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월이 되고부터는 완전히 일상으로 돌아왔다.


그 일상이라는 단어의 의미는 초등학교 저학년 이후로부터 그다지 변하지 않았다. 수업을 듣고, 수업이 끝나면 훈련을 하고, 훈련이 끝나면 집에 돌아와 밥을 먹고 배구 동영상을 본다. 단지 예전에는 배구가 순수한 오락에 가까웠다면, 지금은 그 공이 가지는 무게에 분명한 차이가 있을 뿐이었다. 배구는 너무도 어릴 때부터, 오랜 시간 동안 일상 속에 스며들었다. 대게 주변 사람들도 자신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그리고 배구가 사라진 일상 속에서 살아가는 카게야마를 보고 나서야 그가 정말로 그것을 그만뒀다는 사실이 와 닿았다. 카게야마의 일상에서 이제 배구는 오이카와가 보고 있는 동영상을 같이 보는 정도에 그쳤다. 여전히 관련된 많은 대화를 나누고, 주말이 되면 종종 체육관에 가 같이 연습을 하기도 했지만, 두 사람이 ‘배구’라는 단어에 가지는 비중은 결코 예전과 같지 않았다.


매섭게 쫓아 붙는 후배에게 따라잡히지 않기 위해 이를 악물고 달려왔는데 이렇게 길이 갈라지다니. 여전히 실감이 나지 않았다. 배구를 하지 않는다고 카게야마에 대한 사랑이 식지는 않겠지만, 도저히 모른 척 할 수 없을 정도의 위화감이 서렸다. 마치 제 지갑 속에 고이 자리 잡은 블랙카드처럼.


낮은 한숨과 함께 락커 문을 닫았다. 카게야마 토비오를 아는 사람이라면 아마 누구라도 오이카와와 같은 감상을 가질 터였다. 다른 사람도 아니고 그 녀석이 배구를 그만둔다니.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지는 고민에 결국 스포츠 백을 매며 옆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쿠로쨩, 토비오 알지?”

“누구 씨 애인을 제가 어떻게 모를까요?”


넌지시 던진 물음에 옆에 있던 사람, 쿠로오 테츠로가 심드렁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성의가 없다기 보단 왜 당연한 말을 묻느냐는 어투였다.


“아니, 그게 아니라. 토비오랑 배구 해본 적 있지?”

“뭐, 고등학생 때 몇 번 해봤지.”

“어땠어?”

“어땠냐니. 흐음, 대단했지. 근데 그건 왜? 네가 더 잘 알 거 아냐.”


그 말에 입을 텁 다물었다. 분명 옳은 말이지만 이렇다 할 대답이 떠오르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그래, 몰라서 물어본 것은 아니었다. 단지 제가 느꼈던 감상이 조금이나마 남들과 비슷할까 하는 궁금증에 불과했다. 당연히 그럴 거란 사실을 알면서도.


될성부른 나무는 떡잎부터 알아본다면, 카게야마는 전형적인 그 ‘떡잎’이 아닐까. 따라잡힐 생각은 쥐꼬리만큼도 없지만 천성이 배구를 할 녀석이라고 생각했다. 분명 그렇게 생각했는데.


“토비오, 배구 그만 둘 거래.”


역시 아직은 익숙지 않았다. 여전히 정면을 본 채로 내뱉은 말에 이번엔 쿠로오가 단번에 고개를 돌렸다. 눈을 마주치지 않아도 경악이 느껴졌다.


“뭐, 왜?!”

“가업 잇는다나봐.”

“무슨 가업을 잇는다고 배구를 포기해, 그 녀석이?! 부모님이 무슨 대기업이라도 하신대?”


그 말에 반사적으로 어깨를 움츠렸다. 전부터 생각하긴 했지만 촉이 참 좋은 녀석이었다. 대충 찍어도 맞는 사람이라고 해야 할까. 그 중의 팔 할은 말재간이 해먹는 것 같지만. 단 번에 정답을 맞춘 쿠로오의 말에 오히려 할 말을 잃었다. 본인이 아직 떠벌리지 않은 이야기를 제가 할 수도 없는 노릇이고. 이 녀석은 왜 이렇게 눈치가 빨라서….


