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정발본 5권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 약간의 이자크로



    연기가 자욱한 하우스를 바라보며 이자벨라는 크로네를 생각했다. 

    모든 생에 걸쳐 이자벨라는 언제나 현실적이었다. 자유를 찾아 나부끼는 흰 로프를 발견한 때조차도 그랬다. 그 순간 이자벨라는 엄마가 되기를 결정했을 때만큼이나 신속하게 패배를 받아들였다. 그들은 밖으로 나갔고 그녀는 나갈 수 없었다. 심장에 박힌 칩과는 상관 없이.

    발 앞의 경치는 처음 담벼락 위에 섰던 날과 눈물이 날 만큼 똑같았다. 잠깐 동안 이자벨라는 코앞에서 살랑이는 로프를 붙잡고픈 유혹에 휩싸였으나 곧 포기했다. 절망으로 고통받지 않는 최선의 방법은 이번에도 효과적이었다. 후회하지 않는다. 후회해도 아무 것도 달라지지 않는다. 이자벨라는 아무 것도 바꿀 수 없다.

    다만 그것은 그녀가 아닌 딸의 몫이다. 이제 다시는 엄마가 될 수 없을, 절벽 앞에서도 포기하지 않은 자의 운명.

    그러면 내가 할 수 있는 일을 해야지. 이를테면 지금은 나무에 묶인 로프를 회수하는 일이었다. 열다섯 명이 안전하게 건너갈 정도로 단단하게 묶여있던 매듭도 이자벨라의 손길 앞에서는 얼음보다 빠르게 녹아내렸다. 능숙한 손길로 하나씩 로프를 감아쥐던 이자벨라가 문득 후, 하고 웃었다. 묶은 자국만 보아도 어느 것이 누구의 솜씨인지 전부 알 수 있었다. 어떤 얼굴을 하고 무슨 말을 나누며 한 명씩 날아갔을지 눈앞에 선했다.

    이자벨라는 단 한 번도 아이들을 사랑하지 않은 적이 없다. 그들이 언제 어디에 있더라도 마찬가지였다.

    너는 나를 미워하지 않겠지, 엠마.
    내가 너를 여전히 사랑하는 것처럼.

    모녀 간의 신뢰에 이유는 없다. 지금 이 순간에도 누구보다 딸을 깊이 사랑하는 이자벨라는 같은 까닭으로 엠마가 자신을 엄마라 부를 것을 확신한다. 설령 그 엄마가 자신을 식량으로 키웠다 해도, 설령 그 딸이 지금까지 쌓아올린 모든 것을 망쳤다 해도. 엄마와 딸은 서로를 증오하지 않는다. 

    나는 너희의 엄마. 너희는 내 아이들. 세계가 전부 변한다 해도 그것만은 결코 변하지 않는 사실.
    아이들의 성장을 목도한 어머니는 마땅히 흐뭇하다. 좋은 광경을 자신의 눈으로 직접 보지 못한 그 하나가 이제야 아쉬울 뿐. 

    너도 그랬겠지. 긴 회상을 끝내고 나무 밑둥으로 돌아온 이자벨라의 기억이 말라죽은 자매를 끌어올렸다. 유일한 엄마가 되어 사랑받고 싶었던 그녀의 또다른 딸. 잘못 든 길일지언정 절대로 바꾸지 않는, 마지막 순간까지 포기하지 못했던 그 성급하고 어리석은 집념. 
    엠마를 담벼락 너머로 날려보낼 수 있었던 마지막 올빼미 날개.

    축하해. 네가 이겼구나. 포기하지 못하는 아이마저 엄마는 끝내 사랑할 수밖에 없다. 너를 엄마로 만들어주고 싶었어. 진심이었단다. 때늦은 아쉬움을 뒤로 한 채 이자벨라는 나지막한 자장가를 부른다. 이 노래가 끝날 때까지 만이라도 아무 것도 모른 채 행복할 아이들을 위해. 

    그녀의 이름은 맘 이자벨라. 그레이스 필드의 오직 하나뿐인 엄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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