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처돌이님께 드리는 연성교환입니다.

-한국 대학AU 드림글입니다.









딩동-.


벨소리가 명랑하게 울렸다. 셰인은 멍하니 앞을 바라보다가 놀라 오른쪽 출입문을 화들짝 돌아보았다. 편의점에 들어오는 낯선 손님과 어색하게 눈이 마추쳤다.


"...어서 오세요."


손님은 셰인의 어색한 인삿말을 무시한채 그대로 직진해 음료 코너 쪽으로 갔다. 셰인은 입술을 살짝 앙다물었다. 오늘 아르바이트가 끝나려면 딱 한시간 반 남았다. 평일 저녁 열 시부터 새벽 세 시까지가 셰인의 근무 시간이었다.


지금 내가 뭐하는 짓이지.


셰인은 조소를 흘리다가 표정을 가다듬었다. 연락도 무시하고 있는 주제에 혹시 오늘 한번쯤 만나러 와주지 않을까 하고 기대하는 자신이 우스웠다. 분명 그 애는 셰인이 어떤 생각을 하고 있는줄 전혀 모를텐데.


손님은 카운터에 가져온 물건을 올려놓았다. 셰인은 고개를 숙이고 물건을 하나하나 집어 바코드를 찍었다. 물건은 별 거 없었다. 전부 자취하는 대학생이 이 시간에 야식으로 사 먹을만한 것들 뿐이었다. 생수 한 병, 스트링 치즈, 과자 한 봉지, 불닭볶음면......

셰인은 불닭볶음면을 손에서 떨어뜨릴 뻔 하다가 다시 집었다. 셰인은 힐끔 손님의 눈치를 살폈다. 손님은 놀랐던 듯 하지만 별 말하지 않았다. 셰인은 헛기침을 내맽고 포스기를 보았다. 


"5600원입니다."


 손님은 카드로 계산을 하고 곧바로 떠났다. 조자24시에는 다시 셰인 혼자 남았다. 셰인은 다시 모니터에 적힌 시간을 들여다보았다. 겨우 오분 밖에 지나지 않았다.


"...시발."


혼자 새벽 편의점을 지키고 있을 때 좋은 점은 근무 중에 욕을 할 수 있다는 것이었다. 편의점 근무를 시작한 첫날 셰인은 점장 모리스의 면전에 대고 쌍욕을 내뱉고 싶은 걸 어렵게 참아야만 했다.


물론 욕을 내뱉는다고 몰려오는 짜증과 초조함이 사라지지는 않았다. 속시원히 소리치지도 못하고 나직하게 말하니 오히려 울화가 더 치밀 것만 같았다. 심야의 편의점에선 에어컨이 돌아가는 소리만이 들릴 뿐이었다. 공기는 살짝 차가울 정도로 서늘했다. 청소를 끝낸지 얼마 안 되어서 새하얀 바닥은 매끈하게 광택이 났고 모든 물건은 열에 맞게 진열대에 놓여 있었다. 셰인은 진열대에 새겨진 웃는 사람의 얼굴을 흉내낸 새파란 조자 로고와 캐치프라이즈를 보며 눈썹을 치켜세웠다.


함께하라. 번영하라.


개소리였다.


함께 번영하고 싶으면 학교에 돈이라도 더 많이 뿌릴 것이지.


웃는 모양의 조자로고를 볼때마다 그 면상을 때리고 싶었다. 물론 조자 로고는 조자 대학 근처 어디에나 있으니까 말도 안 되는 소리였다. 그러니 조자 기업 출신이라는 총장의 면상이라도 한 대 칠 수 있다면 소원이 없을 것 같았다. 새로운 총장은 체육대학 예산을 삭감하고 새로 신설한 IT기술전자공학과에 예산을 몰아주었다. 덕분에 셰인은 이번 학기 성적 장학금에서 떨어졌다. 어차피 아슬아슬한 성적이긴 했지만 다른 장학금 신청도 마찬가지였다. 그나마 국가장학금 때문에 버틸 수 있었다. 하지만 덕분에 편의점 아르바이트를 연장하게 되었다. 학기 중에 편의점 야간 아르바이트라니. 미친 짓이었지만 달리 방법이 없었다. 가만히 벤치에 앉아있기만 해도 학교 선수 장학금을 받을 수 있던 때와는 달랐다. 셰인의 집은 이미 셰인의 치료비로 '할 만큼 했다.'는 생각이었다. 셰인은 자신도 할 만큼 했다고 그렇게 생각했다. 하지만 지랄맞게도 학교는 계속 다녀야했고, 알아서 생활비를 벌어와야 했다. 결국 셰인은 모리스에게 그만 둔다는 말을 한 다음주에 다시 일하고 싶다는 말을 할 수밖에 없었다. 차차는 이미 그만 둔 뒤였는데도.



