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은 이와쨩도 저런게 좋아?'

'저런걸 싫어하는 사람이 어딨어요. 저건 대부분 여성들의 로망이라고요. 나중에 남자친구 생기면 몇 개는 꼭 해볼거에요.'

'그럼 저거 나랑 같이 할래?'

내가 지금 무슨 말을 들은 거지? TV를 보다가 잠이 들었나? 꿈인가? 고백이라고 하기에는 애매하고, 그렇다고 장난이라고 하기에는 오이카와의 표정이 진지했다. 그녀는 이 상황이 이상하고 부끄럽고 믿기지 않았다. 안 봐도 얼굴이 빨개졌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어...그러니까...그게..."

짧은 시간동안 수만 가지의 생각이 스쳐 지나갔다. 뭐라고 해야하지? 좋아한다고? 아니면 장난하지 말라고 웃어 넘겨야 하나? 그녀가 알고 있는 오이카와 토오루는 장난기가 많은 사람이었다. 친한친구의 여동생이자 오랜 소꿉친구인 그녀에게 볼뽀뽀정도는 가볍게 하고도 남았다.

그녀는 지금껏 살면서 최고로 빠르게 머리를 굴리고 있었다. 누군가 본다면 그녀의 머리에 김이 나고 있는 것을 알 수 있을 것이다. 그녀의 대답을 기다리는 듯이 오이카와는 생글생글 웃으며 그녀를 쳐다보고 있었다.  더 이상의 시간을 끌 수 없었다. 그녀가 우물쭈물 입을 열었다.

"둘이 뭐하냐"

그러나 그녀에게 다행인지 불행인지 이와이즈미 하지메가 거실 문을 열고 들어왔다. 

하지메는 가뜩이나 인상이 사납고 무서웠는데 가깝게 붙어있는 둘을 보더니 눈초리가 좀 더 사나워졌고 좀 더 얼굴이 험악해졌다. 아무리 오이카와라도 그런 하지메를 감당할 수는 없는지 결국 그녀와 거리를 두며 떨어졌다. 그런 모습을 하지메가 노려보았다.

하지메의 날카로운 눈빛만 없다면, 어느 때와 같이 오빠가 해주는 요리는 맛있었고 분위기는 평범하게 즐거웠다. 그 뒤로 하지메가 깎아준 과일을 집어 먹으며 시덥잖은 예능을 보며 낄낄거리니 주변이 좀 더 어두워지고 어느 덧 시계바늘이 10에 가까워졌다. 

"아~ 늦었네 오이카와상 이제 가야겠다."

시계를 힐끗 본 오이카와가 늦었다며 본인의 소지품을 챙기고 일어섰다. 배웅을 하기 위해 하지메와 그녀 둘 다 오이카와의 뒤를 따라 현관으로 갔다. 그 때 전화벨 소리가 울렸다. 거실에 있는 전화를 받으러 그녀가 몸을 돌리니 하지메가 "내가 받을테니까 오이카와 마중해 줘." 라며 만류했다. 

"작은 이와쨩."

"오이카와상 배웅해 줘야지"

가자. 오빠의 뒷모습을 멀뚱히 보고 있으니 오이카와가 그녀의 손을 붙잡고 현관으로 갔다. 수족냉증인 그녀와 달리 오이카와의 손은 크고 따뜻했다. 옛날에 오이카와랑 손을 잡아 본 적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그녀는 왜인지 맞닿은 손이 화끈거리는 것 같았다. 게다가 오이카와의 적당히 길고 가는 손가락이 하나하나 느껴졌다.

아까 그 이상하고 얼렁뚱땅 넘어간 고백같지 않은 고백이 있은 후, 오이카와는 딱히 어떤 태도도 취하지 않았다. 그 모습에 왠지 안심이 가면서도 한 편으로는 서운했다. 그런데 그가 손을 한 번 붙잡아주었다고 서운함이 눈 녹듯이 녹아 내렸다. 진짜 중증이다. 그녀가 오이카와에게 들리지 않을 정도로 작게 한숨을 쉬었다.

"장난한 거 아니니까. 아까 일 진지하게 생각하고 대답해줘."

