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백이 하행과 함께 몸져누운 상행을 간호하다 찬석에게 도움을 요청하러 간 후 얼마 뒤, 그는 찬석뿐만 아니라 다른 캡틴들까지 전부 데리고 다시 하행의 집으로 왔다.


그들은 상행의 상태를 보자마자 그가 꽤 심한 감기에 걸린 것이라 생각해 부락의 공용 창고에 있는 약재들을 가져와 약을 달이기 시작했다. 약이 완성되자 찬석은 그것을 호호 불어 식힌 후 하행에게 건네주었다.


하행은 처음에 이걸 왜 날 주나 싶었지만 자신이 상행의 동생이니 직접 먹여주라고 배려하는 것이란 걸 깨닫고 찬석이 건네는 약그릇을 받아들었다. 그리고 그것을 상행에게 먹이기 위해 잠든 상행을 흔들어 깨웠다.



" 상행, 많이 힘들겠지만 잠시만 일어나서 이것 좀 마셔봐. 찬석이랑 금강단 캡틴들이 너 주려고 다 같이 끓인 약이야. "


" 으으... "



하행의 부름에 상행은 겨우 눈을 떠서 몸을 일으키려고 했다. 하지만 그조차도 너무 힘들어하자 찬석이 얼른 형제의 곁으로 다가와 상행의 등을 손으로 받치고 힘을 주어 그가 일어날 수 있도록 도와주었다.


상행이 이부자리에 일어나 앉자 하행은 아직 뜨거운 김이 올라오는 약을 한 번 더 불어 식히고 상행의 입에 그릇을 가져다 대어 그가 편히 약을 마실 수 있도록 천천히 기울여주었다.



꿀꺽.. 꿀꺽..



" 하아....... "


" 어.. 어때, 상행...? 좀 괜찮아? "



약을 한 방울도 남김없이 다 마신 상행이 긴 숨을 내뱉자 하행은 그에게 어떠냐고 물었다. 하지만 약을 마신 바로 직후라 그런지 상행은 딱히 나아졌다는 기분이 들지 않았다.


그러나 자신을 위해서 이렇게 많은 사람들이 이 늦은 밤에 고생해 줬는데 그 약이 효과가 없다는 말은 차마 할 수가 없었다. 그는 열 때문에 잘 움직여지지도 않는 얼굴 근육을 겨우 움직여 옅은 미소를 지어 보이며 말했다.



" 확실히.. 아까보다는 훨씬 나아진 것 같군요. 여러분, 정말 고맙습니다. "



하지만 그의 얼굴을 뚫어지게 쳐다보고 있던 찬석은 상행이 거짓말을 하고 있다는 것을 바로 알아차렸다. 그가 자신들 눈치는 보지 말고 제대로 말하라고 하자 상행은 그제야 별로 효과가 없는 것 같다고 솔직하게 대답했다. 그러자 억새가 곤란한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 그럴 수가... 정말 큰일이네요. 감기에 최고로 좋은 약재들만 엄선해서 달인 건데, 그게 전혀 효과가 없다니... "


" 혹시 감기가 아닌 거 아니야? "



동백이 그렇게 말하자 사비가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대답했다.



" 그건 아니야, 동백 오빠. 내 천리안으로 봤을 때 지금 상행님이 걸린 병은 분명 감기가 맞아. 그런데 조금 이상하긴 하네? 뭐랄까, 감기는 부가적으로 딸려온 느낌이라고 해야 될까? "


" 엥? 그게 무슨 소리야? 딸려오다니, 뭐에? "



사비의 말에 동백이 눈을 동그랗게 뜨고 되물었다. 찬석과 다른 캡틴들, 그리고 하행도 동시에 사비에게 이목을 집중했지만 그녀는 고개를 갸우뚱 기울이며 말했다.