“아니면 혹시 미야기 어딘가에 있는 우동 장인의 3대 독자라던가.”


아니, 이 말은 취소. 사실 현실성을 따지자면 이 쪽이 좀 더 승률이 있지만 굳이 그것을 정정해줄 필요는 없었다. 스포츠 백을 고쳐 매고 건물을 나올 무렵 쿠로오가 중얼거리듯 말을 덧붙였다. 이 이야기를 처음 들었을 때의 오이카와와 마찬가지로 충격이 가시지 않는 모양이었다.


“와, 근데 진짜 놀랍네. 배구 말고 다른 건 모를 거 같은 녀석이었는데.”

“내 말이.”

“뭐, 너도 엄청 놀랐겠네.”


그 말과 함께 쿠로오가 가볍게 어깨를 으쓱였다. 따라오는 눈빛에는 ‘그럼 이젠 어떡하려고?’라는 의사가 분명했다. 아마 제 고민을 눈치 챈 모양이었다. 같은 길을 바라보던 연인과 하루아침에 갈림길에 들어섰으니. 과도기가 아니라고 할 수 있을까.


“금요일인데 밥이라도 먹고 갈래?”


쿠로오의 제안은 아마도 그런 배려의 연장선이었을 터였다. 내일은 오전 연습이 없으니 술이라도 한 잔 하면서 털어놓는 게 좋지 않겠냐는. 평소라면 물론 구미가 당길 제안이었으나 아쉽게도 이번에는 고개를 저어야만 했다.


“미안. 선약이 있어서.”


카게야마와 단 둘이 밥을 먹기로 한 약속조차도 이번 달 들어서 처음인 탓이었다. 예전에는 주에 두세 번은 자취방에서 같이 저녁을 먹곤 했는데. 학기가 시작하기 전부터 바쁜 기색이 역력했던 카게야마는 개강과 함께 말 그대로 눈코 뜰 새가 없어보였다. 바쁘기로는 교내 누구에게도 뒤지지 않을 오이카와가 이런 말을 할 정도였으니 정말 24시간이 부족하다는 말조차 과언이 아니었다.


“워, 매몰차시네.”

“나도 애인 얼굴은 보고 살아야할 것 아냐.”


그제야 쿠로오가 대충 고개를 끄덕였다. 더 이상 붙잡아봐야 의미가 없는 논제임을 깨달았을 터였다. 시시콜콜한 이야기를 나누며 정문 근처에 다다랐을 때에는 반사적으로 주변을 살폈다. 분명 오늘 이 쪽에서 만나기로 했는데.


습관처럼 연락을 위해 휴대폰을 꺼내던 찰나 문득 발걸음을 멈췄다. 처음 봤을 때부터 확실히 시선이 쏠렸고, 이제는 익숙해지기까지 한 차량을 발견한 탓이었다. 학교에 굳이 저런 차를 끌고 올 이유는 어디에도 없으니, 아마도 제 추측이 옳을 터였다.


그리고 그 추측은 운전석에서 내린 후지무라로 인해 확실해졌다. 눈을 마주친 순간 가볍게 고개를 숙였다. 지난 한달 남짓한 시간동안 의도치 않게 여러 번 마주치며 이제는 꽤 낯이 익게 된 사람이었다.


“안녕하세요, 후지무라 씨. 무슨 일이세요?”

“안녕하십니까, 오이카와 씨. 토비오 도련님께서 일이 생기셔서 부득이하게 제가 모시러 왔습니다.”


그제야 꺼내 본 휴대폰에는 이미 부재중 통화가 여러 통 찍혀있었다. 카게야마로부터 온 라인도 알람만 가득 쌓인 채였다. 이런, 적어도 연습이 끝나고 나서는 확인했어야 했는데. 일정이 꼬여 바로 레스토랑에서 만나자는 내용이 그제야 눈에 들어왔다.


“아, 죄송해요. 제가 연락을 못 봤네요.”

“괜찮습니다. 급하게 변경된 일이여서요.”


타시죠. 짧은 한마디와 함께 후지무라가 뒷좌석 문을 열고나서야 문득 떠오르는 것이 있었다. 눈 앞에 있는 사람과 대화하느라 일순간 잊고 있던 옆 사람의 존재였다. 그제야 천천히 돌린 시선에 끝에는 어색한 표정으로 얼어붙은 쿠로오가 보였다.


