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까지 바람이 매몰차게 불더니 낮이 되니까 가볍게 내려앉는 햇살이 마을을 덮었다. 마을 곳곳에 쌓인 눈에 햇빛이 내려앉아 사방이 나른하고 반짝거렸다. 눈구름 때문에 하얗던 하늘도 푸른 제 모습을 찾았다. 차가운 바람 때문에 하늘의 색마저도 시린 파랑으로 보였다.

노아의 집에서 나온 해리는 컬러링 타운을 아주 잠시 배회했다. 더 오래 마을을 돌면 컬러들을 만날까 봐 무서웠다. 그래서 푸른 사거리로 가지 않고, 교외로 방향을 돌렸다. 계속 크게 걸었다. 아무 생각이 들지 않았다. 어쩌면 필사적으로 생각을 하지 않으려고 했던 것일지도 몰랐다. 그는 땅바닥에 시선을 두고 걸었다. 일부러 눈에 초점을 버린 채로 걸었다. 아주 느릿하게 눈을 끔벅이며 걸었다. 흐릿하게 와닿는 것들의 형체와 풍경들이 익숙하면서도 낯설었다. 그리고 좀 서글펐다.

내가 한 말과 행동들 때문에, 컬러들이 많이 놀랐겠지. 그래. 나는 이 마을에 어울리지 않는 사람인 거야. 좋은 사람이 되려고 아등바등해도, 속에 있는 열등감을 버리지 못 하니까. 엄청 찌질하고 한심해 보였을 거야. 컬러들이 다시는 날 보지 않으려 하면 어떻게 하지? 어쩔 수 없어. 내가 저지른 일이니까.

어쩌다 여기까지 와 버렸을까.

한참 그렇게 걷다가 발 아래 사각거리는 눈에 고개를 들었다. 언제 올라왔는지, 뒤를 돌아보니 조금 가파른 오르막이 있었다. 하얀 눈길에 한 사람의 발자국이 찍혀 있었다. 멈춰선 해리의 발까지 연결된 발자국을 가만히 바라보다가 고개를 돌려 앞을 보았다. 짚의 색으로 바랜 키 작은 풀들과 하얀 줄기를 가진 나무들이 규칙 없이 서 있는 게 보였다. 해리는 어리둥절했다.

"여긴 자작나무 숲이잖아."

언제 여기까지 왔지? 문득 자작나무 숲에 가보라던 루카스의 말이 생각났다. 기분이 묘했다. 해리는 단 한 번도 자작나무 숲에 온 적이 없었다. 가끔 컬러들끼리 자작나무 이야기가 나오면, 해리도 자작나무 숲이 가진 신비를 믿는다는 입장으로 이야기하고는 했지만 정작 실제로 숲에 온 적은 없었다. 정확한 위치도 몰랐다. 그런데 이렇게 절묘한 시기에 우연히 이 숲에 도달했다니, 정말 자작나무 숲에 기묘한 힘이라도 있나, 그렇게 생각했다.

등 뒤에서 바람이 불어왔다. 귀를 시렵게 하는 바람이었다. 해리는 바람에 등을 떠밀려 숲으로 들어갔다. 척 보기에도 추워 보이는데, 목도리라도 가져올 걸, 생각했다.

하지만 숲은 생각보다 춥지 않았다. 시린 바람이 더는 불지 않았다. 키가 큰 나무 사이사이로 햇살이 스며들었다. 해리는 해가 잘 들어오는 곳에 손을 뻗었다. 햇살이 손끝을 간지럽혔다. 분명 형체가 없을 온기지만, 꼭 얇고 부드러운 천을 만지는 것 같은 기분이었다.

우리 컬러들은 참 따뜻하지. 햇살처럼. 나도 그에 어울리는 사람이 되고 싶었는데.