셰인은 입술을 앙다물었다. 한밤중 에어컨과 냉장고가 돌아가는 기계음을 들으며 멍하니 편의점을 바라보다보면 종종 차차와 함께 일했을 때가 떠올랐다. 저 쪽은 차차와 함께 폐기 삼각김밥을 먹었던 창고였고, 눈 앞을 보면 차차가 좋아하는 과자와 불닭볶음면이 보였다. 차차는 늘 매워서 힘들다면서도 불닭볶음면을 남기지 않고 다 먹었다. 차차가 컵라면을 엎질러서 눈물을 글썽거렸던 날도, 돈이 부족해서 초코칩쿠키를 사먹지 못한 어린이를 위해 자기 돈으로 대신 계산해주던 날도 기억났다.



셰인과 차차가 함께 일했던 시간은 사실 얼마 되지 않았다. 조자대학 옆 빌라 일층에 있는 이 편의점은 작은 편은 아니었지만 사실 내내 두 사람이 일해야할 정도로 큰 지점은 아니었다. 셰인은 취객들이 편의점에 몰려올 때마다 자기가 두 사람으로 분해되어서 일손이 더 생겼으면 좋겠다고 생각했지만, 모리스가 그렇게 생각할 리가 없었다. 모리스는 인건비를 최대한 아끼려는 점주였다. 하루 중 가장 바쁜 저녁 시간대 딱 한 시간. 함께 할 수 있는 시간은 그 때뿐이었다. 


처음에는 함께 일하는 게 거슬렸다. 차차가 일을 미루거나 실수가 잦거나 그런 문제는 아니였다. 좁은 카운터에서 계속 함께 서서 손님 맞는 일이 어색했다.

차차는 늘 손님들에게 친절하게 먼저 인사를 건넸다. 특유의 명랑한 목소리로 '안녕하세요~!' 라고 인사를 건네면 대부분은 고개를 끄덕이거나 웃으며 차차의 인사에 답을 해주었다. 손님이 들어거나 말거나 멀뚱하게 허공을 보다 계산만 해주고 마는 자신과는 딴판이었다. 차차와 함께 일하는 모습을 본 다음날 모리스는 셰인에게 '서비스 정신이 부족하다'고 말했다. 불친절하다는 거였다. 지랄하지 말라는 말이 목 끝까지 올라왔지만 애써 웃었다. 모리스는 한숨을 쉬더니 그냥 계속 안 웃는 게 나을 것 같다며 일 좀 똑바로 하라는 말만 남겼다.


셰인은 차차와 친하게 지내려는 생각을 한 적이 없었다. 차차와 비교되는 게 불편했던 건 아니었다. 그저 각자 할 일을 똑바로 하고, 어색하다 하더라도 서로 적당히 무시하며 자기 할 일을 하는 사무적인 관계를 원했다. 그 정도 사이면 충분하다고 생각했다. 자신은 차차같은 사람과는 가까워질 수 없다고 생각했다. 그렇게 밝고, 웃음이 많은 사람은 셰인과는 다른 종류의 사람이었다. 그래서 같은 공간에 있다 하더라도 가까워 질 수 있는 일은 없다고 믿었다.

웃는 상으로 지내는 차차와 늘 떫은 얼굴로 사람을 맡는 자신의 온도차는 차차와 함께 근무한 첫날부터, 누구보다도 잘 느꼈다. 그래서 차차가 거북하지는 않았지만 함께 지내기엔 꺼림칙했다. 

그러나 차차는 셰인에게 계속 말을 걸었다.


