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전공 지식이 없어서 여러 자료를 찾아보기는 했지만 여전히 다소 부족합니다. (u.u;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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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린 시절에 무언가를 시작하는 건, 대부분 아이들이 그렇듯, 부모님의 탓이 크다. 피아노, 미술, 태권도, 서예, 그리고 수영 같은 것. 물론 아이의 요구 반영도 분명히 들어가겠지만 아무래도 부모님의 영향이 클 수밖에 없지 않을까? 일단 6살 호랑이반 진지혁의 경우는 그랬다. 피아노, 재능 없음. 미술, 주의가 산만함. 서예, 한자리에 가만히 있는 걸 못 함. 태권도는 진지혁이 원했으나 외동아들이 혹여 유치원이건, 나중에 들어갈 초등학교에서건 주먹질을 할까 걱정한 부모님이 반대했다. 원체 에너지를 주체하지 못하는 아들이었어서 말이다. 이미 '골목대장'에 가까운 위치─이렇게 표현해도 될런지 모르겠지만─에 있는 것도 알고 있고.

그렇게 가장 마지막에 들렀던 곳이 동네 문화센터에 있는 어린이 수영교실이었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6살 진지혁에게는 동네의 태권도장─그것도 용인, 어쩌고저쩌고, 뭔가 번지르르한.─ 보다 수영장이 더 재밌어 보였다. 제 또래의 친구들과 더 나이가 많은 사람들이 저마다 반짝거리며 물살을 가르고, 물장구를 치고, 소리가 와르륵 깨어지며 울리던 그곳이 퍽 끌렸다. 그래서 진지혁은 곧장 부모님께 강하게 요구했다. 뭐, 6살이 강하게 요구하면 얼마나 강하겠냐마는, 어쨌든 방문한 그날 바로 어린이 수영교실에 등록했다.

재능을 발견한 건 우연이었다. 강사의 눈에는 지혁이 수영을 처음 해본 아이치고 제법 괜찮은 모양이었다. 어머님 이번에 이러저러한 어린이 수영대회가 있는데 한 번 나가보시겠어요, 아버님 이번에는 이런 대회가... ... 대충 그런 대화를 하는 강사 선생님과 부모님을 몇 번이고 목격했더라. 손목에 수영복과 수영모가 담긴 가방을 달랑달랑 들고, 바나나 우유를 쪼로록 마시고 있던 진지혁은 모른 척 부모님의 옆에 서서 대회도 나가고 싶어요, 이랬고. 어린이 때부터 겉멋이 꽤 들었던 지혁이었기에 대회에 나가고 싶은 건 당연한 거였다. 뭘 모르는 어린이 눈에도 메달을 따면, 멋져 보였으니까!

그렇게 벌써 10년이다.

곧 고등학교 입학을 앞둔 진지혁은, 여전히 행운의 신의 가호를 잔뜩 두른 채로 물살을 가르고 있었다.




패배를 경험해보지 않았다고 한다면 그건 당연히 거짓말이다. 세상에는 많은 사람이 있고 그보다 실력이 좋은 사람은 어디고, 언제고 존재하기 마련이었으니까. 소수점의 차이로 메달을 놓치는 순간도 겪었고, 메달을 땄어도 자기가 목표했던 기록이 나오지 않아 분했던 순간도 겪었다. 그러나 남들이 들으면 배 아파할 지도 모르지만, 그는 메달 운이 없었던 것은 아니었다. 또래에 비해 메달 운이 좋았고 실력도 좋았으며 남들보다 슬럼프를 적게 겪었다. 왜, 스포츠 선수들 명언이 있지 않은가. 무슨 생각을 해, 그냥 하는 거지. 진지혁이 딱 그랬다. 뭔 생각을 하나. 그냥 눈 뜨면 준비 운동 겸 러닝 뛰는 거고, 수영하는 거고, 밥을 먹고 또 수영을 하는 거지. 슬럼프가 올 것 같으면 그냥 냅다 뛰었고, 냅다 물로 뛰어들었다. 어린 시절 느꼈던 재밌는 순간은 짧았고 스스로의 벽을 깨는 순간은 지난했다. 그러나 동시에 말할 수 없는 성취감과 고양감을 선사하기도 했고. 그래서 그만 둘 수 없었다. 단 0.03초라도 자신의 벽이 깨어지는 순간이 너무나도 짜릿했기에 다른 걸로는 통 만족할 수 없었으니까 말이다.

