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Flower · Johnny Stimson 







Suddenly 

_만일 내 계절이 바뀌지 않는다면





 

아프다 하고 알바를 재꼈다. 완전히 거짓말은 아니었다. 어제 그런 이후로 계속 어지럽고 몸 여기저기 열이 나는 기분이었으니까. 우리 집은 8층인데 내 방에서 내려다보면 편의점 뒷문이 보인다. 종일 누워서 뒹굴뒹굴하다가 몇 번씩 밑을 내려다봤다. 괜히 그런다. 김태형이 보이는 것도 아닌데.

그냥 알바 간다고 할 걸 그랬나. 오늘따라 하루가 길었다. 쉬면서 생각을 정리하려고 했지만, 오히려 아무것도 하지 않으니까 생각이 더 복잡하게 꼬리를 물고 이어졌다. 거슬린다고, 불편하다고 했던 김태형과 어제 만난 김태형이 나를 사이에 두고 혼란스럽게 했다.

나는 어렸을 때 내리막길에서 아주 크게 넘어진 적이 있었다. 그때 손바닥과 정강이 전체가 피범벅이었다. 그래서 그런 뒤로 나는 별로 크게 경사지지 않은 내리막길도 무서워하게 됐다. 김태형이 나한테 그랬다. 그때의 일이 나한테는 넘어져서 큰 상처가 났던 것보다 더 아팠다. 그래서 아무렇지 않게 김태형을 대하는 게 어떻게 하는 것인지 모르겠다. 그 상황이 불편하고 싫다. 아무리 생각해도 김태형을 다시 본다는 건, 그건 끝도 없는 내리막길을 뛰어가는 기분일 것 같다.

 

 

"박지민 쓰레기 좀 버리고 와."

"엄마 나 아프다니까."

"빨리 갔다 와라."

"아 진짜."

 

 

엄마가 방문을 벌컥 열고 들어왔다. 추워서 나가기 싫은데. 밖은 벌써 해가 져서 어둑어둑했다. 대충 겉옷만 걸치고 운동화를 구겨 신고 나갔다. 쓰레기를 버리고 들어가려는데 아파트 입구 쪽에 낯익은 차 한 대가 주차장 쪽으로 들어왔다. 차에서 그 호빵 매니아 김남준씨가 내렸다. 어? 오늘은 이른 시간에 왔네? 

 


"안녕하세요!" 

"왜 거기서 와요?" 

"아, 저 오늘 일하는 날이 아니라서." 

 


뭐 안하는 건 맞으니까.

김남준씨는 넥타이가 없는 흰색 차이나 카라 셔츠를 입었는데 꽤 잘 어울렸다. 머리는 단정한 포마드 스타일로 넘겼고 시계는 지난번과 다른 브랜드의 디자인이었다. 평소보다 더 차려입은 느낌이라 어디 약속이라도 가는 건가 싶었다.

 


"혹시 저녁 먹었어요?" 

"아니요." 

"타요. 저녁 먹으러 갑시다." 

"네? 지금요?" 

 

 

아뇨 괜찮아요, 하고 거절하려는 찰나였다. 하필 그 타이밍에 카페 뒷문에서 김태형이 나왔다. 어떡하지? 아는 체를 할까? …아니지, 어제 그러고 나서 오늘 알바도 안 갔는데. 이 상황에 어색하게 인사할 바엔 차라리 피하는 게 백 번 낫지. 빠르게 생각을 정리하는 나는 김태형이 내 이름을 부르기 전에 먼저 저녁 먹으러 가자는 말을 건네며 김남준 씨의 차에 올라탔다. 

차가 아파트 단지 내를 완전히 빠져나갈 때까지, 김태형은 꼿꼿하게 거기 서 있었다.

 

 



*


 

 

쓰레기 버리러 나간 아들이 실종됐다고 신고할까 싶어서 엄마한테는 잠깐 친구 만나고 온다고 연락했다. 

차에서 별다른 얘기는 하지 않았다. 왜 갑자기 저랑 저녁을 먹자고 하세요? 물어보기엔 내가 먼저 스스로 차에 탔으니 할 말이 없고 그냥 지난번에 못한 통성명이나 했다. 나이는 몰랐는데 나보다 8살 더 많았다. 김남준씨는 편하게 나를 지민이라고 부르기로 했고 나는 형이라고 부르는 게 뭔가 어색해서 아저씨라고 부르기로 했다. 물론 썩 내켜 하지는 않았다.

