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퀘 가련서연


바람이 찼다. 앞이 잘 보이지 않을 정도의 기록적인 폭설이었고, 아마 궐에서 매일같이 기록하는 사관들의 붓 아래서도 오늘 날씨는 대단했노라고 서술될 것이었다. 눈발이 거세게 휘날리는 사이로 가련은 몸을 날렸다. 눈이 내리는 날은 거칠게 내리는 동안 움직이는 게 최상의 수였다. 눈이 다 그친 뒤엔 발자국이 모조리 남아버리고 말 것이었고 전설의 일지매는 결국 발로 뛰어다니는 하나의 계집애라는 것을 들키고 말 테니까.

그렇게 지붕 위를 건너다니며 힐끔 거리를 내려다보다가 무엇인가를 시야에 담은 순간, 발걸음이 우뚝 멎었다.

“…….”

달리던 속도를 못 이겨 발끝에 걸린 기와에서 덜걱하는 소리가 났다. 코에서부터 샌 김이 부옇게 얼굴 앞을 뒤덮었다. 새하얗게 번지는 시야 사이로 차분한 남색의 관복이 걸려든다. 어둠과 섞인 눈발로도 서연의 창백한 피부와 발갛게 변한 코끝이 선명해 가려지지 않는다.

“저놈의 포청은 미친 것인가? 포졸들이라곤 코빼기도 보이지 않는 날에 다모만 저렇게 내돌려?”

절로 기가 차 헛웃음이 났다. 아니, 쫓기는 처지에서 포청 종사자들의 권리까지 챙겨줄 정도로 넉넉한 마음씨를 가진 건 아니지만 이건 좀 다른 문제이지 않나. 이 야밤에 봉급도 얼마 되지 않을 관비가 이렇게 종종걸음을 하고.

“하여간에 저 다모는 너무 열심인 데가 있어.”

보나 마나 제 나름의 노력이며 성실함이겠지만, 몇 년을 시달려 온 입장으로 보기엔 오늘 이 폭설 속의 외출도 혼자 자청한 것일 터였다. 가련은 고민하다가 조금 더 낮은 지붕으로 풀썩 내려갔다. 아마 서연이 고개만 돌린다면 곧장 자신을 발견할 수 있을 것이었다.

그러나 서연은 꼿꼿하게 앞만을 바라보고 걸었다. 아니, 김희수처럼 옆도 좀 살피고, 주위 관찰도 하고. 좀 그래야 하는 것 아닌가? 무슨 사람이 허리도 굽히질 않고 목각인형처럼 뚜벅뚜벅 앞만 보고 걸어.

“…….”

충동이 불쑥 든다. 귓가에서 김희수가 쫑알거리는 것 같았다.

‘야, 너는 꼭 과시욕이나 명예욕이 있어. 알아? 조용히 가서 훔쳐만 나와도 될 거를, 들어가면서부터 나 훔쳐요~ 나 훔쳐가요~ 하고 그러잖아. 다음부턴 훔쳐 나오는 길에 소리를 치고 매화를 뿌리던가 해.’

‘김 선비, 이제보니 아주 간이 배 밖으로 나왔구나? 이렇게 날조를 하다니! 내가 언제 나 훔쳐요~ 했느냐? 난 정의를 추구하고 의를 선도하는 일지매로서 양반들의 긴장과 걱정을 부추기기 위한 예고장을 몇 뿌렸을 뿐인데!’

‘됐고, 난 너 위험한 거 싫어. 안전하게 가란 말이야. 안전하게.’

‘벗이 아니었다면 진즉 네 말 같은 건 무시했느니. 이번만 봐준다! 그리고 양반이라면 모름지기 의기를 펼치기 위해 위험쯤은 감내할 줄 아는 법이란 말이야.’

희수와의 대화가 귓가를 잡아당긴다. 안전? 그러나 제가 하려는 행동은 그 안전과는 거리가 멀었다. 가련은 망설였다. 그러는 사이에 조금 더 늦으면 다모는 아주 눈발 속으로 파묻혀 사라져버릴 것 같았다. 기묘한 조급증까지 치미는 것 같아 한숨을 푹 쉬었다. 고개를 흔들자 패랭이 위에 가볍게 쌓인 눈이 흐트러져 떨어진다.

