치트는 사고로부터 딱 6개월이 지난 뒤 매뉴얼의 치킨집에 들렀다.

 

그날은 아주 맑았고, 심지어 치트는 일찍 왔다. 매뉴얼에겐 여섯시쯤 도착할 것이라고 말했던 것이 무색하다. 하필 그날따라 일도 별로 없었던데다 차도 막히지 않았던 탓이다. 예상대로 매뉴얼은 준비를 하느라 홀의 불을 다 꺼놓고 있었다. 치트는 다소 어색한 발걸음으로 가게 안에 들어섰다.

 

"연구원님."

"...?"

 

안쪽 주방에서 부산스럽던 매뉴얼은 어두운 홀 안에 기다란 인영이 비치는 것을 보고 기겁해서 뛰어나왔다. 그러나 다행히 그게 치트임을 알아채고 한박자 늦게 반가운 표정을 꺼내왔다.

 

"어어. 왔냐? 일찍 왔네? 준비 아직인데... 좀 앉아있을래?"

"네. 오늘 차도 안 막혔슴다."

"아무데나 앉아. 혹시 손님 오면 돌려보내고."

"네."

 

그날은 치킨집의 휴무일이었다. 그렇기에 다른 손님의 예약은 죄다 거절한 상태였지만 혹시라도 영업하는 줄 알고 들어오는 사람들이 있으면 좀 귀찮게 된다. 매뉴얼은 치트에게 신신당부를 해두고 다시 주방으로 들어갔다. 하지만 치트는 그 지시가 좀 비효율적이라고 생각했다.

 

게다가 그는 넥타이 없이 현장 작업복 점퍼를 입고 있었기에 그 차림으로 손님을 쫓아내게 된다면 그 손님이 겁에 질려 다시는 매뉴얼의 가게를 찾지 않을게 뻔했다.

 

"그냥 문을 잠그면 안됨까?"

"그럼 애들은 어떻게 들어와?"

"오면 연락하겠죠."

"그래, 그럼."

 

튀김기 예열을 마친 매뉴얼이 다시 홀로 나왔다. 휴무 표시도 야무지게 걸어두고 문을 잠가두었다.

 

"아직 튀김은 안되고, 뻥튀기라도 먹을래?"

"맥주는요?"

"그건 돼."

 

매뉴얼은 치트 줄 맥주와 뻥튀기를 가져왔다. 그런데 그 뻥튀기가 몹시 길고 컸다. 일반적으로 가게에서 제공하는 뻥튀기치고는 매우 비효율적이었다.

 

"지팡이 뻥튀기 아님까...? 가게에 보관은 어떻게 하려고 그렇게 부피가 큰 걸...?"

"손님이 사다줘서 다 먹고 하나 남았어."

"남은거를 이렇게요..."

 

매뉴얼은 괜찮다면서 치트 앞에서 뻥튀기를 부숴주었다. 치트는 몹시 맘에 안든다는 표정을 지었지만 맥주가 생맥주였기 때문에 참고 먹었다.

 

"맛있네요."

"그치."

 

치트는 매뉴얼의 시선이 줄곧 그의 새 명찰과 점퍼에 가 있는 것을 알고는 있었다. 아마 매뉴얼도 뉴스를 보니 대충은 알 것이라 짐작하지만, 세부사항은 모를테니까. 그는 모두가 다 오면 공개하려 했던 계획을 수정했다. 맘을 바꿔먹었다. 좋은 이야기도 아닌 터라 빨리 해치우고 싶었다. 마침 매뉴얼도 궁금증을 숨기지 않았다.

 

"너네 그거... 어떻게 된 거야?"

"말하자면 길죠 뭐. 그때 사고가 어떻게 하다보니 사업부서 관리소홀으로 결론이 났슴다. 근데 그게 또 제 담당이고... 환장하겠더라고요. 솔직히 옛날 버그 몰아넣은 창고까지 제 담당은 아니라고 생각했거든요. 근데 막상 튀어나오고 프로그램 문제 생기고 하니까 창고관리가 아니라 프로그램 사업부서 소관이 되지 뭠까."

"이해돼. 너무나 전형적인 수호대 책임전가 프로세스야."

"처음엔 저를 강등시킨다 어쩐다 하다가... 제가 좀 강하게 항의했슴다. 처음엔 진짜 밖에 신고할 생각도 있었고요. 그러니까 물러나더라고요. 대신 설비랑 관리쪽 임원 달아서 귀양보내버리고."

"허어..."

"카트리지랑 RF가 이때다 싶어서 미친개처럼 물어뜯는데 그거 당해내질 못하겠더라고요."

 

치트는 그렇게 말하며 양손을 들어보이기까지 했다.

 

"그놈들이 사업부서들 먹을라고 그랬구만."

"네. 억울해 죽겠어요. 제가 그거 5년 넘게 했는데 이제 와서 관리쪽이라니..."

 

매뉴얼은 진심으로 안타까워하며 혀를 찼다. 여전히 치트의 명함에 이사가 박혀 있지만 연구원이라고 다 같은 연구원이 아니듯 이사라고 다 같은 이사가 아니다.

 

"그럼 요샌 어떻게 해?"

"한동안은 너무 화나서 잠을 못잤슴다."

"그렇겠지..."