살짝 녹은 눈이 사각사각 밟혔다. 커다란 보석과자를 밟는 것 같았다. 해리는 하얀 숲을 가만가만 걸었다. 해리의 움직임만이 소리로 들려왔다. 눈 밟는 소리. 옷이 옷과 부딪히는 소리. 걷다가 무릎끼리 부딪히는 소리. 손을 주머니에 넣었다가 빼는 소리. 손을 뻗어 자작나무를 만져보는 소리. 눈 속에 갇힌 낙엽이 으스라지는 소리. 숨을 내쉬는 소리. 숲을 들이마시는 소리. 가끔 혼자 중얼거리는 소리.

뭐가 문제였을까? 정말 단순히 계절 때문일까? 아닐 거야. 생각해 보면, 나는 겨울이 아닌 계절에도 우울해졌고, 찌질해졌어.

조금 걷다가 바닥에 앉아 쉬었다. 해가 정면에 보였다. 얼굴에 닿는 온기를 느끼며 가만히 눈을 감고 있었다. 바람이 얇은 나뭇가지를 건드는 소리가 들렸다.

사랑받고 싶었어. 좋은 사람들한테 사랑을 받으면, 나도 좋은 사람이 될 거라고 생각했어. 어떻게 좋은 사람이 될지 고민했던 적도 있었지. 그러다 선물을 받으면 기뻐하는 컬러들을 보고, 나도 선물을 줘서 컬러들을 기쁘게 만들고 싶었던 거 같아. 참 일차원적인 생각이지. 그래서 샘이 났던 거야. 나는 돈 때문에 내 생활도 헐떡이는데 원하면 언제든 선물을 건넬 수 있는 노아와 클로이한테 샘이 났던 거야. 내가 생각해도, 너무 별로인 사람인데, 나. 정말 무진장 별로다. 

구름이 해를 가렸는지, 얼굴에 내려앉았던 햇살이 사라지자 해리는 눈을 떴다. 그리고 다시 걸었다. 쓱 뒤를 보았다. 입구에서 얼마나 걸어왔지? 슬슬 내려가야 할 거 같은데. 뒤로 돌아 걸어왔던 길을 걸어가 보았다. 이때까지 보아왔던 풍경이 보였다. 한참 걸어도 마찬가지였다. 입구는 보이지 않고 같은 길만 걷는 것 같았다.

걸음을 멈추고 제자리에 멈춰 서서 허공에다 말을 걸었다.

"난 아직 집에 가면 안 되는 거야? 좀 더 이 숲에 있어야 하는 거야?"

괜히 가까이에 있던 나무가 흔들린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해리는 흔들린 나무를 보다가 어깨를 으쓱하고 다시 뒤로 돌아 걸었다. 숲의 더 깊은 곳인지, 어쩌면 숲을 빠져나가는 곳인지 알 수 없는 방향으로, 아무튼 지금 걷던 방향의 반대로 걷기 시작했다.

사실 선물을 준다고 다 좋은 사람이 되는 게 아니라는 건 알고 있어. 그런데, 나는 그렇게 성격이 발랄하지도 않고, 멋있지도 않잖아. 아무리 노력해도 성격은 잘 안 바뀌니까, 그나마 괜찮은 게 선물이라고 생각했지.

……근데 꼭 선물이 비쌀 필요는 없잖아. 마음이 중요한 거니까. 근데 왜 나는 금액에 집착했을까?

나무 위에 앉아있던 이름 모를 새가 어디론가 날아갔다. 나뭇가지에 맺힌 녹은 눈이 햇빛을 받아 반짝거렸다. 해리는 새롭게 보이는 풍경을 바라보며 생각을 이어갔다.

아마 재력도 능력이라고 생각했던 거 같음. 멋있어 보이려면 능력을 보여주는 게 중요하다고 생각했던 거야. 그래서 아득바득, 어차피 아득바득해도 안 될 거면서도 그렇게 돈에 집착하고 그랬던 거 아니었을까? 그런가? 그렇게 생각했던 건가?

……이걸 지금 생각해서 뭐 해. 이미 다 망쳤는데. 나는 인간관계까지 망쳤…….

거센 바람이 불어 해리의 머리를 다 헝클어트렸다. 해리는 또 가만히 멈춰 서서 있다가 머리를 정리했다.

