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휴짤대 

#16 (完) 

w.데자와 



본부장실의 블라인드는 요즘 항상 누워있다.



N인터네셔널 본사 건물 1층에는 카페가 입점해있다. 카페의 주 출입구는 두 개로, 하나는 건물 바깥으로 나있고 나머지 하나는 로비를 통해 실내에서 바로 연결되는 문이다. 말인즉슨 이 카페 매출의 대부분이 N인터 직원들로부터 나온다는 것이다. 실제로 출근 시간 직전, 점심 시간 후반부, 오후 서너시쯤의 집중력 저하 타임에는 네이비 컬러의 사원증을 건 N인터 직원들이 포스 앞에 길다랗게 줄을 서있고, 가끔은 매장 내 모든 좌석이 직원들로만 가득차 있기도 하다. N인터에 입사하고 싶은데 어떤 팀이 헬이고 어떤 팀이 그나마 괜찮은지 궁금하다고? 12시 반에서 1시 사이에 이 카페에 앉아 옆 테이블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이면 된다. 사내 정치, 사내 연애, 그리고 사내 연예까지, 온갖 다채로운 정보를 접할 수 있을 것이다. 사내 연애는 알겠는데, 사내 연예는 또 뭐냐고? 


"어제 강본부장님 코트 봤어?"

"봤지, 봤지! 세상에 어떻게 그런 디자인을 소화해내실 수가 있냐."

"엘베 앞 걸어가시는데, 회사 복도가 아니라 런웨이인 줄. 오트쿠튀르가 따로 없어." 


대충 이런 거다. 이렇듯, 사내 연예인들 중 넘버원은 단연코 강다니엘 본부장이지만 그를 필두로 한 신규사업본부 직원들도 '신규 사단'이라는 이름으로 자주 소환되는 편이다. 옹성우 팀장, 기획관리팀의 얼굴이었다가 몇 년 전 신규로 뽑혀간 황민현 책임, 모델 핏으로 유명한 신규지원팀 권현빈 대리 등. 그리고 최근 주가가 급상승한 에이스가 있었으니. 


"맞다. 어제 박지훈 대리 너네 팀 갔었다며?"

"아. 응! 작년 대금 지급 문제 때문에 왔었는데.. 나 기절할 뻔 했잖아."

"왜? 왜?"

"누가 파티션을 톡톡 쳐서 돌아봤더니, 그 박대리가 바로 옆에 서있는 거야."

"와. 김미정 계탔네."

"유과장님 안 계시냐고 물어보는데.. 나 순간 대답도 못하고 입만 뻥긋거렸잖아."

"가까이서 영접하면 어떤데?"

"존예. 대존예. 그에 비하면 내 얼굴은 얼굴도 아냐. 낯짝! 면상! 그냥 눈코입 붙어있는 평지!" 


입사 때부터 유명했던 박지훈 대리는 사보를 찍으면서 그룹 차원의 관심을 모았다. 루머로 판정난 블라인드 사건도 이제 와선 그의 비범함을 드러내는 에피소드 중 하나가 되었다. 문제의 게시물이 삭제된 후 <일반인한테 파파라치 붙은 건 난생 처음 봤음> 이라는 제목으로 올라온 파생글에는 '저도 이게 무슨 일인가 했는데 얼굴 보니까 이해 되더라구요.' '어렸을 때부터 똥파리 많이 붙었을 것 같아요.' 라는 댓글이 이어지며 문제의 몰카에 있어서만큼은 톡으로 알음알음 주고받던 소비도 지양하자는 합의까지 이루어졌다. 


한편, 가고싶은 부서 탑 쓰리 안에 꾸준히 들던 신규사업팀은 2018년 맞이 비공식 설문조사에서 결국 1위를 차지하고야 말았다. 지원자가 아무리 많아도 아무나 받아주지 않는 까다로운 본부장 탓에 항상 인력 부족과 극악의 업무 강도에 허덕이는 팀이지만, 최근에는 수당 없는 야근도 괜찮으니 제발 그 팀에 가고 싶다고 울어대는 여성 직원들이 한 트럭이었다. 