“이봐.”

입을 열어 부르자 일상 앞만을 보고 나아가던 신코가 우뚝 멎었다. 가련은 어색한 웃음을 지으며 손을 흔들었다.

“안녕?”

“……!”

서연은 몹시 놀란 얼굴로 이쪽을 바라보았다. 새까만 어둠과 새하얀 겨울이 흩날리는 그 밤에 희미한 달빛이 눈 위로 옅게 반짝였다. 따로 불빛은 없었지만 둘이 서로를 인식하는 데에는 그것으로 충분했다.

“일지매…!”

서연은 미간을 확 좁히면서 가련이 서 있는 지붕 쪽으로 성큼성큼 걸어왔다. 그러다 멈칫했다. 이쪽에서 시선을 떼지 않으면서 주위를 슬슬 둘러보는 품이 도주로를 미리 차단하려는 목적인 듯했다. 가련은 이제 그런 것마저 다 눈치채게 된 세월이 우스워 피식 웃음을 흘렸다. 먹빛 복면 너머로 입김과 섞인 목소리가 흩어졌다.

“어딜 가는 것이냐? 이 추운 날씨에.”

“그런 걸 말해줄 것 같습니까?”

“아니? 그렇지만 내가 물어보는 건 자유지.”

가련은 말을 마치자 마자 조금 굽히고 있던 허리를 펴며 훌쩍 몸을 날렸다. 지붕 위를 거칠게 뛰는 통에 발끝에서 이엉이 흐트러지고 기왓조각이 떨어져 나가는 것들이 모조리 선명했다. 힐끗 시선을 돌려보니 서연이 잔뜩 찌푸린 얼굴로 열과 성을 다해 쫓아오는 것이 보였다. 역시 예상대로였다.

“어라, 가던 길 가야 하는 것 아니냐?”

목소리를 높여 묻자 서연은 대답도 하지 않고서 쫓아오는 데만 열중하는 것이었다. 복면 아래로 이상하게 웃음이 나서, 가련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아무래도 저 다모가 제 몫을 열심히 하는 모습이 기꺼운 거지. 그런 자기합리화를 몇 번 하다가, 마침내 익숙한 대문이 보일 때쯤 풀썩 뛰어내렸다. 땅에 얹혀가던 눈이 주위로 가볍게 비산했다.

“포청에서 또 뭘 하려고!”

서연이 보기 드물게 씩씩거리는 모습이 보였다. 어라, 화났나. 가련은 뒷목을 긁적이다가 고개를 살살 흔들었다. 그냥 포청 방향으로 유인한 게 다였는데.

“뭘 할 요량은 아니었… 음. 아니다. 네가 너무 열심히 쫓아오는 통에 할 마음도 다 사그라졌으니, 들어가서 발이나 닦고 잠이나 자도록 해라!”

가련은 그렇게 말하고는 다시 몸을 휙휙 당겨 나무를 타고 올랐다. 몸을 기울여 다른 지붕으로 날 듯이 뛰었다. 뒤를 돌아보니 빤한 시선으로 이쪽을 바라보는 서연이 보였다.

“그렇게 열렬히 바라봐주니 내 마음이 다 기쁘구나?”

킥킥 웃으며 몸을 돌리자 서연의 모습이 다시 눈발에 뒤덮인다.

됐어, 뭐. 이걸로 저 다모는 오늘 하루쯤 발 닦고 푹 자겠지. 이런 날씨엔 좀 쉬어야 하는 것 아냐? 가련은 제 나름대로 뿌듯한 마음을 껴안고 집으로 향했다.

그리고 가련의 귀에 우포청의 어느 다모가 일지매를 찾아 헤매다 독한 고뿔이 들었다는 소문이 들린 것은 며칠이 흐른 뒤였다.*






@nynypunc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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