"……이 생각 아니야? 왜 아니야. 내가 다……."

이번에는 정면으로 바람이 불어와 해리의 얼굴에 시린 바람이 들이닥쳤다. 그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으래. 알겠어."

그는 다시 걸었다.

"……."

……조바심이었던 거야. 조바심을 느꼈던 거야. 계속 내가 원하던 걸 얻지 못 하니까, 자꾸 내가 세운 목표를 달성하지 못 하고 실패하는 거 같으니까 안달이 난 거야. 그 목표가 건강하지 않다는 걸 알면서도 외면하다가, 조바심에 바르지 않은 목표라는 것도 인지하지 못 했던 거야.

아직 떨어지지 않아 나뭇가지에 매달린 낙엽들이 바람에 살랑거렸다. 금방이라도 떨어질 거 같은데, 바람에 빙글빙글 돌지언정, 떨어지진 않았다. 색이 바랜 풀들 사이에는 실처럼 얇은 거미줄도 보였다.

어찌 되었든 내가 잘못한 거지. 응응, 이건 당연한 거야. 기분이 태도가 되어 행동으로 드러났으니까. 생각을 좀 많이 해야 할 거 같아. 당장 내가 열등감을 버리겠다고 확신할 수는 없을 거 같아. 일단 컬러들한테 사과를 하고, 혼자만의 시간을 가지자.

해리는 고개를 끄덕이며 걸었다. 숨쉬기가 좀 편해진 거 같기도 하고, 기분 탓인가 싶기도 하고. 아무튼 이게 마음이 편해진 건가, 생각했다. 자작나무 숲을 믿길 잘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신비 때문인지는 모르겠지만 생각을 계속하다 보니까 마음이 가벼워지고 정리가 된 것 같았다.

조금만 더 걷다가 집으로 가야겠다고 생각하며 해리는 걸었다. 눈에 보이는 것들을 기꺼이 받아들이며 기쁘게 숨을 내쉬었다. 그토록 싫어했던 눈도, 지금은 싫지 않았다. 눈 위에서 이렇게 오랫동안 넘어지지 않은 것은 처음이었다. 몸에 있던 긴장이 사라진 것이 느껴졌다. 발걸음이 가벼워졌다.

그때.

나무들 사이의 간격이 조금 벌어진 공간이 눈에 들어왔다. 해리는 아무 생각 없이 그곳으로 걸어갔다. 그리고 그곳에, '가장 키가 큰 자작나무'가 있었다. 꼭 해리를 기다린 것처럼 그곳에 있었다. 유난히 해가 잘 들었다. 그 나무 주변에는 눈도 얼마 없었다. 해리는 조심스럽게 자작나무에게 다가갔다. 그리고 자작나무 아래 엉덩이를 붙이고 앉았다.

심장 소리를 들려주라고 그랬지.

그러려면 이 나무를 안아야 하나? 안고 있어야 하는 건가? 아닌가. 그냥 등만 대고 있어도 되는 건가? 해리가 나무를 안았다가 등을 댔다가 우왕좌왕했다. 

안고 있자니 자세가 불편해서 등을 대고 앉았다. 괜스레 긴장이 되는 것 같았다. 음, 소원을 들어준다고 그랬는데, 말로 뱉어야 그게 소원인 건가? 생각만 해도 되는 건가? 생각으로 여러 개 말하면 그 중에서 어떤 걸 들어주는 거지? 그러다, 한숨을 푹 내쉬고 눈을 감았다. 또 생각이 많아져버렸다. 조심히 심호흡을 하고, 자신의 심장이 뛰는 것에 집중했다. 이상하게 심장 소리가 평소보다 더 크게 들려왔다.

이제 해리는 소원을 생각했다. 어떤 소원을 빌어야 하는지. 속으로 여러 가지를 생각했다. 세상의 모든 사람들이 나를 좋아하게 되었으면 좋겠다. 미워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컬러들과 잘 지낼 수 있었으면 좋겠다.

