솔누넴(@solnu_illusion)넴과의 합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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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4장 

일지춘심(一枝春心)


새 생명이 움트는 봄의 초입에서



황실에 내린 크나큰 은총에 태의는 그저 기뻐했을 뿐인데, 다자이는 그에게 함구령을 내렸다. 황실의 흉복에 입을 다물라는 명을 받은 그는 처음에는 어리둥절한 것 같았지만 곧 이해했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며 자리를 피했다. 눈치 없는 자는 도태되는 세상이었고, 태의는 그 지독한 황실의 피바람을 정면으로 맞고 살아남은 사람 중 하나였다. 황제와 황후를 뒤로하고 나오는 태의의 발걸음이 무거웠다. 태의원으로 돌아간 그는 동료에게 보약을 지으라 일렀다. 황후 폐하, 앞으로 오래 뵙지는 못하겠구려.

 

태의가 홀연히 사라지고 난 후에 다자이와 츄야 사이에는 정막이 흘렀다. 츄야는 자신이 원수의 아이를 뱄다는 것을 아직도 받아들이지 못한 듯, 멍하니 있었다. 이윽고 숨을 삼킨 츄야가 천천히 손을 들어 올려 제 배 위에 얹었다. 제 마른 배 위를 더듬으며 믿을 수 없다는 듯이 헛웃음을 얼굴에 걸었다.

 

“아이가 태어날 때까지 숨겨. 그게 그대의 목숨줄을 오래 붙드는 길일 걸세.”

 

이국에서 온 유일한 황후가 임신한 사실이 알려진다면 츄야가 무슨 짓을 당할지 모르는 일이었다. 그래서였구나. 몇 달째 보란 듯이 츄야 옆에 자신이 붙어있었으니 그들은 부러 살수를 보내지 않은 것이었다. 그들은 뒤에서 조용히 엎드려 있었다. 다자이는 뒷짐을 진 손으로 주먹을 아프게 쥐었다.

 

그들이 오래 기다렸겠구나. 그대가 아이를 가지기를.

내가 그대와, 잠자리를 가지지 못하게 되는 날을.

 

“앞으로 입에 들어가는 모든 것을 조심하시오. 일이 새어나가지 않도록 함구령을 내리겠지만, 언제까지 숨길 수는 없는 일이니.”

 

황후에게 은식기를 선물해야겠군. 다자이는 독살 위협이 들이칠 것을 예상하며 진저리를 쳤다. 다자이는 그녀가 황후로서 주의해야 할 일들을 일일이 읊다 문득 츄야를 돌아보았다. 츄야가 답이 없었다. 아까부터 고개를 숙인 채로 너무 조용했다. 이 여자, 내 말을 듣고 있기는 한 건지. 다자이는 어째서인지 속이 상해 짐짓 냉한 목소리로 츄야를 불렀다.

 

“황후, 듣고 있는 건가.”

 

“...”

 

“대답하게, 황후.”

 

“...”

 

“츄야!”

 

츄야의 상태가 이상하다 싶어 다자이는 친히 무릎을 굽혀 침대 끄트머리에 앉은 그녀와 눈높이를 맞추었다. 그녀의 양어깨를 부드럽게 잡은 그가 다시 한번 목소리에 힘을 실어 그녀를 불렀다.

 

츄야.

 

그제야 화들짝 놀란 그녀가 고개를 들어주었다. 붉게 상기된 두 뺨에 눈물방울들이 맺혀 있다 후두둑 떨어졌다. 푸른 두 눈에 박힌 그 작디작은 물방울 몇 개가 다 뭐라고, 다자이의 언 가슴을 부식시켰다. 청룡의 포효 같은 파도에 부서지고야 마는 하얀 포말처럼, 얽히고 설킨 마음에 어처구니없이 묻어 있던 비틀린 증오는 눈 녹듯 사라졌다. 속울음을 앓는 그녀를 보고 있자니 가슴이 문드러지는 것 같아서, 섣불리 손을 뻗어 그 눈물을 닦아 줄 수도 없었다. 그래, 제 조국을 가지고 절 겁간한 남자의 아이를 배었는데 좋아할 여인이 동서고금 어디에 있으리. 더이상 그녀와 시선을 맞추고 있을 수가 없었다. 너무 겁이 나서, 겁이 너무 나서. 그는 어깨에서 손을 떼고 무릎을 폈다. 태양을 휘감은 주황색 머리카락에 시야에 잡히는 것마저 괴로워서, 그는 괜히 시선을 천장으로 향했다. 초대 황제가 공들인 이 적색 궁에서는 사랑하는 총비의 무료함을 달래줄 문양이 천장까지 덮여 있었다. 무심코 아름답다고 생각했다. 마른 세수를 한 다자이는 심장을 옥죄는 이 감정이 무던히도 짜증이 나서 되는 대로 말을 뱉었다.

