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과 바다 



빛 잘 드는 카페테라스에 앉아 있는 정대만이 낯설어서 송태섭은 가게 바로 앞에서 잠시 걸음을 멈췄다. 언제, 몇시, 어디 카페에서 보자. 그렇게 온 문자도 딱 이만큼 낯설었다. 송태섭과 정대만은 그렇게 약속을 잡고 만나본 적이 없었다. 대뜸 전화해서 어디야? 묻는 것으로 허락을 받는 사람이었다. 송태섭의 좁은 인간관계는 그래봤자 이달재 아니면 강백호라, 정대만은 눈치도 안 보고 그 사이에 끼었다. 휴일에 약속이 없으면 서로의 집에서 보내는 게 익숙했고, 상대방이 없어도 주인 없는 집 침대에 누워 잠을 자거나 요리를 해 먹는 게 당연했다.

멍하니 보고 있던 송태섭은 테라스에 앉아 있던 정대만과 눈이 마주쳤다. 대만이 입 모양으로 말을 건다. 뭐해. 안 들어오고. 어기적어기적 움직이지 않는 발을 움직여 카페 문을 열었다. 어서 오세요. 점원의 상냥한 목소리에 태섭이 고개를 살짝 숙였다. 테라스에 일행이 있다고 하니 곧장 손가락으로 가리킨다. 테라스는 저 문으로 나가시면 돼요. 주문은 카운터에서 도와드릴게요. 명랑한 목소리에 정신이 좀 돌아오는 것 같았다.

휘둘리지 않으려면 정신 똑바로 차려야지. 송태섭은 정대만이 앉아있는 테이블로 걸어가 어깨에 메고 온 가방을 빈 의자에 내려놓았다.


"오늘 선배 병원 예약일 아니에요?"

"그걸 어떻게 알아? 안 그래도 다녀오는 길이야."

"매월 25일이잖아요. 전에 퇴원 수속할 때 들었으니까."


눈이 동그래진 정대만이 웃기다. 송태섭은 그의 앞에 놓인 커피를 보았다. 블랙커피에 각설탕 반개. 그래도 귀신같이 입맛은 잘 찾아 먹는단 말이지.


"커피 주문 좀 하고 올게요."


정대만이 벌떡 일어섰다.


"아니지. 커피는 내가 살게. 뭐 마실래?"


꼭 이런 데서 선배인 척을 한다. 송태섭이 무뚝뚝한 얼굴로 대꾸했다.


"됐어요."

"씁."


말 좀 들어라. 정대만은 송태섭의 이마를 손바닥으로 툭 밀고 스쳐 지나갔다. 내가 뭐 좋아하는지도 모르면서 이미 계산대 앞으로 걸어가고 있다. 기운이 빠져서 송태섭은 그냥 자리에 앉았다. 이상한 일이다. 송태섭은 누구에게든 약한 사람이 아닌데 정대만 앞에서는 그렇게 태어나기라도 한 것처럼 흐물흐물해진다.

주문을 하고 돌아오는 정대만의 손엔 카페에서 직접 만든 수제 쿠키가 있다.


"..."

"너 커피는 쓴 거만 마시면서 단 거 엄청 좋아하더라."


그걸 당신이 어떻게 알아요. 하고 물었더니 어이없는 표정을 한다. 우리 그래도 한 달 넘게 같이 살았거든. 먹고, 자고, 씻고. 매일 얼굴 마주 보고 살았다고.

송태섭은 또 똑같은 실수를 반복하고 있다는 걸 깨달았다.


*


애써 무시하려고 해봐도 정대만은 기억을 잃어도 정대만이고, 송태섭이 사랑했던 모습 그대로의 사람이라는 걸 알게 된다. 다만 그의 인생에서 나만 빠져있을 뿐이라는 걸 알게 되면 비참해진다.