"셰인! 어제 저녁으로 혹시 제육볶음 삼김 폐기 남은 거 먹었어?"


어느 날은 유니폼을 입기도 전에 카운터 앞까지 와서 인사를 하며 그렇게 물었다.


네가 그걸 왜 물어보냐고 물으면


"응? 너 제육볶음맛 좋아하지 않았어...? 어제는 안 팔리길래 네가 먹으면 좋겠다 싶어서!"


라면서 웃었다. 그런 식이었다.


셰인은 매운맛을 좋아한다고 말한 적이 없었다. 하지만 가끔 손님이 몰리고 빠져나갈 시간에 번갈아가며 저녁 식사를 할 때 차차는 셰인이 무엇을 먹는지 살펴보던 모양이었다.

그 뒤로 셰인은 차차가 저녁으로 뭘 먹는지 신경이 쓰였다. 차차가 좋아하는 삼각깁밥은 계산할 때 망설여지기도 했다. 차차가 옆에서 아쉬운 눈빛으로 삼각김밥을 뚫어지게 봐서 그랬을까. 



저녁식사는 비품 창고에서 하곤 했다. 열린 문 틈으로 사각 플라스틱 의자에 앉아 테이블도 없이 다리를 붙여 앉아 무릎 위에 먹을 것을 올려 놓고 밥을 먹는 차차의 모습이 보였다. 차차는 라면을 먹을 때 긴 머리가 흘러내리지 않게 조심하면서 머리카락을 쓸어넘기고, 한 손으로는 라면을 잡고 한 손으로는 젓가락을 들었다. 뜨거운 라면을 젓가락으로 들어 후후 불다가 후루룩 삼키면 입꼬리가 호선을 삼키며 올라가고 동그란 갈색 눈동자가 반짝였다. 불닭볶음면을 먹을 때면 너무 매워서 혀를 다 내놓고 부채질을 하기도 하고, 생수를 벌컥벌컥 들이마시기도 했다. 맵다고 소리치는 개운하다는 듯 즐겁게 먹으면서 입가를 비비는 모습이 숨겨놓은 도토리를 혼자서 즐겁게 먹는 다람쥐가 생각났다. 일부러 보려고 한 것도 아닌데 눈길이 갔다.



"오늘도 그거 먹게?"


차차가 불닭볶음면과 폐기 삼각김밥을 들고 비품 창고로 들어가려던 날, 셰인은 차차에게 먼저 말을 걸었다. 업무와 관련없는 잡담은 먼저 시작한 적이 거의 없었다. 차차는 놀란듯 잠시 셰인을 빤히 바라보다가 황급히 고개를 끄덕였다.


"왜 평소에 먹던 거 안 먹고."


원래 차차는 그렇게 맵지 않은 라면만 골라 식사를 했다. 차차가 목을 가다듬고 말했다.


"어...먹어보니까 맛있다 싶어서."


차차는 민망한듯 눈을 이러저리 굴리다가 양손에 든 컵라면을 꼭 껴안았다. 힐끔 자신을 올려다보는 시선이나 망설이며 대답하는 모습에서 감정이 그대로 보여서 우스웠다. 그렇다고 정말 우스운 게 아니라 웃음이 나오는 느낌이었다.


"전에는 너무 매울 것 같다며."


"아니...네가 맛있게 먹는 거 보니까 나도 한번 먹어볼까 했어." 


차차는 머쓱한듯 뒷머리를 손으로 긁으며 웃었다. 입을 크게 벌린 환한 웃음이었다. 셰인은 차차의 시선을 피했다. 매장 벽면에 붙여진 거울에 웃고 있는 자신의 모습이 보였다. 차차의 해맑은 웃음은 보다보면 따라웃게 되는 힘이 있었다. 