 

“하긴, 원수의 아이를 배었으니 울분이 뼈에 사무치겠군.”

 

츄야가 고개를 들고 그를 바라보았다. 다자이는 그동안 제가 봐 왔던 그 어떤 하늘보다 청명한 하늘이 그곳에서 침수되어 있었다고 자신할 수 있었다. 하늘은 야속하게도 제 아름다움을 츄야에게 전부 몰아주는 대신 그녀의 행복을 모조리 앗아간 듯했다. 그 시선에 매료되어, 다자이는 새삼스레 위기감을 느꼈다. 그는 눈을 더 마주하지 못하고 방을 나섰다.

 

지금 저 남자가 무어라 한 것일까.

 

츄야는 돌아가지 않는 사고회로를 억지로 가동해 생각이라는 걸 해보려 애썼다. 그러니까 자신은 지금 임신을 했다. 최근 몸 상태가 정상이 아니었던 것은 고뿔 정도의 문제가 아니었던 것이다. 아이를 가졌다. 이 짧은 문장이 주는 울림은 갈빗대 사이 어딘가에 둔통을 일으켰다. 물에 젖어 색이 짙어진 치맛자락이 눈에 들어왔다. 한 방울, 두 방울. 물방울은 계속 떨어진다. 이 눈물의 출처가 어디일까 고심하던 츄야는 제 뺨에 손을 올리고 나서야 깨달았다. 내 눈물이었구나. 나는 왜 울고 있는 것일까. 이유가 성립되지 않았다. 그도 그럴게, 츄야가 처음 임신 소식을 접하고 느낀 감정은 안도였으니까.

 

안도, 그래. 츄야는 안도했다.

 

안도했다는 사실이 화가 나서, 그것이 분해 눈물을 쏟았다. 원수의 아이를 밴 것이 뭐 그리 좋은 일이라고 안심이 되었을까. 상황에 안주해버린 스스로가 미웠다. 몇 달이 흘렀다고, 고작 몇 달 검을 잡지 못했다고 이렇게 해이해졌다. 그 쳐죽일 놈을. 이 손으로, 이 검으로 굴복시켜 무릎을 꿇리고 싶었는데. 꿈이 현실이 되어가는 것만 같아 두려웠다. 밤만 되면 그를 기억하며 달아오르는 몸이, 그의 씨가 몸속에 자리 잡은 것을 속으로 바라고 있었던 것은 아니냐며 그녀를 다그쳤다. 아니야, 아니야. 그 남자의 아이 따위. 그래도 언젠가는 그의 아이를 가지게 될 것이라고, 막연히 납득은 했었다. 근데, 이건, 너무, 이르잖아.

 

츄야는 그 날 해가 저물 지경까지 펑펑 울었다. 스스로 왜 우는지도 이해하지 못한 채로.

 

해가 서산에 걸리고, 어김없이 그 남자가 찾아오는 야심한 시각이 되어서야 그녀는 울음을 그칠 수 있었다. 발갛게 부어오른 두 눈가 위에, 시녀들은 갓 내린 눈과 약초를 담은 주머니를 가져다 주었다. 찬 눈이 생각을 정리해주는 듯 했다. 낮의 그는 자신이 우는 것을 보다 못해 방을 박차고 나갔다. 눈물 사이로 얼핏 비추었던 그의 얼굴은 상처받은 강아지 같아서, 도저히 내버려 둘 수가 없었다. 그 원수 같은 놈의 아이를 밴 주제에 놈 걱정이나 하고 있는 자신이 우스웠다. 몸정이라도 든 것인가. 내 분노는 다 어디로 간 것일까.

 

이젠 다 모르겠다. 한바탕 운 이후에는, 늘 그랬듯 아무 생각도 들지 않아서 츄야는 그대로 잠들었다.

 

다자이는 하루 종일 저기압인 상태로 일과를 내달렸다. 오늘의 그는 유난히 집중을 못 해서 대신들이 무슨 일이 있으셨는지 감히 여쭐 지경이었다. 나이 많은 대신이 비웃음 비슷한 것을 얼굴에 올리며 황후 폐하와 싸우기라도 하셨나 물었을 때에는 저도 모르게 책상을 내리쳤다. 평소의 능구렁이 같은 황제가 보이는 이상 행동에 내무부는 비상이 걸렸다. 오늘 황제 폐하께서 특히 저기압이시니, 쓸데없는 짓걸일랑 할 생각을 말라고. 그리고 그 말을 어기는 자는 없었다.