"야! 미정아! 저기 봐봐."

"뭐? 어디?"

"저기 밖에. 빨리!"


1층 카페의 창 밖, 그러니까 회사 바로 앞 보도에 방금 전 언급되었던 화제의 인물 두 명이 지나가고 있었다. 점심을 함께 먹었던 듯 상가 밀집 지역에서 회사 쪽으로 걸어오고 있는 둘은 본부장과 대리라는 멀고 먼 직급 차이에도 불구하고 마치 평범한 형 동생 사이처럼 친해보였다. 잘생긴 애 옆에 잘생긴 애야! 어흐흑. 입사 동기인 재무팀 김미정 대리와 B2B영업팀 신수지 대리는 각자 입을 틀어막으며 소리 없는 아우성을 질렀다. 이런 그녀들의 존재를 아는지 모르는지, 박지훈 대리는 채찍을 휘두르는 듯한 동작을 하며 연신 뽀짝거렸고 강본부장은 그 넓은 어깨를 들썩이며 빵빵 터졌다. 올 겨울 들어 제일 추운 날이라는데, 저기만 봐서는 벚꽃 날리는 4월의 한낮이다. 두터운 아우터와, 찬바람에 볼이 트다 못해 귀까지 벌개진 그들의 얼굴이 지금이 한겨울 임을 알려주는 그나마의 표식이었다. 


"헐?"

"옴마나."


두 여자는 동시에 눈을 비비며 창가에 한층 더 가까이 붙었다. 아이섀도우가 손가락에 묻어났지만 지금 화장이 무너지는 걸 신경쓸 게 아니었다.


"방금.. 봤어?"

"어.. 너도 본 거지?"

"나 저거 본 적 있어."

"나도.. 시상식에서..."


그녀들이 본 장면은 이랬다. 채찍인지 뭔지를 다 휘둘렀는지 박대리가 팔을 아래로 내리자 강본부장이 슬쩍 팔을 겹치며 깍지를 끼려고 했고, 박대리는 어색하게 웃으며 손을 뒤로 빼내었다. 지금은 부부가 된 안현재와 구선혜 커플이 비밀 연애 당시 보였던 바로 그 텐션. 미정과 수지는 얼떨떨한 표정으로 서로를 마주보았다가, 창밖을 다시 돌아보았다. 두 사내 연예인은 이미 카페 앞을 지나쳐 건물 입구 회전문에 들어서고 있었다. 


그리고 이 장면을 뒤에서 바라보고 있던 또다른 연예인들이 있었으니. 


"황책임도 방금 봤지..?"

"..네."

"쟤네.. 아, 아니. 본부장님이랑 지훈이. 자기들은 비밀 연애라고 믿고 있는 거 같지?"

"...네."

"쟤네를 어쩌면 좋냐."


창가 구석 자리를 파고 들었지만, 신규 사단답게 이 둘에게 붙은 눈들도 많았다. 우렁우렁한 목소리를 최대한 낮게 깔고도 불안했던 옹팀장이 황책임의 귓가에 입을 딱 붙인 채 얘길 하자 옆 테이블에서 꺅! 하이톤의 감탄사가 터졌다. 


"뭐. 저희가 어떻게 할 게 있나요." 

"그렇긴 한데... 아, 맞다. 황책임, 요새 강본이 맨날 하고 다니는 벨트 알지?"

"네. 가운데 큼직하게 H 박힌 그거요." 


옹팀장은 으으, 고개를 저으며 식은 아메리카노를 한 모금 들이켰다. 


"그거 강본 취향 아니어서 내가 물어봤거든. 그렇게 브랜드 대놓고 티 내는 거 별로라고 하지 않았냐고." 

"그렇죠. 본부장님 원래 브랜드 이름 박힌 제품 안 좋아하시잖아요." 

"그치. 아무 것도 안 쓰여있는데 나중에 보면 개인 디자이너 제품이고... 아무튼 그렇게 물어봤더니, 그거 브랜드 이름 아니라는 거야." 

