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아하는 음식을 물으면 별 망설임 없이 떡볶이라고 한다.
떡볶이랑 피자요. 떡볶이랑 빵이요. 돌아가며 대답하지만 ‘떡볶이랑 아구찜’이라고 말한 적은 없었다. 하지만 돌이켜 보면 나를 키운 몇 할은 바로 아구찜일지도 모르겠다.

아구찜에 대한 가장 오래된 기억은 노란색 뚜껑의 동그란 반찬통이다. 우리 가족은 소 자를 시키면 늘 삼 분의 일 정도가 남았다. 그걸 엄마가 통에 옮겨 냉장고에 넣어두면, 나는 다음 날 아침 식사 시간이 되자마자 통을 꺼내와 내 밥그릇 앞에 두었다. 차가워진 아구찜은 어제보다 덜 매워 먹기 좋았다. 그래서인지 어제 잘 먹지 않던 동생도 젓가락을 바삐 놀렸고 먹는 속도가 더딘 일곱 살은 애가 탔다.

그때는 대한민국이 지금만큼 배달의 민족이 아니었을 뿐더러 우리 집은 배달 음식을 불량 식품으로 간주하는 경향이 있었다. 그러나 유치원생 딸이 엄마, 저는 일주일 동안 아구찜만 먹을 수도 있어요, 하고 선언해 버렸으니. 아구찜은 면죄부를 받고 꾸준히 배달 되었다.


아구찜은 어쩌다 김치도 안 먹던 어린이의 입맛을 사로잡아 버렸나. 20년이 넘게 지나서야 엄마에게 이 양념이 어떻게 만들어지는 지 물었다. 내가 떠올릴 수 있는 재료는 고춧가루 아니면 고추장 뿐인데 그 맛은 아니었기 때문에, 나는 이것을 그저 ‘아구찜 맛’이라고 불러왔다. 엄마는 다대기와 전분이 들어갈 거라 했고 나는 성의 없이 “글쿤.” 하며 콩나물을 조금 집어 입에 넣었다. 엄마도 나도 절대 이 음식을 만들 수 없다는 걸 안다. 우리는 지난 이십 몇 년간 아구회관, 신기아꾸, 조롱박 아구찜, 묵돌이네로 거래처를 바꾸며 주구장창 사 먹었다.

매콤하면서 고소한 양념, 그것을 충분히 머금은 통통한 콩나물과 잔가시 없이 희고 쫄깃한 생선 살. 나는 미더덕까지 으득으득 씹으며 요리를 남김없이 해치웠다. 기숙사 생활을 할 땐 이 주에 한 번 집에 내려가 아구찜을 먹었다. 수능이 다가오자 모부님이 아구찜 대 자와 갓 지은 흑미밥을 포장하여 기숙사로 날랐다. 맛있게 먹는 친구들에게 이건 이렇게 먹으면 더 맛있어, 하고 괜한 설명을 덧붙이며 으쓱해졌다.

스무 살에 홀로 서울에 살게 됐다. 회기동 일대가 서울의 전부였던 시절 큰맘 먹고 배달 시켜 본 체인점 아구찜은 말린 생선의 구린내가 났다. ‘아구찜 맛’은 맞았지만 혼자 먹기에 너무 비싸고 양이 많았다. 황태찜, 코다리찜처럼 '아구찜 맛' 나는 음식을 얻어 먹어 보기도 했지만 나의 아구찜과는 역시 달랐다.

그러니 오랜만에 집에 내려가면 첫 끼는 당연하게 아구찜이었다. 더구나 네 시간이 넘게 고속버스를 타면 속이 메스꺼워 매운 음식이 간절해졌다. 해가 지나 돈을 벌기 시작하며 출발지는 고속버스터미널이 아닌 용산역으로 바뀌었다. 두 시간 오십 분 만에 열차에서 내린 나는 “아구찜 먹으러 갈까?” 하는 엄마의 물음에 피곤에 절어 “빨리 집에 갈래.” 하게 됐다. 사실 그동안 맛있는 걸 많이도 찾아 먹은 덕분인지, 아니면 입맛의 수명이 다하였는지 몰라도 언젠가부터 '아, 떡볶이 먹고 싶네' 하는 만큼 아구찜을 떠올리지는 않게 되었다.

그래도 집에 머무는 동안 한 끼는 꼭 아구찜을 먹는다. 일종의 의례인 것이다. 이제 우리는 셋이서 소 자를 시켜 남기지 않고 밥까지 두 그릇 씩 먹는다. 그리고 매번 감탄한다. 엄마, 서울에선 이거보다 훨씬 허접한 콩나물무침 같은 것이 오만 원 넘더라. 인당 만 원에 이런 반찬까지 먹을 수 있는 건 큰 축복이라고. 밑반찬으로 양념게장이 나오는 게 웬 말이냐고. 


대학생 때 어쩌다 아구찜 이야기가 나왔는데 누가 그랬다. 아귀, 그거 엄청 못생기고 징그러운 거잖아. 그걸 어떻게 먹어? 차마 그것이 나의 소울 푸드라고 말할 수 없었다. 그 후로 아무에게도 아구찜을 좋아한다고 말하지 않았다. 나를 키우는 동안 그놈의 ‘어머니의 된장찌개’ 보다 많이 먹은 음식에게 조금 미안한 일이다. 아구찜을 먹는 것이 전혀 창피하지 않게 된 지금은 약간의 자부심이 생겼다. 일주일에 두어 번은 떡볶이를 먹지만 세상에 떡볶이 전문가는 너무나 많지. 하지만 적어도 내가 아는 사람 중에서 나만큼 많이, 오래 아구찜을 먹은 사람은 없다.

이제 아구찜을 먹는 것은 휴가와 같은 뜻이다. 일상을 잠시 멈추고 서울에서 아주 멀리 떨어진 곳에서, 나를 해치는 사람들에게서 머얼리 떨어진 곳에서 오직 엄마 아빠랑 먹는 음식. 그렇게 이십 몇 년 만에 나의 아구찜에게 제대로 의미를 찾아 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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