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녕이 귀환하는 데에는 꼬박 열이틀이 걸렸다. 서운이 그 동안 애가 닳았음은 자명한 일이다. "기약을 정했어야 했는데." 하고, 그는 영녕이 떠나고 꼭 사흘째부터 걸핏하면 먼지 구름과 안개 너머 월루국 땅을 쳐다보며 중얼거렸다. 군주께 무슨 일이라도 생기면 큰일난다는 이유와 이번 임무의 실마리를 쥐고 떠난 존재라는 이유가 따라붙었지만 서서운은 본심을 크게 감추는 사람은 아니었고, 따라서 그가 어릴 적부터 함께 지냈던 영녕군주를 온통 걱정하고 있음은 누구나가 다 아는 사실이 되었다.


"따지고 보면 나라를 순방하는 일인데 어떻게 시간이 안 걸릴 수가 있겠습니까. 진이나 점검하러 가시죠." 교위 장위지가 말했다. 어제 했잖아." "그러면 보급을……." "그건 이따 신시에 천의열이 보낸 관리가 방문한다고 했다." "그러면 그냥 군주를 걱정하셔야겠습니다." "그렇지?"


궁금증을 해소해 줄 주술사들이 모두 함께 떠나갔으니 그야말로 할 수 있는 것은 기다리는 일밖에 없는 셈이었다. 문득 진을 만들 때 밝아지던 백성들의 얼굴이 떠오르며 서운은 할 수 있는 일이 있고 없고가 무척 중요한 일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독단적으로 찾아와 나서신 것이라고는 하나 제국의 군주이시니까요. 만일 무슨 일이 생긴다면 외교적 문제이기도 합니다." 그러니 무사히 돌아올 것이라는 뜻을 내포한 말이었다. 서운은 자리에서 끄덕끄덕했다. "이번에는 별일이 없을 것이라는 느낌이 있기도 해서 가시게 둔 것이기도 한데……. 그냥, 소식이 궁금하잖나." "그건 그렇습니다. 과연 군주께서 주술사들과 월루국 사람들을 잘 설득하고 오실지……." "나는 믿어." "그럼 뭘 걱정하시는 겁니까?" "그냥 보고 싶잖아."


허 하고 장위지가 제 상관을 쳐다보면 서운은 씩 웃고 말았다. 사람들과 워낙에 허물없이 지내는 성격이어서 그런지 이외에도 서운에게 영녕의 안부를 주제로 말을 거는 이들은 많았다. 그래서 다행이었다. 염려하는 이들과 이리저리 말로 댓거리를 하고 있으면 하루도 그럭저럭 지나갔다.


영녕은 새벽녘에 이슬을 맞으면서 돌아왔다. 안개가 걷히자마자 그 속에서 모습을 나타낸 군주는 열흘이 넘게 황무지를 돌아다닌 이답게 온통 먼지를 뒤집어쓰고 있었고, 무척 지친 표정을 하고 있었지만 눈빛만은 맑았다.


"군주!"


하고 서운과 병사들이 몰려가면 영녕은 그들과 눈을 마주치고 고개를 끄덕이고, 그리고 사람들에게로 몇 발을 옮겨서 합류한 후에,


"지치는구나. 일단 좀 씻어야겠어."


하고 그를 이끄는 서운의 손에 몸을 맡겼다.





그 이후 호리화난은 영녕과 서운과 동행하여 지금 병사들이 만들어 놓은 진을 돌아보며 보완할 점과 그 이후의 제례에 관해 이야기했다.


"집을 꾸미는 담 모서리마다 작은 깃발을 세우시오. 또한, 그대들은 월루 사람들과 달리 귀신에 강한 체질이 아니므로 담을 지금보다 더욱 촘촘히 구성해야 할 것이오."

"그러자면 대대 전 병력을 동원해도 모자라겠는데."

"제는 본래 민간에서 하늘의 돌보심을 기원하여 올리는 것이니 누가 참여하든 문제될 일은 없을 터요."

"마을 사람들을 동원하라는 것인가. 그러나 어찌 민간인을 군과 함께 작전에……."


호리화난은 서운에게 손짓해 그가 진을 만들기 시작한 후부터 항상 가지고 있던 도해를 꺼내도록 했다. 그리고 그림을 하나씩 짚어 가며 설명했다.


"이 집은 열두 겹의 담을 가진 튼튼한 집으로, 웬만한 귀신은 이 집 마당까지 들어올 수가 없소. 그것을 이용해 마당에서 제사를 올리는 것이오. 여기서 중요한 역할을 맡아야 하는 이들은 문지기와 제주(祭主)로서, 그 이외 사람들은 집의 담을 구성하고 있는 것이니 보통 사람들이라도 자리만 지킨다면 능히 해낼 수 있는 역할이오."