"네? 그 벨트 누가 봐도.."

"맞아. 그거. 그래서 내가 KTX 타고 가다 봐도 이건 에르메슨데 뭔 소리냐고 물었지. 그랬더니.."


그랬더니요? 황책임이 귀를 좀 더 가까이 붙이며 뒷말을 기다렸다. 옆 테이블은 또 난리가 나더니 카메라 셔터음까지 터졌다. 


"선물해준 사람 이니셜이라는 거야."

"H.. 아......"

"그걸 황책임이 사줬을 리는 없잖아."

"제가 왜요. 그 돈이면 한 달 적금이에요." 

"알아. 그냥 해 본 소리야. 그 H가 누군지는 황책임도 알고 나도 알고 온세상이 다 알잖아." 

"온세상까지는 좀 과하구요."

"것참. 말이 그렇다고." 


보고 있는 것만으로도 눈이 맑아지고 시력이 상승한다는, 신규 사단의 '개안즈' 콤비가 만담을 나누는 동안 N인터 여성 직원들의 카톡이 바쁘게 울려댔다. 아무 생각 없이 화면을 열었다가 잇몸 미소가 피어난다. 카페 창가에 앉아 커피를 마시는 두 미남자의 사진에 오후의 혐생을 살아갈 힘을 얻는 그녀들이었다. 



*



"훈아아아아--"

"아, 안된다니까요." 

"딱 한 번만--"

"회사에서 이러지 않기로 했잖아요. 아까도 말이에요. 회사 앞에서 손 잡으려고 하고!" 

"그건.. 습관적으로... 아무튼, 아직 점심시간이니까 공식적으로 개인시간이잖아. 1시 되기 전에 딱 한 번만."


이 사람이 이런 캐릭터였나. 몇 달 전까지만 해도 카리스마 작렬에 귀신 같이 무섭던 본부장이었는데, 정신을 차리고보니 어느새 치대기 좋아하는 대형 멍멍이가 되어 있었다. 매번 자기 덩치도 잊고 한아름 앵겨오는 탓에 요즘 허리까지 뻐근할 지경이다. 물론 허리가 아픈 주요 원인은 따로 있긴 하지만.. 


"누가 보면 어떡해요."

"안 보이는 데서 하면 되지." 


나는 대환멸을 표정을 지으면서도 못 이기는 척 형이 이끄는 대로 따라갔다. 이제는 눈 감고도 들어갈 수 있을 것 같은 본부장 책상 아래. 그 어느 날의 밤처럼 나를 먼저 구겨넣고 뒤따라 움츠린 형의 어깨가 오늘도 수납되지 못한 채 밖으로 삐져 나갔다. 


"일하기 싫다."

"저두요."

"같이 오후 반차 쓸까?"

"반차 쓰고 뭐하시게요."

"데이트?"

"불량 본부장이네요." 

"부하 직원이 마음에 들었을 때부터 모범 상사는 포기했어." 


속닥거리다 말고 웃음이 새어나왔다. 진지하던 내가 웃음이 터진 것과는 반대로, 형은 웃음기를 지우고 진지해졌다. 일자로 웃고있던 눈이 날렵하게 뜨이고 눈썹이 치켜올라갔다. 다가오는 눈물점이 이곳이 어딘지를 잊게 할만큼 섹시하다. 부드럽게 맞물리는 입술 사이로 두툼한 혀가 익숙하게 치고 들어왔다. 앞니를 세워 혀끝을 살짝 물었다. 어디까지나 장난이었는데, 감고 있던 눈을 슬쩍 떠보니 형의 미간이 찌푸려져 있었다. 괜한 짓을 했다, 라고 후회하기가 무섭게 다정했던 침입자가 폭군으로 변했다. 뒷머리가 마호가니 원목에 부벼지고, 혀가 섞이는 소리가 책상 아래 좁은 공간을 가득 채웠다. 바지 안쪽으로 단정하게 들어가있던 내 셔츠가 끄집어내졌다. 아래에서부터 등을 더듬어 올라오는 손길에 낮은 신음을 흘리던 차였다. 