아침에 자다 막 일어난 목골로 슬리퍼를 끌고 나와 빌라 앞에서 마주쳐도 차차는 해맑게 인사를 했다. 셰인은 차차가 자신의 자취방 맞은편 빌라에 산다는 걸 그날 처음 알았다. 같이 아르바이트를 시작한 지 두 주쯤 지났을 때였다. 한 손에는 폐휴지 봉투를, 다른 쪽 손에는 플라스틱이 가득한 쓰레기봉투를 들고 면도도 하지 않은 목골로 골목에서 딱 마주치는 건 분명 유쾌한 만남은 아니었다. 주말 아침의 차차는 넉넉한 반팔 티셔츠에 트레이닝복 바지를 입은 차림이었다. 분명 같은 트레이닝복인데도 자신이 일어나자마자 눈에 보이는대로 집어 걸치는 추리닝과는 다르게 말끔했다. 숱많은 연갈색 머리카락은 포실하게 뭉쳐서 한번 만져보고 싶을 정도로 탐스러워 보였다. 화장기가 없는 얼굴에선 나른함이 한껏 묻어나왔다. 그러면서도 안색만은 칙칙한 곳 하나 없이 환했다. 차차는 눈도 제대로 뜨지 못하고 하품을 내뱉었다.



"흐암~. 안녕!" 


차차는 주저하지 않고 다가와 인사를 건넸다. 셰인은 차차가 있었던 줄 몰랐던 척 플리스틱 수거함에 페트병을 밀어넣었다. 삼월이었지만 아침 햇살이 강해서 눈살이 찌푸려졌다. 등 뒤에서 땀 한방울이 흘러내렸다. 오른쪽 팔꿈치 끝이 저릿했다. 

차차가 먼저 인사할 것이라는 생각은 해보지도 못해서 당혹스러웠다. 당연히 자연스럽게 못본 척 지나갈 줄 알았는데. 아니, 사실은 그냥 자신을 보지 못하기를 바랐다.


"...안녕."


지나치게 퉁명스러운 인사였다.


"어, 아침부터 분리수거하는 거야? 성실하다."


차차는 셰인의 어색한 인삿말을 애써 넘기며 더 가까이 다가왔다. 셰인은 어깨를 살짝 움츠리다가 서둘러 빈 쓰레기봉투를 비닐수거함에 넣었다. 


"아니. 딱히..."


미루다가 이따 수거해갈 테니까 하는 거라는 사실을 굳이 구차하게 설명하고 싶지 않았다.


"셰인, 혹시 아침 먹었어?"


쓰레기를 전부 버리고 빈 손으로 뻘줌하게 선 셰인을 보며 차차가 물었다. 뜬금없는 질문에 대답할 타이밍을 놓쳤다.


"나 아직 아침 먹으려고 백반집 가려는데 같이 갈래?"


백반집이라. 구미가 당기기는 했다. 제대로 된 밥 같은 밥을 먹은 것도 오래됐다. 뜨끈뜨끈한 흰쌀밥에 아삭아삭한 김치, 얼큰한 김치찌개가 그리웠다. 게다가 백반집은 혼자 들어가서 먹기엔 뻘줌하다는 점 덕분에 간지 오래되었다. 친구들끼리 모이면 항상 술집만 가게 되고, 혼자서 먹기엔 너무 거창했다.


"아직 안 먹긴 했는데."


셰인은 머뭇거리며 답했다. 잘 알지도 모르는 여자애랑 둘이서 아침 식사라니. 아니, 차라리 앞으로 볼 일이 없는 사람이면 모를까. 앞으로 몇 개월은 계속 같이 일할 사이니까 더 신경쓰였다. 거절해야 될 것 같기는 한데 백반집은 가고 싶었다.


"그럼 같이 먹자."


차차가 한손으로 주먹을 꼭 쥐더니 행군할 때 슬로건을 외치는 운동가처럼 팔을 뻗고 외쳤다.


"밥 먹으면 기분 좋아져!"


그러더니 천천히 팔을 내리더니 엄지손가락을 손가락 사이에서 내밀어 '좋아요' 마크를 만들었다.


"...그러냐?"


자기도 모르는 사이 실소가 나왔다. 더 이상 등줄기에서 땀이 흐르는 것 같지 않았다. 웃자마자 기대하는 눈빛을 숨기지 못하고 자신의 대답을 기다리는 차차의 모습이 귀여웠다.


"그래."


셰인은 차차를 앞서 골목을 나섰다. 차차가 달리는 것처럼 경쾌한 발걸음으로 자신을 쫓아왔다.


