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4


째깍째깍. 귓속에서 초침이 움직이고 있었다.

내일이 되기까지 남은 시간은 6시간 3분. 그 말인즉 살 날이 그것밖에 남지 않았다는 뜻이기도 했다.

어쩌자고 그 순간 동석이라고 했을까. 차에 흠집 낸 게 자신이라는 걸 밝히고 광명을 찾았으면 망치로 머리 한번 찍히는 거로 끝났을 테다. 입을 찧고 싶은 심정이다. 아까 석원이 아닌 척 연기했다는 걸 알면, 그 성격 나쁜 작자가 가만있지 않을 게 분명하다.

살려주겠다고 했지만, 유진처럼 인내심이 짧은 사람이 이 사실을 전부 알고도 살려줄지 의문이다. 아마 ‘제가 윤석원이에요.’ 이 말을 꺼내자마자 그 미끈한 입가에 미소를 띠고 주먹부터 냅다 꽂을 게 뻔했다. 그 정도면 양호하다. 옥상으로 끌고 가 밀어버릴지도 모른다. 석원은 두 손바닥으로 머리를 지탱하고 휴대폰을 노려봤다. 휴대폰엔 11개의 번호가 있었다.

“퇴근 안 해? 오늘 출동도 없는데……. 오늘 당직은 A조인데, 네가 왜 그러고 있어?”

옆자리를 차지한 은형은 A팀 서포터였다. 에스퍼도 가이드도 아닌 일반인으로, 에스퍼들의 스케줄을 관리하고 현장에 빠르게 배치하는 직책이다.

“그렇게 있지 말고 한잔 하러 가자. 내가 끝내주는 곳 알아.”

“저도 거기 알아요.”

“거길 어떻게 알아? 나 어디 가자는 말도 안 했는데?”

“할머니의 끝내주는 막걸리집이잖아요. 거기면 안 가요.”

“어, 어, 맞지. 거기 갈 생각이긴 했는데 요즘 독심술도 발현했어?”

간파당한 오늘 행선지에 은형은 적잖이 당황한 얼굴이다. 사실 모르는 게 이상했다. 그는 비가 오나 눈이 오나 회사에서 20분 떨어진 막걸리 집에 다녔다. 푸짐한 음식만큼이나 인심 좋은 할머니가 운영하는 곳으로 A팀이 회식할 때 자주 가는 곳이기도 했다.

“아니요.”

“빨리 가자. 차 막히기 시작할 때라 지금 나가야 제시간에 도착하지.”

“조금 있다 가면 차 막힐 이유가 없고요.”

“그래서 퇴근을 늦게 하겠다고? 차라리 근처에 있다가 정체 풀리면 나가는 게 낫지. 괜히 여기 있다가 팀장 눈에 띄어서 현장 가면 그건 그것대로 싫다.”

은형의 눈이 동그래졌다. 러시아워에 몸 담기 싫어 퇴근을 안 하겠다는 석원을 이상한 눈으로 바라봤다. 평소에 누구보다 퇴근에 칼 같던 사람이었다.

“어디 아파? 또 저체온인 거 아니야? 체온 재봤어?”

은형은 연필꽂이에 꽂힌 고막 체온계를 꺼냈다. 귀를 잡아 올리고 그 안에 체온계를 꽂아넣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체온계에 온도가 표시됐다.

“체온은 괜찮은데. 왜 그러냐?”

지금 미쳤거나 돌았거나 그 사이쯤인지 모른다. 반쯤 초첨 없는 눈으로 휴대폰만 뚫어지게 봤다. 어디서 어떻게 풀어야 할지 모르겠다.

“신유진 님이요.”

“그 새낀 왜? 아까 A팀에 떴다면서? 또 누구 해코지라도 했어? 본부에선 신유진 안 잡아가고 뭐하냐."

은형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아까 낮에 자기 차에 흠집 낸 새끼 찾아내라며 보안과 직원 족쳐놨다던데. 그 흠집낸 새끼 살기 어렵겠더라. 그 차 독일에서 직접 가져온 거라며? 차 받기까지 1년 넘게 걸렸다던데.”