 


"다 왔다. 내려도 돼." 

"아니 호텔은 왜…?" 

 


그보다 근처라더니 이 아저씨는 나를 집에서 거리가 꽤 먼 H 호텔 앞까지 데려왔다. 뭐지? 지금 이 상황은? 내가 안 내리고 버티니까 아저씨가 어이없다는 듯이 웃었다.

 

 

"무슨 생각하는 거야. 호텔에서도 식사할 수 있거든?" 

"아 뭐, 누가 뭐래요?" 

 

 

당황해서 안전벨트를 풀다가 되려 줄이 꼬였다. 아저씨는 기가 찬다는 듯이 어이없어했지만, 말과 달리 다정하게 벨트를 풀어주고 문도 열어줬다. 호텔 입구에 들어서자 문득 지금 나의 차림이 부끄러워졌다. 이런데 올 거면 말이라도 하든가. 집에 가서 옷이라도 갈아입고 오게.  아저씨는 머뭇거리는 나를 질질 끌다시피 호텔 안으로 데리고 들어갔다.


H 다이닝 라운지라고 적힌 곳은 호텔 제일 꼭대기 층에 있었다. 매니저의 안내에 따라 앉은 자리는 한강의 화려한 야경이 한눈에 보였다. 실내조명은 다소 어두웠지만, 테이블에 켜져 있는 은색 초는 충분히 분위기를 살렸다. 그런데 온통 불어로 적혀 있는 메뉴판을 보자 갑자기 머릿속이 새하얘졌다. 아니 한국에서 왜 한국어 메뉴판이 아닌 거야? 내가 메뉴판과 씨름하고 있는 걸 알았는지, 아저씨가 알아서 주문했다.

 


"메뉴판 뚫어지겠다." 

"…이런 데 자주 오시나 봐요."

 "아냐. 나도 잘 몰라. 베스트라고 적혀 있길래 그걸로 주문한 거지."

 


내가 무안할까 봐 하는 배려라는 걸 알지만 그런 호의가 싫지 않았다. 음식이 나오기까지 영양가 없는 대화들이 오고 갔고 아저씨는 대화 내내 내가 불편해할까 봐 말을 꺼내는 단어 하나에도 신경을 써서 말했다. 그래서 우리의 대화는 어색한 긴장을 풀기에 적당했고 금세 편해졌다.

 들어보니 오늘 중요한 약속이 있어서 여기를 예약했었는데, 상대가 약속을 잊었다고 했다. 혼자라도 올까했는데 그러긴 싫고. 그래서 나한테 갑작스럽게 말하게 됐다며 미안하다고 했다. 난 진짜로 상관없는데. 괜찮다고 해도 아저씨는 약속을 취소한 상대 '대신' 데리고 온 게 마음에 걸리는 듯했다.

 

 

"근데 이런 데서 만나기로 하신 분이면 여자친구?" 

"아니. 그냥, 아는 분이야."

"그냥 아는 분인데 이런 데를 온다고요?" 

"나 말고…그분한테 내가 그냥 아는 사람이라." 


 

짝사랑인가? 뭐라 말해야 할지 고민하다가 괜스레 물만 홀짝였다. 

  

 

"근데 왜 맨날 호빵 먹으러 와요? 그 시간에? 호빵 좋아해요?" 

"지민이가 나한테 질문이 많아서 좋네." 

"네?" 

"누가 알려줬거든. 호빵 먹어보라고." 

"그 사람이 껍질 벗기는 건 안 가르쳐줬어요?" 

"그러게." 

 

 

주문한 음식이 순서대로 나왔다. 음식 맛이 나쁘진 않았으나 손이 계속 가진 않았다. 아저씨도 그런 나를 눈치챘는지 강제로 음식을 권하지는 않았다.

 

 

"알바는 평일에만 하는 거야?" 

"네. 주말엔 친구들 만나거나 공부하죠." 

"무슨 공부?" 

"아, 어…. 영어 공부?" 

