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신 차리자. 야미쿠모는 생각했다. 


벌써 며칠째 야미쿠모의 기분은 최저를 달리고 있었다. 그녀는 뉴스를 확인하는 것을 그만뒀고 밖으로 나가지도 않은 채 집안일에 집중했다. 바쿠고 카츠키와의 모든 연관성을 끊어내고 싶었다. 


바쿠고 카츠키가 잘 되든 못 되든 나와 아무 상관 없다. 중요한 것은 유우와의 일상이다. 수없이 그렇게 되뇌어봤지만, 마음은 갈수록 심란해져 갔다. 


불안한 마음에 동조한 카드의 정령들은 폭주 때처럼 술렁이기 시작했다. 야미쿠모는 기분전환 삼아 불러낸 윈디의 바람이 평소보다 거칠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리고 그런 자신을 바라보는 유우의 불안한 눈빛도. 


결국 야미쿠모는 인정하고 말았다. 그녀는 과거에서 벗어나지 못했고, 실시간으로 휘말리고 있는 중이었다. 빨리 이 상황을 해결해야 했다. 


"유우, 우리 밖에 나갈까? 요 근처 호스 시에 가서 맛있는 거 사먹자. 너 좋아하는 사과 잼이랑 팬케이크도 사고." 

"괜찮아?" 

"물론." 


야미쿠모는 유우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손가락이 뭉툭한 뿔을 매만졌다. 


"가면... 내가 왜 체육대회 때 이상했는지 말해줄게." 


아직 유우에게 바쿠고 카츠키에 대해 말하지 못했다. 이제는 그 사실을 털어놓아야 할 때다. 바쿠고에 대해서도, 위저드에 대해서도. 



호스 시는 야미쿠모와 유우가 사는 도시에서 조금 떨어진 곳에 위치해 있었다. 기분 전환하러 나오기에 딱 좋을 정도의 거리였다. 



간만에 찾은 호스 시는 사람이 그리 많지 않았고 곳곳에 히어로들이 순찰하고 있었다. 아마 히어로 살인마가 돌아다니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스테인이라 명명된 그 남자는 공교롭게도 유에이 체육대회 날 호스에서 히어로 잉게니움을 습격했다. 그러나 야미쿠모는 히어로 킬러에 대해 그리 걱정하지 않았다. 히어로 킬러는 철저하게 히어로만을 노리며, 민간인을 미끼로 하는 사례는 아직까지 없었기 때문이다. 행동양상을 볼 때, 히어로를 배척하는 사상을 가진 단독범일 확률이 높았다. 


'으슥한 곳에 히어로를 유인해, 날붙이를 이용한 암살. 반드시 피를 보는 걸 보면 피에 구애되는 면이 있다. 개성일려나.' 


만의 하나, 스테인의 칼날이 두 사람을 향해온다고 해도, 그 남자가 유우를 상처입힐 일은 없을 것이다. 야미쿠모는 자신들을 감싼 '윈디'의 바람을 체크했다. 대외적으로 야미쿠모의 개성은 이 바람으로 되어있다. 


'위저드와 겹치는 게 좀 걸리지만 말이야.' 


위저드의 개성은 오리무중이지만, 잘 쓰던 '개성'이 바람이라는 건 잘 알려진 사실이다. 윈디가 그만큼 유용한 카드라는 증거이기도 했다. 


"우리 어디 갈까? 유우가 골라볼래?" 

"으-음... 그럼, 사과주스랑 팬케이크 먹으러 가자!" 

"그래. 그럼 저쪽 카페로 가볼까?" 


대비를 한 것이 무색하게, 스테인이 나타나는 일은 없었다. 야미쿠모와 유우에게도, 히어로들에게도 평화로운 하루가 천천히 지나갔다. 


카페와 인형뽑기 샵, 노래방을 거친 야미쿠모와 유우는 마침내 공원 벤치에 앉았다. 손에는 인형과 음료수 따위가 잔뜩 들려 있었다. 주위에는 사람 하나 없었다. 


"일루전." 


