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

숨소리가 고동 소리가 맥박 소리가

수학자의 귓전에 함부로 들락거린다

비천한 육체에 깃든 비천한 기쁨에 대해 생각한다


김소연, 수학자의 아침 中


1.

증명을 위해서는 가정이 필요하다. 가정이라고 하는 흐릿한 덩어리를 날카롭게 조각하고 틈을 메워 흠 없는 답으로 만들어 내는 증명의 과정. 증명 앞에 가정이 놓인다는 것은 증명을 해내는 사람들의 영혼 일부분이 공상가라는 뜻이다. 누군가가 이미 간 길이라 해도 증명하는 사람들에게는 상관없다. 미로 끝을 찾아가는 모험가처럼 함정을 피하고 몇 번의 아침 해를 보고서 자신이 그 땅을 밟아야만. 그래야만 살아있다고 느끼니까.

삶을 증명해내는 것은 수학의 영역이 아닙니다.

그는 이렇게 말했지만 옆에 앉은 여자를 증명하고 싶어졌다. 적어도 자신과 그녀의 관계 사이에 연관성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증명해야 한다는 두려움에 가까운 의무가 어깨 위에 내려앉았다. 언제 흩어질 지 모르는 상상처럼, 도망가버리는 찰나의 실마리처럼 어디에 적어두지 않으면 그녀가 사라질 것만 같았다.

세상의 끝처럼 느껴지는 계단은 햇빛이 단 한 번도 들어온 적 없는 것처럼 냉랭하고 조용하다. 그 계단에 함께 걸터앉은 둘은 정의될 수 없는, 영원한 가정과 희미한 확신에 내던져진 것이 당혹스러운 듯 말을 아꼈다. 옆에 앉은 여자의 이름과, 피부와 눈빛에서 읽어낼 수 있는 가정의 실마리가 공상가의 영혼을 미지의 영역으로 끌고 갔다. 갈 곳 없는 옅은 분노와 체념이 뒤섞인 여자는 곧 사라질 것처럼 보였고, 그는 본능적으로 조금씩 그녀의 삶 안으로 발을 들였다. 그 결과는 차가운 계단 위에 덩그러니 놓인 두 사람. 

그는 다시 머리 속에 물음표를 그렸다. 약속도 하지 않았지만 매일 비슷한 시간에 같은 자리에 앉아 지는 해를 바라보는 관계를 뭐라고 부를 수 있을까. 살아줬으면 하는 마음과 내가 대신 죽어버리고 싶은 마음은 또 뭐라고 명명해야 하는가.


2.

자연어보다 숫자와 가까운 남자는 몇 밤 동안 고작 한 장의 편지를 썼다. 자신이 왜 살아있는지는 몰라도 살아있는 동안 삶 속에서 수학의 진리만 쫓아다니던 남자가 온갖 문학적 수사를 끌어모아 삶을 증명하는 글을 써낼 수 있을리 없었다. 그는 밤을 새워 영원의 불가능을 증명해냈다. 덧붙여 세상에겐 그와 그녀가 불필요하다는 사실과 외로움의 필연까지도. 하지만 그녀는 괜찮다고 했다.

세상 사람들이 전부 죽어버리기를 바라는 사람이 사라지면, 그러니까... 차라리 제가 사라지면 모두 끝나는 거잖아요.

당신이 사라지면 저는 평생 믿지 않았던 영혼을 믿어야 할 지도 모릅니다. 남자는 이 말을 삼켰다. 그러니까 인희 씨는 제게... 머리 속에서 뭉치는 단어의 덩어리들은 완전한 문장이 되지 못할 것이 뻔했다. 가장 중요한 단어가 빠졌다는 사실은 분명한데, 사랑이라는 단어는 부족하다. 완벽함을 추구하는 사람들은 종종 불완전이 두려워서 말을 내뱉지 못한다.

그가 가끔씩 약간 먼 허공을 볼 때면 그녀는 그를 가만히 두었다. 그녀는 이 이상한 남자가 자신과 풋사랑이라도 하는 것 처럼 구는 것이 신기했다. 차가워진 왼손을 카디건 주머니에 넣자 현실과 가상 사이에 걸려있는 수학자의 편지가 손가락에 걸린다. 그 안의 내용은 짧고 간결해서 펴보지 않아도 다시 떠올릴 수 있을 정도라 그녀는 굳이 그 종이를 다시 꺼내 읽지 않았다. 

현실로 돌아온 공상가는 옆에 앉은 여자의 오른손 새끼손가락 끝에 자신의 새끼 손가락을 가만히 올려놓았다. 이 작은 면적의 접촉으로 느끼는 환희의 값을 무한으로 확장하고 싶은 욕망과, 숫자의 세계를 벗어나는 순간 유한에 얽매이게 되는 현실이 뒤섞였다. 


3.

추우니 집 안으로 들어가자고 하는 여자의 말에 구태여 질문을 덧붙이지 않고 그가 몸을 일으켰던 것은 그의 머리 속을 차지한 혼란 때문이었다. 절대로 그 이후의 상황을 상상했던 것이 아니라, 그저 순순히 고개를 끄덕거리기만 했을 뿐인데... 싸늘한 집 안의 공기가 뜨거워지고 아쉽게 멀어졌던 새끼 손가락 한 마디 크기의 환희가 전신으로 번지는 것은 순식간이었다. 생각을 하지 않아도 전율이 이는 경험은 경이로울 정도여서, 그는 그녀가 단 한 번 들었던 자신의 이름을 기억하고 있다는 사실에 놀랄 틈도 없었다. 석고 씨, 하는 부름이 아찔해서 눈을 감았다가 뜨면 어느 순간 셔츠는 풀어져 있고, 또 한 번의 부름이 지나가면 그의 맨 등에 이불이 닿아 있었다.

한참 작은 여자의 손이 깊은 물처럼 그의 호흡을 앗아가고, 이내 그의 눈 앞이 희뿌옇게 흐려졌다가 환희로 밝아졌을 때. 그는 그녀에 대한 감정에 사랑이라는 단어보다 더 정확한 가정을 세웠다.

복종과 유일.

상상하는 모든 영원은 불가능하고, 세상은 그녀와 그를 필요없다 하더라도. 그는 적어도 그녀에게 분명하게 복종을 줄 수 있는 사람은 자신 뿐이라고 생각했다. 온 이해를 바쳐서 그녀를 살아있게 만들겠다고. 기필코 쓸모를 증명해 내어 영원에 가까워지고 싶다는 욕망이 거칠게 들이마시는 숨과 함께 폐 속으로 스며들었다.

그녀는 그가 허공을 볼 때면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묻지 않는다. 증명으로 가는 새벽 첫 차 시간에 그녀가 먼저 그의 새끼 손가락에 자신의 새끼 손가락을 얽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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