"근데 일주일쯤 지나니까 진정되더라고요. 요새는 현장직들 만나서 술도 많이 마시고... 급식업체 선정 관리 해주고, 뭐 그런 거 하면서 지냄다. 머리 식히긴 좋아요."

"야, 너는 뭐 열받는 성격이 아닌데 식힐게 뭐 있어."

"받더라고요."

 

매뉴얼은 치트에게 술이나 부어줄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한직으로 떠밀린 경험이 없는 것도 아니니 일종의 동병상련 같은 느낌도 있었다. 그들은 정작 회사 내에선 별다른 교류가 없어 데면데면하던 사이였으나 이상하게 밖에 나오니 서로 할말이 많았다.

 

"근데 이게 전화위복일 수도 있어."

"네? 이게요? 요새는 직원들 정수기 직수로 바꾸는 거나 검토하고 있는데요?"

"들어봐. 네가 거기서 잘 하면 어쨌든 직원들이 좋아할 거 아냐. 거 직수 정수기 아이디어 좋네. 맨날 무거운 생수통 안 날라도 되고 생수통 가지고 업체가 삥땅칠 일도 없잖아?"

"안그래도 보니까 200통 납품하고 350통 줬다고 영수증을..."

 

대충 매뉴얼의 의견은 이랬다. 치트가 머리 식히며 직원복지 관리를 하다보면 거창한 사업이 아닌 회사의 살림도 속속들이 알게 되고, 몇 년 지난 후엔 다양한 분야를 아우른 임원이란 평가를 받을 수도 있다는 거였다.

 

"회사 생활 길게 봐야지."

"그만두셨잖아요, 연구원님은 길게 안 보고."

"뭐 낯간지럽게 연구원님이야. 이젠 연구도 안하는데."

"그럼 뭐라고 불러요. 아저씨?"

"이새끼가..."

 

그들은 적당히 선배님이라고 합의를 보려고 했다. 하지만 치트는 패치를 염두에 두고 있었기에 선배님은 어폐가 있었다.

 

"사장님...?"

"좀 그래. 거리감 느껴지네."

 

치트는 원래 거리감이 있었다고 말하려다가 합의에 도움이 되지 않을 것 같아 이것저것 제시했다.

 

"형?"

"이상해."

"아 그럼 뭘로..."

"이건 좀 생각해 보자. 더 마실래?"

"네."

 

매뉴얼은 주방으로 가 맥주를 따르려다가 튀김기 예열이 된 것을 확인하곤 바로 치킨을 담갔다.

 

"조금만 기다려. 닭 튀겨가지고 갈테니까."

"예예. 천천히 하십쇼."

 

남은 뻥튀기 부스러기를 뜯어먹던 치트는 패치와 컨티뉴가 오지 않나 창 너머를 흘끔흘끔 보았다. 아직 퇴근 시간이 아니라 그런지 소식이 없었다.

 

예전과는 다르게 한적해진 폰을 뒤적이다가 맥주잔 바닥에 고여 밋밋한 물맥주를 좀 빨아먹어도 매뉴얼은 나올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대신 뭔가 익어가고 있긴 한지 맛있는 냄새가 홀까지 흘러왔다.

 

"그거 생각보다 오래 걸리네요?"

"어어... 야, 잠깐 이리 와봐!"

 

손님으로 온건데 어째 부려먹힐 것 같다는 예감이 강하게 들었으나 거부할 방안은 없었다. 그는 자리에서 일어나 느적느적 주방으로 들어갔다. 그러자 튀김기 앞에 붙어 치킨을 보던 매뉴얼이 인상을 쓰며 말했다.

 

"왜요?"

"나 눈에 땀 들어갔어."

"....?"

 

그러니까 좀 닦아달라는 건가. 매뉴얼치고는 아주 이상한 부탁이었다. 치트는 잠깐 눈을 가늘게 떴다가 대충 상황을 파악했다. 한 마리만 하는게 아니라 곧 올 컨티뉴와 패치 생각까지 해서 여러마리를 한 번에 하고 있었던 거다. 양손이 붙들려 움직이기 애매한 상황으로 보였다.

 

"빨리! 뭐해?"

"알았어요. 어디보자..."

 

하지만 주방이 카페 화장실도 아니고 우아하게 땀을 닦아줄 만한 티슈 같은 건 없었다. 키친타올을 사용하면 되겠으나 이런 일이 생소한 치트에게 그런 아이템이 한번에 들어올 리 없었다.

 

"아, 바닥에 저거 쓰면 됨까?"

"미쳤어!?"

 

매뉴얼은 매뉴얼대로 빠릿하게 휴지를 가져오지 않고 걸레로 얼굴을 문질러주겠다는 치트의 말에 선 채로 폭발할 뻔했다. 덕분에 치트는 매뉴얼의 고성을 듣게 되어 정신을 차렸다.

 

"농담인데 연구원님도 참..."

"그런 말을 꺼낸 자체가 미친놈이지."

 

치트는 더 욕을 듣고싶지 않았기에 나름 깨끗한 소맷단으로 매뉴얼의 이마에서부터 죽죽 흐르는 땀을 닦아주려 했다. 정말 땀이 꽤 들어간 건지 매뉴얼의 눈에 약간의 실핏줄이 보이기도 했다. 더 지체해선 안되겠다 싶어 소매로 얼른 슥슥 닦아주었다. 어째 세수를 시키는 기분이다.

