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벤져스-엔드게임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영화를 아직 보지 않으신 분은 읽지 마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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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어쩌다가 또 이 치와 둘만 대치하는 상황이 됐지.

토니는 부러 시선을 피한 채 고집스럽게 턱을 세웠다. 얼굴은 무슨 일이야? 누구한테 빌린 수염이야? 스타일링 바꿨네? 온갖 말이 다 머릿속을 스쳤는데 그 중 어느 것도 말하지 못했다. 그를 보고 한 첫 마디는 놈을 못 막았어, 그 다음 말은 아이를 잃었어. 씻을 기운도 없어 일단 물만 적당히 끼얹고 나와 수액을 맞고 나니 그제야 제가 지구로 돌아왔다는 실감이 났다. 정신을 차리고 보니 하지 않아도 될 소리를 했다는 생각이 들지만 아무려면 어떤가, 하지 말아야 할 말까지는 아니었다.

가장 보기 싫은 얼굴이 네 얼굴이었다고 말해줄까, 그의 발치를 쳐다보며 토니는 잠시 생각했다. 가장 많이 떠올린 게 그의 얼굴이었다고 해서 가장 보고 싶었다는 뜻은 아니니까, 네가 보기 싫었다고 말해봐야 딱히 거짓말도 아니다. 그러고보니 말한 적이 있었지, 네 그 고른 치아에 주먹을 날려버리고 싶다고. 그 말을 한 직후에는 괜한 소리를 했다고 생각했는데, 지금 돌이켜보니 그 말이라도 하기를 잘 했다.

“어디 있었어?”

“…토니?”

“어디 있었냐고. 내가 필요할 때는 거기 있겠다더니.”

“…자네가 불렀다면 기꺼이 왔을 거야.”

“아, 그래. 내가 부르지 않아서군, 내 탓이야?”

“그런 말이 아닌 걸….”

“아니, 모르겠는데.”

“…그런 말이 아니야.”

좀 전까지 지구의 중력이 무거워 숨 쉬기도 버거웠던 게 거짓말 같다. 그와 둘만 마주하고 나니 딱히 애쓴 것도 아닌데, 그에게 한껏 삐딱하게 굴 정도의 힘이 어디에선가 솟아났다. 그의, 스티브의 얼굴을 마주하고 있는 게 아닌데도 자신을 어떤 얼굴로 보고 있을지 알 수 있었다. 굳이 고개를 들어 그의 얼굴을 보지 않는 게 그 예상이 맞을 것이 싫어서인지, 혹시 틀릴 것이 두려워서인지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어 토니는 제 자신이 좀 우스워졌다.

“자네 전화를 기다렸어.”

“그랬겠지.”

“내가 할 수는 없었다는 걸 알잖아.”

“내가 하지 않을 건 몰랐고?”

“그래도 해줬으면 했어.”

퍽이나, 가 좋을까, 어련했겠어, 가 좋을까. 잠시 고민하다가 대꾸할 타이밍을 놓친 토니는 입을 다물었다. 그 놈의 전화, 어디서 구한 건지도 모를 구식 전화기. 타이탄으로 떠나기 전에 매일 충전해서 내내 몸에 품고 다녔던, 제 주먹의 반도 안 되고 무게는 몇 십 그램밖에 안 되면서 잠시도 무시할 수 없게 제 존재감을 뽐내던 그 망할 전화. 그의 말대로 전화는 한 적 없다, 하려고 생각한 적은 있었지만 하지 못했다. 했으면 너는 정말 왔을까? 전화만 했더라면 네가 왔을 거라고 내게 믿어달라는 건가? 너는 벌써 내 부름을, 내 바람을 거절한 적이 있는데.

“내가 말한 적 없다고는 하지 마.”

“뭘 말인가.”

“당신이 필요하다고.”

“…자네가 언제.”

“기억 안 나? 베를린, 내가 올리브 가지를 건네면서-.”

“‘우리는 캡틴이 필요하다We need you, cap’고 했지.”

“잊어버리지는 않았네.”

“내가 싫었다는 얘기도 했었지. 날 한 대 치고 싶다고도 했고.”

기억하고 있네, 생각 외로 세세하게. 토니는 문득 웃고싶어졌다, 지금 웃어봐야 히스테릭한 소리가 터져나올 게 뻔했지만. 네 얼굴이 제일 보기 싫었다고 말해주기 딱 좋은 타이밍인데, 굳이 해봐야 그에게는 아무 데미지도 주지 않을 것 같고, 그래서 되려 제가 마음이든 기분이든 상할 것 같아 토니는 그 얘기는 하지 않기로 했다.

“그래, …아무튼, 했잖아. 그걸로는 부족했나?”

“…내가 뭘 원했는지 알잖아, 토니.”

알지, 알다마다! 그래서 방패도 버리고 갔지, 나를 혼자 두고 갔잖아!

제 화를 못 이겨 벌떡 일어났다, 고 생각했는데, 마치 발이 미끄러지듯 무릎이 제 정강이에서 미끄러지는 느낌이었다. 시야가 푹 내려앉는 것으로 쓰러지는구나- 생각한 것도 잠시, 토니는 자신이 익숙하다못해 잊고싶기까지 했던 단단한 팔이 제 몸을 지탱해주는 것을 느꼈다.

