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렇게 둘은 평화로운 듯하면서도 묘한 찜찜함을 남긴 상태로 지내고 있었고 그렇지만 서로의 집에 찾아가는 일은 없었음. 그렇게 몇 주가 지나고 어느 금요일 저녁, 오랜만에 같이 술 먹자는 지범과 재현의 연락을 받고 학교 근처 술집에서 넷이 만나.  둘에게 사귄다고 오픈한 지범과 재현은 더이상 숨기지 않고 사귀는 티를 팍팍 냈지.


"아 너네 진짜 적응 안 된다. 어떻게 친구가 애인으로 보여?"

"동현아, 니가 아직 어려서 뭘 모르나 본데"

"뭔 소리야. 너랑 나랑 생일도 한 달밖에 차이 안 나는데."

"세상에 첫눈에 반하는 사랑만 있냐? 같이 있다 보면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옆에 없으면 계속 생각나고, 연락 없으면 걱정되고 그러다 보면 그 사람만 특별해 보이고 그러는 거지."


그 말을 듣고 동현이 생각에 잠긴 듯했어. 주찬은 대화에 끼지 않고 술만 마시며 동현을 지켜봤어. 옆에 있던 지범이 물었음. 니 오늘따라 조용하네.


"어? 어, 너네는 술 많이 안 마시고 돈은 나눠서 내니까 내가 다 먹어야지."


동현을 관찰하고 있던 게 들켰나 싶어 둘러대며 안주를 집어 먹었어. 동현의 시선이 잠깐 주찬을 향했지만, 눈이 마주치자마자 피함.




이런저런 이야길 하다 보니 시간이 흘러 자리는 파하게 되고 지범은 재현이랑 먼저 간다고 했어.


두 사람이 떠난 방향을 보고 있던 주찬과 동현 사이에는 정적이 흘렀어. 야 김동현. 주찬이 동현을 부르며 동현과 눈을 맞췄다가 동현의 오른쪽 눈을 한번, 왼쪽 눈을 한번 보고 다시 눈을 맞췄어. 동현은 제 안에 숨긴 비밀을 찾고 있는 것 같다고 느낌. 동현의 떨리는 눈동자를 본 주찬은 기세를 누그러뜨리고 부드럽게, 그 이전이었다면 닭살 돋는다고 했을 것 같은 눈으로 바라봤지. 그 순간 동현은 잊고 있던 그날 밤의 파편이 떠오르고 순식간에 얼굴이 달아올랐어.


"동현아."

"..왜?"

"전에 너 우리 집 왔던 날"

"어, 어? 뭐, 언제? 너희 집을 한두 번 가냐?"

"너 마지막으로 왔을 때, 나 드라마 보고 있었잖아."

"몰라, 니 드라마 맨날 보잖아."

"아니, 너 그때 와서 지범이랑 재현이 얘기 물어봤던 날."

"ㅁ, 뭐? 야, 야, 나 화장실 급해. 먼저 간다!"


너는 거기 있으라는 듯이 주찬의 어깨를 툭툭 두드린 동현은 서둘러 집으로 갔어. 자리를 피하려는 의도가 빤히 보이는 이유를 둘러대며 도망치는 동현을 보며 주찬은 한숨을 내쉬었어. 다 기억하고 있으면서. 



-



요즈음 주찬은 자기 속이 예전 같지 않다고 느껴. 뭘 하든지 김동현 생각뿐. 동현의 일로 속이 답답해 스트레스를 풀려고 노래를 들어봐도 생각은 멈추지 않고, 심지어 어떤 노래를 들어도 다 김동현 얘기로 들리는 기이한 현상까지.. 이거 딱 누구 좋아할 때 나타나는 증상 아닌가?