그러다 나지막이 읊조렸다.

"내가 또 어떤 실패를 하게 된다고 하더라도, 실망하지 않고 무던히 넘기게 되었으면 좋겠다."

그리고 서둘러 덧붙였다.

"그러니까, 아예 실망을 안 할 수는 없을 거니까 조금만 실망하고 금방 회복되는……. 내 말 무슨 말인지 알겠지, 나무야?"

몇 분 더 가만히 앉아, 자신의 심장 소리를 듣었다. 해리는 하늘을 올려다보며 심호흡을 하다가 집으로 돌아오기 위해 걸었다. 그리고 안전하고 재빠르게 숲을 빠져나올 수 있었다. 


🧭


숲에서는 분명 사방이 밝았는데, 숲을 나와 조금만 걷자 주변이 금세 어두워졌다. 해리는 제일 먼저 노아의 집으로 걸어갔다. 자신 때문에 제일 많이 놀랐을 사람이 노아 같았기 때문이었다. 초인종을 누르고 떨리는 마음을 다잡으며 문 앞에서 기다렸다.

문이 열리고 노아가 놀란 표정으로 서 있었다. 해리는 노아의 얼굴을 보자마자 심장이 쿵, 하고 떨어지는 걸 느꼈다. 무서웠다. 혹시나 노아가 자신의 사과를 받아주지 않을까 봐, 무서웠다.

하지만 그것도 자신이 받아들일 문제라고 생각하고 주먹을 꽉 쥐었다. 사과를 하기 위해 고개를 드는데, 노아가 웃으며 말했다.

"왔어요, 형?"

해리는 어안이 벙벙해서 가만히 서 있기만 했다. 그런 해리를 노아가 이끌고 집 안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노아의 집 거실에는 모든 컬러들이 있었다.

"다들 형을 기다리고 있었어요."

해리의 눈에 눈물이 차올랐다. 미안함과 고마움에 감정이 북받쳐 오른 것이었다. 그는 손에 얼굴을 묻고 횡설수설하며 자신의 마음을 그대로 뱉어댔다. 컬러들은 해리의 곁으로 다가가 그를 꼭 안아주었다. 가장 먼저 해리를 안은 루카스가 눈물 범벅이 된 해리에게 다정히 말했다.

"계속 기다리겠다고 말했잖아."

컬러들은 노아의 집에서 해리의 이야기를 남김없이 다 들었다. 서로 사과를 주고받고, 눈물을 닦아주고, 고마움을 전하며 결국에는 모두가 후련하게 웃을 수 있었다.

분위기가 말랑말랑해지자, 뒤에 무언가를 숨긴 노아가 장난스러운 얼굴로 해리에게 다가왔다.

"그럼 이건 어떻게 할까요?"

짠, 하고 보인 건 노아가 해리를 위해 준비했던 장갑이었다. 해리는 부끄러움에 얼굴을 붉혔다.

"여기 잘 보시면, 제가 형 드리려고 형 이름 직접 수놓았는데! 안 받으시겠다면 어쩔 수 없죠……."

울상을 짓는 노아에게서 서둘러 장갑을 받은 해리가 말했다.

"……나 사실 선물 짱 좋아해……."

덕분에 컬러들은 또 웃을 수 있었다.


🧭


어느 낮. 그레이스가 동쪽 자작나무 숲을 찾았다. 그는 곧바로 '가장 키가 큰 나무'를 찾을 수 있었다. 나무에 등을 대고 앉아 그레이스는 조용히 생각했다. 그리고 소원을 빌었다.

우리 컬러들이, 꼭 자기가 특별한 누군가라서 사랑받는 게 아니라, 존재 자체가 소중하고 사랑스러운 탓에 남김없는 사랑을 받는다는 걸 알았으면 좋겠다.

그 자체로 하염없이 사랑스러운 사람들이란 걸, 느꼈으면 좋겠다.

쿵, 쿵, 쿵. 

심장 소리가 크게 들렸다.

언제나 당신을 사랑한다는 것만 기억해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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