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

 

 

악역은 정해져 있지 않았다. 살아가다 보면 만나는 숱한 사람들 중 첫눈에 저 사람은 내 인생의 악한 부분을 담당해 줄 것이라는 생각을 하게 만드는 사람은 없었다. 어제까지는 괜찮은 것 같았던 사람이 오늘의 내게 비수를 꽂을 수도 있고, 내 등 뒤에서 나를 겨냥하고 있던 것이 사실은 총이 아니라 붉은 장미 꽃다발일 수도 있었다. 아무도 믿을 수 없고, 그렇다고 아무도 믿지 않을 수 없는 삶 속에서 누군가와 사랑을 한다는 건, 어쩌면 처음부터 너무나 어렵고 불가능 한 일 일지도 몰랐다. 이 사람이 내 인생의 악역이 될 것인지, 아님 내 손을 붙잡고 놓지 않을 사람이 될 수 있을지는 시간이 지나야 알 수 있는 것이었다. 그리고 시간이 흘러 그 사람이 나아 평생 함께 할 수 있는 사람이라는 결론이 나는 것은 참으로 운이 좋은 것이다. 운 좋은 사람이고 싶었다. 운이 좋은 사람이라서 이번에 만나는 사람만큼은 반드시 마지막이길 바랐다. 평생을 함께 하자는 현실 모르는 철없는 소리가 아니라, 마음 한 구석에 언제나 담아 놓을 수 있는 사람이길 바랐다. 잊어버리려고 애를 쓰고 떠올릴 때마다 괴로운 사람이 아니길 바랐다.

 

“표정 좀 풀지.”

“....”

 

그러나 나는 지독히도 보통의 사람이고, 세상에 떨어진 수많은 인간 중 하나일 뿐이라는 걸 알고 있었다. 그런 행운이 아무런 대가 없이 찾아오지는 않았다. 과장을 좀 보태 갈수록 최악을 경신 할 뿐, 나아짐이라곤 없었다. 예상을 했다 해도 얻어맞는 뒤통수는 얼얼할 수밖에 없었다. 그래도 한 때는 사랑했던 인간이 믿고 싶지 않을 정도로 최악일 때, 내 인생을 아무렇게나 망가뜨릴 것 같은 악역으로 변해 있었을 때, 나는 삶의 전체로 따지고 보면 얼마 되지도 않은 그 교제의 시간을 완전히 송두리째 불살라야 한다는 생각마저 들었다. 그것이 내 마지막 연애로 남겨두기엔, 내가 너무 불쌍했다.

 

“최민기씨.”

“실수하신 거예요.”

“내가요?”

“그럼 제가 했겠어요?”

 

그 불쌍한 인생은 나 하나로도 충분했다. 모르고 살아야 좋은 사람이었다. 엮이지 않는 것이 나를 위한 일이었다. 같은 공간에 있어도 모르고 살 수 있는 방법은 무궁무진했고, 지극히 사무적인 일 이외에는 그 어떤 모습으로 엮이지 않는 것이 더 자연스러웠다. 그런데 그걸 깨버렸다.

 

“나 잘못한 것 없는데.”

“그걸 지금 말이라고 해요?”

“말 아니고 소? 닭?”

“....”

 

진짜 화나려고 하는데요. 단호하게 터트리는 목소리에 빙긋 웃으며 알았다는 듯 슬쩍 상체를 뒤로 빼내는 곽아론을 빤하게 바라보던 나는 곧 긴 한숨을 내쉬며 입술을 질끈 깨물었다 놓았다. 갑작스러워 말릴 수가 없었다. 아니, 갑작스럽지 않았다고 해도 말릴 틈이 없었을지도 모른다. 무엇인가를 캐내기 위해 짐승처럼 으르렁 거리고 있는 녀석에게 너무나 순순히 제 살을 내어준 곽아론의 입에서 터진 말에 나는 그대로 온 몸이 굳어버렸다.

 

“화가 났다면 화를 내요.”

“.....”

“화내는 건 얼마든지 받아 줄 테니까.”

“.....”

