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 진실과 거짓






괜스레 손을 꼼지락거리며 나재민의 뒷모습을 바라봤다. 뜻밖의 상황에서 알아버린 나재민의 진심. 분명 첫 만남 때까지만 해도 온갖 거짓말을 늘어놓으며 내 속을 뒤집어 놓았으면서. 강창현과 끼리끼리 잘 만났다며 내 마지막 자존심을 보란 듯이 짓밟았으면서. 왜 오늘은 거짓 하나 없는 다정한 진실만을 들려주는 건지. 설마 그 짧은 시간 안에 생각이 바뀌었을 리는 없고… 방금 실제로 본 강창현이 자기 예상보다 훨씬 더 쓰레기여서 그랬던 건가. 아까 같은 상황만 두고 보면 욕을 안 할래야 안 할 수가 없는 상황이었을 테니까.




"야."

"왜."

"방금 나 왜 도와줬어?"




은근슬쩍 나재민을 떠보며 발걸음을 빨리했다. 짧은 정적. 내가 힘겹게 따라오고 있다는 걸 눈치챈 나재민이 걷는 속도를 늦추며 무덤덤한 얼굴로 입을 열었다.




"그 상황에서 안 나설 수 있는 애가 몇이나 되겠냐."

"……."

"잘못한 것도 없으면서 비 맞은 강아지마냥 축 처져 있지를 않나. 남자 친구가 자기 함부로 휘둘러도 욕 한마디 못하고 울려고 하지를 않나."

"… 울진 않았거든."

"어쨌든. 걔가 너한테 소리 지르면서 지랄하는 거 보자마자 손이 먼저 나갔어."

"……."

"저런 새끼가 선희 누나랑 데이트한다는 사실도 좆같았고, 걔가 화 좀 낸다고 곧바로 집 가려는 네 태도도 좀 짜증 났거든. 답답하기도 했고."




내 쪽을 흘깃 쳐다본 나재민이 낮은 웃음을 흘렸다.




"그리고."

"……."

"너 오늘 과제 때문에 꾸미고 온 거잖아."

"……."

"그렇게 입고 나와서 영화도 안 보고 집 가버리면 너무 아쉽지 않겠냐?"




장난기가 다분한 말투. 아무렇지도 않게 흘러나온 나재민의 말에 아까부터 지속돼오던 손끝의 떨림이 멎었다. … 맞아. 이렇게 힘들게 꾸미고 나왔는데 영화도 안 보고 그냥 갈 순 없지. 작게 심호흡을 하며 눈꼬리에 매달려 있던 눈물을 닦아냈다. 직접적인 위로도 아니고, 다정함이 담긴 따뜻한 말도 아니었지만. 이상하게도 나재민의 말 몇 마디에 진창에서 구르던 기분이 순식간에 괜찮아지는 것 같았다.




"야, 나재민."

"왜."

"그럼 너… 마지막에 강창현한테 했던 말도 그냥 강창현 기분 나쁘라고 한 소리였어?"

"……."

"강창현 자존심 상하라고."




내 물음에 나재민의 입이 꾹 다물어진다. 한참을 생각하는 듯 이리저리 눈동자를 굴리던 나재민이 말없이 고개를 돌렸다. 잘만 마주치던 눈을 피해 버리고, 언제나 당당함이 가득하던 얼굴 대신 새빨개진 귀를 보여 준 나재민. 내 물음에 대한 답이 돌아온 건 상영관 앞에 도착하고 난 뒤였다.




"… 어."

"……."

"그냥 걔 엿 한 번 먹어 보라고 그런 거야."

"……."

"다른 뜻 없어."




부자연스럽게 내 손을 놓은 나재민이 상영관 안으로 먼저 몸을 들였다. 누가 봐도 급하게 손을 빼는 듯한 모습. 마지막 말을 내뱉는 순간 맞잡은 손의 온도가 급격하게 올라가는 것이 느껴졌다. … 이 새끼 봐라? 나재민과 마주 잡고 있던 손바닥을 내려다보며 작게 웃음을 흘렸다. 오늘 나를 만난 순간부터 단 한 번도 거짓말을 하지 않았던 나재민은 방금 처음으로 거짓말을 했고. 평소와 달리 잔잔하게 울리던 효과음은 금방이라도 터질 것 같던 나재민의 새빨간 귀와 아주 잘 어울렸다.


다른 뜻이 없기는. 꼴에 자존심 세운다고 거짓말하는 거 봐라. 진심으로 내가 아깝다는 걸 인정하기가 그렇게 싫은가? 아니다. 나재민 성격이라면 나한테 듣기 좋은 소리 해 주는 게 싫어서 억지로 거짓말하는 걸 수도. 실실 올라가는 입꼬리를 진정시키며 나재민을 따라 상영관 안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나재민이 거짓말을 하고, 그런 거짓말을 알아내며 나재민의 속내가 무엇인지 알아내는 건 개강 파티 때와 똑같은데. 속에 숨겨져 있는 진심이 180도 달라서인지 이번만큼은 나재민의 진심을 파헤치는 일이 기분 나쁘지 않았다.




"야, 귀염둥이. 영화 잘 봐라."

"방금 강창현한테 한 소리 듣더니 미치기라도 한 거야? 뭔… 뭔 둥이?"

"좋게 불러 줘도 지랄이네."

"너 같으면 지랄 안 하게 생겼어?"




