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온갖 문화권과 종교권이 섞여있을 경우 명절과 기념일은 어느 달력을 기준으로 쇠어야 할까? 같은 시간에 살고 있는것 같아도 타인의 시간은 나와는 다르게 흐른다. 동시성이란 그저 인간이 시간을 이해하려 만든 수단에 불과했다. 우리는 각자의 우주에서 각자의 시간으로 살아간다. 하물며 개인의 시간도 똑같은 속도로 흐르지는 않는다. 하루가 12시간 같을 때도, 38시간 같을때도 있다.

다만 우리가 서로에게 극도로 가까워질 때, 서로의 중력에 얽혀갈 때, 우리는 점점 더 느리게 회전한다. 강력한 힘 앞에서 이따금 아예 멈춰버린다.

좀 더 자주 밖에 나와야지. 박무현은 지친 기색으로 생각했다. 대한도 해변 모래에 파묻힌 맨발이 점점 차갑게 식어가는 게 느껴졌다. 바로 뒤에는 위험하니 신발을 벗고 다니지 말라는 안내표지판이 세워져있었다.

그의 근무 시간은 오후 일찍 끝이 났고 오늘은 라마단 마지막 날이었다. 해변에는 해가 지면 만찬을 즐기려는 사람들이 테이블을 깔고 천막을 세우며 분주하게 움직이고 있었다. 답지않게 쌀쌀한 바람이 불었지만 여기저기 밝혀놓은 조명과 보랏빛 노을 속에서 왁자지껄하게 어울리는 사람들의 모습은 민속화처럼 생기넘쳤다.

이맘때 한국에는 무슨 기념일이 있었는지 곰곰히 생각하다가 개학철임을 떠올리고 동생에게 넉넉하게 용돈을 부쳐줘야겠다고 다짐했다.

엉덩이 옆에 놓아두었던 패드 화면이 깜빡였다. 강수정 엔지니어에게서 온 연락이었다. 업무가 끝난 사람들끼리 대한도에서 하는 축제에 갈 예정인데 같이 가지않겠냐는 초대였다. 운이 좋은건지 나쁜건지 마침 혼자 시공간에서 뚝 떨어져나온것처럼 청승맞게 앉아있는게 외로워지던 차라 대한도에서 만나자고 답장을 보냈다.

십여분이 지나서 각국의 엔지니어팀과 특수직군 사람들이 뒤섞인 한무리가 보였다. 대부분이 여자였고 김재희와 서지혁, 그리고 러시아팀장인 블라드미르가 여자들 사이로 쑥 솟아있는게 보였다.

"무현 선생님! 언제 올라오셨어요? 중앙 엘리베이터 타고 다같이 올라온건데." 강수정이 말했다.

"오늘 오후 예약이 하나도 없어서 휴가 낸 김에 올라와있었습니다." 박무현은 깔고앉아있던 조그마한 수건을 털어 팔에 걸쳤다. 아는 얼굴들과 눈과 손짓으로 인사를 하고 일행에 합류해 축제준비중인 곳으로 다함께 걸어갔다.

"그런데 저희도 가도 되는건가요?" 박무현이 물었다.

"네. 대신 술은 가져가면 안되지만요. 개인적으로 준비해온 음식도 금지고요. 맨처음엔 무슬림이 아닌 사람들은 술 마시는 것도 봐줬었는데 일이 좀.. 있은 후로는 아예 몸수색까지 한 뒤에 들여보내줍니다." 강수정이 손에 들고 있던 각종 음료캔과 커피트레이를 들어보였다.

의사는 무의식적으로 음료에 써있는 무가당 선전문구를 보고 고개를 끄덕였다.

"일이라고 하시면..." 박무현의 질문에 강수정이 턱아래를 긁적이고만 있자 뒤에서 김재희가 박무현에게 어깨동무를 하며 힘을 실어왔다.

"맨 처음에 라마단 기간 지킨다고 했을 때 소음이 많았거든요. 너네만 그렇게 하냐? 그러면 나도 매주 일요일엔 일 안한다. 지저스 크라이스트께서 하지 말라셨다. 중국애들은 춘절 노동절에 집간다고 탈주하고 러시아애들은 그럼 자기들은 원래 율리시스력으로 세서 크리스마스를 1월7일에 지내니까 새해 첫주는 죽어도 일 안한다고 하고. 뉴질랜드애들은 그럼 자기들도 마타리키 축제를 하겠다고 하질 않나. 웃긴게 뉴질랜드 애들중에 마오리족은 두 명? 밖에 없거든요. 게다가 그 중 한 명은 심지어 혼혈이고. 하여튼 그래서 일 년 내내 여덟국가의 명절과 여섯.. 아니다 일곱개 종교의 기념일로 빼곡하게 들어차서 나도저도 일 안한다 드러누웠죠."