그정도로 욕심이 많았던 진지혁에 비해 부모님은 매년, 새해 인사와 더불어 늘 강조하듯 이런 말을 건넸다는 게 좀 독특한 가정이긴 했다. 누군 메달을 따오라며 악을 지르고 왜 더 잘하지 못하냐며 호통을 치기도 한다는데 지혁의 부모님은 늘, 매년 같은 순간에 '네가 그만두고 싶다면 언제든 그만둬도 된다.', '억지로 할 필요 없다. 쉬고 싶으면 언제든 쉬고, 이게 아니다 싶으면 언제든 편하게 말해라.'라는 요지의 말씀을 하셨으니. 그래서 늘 진지혁은 생각하는 것이다. 나는 정말 운이 좋은 사람이구나, 하고. 

손을 뻗는다. 촤르륵, 갈리는 물살이 가볍기도 하고 무겁기도 하다. 상체가 물 밖으로 나오는 짧은 순간 숨을 삼키고 다시 물 속으로 들어가 힘차게 팔을 휘두른다. 그렇게 한참 물살을 가르던 지혁은 손 끝에 닿는 벽을 느끼고 나서야 고개를 완전히 물 밖으로 빼낸다. 연습이 고되면 고될수록 잡념이 사라지는 건 좋지만, 단점은 역시 힘들다는 걸까. 자연스레 우는 소리가 나왔다. 아무리 겉멋이 들고 남들이 보면 대학생으로 볼 정도로 체격이 좋은 아이여도 그는 결국 고작 중학교 3학년이었기에.

"푸하-... 아, 힘들어 죽겠어요, 코치님."

"그럼 오늘은 여기까지 할까? 겸사겸사 보여주고 싶었던 것도 있고."

수경과 수영모를 한 번에 벗어들고, 상체를 물 밖으로 빼내 바닥에 걸터앉는다. 가쁜 숨이 한꺼번에 뱉어졌다. 확실히 접영은 다른 영법에 비해 체력을 소모하는 단위가 달랐다. 자세가 조금이라도 틀어지면 등과 허리에 가해지는 부담도 컸고. 아직 성장기라 주 종목으로 삼은 건 아니지만 지혁이 배우기를 원했다. 뭐... 이유는 굳이 말하지 않겠다. 물이 뚝뚝 떨어지는 머리칼을 이마 뒤로 다시 넘기며 제 옆에서 싱글벙글 웃고 있는 코치를 본다. 겨우 호흡이 가다듬어졌다. 뭘 보여주고 싶길래 저렇게 웃으시는 거람.

"... 그렇게 웃으시니까 수상해요, 코치님."

"얘 좀 봐라. 일단 쿨다운 하고 와. 저녁은 뭐 먹을지 생각도 해보고."

"고등학교 입학 축하 선물 같은 거예요?"

그렇지? 맨살 위로 찹 오가는 손길이 참 정답다. 마찰력이 높아져서 어쩐지 더 아릿하게 느껴지는 어깨를 주무르며 얼떨떨한 얼굴을 한 지혁은, 코치의 말대로 순순히 발까지 오롯이 물에서 빼내고 이제는 다 외워서 숨 쉬는 것만큼 자연스러운 쿨다운 스트레칭을 한다. 등과 허리를 스트레칭할 때는 좀 더 주의를 기울여서 했고. 자라나는 성장기인 만큼 부상은 있어서는 안 될 일이다.

스트레칭을 마치고 샤워까지 한 다음 코치실로 가면 갈 준비를 다 했지만 여전히 컴퓨터 앞에 앉아있는 코치가 보인다. 대충 말린 머리카락을 자연스럽게 상비되어 있던 수건으로 텁 덮어주며 제 옆에 앉으라는 신호를 보내주는 코치 옆에 어어, 네, 하며 앉으면 넓은 모니터 화면에 자연스레 시선이 닿는다.

지혁에게는 몹시 익숙한 곳이다. 수영장. 아마도 대회인 것 같고. 언제 있었던 대회지, 싶어 화면에 잠깐씩 스치는 현수막을 주의 깊게 본다. 올해 했던 경기구나. 아직 물기가 남은 머리카락 위로 수건을 대충 눌러 물기를 흡수하고 있으면 코치의 길쭉한 손가락이 한 레일 앞에 서 있는 훤칠한 사람을 쿡 누른다.