 

"에이 씨. 환풍기 트는거 깜빡했더니만..."

 

매뉴얼은 어느정도 시야가 확보되자 고개를 털며 요리에 집중하려는 모습을 보였다. 하지만 치트는 얼마나 더 닦아야 할지를 몰라 옆에 바짝, 또 멍하게 서 있다가 주방 창문 밖에서 아주 차분한 표정으로 우두커니 서 있는 컨티뉴를 보고 비명을 질렀다. 매뉴얼의 고막에 대고 비명을 꽂는거나 다름없었기에 매뉴얼도 같이 놀라 엄청나게 소리를 질렀다.

 

"으아아악!"

 

그럼에도 매뉴얼은 끝까지 치킨을 사수했다. 펄쩍 뛰는 치트를 어깨로 밀고 공간을 확보한 뒤 치킨을 꺼내 기름을 빼기 시작했다. 그러자 밖에 서 있던 컨티뉴가 더 기가 찬다는 투로 말했다.

 

"두 분 왜 그러세요...? 못볼 사람 봤다는 것처럼."

"아, 아, 아니. 문 놔두고 왜 거기서 그러심까?"

"잠겼던데요."

 

컨티뉴는 전에없이 차분하고 냉정한 표정이었다. 그제서야 사건의 심각성을 깨달은 매뉴얼이 급히 홀을 가로질러 입구를 열어줬다.

 

"야, 이리 들어와!"

"... 네."

 

컨티뉴는 아주 천천히 들어왔다. 입구에서 잠깐 치트가 앉았던 테이블을 점검하기도 했다.

 

"야, 별것도 아닌 걸 가지고. 내가 땀나서 좀 닦아달라고 부탁한거야."

"그런 것도 부탁하나요?"

"그럴 수도 있지. 쟤가 제일 먼저 왔는데. 안 그러면 음식에 땀 들어가."

"....."

"앉아. 뭐 그렇게 흰눈을 뜨고 그래?"

 

뒤늦게 주방에서 빠져나온 치트는 둘 사이의 미묘한 기류를 헤치고 다가갈 자신이 없었다. 그는 다시 핸드폰이나 만지작댔다. 맘같아선 패치에게 얼른 와달라고 하고 싶었다. 그걸 눈치 챈 건지, 매뉴얼이 홱 뒤를 돌아보았다.

 

"패치 언제 온대?"

"연락 안왔슴다."

"물어봐."

 

치트의 눈썹이 한번 더 처졌다.

 

"왜 저래."

"그게..."

 

컨티뉴도 이 상황이 이상하다 생각했는지 살기를 거두고 의아한 눈빛을 하고 있었다.

 

"연락 않은지 좀 됐슴다."

"어엉? 왜? 너희 싸웠냐?"

"아뇨, 안 싸웠어요. 싸울 사이조차 아닌걸요."

"뭐. 그건 또 뭔말이야."

 

홀에는 치트의 한숨만 울렸다.

 

그들은 일단 앉았다. 컨티뉴는 조금 전까지만 하더라도 치트에 대한 무한한 불신(의심)을 가지고 있었다가 지금은 좀 가라앉은 듯했다.

 

"그냥 이게 어떻게 하다 보니까..."

"뭘 어떻게 해. 아무것도 안했잖아?"

"그건 그렇죠. 근데 몇 달 동안 정신없다보니까요. 일부러 연락 않은 건 아님다. 그냥 소원해졌다고요."

"참 나... 같은 회사에 있으니까 만날 일도 많잖아? 구내식당에서만 봐도 맨날 봤겠구만. 너는 배부른 소리 하는거야."

 

가만히 옆에서 듣고만 있던 컨티뉴는 매뉴얼의 말을 두둔해 주려고 했다.

 

"우리같이 나와서 따로 사업하는 사람들이야말로 서로 신경 안 쓰면 소원해지기 쉬운거죠. 같은 회사 다니시는데 연락 안 하셨다 하시면 일부러라고 밖엔..."

"그러니까 말이다."

 

치트는 답답한 마음을 표현하듯 한숨을 쉬며 의자에 확 기댔다.

 

"그러니까, 저는."

"밖에 팀장님 오신 것 같은데요."

"......"

 

패치가 문밖에서 손을 흔들며 열어달라고 요청하고 있었다. 그런 패치를 세워두고 이야기를 할 수는 없으니 치트의 이야기는 그쯤 종료되었다. 문쪽에 가까이 앉아있던 컨티뉴가 가서 문을 열어주었다. 패치는 당연히 예의바르게 컨티뉴에게 고마움을 표했다.

 

"감사합니다. 근데 제가 제일 늦었네요."

"저도 방금 왔어요. 오랜만이네요."

"네... 제가 먼저 연락도 드리고 했어야 하는데. 몸은 좀 어떠세요?"

"보다시피 좋죠."

 

그들은 형식적인 인사를 나눈 뒤 착석했다.

 

"오느라 고생했다. 뭐 마실래? 사이다 같은 거 있는데."

"아무거나 줘."