"본부장님!"


문이 확 열렸다. 나는 엉겁결에 형의 가슴팍을 밀어내며 숨을 멈추었다. 형 역시 긴장한 표정으로 몸을 더 움츠렸다. 그와중에도 타액으로 번질한 형의 입술에 시선이 가서, 입 안에 자꾸만 침이 고였다. 


"들어가시는 걸 분명히 봤는데..."


한참동안 문 앞에 서서 혼잣말을 중얼거리던 지원팀장님이 드디어 나갔다. 시계를 보니 어느새 점심시간이 끝나있었다. 비 맞은 강아지 표정으로 내 앞에 앉아있는 본부장을 냉정하게 밀어내었다. 


"훈아.." 

"1시 2분입니다. 본부장님." 


불만이 가득한 얼굴로 몸을 일으켜 세우더니 의자에 털썩 주저앉는 그의 앞섶이 불룩하다. 사실 나도 아까 살짝 서긴 했지만 지원팀장님의 난입으로 진화된지 오래인데. 저 사람은 아까부터 지속된 건지 방금 다시 선 건지. 뭐가 됐든 참 대단한 하체임에 틀림 없다. 


"입맛은 왜 다시나요, 박대리님."

"맛있어 보여서요. 본부장님."

"그럼 한번 드셔보세요."

"점심시간 이미 끝났는데요."

"알아요. 이건 본부장의 지시사항입니다, 박대리님."


어이가 없어서 피식 웃었을 뿐인데, 본부장은 의자 바퀴를 굴려 책상 앞으로 성큼 다가왔다. 수컷의 당당한 자신감이 코앞에 들이밀어졌다. 들킬지도 모른다는 두려움 반, 적절하지 못한 시간과 장소가 주는 묘한 스릴감 반. 전신을 휘감는 짜릿함 때문에 소름이 돋았다. 


"뭐하고 있어요. 명령 불복종입니까?"

"아뇨. 상사가 까라면 까야죠."


그리고나서 말 그대로 깠다. 내가 사준 벨트를 끄르고 바지 버클을 내리자 팽팽하게 긴장한 검은 드로즈가 나타났다. 아래에서 위 방향으로 느리게 훑어주자 허벅지 근육에 힘이 들어가는 게 느껴졌다. 두꺼운 재질의 겨울 수트 위로도 내비치는 근육의 결이 너무 아름다워 나도 모르게 손이 갔다. 양쪽 다리 안쪽을 손으로 단단히 잡고, 드로즈 위에 혀를 갖다대는 차에..


"본부장님!"


이번엔 우리 팀장님이 들어왔다. 동작을 멈춘 채 굳어버린 나는 눈만 치켜뜬 채 본부장의 눈치를 살폈다. 그는 잠시 나를 향해 눈짓을 하더니 팀장님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그런데 그의 언행이.. 내가 봐도 어색하기 짝이 없었다. 마치 로봇처럼 굳어서 "네. 옹.팀.장.님." 하고 스타카토로 끊어 말을 하는데, 우리 팀장님 정도의 눈치면 뭔가 이상하다는 걸 분명히 알아챘을 것이다. 


"지원팀장이 본부장님 찾던데. 여기 계셨네요."

"아. 네."

"방금 전까진 안 계셨는데 말이죠." 

"하하. 지원팀장이.. 잘 못 봤나 보네요."


저 어색한 웃음소리라니. 차라리 웃질 말지. 그런데 나도 팀장님한테서 옮은 건지, 궁지에 몰린 그를 보니 왠지 놀려주고 싶은 마음이 치솟았다. 이러면 안 되는데, 안 되는데.. 하면서도 드릉드릉 차오르는 장난기를 주체할 수 없었던 나는 결국 사고를 치고야 말았다. 


"그럼 지원팀장 들어오라고 해도 되겠습니까?"

"조금 있다..가!"