정대만의 명. 송준섭의 명. 송태섭의 명. 명이라는 건 얄궂다. 송태섭은 명줄이 질겼다. 오토바이 사고로 한 번, 미국에서 서핑을 하다가 파도에 휩쓸려 한 번, 미국에서 홈스테이를 하던 당시 차고에서 폭발 사고가 나서 집이 타버린 적도 있었다. 모두가 입을 모아 송태섭에게 ‘기적이다’ ‘신이 살렸다’라며 위로를 건넸다. 그 운은 송태섭 한정인지, 다른 사람들보다 유독 주변에 명 짧은 사람이 많았다. 미국에 있을 때도 친구들 중 한 명은 병으로, 한 명은 사고로 떠나보냈다. 그 중 한 명은 태섭과 신입생 때 룸메이트를 했던 친구였다.

죽음의 문턱에서 살아 돌아온 정대만은 어쩐지 더 제멋대로여서 무슨 짓을 할 지 예측하기가 어려웠다. 송태섭이 지금의 정대만을 만나고 싶지 않은 이유였다. 예측할 수 없는 정대만이라니 뭐야 그게.

그 묘한 불쾌감은 결국 송태섭의 문제였다. 정대만은 자신의 밑바닥이든, 어떤 생각이라도 송태섭에게 노출하는 걸 꺼려하는 사람이 아니었다. 그건 솔직한 것과는 조금 다르다.


“왜 그랬는지는 안 물어볼게요.”

“왜?”

“내가 한 짓이 쪽팔리니까.”


사람에게는 다 까발리고 싶지 않은 무의식이라는 게 존재하거든요. 선배는 아닐지 몰라도. 송태섭은 쿠키 봉지를 두 손으로 잡고 부스럭 거렸다. 대만은 빳빳하던 포장지가 흐물해질때까지 부스럭거리던 송태섭의 손목을 붙잡았다.


“모르는 사이로 살고 싶은 거냐?”

“네.”


1초의 망설임도 없이 대답하는 송태섭에게 분노가 끓었다.


“내가 그러기 싫으면?”

“그게 저랑 무슨 상관인데요.”


저랑 선배랑은요. 송태섭이 손가락으로 유리창 바깥의 사람들을 가리켰다. 사실 저기 지나가는 사람들이랑 비슷한 관계에요. 어쩌다 보니 한 달 같이 살게 되면서 사람이니까 정이 붙을 수도 있겠지만, 사실은 서로의 시간을 단 한 순간도 차지한 적이 없는 그런 사이라고요.

정대만은 고개를 돌려 지나가는 사람들을 바라보았다. 송태섭의 말은 틀리지 않았다. 둘은 기억 속에서 처음 만나는 사이였다. 하지만 한 시간이든, 일주일이든, 한 달이든. 시간의 단위는 중요하지 않았다. 기억을 잃은 이후로도 삶은 계속되고 시간은 흘러간다. 그 이후의 시간과 송태섭은 지금의 정대만에게 켜켜이 쌓여가고 있었다. 그런 송태섭에게 마음이 가는 걸 막을 이유는 없었다. 정대만이라서 안된다고? 그런 게 어딨어. 송태섭을 가장 공략하기 쉬운 약점도 정대만이라는 걸 아는데.

정대만은 표정을 숨기는 데에 능숙하지 못한 사람이다. 송태섭은 맞은 편에 앉아 끓어오르는 분노를 삼키려 노력하는 얼굴을 보았다. 좋지 않은 예감이 들었다. 점차 일그러지는 얼굴을 보다 송태섭이 먼저 손을 뻗어 테이블 위에 올려진 대만의 손을 툭. 쳤다.


“뭐가 그렇게 진지해요.”

“너야말로 도망치지 마.”


현실을 똑바로 직시하고 받아들이라고. 의사와 같은 말을 한다. 송태섭은 한숨을 쉬고 고개를 들었다. 정대만은 뭐에 한번 꽂히면 집요한 구석이 있다. 천장에는 지금 분위기와 어울리지 않는 샹들리에가 투명하게 반짝이고 있었다.


“우스워요?”

“...”