" 글쎄...? 분명한 건 이 감기 뒤에 숨어있는 더 큰 뭔가가 있는데, 그게 자신의 정체를 감추려고 감기로 위장해서 나타났다고 해야 하나? 그런데 그게 뭔지는 나도 잘 모르겠어. "



금강부락 내에서 집안 대대로 신기를 내려받아왔고, 거기에 신묘한 워글의 힘까지 더해 천리안을 지니게 된 아이인 사비가 그렇게 말하자 그곳에 모인 사람들은 상행이 예상보다 더 기묘한 일에 얽혔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어 다들 심각한 표정이 되었다.


하지만 어쨌든 우선 눈에 보이는 병명은 확실히 감기라고 하니 일단 그것을 낫게 하는 것이 급선무라고 판단했다. 조금 고민하던 찬석이 다른 약재를 써서 한 번 더 약을 달여보는 것이 어떻겠냐는 말을 꺼내려 할 때,



" 콜록, 콜록, 콜록-! "



상행이 손으로 입을 막고 쿨럭쿨럭 기침을 하자 찬석이 아차- 하며 미안한 기색을 비췄다.



" 이런, 저희끼리 떠드느라 정작 환자인 상행 씨를 간과하고 있었네요...! 정말 죄송합니다, 상행 씨. 저희는 이만 물러갈 테니 편히 누워서 쉬고 계세요. "



찬석은 캡틴들을 먼저 밖으로 내보내고 아까 약을 달이기 위해 이것저것 가져온 도구들을 주섬주섬 챙겨 그도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그는 자신을 배웅하려고 문 앞까지 같이 나온 하행에게 말했다.



" 하행 형님, 혹시 나중에라도 약효가 나타날지 모르니까 형님이 계속 상행 씨의 상태를 살펴봐주고 있어. 우리는 회의실로 가서 다른 방법을 같이 생각해 볼게. "


" 알았어 찬석아. 이렇게 늦은 시간까지 여러 가지로 도와줘서 정말 고마워. "



하행이 그렇게 말하자 찬석은 너무 신경 쓰지 말라고 하고는 혹시 무슨 일 있거든 언제든지 자신을 부르러 와달라고 덧붙였다. 하행은 고개를 끄덕이고 집 울타리를 나서는 찬석 일행에게 손을 흔들어 조심히 가라고 인사했다.


그들을 보내고 방으로 돌아온 하행은 아까 자신이 나가기 전에 자리에 눕혀준 상행이 그 짧은 사이에 다시 잠들어 있는 것을 발견했다. 상행 곁에 무릎을 꿇고 앉은 그는 잠시 상행의 얼굴을 가만히 들여다보다가 팔을 뻗어 형의 이마에 놓인 물수건에 손을 살짝 올려보았다.



" ... 물수건, 또 새걸로 갈아줘야겠네... "



하행은 슬슬 양동이의 물도 새로 담아와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는 일단 상행 이마의 물수건을 가져가고 다른 수건을 적셔서 놓아준 후 양동이를 들고 끙차- 일어서서 욕실로 향했다.


잠시 방에 홀로 남게 된 상행은 온몸을 괴롭히는 열과 싸우느라 쌕쌕거리며 힘겨운 호흡을 이어나가고 있었다.






...



" ... 이여... 을 ... 뜨거라... "


" ... "


" 포푸니크의 캡틴이여, 눈을 뜨거라. "


" ...? "



상행은 누군가가 자신을 부르는 소리에 의식이 돌아왔다. 그는 서서히 눈을 뜨면서 이 목소리를 언젠가 한 번 들어본 적이 있다고 생각했다. 아마 그리 오래되지는 않았던 것 같은데...



" !!! 신오... 님?! "



눈을 뜨자마자 보이는 황금빛 고리에 상행은 자신 앞의 존재에게 바짝 엎드려 절을 했다. 그러자 그 존재는 상행에게 고개를 들라 말했지만 상행은 무언가 찔리는 일이 있는지 차마 그러지 못했다. 황금빛 고리를 지닌 존재는 다시 상행에게 말했다.