"그리고 다음에는 토오루라고 불러줘. 그럼 잘 자." 오이카와가 물 흐르듯이 태연하게 그녀의 볼에 가볍게 입을 맞추고 문을 열고 나갔다. 그녀는 오이카와가 나가고 문이 닫힐 때까지 멍하게 현관을 쳐다보았다. 하지메가 전화를 끊고 그녀에게 뭐 하냐고 물어볼 때까지 계속.

머리카락 사이에 언뜻 보이는 그녀의 두 귀가 붉었다.




***




"그래서 일주일 동안 대답을 못했다고?"

요 일주일동안 이상한 짓을 아주 다채롭게 하더니. 아. 귀찮다. 쿠니미 아키라. 16세. 팔자에도 없는 연애 상담을 하고 있었다. 그는 자신의 앞으로 의자를 끌고 와서 한숨을 푹 쉬며 책상에 엎어져 죽어가는 자신의 친구를 바라보았다. 

본인은 모르겠지만 그녀는 여러 의미로 유명한 인사였다. 이와이즈미 하지메가 금쪽같이 여기는 여동생. 나름 잘생겼지만 사나운 인상을 가진 오빠와 닮은 점이라고는 살짝 올라간 눈매밖에 없는 고양이상 미인. 그런데도 활짝 웃을 때는 멍멍이에 가까워서 그 갭모애 때문에 인기도 많았고, 좋아하는 남자애들도 많았다.-물론 이와이즈미 하지메에 의해서 컷 당했다-

소문에 관심이 없는 쿠니미 조차도, 옆반의 누구가, 3학년 선배가 그녀를 좋아한다던가 등등 많은 소문을 들었다. 그런데 그녀는 연애에 관심이 없는건지 아니면 눈치가 더럽게 없는건지 주변 상황을- 하지메가 견제하고 있는- 전혀 몰랐고 쿠니미는 그녀와의 상담에서 후자라고 확신했다. 

"어..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단 말이야."

나를 좋아하는 건지도 모르겠고. 말끝을 흐리며 그녀가 다시 책상에 엎어졌다. 

그녀의 고민을 정리해 보자면, 고백을 받은 후 3일은 기쁘고 들떠 있느라 타이밍을 놓쳤고, 나머지 3일은 평소와 다름없이 아무렇지 않아 보이는 오이카와의 모습에 의기소침해져서 말하기가 무서워졌다는 것이었다.

아. 귀찮아. 평소라면 관심도 없고 귀찮기만 한 이런 상담 절대로 응하지 않았겠지만, 누가봐도 불쌍해보일 정도로 애절하게 부탁하는 그녀와 그녀가 제시한 일주일치 소금카라멜 때문에 나름 성의껏 고민을 들어주었다.그런데 삽질하는 그녀가 답답해서 쿠니미는 혀를 찼다 

"쯧쯧, 그러니까 네가 그 모양인거야." "뭐? 죽을래?!" 그리고 엎드려 있던 몸을 일으켜 불끈하는 그녀를 가볍게 무시했다.

"그럼 싫어하는 사람한테 그러자고 하겠어? 네가 아는 오이카와상은 그런 걸로 장난하는 사람인가?"

그의 물음에 그녀가 고개를 저었다. 그렇지? 내가 생각해도 오이카와상은 진심이거든. 쿠니미는 그 날의 오이카와의 눈빛이 떠올라 몸을 부르르 떨었다.그런 상황 다시 겪고 싶지 않아. 

쿠니미는 간지럼을 잘 탔고 그걸 그녀에게 들킨 시점부터 그녀는 그런 종류의 장난을 많이 걸어왔다. 그 자신도 간지럼만은 불가항력이라서 그 날 역시도 별 달리 저항하지 못했다.

그 상황에 마주친, 자신을 쳐다보는 오이카와의 눈빛을 그리고 그녀가 쳐다보자 부드럽게 풀리던 그의 표정을 그녀 역시 보았다면 저딴 삽질은 하고 있지 않을 거라고 쿠니미는 생각했다. 

잠깐. 단 15분. 그녀와 쿠니미가 단 둘이 있던 아주 짧은 시간. 그 시간 안에 오이카와는 서둘러 준비를 마치고 그녀를 데리러 왔다. 