진심으로 소름 돋는다는 듯 작게 몸을 움츠린 나재민이 잔뜩 인상을 찌푸렸다. 나재민 속마음도 알았겠다, 싫은 것과는 별개로 관계가 좀 가까워진 것 같아서 짓궂은 장난 한 번 쳐 본 건데. 진짜 노골적으로 싫어하니 할 말이 없었다. 그래, 네가 싫다면 안 하지 뭐. 아직도 충격에서 헤어 나오지 못한 나재민을 뒤로한 채 스크린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물론 옆에서 들리는 나재민의 혼잣말 소리가 거슬리긴 했지만. 아무리 봐도 제정신 아니라며 제 팔뚝을 쓸어내리는 모습이 짜증 나긴 했지만. 이젠 그런 나재민의 행동에도 예전처럼 화가 나거나 그러진 않았다.


틈만 나면 거짓말을 하고, 제 이미지를 지키기 위해 억지스러운 위로를 건네는 가식적인 놈이긴 하지만. 적어도 자기 선에서 아니라고 생각되는 것들은 가차 없이 잘라내니까. 적어도 내가 본 나재민은 그랬다. 그냥 거짓말을 많이 하고, 성격이 매우 나쁠 뿐인 평범한 사람. 솔직히 요즘 같은 시대에 나재민 같은 사람이 한 명도 없겠어? 영화관 의자에 편히 기대며 온몸에 긴장을 풀었다. 나재민에 대한 정의를 내리자마자 마음속 한구석이 가벼워진 것 같았다.




"배고파. 끝나고 삼겹살 먹자."

"안 그래도 영화 재미없어서 짜증 나는데 열 뻗치는 소리 좀 하지 말자."

"밖에 비 온대. 너 우산 있냐?"

"우산은 없고 차는 있는데."

"그럼 그거 타고 삼겹살집 가면 되겠다."

"너 내 말 안 듣지?"




입술을 앙 다문 채 애써 나긋나긋한 말투를 유지하던 나재민은 눈 하나 깜빡하지 않는 내 태도에 반쯤 포기한 듯했다. 그래, 너 하고 싶은 거 다 해라. 다 포기한 얼굴로 등받이에 몸을 기댄 나재민이 팔짱을 낀 채 두 눈을 감았다. 평소 같았으면 짜증 나는 소리 하지 말라며 진작부터 내 말을 씹었을 텐데. 아까 강창현과 있었던 일 때문인지 나재민은 눈에 띄게 유순해진 태도로 나를 대하고 있었다. 어라. 이렇게 고분고분한 나재민이라니. 이 정도면 강창현의 개지랄… 한두 번쯤은 더 받아줄 수 있을지도? 시답지 않은 생각을 하며 킥킥 웃었다. 쓸데없는 걸로 웃고 있으니 시간이 더 빨리 가는 것 같기도 했다.


영화가 다 끝난 뒤. 칼같이 자리에서 일어난 나와 나재민은 곧바로 상영관을 빠져나왔다. 영화가 더럽게 재미없었던 건 둘째 치고, 지금 나와 나재민에겐 속도가 생명이었기 때문이다.




"영화 내용이랑 인증 사진은?"

"스토리 얼추 기억하고 있고, 사진은 표 뽑자마자 몇 장 찍어 놨어."

"옷 사진 같은 건 밥집 가서 대충 찍으면 되고. 너 근처에 아는 삼겹살집 있어?"

"사거리 건너편에 삼청 고깃집이라고 삼겹살 맛집 있어."

"미리 정해 놔서 다행이네. 너랑 차 안에서 오붓하게 삼겹살집 찾고 있을 생각에 소름 돋던 참인데."

"미안한데 그건 나도 싫거든?"




잔뜩 틱틱대며 나재민의 차 안으로 몸을 끼워 넣었다. 운전석에 앉자마자 익숙한 손놀림으로 네비게이션을 켠 나재민은 쏟아지는 비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차를 움직였다.




"1시간. 그 이상은 같이 못 있어줘."

"그 이상으로 같이 있을 생각도 없거든요?"

"얼굴 마주 보고 밥 먹는 것도 좀 그런데. 테이블 따로 해서 앉아도 되지?"

"당연한 거 아니냐? 애초에 난 너랑 겸상할 생각도 없었어."

"한결같이 싸가지 없어서 좋네."

"그렇다고 누나 너무 좋아하진 말고."

"진짜 확 길바닥에 버리고 갈까…."




어이 털린 얼굴로 내 쪽을 바라보던 나재민이 이내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하는 행동을 보아하니 진짜 버리고 가려다가 '안 그래도 불쌍한데 그러면 되나….' 싶은 마음에 그만둔 게 분명했다. 하여간 좋아할래야 좋아할 수가 없는 새끼. 기회만 된다면 나재민의 뒤통수를 한 대 갈기고 싶었다.


비교적 가까운 거리에 있어 예상보다 빨리 도착한 고깃집. 나재민과 나는 고깃집에 들어가자마자 각각 따로 테이블을 잡은 뒤 밥을 먹었다. 물론 과제에 넣을 사진을 찍을 땐 세상 다정한 척을 하며 온갖 염병을 다 떨었지만. 사진을 다 찍고 나서는 기다렸다는 듯 제자리로 흩어져 말없이 밥만 먹었다. 누가 보면 '쟤네 어디 아픈가?' 싶겠지만… 당사자인 나는 세상 이렇게 편할 수가 없었다. 오글거리게 겸상하면서 밥 안 먹어도 되고, 기분 나쁘던 거 맛있는 거 먹으면서 풀고! 표정만 보면 나재민도 나와 다를 바 없이 편한 듯했다. 아직까진 이 정도가 우리 사이의 적당한 거리니까.


