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이 넘어가는 소리



시골이라 그런지 볕이 따가웠다. 종현은 무더운 날씨에 잠시 돌아갈까. 하는 생각을 하다가 이왕 여기까지 온 거 마저 가는 게 좋겠다 생각하며 발길을 재촉했다. 안에는 시원하겠지 하는 일념으로 목적지에 도착한 종현은 삐질삐질 흐르는 땀을 손으로 대충 훔쳐내고는 낡은 미닫이문을 열었다. 삐걱거리는 소리와 함께 열린 문은 방문하는 사람이 없는지 옅은 먼지를 흩날리고 있었다. 손으로 먼지들을 휘젓고 안으로 들어온 종현은 이제야 살 것 같다는 생각을 하며 땀으로 축축해진 제 옷을 펄럭거렸다. 내부는 확실히 시원했다. 서늘하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시원한 온도에 만족한 듯 숨을 내쉰 종현이 벌겋게 올라온 얼굴을 식히며 터벅터벅 깊이 들어왔다.

이렇게 구석진 시골에도 도서관이 있네. 대충 쭉 둘러진 책장을 살펴보던 종현은 누군가 앉아 있어야 할 공간에 아무도 앉아있지 않자 고개를 쭈욱 빼고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아무도 안 계세요…."


책장 하나를 지나쳐 갈 때마다 나타나지 않는 사람의 형상에 점점 시무룩해지던 종현의 얼굴에 일순간 웃음이 번졌다. 안녕하세요! 맑은 목소리가 조용하다 못해 적막하던 도서관에 울렸다. 종현의 목소리가 닿은 곳에는 하얀색 셔츠를 걸친 남자가 책 한 권을 읽고 있었다. 분명 제 목소리를 들었을 텐데도 고개를 돌리지 않는 남자의 행동에 조금 성이 난 종현이 터벅터벅 남자의 옆으로 다가가 다시 한번 꾸벅 인사를 했다.


"안녕하세요!"

"……."

"저기요? 안녕하세요! 여기 사서분이세요?"

"저, 저요?"

"…여기 그쪽 말고 다른 분이 더 계세요?"

"아뇨, 저뿐인데요…."


그러니까요. 그쪽뿐인데. 어벙한 남자의 얼굴에 잠깐 고개를 갸웃거린 종현이 곧 손뼉을 치며 고개를 푹 숙였다. 너무 집중하셔서 못 들으셨구나…. 갑자기 다가와서 놀라셨죠, 죄송해요. 금방이라도 울 듯 눈썹을 축 늘어뜨리는 종현의 모습에 어버버 거리며 책을 덮은 남자가 들고 있던 책을 책장에 꽂아두었다.


"저기요."

"네!"

"제 손 좀 잡아 보실래요?"


자신의 앞에 내밀어진 손을 멀뚱히 보던 종현은 이상한 부탁을 하는 남자를 한 번, 그의 희멀건 한 얼굴처럼 하얀 손을 번갈아 보았다. 참 이상한 사람이네. 갑자기 손은 왜…. 그러면서도 천천히 내밀어진 손이 하얀 손바닥 위에 얹어졌다. 화들짝 놀란 듯 손을 빼내며 눈을 깜빡거리는 남자에 도리어 당황한 종현이 제 손을 감싸 쥐며 울상을 지었다.


"왜, 왜요…."

"아니, 아니에요…."


너무 놀라 훌쩍거리는 소리를 내던 종현은 제 손끝에 느껴졌던 소름 끼칠 정도로 차가웠던 감촉에 몸을 부르르 떨었다. 여기 에어컨을 너무 세게 틀어둔 거 아냐? 사람 손이 왜 저렇게 차가워. 괜히 주변을 힐끗거리며 고개를 저은 종현은 여전히 자신을 보며 눈을 끔뻑이고 있는 남자를 보곤 어색한 웃음을 지으며 뒷목을 긁적거렸다.


"하핫, 수…, 수족냉증이 있으신가 봐요!"


*


남자는 참 이상한 사람이었다. 마을에 파다하게 퍼진 종현의 이야기도 한 톨 모르는. 여기 사람이 맞나 싶을 정도로 무지한 남자 덕에 종현은 도서관에만 들어서면 꼭 다른 시공간에 들어온 듯한 기분이 들었다. 바깥은 햇볕 쨍쨍 무더운데 이 안은 서늘하기 그지없어서, 시골이라 에어컨이 없으면 어떡하지…. 하는 생각만 하던 종현의 생각을 와장창 깨뜨렸다.


