센티넬버스[아카보쿠]


 제일 처음 느낀 건 즐거움이었다. 보쿠토 상의 가이드. 처음 자각을 했을 때, 우리는 서로 놀란 눈으로 바라보며 아무 말도 못했다. 부서진 네트, 망가진 바닥, 그 공간 속에서 숨만 오르락 내리락 내쉬던 두 사람.


그 때까지도 나는 손을 놓고 있지 않았다. 본능적이었다. 난데없이 금색 눈동자를 부릅뜬 채로 주위에 있던 물건을 망가뜨릴 때, 그를 막아야한다는 생각밖에 없었다. 놀라서 비명을 지르며 물러나는 아이들 속에서 나는 앞으로 달려들었다. 옆으로 날카로운 무언가 뺨을 긋고 지나갔다. 고통이 수반한 그 짧은 시간에, 나는 수 만가지의 생각이 빛처럼 지나가는 걸 느꼈다. 

죽는 거 아닐까?


아니면 팔 다리 중 하나가 나가버릴 수도. 그건 곤란한데.


그럼 부러지기만 했음 좋겠다. 잘려지면 다시는 보쿠토상과 배구 할 수 없잖아.


나는 그의 이름을 불렀다. 내 목소리를 들은 건지, 아니면 그저 소리가 나서 움직인 건지 아무튼 보쿠토상은 뒤를 돌았다. 금색 눈과 마주쳤다. 찰나의 순간에도 몸이 얼어붙는 걸 느꼈다. 과하게 기뻐하거나, 아니면 과하게 슬퍼할 떄도 저 눈동자만큼은 빛이 났다. 


그러나 첫 폭주를 하던 보쿠토상의 눈에는 빛이 없었다. 목덜미가 오싹해지는 공포였다. 


손을 뻗을 수 있었던 자신이 신기한 점은 그 이유 때문이다. 그 와중에도 어떻게 보쿠토 상의 손을 잡을 수 있었던 걸까? 지금도 알 수 없었다. 다만 선명하게 기억나는 건, 어떻게든 보쿠토 상을 진정시켜야 한다는 생각 뿐이었다.


우리는 약간은 겁에 질린 상태로, 그리고 약간은 흥분을 감추지 못한 채로 서로를 응시했다. 바깥에서 선생님이 급하게 뛰어오는 소리가 울리고, 이어 아이들의 벌 떼같은 외침이 들렸다. 우리는 누구도 먼저 일어나지 않았다. 그저 혼란 속에서도 선연하게 자각하기 시작했다. 


보쿠토 상은 센티넬
나는 가이드였다.


어쩐지 울 것 같은 보쿠토 상과 달리 나는 그만 웃어버렸다. 


"보쿠토 상."


그는 아무 말 하지 못했다. 평소라면, 아카아시! 나 어쩌지?! 이거 어떻게 된 거야, 응응? 하고 귀찮게 달라붙을 그가 완전히 얼어붙어 있었다. 나는 잡고 있는 손을 들어 보쿠토 상의 어깨를 잡았다.


"괜찮아요."


보쿠토 상에게 한 말이었으나, 실상은 나를 위한 말이었다. 괜찮아. 즐거움이 꾸물꾸물 밀려왔다. 이제 우리는 공식적인 파트너야. 각인이라는 명목 하에 보쿠토 상을 자유롭게 만질 수 있게 되었어. 비록 가이드로서의 어쩔 수 없는 역할이라고들 생각하겠지만. 그건 중요치 않아.


짝사랑으로만 끝나고 말았을 욕망을 실현시킬 수 있는 거야. 나는 웃으며 보쿠토 상의 어깨에 힘을 주었다. 그 순간 닫혀 있던 체육관 문이 열렸다. 사람들과 함께 빛이 들어왔다. 몇 년이 지나도 뚜렷하게 기억남을 강한 햇살이었다.



*



 
보쿠토 상은 자신이 센티넬인 것을 괴로워했다. 이유는 단순했다. 배구를 하지 못하게 되었으니까. 센티넬임이 판명되자마자, 그는 법대로 군인 훈련을 받아야 했다. 남들은 그토록 바라는 자리였다. 받는 돈은 억대 연봉인데다, 단숨에 상류층으로 올라가는 길이 되었으니까. 원래부터 운동신경이 천부적이었던 보쿠토 상은 능력까지 얻게 되니 단숨에 적응해버렸다. 신입이 빨리 해내는 걸 본 적이 없다며 다른 센티넬들은 감탄어린 소리를 냈다. 그러나 적응이 되었다고 해서, 그 일을 만족하는 건 아니었다. 보쿠토 상은 배구 경기를 하는 티비에 눈을 떼지 못한 채로 서 있곤 했다. 밝은 얼굴이 그 순간만큼은 소중한 걸 빼앗긴 아이처럼 일그러졌다.


그에 반해 나는 어느 순간보다도 편안함을 느꼈다. 보쿠토 상처럼 배구를 못해 죽을 지경도 아니었고, 무엇보다 각성 이후로 정식으로 보쿠토 상의 파트너가 될 수 있었다. 보쿠토 상이 때로 폭주를 할만 치면, 다가가서 입을 맞추었다. 헐떡이는 남자의 입 안으로 혀를 넣었다. 제 정신을 차리기 직전 사지를 덜덜 떠는 보쿠토 상을 보며 나는 흥분했다. 겉으로는 이제 되었냐고 묵묵하게 물어보았지만, 실상 내 안은 쾌감에 불이 붙어 올랐다. 