"근데 그럼 네가 사주게?"


뒤돌아서 차차를 향해 물어보자 멍하니 셰인을 바라보는 차차의 동공이 거세게 흔들렸다. 아마 머릿속으로 이번 달에 돈을 얼마나 썼는지 계산하는 것만 같았다.


"어, 응? 그...그럴게!"


그렇게 간신히 대답하면 대체 누가 당당하게 얻어먹을 수 있는지. 셰인은 스스로 낯짝이 두꺼운 놈이라고 생각했지만 그 정도는 아니었다. 


"농담이야."


 입꼬리가 올라가는 걸 멈출 수가 없었다. 심장이 찔리는 것처럼 아파서, 속이 살짝 울렁였다. 


"어? 어? 아니, 근데 나 진짜 괜찮아. 내가 먼저 먹자고 했으니까..."


차차는 성급하게 말을 내뱉으며 셰인의 얼굴을 살폈지만 셰인은 손을 휘휘 내저으며 필요 없다는 제스처를 취했다.


"됐다니까. 내가 왜 너한테 얻어먹고 다니냐."


"내가 사준다니까! 참, 말을 해도 그렇게..."


그렇게 아웅다웅 대면서 백반집까지 함께 갔다. 밥 먹는 동안에 어색할 것 같다는 셰인의 예상과는 달리, 둘다 열심히 간만에 집밥-은 아니지만 집밥같은-밥 먹는데에만 집중해서 어색할 틈도 없었다. 그렇게 같이 아침 식사를 하고 매운 걸 먹었으니까 입가심하게 커피를 마셔야한다면서 카페에서 아이스 아메리카노도 시키러 갔다. 그게 시작이었다. 



아침이 아니더라도 그들은 계속 마주쳤다. 낮에 창문을 열고 아래를 내려다보면 맞은편 빌라에서 조자 편의점으로 열심히 달려가 출근하는 차차의 모습이 보였다. 가끔은 퇴근 뒤 셰인 혼자 일하는 야간에 차차가 편의점에 찾아와 야식을 사기도 했다. 그들의 마주침은 사실 지극히 당연한 일에 가까웠다. 번화가도 아닌 지방의 작은 대학가에서 휴학생은 할 일이 별로 없었다. 좁은 동네라서 다니는 곳도 한정되어 있었고, 같은 곳에서 아르바이트를 하니 생활 패턴도 고정되어 있었다. 편의점 밖에서 유니폼을 걸치지 않고 차차를 마주칠 때면 초라한 목골에 민망하기 그지없으면서도 이상하게 불편하다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눈꼽도 제대로 떼지 못한 얼굴부터 보여서 그랬을까. 편한 모습이 익숙해졌다. 


차차는 함께 밥 먹고, 카페에 가서 수다 떠는 걸 좋아했다. 자신은 정작 별 말을 하지 않았는데도 항상 차차가 먼저 이런 저런 이야기를 해주어서 어색한 정적 없이 시간을 함께 보낼 수가 있었다. 차차는 셰인 말고도 다른 친구들이 많았는데도 '동네 친구'라며 셰인과 곧잘 어울렸다. 주말에는 통학생들이 학교에 오지 않으니 차차로서도 함께 밥 먹고 놀 만한 친구가 없었다. 셰인도 혼자 먹는 밥이 지겨워진 참이었다. 복학했을 때부터, 셰인은 학교에 '친구'라고 부를 만한 사람이 더 이상 남아있지 않았다. 셰인은 먹는 걸 좋아했고 혼자서도 뭐든지 잘 해먹는 편이었지만 혼자 사는 자취생이 쥐꼬리만한 식비로 해먹을 수 있는 음식은 몇 개 없었다. 곧 혼자 요리해먹는 것도 시들해졌다. 

그래서 만날 때에는 늘 밥 핑계를 댔다. 같이 밥 먹자고 만나다가 법 먹고 카페에 가고, 저녁에는 포차에 가서 안주 하나 시키고 같이 술을 마셨다. 차차가 취해서 비틀거리면 부축하면서 자취방까지 데려가 도어락 비밀번호를 눌러주고 현관을 닫아주는 건 셰인의 몫이었다. 자주 마주치고, 평일 내내 편의점에서 일하고 주말에 또 만나서 같이 밥 먹으러 가고. 나중에는 ㅂ? 카톡 하나만 보내도 밥 먹으려고 집 앞에서 만나게 되었다.