어깨를 내리누르는 김재희의 무게에 박무현의 발이 모래에 푹푹 빠져 슬리퍼 구멍안으로 모래가 줄줄 들어왔다.

"그래도 라마단은 쉬는 명절도 아니고 그냥 마지막날에만 저렇게 하는거니까 좀 다르지 않나요?"

"그냥 배가 아픈거죠. 기싸움이 절반이고요. 서로 아니꼬운 종교가 한둘이 아니니까. 어쨌든 그래서 미국애들이 삼 년? 사 년 전이었나? 이드(Eid)에서 술에 꼴아가지고 아주 난장을 만들어놨어요. 그 일때문에 병원도 바쁘고 임시 대사관도 바쁘고 빵꾸난 미국인력 떼우느라 한국사람들도 바쁘고~"

"김재희! 쓸데없는 소리 하지마라." 강수정이 김재희의 뒤통수를 딱 소리나게 처올렸다.

"아! 제가 없는 일 지어낸건 아니잖아요, 부팀장님은 그때 없으셔서 모르신다니까요."

축 처진 김재희의 몸을 거의 질질 끌면서 걷다보니 박무현의 숨소리가 가빠지기 시작했다.

"한국사람들은 추석이랑 설 지낸다고 그러진 않았나요?"

"제사 지내고 싶다는 사람도 없고 지낼 여력도 없어서 대충 다같이 음식 사들고 모여서 향 하나 태웠었는데 아시안들이 오컬트주술 한다고 신고가 들어간거에요. 이상하게 그걸 들은 그 당시 중국팀장이 뚜껑이 열려서 효와 인도 모르고 나라 역사가 니네 가방끈보다도 짧은데 뭘 알겠냐고 지랄지랄을 했죠."

"그러다 그 미국인 엔지니아 총괄 아시죠? 마이클이라고. 그 사람이 중국인 너네들은 개국한거 이제 0부터 세어야 되는거 아니냐고 아주 들이박아버렸어요." 

뒤에서 따라오던 이지현이 대화에 끼어들며 옆에 있던 서지혁의 옆구리를 팔꿈치로 쿡 찔러 턱짓하자 서지혁이 박무현위로 녹아있던 김재희를 달랑 들어 옆으로 치워버렸다.

"사람 얼굴이 그렇게까지 빨개질 수 있다는 건 그때 처음 알았어요. 어쨌든, 결국 지금까지 살아남은 행사중 하나에요. 준비하는데 워낙 손이 많이 가다보니 타지에서 고향 명절같은 걸 꾸준히 챙기는게 쉬운일은 아니잖아요. 저 사람들이야 인원은 적지만 종교와 일상을 구분할 수 없는 문화권에서 자랐으니까 계속 유지할 수 있는거구요."

천막에 가까워질수록 싸구려 스피커로 틀어놓은 독특한 선율의 음악과 함께 강한 향신료 냄새가 공기를 뒤흔들고 있었다. 이지현은 습관처럼 목에 건 십자가를 만지작거렸다.

"어.. 근데." 박무현은 기독교인 이지현이 이런 자리에 올 생각을 다했냐는 말을 예의바르게 할 방법을 찾지 못해 말꼬리를 흐렸다. 이지현은 생각이 다 드러나는 남자의 얼굴에 그저 생긋 미소만 지었다.

"중국인들은 여기 절대 안와요. 미국애들은 개인적으로 친분있는거 아니면 출입금지이고 러시아놈들은 술 없으니 당연히 안오고. 저희가 나름 귀한 손님이랍니다. " 서지혁이 박무현의 옆을 지나가며 가져온 음료에 대해 알콜검사를 받고 누군가와 반갑게 인사했다.

주황과 보라빛으로 해면을 색유리처럼 물들이던 해가 수평선의 반을 넘어가자 하늘은 순식간에 흐릿한 남색으로 변하기 시작했다. 바다와 하늘의 경계가 용의 잇새처럼 불타오르다가 마침내 물에 잠기자 사람들이 사탕수수로 만든 음료가 담긴 잔을 높이 치켜들며 환호했다. 누군가 박무현의 등을 세차게 치며 그의 손에도 잔 하나를 들려주었다. 축제의 시작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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