국과 눈이 마주쳤다. 지민을 받아 주면서 무게로 인해 같이 물속으로 잠겼던 모양이었다. 체대 수영장이라 깊이가 꽤 깊었다.


정국이 양손으로 지민의 뺨을 감싸더니 입을 맞췄다. 놀란 지민이 바동거렸다. 그래봤자 몸이 떠 있어서 발장구치는 수준이었다. 물에서 빠져나가려고 했는데 지민은 더 깊이 빠지는 것을 느꼈다. 완전히 빠진 것이었다. 









옷장에서 옷을 고르던 정국이 시계를 확인했다. 며칠 전부터 계속 뭐 입을지 고민했는데 당일까지 또 고민하고 있을 줄은 몰랐다. 늦으면 안 되니까 그래도 대강 골라 뒀던 남방과 블랙 스키니를 집어 들었다. 오늘은 지민의 올해 첫 공연 날이었다. 얼마 전 지민은 정국에게 공연 티켓을 선물했다. 미리 티켓을 사 뒀던 정국은 당황했지만 티 내지 않고 지민이 주는 초대권을 받았다. 원체 지민의 공연은 인기가 높아서 티켓을 구하기 쉽지 않은 편이었다. 지민이 강의에 더 치중하게 되면서 현역이라 불리던 시절만큼 공연을 자주 하지 않다 보니 더 치열했다. 꽤 좋은 자리를 구했던 정국이지만 지민이 준 좌석에 앉고 싶어서 눈물을 머금고 취소했다.


이마가 반쯤 드러나게 머리를 만진 정국이 얼른 나갈 준비를 했다. 봄 날씨가 무척 화창했다. 어느새 5월이었다. 중간고사가 끝난 지도 일주일이 지난 것이었다. 정국은 문득 수영 시험을 쳤던 날을 떠올렸다. 수영을 더 하고 가려고 남았는데 그날 지민이 수영장으로 왔다.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다가 지민이 물에 빠졌었다. 그리고 수중 키스를 했다. 다분히 정국의 충동으로 벌어진 일이었다. 물에서 나온 후 지민은 옷이 젖어서 어떡하냐고 했다. 정국도 지민이 입고 있던 옷이 쫄딱 젖어버려서 허둥지둥하느라 정신없었다. 결국 머리만 말리고 정국의 여벌 옷을 입은 채 집으로 돌아가야만 했다.


그러고 열흘이 흐르는 동안 그날의 키스는 마치 언급 금지라도 된 것처럼 두 사람 다 말이 없었다. 때마침 둘 다 바빠진 탓도 있었다. 정국은 중간고사로, 지민은 공연을 앞두고 각자 몰두해야 할 일이 생겼다. 게다가 컨디션 조절한다고 지민이 섹스를 피했다. 정국은 갑작스러운 히트사이클을 막기 위해 주말쯤 한번 하는 게 어떻겠냐고 넌지시 말했지만 장렬하게 까였다. 너랑 하고 나면 나 힘들어서 공연 못 해. 그렇게 말한 지민은 요즘 몸이 가뿐하고 꽤 정상으로 돌아온 것 같다며 걱정하지 말라고 했다.


공연장으로 향하던 정국이 꽃집 앞에서 멈춰 섰다. 약 2년 전에 들렀던 곳이었다. 그때는 전하지 못했던 꽃다발이지만 오늘은 전해 주고 싶었다. 어릴 때는 다소 충동적으로 들어갔는데 오히려 이번엔 용기가 더 필요했다. 


어서 오세요! 돌아보며 인사하는 주인을 본 정국은 가물가물했지만 아마도 그때와 같은 플로리스트일 거라고 생각했다.


“좋아하는 사람에게 선물하려고 그러는데요. 제가 꽃을 골라도 될까요?”

“네. 그러세요.”


쭈뼛대던 어린 시절과 달리 정국이 분명하게 말했다. 성장한 것이기도 했고, 그때보다는 자신감이 더 생긴 덕도 있었다. 관계의 변화에 따른 것이었다.