 


사실 거짓말이다. 사놓은 토익책은 첫 장도 열어보지 않았다.

 

 

"그럼 나랑 같이 공부할까?" 

"아저씨랑요?" 

"내가 도와줄 수 있을 거 같은데." 

"전 좋은데 아저씨는 괜히 시간 뺏기는 거 아니에요?" 

"아니 전혀."

 

 

갑작스러웠지만 나쁘지 않은 제안이라 괜찮을 것 같았다. 과외비라도 따로 줘야 하는 거 아니냐니까 됐다면서 같이 이렇게 저녁이나 몇 번 먹으러 오자길래 알겠다고 했다. 정말 한국에 친구가 없나? 식사를 마치고 나가는데  언제 했는지 아저씨가 먼저 다 계산을 했다. 사람이 이렇게까지 매너가 좋을 수가 있다니. 

그런데 사실 밥을 먹는 내내 나는 누가 쫓아오는 것도 아닌데 마음이 불안하고 조급했다. 그래서 아저씨한테는 미안하지만 얼른 집에 가고 싶었다. 김태형이 아까 그 자리 그대로 서 있을 것 같아서. 신경 쓰기 싫은데 자꾸만 김태형이 나를 불편할 것이 없는 곳에서 불편하게 만들었다.




 

*


 

 


아파트 정문 앞에 내렸을 때가 밤 11시였다. 이 시간이면 벌써 알바 끝나고 갔을 시간이었다. 하지만 주차장에 아까 봤던 그 자리 그대로 김태형이 있었다. 설마 그때부터 지금까지…? 앞에는 담배꽁초가 산처럼 쌓여있었다. 모른척 그대로 지나가려는데 김태형이 내 쪽으로 걸어왔다.

 


"누구야." 

"뭐가." 

"누군데." 

"네가 알아서 뭐하게." 

"데이트?"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냐고 아니라고 말하려는데 그 순간 무슨 심보인지 그러기 싫었다. 데이트냐고 묻는 그 말도 황당했다. 김태형과 나 사이가 그런 사적인걸 물어볼 만큼 친했나. 아니 그전에 누가 봐도 아는 형, 동생 사이인데. 저랑 내가 그렇게 붙어 다닐 땐 친구들끼리 가볍게 장난치던 농담도 진저리치게 싫어하던 사람이 그런 말을 하니까 어이가 없었다. 

 

 

"그런 걸 왜 물어봐? 너랑 내가 뭐라고?" 

"궁금하니까." 

"궁금해도 물어보지 마." 

"왜." 

"왜냐니? 너랑 내가 그런 걸 묻는 사이는 아니잖아." 

"우리가 그럼 무슨 사인데?" 

"우리로도 묶일 수 없는 사이."

 

 

작게 말했음에도 주변이 고요한 탓에 그 말이 단지 내에 울리는 것 같았다.


 

"됐고. 너 여기서 담배 피우면 안 돼. 알겠어?" 

"알겠어."


 

김태형이 갑자기 내 앞으로 손을 내밀었다. 복숭아 젤리?

 

 

"뭐?" 

"먹어 너." 


 

됐다고 밀어내려는데 닿은 김태형 손이 얼음장이다.

 


"손이 왜 이렇게 차가워? 진짜 아까부터 있었어?"

 

 

김태형은 대답 대신 고개만 끄덕였다. 나도 모르게 손을 잡았다가 놀라서 바로 놨다. 뭐하냐 박지민 미친놈아.

 

 

"아…. 뭐하러 기다려. 날도 추운데." 

"그래서 누군데." 

"김태형." 

"응?" 

"왜 이제 와서 이러는지 모르겠는데…불편해." 

 

 

아랫입술을 깨물었다. 시선을 마주할 자신은 없다.

 


"거슬린다고 나도." 

"……." 

"그러니까 앞으로는 이러지 마." 

 

 

2년 만에 나는 이 말을 돌려줬다. 하지만 내 말에 김태형은 그때처럼 화를 내지도, 놀라지도 않았다. 