그렇게 봄과 여름을 함께 보냈다. 계속 학교에 다니는 다른 친구들과는 다소 거리감을 느끼고, 편의점과 자취방 밖에 갈 곳 없는 그 시간에 차차는 셰인과 늘 함께 있었다. 분명 어울릴려고 한 적은 없었다. 가까워지리라 기대한 적도 없었고 그런 바람도 없었다. 그러나 비오는 날 가랑비에 옷이 젖는 줄도 모르는 것처럼, 차차는 어느새 셰인의 일상에 스며들어 있었다.










가을학기가 시작됐다. 차차도 셰인도 복학했고, 다시 학교를 다니는 차차는 꽤나 바빠보였다. 셰인도 셰인대로 학교에 다니라, 아르바이트 하느라 바빴다. 이전처럼 매일같이 만나 같이 밥 먹을 수는 없었다. 같이 편의점에서 일 할 때, 아무때나 연락하기만 하면 만날 수 있었던 때와는 달랐다. 체육대학은 시험 기간 때가 아니면 딱히 바쁘지 않았고 선수도 아닌 셰인은 실기 성적 유지를 위해 매일 가볍게 운동하는 수준에서 그치고 했다. 그러나 차차가 다니는 미술대학은 많은 과제량과 특유의 야간작업으로 악명이 높았다. 아직 학기 초인데도 차차는 과제를 준비하느라 동아리 활동을 하느라 분주해 보였다. 


그래도 잠시나마 만날 수 있었다. 차차는 셰인이 일하는 시간에 편의점에 꼬박꼬박 들러서 간식이나 컵라면, 삼각김밥 따위를 사갔다. 차차에게 편의점 음식으로 밥을 때우지 말라고 하면, 너부터 제대로 챙겨먹으라는 잔소리를 듣기도 했다. 차차 덕분에 새 알바생 샘과 덕분에 금방 친해기도 했다. 샘과 함께 근무할 때면 주로 차차와 샘이 수다를 떨고 셰인은 그런 둘에게 대충 답해주는 역이었다. 혼자 손님을 맞으며 샘에게 너도 일하라며 눈총을 주긴 했지만, 진심으로 짜증났던 적은 없었다. 샘은 셰인이 정말 편하게 대할 수 있는 몇 안 되는 학교 사람이었다.



"차차 누나는 근데 왜 맨날 여기 오는 거래요? 


어느날, 드물게 한산할 때 샘이 물어보았다. 차차가 편의점에 매일같이 드나드는 게 일상처럼 된 뒤였다.

"그게 왜?"


셰인은 못마땅해하는 기색을 숨기지 않고 역으로 샘에게 질문을 돌렸다. 


"아니, 차차 누나 싫다는 건 아니고요. 궁금해서요. 나는 점장님이랑 마주치기 싫어서라도 이 편의점은 피해 다닐 것 같은데."


샘은 손을 휘저으며 당황한 듯한 웃음을 지었다. 그러나 셰인은 삐딱한 태도를 풀지 않고 답했다.


"낸들 아냐. 차차한테 물어보든가."


"혹시 나랑 노는 게 너무 좋아서? 아니라면 혹시...축제 때 노래 부르는 내 모습을 보고 역시 우리 밴드 팬이 되기로 한 건가?!"


샘이 장난스럽게 외치며 손으로 입을 막아 놀라는 모양새를 취했다. 샘은 손님 없이 한산할 때면 물어보지도 않은 이야기를 꺼내면서 수다를 떤다든가 이런저런 시답잖은 농담을 던지면서 장난치는 걸 즐겼다. 그런 샘이 처음에는 귀찮게 느껴지기도 했다. 하지만 셰인 앞에서 지나치게 긴장해서 어색하게 뻣뻣한 군대식 인사를 하고 뒤에선 몰래 속삭이는 체대 후배들과는 달리 자신을 어려워하지도 않고 살갑게 형, 형 하면서 따르는 모습이 싫지만은 않았다.


