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칠흑 5.0 스포일러 있는, 수정공 나오는 드림 조각글

*새벽의 영웅 칭호를 레네 혼자만 가진 게 아니라는 드림 설정상, 레네 혼자서만 1세계로 불렸을 것 같지 않아서 글이 공식 라인과 같지는 않습니다.. 어차피 만족용 글이지만. 그런데 아무리 생각해도 레네랑 같이 다닌 모험가 친구들도 어떻게든 같이 떨어졌을듯 신생 때부터 온갖 곳을 같이 돌았는데ㅠ










“레네라고 해.”


평범한 자기소개였음에도 동료들은 각자의 귀를 의심했다. 그도 그럴 것이 낯선 제1세계에서 수정공은 처음 보는 사람이었고, 레네에게는 아주 가까워진 자기 사람이 아니고선 모험가로 활동할 때 쓰는 이름을 내세운다는 규칙이 있었다. 그리고 잠깐 크리스타리움 내를 돌아보는 동안에도 레네는 그 규칙에 충실하여, 결코 자신을 레네라 부르지 않았다.

아니, 그러면서도 그들은 그들 나름의 이유로 납득했다. 수정공이 새벽과 모험가들을 원초세계에서 제1세계로 불러들인 만큼, 아군으로서 그를 신뢰하겠다는 레네 나름의 의사 표명에 가까울 것이다.


“……레네.”


후드에 가려 입 모양만 겨우 보였으나 수정공은 다소 떨떠름한 표정이었다. 그의 입매가 희미하게 떨렸다.


“그렇게 부르도록 하지.”









콜루시아 섬 최상단의 바람은 따뜻했다. 끝없이 펼쳐진 빛과 가깝기 때문인지, 굴그 화산 가까이에 자리해서인지는 확실치 않았다.

지겹게도 화사한 빛 아래서 수정공은 몸을 웅크리고 잠들어 있었다. 아니, 쓰러진 걸지도 모른다. 크리스탈 타워와 멀리 떨어진 상태로 기력을 심하게 낭비해서였다. 알피노와 알리제를 비롯한 새벽 현자들을 호위하다 돌아온 레네는 수정공의 상태를 염려한 동료들에게서 산책하러 나간 그를 찾아오란 부탁을 받았고, 실제로 쓰러져버린 그를 구조해냈다.


“응……? 네가 왜………….”


수정공은 한참 눈을 깜빡이더니 마치 꿈에서 깨는 것처럼 화들짝 놀랐다. 그는 이 상황을 무척 멋쩍어했고, 레네도 멋쩍기는 마찬가지였다.


“어쩌다가 그렇게 됐네.”

“……아니, 아니야. 방금 그건.”

“못 들은 걸로 할게. 당신을 주우러 왔어, 수정공.”


보아하니 금방 데려갈 수 있는 상태는 아니네. 레네는 수정공 옆에 털썩 주저앉았다. 그런 그녀에게 양해를 구하며 수정공은 자신의 몸 상태와 타워에 관한 이런저런 이야기를 늘어놓았다. 그가 이야기를 마친 후에는 레네가 굴그 화산에 진입하기 위한 거대 탈로스 계획의 진척 상황을 말해주었다.

수정공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군. 이게 마지막 휴식이 되겠어. 그럼…… 괜찮다면 잠깐 얘기를 나누지 않겠나?”


레네는 그 제안을 기꺼이 승낙했다. 그간 수정공과 느긋하게 대화를 나눌 기회가 거의 없었기 때문이다.


“궁금한 게 있어. 그대는 이 싸움이 끝나면 어쩔 생각이지? 하고 싶은 일은?”


수정공의 질문에 레네는 두 눈을 동그랗게 뜨더니 말없이 생각에 잠겼다. 그리고 한참 뒤에야 입을 열었다.


“우선 우리 도련님과 아가씨를 돌봐야지. 위리앙제만으로는 힘에 부쳐. 당신도 겪어서 알겠지만 둘 다 무모한 구석이 있거든? 뭐, 이곳에서 무사히 돌아가는 방법을 찾는 게 먼저겠지만.”

“…아, 그건. 정말 입이 열 개라도 할 말이 없네. 미안하다…….”


의도한 바는 아니었으나, 결과적으로 일을 어그러뜨린 장본인이 고개를 수그렸다. 그러자 레네가 짤막한 웃음을 터뜨렸다.


“딱히 탓하는 거 아냐. 이미 알리제에게 혼났으니 됐지.”

“그런 점에서?”

“농담이야. 하지만 이미 벌어진 일인데 별수 있나.”


그녀는 하던 이야기를 계속 이었다.


“원초세계에 돌아갈 수 있게 되면… 당장은 제국과 전쟁을 벌이는 처지니 한가하지 않을 거야. 난 전쟁 같은 거 별로 안 좋아하지만, 그렇다고 새벽이 발 뺄 수 있는 상황은 아니니까. 멀리서 동료를 잃을 바엔 가까이서 방패를 드는 게 안정적이더라고.”