동현과는 고등학교 1학년 때 같은 반으로 만나서 맨날 싸우면서도 붙여다녔고 다른 반이 됐을 때도 쉬는 시간마다 같이 있으니까 친구들이 부부냐고 놀리기도 했어. 그 얘기를 듣고 서로 질색팔색하고 악연이라며 싫어했지만, 대학까지 같이 왔을 땐 내심 기분이 좋았어. 3년을, 이제 4년째 하도 붙어다녀서 동현 없는 일상은 상상이 안 가. 생각해보면.. 고등학교 때 고백도 많이 받았는데 그때마다 거절했던 건 김동현이랑 놀 시간이 줄어드는 게 아까워서였어.



같이 있다 보면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옆에 없으면 계속 생각나고, 연락 없으면 걱정되고 그러다 보면 그 사람만 특별해 보이고 그러는 거지.



그때는 그냥 게임하고 축구하는게 좋아서 그랬던 거라고 생각했는데.... 내 마음은 아니었나 보네.  재현의 말은 주찬이에게도 틀린 말은 아니었어. 재현이 했던 얘기를 듣고 동현이 생각에 잠겼던 때가 생각나. 주찬이 보기에 동현이도 비슷한 것 같았어. 친구는 있어도 주찬이보다 더 자주 노는 친구는 없었고 주찬의 곁이든 동현의 곁이든 서로보다 더 잘 맞는 상대가 생기기까진 아마 오랜 시간이 필요하지 않을까. 동현이 누굴 사귄다면 저와 함께 있을 시간이 줄어들 테고 그 시간동안 주찬은 혼자서든 다른 누군가와 함께든 시간을 보내고 있어야 하겠지. 아니 그 전에, 동현이 먼저 누굴 사귄다? 왠지 배신감 들어. 김동현을 가장 잘 아는 사람은 주찬이야. 심지어 가족보다 더 자주 볼 때도 많은걸.


주찬은 금방 인정했어. 나 김동현 진짜 좋아하네. 인정하고 나니까 동현이 너무 보고 싶어졌어.



-



주찬의 마음은 방향을 정했지만, 동현은 오히려 그날 이후로 더 열심히 주찬이를 피하기 시작했음. 주찬이는 슬슬 열이 받음. 얘기를 꺼내기도 전에 꽁지 빠져라 도망치고 머리카락 하나라도 보일까 무서워 아주 단단히 숨어버렸어. 이게 내가 알던 김동현 맞나? 싶을 정도. 옆에 없는 걸 상상하니 상상이 안 가고 허전해서 좋아한다는 걸 인정했는데 그 직후에 옆자리를 텅 비워버린 상대 때문에 정말 온종일 김동현 생각밖에 안 나. 도통 수업에도 과제에도 집중을 할 수가 없어. 김동현이 숨어버린 것에 대해서도 화가 나는데 동현에게 이렇게까지 흔들리는 자신에게도 짜증이 났어.


오늘도 제 연락에 답 없는 동현과의 대화방을 습관처럼 눌러봐. 스크롤을 올려봐도 ㅇㄷ? 카페 앞. 점심? ㅇㅇ, 수업 끝남? ㅇ 학관 앞에서 봐. 이런 대화밖에 없어. 카톡이나 전화보다는 만나서 얘기했으니까 애초에 붙어 있는 시간이 길어서 굳이 떨어져 있을 때 연락할 일이 없었어. 처음 며칠은 카톡하고 전화 걸어봐도 답이 없길래 그래, 이 시간이면 게임을 하느라 바쁠 수 있지. 학교 가서 또 보면 되지. 김동현 시간표 다 꿰고 있으니까. 당장 내일도 점심때 공강 시간 겹치니까 밥 먹을 때 연락하면 되지. 일단 만나서 얘기라도 하자. 고백은 나중에 하더라도. 라면서 스스로 합리화를 해봤지만, 상황에 진전은 없고... 제 수업 뒷부분 빼먹고 동현의 수업 끝날 시간에 맞춰 강의실 앞에서 기다렸는데 주찬을 보자마자 야차라도 본 것마냥 놀라서 도망가는 걸 보고 동현이 반응 봐가면서 좋게좋게 풀어보려던 주찬은 진심으로 빡이 침.