"누군데요?"

"네가 갈 고등학교 수영부에 있는 학생. 너랑 한 살 차이 난다."

"오... 선배님이네."

"얘가 이 나이대 선수 중에서는 접영을 제일 잘해. 참고할 게 많을 거다, 아직 어린애지만."

"이름이 뭔데요? 이름은 알아야죠."

이름이 얼마나 중요한데요. 뭘 좋아하든, 싫어하든 이름의 존재는 중요하다구요. 형태가 없는 걸 좋아하고 싫어할 수는 없는, 중얼중얼, 아이고! 진지혁 또 이상한 궤변 늘어놓는다.

"일단 경기부터 봐. 네가 그렇게 중요하게 여기는 이름은 그다음에 알려줄 테니까."

치. 가볍게 불퉁한 소리를 내면서도 자세를 바로 하고 모니터를 들여다본다. 소리는 없지만 주변이 얼마나 시끄러운지는 지혁이 제일 잘 안다. 그리고 어떤 선수들한테는 그게 부담이 될 거라는 것도 알고, 또 어떤 선수들한테는 그저 멀리서 아득하게 들릴 것도 알고. 코치가 짚어준 선수를 보는 지혁은, 그 현장에 있지는 않았지만 어쩐지 그 선수가 어떤 생각을 하고 있을지 짐작이 되는 것 같아 묘한 기분이 들었다. 정말 여유로워 보였다. 그러니까, 선수가 가지고 있는 기본적인 긴장감 외에는 부담이 될만한 게 전혀 없는 것처럼 보였다는 뜻이다. 전체적인 모습을 보여주기에 선수 개개인의 얼굴이 제대로 보이지는 않았지만 그럼에도 그 이목구비가 꽤 시원시원하다는 것만큼은 보여서, 그리고 그게 기분이 이상했다.

선수들이 하나씩 자리를 차지하고 자세를 잡는다. 하나, 일정한 준비 자세가 된다. 둘, 삑 하는 소리와 함께 대포알이 쏘아지듯 선수들 역시 저마다 입수한다. 눈을 가느다랗게 뜨며 물살이 가르는 모양새를 모든 레일마다 하나씩 본다. 처음은 크게 차이 나지 않는다. 그러나 선수들 간 역량은 금방 차이가 난다. 접영 같은 경우는 특히 그렇다. 이미 '그 선배'가 훨씬 앞질러 가고 있는 모습이 눈에 띄니까. 그럼에도 흐트러짐 없이 우아한 자세가 퍽 인상적이었다. 그래, 우아했다. 그게 좀 특이했지.

경기는 금방 끝났다. 경기 영상을 보며 짐작했지만, 선배-벌써 선배라고 부르고 있었지만, 선배라고 했으니까 선배라고 불러야지!-가 가장 먼저 스트로크를 터치했다. 전광판에 뜨는 이름을 본다. ---...

"... ... 와."

"자, 이제 밥 먹으러 가자. 닭갈비?"

"... 전 소고기가 좋아요."

"그건 부모님이랑 드세요, 진지혁 학생~"

경기 영상은 1등 메달을 딴 선수의 얼굴을 클로즈업 한 뒤에 끝이 났다. 지혁이 처음 느꼈던 대로 여유로운 얼굴이었다. 접영을 배운지 얼마 안 된 지혁은, 분하게도 수영을 하고 나온 뒤에는 아직 저렇게 나른하고 시원스레 웃지를 못했다. 숨이 가빠 그냥 바닥에 드러눕고 싶단 말이다. 그런데도 저 선배는 메달을 목에 걸면서 너무나도 반짝이는 미소를 보여서. 컴퓨터를 정리하고 스포츠백을 어깨에 걸고 나오면서, 입은 자연스럽게 옆의 코치와 수다를 떨면서도 16살 곧 17살이 되는 지혁은 영상의 끝부분에 순간적으로 들었던 제 감정을 정의하기 위해 끊임없이 머리를 굴렸다. 뭘까, 이거?

잠들기 전까지 감정의 정의를 내리지 못했지만, 이거 하나는 했다. 그 선배의 이름을 기억하기. 게다가 같은 학교라. 정의 내리지 못한 감정 대신 자신이 익히 아는 감정 하나를 꺼낸다. 기대감이다.