"…씨이, 그럼 교무실도 좀 틀어주지."


도서관을 가는 내내 또르르 떨어지는 땀방울에 헉헉거리던 종현이 입술을 삐쭉거렸다. 숨이 턱턱 막히는 더위에 옷자락을 팔락거리며 손에 든 손수건으로 연신 이마를 닦아내곤 투덜투덜. 더위를 잘 타는 종현은 여름이 지독히도 싫었음에도 굳이 땀을 내면서까지 도서관으로 향하고 있는 이유는, 그곳이 시원해서만은 아니었다. 한 가지 덧붙이자면 보기 드문 제 또래를 만날 수 있어서.


"민현 씨!"

"왔어요?"


책장 구석에 숨어 책을 읽고 있는 민현을 찾아 살금살금 책장 사이를 누비던 종현은 금세 보이는 익숙한 뒷모습이 반가워 쪼르르 발걸음을 재촉했다. 땀에 폭삭 젖은 자신과는 달리 보송하기 그지없는 민현의 모습에 입술을 삐죽인 종현이 언젠가부터 마련된 의자 위에 털썩 앉았다.


"으으, 밖에 엄청 더워요. 민현 씨는 좋겠다. 계속 시원한 곳에만 있으니까."

"여기도 그렇게 좋지는 않아요, 오래 있으면 춥잖아요."

"그래두… 교무실도 이렇게 좀 틀어줬으면 좋겠어요."

"하하, 오늘은 어땠어요? 애들이 적응 좀 한 거 같아요?"

"음, 네! 새로운 사람이라 그런지 엄청 잘 따르더라고요."


더위에 지쳐 볼이 발갛게 물들어서는 여기까지 오는 길이 너무 더웠다며 쫑알거리는 종현을 빤히 보던 민현이 손을 뻗어 종현의 볼에 제 손등을 얹어주었다. 헉… 짱시원해…. 잠깐 손 좀 빌려도 돼요? 반짝이며 묻는 종현에게 고개를 끄덕거려준 민현은 제 손바닥에 손을 겹치며 볼을 부비는 모습이 꼭 토닥임을 받는 강아지 같아 푸스스 웃어버렸다.


"고생했어요, 오늘도."


*


팔랑팔랑. 아무런 소리도 들리지 않는 그곳에 유일하게 들려오는 소리였다. 책장 구석 어드메에 언젠가부터 놓인 두 개의 의자. 하나는 종현이, 다른 하나는 도서관의 주인이 앉아 사이좋게 책을 들면 종이 스치는 소리가 하나가 아닌 둘로 들려왔다. 종현이 민현을 찾는 방법이기도 했던 소리.


살곰살곰 노을이 지기 시작할 즈음 문을 열면, 도서관은 노란빛으로 물들어 있었다. 이젠 익숙해진 시원함을 만끽하며 내부로 들어왔을 땐 숨소리마저 조심해야 할 것 같은 정적에 저도 몰래 발걸음을 죽이게 되었다. 누가 뭐라 하는 것도 아닌데 뒤꿈치를 들고 느릿느릿 발걸음을 옮기는 종현은 오로지 일정한 텀으로 들려오는 종잇장 스치는 소리에 의존해 민현을 찾는다. 그리고는 빼꼼, 고개를 내밀면 기다렸다는 듯 자신을 향해 올라가는 입꼬리.


"왔어요?"


반겨주는 다정한 목소리까지. 종현은 책장 넘기는 소리로 가득한 도서관을 참 좋아했다.


*


"민현 씨는 여기 있는 책 다 읽었어요?"

"음, 웬만한 건 다 읽어본 거 같아요."

"우와, 책 되게 좋아하나 보다."


난 책 공부할 때 빼곤 잘 안 읽었는데. 입술을 내밀고 고개를 끄덕이던 종현은 낮게 울리는 웃음소리에 슬쩍 입꼬리를 끌어올렸다. 책 안 좋아하면서 여긴 왜 왔었어요? 웃음 끝에 걸린 질문이 정곡을 훅 찌르는 말이라 도르륵 눈을 굴리던 종현이 손가락을 꼼지락거리며 배시시 웃었다.


"놀리지 않기에요."

"네. 안 놀릴게요."

"웃지도 말아요."

"네, 안 웃을게요."


의미 없는 말들을 늘어놓으며 헛웃음만 짓던 종현은 그러고도 한참 뜸을 들이며 흘끔흘끔 민현의 눈치를 살폈다.


"…그, 너무 심심해서…."

"심심해서?"