그저 드로즈 위로 뽀뽀를 했을 뿐인데 본부장은 말을 하다 말고 삑사리를 냈다. 살짝 줄어들었던 부피가 당장에 커지며 내 코에 와서 부딪치고, 잡혀있던 허벅지 근육이 단단하게 굳었다. 


"흠흠. 잠시 있다가 들어오라고 전해주세요."

"......네."


문으로 향해 가는 구둣발 소리가 들렸다. 팀장님 나가시고 지원팀장님 들어오기 전에 나가야지, 머릿속으로 이따 본부장실을 나갈 타이밍을 계산하고 있는데 발소리가 갑자기 뚝하고 멎었다. 


"강다니엘."

"..어?"


헐. 이게 뭔 일이야. 사무실 안에서는 칼 같이 상하관계 지키는 팀장님이 뜬금없이 본부장의 이름을 불렀다. 본부장 역시 놀랐는지 반 박자 느린 반응을 보였고, 그 긴장감이 맞닿은 피부를 타고 내게도 전해졌다. 


"너네.. 회사에선 적당히 해라." 


그 말을 끝으로 문이 여닫히고 잠시 정적이 흘렀다. 문 쪽을 보고있던 본부장의 시선이 천천히 아래로 떨어졌다. 


"방금.. '너네'라고 한 거 맞지?"

".....네."

"......"

"비밀연애.. 망했네요."

"그러게."


그런데 이상하게도 기분이 나쁘지만은 않았다. 심지어 본부장은 묘하게 업된 것 같아 보였다. 


"안되겠다."

"뭐가요?"

"양치하러 가자." 


얼굴이 확 달아올랐다. 내 팔을 잡아 끌며 책상 밖으로 일으켜 세우는 그의 손길이 성말랐다. 문 앞까지는 그렇게 팔이 잡힌 채로 끌려가다가, 급히 손을 뿌리치고 내 발로 문을 나섰다. 마침 본부장실을 향해 걸어오던 지원팀장님이 차례로 방에서 나오는 나와 본부장을 보며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본부장님. 언제 나갔다 들어오셨습니까..?"

"팀장님. 지금 바쁘니까 이따 얘기합시다."


그러고는 쌩하니 복도를 질러가는 그의 보폭이 평소보다도 넓었다. 가뜩이나 긴 다리로 저렇게 빨리 걸으면 어쩌라는 거야. 나는 지원팀장님께 목례를 하며 본부장의 뒤를 따랐다. 들썩이는 어깨가, 산책 나간다고 들뜬 대형견이 따로 없었다. 



*



관린이의 인턴십 기간이 끝났다. 타이밍을 맞추기라도 한듯, 관린이가 발굴하여 내가 발표하고 우리 팀이 달라붙었던 신규 프로젝트도 그 즈음에 완결되었다. 인감날인 찍고 교환까지 완료된 계약서를 영업팀에 전달했던 날, 팀장님이 우렁차게 외치셨다. 


"소고기 회식한다!"

"고기! 고기!" 

"한우! 한우!"


전진하는 스파르타 전사들처럼 고기와 한우를 외치며 울어대는 우리가 너무 시끄러웠는지, 본부장이 방 밖으로 고개를 내밀며 이게 무슨 일이냐고 물었다. 잽싸게 달려간 지원팀장님이 신규사업팀의 회식에 대해 고하자 본부장은 잠시 무언가를 생각하는 듯 하더니 신규팀과 지원팀, 파티션 가운데에 와서 섰다. 


"본부 전체 회식으로 잡고, 투뿔 갑시다." 

"와아! 본부장님 만세!" 


배불리 먹이는 것만큼 좋은 통치는 없다. 그는 그것을 잘 안다. 비단 회사에서 뿐만이 아니다. 연인으로서의 그 또한 나를 좀 더 못 먹여서 안달이다. 워낙 먹성이 좋은 나라서 평소엔 그가 주는 대로 잘도 받아먹었지만 며칠 전엔 충격을 좀 받았다. 엎드려서 그의 것을 받아내고 있는데 뱃살이 아주 약간.. 아래로 처지는 느낌이 드는 게 아닌가. 겨울이라 야외 활동이 뜸한 와중에 그와 맛집이란 맛집은 다 찾아다녔더니 살이 오른 게 분명했다. 