"차차는 애비게일 드럼 파트가 제일 좋다던데."


셰인이 무뚝뚝한 척 핀잔을 주자 샘은 입을 볼록 내밀고 투덜거리며 '애비게일은 힘으로 무식하게 다 밀어버리는 거다.' 라는 식의 불평을 털어놓았다.셰인이 별다른 호응을 하지 않자, 잠시 정적이 깔렸다. 그때 샘이 셰인을 돌아보며 물었다.


"아니면 차차 누나, 혹시 형 보려고 오는 거 아녜요?"


순간 무엇이라 대답할지 몰라서 당혹했다. 흥미진진하다는 표정으로 자신의 옆얼굴을 살피는 샘의 시선이 느껴졌다. 셰인은 표정을 무표정하게 가다듬었다.

"걍 걔네 집이 바로 이 앞이니까 오는 거잖아. 가까운 데 놔두고 뭐하러 멀리 돌아가냐."

처음부터 그렇게 말해줬으면 좋았을 거라는 샘의 볼멘소리가 제대로 들리지 않았다. 지금 자신이 평소와 같은 불퉁한 표정을 짓고 있는 건지 확실할 수가 없었다. 순간 내려앉은 심장은 제 속도로 뛸 줄 몰랐다.


어디까지 눈치 챈 거지?


샘의 말을 듣자마자 그 의문밖에 들지 않았다. 차차가 매일같이 편의점에 오니까 마치 자신을 보기 위해 와주는 것 같아서 좋았던 그 흑심이 전부 까발려진 것만 같아 섬칫했다. 가까운 편의점이고, 친구라서 자주 와주는 걸 알면서도.


언제부터 차차를 좋아하게 된 건지는 몰랐다. 혹시 같이 아침 식사를 하자고 씩씩하게 말했을 때, 아니면 제육볶음밥 삼각 김밥을 챙겨줬을 때부터, 어쩌면 무뚝뚝하게 대답해도 허물 없이 싱긋 웃는 낯으로 답해준 첫날부터...차차가 좋았던 것만 같았다.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아니었기만을 바랐지만 어쩔 수가 없었다. 이 녀석한테 나 같은 게 될 리가 없다고 수없이 생각하면서도. 어쩌면 거리를 두는 게 최선이라는 걸 알고 있는데도. 기껏 얻은 친구 자리를 잃을 수는 없었다.


차차를 보고 있을 때면, 산산히 조각났다 다시 맞춰지면서 팔꿈치가 아프지 않았다. 대신 가슴께가 저릿하게 쓰려왔다. 







체육대학과 미술대학의 거리는 빈말로도 가깝다고 할 수 없는 거리였다. 하지만 오고가다 보면 미대 앞에서 차차를 만날 때도 있었다. 셰인이 체육관에서 나와 자취방으로 내려가는 길목은 차차가 다니는 미술 대학 건물 앞을 지났다. 셰인은 종종 차차를 발견하지 못하기도 있었다. 쉬는 시간이나 수업 끝난 직후에 마주치면 차차는 늘 같은 학과 사람들에게 둘러싸여 대화하는 중이었다. 친구들의 모습에 차차가 가려지기도 했다. 

셰인은 주머니에 손을 찔러넣고 짙은 피로감을 감추지 않은 채 터덜터덜 캠퍼스를 거닐었다. 다른 학생들도 꼭 말끔한 차림은 아니였지만, 체육대학 학생들은 늘 학교 로고가 크게 찍힌 과잠바나 바람막이, 학교 유니폼을 입고 다녔다. 하지만 셰인은 절대 학교 마크가 들어간 옷은 걸치지 않았다. 면도도 하지 않고 추리닝 반바지에 낡은 후드집업을 걸치고 다니니 학교 학생이 아니라 외부인이라고 오해 받은 적도 있었다.