어서 빨리 해치우고 싶다! 그렇게 외친 레네는 새벽의 영웅 중 하나라기엔 퍽 가벼운 태도였다. 수정공의 입가에도 미소가 묻어났다.


“정말 레네다운 이야기군.”

“그래?”

“그래.”

“칭찬으로 들을게. 아, 그리고 하고 싶은 일이라면.”


내리쬐는 빛이 눈 부셨는지 레네가 말을 하다 말고 눈을 감았다. 바위 더미에 등을 기대고 선잠을 자는 듯한 자세를 취한 그녀는 해바라기를 하는 영양처럼 무척 나른해 보였다.


“나도 그렇고, 다른 녀석들도 그렇고, 여기저기 소속된 데가 많아. 특히 어느 유적을 조사하는 팀을 꾸렸었는데…… 그쪽 일은 정말 열심히 하지 않으면 평생이 걸려도 안 끝날지 모르거든.”

“평생이 걸려도?”

“그래. 그래서 일이 잘 마무리 되면 그곳에 합류하려고.”

“…무엇인지 몰라도 어마어마한 일인가 보군. 하지만 잘해낼 거라고 생각해.”

“후후, 당신은 띄워주기도 잘하네.”

“진심으로 하는 말인데.”


수정공이 약간 투덜대는 것 같았다. 간혹 그에게선 한 도시의 지도자나 살아온 나이에 어울리지 않는 모습들이 보였다. 레네는 그때마다 의뭉스러운 얼굴로 고민했다. 탈로스의 심핵을 구하러 갈 때도 분명히…….

모험가들과 자연스레 합을 맞추고, 오랜 파트너 같다는 말에 기뻐하는 그가.


“뭐랄까, 목표가 까마득하긴 해도… 우리에겐 해내야 할 이유가 있어. 만나고 싶은 친구가 그 목표를 이룰 때까지 계속 만나주지 않을 거라서 말이야. 그 녀석 선택은 무척 용기 있었지만, 혼자 너무 오래 잠들어 있게 내버려두고 싶지 않아서.”


오래된 책을 띄엄띄엄 읽어나가듯 레네가 중얼거렸다. 사실 대단한 자신은 없다. 그녀에게는 멀지 않은 과거였으나 어쩌면 몇십, 몇백 년의 세월이 흐른 것과 다르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허나 그 오래된 별빛을 찾는 게 서툴더라도, 한번 마주한 별을 바보같이 잊는 천문학자는 없을 것이다.

그렇게 생각하니, 참 익숙하더란 말이다. 네가.

수정공이 레네를 바라보았다. 어느새 눈을 뜬 엘레젠족 모험가의 안면에 옅게나마 서운함이 어려 있었다. 수정공의 입이 살며시 벌어졌다가, 굳게 다물렸다.

언제부터?

이따위 질문은 무색하다. 돌이켜 보면 처음 크리스타리움에서 어느 이름을 입에 올렸을 적에도 그랬다.


“…….”


수정공은, 그 이름을 떠올렸다.


“설마 시간이 너무 지나서 변해버렸다 해도 못 알아볼 리 없지만 말이지. 걱정할 수밖에 없잖아?”


푸핫, 하고 바람 빠진 소리를 낸 레네가 수정공을 마주 보았다. 언제 그랬냐는 듯 장난기 어린 재기발랄한 미소에 그가 한숨을 쉬었다.


“…그대들의 친구는 좋겠어.”


지친 것이 역력한 숨결마다 말로 할 수 없는 무언가가 적잖이 스며 있었다. 그의 한숨은 곧 따뜻한 바람을 따라 부드러운 흐름에 섞여들었다.

그래서 레네는 그저, 이렇게만 말했던 것이다.


“수정공이 구하고 싶어하는 사람도 그럴걸.”


소중하니까 만나고 싶은 거고.

그 마음은 수정공이 가장 잘 알고 있을 것이었다. 수정공은 잠시 무언가를 생각했다.


“……그래준다면 나 역시… 이 모든 일을 마무리 짓고자 하는 힘이 생겨나. 그리고 지금의 나는 사정이 있어 그 사람을 정면으로 마주할 수 없지만, 언젠가 이렇게 그 사람의 다음 여행 계획을 물어보고 싶다.”


그의 만면에 알 수 없는 미소가 피어올랐다. 빛과 바람에 오래 노출되어 풍화되는 꽃잎 같았다. 동시에 척박한 환경에서도 그치지 않고 솟아나는 샘물과도 같았다.


“그 여행에 나도 함께할 수 있다면 정말 기쁠 거야.”


대지를 누비고, 바다를 건너고.

때로는 유구한 바람을 타고 하늘을 날고.

참으로 눈부시고 아득한 꿈을…….



그들은, 믿으려고 노력했다.





원더메어와 보탈리아에 상시거주 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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