그래서 회식 때는 조금 자제했다. 물론 내 몫의 고기는 야무지게 다 챙겨먹었다. 등심 3인분 정도 먹었나? 막판에 식사를 시킬 때만 고개를 가로저었다. 냉면과 된장이 맛있어보였지만 맹물을 마시며 꾹 참아내었다. 


"지훈 대리 다이어트 해?"


대각선 자리의 이대리님이 냉면으로 둘둘 감싼 고기를 입에 넣으며 물었다.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빈 컵에 물을 한 잔 더 따랐다. 아. 맛있겠다. 자고로 식은 고기는 냉면에 감아서 먹는 게 제 맛이지. 


"박대리 다이어트 한다구요?"


본부장이 내 앞에 있던 현빈 대리님을 밀어내며 없는 자리를 굳이 비집고 앉았다. 아, 누구야. 난데없이 옆으로 밀린 현빈 대리님이 된장찌개를 먹다말고 옆을 쳐다봤다가 그대로 자리에서 일어나 다른 테이블로 이동했다. 마치 원래 자리를 바꾸려고 했다는 듯. 묘한 기시감이 드는데, 그냥 기분 탓이겠지? 


"다이어트, 왜 하는데요?"

"살이 쪄서요."

"하나도 안 쪘는데."

"쪘어요."

"안 쪘다니까요."


이러다 밤새겠다 싶었는지 이대리님이 어색하게 웃으며 끼어들었다. 


"원래 본인만 아는, 숨겨진 살이라는 게 있잖아요. 뱃살이라든지.." 

"그런 거 없던ㄷ--"

"본부장님, 이거 좀 드세요." 


아주 그냥, 엉덩이 밑살까지 다 본 사이라고 동네방네 광고를 하지 그러세요. 나는 살벌하게 웃으며 그의 입안에 처넣은 상추를 안으로 더 밀어넣었다. 내 텔레파시가 통했는지 그는 잠시 말을 멈춘 채 상추만 씹었다. 


"아무튼, 잘 먹는 게 제일 좋아요. 다이어트 같은 거 하지 마세요." 

"그래. 지훈 대리. 본부장님 말씀이 맞아. 살 하나도 안 쪄보여." 


옆 테이블 은정 책임님이 한 마디를 보태며 그쪽 불판에 남아있던 고기를 덜어주었다. 본부장은 잽싸게 상추에다가 그 고기 하나를 얹어서 내 입에다가 밀어넣어주었고, 이대리님은 후배 위로해주는 보기 좋은 광경이라며 옆에서 박수를 쳤다. 쌈을 우물거리며 후배 위로가 아니라 부하 위로라고 정정해드리자 본부장은 또 뭐에 자극받은 건지 혼자 빵터져서 웃고 난리가 났다. 


"형! 나랑도 건배해." 

"관린아. 일할 땐 대리님이라고 부르랬잖아."

"인턴, 아까 6시에 끝났어."

"이야, 역시 똑똑한 이관린." 


내가 감탄하는 사이 옆 자리 건희 선배가 다른 테이블로 옮겨갔고, 관린이가 그 자리에 앉았다. 지금까지 지원팀장님한테 잡혀있었던 관린이는 아무래도 좀 지쳐보였다. 중년의 꼰대 팀장님 상대하는 건 중국 재벌에게도 쉬운 일은 아니었나 보다. 관린이가 들고 온 빈 잔에 맥주를 따라주자 테이블 아래로 내 다리를 툭툭 치는 누군가의 발이 느껴졌다. 나는 짐짓 모른 체하며 끝까지 잔에서 시선을 떼지 않았다. 


"저도 한 잔 주세요. 박대리님."

"아유, 본부장님. 잔이 또 언제 비셨을까요." 


발 끝으로 톡톡 치다가, 발바닥으로 쓱쓱 밀었다가, 결국은 테이블 위로 잔을 내밀며 투정을 부리길래 못 이기는 척 시선을 주자 또 금세 밝아진다. 