지혁은 얼른 '백신주 선배'를 만나고 싶었다.




18살의 지혁이 17살의 진지혁을 다시 보면, 참 웃기지도 않다. 그러니까 그 선배의 부상 소식에 자신이 처음으로 졌던 날보다 더 속상해서 괜히 울컥했던 것 말이다. 그의 경기를 몇 번이고 몇 번이고 반복해서 봤던 터라 사소한 습관마저 기억하고 있는 지혁이었기에─이걸 누군가가 알면 너 그거 집착이야... 라고 했을 테지만 다행히도? 그런 걸 말해줄 사람은 없었다.─ 더 아쉽고 속상했다. 스포츠 선수라면 어지간히 욕심이 없는 사람을 빼고는 당연히 국가대표를 목표로 한다. 그리고 자신이 본 그 선배는 당연히 무리 없이 국가대표가 됐을 것이다. 어깨 부상만 없었더라면.

모든 부상이 치명적일 테지만, 그리고 재활하면 충분히 부상을 입기 전처럼 역량을 드러낼 수 있지만. 스포츠 선수들은 부상을 입기 전과 입은 후의 정신적인 상태부터가 다르다. 이전과 같은 혹은 뛰어난 역량을 드러낼 수도 있지만 아닌 경우도 분명히 있다는 뜻이다. 같은 수영 선수이기에 짐작할 수 있는 상황이고 마음이었다. 물론 그게 전부는 아닐 테지만 결과만 보면 그 선배는 굵직굵직한 대회에서 전부 모습을 감췄다. 치료와 재활에 집중한다는 기사를 몇 번이고 봤다. 지혁도 한동안 훈련에서 차마 접영을 할 수 없었다.

슬럼프라면 슬럼프라고 할 수도 있을 거다. 굳어진 루틴이 있기에 매일 수영했지만 이전만큼 성취감이 느껴지질 않았다. 고작 17살의 슬럼프였으나 지혁은 다소 우울했고 의욕이 없었다. 오죽하면 이제껏 큰소리를 낸 적이 손에 꼽았던 코치가 정신 못 차리냐며 혼을 냈을까. 큰 의미는 없었다.

다시 의욕이 생긴 건 코치로부터 새로운 소식을 들었던 몇 달 전이었다. 그 선배가 복귀한다고. 학교도 다시 나오고, 선수로서도 활동할 거라는.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이렇게 준비되지 않은 순간에 갑자기 자신의 아이돌을 만날 거라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보통 그럴 것이다. 누가 자기의 우상을 이렇게, 갑자기, 평소와 같은 일상에서 만날 거라고 생각하나? 대체로 어떤 장소에서 만날 거라고, 그리고 어떤 모습으로 만날 거라고 꿈과 같은 기대감을 품지 않나. 일단 장소 면에서는 자신의 상상과 어느 정도 일치했지만 잠에서 깬 지 얼마 되지 않아 다소 추레한 모습을 한 채로 마주친 건 절대 예상하지 못했다. 잠겨 있는 수영장 앞에서 멀뚱히 저를 보는, 기억 속의 모습보다는 조금 더 성숙해졌고 어색한 웃음기가 어린 얼굴을 보면서 지혁은 빠르게 제 모습을 추측한다.

평소에는 늘 느껴졌던 행운의 신이 느껴지지 않는 순간이다. 하필이면 지혁은, 새벽 연습 전에는 고양이 세수만 해서 눈곱만 겨우 떼고, 잔뜩 눌리고 뻗친 머리는 모자로 대충 누른 채로 거울도 보지 않고 오는 편이었다. 그게 루틴이었다. 어차피 수영장에 들어가기 전에 샤워를 하기에 굳이 기숙사에서 씻고 나오지 않는 거다. 새벽 연습은 선택 사항인 만큼 참가하는 인원이 적었고, 적은 인원 중에서도 지혁은 늘 제일 먼저 왔기에 수영장의 열쇠와 비밀번호를 알고 있었고, 그러니까... 생각이 길어졌다. 결론만 말하자면 지혁은 지금 몹시 추레한 모습이란 뜻이다. 그에 비해 왜, 저 선배는, 자신이 기대했던 것보다 더 반짝이는 모습으로 왔단 말인가. 그래서 지혁은 평소라면 하지 않았을 선택을 했다.