 

하고 싶은 대로 하라고, 원하면 얼마든지 더 말해주겠다는 듯 서있는 곽아론을 빤히 바라보고 있던 나는 곧, 더 당황한 듯 먼저 자리를 뜨는 변만식의 뒷모습을 확인하고서야 긴 숨을 내뱉었다. 나 회의 가야해서. 그리고는 아무 일도 아니라는 듯 싱긋 웃으며 중얼거리는 곽아론을 나는 반사적으로 그대로 붙잡아 세웠다.

 

“대신 왜 화가 나는지는 말해줄래요?”

“....”

“그걸 알아야 나도 잘못했다고 할 것 같은데.”

“.....”

 

알아요, 나한테 하고 싶은 말 많은 거. 저를 붙잡아 세우는 나를 보며 곽아론은 예상했다는 듯 중얼거리고는 곧 손목에 차고 있는 시계를 한 번 힐끗거리며 다시 입을 열었다. 퇴근 같이 해요. 데려다 줄게.

 

“내가 변지석씨한테 게이라고 한 게 화가 난 거예요?”

“....”

“아니면, 당신 건드리지 말라고 해서?”

“....”

 

나도 듣고 싶은 말이 있거든, 당신한테. 그렇게 나를 두고 돌아서는 곽아론은 조금도 주저함이 없었다. 후회도, 아차하는 순간의 망설임도 없이 뚜벅뚜벅 곧은 걸음을 옮기는 모습을 나는 그저 바라만 보았다. 그때의 모습을 가만히 눈 앞에 그리며 곽아론의 말을 듣고 있던 나는 이내 천천히 고개를 돌려 핸들을 붙잡고 있는 곽아론에게 시선을 옮겼다.

 

“그게 아니면.”

“....”

“내가 변 대리랑 당신 사이에 끼어들어서 그래요?”

“본부장님.”

 

그게 무슨 소리냐는 듯 빤히 정면을 바라본 채 중얼거리는 곽아론의 말을 듣고 있던 내가 놀란 듯 눈을 크게 뜨자, 그와 동시에 곽아론의 고개가 나를 향해 돌아왔다. 어디 갈래요, 밥 먹을까. 묻는 곽아론에게 나는 아무런 대꾸도 하지 않았다. 그저 묵묵히 침묵으로 일관했다. 아무런 생각이 들지 않았다. 그 순간부터 나는 내내 한 가지 생각뿐이었다.

 

“우리는 아무 사이도 아닌데.”

“본부장님.”

“내가 두 사람 사이에 끼어들어서 그런거면..”

“야!”

“.....”

 

혹시 소문이라도 나면 어떡하지, 곽아론이 곤란해지면 어떡하지. 그 자식이라면 그러고도 남을 거라는 것을 모르지 않아서 도무지 안심을 할 수가 없었다. 떠오르는 걱정과 불안은 그렇게 모두 곽아론이라는 한 가지 지점을 향하고 있었다. 그래서 무슨 말도 하지 못하고 그저 입을 다물고 있던 나는 되도 않는 말을 지껄이는 얼굴에 결국 내내 나를 휘감고 있던 불안이 모양을 바꾸어 터져버렸다.

 

“그걸 지금 말이라고 해? 나랑 장난 하냐고!”

“....”

“내가 그 새끼 때문에 얼마나 힘들었는지 알면서 그걸 지금!”

“....”

“어떻게 그렇게 생각을 해!”

“.....”

 

그렇다고 설마 그런 말을 아무렇지 않게 퍼트릴까 싶기도 했지만, 내 마지막 연애의 상대는 내가 상상하는 것 이상으로 바닥인 인간이라는 걸 나는 모르지 않았다. 아무리 그래도, 라는 생각을 하다가도 결국은 불안해졌다. 얼마든지, 더 최악을 보여 줄 수도 있는 인간이라서.

 

“장난이라도 그럼 안됐잖아요.”

“....”

“그 새끼한테 장난으로라도 그런 말 하면 안됐다구요.”

“....”

“그 새끼는 얼마든지.”

“....”