네게 기대어 서느니 차라리 혼자 쓰러지겠다는 생각으로 뿌리치려고 했지만, 스티브는 토니를 놓아주지 않았다. 단단한 팔, 두터운 가슴, 넓은 어깨. 자신이 의지했던, 의지해도 좋다고 생각했던, 심지어 곁에 없을지라도 의지할 수 있으리라고 생각했던, 그리고 저도 모르는 사이에 정말 그렇게 의지하고 있었던 그 모든 것이 저를 둘러싸고 있었다. 이제와서, 지금에야, 이렇게 다 늦게.

“지금 이래봐야 무슨 소용이야.”

“토니.”

“이게 무슨 소용이냐고, 이제 와서, 이제와서-.”

“토니, 날 봐.”

축 늘어지는 제 몸보다도 더 무겁게 내려앉는 목소리에 눈을 들어 그의 눈을 마주했다, 축축하게 젖은 푸른 눈동자 속에서 옅은 녹색이 일렁이는 것 같았다. 이런 눈을 내가 어디서 봤더라, 분명히 본 적이 있어. 그렇게 떠올리자마자 토니의 머리는 빠르게도 그 기억을 찾아낸다. 얼어붙은 시베리아의 방공호에서, 저를 붙잡으며 이름을 불렀을 때도 이런 눈을 했었다. 토니, 지금처럼 이렇게, 토니, 불렀을 때.

저나 토르보다 길게 기른 수염이며 자신이 기억하는 것과 다르게 제법 길어져 뒤로 넘긴 머리칼까지, 지금 제 눈앞의 스티브 로저스는 자신이 알던 것과 다른 사람 같다. 하지만 이 눈은 그 때와 똑같았다, 후회와 죄책감이 뒤섞여 그 위에 애원까지 범벅이 된 모양새가 말이다.

뭐가 그렇게 미안한지는 알겠다, 뭘 후회하는지도 알겠다, 그러나 무엇을 애원하고 싶은가는- 알지만, 그 때 그랬듯 지금도 모른 척하고 싶었다. 내게 용서를 구할 수 있고 사죄할 수는 있어도, 애정까지 바라는 것은 너무한 게 아니냐고 따져묻고 싶었다. 언젠가는 너의 잘못까지 포용할 수 있어도 너의 갈구에는 더 이상 응답할 수는 없다고 거절하고 싶었다. 그 때는 분노와 배신감에 등이 떠밀려 분명 그렇게 할 수 있었던 터다. 그리고 아무 것도 달라진 건 없다, 그냥 시간이 흘렀을 뿐. 그런데, 그가 없이 고작 몇 년이 흐른 그게 뭐라고, 지금은, 이제는 왜.

왜 닿은 곳마다 이렇게 뜨겁지? 원래 이 치가 체온이 높잖아. 하지만 너무 뜨겁다, 혹시 내가 지금 열이 나고 있나? 머리가 빙빙 도는 걸 보면 열이 나는 게 맞는 것 같았다, 적어도 그에게 꽉 잡혀있으니 몸은 돌고 있지 않을 테니까. 열이 올라서인지 머리가 제대로 돌아가지 않는다, 아니, 좀 전에 머리가 돌고 있다고 하지 않았나? 아니야, 다른 의미다. 이것 봐, 이것조차 혼란스러울 정도로 머리가 엉망이잖아.

“토니.”

나를 그렇게 부르지 마, 이제 그렇게 부르지 마. 그렇게 딱 잘라 대답하려고 했는데, 바싹 마른 입은 말 대신 숨만 토해낸다. 토니가 그렇게 뱉어낸 숨을 제가 삼키기라도 할 것처럼 스티브 로저스가 가까이 다가왔다. 토니는 뿌리치려던 힘으로 스티브의 소매를 움켜쥐었다. 지금 제 약한 힘으로는 주름도 제대로 남기지 못하리라고 생각하면서도, 스티브 로저스가, 그가 걸친 그 옷이 제 손에 실제로 형체를 이루고 들어와있다는 것을 그렇게라도 확인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스티브.”

그렇게 말하고 토니는 눈을 감았다, 덜덜 떨리는 입술은 제 의지로는 못해도 다른 사람의 입술이 멈춰줄 터였다. 입술보다 먼저, 그의 수염이 느껴졌을 때 토니는 저도 모르게 조금 미소지었다.

















참 이상한 일이네...
저는 분명히 바락바락 소리치다가 짐승처럼 엉겨붙으면서 제 손으로 링거 뜯어내놓고도 박힐 때까지 저항하다가 박히면서도 몸부림치는 토니를 쓰려고 했는데...
아무튼, 털스팁x초췌토니가 보고 싶어서...대충 이뤘으니 뭐 만족합니다. UㅅU



MCU. 잡덕. 스토니 메인. 토니텀 온리. 토니른. 논리버시블. 용두사미의 화신. @vianvis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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