정국은 이번에도 신중하게 여러 가지의 꽃을 골랐다. 마지막으로 고른 꽃은 호랑이꽃이었다. 호랑이꽃 한 송이를 빼어 든 정국이 주인에게 건넸다. 주인은 그제야 정국의 얼굴을 빤히 쳐다봤다. 2년 전 어린 손님에게 꽃다발을 만들어 줬는데 다음 날 출근해서 보니 가게 문 앞에 있었다. 짝사랑하는 사람에게 전하지 못한 모양이었다. 차마 꽃을 버리지는 못하고 다시 꽃집 앞으로 돌려놓은 게 귀엽고 인상적이라 주인의 기억에 남았다. 아는 척하면 쑥스러울 것 같아 말은 안 꺼내고 속으로 손님의 짝사랑을 응원해 줬다.


“직접 해보실래요?”

“어? 그래도 돼요?”


정국이 꽃다발 만드는 과정을 빤히 쳐다보고 있는 것을 본 주인이 직접 해보라고 제안했다. 만들어 보고 싶었는지 냉큼 수락한 정국은 아까 눈으로 봤던 대로 따라 했다. 줄기를 가지런하게 모은 정국이 보라색 꽃과 여러 색이 잘 어울리도록 손질했다.


주인의 도움을 받아 꽃다발을 완성할 수 있었다. 마지막으로 꽂은 것은 그때처럼 호랑이꽃 한 송이였다. 전보다 커진 꽃다발을 들고 정국이 꽃집을 나섰다.


습관은 변하지 않는다고, 공연장에 도착해 리플릿과 팸플릿 보관용 여분 하나씩을 더 챙긴 정국이 구석에 서서 공연을 기다렸다. 오늘은 꽃다발을 손에 들고 온 터라 한 손에 꽃다발이 야무지게 들려 있었다.


공연 시작 시간이 되었다. 착석한 정국이 두근거리는 마음으로 기다렸다. 일 년 만에 공연을 보는 거였다. 사실 고3이던 작년에도 몰래 공연을 보러 왔었다. 고2 전국체전 이후 태권도를 관두면서 아무것도 하고 싶지 않았는데, 작년에 지민의 공연을 보며 다시 마음을 먹었었다. 공부해서 지국대학교에 들어가겠다고 말이다. 그래서 정말 짧은 기간에 피 터지게 공부해서 수능 시험을 치렀다. 체육 쪽으로 수상 경력도 많고 시험 운도 따라 준 덕분에 지국대 체육교육과에 입학했다. 기숙사는 당연히 처음부터 신청하지 않았다. 아버지에게는 신청했는데 누락됐다고 말했다. 아버지가 늦게라도 자취방을 알아보자고 하자 어머니는 곧 개강인데 어쩌냐며, 지민의 어머니에게 전화를 걸었다. 지민이 지국대 교수로 있으니 집도 근처일 거라고 생각한 것이다. 기숙사 신청만 안 했을 뿐인데 그 후로는 가만히 있어도 모든 게 정국의 계획대로 흘러갔다.


불이 꺼지고 막이 올랐다. 하얀 천을 든 지민이 등장했다. 제 몸보다 길고 큰 천을 자유자재로 움직이며 지민이 춤을 췄다. 지민의 맨발이 허공으로 날아올랐다. 정국은 지민의 모든 동작을 놓치지 않기 위해 집중했다. 지민의 머리카락 한 올까지 춤을 추고 있었다. 그 자체가 하나의 예술 작품이었다.


공연이 끝난 후 정국은 지하 주차장에서 기다렸다. 갑자기 자신이 꽃다발을 들고 나타나면 지민이 곤혹스러울 것 같아서였다. 가뜩이나 무용단에 오메가인 것이 알려진 지 얼마 안 됐는데 저까지 나타나 소문을 추가하고 싶지 않았다. 지민이 스페어키를 준 덕분에 정국은 지민의 차에 타고 있었다. 꽃다발은 얌전히 뒷좌석에 놓아뒀다.