나재민과 함께한 듯 따로 한 기묘한 저녁 식사가 끝난 후. 먼저 나가서 차에 시동 좀 걸고 있겠다는 나재민의 말에 대충 손을 흔들며 거울로 머리를 정리하고 있었을까.




"아가씨~ 방금 나간 청년이 아가씨 테이블 것까지 전부 계산하고 나갔어."

"… 네? 방금 나간 애가요?"

"응. 같은 일행이라고 한 번에 해 달라던데? 여기 이거 계산서는 내가 가져갈게~ 아가씨는 그냥 그대로 나가면 돼~!"

"아니, 이게 무슨…."




잠깐 얼 타고 있는 사이 눈앞에 있던 계산서가 사라졌다. 그 천하의 나재민이 같은 일행이라는 말까지 덧붙이면서 내 밥값을 대신 계산했다고…? 이게 말이 돼? 멍한 얼굴로 입을 벌린 채 가게 밖까지 발걸음을 옮겼다. 문밖엔 차에 시동을 걸어 놓은 채 손에 우산을 들고 서 있는 나재민이 있었다.




"진짜 행동 하나는 기가 막히게 굼뜨다. 대체 뭘 하길래 지금 나오냐, 넌."

"… 야. 너 왜 내 밥값 대신 계산했어?"

"이런 걸로 쓸데없이 더치페이 하기 싫어서."

"애초에 테이블 따로 써서 계산서도 따로 나갔을 텐데 무슨 더치페이 타령이야. 영화표도 너가 결제해서 밥은 내가 사려고 했는데."

"됐네요. 어차피 밥이든 영화든 내가 다 사려고 했어. 너한테 뭐 얻어먹으면 신세 지는 것 같아서 별로야."

"야, 그런 말 하면 내가 뭐가 되냐? 나 지금 너한테 신세 진 사람 됐잖아 미친."

"그럼 신세 진 김에 하나만 더 져라."




제 손에 있던 우산을 내 쪽으로 건넨 나재민이 특유의 얄미운 얼굴로 웃어 보였다.




"나 지금 선희 누나 데리러 가야 해서 너 집 못 데려다주거든."

"……."

"그러니까 이거라도 쓰고 집 가라."

"……."

"방금 편의점에서 사 온 거니까 쓰레기 준 거 아니냐는 생각은 안 해도 되고."




멍청한 얼굴로 나재민이 주는 우산을 받아들었다. 예상치 못한 상황에 머릿속이 정지돼서인지 어떤 말을 내뱉어야 할지 감이 잡히지 않았다.




"… 야, 너…."

"……."

"너 어디 아프냐…?"




힘겹게 튀어나온 짧은 말. 내 말이 끝나자마자 헛웃음을 내뱉은 나재민이 시동이 켜져 있는 차 쪽으로 몸을 움직였다.




"잘 대해 줘도 지랄."




말을 끝마친 나재민이 망설임 없이 차에 올라탔다. 뒤 한 번 돌아보지 않은 채 주차장을 빠져나간 나재민은 이번 데이트에 어떠한 미련도 없는 사람 같았다. 습한 날씨, 귓가를 울리는 거센 빗소리. 허망한 얼굴로 나재민의 차 뒤꽁무니를 바라보며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나재민 미친놈아… 고맙긴 한데 이 우산으론 택도 없어…."




우수수 내리는 빗방울들을 보며 이마를 짚었다. 나재민의 50% 부족한 배려에 머리만 더 아파진 하루였다.





Charming Liar





엣취.


잔뜩 열이 오른 얼굴로 훌쩍거리며 집을 나섰다. 나재민과 데이트를 했던 날. 나재민이 준 우산으로 어떻게든 비를 피하며 집까지 오긴 했지만, 돌풍을 동반한 소나기 때문인지 나재민이 준 우산으로는 비를 피하는 데에 한계가 있었다. 결국 우산은 우산대로 들고 오고, 비는 비대로 맞아서 두 배로 힘들었지만… 그래도 어느 정도 비를 피한 건 맞으니 감기는 면할 줄 알았는데. 아침부터 느껴지는 심상치 않은 기운에 눈을 뜨자마자 좆됐다 하는 생각이 제일 먼저 들었다. 솔직히 감기 걸려도 열만 조금 나고 말 줄 알았는데. 이렇게 몸살까지 와 버리다니. 이 정도면 하늘에서 나 아프라고 고사를 지내는 게 분명하다.




"… 강창현."




근처 약국으로 향하는 길. 잠잠한 핸드폰 화면을 두들기며 괜히 강창현의 이름을 되뇌었다. 강창현은 어제 나재민과 있었던 일 이후로 내게 그 어떠한 연락도 하지 않은 상태였다. 하긴, 따지고 보면 아무렇지도 않게 연락 보내는 게 더 웃기긴 하지. 객관적인 사실만 놓고 보면 자기 여자 친구가 외간 남자랑 데이트하는 거 말리러 갔다가 욕만 한 바가지 먹은 건데. 착잡한 얼굴로 앞머리를 쓸어 넘기며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모든 분노가 사그라들고 이성적인 사고가 찾아왔을 때. 이러면 안 된다는 걸 알면서도 자꾸만 강창현에게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아무리 화가 나도 그런 행동은 하지 말았어야 했는데. 좋게 풀 수도 있었던 상황을 내가 더 악화 시킨 건 아닐까? 강창현과의 관계에서 오랜 기간 동안 자진해서 을의 입장을 고수했던 탓인지 말도 안 되는 방향으로만 생각이 흘러갔다. 이 정도면 내가 나 자신한테 가스라이팅을 하고 있는 거나 마찬가진데.