야미쿠모가 중얼거렸다. 즉시 마력이 퍼져나가 천막처럼 주위를 덮었다. 이제 한동안 사람들은 이 장소를 인식하지 못하고 빙 돌아갈 것이다. 


"......" 


야미쿠모는 그러고 나서도 얼마동안 말없이 커피를 마셨다. 미릿속으로 천천히 할 말을 정리해야 했다. 유우는 토끼 인형을 안은 채 조용히 그런 야미쿠모를 바라보았다. 아이의 붉은 눈동자에는 어떤 각오가 서려 있었으나 야미쿠모는 눈치채지 못했다. 


"유우, 나 할 이야기가 있어." 


마침내 야미쿠모가 입을 열었다. 


"나는 있지. 무개성으로 태어났어. 누구나 가지고 태어나는 개성을, 가지지 못하고 태어났어. 그건, 내가 남들보다 못한 위치에 있다는 뜻이야." 


야미쿠모는 앞을 응시했다. 초록색 눈동자가 어둡게 가라앉았다. 


"나는 히어로가 되고 싶었는데, 무개성이라 그럴 수 없다고 다들 말했어. 나는 아무 힘도 없었어. 그런 나를 사람들은 무시하고 괴롭혔어. 그 중 가장 심했던 게 바쿠고 카츠키라는 아이였어. 심심하면 나를 때리고 놀렸지..." 


주먹이 저절로 꽉 쥐어진다. 데쿠라고 부르며 자신을 향해 폭파를 날리던 녀석의 모습이 생생하게 떠올랐다. 


공교롭게도 바쿠고의 엄마 미츠키 씨는 이즈쿠의 어머니 인코의 친구였다. 그들은 자연히 자식들도 친구가 되길 바랬고, 이즈쿠는 자신의 의사에 상관없이 바쿠고와 자주 마주쳤다. 


가끔은 엄마에게 진실을 말할까 생각한 적도 있었다. 바쿠고가 자신을 괴롭힌다고. 그러나 울면서 꾸역꾸역 음식을 먹어치우는 엄마를 보고 있으면 그런 말이 쏙 들어갔다. 


엄마가 갈수록 뚱뚱해지는 것은 이즈쿠 때문이었다. 그녀는 매일 울고 괴로워했다. 여기서 더 엄마를 실망시키고 싶지 않았다. 


만약 그 때 용기를 내서 털어놨다면, 자신의 인생은 달라졌을까? 


"...9살에 엄마가 돌아가시고, 난 바쿠고네 집에 맡겨졌어. 그 후는 정말 끔찍했어. 바쿠고는 점점 심하게 날... 괴롭혔거든. 그러다가 말이야, 츠키시로 유키토란 사람을 만났어." 


상냥한 청년을 떠올린 야미쿠모가 저도 모르게 미소를 지었다. 


"유키토 씨는 좋은 사람이었어. 정말로, 상냥한 사람이었어. 그 사람도 나 같은 무개성이라서, 서로 비슷해서 더 좋았던 것 같아." 


무개성으로 살아가는 고충을 잘 아는 사람. 그러면서도 그 모든 것을 웃으며 흘려보내는 사람. 나처럼 끔찍한 환경을 겪어왔을 텐데도 어떻게 그렇게 웃을 수 있는지. 한때는 그게 너무나 대단해 보였다. 


그것이 '유에'의 위장이라는 걸 안 후에는 사그라들었지만. 


그 후 멋대로 배신감과 허탈함을 느끼는 자신을 쫓아온 유키토가 영문도 모르고 위로의 말을 건넸던 것은 이즈쿠 인생의 흑역사 중 하나였다. 


그래, 어쩌면... 


"첫사랑... 이었던 것 같아. 아마." 


이즈쿠는 유키토를 좋아했다. 


"카드를 만난 것도 그 사람의 집에서였어. 이 초록색 카드 있지? 이건 원래 크로우 리드라는 엄청 대단한 마법사가 만든 건데, 카드집에 봉인되어 있었어. 그런데 그만 내가 그 봉인을 풀고 만 거야." 


그래, 그것은 자신의 '잘못'이었다. 크로우 리드의 안배였다고는 하나 카드를 해방시킨 것은 자신이니까. 