“그거 이용할 수 있는 인간이라구요. 근데 농담으로라도 그런 말은 안했어야 한다고.”

 

터진 마음을 추스르며 중얼거리는 목소리는 한없이 떨리고 있었다. 바들거리는 목소리만큼 진정이 되지 않는 마음을 나는 찬찬히 억누르며 이내 나를 빤히 바라보고 있는 곽아론을 향해 다시 입을 열었다.

 

“나는 화가 난 게 아니라.”

“....”

“무서운 거예요.”

“....”

“나 때문에, 괜히 나 때문에 그쪽이.”

“....”

“다칠까봐, 나는 그게 무서워서.”

 

내 인연이 악연으로 끝나는 것은 내 몫이었기에 어쩔 수 없다 여기면 그만일 일이었다. 그러나 내 악연이 누군가의 삶을 송두리째 흔들어서는 안됐다. 곽아론의 말이 사실이든 아니든 그것은 분명 곽 본부장의 삶을 완전히 뒤바꾸어 놓을 수도 있는 일이었다. 적어도 내 세계에서는, 내가 살고 있는 세상에서는.

 

“속 좀 시원해요?”

“네?”

“그렇게 소리 좀 지르니까 속 좀 시원하냐고.”

“.....”

 

숨은 여전히 거칠게 쏟아졌다. 몇 시간을 동동거리던 마음과, 곽아론을 보았을 때 느꼈던 공포와, 그리고 말도 안 되는 소리를 뱉어내는 목소리가 만들어 낸 모든 것을 한꺼번에 쏟아 낸 마음은 아직 완전히 진정이 되지 않고 있었다. 그런 나를 그저 바라만 보던 곽아론이 곧 손을 뻗어 내 얼굴을 조심스럽게 감싸쥐었다.

 

“터질 것 같아서 그랬어.”

“....”

“하고 싶은 말은 많아 보이는데, 못하는 것 같아서.”

“....”

“그러다 풍선처럼 터져 버릴까봐.”

“....”

“내가 먼저 터트리고, 그러고 나서 말하려고 했어요.”

 

어처구니가 없다는 듯 허탈한 숨을 뱉으며 곽아론을 바라보자 곧 싱긋 웃으며 구겨진 미간을 따라 구긴다. 그리고는 곧 엄지손가락으로 어느새 흩어진 눈물을 꾹 눌러 닦아 냈다.

 

“이렇게 다 터트려야 내가 듣고 싶은 말도 해줄 것 같아서.”

“...그게 뭔데요.”

“그 전에 당신 밥부터 먹고.”

“....”

“배 안 고파요?”

 

배고플 틈은 줬냐고 이죽거리는 나를 보며 곽아론은 곧 여전히 주차장에 머물러 있던 검은 자동차의 시동을 걸었다. 뭐 먹을까요. 먹고 싶은 거 없어요? 당연하듯 물어오는 곽아론의 물음에 나는 그제야 두 손으로 머리칼을 쓸어 올리며 긴 숨을 내뱉었다.

 

“아.”

“죽지 마요.”

“...”

“그래야 나랑 밥 먹지.”

“....”

 

그리고 눈을 질끈 감았다 뜨는 순간, 내 앞으로 불쑥 나타난 얼굴에 나는 그대로 다시 뱉어낸 숨을 들이키듯 짧은 탄성과 함께 몸을 살짝 뒤로 뺐다. 안전벨트를 주욱 잡아 빼며 중얼거리는 음성엔 약간의 웃음기가 머물렀다. 그러나 완전히 장난이라고 생각할 수는 없을 만큼 다정한 목소리에 나는 이내 다시 몸을 제자리로 가져가 핸들을 돌리는 얼굴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미안해요.”

“네?”

“변 대리한테 괜한 소리해서 당신 무섭게 만든 거.”

“...맞아요, 그건 미안해하세요.”

“네. 그럴게요.”