“남자 좋아하는 게 재밌어서 그런가? 남자가 그쪽 좋다고 목이라도 맬 거 같으니까 재밌어요?”


때마침 점원이 들어와 태섭의 앞에 커피를 내려놓았다. 듣고 싶지 않아도 들렸을 마지막 말에 팔 동작이 뻣뻣해지는 게 느껴졌다. 당사자인 송태섭은 되려 점원에게서 잔을 받아서 들고 평온하게 눈인사를 건넸다. 직원은 어색한 얼굴로 웃으며 테라스 문을 꽉 닫고 나간다.

송태섭의 얼굴에서 다시 웃음기가 사라졌다. 거봐요. 쪽팔리죠? 이런 거에 익숙한 사람 아니잖아.

정대만은 그제야 송태섭이 무슨 말을 하고 싶은지 알아챘다. 관심이 뭐든 저에게 아무런 감정 갖지 말라는 경고였다. 분명하게 선을 긋는 태도였다. 그건 좀 억울했다. 송태섭에게 손을 댄 것에 호기심이 없었다고는 말할 수 없다. 하지만 호기심만으로 누군가와 섹스를 할 나이는 이미 지났다. 그것도 모르는 사이 하룻밤이면 모를까 계속 보고 살아야 하는, 아니, 계속 보고 싶은 상대와는 더더욱.


“다시 묻는다. 나랑 모르는 사이로 살고 싶어?”


망설임 없이 고개를 끄덕인다. 병원에서 퇴원한 지 얼마 되지 않았을 때도 대만은 비슷한 말을 했었다. 그때도 송태섭은 그렇게 하라고 했었다. 한 번도 송태섭의 대답은 달라진 적이 없었다. 정대만의 마음이 변했을 뿐이다. 귀찮은 일에 휘말리고 싶지 않던 마음이, 어떻게든 송태섭이 잘라내려고 하는 인연의 끈을 이어 붙이고 싶은 쪽으로.

시선을 아래로 내리면 송태섭의 손에 들려 있던 쿠키는 형체를 알지 못하게 가루가 되어 있다. 으스러진 입자들이 포장지 안에서 굴러다닌다.


“송태섭. 솔직하게 말해.”

“...”

“이럴 거면 차라리 죽었으면 했다고.”


송태섭에게 어떤 대답이 듣고 싶었던 걸까. 아니라고, 나는 당신이 그래도 살아줘서 고맙다고. 그런 말은 하지 말라고. 정대만B도 내게는 중요하다고. 기대했던 말은 들려오지 않았다. 

녀석은 천천히 몸을 웅크렸다. 고개를 숙인 태섭의 입가가 살짝 떨리는 것도 같았다. 양손에 얼굴을 묻고 숨을 내쉰다. 혹시나 싶어 손바닥 틈으로 보이는 눈가에 집중했으나 얼굴은 건조했고 표정은 담담했다. 가요. 아주 작은 목소리가 정대만을 내쫓는다. 제발 그냥 가요.


“충분히 아픈 말이었어요. 내가 졌어요”


맞는 말이라서 아팠던 걸까? 정대만은 자리에서 일어나 웅크려 있는 송태섭을 내려다보았다. 기억을 잃은 뒤 미지의 세계가 하나 생겼다. 송태섭이라는 이름의 낯설고 알 수 없는 공간에 자주 들어가게 됐다. 

좋아한다는 달콤한 말은 어울리지 않는다. 그래도 정대만은 다친 송태섭을 어르고 달래주고 싶긴 했다. 그러다 마음에 들지 않으면 준비된 칼로 죽지 않을 만큼 찌른다.


“참 잔인하다.”

“...”

“네 말대로 너랑 과거의 내가 인연이 아니었을 수도 있지… 그렇지만 지금 이 시간은 너랑 내 거잖아?”