지금 어디야?

오후 2: 43 나랑 얘기 좀 해


결국 참지 못하고 강창현에게 먼저 연락을 보냈다. 이렇게 구질구질한 짓은 하고 싶지 않았는데. 지금처럼 한껏 나약해져 있는 상태에선 그 어떠한 다툼도 하고 싶지 않아서. 신경 쓸 거리를 하나라도 더 줄이고 싶어서. … 열이 잔뜩 오른 머리를 조금이라도 식히고 싶어서. 언제나처럼 강창현에게 먼저 손을 내미는 것으로 지금 이 냉전이 끝났으면 했다. 너덜너덜한 관계였어도 지금까지 이렇게 잘 이어왔잖아. 제발 좋게 끝내자, 창현아. 아직은 내가 너랑 헤어질 수가 없어. 내 마음이 아직 안 끝나서, 내가 아직 이 관계에 대한 미련을 못 놓아서.


그러니까, 그 모든 게 끝날 때까지만… 딱 그때까지만…….




"… 여주?"

"… 아."




익숙한 목소리에 절로 고개가 돌아갔다. 언제나처럼 멀끔한 차림새를 한 이제노. 반가운 얼굴로 아는 척을 하려던 이제노는 심상치 않은 내 상태를 보자마자 확 표정을 굳혔다.




"여주야. 너 어디 아파?"

"아, 어제 비를 맞아서… 몸살이 좀 왔나 봐. 심각한 건 아니야, 괜찮아."

"괜찮긴 뭐가 괜찮아? 멀리서 봐도 상태 안 좋은 게 티가 나는데."




다급하게 내 이마에 손을 얹은 이제노가 초조한 얼굴로 아랫입술을 짓씹었다. 이제노가 이렇게 반응할 정도면 내 상태가 진짜 안 좋긴 한가 보다. 그래도 걸어 다닐 순 있어서 괜찮은 줄 알았는데. 아니, 어쩌면 강창현한테 먼저 얘기 나누자고 연락 보낸 시점부터 몸이랑 정신 건강 둘 다 박살 난 걸 수도….




"그렇게 걱정할 일 아니니까 인상 펴라, 야. 평일에 아팠으면 출결 인정받으려고 병원까지 가야 했을 텐데. 오늘은 주말이라 안 그래도 되니까 오히려 좋음."

"… 지금 그걸 말이라고 하는 거야? 이렇게 아픈데 무슨 약국 약으로 버티겠다고…."

"진심 여기서 병원까지 걸어가면 더 아플 거 같아서 하는 소리야. 뭐, 평소처럼 약국 약 먹고 좀 자다 일어나면 괜찮아지겠지."

"……."

"내가 맨날 이렇게 해 봐서 알아."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이제노의 얼굴에 그늘이 졌다. 내 딴엔 이제노의 걱정을 덜어 주려고 한 말이었는데. 이제노 입장에서는 그게 아닌 모양이었다.




"맨날 그렇게 했다니. 그럼 강창현은 너 아플 때마다 뭐 했는데?"

"… 어?"

"여주 너 고등학교 때도 감기 자주 걸렸었잖아. 내 기억으론 계절 바뀔 때마다 못해도 한 번씩은 아팠던 것 같은데."

"……."

"설마 그때도 매번 이런 식으로 대충 넘어갔어?"

"……."

"강창현은 아무것도 안 하고?"




이제노의 날카로운 질문에 그 어떠한 대답도 내놓을 수 없었다. 내가 아플 때마다 강창현이 아무것도 안 한 건 맞았으니까. 물론 연애 초반 때야 지극 정성으로 걱정도 해 주고 죽도 만들어 줬지만… 시간이 좀 지나고 나서는 우리 엄마의 직접적인 부탁이 없는 이상 자의적으로 그런 행동들을 해 주진 않았다. 그냥 많이 아프면 병원 가라고 하거나, 죽 기프티콘이나 덜렁 보내 주고 말았지.




"… 자주 아프면 원래 다 그러잖아. 강창현도 안 챙겨 주고 싶어서 그랬던 건 아닐 거야."

"여주야. 지금 사귀고 있는 사람이라고 해서 그렇게 변호해 줄 필요 없어."

"……."

"여자 친구 아픈 것도 신경 안 쓰는 남자 친구가 어딨어?"

"……."

"내가 만약 여주 너 남자 친구였으면 절대 그렇게 안 했을 거야. 아무리 바빠도 병원 정도는 내 손으로 데려다줬을 거라고."




답지 않게 격앙된 말투. 속에 담아 두었던 걸 쏟아내듯 쉴 새 없이 말을 잇던 이제노가 착잡한 얼굴로 내 어깨를 쥐어잡았다.




"나 같으면 이런 꼴로 약국 전전하게 만드는 놈이랑 안 사귀어."

"……."

"난 여주 너가 다 끝난 관계에 목매달지 않았으면 좋겠어."