"만화책 있잖아요, 그리스 로마 신화나… 남극에서 살아남기, 그런 거…."


그거 보러 왔었어요…. 종현의 예상이 적중했다는 듯 터져버린 웃음소리에 무더위 속에 있다 들어오기라도 한 듯 겨우 식혔던 얼굴을 붉게 물들인 종현이 눈썹을 늘어뜨리며 우는소리를 헀다. 그러게 제가 웃지 말라고 했잖아요….


"아, 미안해요. 너무 귀여워서."

"씨이… 됐어요."

"정말 미안해요. 이제 안 웃을게요. 여기도 있어요, 종현 씨가 찾던 책."

"진짜요? 난 한 번도 못 봤는데."

"하하, 이따가 찾아줄게요. 이래 봬도 예전엔 애들이 자주 왔었거든요."

"예전엔? 지금은요? 매일 나만 오는 거 같던데."

"음, 지금은… 글쎄요. 다들 더워서 안 오나."


하긴 밖이 많이 더우니까…. 발끝을 까딱거리며 주위를 둘러보던 종현은 그럴 수도 있겠다고 생각하며 민현을 바라보았다. 그래도 여긴 엄청 시원한데, 그죠. 그에 대답하듯 아직 식지 않은 종현의 볼 위에 손등을 올린 민현에 슬쩍 웃었다. 괜찮아요, 그래도. 종현 씨가 매일 와주잖아요. 어쩐지 그의 대답이 부끄러워 입을 달싹이던 종현은 어찌 반응해야 할지 몰라 눈동자만 데굴데굴 굴리다 제가 앉아있던 의자를 팡팡 두드렸다.


"아. 말이 나와 말인데 이거, 민현 씨 움직일 때마다 옮기기 힘들지 않아요? 진작 말했어야 했는데… 이제 제가 와서 옮길게요."

"별로 안 힘들어요. 나야 매일 여기 있는 사람이고, 와주는 사람도 종현 씨밖에 없으니까."


나 나름의 기다리는 방법이에요. 해사하게 휘어지는 눈을 보던 종현은 어쩐지 멍해지는 정신에 느릿하게 눈을 깜빡이며 자신에게 향한 웃음을 눈에 담았다. 볼에 닿아있는 손, 조금만 움직이면 닿을 듯한 얼굴, 여느 사람들이든 홀릴 수 있을 것 같은 웃음까지.


"히끅…."

"괜찮아요?"

"네, 끅, 괜찮, 히끅, 아요…."


딸꾹질을 할 때마다 들썩이는 가슴 위로 손을 올린 종현은 쿵, 쿵 울리는 게 딸꾹질 때문인지 아니면 제 앞의 사람 때문인지 감을 잡을 수 없었다.


*


요즘 날이 꽤 선선해졌네요. 팔랑거리며 책장을 넘긴 종현이 깜깜하게 어둠이 내린 바깥을 바라보며 중얼거렸다. 이젠 시원함이 아닌 서늘함이 느껴지는 도서관에 주섬주섬 가디건을 꺼내 입은 종현은 훌쩍거리는 소리를 내며 옷자락을 더 여미고는 작은 의자 안에 몸을 구겨 넣었다.


"많이 추워요?"

"아뇨, 뭐… 괜찮아요."

"안 괜찮아 보이는데."

"진짜 괜찮은데… 그보다 이제 에어컨 좀 줄여야 하나 봐요."

"그러게요."

"민현 씨는 괜찮아요?"

"…네."


이제 아무리 부지런히 걸어와도 땀 한 방울 나지 않는 날씨가 되었으나 이곳 도서관은 여전히 서늘했다. 종현은 어딘가에 달려있을 에어컨을 찾으려 고개를 두리번거리다가는 이내 차갑게 식은 콧방울을 문지르며 자신을 빤히 바라보고 있는 민현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더위를 싫어하는 종현인지라 지금의 날씨가 훨씬 좋았지만, 그래도 한 가지 아쉬운 건 이제 저 차가운 손이 자신의 뜨거운 볼에 닿지 않을 거라는 점이었다.


*


오늘따라 교무실의 분위기가 어수선한 걸 느낀 종현이 고개를 좌우로 갸웃거렸다. 이상하네, 꼭 날 보고 얘기하는 거 같잖아. 묘한 기분에 가방을 내려두고 주섬주섬 자리에 앉던 종현은 여러모로 복잡해 보이는 얼굴로 저를 부르는 연로하신 선생님의 부름에 벌떡 일어나 꾸벅 고개를 숙였다.


"…김 선생, 나랑 얘기 좀 해."