 

패치는 자연스럽게 치트 옆에 앉았다. 사실 자연스럽게 보이려고 연기를 한 것이었다. 치트를 쳐다보면서 가볍게 눈인사를 하고, '일찍 왔네?' 같은 말을 건네는 것. 다른 사람들이 봤더라면 둘 사이 아무 문제가 없었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하지만 이미 치트가 해놓은 말이 있으므로 그런 연기는 약간의 헛짓거리에 가까워졌다.

 

매뉴얼은 컨티뉴를 불러 서빙을 시켰다. 일단 튀겨놓은 치킨이 많았고, 생맥주 잔들이 제법 무거워서 패치에게 떠넘기자니 맥주도 안 마시는 놈한테 너무한 처사인 것 같아서였다. 게다가 치트를 부르자니 묘하게 아까 일이 떠오르며 괜히 신경이 쓰여서 어쩔 수 없었다.

 

"잘 먹겠습니다."

"많이 먹어."

 

컨티뉴는 치킨을 자주 먹어서 아주 큰 감흥은 없어 보였다. 하지만 몇 달만에 온 패치는 새삼 감탄하며 아주 가열차게 먹기 시작해서 매뉴얼을 기쁘게 했다.

 

"배고팠냐?"

"끝나자마자 바로 왔거든. 그리고 치킨 엄청 맛있네."

"고맙다."

 

다소 훈훈한 대화가 지나가면서 잠시 차분한 분위기가 되려고 했다. 물론 아주 잠깐만 그랬다. 합의 없이 맥주잔을 다 비운 치트는 연구원님 부려먹기 불편하다며 알아서 맥주를 따라오겠다고 했다.

 

"그럴래? 주방 냉장고 옆에 맥주 기계 있어."

"네. 아까 봤슴다."

"잘 따라가지고 와 봐."

"예예."

 

치트가 맥주를 가지러 멀어진 사이 패치는 재빨리 손가락을 들어 치트 쪽을 가리켰다.

 

"쟤는 언제 왔어?"

"한시간 쯤 됐어. 일찍 끝나서 일찍 왔다던데. 왜 둘이 따로 왔어?"

 

매뉴얼은 모르는 척 물었다. 패치는 그 질문을 듣자마자 아주 당황한 투로 말했다.

 

"아니, 바쁘니까 서로 시간 맞추기가 힘들어서 여기서 보자고 하고 온 거지."

"근무시간 이후까지 바쁘냐?"

 

영양가 없는 얼마간의 대화가 지나고 나니 치트가 가득 채운 잔 네 개를 가져왔다. 패치는 그제서야 시선을 들어 치트를 올려다보았다.

 

"내 것까지 가져온 거야?"

"혹시 마신다고 하실까봐서요. 싫으시면 제가 마시고요."

"아냐. 줘."

 

다들 의외라는 반응이었다. 예상했던 반응이었기에, 패치는 덤덤하게 대꾸했다.

 

"요샌 좀 마셔. 이게 마실수록 늘더라고."

"얼씨구. 너네 이거 공짜가 아니라 다 돈이야."

"법카 가져왔어. 맘대로 청구해."

"나 참..."

 

컨티뉴는 할말을 찾다가 그들이 병원에 입원했을 때 이야기를 꺼내고, 사고 때의 이야기를 꺼냈다. 지금 생각해도 아찔했기에 모두의 공감대를 이끌어내긴 충분했다. 그들은 그 날이 얼마나 긴박하고 무서웠는지, 또 얼마나 어이가 없고 황당했는지 저마다 투덜대다가 잔을 조금씩 비웠다.

 

"응급실에서도 놀랐다잖아요."

"왜 놀랍니까? 많이 안 다쳐서?"

"아뇨, 동시간에 환자들이 너무 많이 쏟아졌대요."

"아..."

 

어쨌든 다들 사지 멀쩡히 다시 만났으니 축하하지 못할 이유는 없었다. 매뉴얼은 턱을 괴고 있다가 자세를 바로 했다.

 

"아무튼 다들 고생 많았다. 이렇게 다 같이 술마시게 된 게 어디냐."

 

다들 약속이나 한 듯 잔을 가볍게 부딪쳤다. 각자의 오프닝이 끝났으니 뭔가를 먹을 차례였다. 매뉴얼은 좀 더 강한 술을 원하고 있었다.

 

"그럼 이제 소주를 조금씩 넣어볼까..."

"선배님, 저 감자 먹고 싶어요."

"어떤 감자? 모둠?"

"아무거나요."

 

매뉴얼은 사실 감자를 미리 튀겨두었기 때문에 별다른 화를 내지 않고 감자 바구니를 가져다 주었다. 물론 미리 튀겨둔 것이라 약간의 눅눅함은 있었지만 컨티뉴는 오히려 눅눅한 것을 좋아하는 이상한 습성이 있었기에 몹시 기뻐하며 먹었다.

 

모두의 맥주잔에 소주를 퐁당퐁당 넣어주던 치트는 소주를 넣어서 술맛이 조금 나아졌음을 느끼고 더 가열차게 마셨다. 패치는 치트만큼은 아니었지만, 그래도 나름 열심히 마시고 있었다. 그런 모습이 모두의 놀라움을 사기도 했다.

 

치트는 새삼 패치의 술버릇이 많이 완화되었다는 사실을 깨닫고 그 어색함과 묘한 안타까움, 거기에서 오는 착잡한 향수에 몸둘바를 몰랐다.