관객들의 차가 나가는 데도 한참이 걸렸다. 시간이 좀 지나자 무용 단원들로 보이는 사람들이 하나둘씩 내려오더니 차를 타고 떠났다. 아마도 지민은 늦게 나올 거라 예상했는데 정말 늦었다. 주차장의 차가 거의 비었을 때쯤에야 지민이 슬예와 같이 내려왔다. 자신의 차에 타고 있는 정국을 본 지민이 활짝 웃었다. 옆에 있던 슬예가 정국이 누구냐는 듯이 쳐다봐서 정국도 차에서 내려 인사했다. 지민은 정국을 당분간 같이 살게 된 동생이라고 소개했다. 별로 마음에 안 드는 소개였지만 정국은 어색한 웃음을 유지하고 있었다. 


슬예가 간 후 지민도 차에 올라탔다. 자연스럽게 조수석이었다. 지민이 앉자 정국은 뒷좌석에서 꽃다발을 꺼내 운전석에 앉았다. 말없이 지민에게 건네자 지민의 표정이 환해졌다. 와아. 지민이 감탄하자 정국이 쑥스러운 표정을 감추지 못하고 말했다.


“올해 첫 공연 축하해요.”

“고마워 정국아.”


꽃다발을 받아든 지민이 살짝 향기를 맡고는 기분 좋은 듯이 웃었다. 담백하게 고맙다고 인사한 지민이 꽃을 바라보다 물었다. 유난히 눈에 들어오는 꽃이 하나 있었다.


“근데 이 꽃은 이름이 뭐야? 특이하고 예쁘게 생겼다.”

“호랑이꽃이요.”

“아아, 이게 호랑이꽃이야? 왠지 이름은 들어본 것 같아.”


호랑이꽃에 담긴 의미는 이야기하지 않은 정국이 그저 미소 지었다. 그때도 지금도 꽃다발에는 전하지 못한 진심이 담겨 있었다.


“우리 정국이 다 컸네. 형한테 꽃 선물도 하고.”


왠지 차 안의 분위기가 이상해지는 것 같아서 지민이 급히 또 아무 말이나 했다. 최근에는 집에서도 아침저녁으로 잘 마주친 적이 없었던 터라 이렇게 둘만 있는 게 상당히 오랜만인 것 같았다. 더군다나 집이 아니라 차 안이라서 더 멋쩍었다. 수영장에서 키스한 이후 지민은 의식적으로 또 거리를 두려고 했다. 진짜 바쁘기도 했지만 어쩌면 바쁘다는 것을 방패로 삼은 것이었다.


정국이 마음에 안 든다는 듯 볼에 바람을 넣었다가 뺐다. 다 큰지가 언젠데. 이미 한참 전에 다 컸다. 지민이 또 일부러 거리를 두려고 형 동생 관계라는 것을 강조한다는 것쯤 정국도 잘 알고 있었다.


정국이 팔을 뻗었다. 제 앞으로 성큼 다가온 정국에게 놀란 지민이 숨을 멈췄다. 조수석 쪽으로 반쯤 넘어온 정국이 지민에게 안전벨트를 매어 줬다. 여기서 안 할 거 아는 데도 전적이 있다 보니 저도 모르게 긴장한 것이었다. 힐끗 본 지민의 얼굴은 약간의 분홍빛이 감돌았다. 정국의 입가에 웃음이 비집고 올라왔다. 지민의 머릿속이 보이는 것 같았다.


“이번 주에는 해야 할 것 같지 않아요?”

“뭐, 뭘.”

“뭐긴 뭐예요. 지난주에 못 했으니까 이번 주말에는 해야죠.”


지민은 앞으로 2주간 공연이 예정되어 있었다. 일주일에 서너 번 정도여서 휴일 전날에는 해도 괜찮을 듯했다. 직설적인 말에 지민이 괜히 목을 큼큼하며 가다듬었다. 정국이 조금 더 능글맞게 말을 이었다.


“빨리 우성 오메가가 되려면 부지런히 해야 할 거 아니에요.”

“아... 진짜 별로 되고 싶지도 않았는데.”


베타가 아니고서야, 보통 제 형질이 열성이라면 우성이 되고 싶을 법도 한데 지민은 그런 욕심이 전혀 없었다. 다수의 열성 오메가들이 단점이라 생각하는 것을 장점으로 받아들였던 덕분이었다. 페로몬이 적은 것이 콤플렉스가 아니라 오히려 편하다고 생각해 온 지민으로서는 바뀌는 게 귀찮았다. 