" 포푸니크의 캡틴이여. 내 분명, 며칠 전 너의 꿈에 목소리로 나타나 이 상황을 피할 수 있는 방법을 친히 알려주었지 않은가? 어째서 내 말대로 하지 않은 것이냐? "


" 신오님, 그것은... "



상행은 잠시 말하기를 머뭇거렸으나 용기를 내어 고개를 들고 그 존재를 마주 보며 대답했다.



" ... 아시지 않습니까? 신오님께서 말씀하신 그 방법은 제 동생 하행에게 큰 슬픔을 안겨다 줄 것이라는걸요. 그는 이미 히스이에 오기 전부터 저 때문에 많은 고통을 받아왔습니다. 그러니 저 하나의 안위를 위해서 그의 눈에서 눈물이 나오게 할 수는 없습니다. 게다가 그 방법은 그 아이에게도 희생을 강요해야 하는 것이 아닙니까? "



위대하고 거룩한 존재를 직접 마주한다는 두려움에 상행의 목소리는 조금 떨리고 있었지만 그는 자신의 뜻만은 분명하게 전달하고 싶었기에 자신을 내려다보고 있는 존재의 눈을 피하지 않고 똑바로 보며 말했다.


그러자 그 존재는 상행의 얼굴을 좀 더 지그시 바라보더니 공중에 떠있는 그대로 상행의 앞으로 조금 다가가며 말했다.



" 하지만 그것은 이미 결정된 그 아이의 운명이다. 네가 동생을 위한답시고 억지로 그 일을 모른 척하고 피해 봤자, 언젠가 그 아이는 정해진 수순대로 저절로 변화하게 될 것이야. "


" 그, 그런...! "


" 그리고, 네 동생이 눈물 흘리는 것을 보고 싶지 않다고 하였느냐? 그러면 지금 병에 걸려 정신을 잃은 채 누워있는 너를 바로 곁에서 지켜보는 그의 심정은 과연 어떨 것 같으냐? "


" ...! "



상행은 순간 꿀 먹은 벙어리가 되어버렸다. 분명 하행은 지금도 자신의 곁을 지키면서 형이 이렇게 된 것은 본인의 잘못이라고 자책하고 있겠지? 사실 자신이 이토록 앓게 된 진짜 원인은 따로 있는데 말이다.


상행이 아무 대답 없이 무릎 꿇고 고개를 푹 숙이고 있자 그 존재는 다시 입을 열었다.



" 포푸니크의 캡틴, 상행이여. 지금은 첫 번째라 감기로 끝나고 말 것이지만, 다음에 두 번째 고비가 찾아온다면 그때는 어떤 형태로 너의 몸을 잠식할지 나도 장담할 수가 없다. 그러니 더 늦기 전에 그만 마음을 정하고 내가 일러준 대로 하거라. 이것은 분명한 경고이니라. "


" 신오님... "


" 그럼 나는 슬슬 돌아가 보마. 가능하다면 너의 병도 고쳐주고 싶다만 이미 한 번 너의 생명에 관여한 적이 있으니 더는 무리로구나. 어찌 되었든 빠른 시일 안에 회복되기를 바란다. 그럼 이만... "



말을 마친 존재는 몸에서 환한 빛을 뿜어 지난번에도 그랬듯이 상행의 몸을 감싸 그의 의식을 흐리게 만들었다. 상행은 따스한 기운에 저항도 못하고 서서히 눈을 감았다.








...



중얼.. 중얼.. 중얼..



" ? "



잠에서 깬 상행은 옆에서 들려오는 누군가의 목소리에 아직 눈을 뜨지 않은 상태로 귀만 쫑긋 세운 채 그의 중얼거림을 계속 들었다. 중얼거렸다기엔 소리가 좀 많이 크긴 했지만...