또 독일제. 독일이라면 이젠 이가 갈렸다.

“……그러겠죠. 살기 어렵겠죠. 그 흠집 낸 새끼 어떻게 죽일까요?”

“총으로 쏴주면 땡큐지. 총으로 죽으면 별로 고통스럽지 않을 거라면서 히스테인들 다 때려죽인 새끼잖냐.”

석원을 응시하던 은형은 맞은편에 앉아있는 영진을 보았다. 손가락으로 석원을 콕 짚고는 그 다음에 관자놀이 주변을 빙빙 돌렸다.

‘왜 이래? 반쯤 정신 나간 거 같은데?’

그러자 영진은 두 손을 어깨 위로 올리며 모르겠다는 표정을 지었다.

“영진인 퇴근 안 할 거야?”

“해야죠.”

“석원이는 안 간다는데?”

“연인이라도 각자의 시간이 필요하잖아요. 석원인 지금 그 상태예요.”

“그래……?

한참 전에 퇴근 시간 전에 갈 준비를 마친 영진이 시계를 바라봤다. 57, 58, 59, 00초……. 시계 앞자리가 6으로 바뀌자마자 영진의 몸이 위로 튀어올랐다. 영진뿐만 아니다. 시계만 응시하던 A팀이 뒤도 돌아보지 않고 밖으로 나갔다.

“난 너희 둘이 사귀는 이유를 모르겠다.”

흐릿하긴 하다. 우리가 사귀자는 말을 했었나? 그냥 사귀었다는 말없이 자연스레 연애 비슷무리한 것을 하게 됐다.

“가끔 널 보고 있으면 윤성이가 생각나.”

이윤성으로 말할 거 같으면 A팀 에이스로, 얼마 전 1개월간 각인을 지우고 최근 복귀했다. 윤성과 매칭률이 높은 가이드가 없어, 사설 서비를 이용했는데, 운이 좋은 건지 나쁜 건지 그곳에서 우연히 매칭률이 좋은 가이드를 만났다.

거기까지 좋았다. 만남이 반복되는 과정에서 자제하지 못하고 그 가이드에게 각인해버리게 된 데서 그의 불행이 시작됐다. 급속도로 사설 직원에게 빠져든 윤성은 자신이 홀라당 벗겨지고 있다는 것도 모르고 비밀연애를 하다 최근 어마어마한 빚을 졌다.

얼마나 순종적이고 호구같았냐면 제4 금융에서 대출받고, 에스퍼까지 팔아가며 가이드에게 돈을 바치다가 본부에 덜미가 잡혀, 캡슐에 넣어진 게 얼마 전 일이었다. 반강제적으로 각인이 지워진 윤성은 반폐인 상태였다. 빚은 본부가 갚아줬을 거고, 잘못된 각인으로 아마 죽을 때까지 빚을 갚기 위해 일을 해야 할 것이다. 꼬부랑 할아버지가 되어서도 현장에 나가 인재나 테러범, 히스테인을 잡는데 투입될 것이다.

“진짜 윤성이가 그러고 있을 줄 누가 알았겠냐. 가이딩 지원 안 받을 때부터 이상하게 생각하긴 했었는데 그러고 있을 줄은 몰랐잖아. 그 냉철한 새끼가. 어휴, 말을 말자.”

차라리 그냥 죽어?

우울한 얼굴로 창을 바라봤다. 약해진 마음을 틈타고 또 죽자는 생각이 희미하게 올라왔다

“우선 쉬어. 나 먼저 가볼게.”

두 손으로 어깨를 꽉 잡았다가 놓은 은형이 손을 흔들고 저 멀리 멀어졌다. 석원은 꺼진 휴대폰을 노려봤다. 이렇게 사는 것보다 역시 죽는 게 낫겠지. 아이러니하게 매일 죽고 싶다는 생각을 밥 먹듯이 하지만, 아픈 건 싫었다. 내일까지 살아있으면 아프게 죽을 게 뻔하니까 오늘 제 손으로 숨을 끊는 게 여러모로 좋았다.