 

평일 밤의 도로는 아직도 북적거리고 있었다. 도무지 활기를 잃을 것 같지 않은 그 속으로 느리게 끼어든 우리는 도로 위를 달리는 속도만큼 느린 음성을 뱉어냈다. 그런 내 대답에 짧게 고개를 끄덕인 곽 본을 향해 나는 다시 불쑥 치밀어 오르는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그 자식 없는 말도 만들어 내서 퍼트릴 놈이에요. 장난이라도 그런 말은 안했어야 된다구요.”

“....”

“그 새끼가 얼마나 나쁜 새낀데..”

“그 새끼가 얼마나 나쁜 새낀지는 모르겠지만.”

“....”

“괜찮을 것 같은데, 나는.”

 

그런 나를 향해 여전히 느림보 거북이 자동차의 속도만큼이나 덤덤하게 중얼거리는 곽아론의 목소리에 나는 살짝 미간을 구겼다.

 

“나도 그렇게 만만한 새끼는 아니거든요.”

“.....”

 

그러니까 별로 무서울 게 없다는 듯 평온한 얼굴을 하고 있는 곽아론을 물끄러미 바라보던 나는 곧 그래도 답답한 한 구석을 어쩌지 못하고 긴 한숨을 내쉬었다.

 

“그리고 정말로 변 대리가 소문을 낸다고 해도 상관없어요.”

“....”

“거짓말도 아니니까.”

“본부장님.”

“말했잖아요, 나도 당신이랑 똑같다고.”

 

그게 무슨 소리냐는 듯 놀란 듯 눈을 크게 뜨고 돌아보자 곧 곽아론이 한 손으로 제 엉덩이를 툭 친다. 그리고는 곧 기억 안 나냐는 듯 찡긋거리는 표정에 나는 그제야 어렴풋이 기억 언저리에 머물러있던 것을 끄집어냈다.

 

“난 처음부터 숨긴 적 없었어요.”

“....”

“말할 기회가 없었을 뿐.”

“....”

 

그러니까 아무 상관없다는 듯 중얼거리는 태평한 목소리에 나는 나도 모르게 가슴 한 구석이 쿵 하고 내려앉았다. 그게 어떻게 그렇게 아무렇지 않을 수 있는지 이해가 가질 않아서 그랬고, 내 생각이 내 멋대로 저 먼 곳까지 흘러가버려서 그랬다.

 

“그래서 내가 최민기씨한테 키스한 건 아니고.”

“..네?”

“내가 남자를 좋아해서, 당신 어떻게 해보려고 그랬던 건 아니라고.”

“.....”

“남자만 보면 그런 생각이 드는 그런 새끼는 아니라 이 말입니다.”

 

멋대로 흘러간 생각 끝에 곽아론이 서있었다. 이 길이 아니라는 듯 돌아가야 한다며 내게 손을 내밀고 있었다. 혹시나 그래서. 그렇게 시작된 생각이 제멋대로 불어오는 바람에 휩쓸리다 곧 곽아론의 앞에서 멈췄다.

 

“그럼 왜 그랬는데요?”

“그게 이제 궁금해요?”

“....”

“듣고 싶은 말이 드디어 생긴건가.”

 

그리고 그 앞에 멈춰서자 반사적으로 튀어나온 물음에 나는 이내 나도 모르게 입술을 감춰물었다. 변만식이라는 뜻밖의 풍랑에 휩쓸리며 잊어버리고 있었다. 내 스스로 모든 것을 아무렇지 않은 것으로 만들어 놓았었다는 것을.

 

“할 말이 있다고 했었죠, 내가.”

“....”

“듣고 싶은 말도 있다고 했고.”

“....”

 

목적지가 어딘지 알 수 없는 길이었다. 딱히 무엇을 먹고 싶다 말하지 않은 나에게 곽아론은 더 이상 무언가를 요구하지 않았다. 대신 제가 잘 아는 길인 듯한 길을 달리고 있었다. 그 길을 그저 묵묵히 바라보던 나는 곧 무심코 돌아본 바깥을 한참이나 뚫어져라 바라보았다.

 

“나 안 괜찮아요, 최민기씨.”

“네?”

“난 괜찮으니까 당신 하고 싶은 대로 하라고 한 거, 거짓말이라고.”