 

"왜 그래?"

"아뇨... 그새 선배님 취향이 바뀌셨나 했음다."

"나 소맥을 엄청 좋아하진 않아. 그냥 마시는 거지."

"그 뜻이 아니라..."

 

컨티뉴는 어째 둘의 대화를 주의깊게 듣는 것이 세련되지 못하다고 느꼈다. 게다가 별로 중요해보이지도 않았다. 그는 젓가락으로 감자튀김을 쿡쿡 찍어먹다가 대수롭지 않게 매뉴얼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아까 오다보니 건물 2층에 임대 붙어있던데요."

"아, 원래 거기 무당집 있었는데 나갔다. 돈 많이 벌어서 어디 산에 뭐 차린대."

"그럼 다음에 뭐 들어올까요?"

"건물 주인은 노래방 왔으면 좋겠다고 하더라."

"그거 괜찮네요. 선배님 가게랑 시너지가 나겠어요."

 

그렇게 술술 흘러가던 둘의 대화를 강제로 종료시켜준 것은 치트의 다소 거친 하소연이었다. 그는 벌써 몇 잔째인지 모를, 빈 맥주잔을 세게 내려놓고 다소 격앙된 목소리로 말하고 있었다.

 

"까고 말해서 저만큼 일한 사람도 없잖슴까? 새벽 세시에 제약회사 영업부장마냥 술마시고 들어간 사람이 몇이나 있냐구요. 그렇게 사업 따다놓고 규모 키워놨더니 이제와서 관리소홀? 그게, 그게 할소립니까? 지들이 인간백정도 아니고 나이 어리다고... 나를... 사업부 망해갈 땐 대뜸 이사 달아놓더니 좀 살만 해지니까 그걸 홀랑 먹으려고-!"

"그래, 그래."

"솔직히 코드5 발동 났을때도 우리가 다 수습했잖아요! 다 해놨다고! 근데..."

 

치트는 인생의 코드5가 발동된 것처럼 굴었다. 심각성으로 따지자면 코드6(존재하지 않는다) 쯤 된다고 한다.

 

패치 역시 치트와 박자를 맞춰 나름 마셔오고 있었기에 이미 얼굴이 벌갰다. 컨티뉴는 이미 억울함의 극치를 달리는 치트를 말릴 생각을 전혀 하지 않고, 그냥 고개만 주억거리며 패치가 그를 달래주길 기다리고 있었다. 물론 선배로서 이런 상황을 피해선 안된다는 무언의 압력을 받고 만다. 탄탄대로를 걸어왔다고 오해받기 쉬운 컨티뉴였지만 나름의 고뇌가 있었기에 위로하는 말도 제법 나오긴 했다.

 

"그... 이제 와서 제 말이 큰 도움은 안되겠지만 카트리지랑 RF 이사가 보통은 아니에요. 사업부서 그렇게 키워놨으니 먹고싶어서 오래 전부터 노리고 있었을 거 같은데요. 그런 거 생각하면 오히려 그동안 오래 잘 버티셨어요."

"......"

 

치트는 그 말에 이렇다 할 반응을 보이진 않았다. 하지만 미간을 검지 관절로 꾹꾹 누르다가 한숨을 쉬어 보였다. 그러면서 컨티뉴의 말을 듣고는 있다는 듯 몇 번 고개를 끄덕이는 것도 잊지는 않았다.

 

"그래, 자네 그동안 잘 버텼어. 오히려 일을 너무 많이 해서 문제 아니었나. 지금은 좀 쉰다고 생각해."

 

치트는 패치의 말에도 성의없게, 빠르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는 어느 순간 채워진 술잔을 한번에 쭉 비우고는 잔을 내렸다.

 

"좋게 생각해야죠."

"그래..."

"좋게..."

 

매뉴얼 역시 간만에 술을 빠르게 마셔서 의도치 않게 취한 채였다. 겨우 겨우 마인드 컨트롤을 시작한 치트를 응원해 주려고 한 것이었으나, 그는 결과적으로 치트의 의욕을 꺾는 말을 해버렸다.

 

"오래 살고 볼 일이다... 진짜 까마득한 후배 기수들이 이런 말 하는 걸 보네, 내가."

"선배님도 귀양처리 된 적 있죠? 조언 좀 더 해주세요. 저렇게 우울해하는데."

"얌마. 귀양이라니. 내가 좌천 안당했으면 너하고 나하고 만날 일도 없었어."

 

그 순간에도 치트는 계속해서 맥주를 들이붓고 있었다. 매뉴얼은 좋은 마음에 모두를 초대한 것이라 따로 식대를 받을 생각은 없었는데, 그 속도를 보니 돈을 정말 많이 받고 싶어졌다.

 

"근데 치트 네가 지금 밀려난게 정말 잘 된걸 수도 있다."

"....?"

"봐라. 내가 너한테 뭐라고 하려는 게 아니라, 네가 그 위에 있어서 여태 우리 패치가 승진을 못한 것도 있잖냐?"

"예?"

"원래 인사가 그래. 후배가 먼저 가면, 아니 물론 이런 케이스는 극한이긴 해. 아마 수호대에서 그렇게 징검다리 건너 뛴 건 네가 처음일 거다. 그래서 패치 위치가 엄청 애매해졌고. 그건 인정하지?"