"네, 네에…."


이런 적은 처음이라 눈동자만 도르륵 굴리던 종현이 작은 헛기침 후에 입을 여는 선생님의 목소리를 들으며 침을 꼴각 넘겼다.


"김 선생. 요즘 도서관에 자주 간다던데…, 사실이야?"

"네? 네. 거기 되게 좋더라고요."

"…거기, 닫혀있을 텐데."

"…네?"

"거기 담당하던 청년이 몇 년 전에 교통사고로 죽었거든."


비밀이야기라도 하듯 소곤거리는 목소리에 정신이 멍해짐을 느낀 종현은 금방이라도 다리가 풀려 주저앉을 뻔한 걸 겨우 참으며 애꿎은 손가락만 꼬집었다.


"그 청년 이름이 뭐였더라, 황… 황 뭐였던 거 같은데."

"……."

"아무튼, 거기에 안 좋은 소문도 돌고 그러니까 안 가는 게 좋아."


아침부터 이상한 소리 해서 미안하네. 등을 두드리는 손길에 힘없이 흔들리던 몸이 털썩 내려앉아 딱딱하게 굳어갔다. 


*


"왔어… 왜 그래요. 무슨 일 있어요?"


문이 닫히는 소리가 들리기 무섭게 다급히 움직이는 발걸음에 민현의 고개가 들어졌다. 영문을 모르겠다는 듯 눈을 깜빡이는 얼굴을 마주 보자마자 울컥 치솟는 감정을 억누른 종현이 책을 쥐고 있는 하얀 손을 그러쥐었다. 늘 그러했듯 사람의 온도가 맞을까, 하는 생각이 들 정도로 애린 살결이 닿자 그대로 주저앉은 종현은 빠르게 깜빡이는 눈꺼풀을 보며 입을 열었다.


"…민현 씨."

"네. 왜 그래요, 정말 무슨 일 있어요?"

"…민현 씨, 이런 말 이상하다는 거 아는데."


사람 맞아요? 종현의 말을 끝으로 안 그래도 하얀 얼굴이 더욱 새하얗게 질려갔다. 종현의 손에 잡힌 손과, 부축해주기 위해 뻗어진 팔이 다급하게 거두어져 어쩔 줄을 몰라 눈만 굴리던 민현이 슬슬 뒷걸음질을 치자 그래도 아닐 거라 생각했던 종현의 마음이 곤두박질쳤다.


"왜 말을 못 해요. 진짜 같잖아요…."

"미안해요."

"…네?"

"진짜, 미안해요."


그 말은…. 아직 민현의 손이 머물러 있던 그대로 굳어있는 손가락이 바닥으로 툭 떨어졌다. 눈을 깜빡이는 것도 잊고 제 앞의 사람, 아니 사람인지 귀신인지 모를 누군가를 보며 숨을 멈춘 종현은 입술을 꾹 짓이기며 고개를 떨구는 모습을 보다 겨우 숨을 들이켰다.


"민현 씨…."

"이제, 안 나타날게요."

"잠깐…."


자신이 민현이라 부르던 그 누군가는, 정말 귀신이라도 되는 양 홀연히 사라져 지금까지의 일들이 모두 꿈이었다는 듯 스산한 공기만 남아있었다.


*


매일같이 드나들던 도서관엔 민현과 자신이 앉았던 의자만 덩그러니 놓여 있었다. 괜히 민현이 서있던 그곳에 똑같이 서, 그가 보던 책을 뒤적거리던 종현은 속에서부터 뜨겁게 올라오는 무언가에 숨을 크게 들이켜곤 한숨을 푹 쉬었다.


"내가 사람이냐고 물어봤지 누가 나타나지 말랬어요?"


듣는 이 하나 없이 허공에 떠도는 목소리가 차갑게만 느껴져 훌쩍 소리를 낸 종현이 발을 쿵쿵 굴렀다. 집에 있어도 혼자, 학교에서도 혼자. 누구와 제대로 마음 편히 이야기하는 곳이라고는 이곳뿐이었는데, 그마저도 사라지니 밀려오는 쓸쓸함이 서러울 뿐이라 무릎을 끌어안은 종현은 그 위에 볼을 얹곤 옆의 빈자리를 빤히 바라보았다.


"귀신이면 뭐 어때, 나한테 씌일 것도 아니면서."


곧 입김이라도 나올 듯한 추위에 코를 훌쩍.


"내가 굿을 한댔어, 성불한댔어. 왜 나타나질 않아."