“아, 쿠로쨩. 그러니까 이건….”


주차장에서 얼어붙었던 자신의 표정이 이런 모습이었을까. 당황으로 물든 쿠로오의 얼굴은 평소의 여유라고는 조금도 찾아볼 수 없었다. 오이카와와 후지무라의 얼굴을 번갈아 본 쿠로오가 떨떠름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뭐, 우동 장인 집안의 3대 독자는 아닌 것 같네.”

“으응, 그렇지….”


알 수 없는 내용의 대화를 들은 후지무라의 눈빛에 조금 의아함이 서렸지만, 그것이 표정으로 드러나지는 않았다. 나름 직업 정신이 투철한 사람이구나. 이 상황에 그런 생각을 하며 애써 쿠로오의 등을 떠밀었다.


“그럼 내일 봐, 쿠로쨩.”

“예이, 들어가십쇼.”


후지무라에게도 가볍게 고개 숙여 인사한 쿠로오가 벤츠를 지나치며 발걸음을 옮겼다. 그제야 안도의 한숨을 쓸어내리며 한참 전에 열린 뒷좌석에 오를 수 있었다. 몇 번을 타도 적응이 안 된단 말이지. 그런 오이카와의 쭈뼛거림은 아랑곳없이 후지무라가 곧장 운전석에 올랐다.





“방금 계셨던 분도 배구 선수신가요?”

“아, 네. 토비오랑도 아는 사이예요.”


카게야마가 예약했다던 레스토랑은 학교에서는 거리가 제법 있었다. 지금까지 이 차에 탈 때면 항상 카게야마가 함께였는데, 혼자서 오른 뒷자석은 그야말로 가시방석이나 다름없었다. 불편한 기색으로 자꾸만 주변을 흘기는 오이카와가 그제야 신경이 쓰인 모양인지, 룸미러를 살핀 후지무라가 나지막한 목소리로 운을 띄웠다.


“그럼 배구를 잘 하시겠군요.”

“뭐어, 네…. 잘 하죠. 그래도 저희 학교 배구팀은 꽤 강한 편이니까요.”


그렇게 대답하며 가볍게 볼을 긁었다. 다른 사람이라면 편하게 ‘우리 팀이 얼마나 강호인데, 당연히 잘하지!’라고 천연덕스럽게 덧붙일 법 했건만, 어쩐지 이 사람 앞에서는 입이 쉽게 떨어지지 않았다. 강호니 뭐니 해봤자 결국 대학교 팀이었다. 프로 선수가 된다고 해도 성에 안 찰 집안사람들이니, 대학교 배구팀이 과연 눈에 들어오긴 할까.


“오이카와 씨도 대단한 선수라고 들었습니다.”

“아, 정말요?”

“네. 작년엔 국가대표 선발 캠프에도 참석하셨다고요.”


이어지는 말에 다시 어색하게 말을 삼켰다. 그 캠프라면 카게야마도 참석했는데. 선발 캠프에 소집된 인원 중에서는 분명 최연소―그 나이의 선수가 카게야마 뿐만은 아니었지만―였다. 하지만 제가 아는 카게야마라면, 분명 집안사람들에게 이런 이야기까진 전하지 않았을 터였다. 자신이 선발캠프의 최연소 선수라는 것보단, 오이카와와 함께 참석했다는 사실이 더 중요할 사람이었으니.


“그건 말 그대로 선발 캠프라서요. 국가대표로 확정되는 건 올해까지 두고 봐야 해요.”

“그렇군요. 확실히 국가대표 선발 과정이니 짧지만은 않나봅니다.”

“네, 그리고…….”


말끝을 흐리며 침을 한 번 삼켰다. 무릎 위에 고이 포개진 손에 어쩐지 힘이 실렸다. 하필 이 집안사람들과 배구 이야기를 하게 되다니. 언제고 가슴 속에 뭉쳐있던 응어리들이 알음알음 제 모습을 드러냈다.


“배구는 토비오도 잘 해요.”