"……."

"… 그거 사랑 아니야, 여주야."

"……."

"그냥 오기고 미련이지."




… 아. 작게 벌어진 입술 사이로 탄식이 흘러나왔다. 이제노의 마지막 말에 머릿속이 새하얗게 변하는 것 같았다. 아닌데. 나는 아직 강창현을 사랑해서 못 헤어지는 건데. 내가 지금 하고 있는 건, 분명… 조금 미련한 사랑일 뿐일 텐데. 왜 이제노의 말에 이런 감정이 드는 거지? 여태까지 필사적으로 무시해왔던 진실이 눈앞에서 아른거릴 때마다 온몸을 지탱하던 것들이 나가떨어지는 기분이었다.


내가 지금 하고 있는 건 사랑도 뭣도 아닌 그저 오기에 불과했나? 다 끝난 관계를 여기까지 끌고 온 것도, 뻔히 아는 진실보다 달콤한 거짓말을 믿었던 것도. 강창현과 오랜 시간 사귀었던 지난 과거를 의심하기 싫어서, 내 선택이 최고의 선택이었다고 믿고 싶어서……. 이제노의 말이 머릿속을 헤집을 때마다 온갖 자기혐오가 밀려왔다. 사랑이 아닌 걸 사랑이라고 굳게 믿으며 오기를 미련으로 포장했던 날들, 내 선택이 틀리지 않았다는 걸 증명하기 위해 이 악물고 주변 지인들에게 강창현을 옹호했던 순간들, 같잖은 오기 때문에 오랜 시간 동안 천천히 망가져가고 있던 과거의 추억들. 처음부터 잘못된 모든 기억들이 파도처럼 나를 덮쳤다.




"… 그만. 그만해."

"… 여주야."

"네 얘기 그만 듣고 싶어, 제노야."

"……."

"… 난 약국 들렀다가 집으로 가 볼게. 제노 너도 약속 있어 보이는데 얼른 가 봐."

"… 그래도 병원은…."

"괜찮으니까 그냥 가라고."




안절부절못하는 이제노를 뒤로한 채 약국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 내가 여기서 뭘 사려고 했더라? 내가 지금 산 게 나한테 필요한 약은 맞겠지? 제정신이 아닌 상태로 계산을 끝마치고 나왔다. 약국을 나와 집으로 가는 길. 시야에 보이는 모든 게 꿈처럼 희미해 보이기도 하고, 환상처럼 일그러졌다가 사라지기도 했다. 아파서 미쳐 버린 건가. 아니면 원래부터 정신이 나가 있었던 건가. 집으로 돌아와 신발을 벗자마자 자리에 쓰러지듯 주저앉았다. 강창현은 아직까지도 내가 보낸 연락에 답장이 없었다.


지금 어디야?

오후 2: 43 나랑 얘기 좀 해

창현아

나 아파

비 맞아서 몸살 걸렸나 봐

너무 아파

오후 3:13 지금 여기로 와 주면 안 돼?


제발 연락 좀 받으라고. 여태까지 외면해 왔던 진실을 알게 되더라도, 지금 같은 순간엔 알고 싶지 않으니까. 조금 더 늦게 알아도 괜찮을 것 같으니까. 죽을 만큼 힘든 이 시기만 넘겨달라고. 간절한 마음을 담아 강창현에게 최후의 발악까지 해 봤지만, 강창현은 그런 내 진심을 짓밟기라도 하듯 그 어떠한 답장도 하지 않았다. 게다가 내 연락을 뒤로한 채 보란 듯이 올린 인스타 스토리까지. 기가 찬 강창현의 행동에 더 이상 눈물도 나오지 않았다.


어제 일에 대한 복수라도 하는 듯, 선희 선배와 사이좋게 찍은 영화관 데이트 사진. 정성스럽게 태그까지 한 모습에 미친 사람처럼 실소가 흘러나왔다.




"그래……."




이게 너였지. 이렇게밖에 행동할 줄 모르는 게 너였지.


힘 없이 핸드폰을 내려놓으며 말없이 허공만 바라봤다. 이대로 있으면 안 될 것 같은데. 누구라도 내 옆에 있어 줘야 될 것 같은데. 그런 생각을 하자마자 우습게도 나재민의 얼굴이 가장 먼저 떠올랐다. 이제노는 너무 가까운 거리에 있는 사람이기도 하고, 나를 지나치게 걱정하는 바람에 되려 나를 아프게 하니까. 지금 같은 때엔 적당한 거리감을 유지하고 있는, 다정하지 못하고 이성적인 나재민이 더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나재민이라면 어쭙잖은 위로를 해주지도 않을 거고, 무너져있는 나를 현실적인 말로 일으켜 세울 수도 있을 것 같아서.


거기까지 생각이 마치자 자동적으로 손이 먼저 움직였다. 나재민을 여기까지 불러낼 핑계는 쉽게 만들 수 있었다. 강창현과 선희 선배에 대해 할 말이 있다고 하면 무조건 나올 테니까. 선희 선배 때문에 거짓말을 시작할 정도로 선희 선배에 대한 애정이 깊은 애가 이 말에 나오지 않을 리가 없지. 실제로도 나재민은 내 짧은 연락 한 통에 빛의 속도로 우리 집까지 찾아왔다. 계단을 올라오는 소리가 얼마나 요란스러운지, 저녁 시간대였으면 이웃들이 다 잠에서 깨고도 남았을 거다.