" 하~ 진짜... 내가 왜 하행 형님도 아니고 이 아저씨를 간병하고 있어야 하는 거야? 찬석 형님은 그 많은 대원들을 놔두고 왜 굳~이 싫다는 나더러 이런 일을 억지로 시키냐고?! 차라리 아픈 사람이 하행 형님이었으면 기쁜 마음으로 이것저것 해줬을 텐데! ... 근데 이 아저씨 왜 아까부터 미동도 없어? 설마 죽었나?! "


" ... 안 죽었어요, 동백님. "


" 히.. 히이익-!? "



누가 들어도 목소리의 주인은 동백이었고 상행은 그의 혼잣말에 어이가 없어서 눈을 번쩍 뜨고 소리가 난 쪽으로 고개를 돌리며 말했다.


그러자 동백은 너무 놀라서 양반다리를 하고 앉은 자세 그대로 공중부양하듯이 펄쩍 튀어 올랐다가 다시 꿍- 내려앉으며 쿵쿵 뛰는 가슴을 두 손으로 부여잡고 상행에게 말했다.



" 까, 깜짝이야! 뭐야, 아저씨! 언제 깼어?! "


" 방금 동백님이 투덜거리시는 거 듣고요. 정말 잘~ 들리던데요? 설마 대놓고 저 들으라고 일부러 목소리를 높인 것도 아니실 텐데 말이죠? "


" 아, 음.. 그, 그건...! "



아무리 혼잣말로 되는 대로 중얼거렸다지만 그 내용을 상행이 들었다 하니 동백도 양심이 찔리긴 했는지 눈동자를 굴려 상행의 시선을 피하고 말을 더듬거리며 머릿속으로 그럴듯한 변명거리를 찾기 시작했다.


그러나 적당한 말을 찾지 못했는지 다른 주제로 화제를 돌리려고 슬쩍 상행의 눈치를 살피다가 상행이 덮고 있는 이불 한쪽 귀퉁이에 놓인 포푸니크 모양 자수를 보고 말했다.



" 오.. 오오~! 상행 아저씨, 이불에 그 자수, 아저씨가 직접 놓은 거야? "


" 아.. 네, 뭐... 실제 포푸니크만큼 귀엽게 놓아주지는 못했지만요... "


" 에이, 아니야! 진짜 엄~청 귀엽게 잘 놓았는데? 그런데 그 이불, 천관산 오두막에 있을 때부터 쓰던 거 맞지? 그때는 분명 그 자수 없던 걸로 기억하는데 언제 놓은 거야? "



동백은 속으로 '아싸~ 화제 돌리기 성공~!' 하며 능청스럽게 질문을 이어나갔지만 상행은 그의 속마음을 다 꿰뚫고 있었다. 하지만 그 모습이 또 은근히 귀여워서 그냥 넘어가 주자 생각하며 피식 웃고는 동백의 질문에 대답했다.



" 포푸니크가 천관산에서 죽은 뒤 제가 다친 하행을 먼저 금강부락에 보내고 저도 뒤따라 이곳에 이사 왔을 때 잠시 저 혼자서 지낸 적이 있었잖아요? "


" 응, 그랬지. "


" 그때 소중한 존재를 잃은 직후라 그랬는지.. 굉장히 마음이 허하더라고요... 그렇다고 아무것도 안 하고 홀로 방에서 덩그러니 앉아 있으려니 정말 울어버릴 것 같아서 뭐라도 하자는 생각에 아무거나 집어 들고 손을 이리저리 꼼지락거리다 보니 저도 모르게 이불에 포푸니크의 자수가 놓여 있지 뭡니까, 하하... "


" 크흡.. 흑...! 우오오오오오-!!! "



상행은 가벼운 넋두리를 하듯이 담담하게 말했지만 동백은 그가 겪은 일이 남 일 같지 않아서 두 손으로 얼굴을 가리고 큰 소리로 오열했다. 그야 포푸니크의 죽음 직전에 그 역시 자신이 돌보던 동굴의 왕 붐볼을 지키지 못하고 다크트리니티에게 빼앗겨 버렸으니까.