쿠니미는 그녀가 눈치가 없는 이유의 절반 이상은 이와이즈미 하지메의 쓸데없는 견제 탓이라고 생각했다. 무슨 경험이 있어야지, 연애를 눈치채지. 그 견제의 결과가 오이카와라니 쿠니미는 하지메가 조금 불쌍했다. 물론 가장 불쌍한건 이 연애상담을 듣고 있는 자신이었지만.

"내일 있을 학교 행사 때문에 오늘 연습없어."

오늘이 적기라고 생각했던 건지 연습이 몇시에 끝나냐는 그녀의 물음에 쿠니미가 대답했다. 인터하이도 몇 달 안남았으니 잠깐 감독님이 할 얘기가 있었다는 사실을 상기한 쿠니미가 다시 정정해주었다. 그리고 오늘 꼭 이 상담이 종료되길 바라는 마음도 있었기에 기다리길 권장했다.

"30분밖에 안걸릴테니까. 기다렸다가 직접 물어봐." 

네가 허튼짓하는 것보다는 그게 나으니까. 뒷말을 삼키며 쿠니미는 입을 삐죽이며 시무룩해하는 그녀의 머리를 툭툭 쓰담었다. "진짜 그럴까?" 약간 자신 없어보이는 그녀를 보며 걱정말라며, 우물쭈물 거리지 말고 똑바로 전하라고 얘기했다. 그럼 그 다음은 알아서 되게 되어있어.



'곧 끝나. 빨리 체육관으로'

아까부터 그녀의 손에 꼭 들려있던 휴대폰에 짧게 진동이 울렸다. 쿠니미의 라인이었다. 요 며칠 혼란스러웠던 마음과 생각을 쿠니미와 정리함으로써, 그녀는 자신의 흩어진 용기를 다시 주워담았다.

그래 솔직히 고민은 충분히 했다. 이제 직접 전하는 것 뿐이었다. 그녀는 서둘러 교실을 나서서 뛰어내려가듯이 계단을 내려왔다. 땀이 날까 뛰지도 못하고 종종거리며 체육관으로 빨리 걸었다. 오늘 따라 체육관으로 가는 길이 이렇게 길 줄이야. 

그녀의 발걸음이 다급해질수록 체육관은 가까워졌다. 체육관에서 하얀색과 민트색으로 된 배구부의 저지를 입은 사람들이 우르르 나오고 있었다. 이제는 걸을 때가 아니었다. 오늘이 적기야. 오늘을 놓친다면 다시 흩어진 용기를 주우려면 아주 오랜 시간이 걸릴 거라는 걸 그녀는 알았다.

그녀는 문에서 나오는 남자애들 사이에서 오이카와를 찾았다. 키 큰 사람들 너머로 오이카와를 찾으려고 발뒷꿈치를 한껏 들었다. 두리번 거리는 그녀를 아는 몇 명이 수근거렸다. "어 이와이즈미 선배 여동생이다." "오늘은 왠일이지?"

진짜 이 배구부는 쓸데 없이 사람수가 많았다. 그녀는 자신이 찾는 사람은 보이지 않고, 애꿎은 다른 사람만 계속 나온게 정말 짜증났다. 그리고 간신히 사람들을 뚫고 들어온 체육관 한편에서 오이카와 토오루가 다른 여자 팬들-심지어 오늘은 경기도 없었는데 언제 들어왔는지-에게 둘러싸여 웃고 있는 건 더 짜증났다.


"토오루! 좋아해!"


그녀는 약간의 짜증과 자신이 우물쭈물 거리는 사이 겨우 잡은 기회가 달아날지도 모른다는 조급함을 이기지 못했다. 그리고 결과는 공개고백.

체육관이 도서관만큼 조용해졌다. 그리고 체육관에 있는 모든 사람의 시선이 그녀에게 꽂혔다. 심지어 오이카와를 보려고 온 그의 팬들조차. 그녀는 그제서야 자신이 저지른 상황을 인지했다. "바보냐..." 그렇게 말하는 쿠니미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금새 얼굴이 뜨끈뜨끈해졌다. 그래도 그녀는 마주친 오이카와의 눈빛을 피하지 않았다. 그리고 아까부터 계속 자신을 지켜보던 오이카와가 올라가는 입고리를 참지 못하고 여태껏 그녀가 봤던 그의 미소중에서 가장 예쁘고 빛나게 웃어주었다.


"나도 좋아해!"






마음의 바다(心海)에서 헤엄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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