"네..."

"애매해진 패치 위치 고쳐준다고 패치를 사업부서에서 빼다가 뭐 어디 관리나 회계쪽 임원 시켜버린다고 쳐. 그럼 모바일 일은 누가 하냐? 패치를 빼다가 다른데로 승진시킬 수는 없었던 거야. 시킨다면 뭐 자리는 있겠냐고. 그래서 그 상태로 쭉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있던 건데... 이번에 다시 그 노망난 늙은이들이 그, 뭐냐. 사업 가져갔으니까 너네 사업부서 서열상으로는 패치가 다음에 승진 가능성이 있고 뭐 그런 거 아니겠냐."

"아...."

"뭐 좋게 생각하자면 이렇게 생각할 수 있다. 이런 거지."

 

매뉴얼의 말이 다소 길어졌기 때문에, 모두 그에게 과할 정도로 집중을 하고 있었다. 의도치 않은 주목을 즐기는 편은 아니었던 매뉴얼은 조금 민망해져 얼른 술잔을 잡고 쭉 빨며 얼굴을 가렸다.

 

다행히 매뉴얼의 분석은 아주 효과가 있었다. 치트의 표정이 전에없이 밝아졌다. 그렇지만 치트는 매뉴얼에게 감사를 표하는 대신 패치에게로 홱 고개를 돌리더니 커다란 손으로 패치의 양 뺨을 잡았다. 너무나 순식간에 벌어진 일이라 다들 반응 자체를 하지 못했다.

 

"으으읍!"

 

그러더니 치트는 아주 과감하게 패치에게 돌진했다. 그야말로 입술과 입술을 맞부닥쳐 민망한 소리가 날 정도로 세게 빨아들이기 시작한 것이다.

 

"....?"

"어어?"

 

이 모든 광경을 손 뻗으면 닿을 거리에서 생생하게 봐야만 했던 매뉴얼과 컨티뉴는 이번에도 적절한 반응을 찾지 못해 매너 좋은 영화 관람객처럼 앉아있었다.

 

패치는 온몸으로 당황을 내뿜으며 치트의 손아귀에서 빠져나가려 어떻게든 노력하는 모양새였다. 하지만 그 노력도 잠시, 치트가 얼굴을 살짝 틀자 알맞은 각도를 찾아 같이 움직여 혀를 섞기 시작했다. 서로의 혀가 얽히면서 질척이는 소리가 나고, 한 명이 뒤로 빠지면 놓칠세라 잽싸게 따라가 다시 집요하고 간절하게 붙드는 움직임까지 있었다.

 

매뉴얼은 민망해진 나머지 다시 술잔을 들었고, 컨티뉴는 의미 없이 시계를 보았다.

 

하지만 버르장머리가 없다 느껴질 정도로 애정행각이 과해지고 있었다. 컨티뉴의 표정마저 슬슬 가라앉을 찰나, 패치가 의자를 뒤로 확 제끼고 큰 소리를 내며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자네는 진짜...!"

 

그러더니 굳이 닫힌 문을 열고 가게 밖으로 뛰쳐나가는 것이었다. 치트는 혼비백산하여 패치를 쫓아 나갔다.

 

"선배님!"

 

치트는 거의 포효하는 수준이었다. 술을 마시고, 너무 취해서 발성량 조절이 안 되는 상태였다. 쩌렁쩌렁한 여운을 남기고 나가버렸다.

 

매뉴얼은 이걸 불쾌하게 받아들여야 할지, 아니면 그냥 웃긴 에피소드로 취급해야 할지 나름 고민했다. 술기운이 있으니 마냥 기분 나쁘게 와닿진 않지만 역시 이상한 건 이상하다. 그리고 뭣보다...

 

"뭐야. 왜 저러는 거야?"

"글... 쎄요?"

"취해서 저러는구만."

 

가게 밖으로 나간 치트와 패치가 뭐라고 하는지 실내에선 잘 들리지 않았다. 적당히 대화하다 들어오겠거니 하며 술을 마시려는데, 옆에서 컨티뉴가 운을 뗀다.

 

"그런데..."

"응."

"아까 치트가 땀을,"

"하, 너도 취했냐. 했던 이야기 하고 하고 또 하고."

 

컨티뉴는 나름 억울했다. 물론 매뉴얼과 치트가 그런 사고를 칠 리 없지만, 마음 한구석에 남은 불쾌감과 이상한 상실감에 대해 따지고 싶었기 때문이다. 일종의 투정에 가까웠다. 하지만 나이를 먹었으니 이제 속차리라는 듯한 저 냉랭한 태도에 자꾸만 같은 말을 반복하고 마는 것이다. 물론 나이를 먹어도 특정 대상에 대한 결핍이 영원히 채워지지 않는 경우도 있다.

 

"그런 부탁 안하는 성격인 줄 알았죠."

"나는 왜 하면 안 돼?"

 

매뉴얼은 그렇게 말하면서, 너무 컨티뉴에게 냉정하게 보일까 싶었는지 배시시 웃으면서 팔꿈치를 테이블에 괴고 이마를 손으로 짚었다. 그러면서도 살짝 고개를 틀어 컨티뉴를 봐주기도 했다.

 

"안 된다는게 아니고요."

"아니면?"