네가 아까 말했던 아무것도 아닌 우리 사이의 일. 이겨도 이긴 것 같지 않은 찝찝한 기분으로 정대만이 먼저 테라스를 나섰다. 울 것 같은 얼굴이길래 놔두고 올 수밖에 없었다. 애써 고통을 참는 얼굴에 이달재의 목소리가 겹친다. 태섭이는 강해요. 전에는 공감하지 못했지만, 이쯤 되니 그 말이 맞는 것도 같다. 작정하고 찔러대도 끝까지 무너지지 않으려는 독종이다.




꿈과 사랑 




얼마 뒤 송태섭은 복학계를 냈다. 고작 한 학기를 휴학한 것이었지만 감당해야 하는 건 산처럼 쌓여 있었다. 농구부 감독은 태섭에게 주전 자리는 줄 수 없다 딱 잘라 말했다. 개인 건강 관리도 선수의 평가 영역이다. 미국에 있을 때도 늘 듣던 이야기였기에 태섭은 그냥 공손히 손을 모으고 고개를 숙일 뿐이었다. 그런 태섭이 답답했는지 감독이 한숨을 쉬었다. 뭐 변명이라도 해.


"전부 맞는 말씀인데요."

"프로 안 갈 거야?"


송태섭이 미국에 있을 때는 프로 리그라는 게 너무나 멀게 느껴졌다. NCAA 지역 대표로 올라가는 게 가장 큰 목표이자 염원인 학교에서 4년을 조금 넘게 지냈다. 거기서 다시 보게 된 정우성조차 NBA의 벽은 높았는지 졸업 때까지는 스카우트를 받지 못했다. 너는 뭐 할 거냐. 정우성에게 물었을 때 우성은 글쎄? 하고는 또 가볍게 땅을 박차올랐다. 깔끔한 플로터 슛이 들어간다. 생각 없이 살기로는 송태섭도 어디 가서 지지 않는 편인데, 정우성은 더하다. 의식적으로 생각을 차단하려 하는 송태섭과는 달리 정말로 산뜻하게 다른 방법은 생각하지 않는 듯했다.

그런 녀석이기 때문일까, 졸업과 동시에 콜업을 받고 정우성은 더 높고 먼 곳으로 향했다. 송태섭은 순수하게 기뻤다. 국내로 돌아왔더니 다행스럽게도 대학 리그부터 다시 시작할 방법이 있다고 했다. 추천을 받아 입시 하나 치르지 않고 팀에 들어갔고, 미국 유학파라는 이유로 껄끄러워하는 팀원들과 자연스레 섞이기까지 반년이 걸렸다.

반년. 아마 고등학생 때의 송태섭이었다면 한 달이면 끝났을 일이다. 미국에 가면서 성격이 좀 변하긴 한 모양이었다. 사람을 대하는 게 가장 쉬운 일이라고 생각했는데 그것도 성인이 된 이후에는 달라지는 모양이다.


"프로요..."

"너 이미 구단에서 스카웃도 들어왔잖아?"


태섭이 멋쩍은 얼굴을 했다. 들어왔었죠. 지금은 아니고.

스카우터가 찾아온 건 대만이 병원에 입원해 있던 무렵이었다. 대학 리그 선수들 중 모두가 프로 리그에 갈 수 있는 건 아니었다. 프로 리그가 생긴 것도 태섭이 미국에 간 이후이니 이제 막 시작하는 단계였다. 평균적으로 대학 농구부 선수들 세 명 중 한 명, 그마저도 일 년 계약 후 제대로 뛸 것 같지 않다 싶으면 방출되기도 하는 냉정한 세계다.

구단 스카우트는 태섭을 찾아와서는 계획이 있냐고 물었다. 다시 미국에 돌아간다거나 그럴 생각도 있냐고. 미국 농구에도 마이너리그는 존재했으니 가려면 노력할 수는 있었다. 그러나 태섭은 돌아간다는 생각은 해보지 않았다.

돌아간다는 말이 신기하게 들렸다. 미국은 돌아가고 싶다고 갈 수 있는 곳이 아니다. 4년을 지내도 늘 어제 온 것처럼 새로웠고 매해 추수감사절을 보낼 때면 미국에 온 지 얼마나 됐는지 곱씹게 된다.