“....”

“아무렇지 않게 편해지고 싶지 않아요, 나는.”

 

그리고 길이 조금 한산해졌다 느꼈을 때, 나는 그제야 그 길이 우리 집으로 향하는 길이라는 것을 알아챘다. 의심할 여지도 없이 우리 집으로 가는 길목을 따라 그대로 움직이고 있는 자동차를 운전하는 곽아론을 향해 고개를 돌린 나는, 곧 곽 본이 뱉어내는 말에 다시 입이 틀어막혔다.

 

“키스 하고 싶어서 했어요.”

“.....”

“이상하게 들릴 수도 있겠지만.”

“.....”

“최민기씨가 우는 게, 예뻐서.”

“.....”

 

지독하리만치 담담한 이야기였다. 조금의 과장도 허세도 없이 온전하게 제 마음의 모양을 그대로 내보이는 곽아론의 이야기에 나는 순간 모든 사고를 멈출 수밖에 없었다. 그러는 사이 나와 곽아론을 싣고 달리던 것이 멈추었다.

 

“좋아한다는 말을.”

“.....”

“하기에는 아직 너무 빠르다는 건 알지만.”

“....”

 

가로등 불빛만이 반짝거리는 골목에 멈춰선 자동차의 엔진소리마저 멎고, 완전한 고요가 마지막 음성을 휩싸고 돌았다.

 

“좋아해요.”

“....”

 

그리고 곧 들려오는 목소리에 나는 그대로 입을 꾹 다문 채 천천히 고개를 돌려 곽아론을 바라보았다. 고백을 한 목소리와 달리 시선은 나를 향하고 있지 않았다. 올곧게 앞을 보며 다음 말을 준비하는 얼굴은 그러나 마냥 담백하지 않았다.

 

“듣고 싶은 말은.”

“.....”

“최민기씨한테 맡길게요.”

“.....”

“하고 싶지 않으면 하지 않아도 되고, 하기 어려워도 안 해도 돼요.”

“.....”

 

단 한 번도 본적 없는 얼굴이었다. 남들이 수군거리를 정도로 잘난 모습도, 얄미울 정도로 여유롭고 대담한 모습도 없었다. 제멋대로인 김 전무 앞에서도 기죽은 적 없던 얼굴은 분명 긴장하고 있었다. 어른이라 숙련된 감정을 숨기는 법 앞에서도, 어쩔 수 없이 비집고 나오는 그 조금을 눈치 채지 못 할 리 없는 나는 그런 곽아론을 가만히 바라보다 곧 시선을 돌려 눈 앞에 보이는 것을 바라보았다.

 

“들어가서 쉬어요.”

“.....”

“잘 자고.”

“.....”

 

어쩌면 곽아론은 부러 내 집 앞으로 왔는지도 몰랐다. 이렇게 거대한 선택지를 주고는 제가 데려다 줄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있었는지도 몰랐다. 돌아가는 길이 외롭지 않도록, 혼자가 아닐 수 있게 집 앞에 나를 데려다 놓은 것이었다.

 

“.....”

 

그래서 대신 혼자 외롭게 돌아 갈 길을 선택한 것인지도 모를 곽아론을 두고 차에서 내린 나는 몇 걸음 뚜벅뚜벅 걷다 곧 그대로 그 자리에 멈춰 섰다. 그리고 그대로 잠시 멍하니 눈 앞에 보이는 내 오피스텔 건물을 바라보다 방향을 틀었다. 어서 오라며 핸드폰을 든 채 의무적인 인사를 하는 알바생을 뒤로 한 채, 고민도 하지 않고 필요한 것을 집어 계산대 위에 올려 두었다.

 

“.....”

 

안녕히 가세요. 카드를 건네주며 중얼거리는 목소리에 까닥 목인사로 대꾸를 한 나는 이내 터벅터벅 걸음을 옮겨 다시 오피스텔 쪽으로 향했다.

 

“.....”