"카드집에는 케르베로스... 줄여서 케로라고 부를게. 케로라는 봉인의 마수가 있어서, 나한테 카드를 찾을 임무를 줬어. 그래서 나는 바깥 세상에서 소란을 피우는 카드를 차례차례 봉인해 나갔지. 물론, 그 사실을 들키면 안 됐어. 들키면 난 분명 경찰한테 끌려갔을 거야." 


야미쿠모는 유우를 바라보았다. 유우는 흔들림 없이 똑바로 야미쿠모를 바라보고 있었다. 이때까지 있었던 것 중에서 가장 진지해 보였다. 


"사람들은 그런 나를 '위저드'라고 불렀어. 사람들은 위저드를 영웅 같다고 하지만 나는... 아니라고 생각해. 위저드는... 자기가 잘못한 것을 해결하고 있었을 뿐이야. 오히려 비난받았어야 하는데, 비겁하게 그 사실을 숨겼지." 


미도리야 이즈쿠는 영웅이 아니다. 영웅이 될 수 없다. 그러기엔 그녀는 너무 큰 잘못을 저지르고 말았다. 그 잘못으로 피해를 본 사람만 수백이 넘는다. 결코 되돌릴 수 없는 잘못이었다. 


이즈쿠의 어릴 적 꿈은 그렇게 산산조각 났다. 


"그렇게 모든 카드를 모았을 때, 카드를 완전히 내 것으로 만들기 위해 시험을 치르게 됐어. 근데, 놀라운 게 뭔지 알아? 사실 유키토 씨가 유에라는, 크로우 리드의 또다른 사역마였다는 거야. 케로처럼. 그가 날 시험했지." 


그 날의 충격을 잊을 수 없다. 알고 있던 모든 것이 송두리째 뒤집히는 기분은 정말 끔찍했다. 카드를 풀어놓은 벌을 이렇게 받는 건가 생각했을 정도였다. 


"어찌어찌 시험에 통과하고, 이제 다 끝났구나 생각했거든? 그런데 아니었어. 내 마력이 폭주하기 시작하지 뭐야." 


크로우 카드를 자신의 것으로 만들면서 과도하게 부풀어오른 마력은 완전히 이즈쿠의 통제를 벗어났다. 불행하게도, 이즈쿠는 그 사태를 해결할 능력이 없었다. 


"새로운 카드가 생각만으로 막 생겨나고... 유우, 상상해 봐.네 악몽이 갑자기 현실에 나타나면, 어떤 기분일 것 같니?" 

"절대 싫어!" 


상상만 해도 끔찍했는지, 얼굴이 새파랗게 질린 유우가 도리질을 쳤다. 


"폭주하는 나를 막기 위해, 케로와 유에는… 스스로 지팡이 속에서 잠드는 길을 택했어." 


야미쿠모는 목에 걸린 별의 열쇠를 꽉 쥐었다. 지금도 이 안에는 그녀의 두 수호자가 평화로이 잠들어 있을 것이다. 


한 줄기 눈물이 볼을 적셨다. 


"그 후로 나는, 최대한 평범하게 살았어. 바쿠고의 괴롭힘도 꾹꾹 참으면서. ...그러다 하루는, 그 녀석이 나보고 옥상에서 뛰어 내리라더라." 


한 번 터진 눈물은 참을 새도 없이 쏟아져내렸다. 야미쿠모는 코맹맹이 소리로 애써 담담하게 말을 이었다. 


"그것만으로도 충분히 안 좋은 하루였는데, 집에 가는 길에 좋아하는 히어로를 만났어. 기회다 싶어서 무개성이어도 히어로가 될 수 있냐고 물어봤어. 크로우를 통해 얻은 마법이 아니라, 나 자신만으로도 히어로가 될 수 있는지 궁금했거든." 


야미쿠모는 우는 얼굴로 헛웃음을 터뜨렸다. 나는, 정말 무슨 생각으로 그런 걸 물어봤을까. 


"근데, 안 된대." 

"....." 