"우리는 득점력이 있는 포인트가드가 필요하고, 송태섭은 그걸 가졌고."

"..."

"최근 경기로 볼 때 돌파 이후 속공에서 직접 슛 메이드 처리한 게 30퍼센트, 야투율이 39퍼센트. 나쁘지 않아."



삼점 슛은 아직 부족하지만. 칭찬에 덧붙여 부족한 점을 세세하게 꼬집어준 스카우터가 더 물어볼 것이 있냐고 물었다. 기대하는 눈빛이기도 했다. 보통 대학 선수를 찾아오는 스카우트들은 콧대가 높기 마련이다. 데려가 주기를 오매불망 기다려야 하는 선수들의 입장이 갑을병정으로 따지면 정 쯤 되니 그럴 수밖에 없다. 다른 때였다면 스카우터가 원하는 질문들을 던져줬을 것이다. 그러나 지금 태섭에게는 가야 할 곳이 있었다. 앞으로의 미래와 지금 당장 달려가야 하는 곳.

정대만이 있는 곳으로.

그 두 가지의 무게를 저울에 올려 두어야 한다는 생각은 하지 못했다. 정대만이 멀쩡했더라면 3일 밤낮을 욕을 먹었을 일이다. 사랑과 꿈, 순간의 감정과 송태섭의 자리. 하지만 송태섭에게는 언제나 순간이 더 가깝게 느껴졌다. 그렇게 태어난 걸 하루아침에 바꿀 수는 없다.

급하게 가봐야 할 곳이 있다는 말에 스카우터는 눈에 띄게 실망한 얼굴을 했다. 그의 명함도 받지 못한 채 태섭은 버스를 탔다. 매일같이 타는 17번 버스를 타고 병원으로 향하는 동안 태섭은 대만에게 꾸중을 듣는 상상을 했다.


고작 이런 일로 스스로 기회를 차버리는 그런 짓은 하지 마라. 난 그렇게 시시한 녀석 좋아한 적 없어. 


태섭이 미국에 가기 전 이미 한번 들어봤던 말이라 목소리를 상상하는 건 어렵지 않았다. 그때 처음으로 아무에게도 말하지 못할 비겁한 생각을 했다. 미국에 가는 게 정대만이 아니라 송태섭이라 차라리 다행이라고, 뒤도 돌아보지 않고 농구를 택할 사람일 거라는 걸 알기에. 다른 거에는 물러터졌으면서 이런 데에서는 양보가 없다.

감독은 더 묻지 않았다. 일단 체력 테스트부터 받고 연습 합류해. 턱짓으로 옆을 가리킨다. 태섭은 옙. 배에 힘을 주고 대답한 뒤 구석에 가서 스트레칭을 했다. 몸무게는 이전으로 회복했다. 살이 잘 붙지 않는 타입이라 고생 좀 했다.


*


고등학생 때는 40분 풀코트를 뛰어도 문제 없던 강철 체력의 소유자였다. 미국에서도 그게 가장 큰 장점으로 꼽혔던 태섭이기에 잠깐 쉬었다고 해서 완전히 몸이 망가진 건 아니었다. 이전 기록에 아슬아슬하게 도달한 태섭이 흘러내리는 땀을 닦아냈다. 역시 몸 움직이는 것만큼 좋은 게 없다. 옆에서 이온 음료를 건네는 건 태섭 대신 주전으로 뛰게 된 한 학년 후배 강윤민이었다.


"고맙다."

"...괜찮아요?"

"뭐가?"


무슨 말을 하고 싶은지는 알겠지만 모르는 척 웃었다. 태섭과 나이 차이가 4살, 많다고 해야 할지 적다고 해야 할지 모르겠지만 태섭은 그 우물쭈물하는 모습이 귀여워 그냥 웃고 말았다. 같은 포지션끼리 경쟁구도를 갖는 건 당연하다. 당장 하루만으로도 컨디션이 좋지 않으면 스타팅에서 떨어지는 일이 비일비재하다. 다만 국내 리그는 보통 선후배끼리의 위계질서가 빡빡하다 보니 보통은 높은 학년이 주전을 다는 게 당연한 분위기였다.