어제도, 오늘도. 그리고 일주일 전에도. 영 나타날 생각을 않는 인영에 귀신은 귀신이구나 싶어진 종현은 귀신이든 뭐든 좋으니 그 희멀건 얼굴을 보여주었음 좋겠다고 생각했다. 처음에나 좀 무서웠지, 그동안 같이 지내온 시간 동안은 그런 생각일랑 일절 들지 않았으니. 그리고, 여기저기 알아보니까 너 나보다 어리드만!


"야! 황민현! 너 안 나오냐!"


허공에 빽 소리를 질러보지만 유리창 새로 깜깜한 어둠만 내려앉을 뿐, 그토록 기다리던 민현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


끙끙. 비장하게 무언가를 가져온 종현이 끼이익, 쇳소리를 내며 열리는 문에 혀를 쯧 찼다. 저거 문도 고쳐야 할 텐데. 여기 주인이 나타나질 않으니 뭘 할 수가 있어야지. 유비도 세 번 만에 제갈량을 얻었다는데 나는 몇 번이나 와야 얻을 수 있는 거야? 쓸데없이 는 혼잣말만 중얼거리며 침낭을 펴낸 종현이 에구구, 하는 신음을 내며 바닥에 털썩 주저앉았다.


"나 오늘 당신 나타날 때까지 안 갈 거니까 그렇게 알아요."


듣고 있나 모르겠네. 이미 떠나 없는 민현에게 닿지 않을 말들을 전하고 있는 건 아닌가 싶다가도 쓰지 않아 요란한 소리를 내며 돌아가는 온풍기를 보자면 그런 것만은 아니라 입술을 삐쭉 내밀곤 꼬물꼬물 침낭 안으로 들어갔다.


"추울까 봐 걱정되면 얼굴이나 좀 보여주든가."


보여주지도 않으면서. 그거 튼다고 별로 안 따뜻하거든요? 뭐 한겨울까지 안 나타나고 여기서 벌벌 떨다가 감기 걸리게 하든지. 과장이란 과장은 다 섞으며 툴툴거린 종현이 스멀스멀 올라오는 온기를 느끼며 털썩 자리에 누워버렸다. 이래도 안 나오나 보자. 오늘도 안 나오면 나 다신 안 올거야. 사실 종현도 자신이 왜 이렇게까지 하는지는 모르겠으나, 아무리 생각해봐도 떠오르는 거라고는 제 볼에 닿았던 차가운 손뿐이라 그 차가운 손이 그리 맘에 들었나 싶어 고갤 갸웃거리던 종현은 이내 눈꺼풀을 내리며 헛웃음을 지었다. 그것도 아니면 귀신에 홀렸나 보지 뭐.


"…나 진짜 여기서 잘 거예요. 셋 셀 때까지 안 나오면 당신이 켜둔 저 온풍기도 끌 거예요."

"……."

"하나."

"……."

"두울."

"……."

"…셋."


천천히 눈을 뜬 종현은 뚱한 얼굴로 자신을 내려다보고 있는 모습에 벌떡 몸을 일으켰다. 목 끝까지 끌어 덮은 침낭도 부랴부랴 벗어내고 혹여 도망이라도 갈까 팔부터 그러쥔 종현은 허둥지둥 민현의 앞에 섰다. 얼굴을 마주한다면 무슨 말부터 꺼내야 할까 고민했던 생각들은 모두 사라지고 울먹거림부터 내뱉은 종현이 자신을 향해 손을 뻗다 주춤하는 민현의 손을 그러쥐어 제 볼에 얹어주었다.


"이렇게 만져지는데 어떻게 귀신이야."

"…날 왜 그렇게 찾아요."

"몰라요, 나도."

"이 침낭은 뭐고요."

"당신이 하도 안 나타나니까. 진짜 귀신이에요?"

"다 들었잖아요."

"왜 내 앞에 안 나타났어요?"

"당신한테 하나 좋을 거 없는 귀신이니까요."

"그래도 나타나요, 더 이상 내 앞에 나타날 수 없을 때까지 사라지지 마요."


차가운 몸을 끌어안은 종현이 얼음장 같은 몸에 얼굴을 부볐다. 차가워요, 떨어져요. 아무리 밀어내려 해도 떨어질 줄을 모른 몸이 찰싹 붙어 자신의 온기를 옮겨내듯 등을 천천히 쓸어주었다. 보고 싶었어요. 많고 많던 말 중 제일 오래 곱씹었던 말을 겨우 읊조린 종현은 제 등을 감아오는 손길에 긴 숨을 내뱉었다. 아… 나는 정말 귀신에 홀렸나 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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