어릴 적부터 제법 가까운 거리에서 카게야마를 지켜 본 사람이 바로 자신이었다. 가족만큼은 아니겠지만 대신 그에게는 객관적인 판단력이 있었다. 제 자식의 재능을 측정하는 사심 가득한 부모의 심정이 아닌, 완벽한 타인의 시선. 그 시선으로 보아도 카게야마의 재능은 분명 빛났다. 타고난 감각과 센스, 그리고 그것들을 피워낼 수 있는 노력을 이어나가는 것 또한 어째서 재능이 아니겠는가.


일본에서도 손꼽히는 대기업을 운영하는 그들이 눈에는 보잘 것 없는 재능일지 모르겠지만 적어도 오이카와에게는 그랬다. 이유가 어쨌든 그만두기에는 너무나 아까운 재능. 한 때나마 그 재능에 시기와 질투를 가져봤기에 더더욱 확신할 수 있었다. 하지만 오이카와는 제가 내뱉은 말을 곧바로 후회했다. 그것을 후지무라에게 말해봐야 아무것도 변하지 않았다. 후지무라가 카게야마의 인생에 대한 결정권을 가져봐야 얼마나 가졌겠는가. 적어도 그의 부모님 정도는 되어야 할 터였다.


“하하, 오이카와 씨께서 그렇게 말씀하실 정도라니 토비오 도련님의 실력이 정말 뛰어나긴 한가 봅니다.”


다행히 후지무라는 오이카와의 발언으로 인해 딱히 기분이 상하진 않은 모양이었다. 넉살 좋은 대답에 티가 나지 않을 정도로 작게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이대로 대화를 끊어 내기만 하면 되겠지. 그렇게 생각하는 찰나 후지무라가 사뭇 낮아진 목소리로 말을 덧붙였다.


“하지만 사업을 이어받기로 결정하신 건 토비오 도련님 본인이십니다.”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이야기에 이번엔 오이카와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퍼뜩 고개를 들어 룸미러로 시선을 옮겻지만 후지무라와는 눈이 마주치지 않았다.


“집안 어르신들께선 모두 가업을 잇기를 바랐으니 압박이 없었다고 말할 수는 없지만, 회장님과 사장님께서는 분명 도련님께 선택권을 드렸습니다.”


그렇게 말하는 후지무라의 목소리에는 어떠한 변화조차 없었다. 하지만 그것만으로도 오이카와의 말문을 틀어막기는 충분했다. 카게야마가 강압적인 집안 분위기에 배구를 포기했을 거라는 생각은 제 착각에 불과하다고, 분명 그렇게 말하고 있었으니.


“오히려 저는 그렇기 때문에 오이카와 씨한테 감사한 심정입니다.”

“저한테요?”

“네. 직접적이진 않지만 토비오 도련님께서 가업에 집중하실 수 있게 된 데에는 오이카와 씨의 영향이 있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들어서요.”


그러는 사이에도 차는 지금 이어지는 후지무라의 어투만큼이나 부드럽게 달렸다. 어쩐지 말문이 틀어 막혀 쉽사리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자신이 어떤 영향을 미쳤길래 카게야마가 배구를 그만뒀다는 말일까? 어떤 식으로 가업에 집중한다는 소리지? 머릿속에 피어나는 생각은 끝이 없었지만, 눈앞에 있는 사람은 그 질문에 답을 내려줄 수 있는 사람이 아니었다.


“외부인에게는 자세히 말씀드리기가 어렵습니다만, 최근 K그룹에서는 스포츠 쪽으로도 분야를 확장하려고 시도 중입니다. 이 부분에 대해 토비오 도련님에 대해 거는 기대가 크지요.”


아. 그제야 작게나마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도 관심이 있는 분야의 사업을 맡게 되겠구나. 아주 조금은 납득이 갔지만 그것만으로는 완전한 답이 되지 않았다. 하지만 제 의문을 후지무라에게 표출할 필요 또한 없었다.


“토비오 도련님께서 원체 배구 말고는 관심이 없지 않으셨잖습니까, 하하하.”

“하하….”


어쩐지 진심으로 기분이 좋아 보이는 후지무라의 모습에 멋쩍게 웃었다. 표정에 감정이 잘 드러나지 않는 사람임을 알기에 더더욱 어색하기 짝이 없었다.