"윤민아. 잘해. 잘하고 싶잖아."


격려의 말에 후배가 그제야 편하게 웃었다.


"그럼 연습 잘 하고. 먼저 간다."

"아직도 거기 가요?"

"어디? 병원?"

"아뇨. 그 전에 가던 곳..."


거길 네가 어떻게 알아? 태섭의 눈이 동그래졌다. 후배는 어깨를 으쓱했다. 그거 모르는 사람 우리 팀에 아무도 없을 걸요.


"수겸 선배님이 선배 없는 동안 저희 데리고 종종 갔었어요."


김수겸 선배가...? 송태섭은 잠시 미간을 찌푸렸다. 올해 프로팀에 입단한 김수겸은 작년까지 같은 대학의 같은 포지션이라는 이유로 훈련 메뉴를 함께 소화했던 사이였다. 당연하게도 주장을 달고 있던 수겸이었기에 다른 팀메이트들보다는 교류가 많은 편이었지만, 그가 프로에 간 이후로는 따로 연락을 하고 지내지 않았기에 여기서 갑자기 수겸의 이름이 튀어나오는 게 이상했다.


"선배는 보기랑은 다르게 진짜 좋은 사람이에요."


윤민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말에 뼈가 있다?"

"그래서 솔직히 지금 자리 불편해요. 정정당당하게 붙어서 주전 따내고 싶어요."


풀 죽은 후배의 어깨를 두들겨 준 태섭은 체육관을 나왔다. 오늘 저녁에는 김수겸 선배에게 연락을 해볼까. 하고 주머니에 손을 넣으며 버스 정류장으로 향했다. 병원으로 가는 버스는 17번, 그리고 지금 태섭이 가려는 곳은 4번 버스를 타면 한 번에 갈 수 있었다. 안내판에 적힌 '정동 중학교' 라는 글자를 다시 한번 확인한 태섭이 손목시계를 내려다 보았다. 오후 세 시 반. 아직 시간은 넉넉하다.

빵-

클락션 소리에 고개를 돌리면 버스 정류장에서 떨어진 곳에 흰색 승용차 한 대가 세워져 있다. 익숙한 모델에 눈을 가늘게 뜨고 차 번호를 확인하기도 전에 운전석 쪽 문이 열렸다.


"송태섭!"


검정색 반코트를 입은 정대만이 손을 흔든다. 송태섭은 대꾸하지 않고 고개를 돌렸다. 얽히지 말자는 태도에 정대만이 큰 목소리로 외쳤다.


"남자가 너 좋다고 따라다니는 게 싫어? 태섭아?"


와, 미친. 송태섭이 육성으로 욕을 뱉는데 주변의 시선이 태섭에게 꽂혔다. 태섭의 학교는 농구로 유명하다. 대학 리그전이 개막하면 학교 전체가 축제 분위기였다. 물론 농구부 주전인 송태섭도 교내 유명 인사였다.


"밥만 좀 같이 먹자고 태섭아! 다른 거 안 바랄게!"


송태섭의 얼굴이 시뻘겋게 달아올랐다. 저 인간은 어떻게 처음 만났을 때부터 지금까지 저렇게 제멋대로일 수가 있을까. 정대만의 뇌를 해부해보고 싶을 정도다.


"시끄러워요!"


송태섭이 버럭 소리를 지르자 사람들이 더 크게 웅성거리기 시작했다. 진짠가 봐. 맞지? 생체과 송태섭. 저 남자는 누군데? 어, 어디서 많이 봤는데. 송태섭은 사람들이 정대만을 알아보기 전에 다급하게 뛰었다. 생글 웃고 있는 얼굴에 주먹이라도 날려 주고 싶었다.


"머리 집어 넣어."

"왜?"

"진짜 미쳤나... 왜 이래요?"