"아까부터 비어있었는데 아무도 안 채워주시더라구요."

"헉. 죄송합니다! 본부장님!"


투정은 나에게 부렸는데 갑자기 이대리님이 고개를 푹 숙이며 사과를 했다. "아, 이대리. 괜찮아요. 누굴 탓하려고 한 말은 아니에요." 본부장은 난처한 표정을 지으며 내가 들고있는 맥주병을 건네 받았다. 이대리님은 또 깜짝 놀라더니 아직 반 이상 남은 제 잔을 한꺼번에 들이키곤, 본부장 앞으로 내밀었다. 


"관린이 그럼 이제 중국 돌아가는 거야?"

"아니. 아빠 회사, 한국에서 할 일 있다구. 좀 더 배우고 오래." 

"와, 그럼 좀 더 머무는 거야?"

"응. 형 우리 회사 올래? 월급 많이 줄게."


나는 장난스럽게 웃으며 "제안 감사드립니다" 하고 공손하게 인사를 했고 관린이도 그간 배운 비즈니스 화법을 구사하며 "검토 부탁드립니다."하고 받아쳤다. 그래봤자 장난이었는데 -- 왼쪽 뺨이 불에 타는 듯 하여 앞을 돌아보니 본부장이 사람 잡아먹을 것 같은 표정으로 나와 관린이를 쳐다보고 있었다. 


"라이관린씨, 인력 스카웃이 이렇게 공개적이어도 되는 겁니까. 그것도 상사 앞에서."

"몰래하는 것보다 나아요."


1:0 

라이관린 승. 가끔은 심플한 문장이 더 묵직할 때가 있다. 


"박지훈 대리 중국어 못합니다."

"알아요. 그런데 저희 회사, 한국에 오피스 있어요."


2:0

라이관린 승. 관린이가 말하는 오피스란 아마도 한국지사를 의미하는 것이겠지만 뭐, 의미만 통하면 됐지. 


"앗. 관린씨. 샹푸 한국지사 인력 뽑는 거에요? 저 지원해도 되나요?"

"아.."

"공개 채용이에요? 아니면 헤드 헌팅?"


이대리님의 눈치 없음 덕분에 살았다. 관린이가 이대리님에게 잡혀서 난처한 표정을 짓는 사이, 본부장이 핸드폰 액정을 마구 두들겼다. "살살 치세요. 엄지로 액정 부수시겠어요." 스카우트 받아서 한껏 건방져진 대리를 삼백안으로 째려본 본부장이 마지막으로 딱! 발송 버튼을 치고는 폰을 내려놓았다. 나는 그가 누구에게 메시지를 보내고 있는지 이왕에 눈치를 챘지만, 그리고 테이블 위에 올려둔 폰 화면이 밝아지는 것을 봤지만, 괜스레 딴청을 부리며 고기 한 점을 더 집었다. 


안타깝게도 뻗대기는 오래가지 못했다. 기껏해야 발바닥과 무릎을 찔러대던 본부장의 발이, 이번엔 길게 뻗어와 내 중심을 눌러대기 시작했기 때문이었다. 황당한 표정으로 그를 돌아보자 씨익 웃으며 턱짓을 한다. 어서 핸드폰을 확인하라는 의미이다. 그래, 상사가 까라면 까야지. 인턴십이 몇 시간 전에 종료된 관린이면 몰라도, 나에겐 이 회식도 업무의 연장선상이다. 


[오늘 외박한다고 집에 문자 보내놔]

[안 재울 거야]

[어차피 내일 토요일이니까]

[각오해]


말 잘 듣는 부하 박대리는 본부장이 시킨 대로 엄마에게 메시지를 전송한다. 


- 엄마. 나 회사 워크샵 때문에 일요일에 들어가요. 


아무렴, 상사의 요구사항을 미리 헤아리는 것도 사랑받는 비결이지. 




트위터 @tejava_milkt

데자와님의 창작활동을 응원하고 싶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