 

다소 야릇하게 바뀐 분위기에 컨티뉴는 말문이 막혔다. 이제 와서 사과를 받고 싶은 것도 아니니 할 말은 다 사라졌다고 봐도 될 것이다. 치트처럼 냅다 키스를 할까. 그는 빠르고 쉬운 길을 향한 유혹에 사로잡혔다. 간간이 치트와 패치의 목소리가 번지듯 울려왔지만 잘 들리지 않았다. 컨티뉴는 대답 대신 맥주잔을 쥐고 있느라 차가워진 오른손을 뻗어 매뉴얼의 왼뺨을 감싸 다소 성급히 입술을 맞물렸다. 입술이 닿기 직전에 매뉴얼이 헛웃음을 내긴 했다.

 

생각보다 키스가 격해져 매뉴얼이 밀렸다. 벽을 옆에 두고 앉아 다행인 건지. 컨티뉴는 스스로도 술기운에 조금 지배당하고 있다는 사실을 굳이 부정하진 않았다. 그는 매뉴얼이 벽에 편히 기댈 수 있도록 밀고 야금야금 키스의 밀도를 높여나간 뒤 적당한 호흡을 남기고 떨어졌다.

 

"후아. 담배냄새 안 났냐?"

"조금..."

"참아."

 

매뉴얼은 그렇게 말하며 담배를 다시 피우고 싶어진 것이 틀림없었다. 그는 컨티뉴를 놔두고 담배를 피우고 오겠다는 제스쳐를 취했다. 의자에서 일어나며 자연스레 주머니를 뒤지는 몸짓. 그러나 곧 화들짝 놀라며 바깥을 향해 삿대질을 했다.

 

"저, 저놈들이!"

"예? 왜 그러세요?"

 

"저놈들이 내 밥줄 다 끊네!"

 

매뉴얼은 그렇게 말하고 후다닥 뛰쳐나갔다. 가만히 있을 수 없었던 컨티뉴는 당연히 따라 나갔다.

 

골목엔 패치, 치트, 그리고 컨티뉴가 모르는 사람, 피곤해 보이는 매뉴얼이 서 있었다.

 

"아 지금 영업 안 한다고요! 가라고!"

"문 열려있잖아!"

"그냥 잠깐만 연거라니까요?"

"그게 영업이지 뭐야!"

 

그건 골목을 가득 채운 취객들이 만드는 아수라장이었다. 어째서인지 치트와 패치는 매뉴얼의 가게 단골손님을 향해 화를 내고 있었고, 매뉴얼은 그들을 중재하기 위해 불도 안 붙인 담배를 물고 같이 언성을 높이는 중이었다.

 

"야, 야. 니들 진정해. 왜 큰 소릴 내고 그래? 여기 다 주택가라 소리 엄청 울려! 민원 들어온다고!"

"오늘 아저씨 가게 안 한다는데 이 사람이 자꾸 들어가려고 하잖아!"

 

손님은 그제서야 상황을 이해한 듯 싶었지만, 처음부터 이야기해주면 될 걸 가지고 왜 사람을 무안하게 만드냐며 역으로 더욱더 성질을 부렸다.

 

"죄송하게 됐습니다. 애들이 술을 많이 마셔서... 다음에 오시면 서비스 많이 드릴게요."

 

서비스라는 말 때문이었을까, 다행히 손님은 그쯤 물러나 주었다.

 

다만 의문은 남았다. 영업을 안 하는 것뿐이라 손님이 들어오면 말하고 되돌려보내면 되는 것을, 굳이 큰 소리가 나도록 밖에서 잡고 있을 이유가 있었나 싶었다. 컨티뉴는 그 광경을 지켜보고 있다가 다소 느리게 찾아오는 깨달음에 아- 하는 소리를 냈다.

 

"밖에서 이러시지 말고 일단 들어가시죠... 아직 먹던 것도 남았는데."

"그러자... 들어가자. 이놈들이 갑자기 뛰어나가서 큰소리 내는 바람에 술 다 깼네."

 

매뉴얼은 담배에 불을 붙이지 않고, 입에 물었던 것을 담배갑에 되돌려 두었다. 패치와 치트는 질질 끌리는 발걸음을 하고 따라왔다. 둘 사이엔 묘한 분위기가 감돌고 있었다. 공격적인 것은 아니었어도 상당히 신경쓰이게 하는 요소였다. 컨티뉴는 재차 착석하곤 가라앉은 분위기를 조금 돋구고자 어색하게 웃어보였다.

 

"하하하... 근데 두분 술 많이 드셨나봐요. 두분 다 일할 때 빼고 큰소리는 잘 안 내는 줄 알았는데.."

"그러게. 이거 다 동네장사야. 너네 괜히 분쟁 만들지 마."

 

둘의 완곡한 질책에 패치는 좀 억울한 표정을 지어보였다.

 

"나도 조용히 말하려고 했어. 근데..."

"근데 뭐."

"아저씨가 여기서 수석님이랑 키스하고 있었잖아."

 

컨티뉴는 머릿속으로 매뉴얼이 어떤 말을 할까 시뮬레이션을 돌려보았다. 너희들이 예의 없게 먼저 그러지 않았느냐, 불러서 차려 먹여줬더니 건방진 소리나 한다 등등 여러 가지 경우의 수가 튀어나왔다. 하지만 매뉴얼은 그런 말을 하지 않고 시큰둥한 투로 짧게만 대꾸했다.