 

그렇게 경쾌하게 뚜벅뚜벅 걷던 걸음이 이내 그대로 멈추고, 곧 나는 느리게 몸을 돌려섰다.

 

“있잖아요.”

“....”

 

아직 그 자리를 우뚝 지키고 있는 검은 자동차의 운전석 창문을 톡톡 두드린 나는, 곧 내내 의아한 얼굴로 나를 지켜보고 있었을 얼굴을 향해 차분하게 중얼거리다 곧 손에 든 것을 쑥 들어올려 보였다.

 

“라면 먹고 갈래요?”

“....”

 

배고프잖아요. 꼭 그런 표정으로 중얼거린 나는 곧 느리게 웃어버렸다.

 

 

 

 

 


컵라면 하나를 각각 앞에 두고 아무 말 없이 마주 앉아있던 나는 곧 손목에 시계를 힐끗 보며 자세를 고쳐 앉는 곽아론을 보며 덩달아 자세를 바꾸었다. 3분 지났습니다, 먹어요. 한국이 보다 더 철저하게 3분을 지키고 있던 곽아론은 마치 회사에서 일을 하는 사람처럼 비장한 얼굴로 컵라면의 뚜껑을 열어젖혔다. 뭐 그렇게까지 신중할 필요가 있느냐는 듯 바라보던 나도 어느새 덩달아 신중해질 수밖에 없었다.

 

“한국에서 라면 먹고 가라는 게 어떤 말인 줄 알아요?”

“네.”

“..어떻게 알아요?”

“나도 귀가 있고 눈이 있으니까.”

“....”

 

그렇다고 그런 걸 그렇게 냉큼 알 일이냐는 듯 살짝 마뜩찮은 표정으로 바라보자 곧 곽아론이 가볍게 웃으며 나를 본다.

 

“걱정 마요.”

“뭘요.”

“최민기씨가 그 뜻으로 나 잡은 거 아니라는 거 알아요.”

 

곽아론의 이 말엔 나는 아무런 대꾸 없이 면만 휘적휘적 거렸다. 그리고는 곧 눈앞의 곽아론을 보며 느리게 입을 열었다.

 

“궁금한 게 있어서 잡았어요.”

“뭔데요?”

“....”

“우리 집, 어떻게 알았어요?”

“.....”

 

참 아무것도 아닌 궁금증이었다. 그리고 그것은 어쨌든 핑계였다. 내가 굳이 라면 핑계를 대며 곽아론을 붙잡은 건, 나조차도 정확히 무엇이라 설명할 수는 없었다. 아니, 더 정확히는 나는 이미 모든 결론을 내린 상태여서 굳이 시간을 끌 필요가 없었다는 것이 맞았다.

 

“나는 알려준 적이 없는 것 같은데.”

“따라 왔었어요.”

“.....”

“불안해서, 당신 혼자 보내는 게.”

“.....”

 

내 대답을 기다리며 초조해 할 이유를 만들고 싶지 않았다. 내 대답은 이미 정해져 있었다. 그런 나를 두고 외롭게 돌아가며 온갖 생각을 하게 만드는 건, 아무래도 주제 넘는 일이었다.

 

“나랑 키스 한 걸 괴로워 하지는 않을까.”

“.....‘

“자책하지는 않을까.”

“.....”

“또, 울지는 않을까.”

 

그런 게 불안해서 내가 탄 택시를 따라 왔었다고 말을 하는 곽아론을 가만히 바라보던 나는 그제야 곽아론도 나처럼 젓가락으로 면만 뒤적거릴 뿐 한 입도 먹지 못하고 있다는 걸 알아챘다.

 

“어떻게 사람을 그렇게 빨리 좋아할 수 있냐고는 하지 말아요.”

“....”

“좋아한다는 건, 각자 다른 시간과 크기가 필요할 뿐이지 모양은 다르지 않으니까.”

“....”

“그렇지만 그게 당신한테 강요가 되는 건 나도 싫어요.”

“....”

“내가 상사라고 거절을 부담스러워 할 필요 없어요.”