동백이 엉엉 울기 시작하자 상행은 자신이 그의 트라우마를 건드렸다는 것을 깨닫고 그를 달래주려 했지만 이번엔 그가 아까와는 반대 입장에 처해 무슨 말을 꺼내야 좋을지 모를 난감한 상황이 되어버렸다.


그때 자신이 잠들어 있을 때 동백이 읽고 있었던 것 같은 책 한 권이 상행의 눈에 들어왔다. 그런데 언듯 봐도 책 표지가 히스이에서 만들어졌다고는 생각되지 않는 재질의 것이어서 상행은 그 책에 대해서 물어봤다. 그러자 동백이 갑자기 울음을 뚝 그치더니 얼굴에서 손을 내리고 눈을 반짝 빛내며 대답했다.



" 앗, 역시 아저씨도 외국 출신이라 바로 알아보는구나? 이거, 예전에 축복마을에 연승가도 하러 갔을 때 라벤 박사한테서 빌린 소설책 중 하나야. 외국 책이긴 하지만 그 양반이 이곳 사람들도 읽기 편하게 하나하나 히스이어로 다 번역을 해놨다니까?! "


" 오... 그래요? 라벤 박사님, 포켓몬 조사와 연구만으로도 꽤 바쁘실 텐데 그런 작업까지 하고 계셨다니, 정말 대단하신걸요? 그런데 동백님께서 소설 읽는 것에 관심이 있으셨을 줄은 몰랐네요? "



상행이 의외라는 듯 말하자 동백은 팔짱을 턱 끼고 엣헴~! 하면서 우쭐대며 계속 말했다.



" 날 뭘로 보고! 이래 봬도 나, 꽤 다양한 분야에 취미를 두고 있다고! 특히 소설은 다양한 사람들의 창의력을 엿보는 재미가 쏠쏠해서 정말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읽을 수 있다니까? "


" 그, 그래요? "


" 그보다 아저씨, 이거 좀 봐봐! 지금 내가 읽고 있는 이 책, 라이히 작가의 [Galarian in Lumiose]라는 책인데, 여기 나오는 여주인공의 삽화가 우리 아는 누구랑 닮지 않았어? "



동백이 책을 상행 쪽으로 펼쳐서 그 삽화를 보여주자 상행은 그가 말하는 사람이 누구인지를 바로 알아채고 고개를 끄덕였다.



" 오... 이건 누가 봐도 윤슬님이네요. 이 정도면 누가 윤슬님 사진을 보고 그대로 그렸다고 해도 될 만큼 꼭 닮았는걸요? 게다가 이 호브라는 남자 주인공, 여자 주인공인 히카리와 윤슬님만큼 닮지는 않고 오히려 완전히 다른 얼굴이지만 어쩐지 라벤 박사님의 기운이 풍기는 것 같지 않나요? "


" 그렇지? 나도 라벤 박사가 가진 책들 중에 뭘 빌려 갈지 이거저거 뒤적이다가 글보다 이 삽화들이 눈에 띄어서 신기한 마음에 빌려온 건데, 내용도 꽤 재밌더라고? 근데 아쉬운 점은 인물들 대사 중에선 번역이 안 된 것도 있어서 박사한테 일일이 물어봐야 하는데, 아저씨도 알다시피 몇 달 전 축복마을 전체가 쑥대밭이 된 이후론 그곳에 함부로 출입할 수 없게 되어서 중간부터 영 진도를 나갈 수가 없네... "



동백이 정말 아쉬워하며 그렇게 말하자 상행은 그 사건이 자신들 때문에 일어난 것임을 알기 때문에 조금 뜨끔했고 그에게도 살짝 죄책감이 들었다. 그는 괜히 목이 따가운 척하며 큼큼 헛기침을 하고는 동백에게 넌지시 말했다.