"어서 와. 예상보다 더 빨리 왔네."

"… 야, 너…."

"알아. 연락 보낸 거 때문에 온 거지? 질질 안 끌고 본론부터 말할 테니까, 일단 여기 앉아 있어 봐."

"뭐?"

"그렇게 재촉 안 해도 다 말해줄 테니까 가만히 앉아 있어 보라고."




숨을 몰아쉬는 나재민을 집 안으로 들이며 태연스러운 낯을 해 보였다. 선희 선배까지 들이밀면서 불러낸 이유가 '단순히 내가 힘들어서'라는 사실을 들키면 너무 쪽팔릴 것 같아서. 적어도 나재민에겐 약한 모습을 보이고 싶지 않아 필사적으로 포커페이스를 유지하고 있었을까. 어이없다는 표정을 지은 나재민이 신경질적으로 내 손목을 낚아챘다.




"아까부터 뭔 개소리를 하는 거야."

"… 어?"

"넌 네 몸 상태가 어떤지도 모르냐? 존나 툭 치면 기절할 것 같은데 뭔 상황 설명을 한다 만다야."

"… 아니, 너 선희 선배 얘기 들으러 온 거 아니야?"

"그 말 때문에 여기 온 건 맞는데, 너 상태 보니까 일단 그건 뒤로 밀어 둬야 할 거 같다."




작게 혀를 찬 나재민이 침대가 있는 방으로 나를 이끌었다. 바닥에 널부러져 있던 약은 또 언제 발견한 건지, 비어있는 나머지 한 쪽 손으론 내가 약국에서 산 약을 덜렁 들고 있는 채였다.




"언제부터 이렇게 아팠어."

"… 내가 어떻게 아냐? 그냥 어제 비 좀 맞아서 그런 거 같은데…."

"비 때문에 아픈 거면 오늘 아침부터 아팠겠네. 밥도 안 먹었을 테고."

"너 무슨 출장 의사냐? 선희 선배 얘기해 준다니까 뭔 갑자기…."

"입 다물고 가만히 있어. 몸살 걸렸을 땐 가만히 누워서 쉬는 게 최고야."

"……."

"안 그래도 어제 내가 차로 안 데려다줘서 아픈 건가 하는 개 같은 생각이 들어서 기분이 찝찝한 참이거든."




아. 나재민의 말에 작게 입을 벌렸다. 그러고 보니 얘 입장에선 자기 때문에 몸살 걸린 거라고 생각할 수도 있겠구나. 어쩐지 아까 얼굴 보자마자 기가 팍 죽는 거 같더라니. 조용히 나재민의 손길을 받으며 입을 다물었다. 나를 침대에 눕혀 준 나재민은 익숙한 손길로 물수건을 준비해 내 머리 위에 올려 주기도 했고, 약국에서 사 온 약들을 살펴보며 지금 먹어도 되는 것과 안 되는 것들을 구별해 주기도 했다.




"이건 밥 먹고 먹어야 되는 거라 지금 먹으면 안 돼. 일단 파란색이랑 하얀색 곽에 들어 있는 거 먼저 먹고, 있다가 저녁 먹고 난 뒤에 나머지 약 먹어."

"… 집에 밥 없는데."

"집안 꼬라지 보니까 그럴 거 같더라. 아까 물수건 가지러 가는 길에 죽 배달 시켰으니까 입맛 생기면 먹든가."

"우리 집 주소는 어떻게 알았어?"

"너 진짜 또라이냐? 너가 우리 집으로 오라고 하면서 너네 집 주소 찍어 줬잖아. 지금 아파서 머리가 제대로 안 돌아가는 모양인데, 나중에 시간 나면 네가 나한테 보낸 카톡 다시 봐라. 난 진짜 주소 찍어 줘서 온 죄밖에 없으니까."

"… 참나. 누가 너한테 죄지었대? 존나 웃겨."

"난 아픈 와중에도 꾸준히 까부는 네가 더 웃겨."




한마디도 지지 않고 응수한 나재민이 진심으로 어이없다는 낯을 했다. 그래… 보통 아프면 이렇게까지 말대꾸하지 않지…? 머쓱한 표정으로 이마 위에 있는 물수건을 만지작거렸다. 차가운 물수건 덕분인지 팽팽 돌던 머리가 조금은 진정된 것 같았다.




"… 괜한 걸로 너 부른 건 아니고."

"……."

"강창현이랑 선희 선배 오늘 데이트하러 간 거 아나 싶어서."

"이건 또 무슨 미친 소리야? 강창현이 지금 선희 누나랑 데이트를 하고 있다고?"

"어. 방금 인스타 스토리 올라왔어."

"와…."

"어제 있었던 일로 복수라도 하나 봐. 우리가 갔던 영화관에서 똑같이 영화 보고 선희 선배 아이디 태그까지 해서 올렸던데."




내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인스타를 켠 나재민이 곧바로 선희 선배의 스토리에 들어갔다. 선희 선배는 강창현이 태그한 스토리를 그대로 공유해 자신의 스토리에도 올려놓은 상태였다. 진심으로 할 말을 잃은 듯 한참 동안 화면만 바라보던 나재민은 이내 내 쪽을 바라보며 설마 하는 얼굴로 입을 열었다.




"야. 강창현은 지금 너 이러고 있는 거 알아?"

"… 응."

"……."