-



오늘은 기필코 얘기하겠다는 다짐을 하고 동현이네 집으로 찾아가. 밖에서 할 만한 이야기도 아니고 붙들어놓고 얘기하려면 김동현네 집만 한 장소가 없지. 초인종을 누르고 동현일 불러봐도 아무 소리도 안 나, 문에 귀를 대보니 카트를 하는지 키보드 소리가 들림. 주찬은 문을 두드리며 외쳤어.


"야 김동현. 너 안에 있는 거 다 아니까 빨리 문 열어라"

"..."

"김동현!"

"..."

"너 진짜 문 안 열 거야? 이러면 나도 다 방법이 있어!"

"..."


주찬이는 이럴 걸 예상하고 준비해온 멘트를 쳤어.


"네~ 어머님, 저 주찬입니다. 잘 지내시죠? 저, 동현이 집 비밀번호 좀 알 수 있을까요? 동현이가 계속 연락이 안 돼서 아픈 건 아닌가 들어가 보려고요. 네. 별일 아닐 거에요. 제가 잘 돌봐...."


동현이는 진짜 엄마한테 전화하는 줄 알고 놀라서 문을 열었어. 주찬은 화면이 꺼진 핸드폰을 흔들어 보였지. 결국 동현은 주찬을 집안에 들이고 말았고 하고 있던 카트는 지고 방에서도 강퇴당해서 모니터에는 대기실만 보였음.


"야 홍주찬, 니가 이렇게 끈질긴 놈인 줄 몰랐다."

"내가 끈질긴 놈인 게 아니라 니가 사람 열 받게 하는 거지."


동현은 입만 뻥긋거리다가 신경질적인 탄식을 내뱉어.


"너 그만 좀 도망 다녀."

"내가 뭘."

"너 그날 일 다 기억나지? 그러니까 자꾸 나 피하는 거 아니야."


주찬은 또 시선을 피하는 동현을 붙들고 눈을 맞췄어.


"나 드라마 보고 있을 때 연락도 없이 오더니 평소 같았음 중간에 하고 싶은 말 다 하면서 그날은 드라마 다 볼 때까지 기다리고. 드라마 끝나고서야 김지범이랑 봉재현 얘기 물어봤잖아. 그러다 키스하고, 또,"

"그.. 그건..! 취해서 어쩌다 휩쓸려서 그래서 그런 거지!"

"난 아니야."

"뭐?"

"그날, 어쩌다 그런 거 아니라고."


주찬은 동현의 어깨를 쥐며 말했고


"나 너 좋아해. "


동현은 주찬의 말이 이해가 안 가는 듯 눈을 깜빡였어.


"야.. 너.. 너 지금 무슨 헛소릴 하는 거야?"

"너, 좋아한다고."

"너랑 나랑 친구로 지낸 세월이 몇 년인데. 한 번 그런 일 있었다고 좋아한다는 게 말이 되냐?"

"니 말도 맞는데, 그날은 계기였을 뿐이야. "

"징그럽다고! 난 아무것도 못 들었어."


동현은 주찬의 말에 귀를 막고 휙 뒤돌아버렸음. 주찬은 동현이가 싫어할 거라고 예상은 했지만, 생각보다 강한 거절에 속이 상했어. 그동안 잘 지내놓고. 좋아한다는 말에 이렇게까지 질색하는 게 꽤나 맘이 아팠어.


"내가 갑자기 고백해서 당황스러운 건 알겠는데, 그래도 아예 없던 일이라고 치진 마라. 내 마음까지 부정하지는 마. 간다."


동현은 주찬이 나가고 문이 닫히는 소리가 나고 나서야 단단히 귀를 막았던 손을 스르륵 내려. 아무것도 듣고 싶지 않아 막아봤지만 들려오는 소리처럼 단단히 걸어 잠근 마음에 주찬의 마음이 흘러들어와.







이것저것 망상합니다

만두님의 창작활동을 응원하고 싶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