"여기 수영부 아니면 못 들어가는데.... 누구세요?"

"... 신입생이에요."

그래, 사실상 최악의─지혁의 기준으로─ 선택이었다.

그런데 선배는 왜 신입생이라고 거짓말 하세요. 지혁은 울고 싶었다.




"왜냐니, 귀여워서 그랬지."

"그 몰골, 아니 모습이요?"

"모르는 얼굴이기도 했고, 내가 복학한 시점에서는 선배는 없을 거고, 끽해야 동갑이거나..."

후배라고는 생각 안 하셨나요. 음, 키가 너무 커서 후배가 아닐지도 모르겠다고 생각은 했지. 네, 선배. 거기서 조금 더 늘리면 돼요. 쭈우욱. 내가 선배인 거 맞지? 머쓱한 웃음을 흘리며 모른 척 밴드를 당기고 있는 시간을 잰다. 음, 이제 다시 천천히 원상태로요.

"사실, 조금 탐나기도 해."

천천히 원상태로 팔을 돌리며 아무렇지 않게 뱉는 말에는 모른 척 할 수가 없어서 핸드폰 스톱워치를 보던 눈을 돌려 그를 본다. 그러나 굳이 물어보지는 않는다. 어떤 게 탐난다는 건지 명확하게 추측하기 어려운 것도 있었지만 만약 그게 뭔지 알게 되면 아무렇지 않게 대할 자신이 없기도 했고. 왜, 자신의 경우에는 같은 목표를 갖지 못한다는 걸 아쉬워하는 걸 그의 앞에서는 말하지 못하는 것처럼. 이왕이면 같이 국대가 되고, 세계권 경기를 나가고, 올림픽에 나가고 싶다는 거 말이다.

"그럼 선배가 나중에 저 키워주면 되잖아요."

음, 나이 차이가 얼마 안 나서 무리려나. 장난스레 씩 웃고 핸드폰을 내려놓는다. 선배, 저 찜질할 거 들고 올게요. 선배도 쉬고 계세요. 그런 말을 두서없이 뱉어놓고 답을 듣지도 않은 채로 홀라당 그 자리를 벗어났다.

곧 있으면 국가대표 선발전이 있어서 사실 훈련에 집중해야 하는 게 맞았다. 그렇지만 같이 훈련을 하다가 어느 순간 옆 레일에서 느껴지는 출렁임이 없으면 또 집중력이 분산된다. 지금 코치가 잠깐 자리를 비워서 망정이지, 너 지금 뭐 하냐고 혼나도 할 말이 없기는 한데. 자연스레 입술이 삐쭉 나온다. 부산한 머릿속과는 별개로 몸은 착실하게 찜질팩을 데워서 다시 그에게로 가고 있었지만.

물론 지금도 그는 자신이 보았던 그대로의 역량을 레일에서 보여주고 있다. 신기록이 세워지지 않을 뿐, 충분히 그가 보일 수 있는 최고의 모습을 보이고 있다. 오래 하지 못할 뿐, 그것만 제외하면 자신이 몇 번이고 봤던 영상 속의 모습을 눈앞에서 바로 볼 수 있었다. 많은 조건이 앞에 붙었지만 말이다. 그것만으로도 지혁은 다행이라는 생각을 했다. 그리고 이런 생각을 해도 되나 의문을 가졌다. 그와는 예상했던 것보다 가까워지고 친해지기는 했지만 그렇다고 속을 터놓는 이야기를 할 만큼은 아니었으니까 자신이 건방지게 다행이라는 생각을 해도 되는지, 그런 의문이었다.

그러면 또 어떻게 눈치를 챈 건지 길쭉한 눈매를 휘어 웃으며 '가서 한 바퀴라도 더 돌고 오렴.'하고 다정하게 단호한 모습을 보여주는 선배지만.

"이건 나 혼자 할 수 있는 거 알지?"

그러니까 지금처럼 말이다. 지혁은 얌전히 네, 하고는 뜨끈뜨끈한 찜질팩을 건네주고 그가 건네는 수영모와 수경을 받아들었다. 잡념을 끊을 시간이다.

"자세 봐줄게. 코치님이 오시는 게 좀 늦어지니까 그 정도는 내가 할 수 있을 것 같아서."