"문지기와 제주는 각각 어떤 역할을 하나?"

"문지기는 열두 대문의 각 문마다 두 명씩 세우는데, 가장 바깥에 선 사람일수록 귀신을 직접 마주하게 되니 담이 좋아야 하오. 제주는 직접 제사를 올리는 인물이니 이 마을을 위하여 제석천께 빈다면 이 곳에서 나고 자란 이로서 실제로 마을을 구하겠다는 마음을 진실로 가진, 제주의 자격을 갖춘 인물이어야 제사가 효험이 있을 것이오."


"담이 좋다 함은…….." 서운은 귀신을 마주하고 정신을 잃지 않은 이호선과 자신을 떠올렸다. "어느 정도 알겠는데, 그러면 제주는 누가 되어야 하나?"


처음 떠오른 것은 적랑성 지사 천의열이었다. 무엇보다 이 문제에 대한 소를 올리고 문제 해결을 위해 계속해서 신경을 쓰고 있는 인물이었으니 말이다. 그러나 하제국에서 관원이 사사로이 민간의 신앙에 의지한 의식에 참가하는 것은 금지되어 있었기에 천의열을 제주로 삼아 진을 펼칠 수는 없었다.


"어쩌면 마을 사람들 중에서 찾아 보아야 할지도 모르겠군. 그들은 확실히 이 사건의 당사자이니까 말이야."


서운은 막사로 돌아와 영녕과도 짧게 의논한 후, 병사들을 통해 대피해 있는 마을 사람들 중 제주 역할을 할 사람이 있는지 수소문하도록 했다. 그러나 며칠이 지나도 선뜻 지원하겠다는 사람이 없었다. 내심 기대는 했었지만, 서운은 예상 안의 결과라고 생각했다. 지금 그들이 한 달이 넘게 사람들을 동원해 만들고 있는 진의 규모는 마을 전체를 감쌀 만큼 어마어마했다. 그렇게 오랫동안 공을 들인 진의 최종 목적인 제사에서 가장 중요한 역할을 맡으라니 공사(公事)를 행해본 적 없는 마을 사람들로서는 부담이 상당할 것이었다. 호리화난은 제주만 있다면 자신이 옆에서 보조를 할 테니 상관없다고 말했으나 혹시 무언가 잘못되기라도 한다면 큰일이었다. 서운은 자격만 된다면 자신이 나서고 싶은 마음이었으나 반드시 이 일대에서 나고 자랐어야 한다는 조건 때문에 그럴 수도 없었다.


또다시 고민에 빠진 서운이 역할에 포상을 걸거나, 아니면 천의열을 불러 적당한 인물을 수소문하려 의논하거나 하는 방안을 떠올리고 있을 때였다. 막사 밖에서 문득 알고 있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정말인가요? 그렇다면 이 귀신 문제를 해결하는 때도 머지않은 것이로군요!"


서운은 천막을 들추고 밖으로 나갔다. 밝은 목소리가 환한 웃음으로 그를 맞이했다. 반 년이 안 되는 시간임에도 어느새 훌쩍 자란 인상을 하고 있는 천은하였다.


"서 중랑장! 여기 계시다는 말씀을 듣고 얼마나 안도했는지 모릅니다. 폐하께서 파견하셨다는 군대의 사령관이 서 중랑장이시라니오!"


천은하는 태자비 간택에서 떨어진 이후 한동안 울적하게 지내다가, 적랑성 일이 점점 커진다는 이야기를 듣고 염려를 멈출 수 없어 본래 나고 자랐던 고향으로 돌아왔다는 것이었다. 천의열은 천은하의 숙부 되는 사람이었다.


"그렇잖아도 중랑장을 만나뵙고 싶었어요. 그 궁녀가 말한 묘해경을 읽어볼 수 있었다면 좋았을 텐데……. 헌데 중랑장께서는 지금 월루국의 주술사들과 함께 제사를 준비하신다 하니, 이에 관한 방법을 알고 계신 것인가요?"


궁녀라 함은 당시 서운의 곁에 변장을 하고 있었던 해연을 이르는 것일 터였다. 서운은 나오려는 웃음을 참다가 천은하를 진지하게 보았다. "천 소저, 귀신을 쫓는 주문을 위해 태자비가 되고 싶어하신 것이었지요? 지금도 백성들이 염려되어 여기까지 오신 것이고 말입니다."