 

"뭐 어때."

"...뭐 어때라니...? 아저씨 괜찮은 거야? 이미 수석님이랑 동네에 소문 다 났어?"

 

컨티뉴는 참지 못하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주방 냉장고 어딘가에 있는 레몬이라도 가져와야 할 것 같았다. 그는 이런 식의 추궁에 익숙하지 않았다. 엄밀히 따지자면 그에 대한 추궁이 아니라 매뉴얼에 대한 추궁이었는데도 말이다.

 

컨티뉴는 주방에 가서 겸사겸사 술을 더 가져왔다. 어쩐지 평소보다 무덥고 갈증이 더 강하게 느껴졌기 때문이다. 매뉴얼은 그 기회를 놓치지 않고 치킨무도 더 가져오라고 했다.


치트는 그렇게 술을 들이붓더니만 막상 컨티뉴가 술을 더 가져오자 아주 빠른 손놀림으로 술 대신 테이블 위에 있던 티슈를 마구 뽑았다. 그의 손에 비하면 터무니없이 작은 크기의 휴지였기에 족히 열 장은 뽑아야 했다. 그는 땀인지 콧물인지 눈물인지 모를 것들을 닦았다. 울었나 싶을 정도였다. 그걸 묵묵히 지켜보던 패치는 잘만 끼고 있던 장갑을 재빨리 벗더니 치트의 넓은 등을 작은 손으로 토닥이고 머리도 쓰다듬어 주었다. 치트는 패치를 위해 고개를 살짝 숙여주기까지 하여서 몸이 좀 구겨진 상태였다.

 

"두분 그럼 이제 어떻게..."

 

컨티뉴는 원래 이렇게 간소화된 말을 할 생각이 없었다. 원래대로라면 '아까 들어보니 연락을 계속 안 하고 지내셨다는데 이제 다시 잘 지내시나요?' 정도로 성의있게 말했어야 했는데, 그러자니 귀찮았고 너무 둘 사이를 속속들이 파헤치려는 인상을 줄까 싶어 자제한 것이다.

 

"네..."

"....?"

 

대답은 충분치 않았다. '어떻게'를 물었는데 되돌아 오는 건 네 한마디. 컨티뉴는 치트에게 좀더 설명해달라는 눈빛을 보냈다. 하지만 그는 패치에게 온몸을 구겨주느라 대화를 할 의지 자체가 없어 보였다. 둘 중에서 그나마 대답을 해줄 만한 사람은 패치뿐인데 그나마도 입을 다물고만 있어서 컨티뉴를 조금 짜증나게 했다. 술 핑계를 대려는 것인지도 모른다. 컨티뉴는 이걸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 몰라 무의식적으로 선배님을 찾았다. 매뉴얼 쪽으로 고개를 돌려보니, 매뉴얼도 잘 모르겠다는 표정으로 술잔만 입에 대고 있었다. 어색한 공기의 정체에 패치가 드디어 답을 해야겠다 생각했는지, 입을 열긴 했다.

 

"치트가 내 생각 하면서 이제 회사 열심히 다니겠대."

"......"

 

다행히 매뉴얼은 맥주를 뿜어내지 않았다. 마시는 흉내만 내고 있었어서 입에 들어가지도 않았기 때문이다.

 

"무슨 말이야..."

"제가 강등되면 선배님이 승진할 수 있다고 하셨잖슴까, 아까요."

"아니, 100%는 아니고 그럴 수 있다고 한 거지..."

"그럼 된 거죠..."

 

패치는 그런 치트의 태도가 몹시 마음에 든 듯했다. 매뉴얼이 뭔가를 더 말하기도 전에 참지 못하고 치트의 말에 살을 붙였다.

 

"한직으로 밀려나서 내가 싫어할까봐 걱정했었다는거야."

"... 아, 선배님..."

"그럴 일 없는데 왜 혼자 걱정을 하고 그러는지."

"......"

"그 자리는 내가 어떻게든 해 볼게. 어떻게든 하면 되겠지."

 

패치의 당당한 말에 편안함을 느낀 치트는 입 끝을 올려 씩 웃어보였다. 창백한 얼굴에 좀 홍조가 올라오기도 했다.

 

서로 화해(싸우진 않았다)하게 된 계기 치고는 밋밋하고 조금은 웃기기까지 했다. 하지만 컨티뉴는 그 나름의 역경이 있었으리라 생각하고 고개를 끄덕여 주었다.

 

"두 분 잘됐네요. 힘내세요. 제가 가르쳐드릴 건 없지만 혹시 물어볼 거 있으면 물어보시고요."

"네에. 감사합니다."

"꼭 회사에서 하는 성공만이 성공은 아니니까요..."

"성공해야죠."

 

멋진 해결책이 나온 건 아니었대도 어째 다 잘 되어가는 느낌이었다. 많은 것이 죄다 변해버렸다는 사실에 공포를 느끼다가도 사실은 변한 것이 없다는 것을 확인했기 때문이다. 그들은 아직 밤이 그렇게까지 깊지 않았다는 사실에 안도하며 또 술잔을 채웠다.

 

전오수 치트패치+컨티뉴얼 주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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