그렇게 잠깐 정적이 흘렀다. 나는 엄지손톱으로 손바닥을 꾹꾹 눌렀다. 더 할 말 없으면 간다고 김태형을 올려다보는데 눈가가 빨갰다. 뭐야? 우는 거야 설마? 그 순간 심장이 쿵 하고 떨어지는 기분이 들었다. 내가 무슨 짓을 한 거지. 아닌데 나는 잘못한 거 없는데. 왜 꼭 내가 나쁜 짓을 한 사람 같은 거야.



"갈게."

 

 

더 뭐라 할 말이 없어서 그대로 집으로 들어왔다. 김태형은 붙잡지 않았다. 나는 손이 덜덜 떨려서 엘리베이터에서 두 번이나 버튼을 잘못 눌렀다. 들어와서 방 창문으로 내려다보니 김태형은 갔는지 없다.



"…너무했나."

 


창문에 기대서 나도 모르게 나온 말에 내가 더 당황했다. 뭘 너무해. 김태형이 나한테 어땠는데. 

그런데 이상하게 답답한 기분이 들었다. 다 말하고나면 속 시원할 줄 알았는데 아니었나보다. 김태형의 상처받은 표정이 가슴 한가운데 박혀서 머리만 더 아파졌다.

그날 밤 꿈에서 나는, 끝도 없는 내리막길을 홀로 내려가는 악몽을 꿨다.

 


 


*




알바를 하루 빼먹은 대가로 2시간 당겨서 근무하기로 했다. 하긴 어제 사장님이 나 때문에 연장근무 하셨을 테니 죄송해서 흔쾌히 알겠다고 했다. 평소 알바를 나오는 시간보다 이른 시간이라 사람도 거의 없고 한적했다. 조용한데 날도 좋고 따뜻하니까 졸음이 쏟아졌다. 꾸벅꾸벅 졸고 있는데 딸랑 소리가 들리며 손님이 들어왔다. 못 보던 사람인데 분홍 앞치마를 하고 있다. 옆 카페 알바생이 김태형 말고 또 있었나. 그 사람은 매장을 한참 돌아다니며 뭘 찾았다. 졸려서 하품이 절로 나온다.


 

"아 여깄었네."


 

김태형 말고 다른 알바생도 잘생겼네. 저 집은 외모로 알바생을 뽑나. 계산대에 올려 놓은건 다름 아닌 어제 김태형이 줬던 복숭아 젤리였다. 뭐지? 우연인가.

 


"1500원입니다." 

"어? 나 몰라요?"

 


제가 알아야 하나요?

 

 

"옆 카페 알바생…?" 

"이야 이 친구 사회생활 완전 잘한다." 

"네?"

"나 그렇게 어려 보여요?"

 


그렇다고 그게 딱히 어려 보인다는 말은 아니었는데요.



"나 저기 사장이에요. 김석진. 우리 친구 완전 마음에 든다."

"아…네. 감사합니다."

 


졸려 죽겠는데 그냥 얼른 계산이나 하고 갔으면. 그런데 카페 사장님은 나가다 말고 다시 들어왔다. 그러더니 갑자기 나더러 박지민이냐고 묻는다. 뭐지? 내 이름 어떻게 알았지? 일단 고개를 대충 주억거렸더니 진짜요? 하며 연신 되묻는다. 맞다고요. 도대체 왜 이러세요. 사장님은 반갑다면서 강제 악수를 청했다.

 


"와 대박. 나 지금 연예인 만난 기분이에요." 

"에?" 

"김태형 알죠?"

"아…그게."



김태형이라는 말에 순간 나도 모르게 정색했다. 

하지만 카페 사장님은 당황하지 않고 오히려 밝게 웃었다. 



"태형이한테 많이 들어서 누군지 진짜 궁금했는데."

"……." 

"맞죠? 김태형 첫사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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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일 1연재로 얼른 완결까지 내려는데 자꾸 오타가 보여요ㅠ 자꾸 읽으니까 문장도 이상하고 2천자나 덜어낸...

댓글중에 남준이와 태형이가 형제냐고 물어보셨는데

아닙니다ㅎㅎㅎ 물론 석진이도 아닙니다

그렇지만 남준과 태형의 기싸움은 계속 될 예정입니다


비댓 안되는데도 댓글 달아주셔서 너무 감사합니다 ㅠㅡㅠ!!! 내일 4편으로 올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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