" 동백님, 괜찮다면 나중에 제가 그 부분을 번역해서 읽어드릴까요? 저도 가라르어권 출신이니 대사 번역 정도는 어렵지 않게 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만. "


" 헉! 그, 그래?! 상행 아저씨도 라벤 박사처럼 가라르 출신이었어?! "


" 아니요, 저는 하나지방 사람이었지만 하나의 언어가 대부분 가라르에서 넘어왔기 때문에 웬만한 건 거의 다 일치합니다. 억양이나 몇몇 단어가 다른 부분은 있지만요. "



상행의 말에 동백은 아까보다 더 눈을 초롱초롱 빛내며 상행의 손을 덥석 잡고 위아래로 붕붕 휘두르며 소리쳤다.



" 그래주면 정말 고맙지! 이 책 엄청 재밌는데 항상 대사 부분에서 막혀서 몇십 번째 되돌려보고 있는지 모른다니까?! 고마워 아저씨, 진짜진짜 고마워!!! "


" 으악! 아, 알았으니까 이 손은 놓고 말씀하세요! 이러다 감기 옮으면 어쩌시려고...! "



동백의 부산스러운 행동에 상행이 정신이 없어서 그렇게 말하자 동백은 얼른 그의 손을 놓고 옆의 물수건으로 제 손을 슥슥 닦았다. 상행은 하하... 하며 너털웃음을 짓다가 그제야 뭔가 생각난 듯 주변을 둘러보더니 동백에게 물었다.



" 그런데 동백님, 하행은 어디에 있나요? "


" 그걸 이제서야 묻는 거야...? 솔직히 일어나자마자 찾을 줄 알았는데, 아저씨도 은근 둔한 구석이 있구나? 하행 형님은 드레디어랑 같이 약재를 구하러 나갔어. 아저씨가 감기에 걸린 게 자기 때문이라면서 자기가 책임지고 아저씨 병을 낫게 해줘야겠다면서 말이야. "


" 아이고, 세상에... 하행은 역시 계속 그런 생각을 하고 있었군요... "



동백에게서 하행의 말을 전해 들은 상행이 동생의 심리 상태를 걱정하며 조금 풀이 죽은 듯 중얼거리자 동백은 조금 이해가 안 간다는 표정을 하고 말했다.



" 아니이~ 그런데 참 이상하단 말이야? 천관산이나 순백동토처럼 그냥 가만히만 있어도 얼어 죽을 것 같은 곳에서 냉수마찰을 즐겨도 지금껏 멀쩡했던 양반이, 진흙탕에 빠져서든 목욕하다 찬물을 얻어맞았든 그런 하찮은 이유로 갑자기 이런 심한 감기에 걸린다는 게 말이 돼? "


" 아하하... 그렇게 말입니다... "



상행은 적당히 얼버무리려다가 만약 자신이 진짜 평범하게 감기에 걸렸었다면 이런 이유이지 않았을까 싶어 괜히 아련한 표정이 되어 말했다.



" 만약 제가 하행을 만나지 못하고 계속 저 혼자 지냈었다면... 아마 전 죽을 때까지 감기 같은 것은 걸리지 않았지도 모릅니다. "


" 엥...? 그건 또 무슨 소리야? "



동백이 고개를 갸우뚱하며 묻자 상행이 옛일을 회상하며 말을 이어나갔다.



" 그러니까... 제가 예전의 기억을 잃고 히스이에 떨어진 지 얼마 안 되었을 때였습니다. 지금껏 살던 곳과 너무 다른 기후에 적응을 하지 못해서인지 그때도 한번 심한 감기에 걸린 적이 있었는데 정말 죽을 것 같이 아픈 상황에서도 그때의 진주부락 사람들은 아직 말도 제대로 안 통하는 저를 매우 두려워해서 그 누구도 절 보살펴주러 오지 않았어요. "


" 어.. 음... 그거 되게 서운했겠네... "


" 하지만 딱 한 분, 아직 어린아이셨던 주혜님만은 아무런 편견도 가지지 않은 순수한 눈빛을 하고 저에게 먼저 다가와 주셨습니다. 주혜님은 주변 어른들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손수 약을 달여서 제게 먹여주시기도 하고 병상에 누워만 있는 제가 심심해 보였는지, 옆에 앉아서 히스이의 말도 가르쳐 주셨어요. "


"  그런 일이 있었는 줄은 몰랐네... 그래서 아저씨가 주혜 말이라면 뭐든 따르는구나? "



상행은 고개를 끄덕이고 계속 말했다.