 

그리고 아예 젓가락을 내려놓고 중얼거리는 곽아론을 가만히 바라보던 나는 곧 살며시 입술을 깨물었다 놓으며 길게 숨을 뱉어 냈다. 어쩌면 곽아론이 내게 좋아한다 말하지 않았어도 언젠가는 내가 먼저 꺼내놓았을지 모르는 이야기를 나는 시작해야했다.

 

“본부장님도 알죠, 내 마지막 연애가 어땠는지.”

“....”

“실패하고 싶지가 않아요.”

“....”

“더 이상은 실패하고 싶지 않아요, 나는.”

“....”

 

내가 먼저 곽아론이 좋아질 수도 있었다는 걸 나는 부정할 수 없다. 내가 같은 남자를 좋아한다는 전제가 붙어버린 이상, 곽아론은 충분히 매력적이고 좋은 사람이었다. 그런 곽아론에게 반하지 않을 자신 같은 건 없었다. 나는 이미, 이 사람에게 꽤 많이 반한 상태였다.

 

“누군가와 시작을 한다는 게 나는 곧 실패로 가는 길 같아서.”

“.....”

“엄두가 안나요.”

“.....”

“이러다 끝나버리지는 않을까, 나를 지치게 할 것 같고..”

“.....”

“그러다가 상대도 지치게 될 거고.”

 

그럼 결국 또 똑같은 끝을 볼 수밖에 없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반한 것과 좋아하는 것이 동의어라 할지라도 그것이 시작의 명분이 될 없었다. 적어도 나에게는 더 이상 연애를 시작한다는 행위가 존재해서는 안됐다. 시간이 꽤 흐른 뒤라면 모를까 지금은, 지금의 나는.

 

“그럼 또 본부장님도.”

“....”

“나쁜 새끼가 될 것 같아요, 나한테.”

“....”

 

더 이상의 악역은 필요하지 않았다. 좋아한다는 그 담백한 한 마디에 가슴이 설레고, 내 편을 들어주는 그 사소함이 눈물 나게 좋으면서도 나는 여기까지였다.

 

“본부장님은, 좋은 사람인데.”

“....”

“아니, 좋아하는 사람인데.”

“....”

“그렇게 만들고 싶지는 않아요.”

“....”

 

내 대답은 여기까지라는 듯 가만히 중얼거린 나는 곧 그저 나를 빤히 바라만 보고 있는 곽아론을 보며 먼저 자리에서 몸을 일으켰다.

 

“가세요.”

“....”

“회사에서 봬요.”

“최민기.”

 

배웅을 할 상황은 아니라는 걸 알기에 자리를 피하려던 나는 곧 그보다 먼저 내 발걸음을 멈춰 세우는 손길에 얼마 도망치지 못하고 멈춰버렸다.

 

“내가 왜 고작 좋아한다는 말 밖에 못했는지 알아?”

“....”

“영어로 하면 훨씬 더 잘할 수 있었는데 안 했어.”

“.....”

“왜 그랬는지 알아?”

“.....”

 

내 손을 가볍게 붙잡은 곽아론의 손이 바들바들 떨리고 있었다. 그것을 가만히 내려다보던 나는 곧 살며시 나를 힘주어 붙잡는 손길에 완전히 고개를 돌렸다.

 

“그게 당신의 언어니까.”

“.....”

 

나를 향해 가만히 읊조리는 목소리에 나는 그대로 입술을 꽉 깨물었다.

 

“그래야 내 마음이 전해지니까. 나만 아는 말로는 아무것도 할 수 없으니까.”

“.....”

 

이번에는 나를 피하지 않았다. 오롯이 나를 바라보며 중얼거린 목소리에 나는 곧 깨물고 있던 입술을 가만히 풀어내며 곤란한 듯 미간을 구겼다.

 

“연애하자는 말 안할게.”

“....”

“내 마음은 의심하지 마.”

“....”

 

나는 그거면 돼. 나는 거기까지면 돼. 아무런 욕심 없는 마음이, 정신없이 욕심나게 만들고 있었다. 주제넘게, 또 사랑을.

 

 




*

늦어서 죄송합니다ㅠ^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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