 

집무실에 틀어박혀 있다 보니 그믐달이 먹칠한 하늘에 걸렸다. 달무리가 피어 방위를 알려줄 북극성도 다 가려져 보이지 않아서, 지독하게 어두웠다. 농묵으로 가득 칠한 밤하늘은 다자이에게 쉴 곳을 내어 주지 않았다. 달이 한 자락 피고, 가득 차고, 죽을 때가 되어 그믐이 찾아오고 마는 날이면, 다자이는 찾아오는 상념과 기억에 이성을 맡겼다. 피로 덧칠한 과거를 되짚게 하는 하현달이 하늘의 한 켠에 자리를 잡고, 이야기를 속삭이게 내버려 두었다. 어떨 때는 선황의 조소가 묻어나는 목소리로, 친모의 원망 섞인 피울음으로, 그의 가녀린 신부가 야살스럽게 뱉는 교태 어린 신음으로. 그것은 다자이를 원망하는 사람들의 원념의 집합체였다. 보위에 오른 지 어언 4년, 스물 둘의 젊은 황제에겐 적이 너무나 많았다. 그의 이국에서 온 신부가 짓씹는 저주는 꽤 버틸만 해서 다행이었다. 친부모의 원망 어린 소리를 듣다가도, 그 걸쭉한 욕지거리를 들으면 정신이 확 들었다. 그야 그의 부인은 너무나 작고 하찮고 귀여웠으니까.

 

전장에서 잔뜩 굴러 단단한 몸을 가졌던 여인은 이제 툭 치면 부러지기라도 할까 봐 노심초사해야 하는 지경에 이르렀다. 그 사실이 조금은 안타깝긴 했으나 부러진 날개를 부여잡고 꿇어앉아 우는 것을 지켜보는 것도 나쁘지 않았다. 악취미라고 욕하는 츄야의 음성이 귓전에 머물렀다. 다자이는 작게 웃었다. 다만 걱정이 될 뿐이다. 그 가냘픈 몸으로 아이를 배었기에, 몸이 쉬이 상할까 봐.

 

츄야가 아이를 가진 것에 울분을 토하건 말건 이제는 알 바가 아니라는 생각이 강해졌다. 달 없는 밤에는 동백꽃 향이 유난히 짙어졌다. 많고 많은 따듯한 날을 피해 굳이 추운 겨울의 한복판에 꽃망울을 맺는 것이, 마치 누구처럼 갸륵하여 정원에 심으라 일렀다. 새하얀 눈꽃이 새붉은 동백 꽃잎에 내리는 것은 꽤나 절경일 테지. 여기까지 도달하자, 그녀가 싫어하건 말건, 그에게 더는 상관없어졌다.

 

내 아이니까.

그 동백이 품은 것은 장미의 씨니까.

 

그 눈물로 얼룩진 얼굴을 기억해내지 않으려고 애쓰면서 다자이는 눈을 감았다. 다시 눈꺼풀을 들어 올렸을 때는, 그 잔상이 망막에 남아있지 않기를 바라면서.

 

만물의 이치가 그렇듯, 달이 지면 밤이 가고 해가 타올랐다. 유난히 길었던 지난 밤, 츄야는 꿈을 꾸었다. 기분 좋게 시작한 꿈이었다. 상사화가 흐드러지게 핀 어느 국경지대의 너른 벌판에서, 마침내 그 남자의 심장에 검신을 박아넣었다. 간담이 서늘해지는 짜릿함에 츄야는 오싹 몸을 떨었다. 그러나 그 남자는 죽는 순간까지 힘겹게 입꼬리를 올려 웃고 있었다. 호선을 그리는 입가에 묻은 피만 아니었다면 평소와 다를 것 없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울컥 피를 토한 그가 떨리는 손을 들어올려 츄야의 배에 얹었다. 그녀의 배에서 자신의 것이 아닌 심장 소리가 적군의 북소리 마냥 울려퍼졌다. 그녀가 손을 쳐 내기 직전에, 그가 비웃듯 남긴 말이 숨을 막히게 했다.

 

“여기 내 아이가 있으니 괜찮네.”

 

놀라 검을 휘둘러 빼낸 츄야에 의해 다자이의 몸이 축 늘어졌다. 그의 갈색 동공에 어린 것은 승리였다. 내가 이긴걸세, 츄야. 그가 입모양으로 전했다.

 

츄야는 비명을 내지르며 침상에서 벌떡 일어났다. 숨을 몰아쉰 그녀는 배에 손을 가져다 대었다. 그의 피 묻은 손이 닿던 느낌이 생경했다. 이겼다고. 당신이. 츄야는 용암처럼 솟아오르는 화를 가라앉히려 노력했다. 곧 냉수를 맞은 듯 정신이 번쩍 들었다.

 

아, 안도감의 이유를 찾았어.

 

이 아이가 이 나라를 차지하고 멸망시키게 만들면 되는 거구나. 네가 내 복수와 삶의 이유가 되면 되는 것이로구나, 아가야.














공방주인. 글을 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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