“그래서 결혼 이야기가 나오기도 했었거든요. 연애에는 도통 관심이 없으신 것 같으니, 차라리 집안에서 결정하는 게 어떻겠냐고요.”

“아….”

“그런데 토비오 도련님께서 결혼을 전제로 교제하시는 분이 계셨다니, 정말 놀랐습니다.”


이번에도 입술을 달싹거리는 게 고작이었다. 하지만 분위기가 아까만큼 불편하지는 않았다. 어째서일까. 이미 알고 있던 이야기를 다른 사람의 입을 통해 듣는 것은 사뭇 기분이 달랐다. 결혼 이야기가 정말로 나오긴 했었구나. 애꿎은 카게야마를 의심했던 것에 대해 조금은 미안한 기분이 들었다.


“그것도 상대가 오이카와 씨 같은 분이니, 제가 얼마나 안심했는지 모르실 겁니다.”


그 순간 차가 멈춰섰다. 도착했습니다. 평소와 똑같은 목소리에 대답할 타이밍을 놓치고 말았다. 어쩌면 상대는 대답을 바라지 않았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문득 치밀었다. 결국 후지무라에게 반문하는 대신 얌전히 차에서 내렸다. 곧바로 앞에서 기다리고 있는 카게야마를 발견한 탓이었다.


“들어가요.”


후지무라에게 가볍게 인사한 카게야마가 곧바로 발걸음을 올겼다. 감사하다는 짤막한 인사와 함께 발을 떼자 이제는 익숙한 정장을 입은 상대가 눈에 들어왔다. 불과 한달 전까지만 해도 어색하기 그지 없었는데. 사람의 적응이란 이리도 빨랐다.


내부로 들어서기 무섭게 웨이터가 두 사람을 안내했다. 방금 전까지 편하지 않은 이야기를 나눴던 탓인지 어쩐지 입이 쉽사리 떨어지지 않았다. 근래에는 어떤 일이 있었다던가, 오이카와 씨의 요즘 연습은 어떠냐던가, 쉴 틈 없이 말을 붙이는 카게야마에게도 짤막하게 대답하는 게 고작이었다.


“토비오, 배구 왜 포기했어?”

“포기요?”


안내받은 테이블에 앉으며 나지막한 목소리로 물었다. 먼저 자리에 앉은 카게야마가 퍼뜩 고개를 들었다. 마주친 시선에서 영문을 모르겠다는 의아함이 엿보였다.


“포기라는 건 무언가를 더 이상 할 수 없거나, 아니면 그럴 자신이 없어서 그만 둘 때 쓰는 말 아닌가요?”


그 말에 이번에도 말문이 막혔다. 이 녀석이 언제 이렇게 논리정연하게 말할 수 있는 사람이 됐지. 이따금 시험기간이 되면 국어 단어의 뜻을 달달 외우던 모습이 스쳐지나갔다. 카게야마가 덧붙인 설명을 듣고 나서야 뒤늦게 아차, 하는 생각이 들었다. 적어도 지금 그가 한 말이 틀리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저는 배구 포기한 적 없는데요.”

“미안, 내가 말실수 했네.”


순순히 인정하자 의외로 카게야마는 대수롭지 않게 고개를 끄덕였다. 기분이 상하지는 않은 모양이었다. 단지 입 안이 바싹 마른 쪽은 오이카와였다. 분명 물어보고 싶은 이야기가 있는데 운을 잘못 떼어버린 기분이다. 애써 시선을 피하며 물을 한 모금 들이켰다.


“포기한 건 아니지만 그만 하기로 결정하는 건 좀 힘들었어요.”

“응. 나도 많이 놀랐으니까.”

“그렇지만 가업이니 뭐니 하는 문제에 계속 신경 쓰면서 배구를 같이 하는 건 쉽지 않으니까요.”


마찬가지로 카게야마가 물을 한 모금 들이켰다. 본인은 알아채지 못한 것 같지만 그렇게 말하는 표정이 조금 일그러져있었다.


“그렇게 무언가를 병행하면서 할 수 있는 길이라고 생각하진 않아요.”

“…….”