제주를 맡아 달라는 요청에 천은하는 반색했다. "물론이에요. 제가 할 수 있는 일이 있다면 그 얼마나 기쁜지 모릅니다. 무엇보다 그 제사를 지내면 이 일대에는 영영 귀신이 출몰하는 일이 없게 되는 것이겠지요?"


그럴 것 같다고 서운은 호리화난에게 들은 이야기에 기초하여 대답했다. 사정 설명을 들은 천은하는 얼굴에 안도의 빛을 감추지 않았다. "그러면 이제 문지기만 찾으면, 그 주술사가 말한 날짜에 맞추어 제사를 올릴 수 있게 되겠군요."


열 두 문을 지키자면 스물 네 명의 문지기가 필요했다. 맨 바깥문에는 이미 안개 속에 홀로 있어 본 자신과 낭장 이호선을 세울 생각이었으되, 남은 문지기들을 누구에게 맡기는지가 문제가 되었다. 설명에 따르면 맨 겉 대문에서 멀어질수록 귀신도 안개의 영향력도 줄어든다 하였지만, 문지기를 맡을 이가 혹시라도 정신을 잃고 쓰러진다면 매우 곤란한 일이었다.


"병사들 중 멀쩡한 이가 있는지 어떤지 다들 안개 속에 들어가 보라고 할 수도 없고, 어려운 일이로구나."


서운이 고민하고 있자 옆에서 골똘히 생각하던 천은하가 의견을 내었다. "만약 그게 체질을 타는 종류라면, 백성들 가운데서도 귀신에 강한 사람이 있을지 모릅니다. 무엇보다 처음 귀신이 나타났을 때부터 그들과 부대끼며 살던 이들이 아니겠어요?"


과연 일리가 있는 말이었다. 서운은 상의하여 진에 참여할 사람들과 문지기를 구한다는 방을 대피소와 적랑성의 다른 마을 곳곳에 붙였다. 물론 군사들에게 명하여 말로 소식을 전하도록도 하였다. 이틀 후에 대엿 명의 사람들이 병영을 찾아왔다. 그들은 문지기 역할을 자원하겠다는 의사를 밝혔다.


"문지기는 귀신에 홀리지 않고 정신을 차린 채 자리를 지켜야 하는데, 이에 관한 비방을 가지고 있는가."

"장군. 장군께서는 아마도 꽃의 약속을 맺은 상대가 있으실 것입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뜬금없이 돌아온 물음에 서운은 의아함과 놀라움을 동시에 느꼈다. 영녕과 서운의 관계가 특수하여 황도에 빠르게 소문이 퍼졌기는 하나 기본적으로 화인은 개인적인 약속으로서, 타인에게 알리는 종류도 아니었고 이렇게 쉬이 언급되는 종류도 아니었다. 따지자면 집안 사정을 캐물은 것과도 같은 일이니 묘할 수밖에 없었다. 이 먼 변방까지 소문이 퍼질 만큼 큰일이었나 하고 생각하면서 서운은 물었다.


"그것은 어찌 물으시는가."

"몸에 화인을 지닌 자는 귀신들 사이에 있어도 제정신을 유지할 수 있습니다. 저희도 모두 그런 사람들이지요."


이 근방에서 귀신이 나타날 초기에도 서서운과 이호선처럼 남들이 안개 속을 헤매는 모양을 지켜보기만 할 수 있었던 이들이 있는 모양이었다. 사건 조사를 위해서 이들을 모았을 때, 각기 연령도 성별도 모두 다른 사람들 사이 공통점을 찾기까지 시간이 다소 걸렸으나, 결론은 그들 모두가 누군가와 화인을 맺어 몸에 그 낙인을 지니고 있는 자들이라는 사실이었다. 이 이야기를 들은 서운은 옆에 있는 이호선을 슬쩍 쳐다보았다. "이것 참. 예, 그렇습니다. 저도 지키기로 한 사람이 따로 있어서 말입니다……." 이호선은 머쓱한 표정을 지으면서 대답했다.


화인의 종류와 입장을 가리지 않고 약속에 관계되어 있기만 하면 효험을 발휘하는 것 같았다. 영녕은 그 말을 듣고는 자신도 문을 지키는 역할을 맡겠다는 뜻을 밝혔으며, 서운은 다시 한 번 명을 내려 대대 안에서, 그리고 다른 마을 사람들 가운데서라도 화인을 지닌 인물이 있다면 귀신을 쫓아내기 위한 문지기로 자원해 줄 것을 청했다. 이리하여 제사를 사흘 앞두고 스물 네 명의 문지기들을 모두 구할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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