정대만이 차에 상체를 기대고 웃었다. 그래. 미쳤지. 송태섭 네가 바라는 거 같아서 그렇게 해봤다.


"일단 차에 타. 안 잡아 먹는다."

"나 지금 가야 할 곳 있어요."

"그럼 거기로 가."


정대만이 운전석 문을 열며 턱짓을 했다. 송태섭도 자연스럽게 조수석에 올라탔다. 버릇처럼 열어 손을 집어 넣은 글로브박스에는 콘돔이 그대로였다. 손에 만져지는 종이상자에 피식 웃음이 났다. 정대만은 안전벨트를 매다 말고 왜? 하고 물었다.


"나랑 자고 싶은 거면 난 좋아요."

"뭐가 좋은데?"

"지금 여기서도 오케이인데요. 그쪽만 괜찮다면."


말이 끝나자마자 정대만의 팔이 송태섭을 향해 덮쳐왔다. 처분을 기다리듯 눈을 감자 빠각. 돌 얻어맞는 소리가 태섭의 이마에서 났다. 악. 짧은 신음성과 함께 태섭이 몸을 웅크렸다. 정대만이 허공에 몇 번 더 손가락을 튕긴다. 농구 선수가 딱콩하는 건 무슨 무슨 법에 위배되는 거 같은데요. 태섭이 불만스럽게 중얼거렸다.


"미안하다고."

"때려놓고 사과하면 다인가."

"그거 말고. 정신 없는 너한테 손댄 거 반성하고 있어. 오늘은 그냥 얼굴 보자고 온 거야."


방금 전에 미친 짓 한 건 내가 그냥 그런 호기심으로 너한테 손댄 거 아니라는 거 보여준 거고. 알겠어? 송태섭이 이마를 문지르며 말했다.


"그건 그쪽 감정이지 내 감정 아니잖아요."

"..."

"정대만 때문에 내가 어디까지 끌려다녀야 만족하겠어요."


정대만 정대만 정대만. 이제 진짜 지겹다. 송태섭이 조수석 창문에 머리를 박았다. 차에서 내리기에도 이미 늦었다.


"너 짚신도 짝이 있다는 말 알아?"

"네. 알죠."


또 헛소리한다는 얼굴로 송태섭이 앞을 바라보았다.


"나한테서 네 기억이 없어지고 나니까..."


정대만은 아까 전 학교 앞에서 고래고래 소리를 지를 때보다 지금이 더 창피했다.


"뭔가 잘못된 거 같다는 생각만 들어. 다 멀쩡하게 돌아가고 있는데도 한 곳이 뻥 뚫린 것처럼 초라해."


너한테만 내가 소중한 게 아니라, 나한테도 네 기억은 소중하다고. 그동안 정리되지 않던 마음이 말로 내뱉고 나서야 정확해지는 것 같았다. 그래. 송태섭이라는 미지의 세계는 열어보지 않는다고 해서 해결되는 것이 아니었다.

산 하나를 통과하는 긴 터널을 지나는 동안 송태섭은 정대만의 마음에 대답하지 않았다. 터널 안 조명이 물결치듯 송태섭과 정대만의 얼굴을 지나갔다. 한 번도 생각해본 적 없던 경우의 수를 생각하게 된다. 송태섭이 정말로 버리려고 할까. 정대만을.


"선배. 저 정동 중학교로 갈 건데요. 길 알아요?"

"...어?"


애들이 선배 보면 좋아할 거 같은데. 삼점슛 실력 좀 봅시다. 정대만은 터널을 빠져나오자마자 핸들을 돌렸다. 야. 아까 말하지. 다시 돌아가야 하잖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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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세요. 이런 이야기라도 기다려 주셨을까요... 

대태온에 회지를 내야 한다는 생각에 열심히 쓰고 있지만 쓰는 내내 이게 맞는지 고민이 되는 글이기도 합니다 ^_ㅜ 그래도 다음 이야기부터는 창문 활짝 열고 환기가 좀 될 예정이니 나머지 원고는 회지에서 봐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아래는 인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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