"내가 아프다고 지금 와 달라고 연락 보냈는데… 그거 씹고 올린 게 방금 네가 본 스토리야."

"야, 강창현 이 새끼…."

"……."

"이 새끼 진심 미친 거 아니냐…? 사람 맞아 얘?"




어이없음을 넘어 화가 난 듯한 나재민이 곧바로 자리에서 일어났다. 표정만 보면 눈앞에 있는 모든 사람들을 찢어 죽이고도 남을 기세였다.




"선희 누나가 이런 새끼랑 데이트하고 있는 꼴 못 봐주겠다. 누나 데리러 가야겠어."

"지금 가도 강창현은 선희 선배 안 놔줄 텐데."

"지가 뭔데 놔준다 만다야 뒤질라고. 그리고 너도 걔가 연락 안 받으면 전화라도 해 보지 왜 그러고 있어? 나 같으면 스토리 보고 궁상떨 시간에 전화 100통 걸어서 개지랄이라도 하겠다."

"지금 내 꼬라지를 봐라. 그럴 상태가 되는지."

"그건 그렇네. 그럼 그 지랄 내가 대신해 줄 테니까 너 여기서 약 먹고 쉬고 있어라."

"가서 도대체 무슨 소리를 하려고 그래?"

"무슨 소리를 하든 지금 여기서 너랑 명의 허준 찍고 있는 것보단 나을 거 같은데."




서둘러 옷을 갈아입은 나재민이 집 밖으로 나섰다. 나가는 와중에도 같이 있을 사람 불러서 옆에 있게 하라는 말은 빼먹지 않은 채로. 대충 손을 흔들어준 뒤 잠잠한 핸드폰을 들여다봤다. 개 같은 나재민. 누군 안 그러고 싶어서 이러고 있는 줄 아나? 부르려고 해도 마땅히 부를 사람이 없는 걸 어떡하라고. 작게 투덜대며 저장되어 있는 연락처를 쭉 훑어봤다. 솔직히 여기서 부를 수 있을 만한 사람은….




"… 이제노밖에 없는데."




집 가깝고, 고등학교 때부터 나 꾸준히 걱정해 준 데다, 성격도 착한 아이. 심지어 이제노는 하나밖에 안 남은 내 유일한 남사친이기도 했다. 아까 이제노가 너무 정곡을 찔러서 예민하게 반응하긴 했지만… 지금 간병해 달라고 부탁할 수 있는 사람은 이제노뿐인데. 이럴 줄 알았으면 아무리 기분 나쁘고 예민했어도 싸가지 없게 대답하지 말걸. 이제노 이름 석 자를 뚫어져라 쳐다보며 말없이 손만 꼼지락거렸다. 어쩐지 나재민이 나가고 나서부터 다시 열이 오르는 느낌이었다.


그렇게 몇 분이 흘렀을까. 누군가 우리 집 문을 조심스럽게 두들기는 소리가 났다. 처음엔 나재민이 배달 시켰던 죽이 이제야 온 줄 알았는데. 축축 늘어지는 몸을 이끌고 힘겹게 연 문밖엔 헬멧을 쓴 배달원 대신 살짝 흐트러진 모습의 이제노가 서 있었다.




"… 멋대로 찾아와서 미안해, 여주야."

"……."

"나는 그냥, 여주 너가 너무 아파 보여서…."

"……."

"그대로 보내면 안 될 것 같아서…."




누가 봐도 급하게 뛰어온 듯한 모습. 아래로 시선을 내리깔며 이제노의 손에 들린 걸 확인했다. 온갖 약이란 약은 다 들어 있는 하얀색 봉투, 보온팩 없이 덜렁 들고 오느라 살짝 식어 보이는 죽. 순간 말도 안 되는 가설 하나가 머릿속을 지배했다. … 아니지? 이제노 너 그냥 내가 걱정돼서 그러는 거지? 지나치게 가까운 거리에 본능적으로 뒷걸음질 치게 됐다.


이제노가 약과 죽을 사들고 우리 집 앞까지 찾아온 순간. 운명의 장난처럼 나재민이 배달 시켰던 죽도 똑같은 타이밍에 도착했다. 김이 펄펄 끓고 있는 나재민의 죽은 누가 봐도 이제노의 식은 죽과 비교되어 보였다.




"… 일단 들어와, 제노야."

"아… 응."




의도적으로 나재민의 죽을 손에 든 채 이제노를 집 안으로 들였다. 옛날 같았으면 나재민이 뭘 보냈든 이제노가 가져온 것 먼저 챙겼을 텐데. 왠지 지금은 그러면 안 될 것 같았다. 이제노가 가져온 걸 먼저 챙기는 순간, 이제노에게 알 수 없는 희망을 심어 주는 게 될 것 같아서. 나는 이제노의 서운한 눈빛을 애써 모른 체하며 나재민이 보낸 죽 포장을 까기 시작했다.




"미안. 아까 친구가 먼저 보내준 게 있어서."

"… 아, 괜찮아. 내 건 나중에 먹으면 되지."

"응. 그거 냉장고에 넣어 놓으면 내가 내일 꺼내서 데워 먹을게. 약도 그냥 테이블에 올려놔 주고."

"알겠어."