"어, 그럼 부탁드릴게요. 접영 다시 시작한 지 얼마 안 돼서 봐주시면 저야 좋죠."

"다시 시작한 지 얼마 안 됐다고?"

"네, 얼마 전까지 슬럼프였어서 그런지 처음 시작할 때만큼의 기록이 안 나오더라고요."

후, 짧게 숨을 내쉬며 몸을 가볍게 풀고 스타트대 위로 올라선다. 짧은 침묵과 함께 차분한 목소리로 카운트 다운이 이어 들린다. 신호에 맞춰 몸이 튀어 나가듯 첨벙, 입수했다.

자연스럽게 머릿속으로 복기했던 영상들이 떠오른다. 우려했던 것과는 다르게 헤엄치는 박자 위로 가뿐하게 몸이 올라간다. 잡념도 가위로 자른 것마냥 끊겼다. 레일 밖에 누가 있구나, 라는 것만 머리에 남고 당장 몇 초 뒤에 몸을 돌려야 한다는 사실만 뚜렷하게 남는다. 부서지는 물방울들과, 숨을 언제 들이마시고 내쉬어야 하고, ... 손이 닿으면 몸을 돌려 다시 돌아간다. 그제야 시야에 아주 잠깐 서 있는 인영이 보인다. 스톱워치를 들고 있을 모습이. 돌아간다, 고. 어째 묘한 감상을 불러일으키는 단어네. 물론 그런 생각은 제대로 마무리 지어지지 않은 채로 손이 닿았지만.

"54.57초."

"어?"

숨을 거칠게 몰아쉬는 와중에도 들린 소리가 믿어지지 않아 수경을 위로 올려 내민 스톱워치를 다시 본다. 선명하게 보이는 숫자가 들린 그대로다. 눈을 끔뻑이며 얼굴 위를 흐르는 물을 대충 닦아내고 몸을 빼내 바닥 위에 걸터앉는다. 그도 옆에 슬그머니 앉은 채로 아예 스톱워치를 제 손에 들려준다. 작은 감탄사가 흘러나온다. 진짜로?

"... 우와."

"몸에 힘이 너무 들어간 것 같다는 점을 빼면 뭐 지적할 부분이 없던데. 코치님 눈에는 어떨지 모르겠지만."

"음, 그건 선배 앞이라서 그런 걸지도요."

"왜 내 앞에서는 그러니?"

"저 선배 팬이잖아요. 전에 들켰지만."

수영모를 벗어 젖은 머리칼을 대충 정리하듯 흩트리며 씩 웃는다. 저를 보는 시선에서 어떤 감정이 내비치는지는 잘 모르겠다. 웃는 입꼬리를 보면 기분이 나쁜 것 같지는 않다. 그냥 장난스레 어깨를 으쓱하고, 아직 물에 잠겨있는 발을 흔들거렸다.

"뭐... 숨길 생각이 있었나 싶기는 하네."

"티는 안 내려고 노력했죠. 그때 들켰던 건 거의 무의식적인 반응이었기도 했고..."

"어쩐지 묘하게 기시감이 느껴지더라. 너 헤엄치는 모습에서."

이건 같이 연습하면서 종종 들었던 생각. 여상한 어투로 덧붙이는 모습에는 그저 눈을 굴리며 모른 척 웃기나 했다.

"저 목표 정했어요."

"국대가 되겠다는?"

"그것도 있고, 접영으로 메달 따는 거요."

이왕이면 찬란한 금빛으로. 장난스레 말하며 팔을 뻗어 헤엄치는 시늉을 했다. 어이구, 하는 듯한 표정인 것 같아서 하하, 웃고 슬쩍 기대기나 했다. 고작 한 살 차인데도 가끔 그는 한참 차이 나는 후배를 보듯 해서 그게 묘했다. 지금처럼 말이다. 그래서 더 쉽게 친해졌나. 보통 지혁을 그렇게 보는 사람은 없었으니까. 그래서 반쪽의 목표만 그에게 선뜻 내밀었다. 나머지 반쪽은 정말로 메달을 딴 뒤에 달성할 수 있는 거라서. 걱정이 되는 건, 그가 기뻐해 줬으면 하는 건데.

일단 이 순간을 만끽하기로 했다. 코치님이 너네 뭐하냐, 하고 현실을 일깨워주기 전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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