" 비록 그때는 주혜님 덕분에 다시 일어설 수 있었지만 저는 그때 확실히 배웠죠. '아, 외지인인 내가 이곳에서 살아남기 위해서는 무슨 일이 있어도 약해 보여서는 안되겠구나. 만약 조금이라도 빈틈을 보이면 언제 이곳 사람들에게 버림받을지도 몰라.' 그런 생각에 그 후로는 몸이 좀 이상하다 싶으면 절대 아프지 말라고 저 스스로에게 최면을 걸었습니다. "


" ... "


" 그리고 제가 캡틴이 되어 이곳에서 어느 정도 자리를 잡고 주변에 아는 지인이 많아졌어도, 저는 여전히 많은 사람들 틈에 섞여 왁자지껄 떠드는 것보단 홀로 조용히 겉도는 것을 좋아했습니다. 사실 지금 돌이켜보면 그걸 진정으로 좋아하는 것은 아니었지만... 제가 조금이라도 아픈 모습을 보이면 제 곁에 있는 사람들이 절 걱정해서 괜히 마음 쓰게 하는 것을 보기가 싫어서 그랬는지도 몰라요. "


" ... 상행 아저씨... "



동백은 지금껏 자기가 봐온 바로는 상행은 참 따분하고 속을 알 수 없는 이상한 사람이라 여겼는데 그런 속사정이 있는 줄도 모르고 그렇게 생각했던 것이 미안해서 눈물을 찔끔 흘렸다. 상행은 그의 마음을 읽었는지 괜찮다 말하며 그를 위로해 주고 다시 이야기를 했다.



" 하지만 몇 달 전, 제 기억 속에서 영영 잊혀질 뻔 했던 하행이 어느 날 갑자기 제 앞에 기적처럼 나타나 주었어요. 하행은 제게 남은 유일한 가족이자 쌍둥이 형제, 저의.. 소중한 반쪽... 그래서 저는 그에게만큼은 온전히 기댈 수 있겠다 싶어 그동안 참아왔던 병이 지금 한 번에 터진 걸지도 모릅니다. "



상행의 이야기가 끝나자 동백은 복잡 미묘한 감정에 사로잡혀 자기도 모르게 혀를 내두르고 숨을 스읍- 들이키며 말했다.



" 그래? 뭐랄까 참... 하행 형님과 대화했을 때도 살짝 느꼈지만 말이야, 상행 아저씨랑 하행 형님은 단순한 형제 사이라고 하기에는 뭔가 남달라도 한~참 다른 것 같아. 잘 설명은 못하겠지만... 나랑 찬석 형님 사이에선 절대로 볼 수 없을 뭔가가 있는 것 같단 말이지? "


" 하하.. 그런가요...? 그럴지도 모르겠네요. "



긴 이야기를 마친 상행은 조금 괜찮은 것 같았던 몸이 다시 으슬으슬 해지는 것을 느꼈고 목도 따끔따끔 아파와서 콜록콜록 기침을 했다.


그제야 동백은 자기가 오랫동안 상행 이마의 물수건도 갈아주지 않고 있었다는 걸 깨닫고 재빨리 새 수건을 물에 적셔서 바꿔주었다.


그는 고개를 들어 창밖을 슬쩍 내다보곤 해가 떠 있는 위치로 대충 시간을 파악해 점심 먹을 때가 되었다고 생각해 상행에게 죽이라도 끓여주려고 자리에서 일어나 부엌으로 갔다.