정국이 차에 시동을 걸었다. 곧 차가 주차장을 빠져나왔다. 꽃다발을 품에 안은 채 지민이 수줍게 물었다.


“공연은 어땠어? 괜찮았어?”

“좋았어요.”

“어릴 때 보던 거랑은 다르지?”


지민은 정국이 여덟 살 때, 즉 자신이 열일곱 살 때 서울로 올라와서 했던 공연만 본 줄 알고 있었다. 그래서 그때보다 자신이 훨씬 더 발전하지 않았냐는 의미로 한 말이었다. 지민의 공연을 작년, 재작년, 재재작년에도 본 정국으로서는 갑자기 12년 전을 묻는 지민이 귀여웠지만 제가 말을 안 했으니 별수 없었다.


“무대 위에서의 형은...”

“.......”

“빛이 났어요.”


운전하며 담담한 어조로 말했지만 진심이었다. 그리고 진심은 닿기 마련이었다. 어찌 보면 과한 표현으로 느껴질 수도 있었지만 정국이 정말 진심으로 말했기 때문인지 지민은 오히려 그 어떤 칭찬보다 기뻤다. 오래오래, 아니 평생 무대에 서고 싶었으니까.


부끄러워질 때면 반작용으로 쾌남이 된다든지 딴소리를 하는 지민이었지만 이번엔 그러지 못했다. 정국의 칭찬이 편안하게 느껴진 덕분이었다. 그냥 그 말을 듣는데 마음이 편안해졌다. 작년의 재연이라고는 하나 꽤 오랜만의 무대여서 오르기 전 긴장됐었다. 공연이 끝나고도 여운이 남아 살짝 기분 좋은 긴장감이 감돌았는데 이제야 열기가 좀 식는 기분이었다.


끼익. 갑자기 앞에서 끼어든 차 때문에 정국이 급하게 브레이크를 밟았다. 오른팔을 뻗어 그 와중에 지민의 몸이 쏠리는 것을 막아준 정국이 고개를 돌렸다. 괜찮아요? 지민이 고개를 끄덕이며 품에 안고 있던 꽃다발을 흔들어 보였다. 괜찮다는 뜻이었다.


긴장이 풀리나 싶었는데 새로운 긴장감이 찾아왔다. 무대에서 느끼는 것과는 다른 감정이었다. 간질간질한 느낌이 꼭 연애 초 같았다. 연애가 아닌데 이런 기분이 들다니 지민은 정말 자신이 단단히 착각에 빠진 것 같다고 생각했다. 마지막 연애가 거의 1년 반 전이긴 한데 평소에 그렇게 연애하고 싶어 하던 것도 아니었다. 조그만 게 괜히 사람 설레게 하고 말이야. 지민이 몰래 눈을 흘겼다.


늦은 저녁 식사는 편의점에서 사 가기로 했다. 집 근처는 학생들이 볼 수도 있어서 일부러 다른 동네에 차를 세웠다. 정국이 새로 나온 도시락을 집었다. 지민은 아무거나 상관없다고 했다. 대강 배만 가볍게 채우고 잘 생각이었다. 그래도 막상 들어오니까 맛이 궁금한 신제품이 많이 보여서 지민이 이것저것 구경했다. 어느새 옆에 다가온 정국이 지민의 허리에 팔을 둘렀다. 그러고는 지민이 보고 있던 곳을 쳐다봤다. 딸기가 든 샌드위치였다.


“이거 먹고 싶어요?”

“어? 어어, 응.”


그러자 정국이 성큼 샌드위치를 집어 들었다. 지민은 그제야 정국이 제 허리에 팔을 두르고 있다는 것을 의식했다. 순간 너무 자연스럽고 편해서 눈치채지도 못했었다.


“계산은 내가 하는데 왜 네가 사 주는 척이야.”

“이건 내가 살게요.”


그럼 샌드위치만 사겠다는 말에 지민이 어이없어하며 웃었다. 신용카드 준다고 기분 나빠할 때는 언제고 이젠 정국도 확실히 여유가 흘렀다.