막상 죽으려니 하고 싶은 게 많이 떠올랐다. 하루라도 늦춰볼까? 석원은 휴대폰을 두 손으로 잡고 문자를 작성했다.

[오늘 석원 씨 만나지 못했어요.]

보낼까 말까 잠시 고민하다가 확인을 누르자 메시지 전송 표시가 떴다.

띠링, 문자를 보내자마자 답장이 왔다.

[너도 같이 뒈지고 싶어요? 아니면 빨리 전해요.]

역시 안 되겠다. 오늘 죽어야지.


*


차 정체가 풀릴 때쯤 석원은 지하철을 타고 레지던스로 돌아왔다. 애인은 새 차를 타고 신나게 도로로 퇴근하고 있을 테지만, 석원은 지하철로 출퇴근하는 신세였다. 지부에서 대중교통으로 30분 거리에 직원들을 위한 레지던스가 마련되어 있었다.

3개의 똑같은 건물이 ㄷ자로 서 있었고, 가운데 동은 일반 직원이, 왼쪽 동은 가이드, 오른쪽 동은 에스퍼의 숙소로 이용됐다. 로비로 들어가자 프론트를 지키고 있던 직원이 졸고 있다가 화들짝 일어났다. 더 자라고 손짓을 하고 엘리베이터로 앞에 섰다.

석원은 조금 우울한 얼굴이다. 한 손에서 유명한 아이스크림 브랜드 로고가 새겨진 종이가방이 들려있었다. 엘리베이터 문이 열리자 12층 버튼을 눌렀다. 느릿느릿 올라간 엘리베이터가 12층에서 입을 벌렸다.

바로 정면에 있는 곳이 석원이 머무는 숙소였다. 카드키로 잠금장치를 해제하게 들어간 석원은 신발을 벗자마자 소파로 달려가 고꾸라졌다. 몸을 감싸오는 부드러운 감촉의 패브릭 소파에 얼굴이 닿자 피곤함이 밀려왔다.

그래, 잘 됐다. 지금이면 더할나위 없이 쥐도 새도 모르게 죽기 좋은 피곤함이었다. 석원은 에어컨을 켜고, 종이가방에서 아이스크림을 꺼냈다. 달콤한 맛이 일품인 밀크 아이스크림이었다.

평소 아이스크림을 좋아했지만, 냉증을 겪고 있는 석원에게 금지된 식품이었다. 한통을 다 먹으면 그대로 저체온증으로 이어지기 때문에 먹어도 몇 숟갈 이상은 먹지 말고, 어쩔 수 없는 사정으로 아이스크림을 먹게 된다면 체온을 재고 따듯한 물에 몸을 담그라고 관리사가 몇 번이나 말했었다. 금지되었던 아이스크림 통을 품에 열자, 하얀 눈같은 아이스크림이 눈앞에 펼쳐졌다.

석원은 일회용 숟가락으로 아이스크림을 떠서 입에 넣었다. 단맛과 함께 한기가 밀려왔다. 정말 달콤하고 맛있어 눈물이 나올 정도였다. 콧물이 나오는 거 같아 손등으로 여러 번 코를 훔쳤다. 이렇게 달고 맛있는 걸 먹고 죽는 거면 정말 달콤한 자살이었다. 생각해보면 정말 신은 공평하다. 원하지 않은 에스퍼를 줬지만, 덤으로 달콤한 자살도 할 수 있게 해줬으니까.

스르륵 눈이 감겼다. 속눈썹이 이렇게 무거웠던 걸까? 석원은 일회용 숟가락을 물고 소파로 몸을 묻었다. 오소소 한기가 온몸을 감쌌다.

[삶에 비관한 에스퍼가 아이스크림으로 자살해. ]

뉴스 어딘가에 조금만 실리려나. 어쩌면 능력 좋은 팀장이 기자들을 매수해 기사가 실리지 않을 수도 있을지도 모르겠지만. 뭐, 나쁘지 않은 죽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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