그때 아침 일찍부터 드레디어와 홍련습지로 나갔던 하행이 약초를 한가득 담은 망태기를 등에 진 채 문을 벌컥 열고 방으로 들어오며 동백을 불렀다.



" 동백아, 상행의 상태는 좀 어ㄸ.. 앗, 상행! 일어나 있었구나! 몸은 좀 괜찮아? "


" 아... 하행, 왔어요? "



하행이 눈을 뜨고 있는 상행을 보고 반가운 마음에 그에게 바짝 다가가며 묻자 상행은 그를 걱정시키지 않으려 바로 고개를 끄덕였다. 여전히 아프기는 했으나 확실히 어젯밤보다는 나아진 듯하니까.


부엌에서 점심을 준비하던 동백도 하행이 들어오는 소리를 듣고 다시 나와 하행을 보고 말했다.



" 앗, 마침 잘 왔어, 하행 형님! 형님도 아직 점심 안 먹었지? 지금 내가 차릴 테니까 같이 먹자. 그리고 내가 형님이 구해온 약초로 약 만드는 법도 알려줄 테니까 밥 먹고 바로 상행 아저씨 약도 달여서 먹여주자고! "



하행은 알겠다고 대답하고 점심 준비를 돕기 위해 망태기를 방 한쪽 구석에 내려놓고 동백을 따라 부엌으로 들어갔다.



... 푸니야링-!


" 포푸니...? "



하행이 시야에서 보이지 않게 되자 망태기에 매달려 있던 하행의 포푸니가 톳- 내려와 상행이 덮고 있는 이불 속으로 쏙 들어갔다.


포푸니는 꼬물꼬물 상행의 가슴 쪽으로 기어올라가더니 상행에게 자신이 보이도록 얼굴만 이불 바깥으로 뿅 내밀었다. 그리고 냥냥거리며 상행에게 뭐라고 말하기 시작했다.



푸니.. 푸냐냥-!


" 포푸니... 전 괜찮습니다. 하행과 당신을 위해서라면 저는 이보다 더 큰 병을 앓는다 하더라도 참아낼 수 있어요. 그러니 당신이 저를 위해서 희생하실 필요는 없습니다. "


냐리잉...


" 비록 신오님께서는 당신이 변하는 것은 어쩔 수 없으니 한시라도 빨리 일을 진행하라 하셨지만... 그게 언제가 되든 당신의 자아가 존재할 수 있도록 허락된 시간만큼이라도 마음껏 당신의 삶을 누리셔야죠. 그러니 제 눈치 보지 마시고 앞으로도 하행과 함께 즐거운 시간을 보내도록 하세요. 알겠죠, 포푸니? "



비록 상행은 여전히 포푸니의 말을 알아들을 수 없었지만 그녀가 자신을 걱정해 준다는 것만큼은 확실히 느낄 수 있었다. 그래서 그는 한 손을 들어 포푸니의 동그란 머리 위에 올려놓고 부드럽게 쓰다듬으며 그렇게 말했다.



푸니.. 잉...



그러나 포푸니는 여전히 울상을 지으며 기다란 귀를 기운 없이 축 늘어뜨렸다. 상행은 포푸니의 머리에서 손을 거두고 그녀를 두 손으로 들어 이불 밖으로 들어내 제 옆에 살포시 내려놓으며 말했다.



" 포푸니, 미안하지만 저 아주 잠시만 눈 좀 붙일게요. 아까 말을 좀 많이 해서인지.. 살짝.. 졸..리..군요... "



상행은 말을 마치자마자 스르르 눈을 감고 바로 잠에 빠져들었다.



" z.. zz... "


... 푸니.



잠든 상행의 얼굴을 빤히 바라보던 포푸니는 짧은 울음소리를 내고 상행 옆에 조금 비어있는 이부자리에 자리를 잡고 몸을 말아 그녀도 눈을 붙였다.


곧 포푸니는 새근새근 숨소리를 내며 잠에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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