셰인은 차차의 친구들이 보이면 거리를 두고 걷는 습관을 들였다. 시각 디자인과 과잠을 걸친 사람이 한 명이라도 보이면 더 구석진 곳으로 들어가 앞만 뚫어져라 쳐다보기도 하고, 후드집업을 뒤집어 쓰기도 했다. 하지만 차차는 어김 없이 차차는 셰인의 이름을 불렀다.셰인을 부를 때면 차차의 또랑또랑한 목소리가 높이 올라갔다. 차차는 셰인의 이름을 큰소리로 불렀다. 큰소리로 부르면 자기 목소리가 들리면 셰인이 꼭 대답할 것이라 믿는 사람처럼.

"셰인, 안녕!"

셰인이 그 소리에 뒤를 돌아보면 차차는 씨익 웃었다.

셰인은 친구들 사이에 낀 차차를 보면 어색하게 '안녕'이라고 중얼거리듯 말하고 계속 걸어갔다. 차차는 친구들이 조금 기다리더라도 신경쓰지 않는지 인사를 하고도 시시콜콜한 잡담을 이어갔다. 셰인은 차차의 말에 착실하게 대답했다. 점차 시간이 지날수록 셰인도 '어제도 야작했어? 오늘 머리 안 감고 온 거 아니냐?' 같은 장난을 치기도 했다. 그러나 셰인은 차차처럼 티끌 하나 없는 웃음을 지을 수는 없었다.

늘 무리 속에 있는 차차와 혼자 캠퍼스를 가로지르는 자신.  다른 영역에 속한 사람이라는 것이 그때만큼 실감날 때가 없었다.

캠퍼스의 차차는 종종 밤샘 작업에 지쳐 파리할 정도로 창백했다. 편의점에 손님이 많아도 치치가 그렇게 지쳤던 적은 한번도 없었는데, 어느 날 미대 앞에서 본 차차는 계단에 앉아 친구의 어깨에 머리를 기대고 햇빛을 쬐며 꾸벅꾸벅 졸았다. 밥 먹으러 가야한다고 친구들이 차차의 어깨를 잡고 흔들어도 차차는 눈꺼풀을 굳게 닫은 채로 힘 없이 몸을 흔들며 제 정신이 아닌 모습을 보이기도 했다. 차차는 개강 첫 주가 지나자 청바지에 까만 바람막이 과잠을 걸치는 패션을 고수했다. 그러니까 새삼스럽게 처음 보는 예쁘게 꾸민 모습이 신선하고 설렜다든가, 그런 이벤트는 전혀 없었다.


그러나 백 살도 더 되었다는 울창한 참나무 여럿이 바람에 흔들리면 나뭇잎이 스치는 소리에 가슴이 쓰라렸다. 가을의 바람은 거셌다. 바람이 뺨에 닿기도 전에 가로수가 흔들리는 소리가 파도처럼 퍼졌다. 드리운 참나무 그림자 아래서 얼굴을 빼꼼 내밀고 자신에게 손을 흔드는 차차가 있었다. 그림자 사이로 햇빛 한 조각이 차차의 얼굴에 들어왔을 때, 셰인은 눈이 부셔서 얼굴을 찡그렸다. 자신이 무엇을 느끼고 있는지 알기에 차분해질 수 있었다.

단순히 혼자 있을 때는 전혀 느끼지 못하고 편안하기만 했던 고독이 고통이 되어 그의 가슴을 옥죄였다. 혼자서 먹는 밥은 똑같은 밥인데도 차차와 함께 먹을 때처럼 식욕이 일지 않았다.


 셰인은 그제야 비로소 깨달았다. 맨 처음 차차가 다가올 때마다 느꼈던 그 꺼림칙함의 정체를. 차차가 가까이오면 올수록, 밀어내도 태연하게 웃어줄수록. 좋아할 수밖에 없었다. 그 마음을 보답 받지 못하고 그저 대학 시절 친구로 있다가 사라질 사람이 된다고 해도. 외롭고 쓸쓸하게 홀로 곯아가고 있던 자신의 생활을 지탱해준 유일한 사람. 스스로의 무능에 치를 떨면서도 차마 끝내지 못해 마지못해 연명하던 하루하루를 평범한 일상으로 만들어준 사람. 좋아할 수밖에 없었다.

빛은 그 아래에 있는 모두를 품어준다는 걸 알면서도.







-중편에서 이어집니다.






글연성 백업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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