학창 시절에 단 한 번이라도 입을 맞추어 볼까 수백만번 고민했던 보쿠토상의 몸은 내 것이 되었다. 그리고 마음껏 탐해도 그 누구도 이상하게 보지 않았다. 심지어 보쿠토 상 그조차도. 


보쿠토 상은 오히려 자신만을 쫓아다녀야할 나에게 죄책감을 갖고 있었다. 선배는 나에게 무엇이든 해주고 싶어했다. 아카아시. 아카아시 정말 미안. 나 때문에. 미안해. 미안.  그럼 나는 일부러 처연한 웃음을 지으며 괜찮다고 말했다. 나의 옅은 웃음이 보쿠토 상의 마음에 죄책감을 더해준다는 걸 알기에 일부러 잘 짓지도 않는 미소를 건네주었다. 보쿠토상은 칼에 찔린 듯한 표정을 지으며 고개를 떨구곤 했다.


바보같은 사람.


"아카아시, 아카아시! 나 정신 차렸......"


"아뇨. 아직 폭주가 멈추지 않았습니다."


"그만해! 진짜야, 나 정신차렸어! 제발!"


보쿠토 상이 비명을 질렀다. 그러나 나는 허리를 여전히 흔들며 고글을 벗어던졌다. 고글이 부서진 벽에 부딪치는 소리가 났다. 동시에 보쿠토상이 새된 비명을 질렀다. 평소의 명랑한 음색과는 전혀 다른, 숨 넘어갈듯한 소리였다. 그것은 오히려 내 흥분을 부추겼다.


보쿠토 상이 폭주를 멈춘건 진작에 알고 있었다. 그가 폭주를 하도록 나는 일부러 가이딩을 하지 않았다. 몇 십 미터 뒤에 숨어 어쩔 줄 몰라하는 그를 지켜볼 뿐이었다. 보쿠토 상은 적을 처리하면서도 이리저리 둘러보며 나를 찾았다. 자신 때문에 인생을 망친 후배, 그럼에도 불구하고 항상 괜찮다며 성실히 챙겨준 사람이 보이지 않으니 점차 불안해진 것이다. 곧 보쿠토 상은 폭주했다. 땅이 무너지고 건물이 박살나는 걸 보며 나는 가만히 서 있었다.


그러게 헛 짓을 하지 말았어야지. 나는 선배의 뒷모습을 보며 고개를 기울였다. 바보 같으면서도 이상하게 이기적인 남자다. 자신 때문에 삶도 제대로 누리지 못해 어쩌냐고 늘상 중얼거리던 사람이, 어떻게 나를 두고 다른 여자에게 눈이 꽂힌건지. 센티넬과 가이드가 꼭 사랑하는 관계라는 법은 없지만, 적어도 우리는 이 만들어진 규칙을 끝까지 지켜야 하는 거 아니었나? 죄책감을 갖고 있으면 계속 나를 책임졌어야죠, 선배.


나는 늦게야 보쿠토 상을 쓰러뜨렸다. 헐떡거리는 사람의 손을 잡고 입 안을 탐했으며 옷을 벗어 던졌다. 무기를 하나씩 떼어낸 다음 강제로 관계를 맺었다. 키스를 했을 때부터 몽롱하게 정신을 차렸던 그가 급히 소리 질렀다. 나는 못 들은 척했다. 


"아냐, 괜찮, 괜찮다니, 까!"


"제가 안 괜찮습니다."


"무슨 소리, 윽!"


보쿠토상이 도망치려고 했다. 제 힘이면 충분히 나를 떨치고 갈 수 있으면서, 폭주 직후의 상태는 컨트롤조차 제대로 못하는 모양이었다. 나는 그래서 보쿠토 상의 다리를 강제로 벌리고 다시 안에 깊숙히 나를 묻어버렸다.


그는 다른 사람에게 호감을 갖고 있다. 내가 아니었다. 몇 년간 관계를 맺어온 그 몸으로 감히 타인을 사랑하고자 했다. 용서할 수 없었다. 나는 전쟁터 한가운데서 보쿠토 선배를 깔아뭉개고 끝까지 폭력에 가까운 행위를 퍼부었다. 보쿠토 상은 이것이 화풀이라는 걸 알지 못한 채 결국 내 목에 팔을 두른 채 신음을 뱉기 시작했다. 


아카아시, 아카아시. 한 때 어린 시절 멋내기 위해 올렸던 흰 머리카락은 흐트러져선 눈을 가려버렸다. 그 머리칼을 뒤로 젖힌 채 눈물이 흐르는 뺨에 혀를 갖다대었다. 뜨겁고 짠 맛이 입 안을 적셨다. 눈물을 핥아 받아낸 뒤, 곧장 선배의 입안에 혀를 집어넣었다. 나의 센티넬은 몸을 파르르 떨며 쏟아지는 구타를 받아들이는 수밖에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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