언제 그랬냐는 듯 서운한 티를 감춘 이제노가 웃는 얼굴로 몸을 움직였다. 내 말대로 고분고분 움직이는 이제노를 볼 때마다 방금 전 세운 가설에 힘이 실리는 느낌이었다. … 이거 자의식 과잉인가. 차라리 그랬으면 좋겠는데. 착잡한 속내를 숨기며 나재민이 보낸 죽을 억지로 몇 입 퍼먹었다. 친구가 먼저 보내 준 죽을 먹겠다는 핑계로 이제노가 사 온 죽을 냉장고로 밀어 넣었는데. 여기서 입맛 없다고 나재민이 보낸 죽까지 안 먹으면 대놓고 이제노의 성의를 무시한 게 된다. 아무리 선을 긋는다 해도 사람 정성까지 짓밟을 순 없지.




"천천히 먹어, 여주야. 뜨거운데 입천장 다 데이겠다."

"괜찮아. 이제 다 먹었어."

"너무 적게 먹은 거 아니야? 약 먹을 거 생각하면 더 먹어 두는 게 좋을 텐데…."

"아냐. 더 먹으면 소화 안 될 것 같아서 그래."




억지웃음을 지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말없이 침대가 있는 쪽으로 발걸음을 옮기니, 이제노는 그럴 줄 알았다는 듯 미지근한 물 한 컵을 손에 든 채 나를 따라왔다.




"약 먹고 바로 잘 거지?"

"… 응. 어떻게 알았어?"

"여주 너 고등학교 때도 맨날 그랬잖아. 보건실에서 약 받고 오면 그거 먹고 바로 잤던 거 같은데. 아니야?"




다정하게 되물은 이제노가 환하게 웃어 보였다. 내 사소한 습관마저 모조리 꿰뚫고 있는 이제노의 모습에 마음속 한구석이 불편해졌다. 자의식 과잉이어야 하는데. 내 예상이 틀려야만 하는데. 왜 자꾸 너는……. 이제노의 말에 어떠한 대꾸도 하지 않은 채 옆에 있던 약을 한꺼번에 입안으로 털어 넣었다. 상황이 이래서인지 안 그래도 뜨겁던 머리에 열이 더 오르는 기분이었다.




"… 항상 느끼는 거지만 제노 너는 기억력이 참 좋네."

"……."

"다른 애들 것도 다 그렇게 기억하는 거지?"

"……."

"나도 네 기억력 좀 닮고 싶다."




실없는 소리를 내뱉으며 천천히 침대에 몸을 뉘었다. 이제노는 내가 두 눈을 감고 잠을 청할 때까지 그 어떠한 대답도 내뱉지 않았다. 정적만이 내게 줄 수 있는 최대한의 배려라는 듯.





Charming Liar





늦은 새벽.


몽롱한 상태로 눈을 떴다. 약을 한꺼번에 먹어서 그런가 좀처럼 제정신을 유지하기가 힘들었다. … 지금 몇 시지. 강창현한테 연락은 왔나. 빙빙 도는 머리를 부여잡은 채 몸을 뒤척였다. 얼른 일어나서 뭐라도 하고 싶은데. 그런 내 의지와는 달리 몸은 물먹은 솜처럼 축축 늘어지기 바빴다.




"… 아, 여주야."

"……."

"일어났어?"




그때. 부스스한 몰골로 일어난 이제노가 조심스럽게 말을 건넸다. 불편한 자세로 침대 끄트머리에 엎드려 있는 모습. … 아. 멍한 얼굴로 이제노를 바라보며 작게 탄식을 내뱉었다. 설마 여태까지 집도 안 가고 내 상태 지켜보고 있었던 거야…? 성큼 다가온 불길함에 쉽사리 입을 열 수 없었다. 방금 전까지 필사적으로 부정하고 있던 사실이 머릿속을 엉망진창으로 헤집어 놓는 기분이었다.




"조금 더 자. 아직 열 안 떨어졌어."

"… 제노야."

"응?"

"왜 그래?"

"……."

"지금 왜 이러냐고."




충동적으로 튀어나온 질문. 맨정신이었으면 이제노의 입에서 나올 말이 두려워 물어보지도 못했을 텐데. 지금은 약 기운 때문인지 속에 담아 두었던 질문이 잘만 튀어나왔다.




"… 왜 그러냐니. 나는 그냥 여주 네가 걱정돼서…."

"과해."

"……."

"친구한테 하는 행동치고 너무 과하다고."

"……."

"너도 알잖아, 제노야."

"……."

"… 평범한 친구끼리는 안 이래."




두 눈을 느리게 감았다 뜨며 움찔거리는 손끝을 말아 쥐었다. 내뱉는 숨마다 차마 토해내지 못한 열기가 한가득 묻어있는 것 같았다.




"제노야."

"……."

"우리 친구 맞지."

"……."

"너… 나 친구로 생각하는 거 맞지."




기어코 쏟아져 버린 불안감. 말없이 내 쪽을 바라보고 있던 이제노가 눈에 띄게 움찔거렸다. 갈 곳을 잃은 눈동자, 습관처럼 씹어대는 입술.




"… 어."

"……."

"친구 맞아."




한참 동안 정적을 지키고 있던 이제노의 입에서 그토록 기다렸던 대답이 튀어나온 순간. 항상 따뜻하기만 하던 이제노 주위의 공기가 얼어붙는 것이 느껴졌다. … 아. 부정하고 싶은 현실에 작게 탄식을 내뱉었다.

 

…… 이제노의 온도가 100도에서 99도로 떨어져 있었다.











 

배타미님의 창작활동을 응원하고 싶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