지민이 살짝 떨어졌다. 온 김에 필요한 것을 사려고 돌아볼 참이었다. 정국과 두 달 정도 살다 보니 정국이 알아서 온라인으로 다 시키는 바람에 딱히 생활용품 살 일이 없었다. 구경하다 위생용품 쪽에 오게 된 지민은 콘돔이 있는 것을 보곤 돌아가려 했다. 그러나 뒷걸음질 치자마자 누군가의 몸에 부딪혔다. 그 누군가는 당연히 정국이었다.


“저건 내가 사 놨어요.”

“알아, 알아. 너 맨날 저거 미리 사 놓는 거 안다고.”

“아니.. 난 형이 또 사려고 하는 줄 알고.”


지민이 욱해서 대꾸하자 정국이 아무렇지 않게 답하곤 휙 가버렸다. 무심코 정국을 쫓아가던 지민이 뒤로 돌아섰다. 반대 방향으로 갈래. 일부러 반대쪽으로 가서 한 바퀴 휙 돌았다. 그런데 정국도 같은 쪽으로 돌았는지 맞은편에서 오고 있었다. 꽤 넓은 편의점이라 각자 다니면 안 마주칠 법도 한데 자꾸 같이 다니게 됐다. 


편의점을 나왔다. 정국은 정말 샌드위치를 계산했고 무거운 봉지를 직접 다 들었다. 뒷좌석에 실은 정국이 운전석에 앉았다. 지민은 조수석에 놓아뒀던 꽃다발을 다시 소중하게 품에 안았다.


솔직히 이대로도 나쁘지 않은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뭔가 전에는 그저 아빠 친구 아들과 한집에 살게 된 그 이상 그 이하도 아니었는데, 요즘은 살짝 묘했다. 연애하는 기분이 든 지민이 슬쩍 정국을 쳐다봤다. 아까 급정거한 게 신경 쓰였는지 더욱더 운전에 집중한 얼굴이었다. 옆에서 봐도 동그랗긴 한데 오늘은 좀 근사해 보였다.


유사 연애하는 기분에 빠진 건 저뿐만이 아니라 정국도 마찬가지인 것 같았다. 분명 합의 후 서로 도와주고 도움받는 관계가 되었을 뿐인데, 요즘 정국은 저를 연인 대하듯 대했다. 어려서 구분을 못 한다고 하기에는 요즘 저도 헷갈리는 것 같기도 하고. 그렇지만 저는 적어도 정국을 연인처럼 대하고 있지는 않다고 생각했다.


지민은 지금 상황이 딱히 싫다고는 할 수 없었지만 이용하는 기분도 들어서 찝찝했다. 정국이 저에게 진심이 될까 봐 조금 걱정도 됐다. 그러나 전에 저 안 좋아한다고 대답한 애한테 굳이 또 나서서 나 좋아하게 됐냐고 묻고, 좋아하지 말라고 하는 건 정말 지나쳤다. 정국이 저에게 좋아한다고 말한 것도 아닌 데다 제가 정국을 좋아하는 것도 아니, 아니니까... 생각하다 말고 멈칫한 지민이 꽃다발을 끌어안았다.


저야말로 엄청난 착각 속에 빠진 것은 아닐까. 정국은 그저 착해서 저에게 잘해 주는 것뿐인지도 모르는데. 저는 집주인이고, 오래 알던 형이고, 어릴 때 초코짱도 줬고..! 그렇게 생각하면 이런 생각이 전부 부질없게 느껴졌다.


인간관계는 아직도 너무 어렵다. 상대가 뭘 생각하는지 모르겠고 제가 생각한 게 틀릴 때도 있었다. 정국의 말대로 잘라내려 하지 말고 그냥 마음이 가는 대로 하는 게 맞는 걸까. 복잡해진 머릿속을 비우려고 지민이 눈을 감았다.