“그런 순간에도 오이카와 씨 같은 사람은 배구 하나만 보고 달려가고 계실 테니까요.”


그 말에 숨을 삼켰다. 카게야마의 목소리는 무덤덤했지만 평소와 같지는 않았다. 그렇게 말하는 모습에는 분명 짧지 않았을 고뇌가 엿보였다. 간신히 고개를 들어 마주친 카게야마의 표정은 의외로 평온했다. 진심으로 배구만을 생각했기에 내릴 수 있는 결론이라고, 그가 내뱉는 말을 들으며 생각했다.


배구가 아닌 다른 길을 선택한다는 것은 카게야마 토비오라는 사람에게 있어 결코 쉽지 않은 일이었을 것이다. 그는 커다란 사업을 제대로 이어 받을 자신이 없어 배구를 선택할 사람과는 거리가 한참 멀었으니까. 하지만 배구에 전념할 수 없다면 더 모든 것을 쏟아 부을 수 있는 길을 선택할 포부가 있는 사람이었다. 카게야마에게는 분명 재능이 있었다. 무언가에 제 노력을 온전히 쏟아 부울 수 있는 것 또한 어떻게 재능이 아니겠는가.


거기까지 생각이 미치고 나서야 마음이 차분해졌다. 고작 블랙카드 한장을 받은 것을 계기로 많은 것이 변했다고 생각했다. 카게야마가 경영권을 승계받기로 결정했다면 분명 그 분야에 있어서도 독종이 될 터였다. 배구를 하지 않는다고 해서 카게야마 토비오라는 사람이 변할 리는 없으니. 그래, 그렇다면. 자신이 알던 카게야마 토비오라는 사람과는 조금도 다르지 않았다.


“토비오, 결혼을 전제로 사귀어달라고 했었잖아.”

“네.”

“생각은 해봤어.”


가볍게 숨을 내쉬었다. 급작스런 변화에 당황한 건 사실이지만 언제까지고 그 격류에 휩쓸린 채로 남을 수는 없었다. 그래, 그게 너의 선택이라면. 이 필연적인 변화를 받아들이는 수밖에 없었다.


“그래, 그렇게 하자.”

“정말요?!”

“응. 근데 말이야.”


카게야마와 똑바로 시선을 마주쳤다. 처한 상황은 순식간에 변했지만 그것이 곧 관계의 변화를 의미하지는 않았다. 이제까지 쌓아왔고, 앞으로도 이어질 이 관계는 그렇게 쉽게 무너질 것이 아니었으니.


“난 네가 국가대표에서 날고 기는 배구 선수든, 아니면 잘나가는 재벌 기업의 사업가든, 질 생각은 조금도 없어.”


처음부터 이 조금도 귀엽지 않은 후배에게는 무엇도 따라잡히고 싶지 않았다. 설령 배구가 아니더라도 이 사실 하나만큼은 분명했다.


“너희 집안에서 모셔갔다는 이야기 듣게 할 테니까.”


그러니 이것은 일종의 선전포고였다. 네가 어떤 사람이 되고, 어떤 위치에 있든 절대지지 않겠다는. 몇 년 후가 되더라도 이 정도쯤 되는 대기업의 외아들과 결혼한다는 사실은 분명 세간의 화제를 모을 터였다. 제 아무리 유망한 배구선수로 추앙받는다 하더라도 누군가는 그의 입지에 비할 순 없을 거라고 비웃을 지도 모른다. 분명 그렇지만,


“저도 안 질 겁니다.”


적어도 눈앞의 이 사람은 아니었다. 코트 위에서 마주했을 때처럼 승부욕이 불타는 눈동자에 가볍게 웃었다. 우리의 시합은 언제나 선의의 경쟁이라고 하기엔 지나치게 과열되어 있었다. 하지만 한 가지 분명한 사실은, 죽기 살기로 배구를 해야 할 이유가 한 가지 늘었다는 것이다.


그렇게 다시 눈을 마주치고 나서야 가벼운 웃음과 함께 메뉴를 고르기 시작했다. 카게야마에게 받은 블랙카드는 한동안 제 자리를 지킬 듯싶었다. 새로운 경쟁이 출발선에 다다를 때 까지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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