"무개성은 히어로가 될 수 없다고... 그 후에 빌런이 바쿠고를 잡은 걸 보고 뛰어들었는데, 역시 무개성이 나선다고 한 소리 들었지." 

"...그치만." 


잠자코 듣던 유우가 말했다. 


"야미 언니는 히어로인걸. 나를 구해줬어." 

"...맞아." 


야미쿠모는 눈물을 닦았다. 옷소매가 축축하게 젖어들어갔다. 


"그 날 너를 만났어." 

"그 날..." 

"처음으로, 카드와 엮이지 않고 순수하게 누군가를 구했어. 그게 너였어." 


네가 나를, 히어로가 될 수 있게 해줬어. 


"너를 구할 수 있어서 나는 구원받았어." 

"...." 

"나를 구해줘서, 정말 고마워." 


언젠가 놀이공원을 다녀오고 나서 했던 이야기를, 야미쿠모는 다시 되풀이했다. 한없는 감사의 마음을 담아. 


그때처럼 유우의 눈에 눈물이 어렸다. 하지만 그녀의 얼굴에는 어둡디 어두운 그림자가 져 있었다. 


"나도, 할 이야기가 있어." 

"응." 

"야미 언니, 나는-" 


유우는 심호흡을 했다. 인형을 안은 팔에 힘이 들어갔다. 


"아빠를, 사라지게 했었어." 

"...!" 

"어떻게 했는지는 모르겠어... 엄마는 내가 저주받았다고 했었어. 그래서 할아버지 집에 날 두고 갔어." 


유우의 눈에서도 눈물이 뚝뚝 떨어졌다. 


"할아버지는 내가 나쁜 게 아니라고 했어. 근데, 얼마 후에, 치사키가 와서, 할아버지가 아프댔어. 어디로 갔는지 몰라. 근데 그게 나 때문에 그런 거래. 그리고 치사키가... 내 힘이 저주받은 거라면서..." 


아이의 이마에 식은땀이 송골송골 맺혔다. 야미쿠모는 아이의 이마를 쓸었다. 


"...많이 아팠어. 치사키는 내가, 나쁘다고 했어. 다 죽게 만든다고. 내 탓이라고 그랬어. 난 모두를 불행하게 만든대." 

"아니야." 


야미쿠모가 토끼 인형 채로 유우를 꼭 안았다. 유우의 몸이 바들바들 떨렸다. 


"나는 너 덕분에 행복해. 그리고 너한테 일어난 일도, 네 잘못이 아니야. 그건 사고였어." 

"그렇게 말해주는 건, 야미 언니 뿐이야." 

"치사키가 나쁜 거야. 착한 사람들은 누구나, 잘못한 게 치사키라는 걸 알아." 

"그래도 내가 아빠를 사라지게 만들었어!" 

"네가 그러고 싶어서 그런 게 아닌걸." 


자신이 한 말을 곱씹던 야미쿠모는, 어쩌면 그 말이 자신에게도 해당한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녀도 그러려고 해서 카드를 세상에 풀어놓은 건 아니었다. 


"그런 날 야미 언니가 날 구해줬어. 언니가 행복하다고 말했어. 내가 있어서." 

"사실이야. 난 정말 널 만나서 행복해. 앞으로도 그럴 거고." 

"...나는 행복해도 돼?" 

"응." 


야미쿠모는 유우의 등을 토닥였다. 두 사람의 사이에 끼인 토끼 인형이 꽉 눌렸다. 유우가 코를 훌쩍였다. 


"설령 세상 모든 사람들이 유우 너를 비난한대도, 나는 네 곁에 있을 거야." 

"정말?" 

"우린 가족이잖아. 그렇지?" 

"가족." 


유우는 야미쿠모의 품에서 고개를 들었다. 초록색 눈과 붉은색 눈이 마주쳤다. 


"우린 가족이야?" 

"물론이지." 

"정말 나랑 함께 있을 거야? 모두 날 싫어해도?" 

"응." 


유우는 다시 야미쿠모의 품에 얼굴을 묻었다. 그 상태에서도, 야미쿠모는 유우가 웅얼거리는 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 '나도 언니와 함께 있을 거야.'




일루전, 윈디: 크로우 카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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