며칠간의 공연을 마치고 드디어 내일이면 쉬는 날이었다. 이틀 쉬고 또 공연이 있지만 정국이 했던 말대로 이번 주말에는 해야 할 것 같았다. 지민은 어제 병원을 다녀왔다. 물론 정국도 당연히 따라갔다. 아침에 일찍 나가려는데 정국이 귀신같이 알고 병원 가냐고 묻더니 따라붙었다. 운전도 정국이 했다. 대학은 축제 준비로 시끌벅적한 터라 정국에게 축제는 관심 없냐고 묻자 정말 관심이 없다는 대답을 들었다. 지민은 정기 검진차 들렀던 병원에서 별 이상 없다는 소견을 받았다. 변화가 없는 것은 아니었다. 우성 수치가 전보다 높아졌다고 했다. 의사가 그 말을 할 때 동그라미의 표정이 얼마나 뿌듯해 보였는지. 지민은 그때 우연히 정국을 보곤 약간 환멸 어린 표정을 지었었다.


퇴근하려는데 단장이 지민을 불렀다. 할 말이 있다는 것이었다. 지민은 공연장 대기실에 단장과 둘만 남았다. 


“지민아. B그룹 차남이 널 만나고 싶어 해.”

“네?”

“오해하지 말고 들어. 스폰 그런 거 아니고, 그냥 만나 보고 싶다는 거야. 소개팅 같은 거.”


당황했던 지민의 표정이 조금 풀어졌다. 단장의 말에 따르면 그저 소개를 주선해 달라는 의미 같았다. 워낙 예쁘다 보니 공연 후 저를 소개해 달라는 사람이 그간 한둘이 아니었지만 단장이 나서서 하는 건 처음이었다.


“그 사람 알파인데, 네가 오메가라고 하니까 엄청 좋아하더라고.”

“제가 오메가인 걸 말씀하셨어요?”


지민의 안색이 나빠졌다. 지민이 그간 그런 소개 제안을 쉽게 거절할 수 있었던 건 베타였기 때문이었다. 알파와 오메가는 동성혼이 흔하지만 베타 간에는 흔하지 않았다. 결혼은 허용되어도 흔치 않다 보니 베타라고 하면 알아서 거절의 의미가 된 셈이었다. 저는 베타 남자니까 베타 여자만 만난다는 뜻이 되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오메가라는 것이 알려졌다면 쓸 수 없는 방법이었다.


“B그룹에서 이번에 후원해 주겠다는데, 한 번만 만나 보면 안 되겠니?”


후원을 받는다는 것은 결국 아까 단장이 아니라고 했던 스폰의 의미와 다를 바가 없어 보였다. 지민의 표정을 본 단장이 급히 회유했다.


“만나서 잘 되면 재벌과 결혼하는 거야 지민아. 그냥 소개로 만나는 거니까 부담 갖지 않아도 돼.”

“후원, 해 주신다면서요.”

“으응. 그렇지.”


단장이 갑자기 후원으로 얻게 될 혜택에 관해 설명했다. 공연 의상비를 비롯해 연습실 등 전반적으로 좋아질 환경에 대해서였다. 후배들과 앞으로의 발전을 생각하면 후원이 필요한 것도 사실이었다. 그러나 어차피 해줄 후원이었다면 굳이 저를 걸고넘어지지 않아도 되었을 텐데, 지민의 표정이 점차 어두워졌다. 그 후부터는 단장의 말이 잘 들리지 않았다. 듣고 싶지 않았던 건지도 모르겠다.


홀로 공연장을 걸어 나오던 지민이 멈춰 서서 벽을 짚었다. 간혹 무용하는 오메가에게 그런 제안이 있다는 걸 소문으로 들어본 적은 있지만 저에게는 일어난 적 없는 일이었다. 딱히 주변에서도 본 적 없었기에 지민은 그저 당혹스럽기만 했다. 단장이 마음대로 제가 오메가라는 것을 발설한 것이 제일 불쾌했다. 결국 이게 다 오메가라는 것이 알려지게 된 이후 벌어진 것이었다. 자신이 오메가라는 것이 이렇게 비참할 수가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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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댓으로 바뀌었는데도 댓글 많이 달아 주셔서 감사합니다ㅠㅠ 남들이 보기엔 연애하는 것처럼 보이겠지만 사실은 아직 연애하지 않는 국민... 그리고 지민이는 연애 직전에 갈팡질팡하고 상대 마음에 대해 고민하고(또는 자신의 입덕 부정) 그런 시기인 것 같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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