빌어먹을 김여주 
Written by 시민


휴대폰이 계속 울려댔다. 지현아 우리 자리 파해야 하는데 혹시 오고 있어? 그리고 눈물 이모티콘. 우지현은 그 진동들이 무안해질 정도로 외면한 채, 원래의 목적지와 반대로 걸었다. 나재민과 최대한 멀어졌다. 손에는 숙취제와 소화제를 든 채로. 새로운 목적지를 찾아야 하는데 아무 생각이 안 들어 계속 걷기만 했다. 한 이십 분 정도 걸으니까 더 이상 진동이 오지 않았다.

나재민은 택시에 태워져서 자기 집으로 잘 갈까, 아니면 자취하는 동기 집에 묵을 수도 있겠네. 뭐가 됐든 아침에 일어나면 나재민은 뭘 기억할까. 기억을 할 수나 있을까. 네가 여주라는 애와 내 이름을 섞어 문장을 만든 건 기억할까. 그걸 기억하면 나한테 연락할까, 숨기며 아무렇지 않은 척할까. 대답을 바라지 않은 문장들이 허공에 흩뿌려졌다. 우지현이 뒤를 돌았다. 누군가에게 전화를 걸며 뛰었다.


“어, 나 지금 가고 있어. 혹시 자리 파했어? 나재민 갔어?”

“어? 아니, 아직. 올 거야?”

“갈게. 걔 붙잡아 둬. 내가 데려다 줄게.”


전화를 마친 우지현이 본격적으로 나재민을 향해 뛰었다. 나재민이 모르는 척하는 걸 보는 것보다, 내가 먼저 아는 척을 하는 게 나았다.


“진짜 미안… 나는 다른 애들 챙겨야 해서 멀리까지는 부축 못 해 줄 것 같다, 지현아.”

“너도 취한 것 같은데 몸 잘 챙기고 조심히 들어가. 그리고 집 도착하면 연락해. 걱정된다.”

“…내가 볼 때 넌 나재민이랑 아주 또옥같아. 아- 진짜. 이러면 혼자 보내기 좀 그런데, 너 진짜 걔 혼자 감당 가능해?”


어. 당연하지. 나 진짜 갈게. 말은 웃으며 했지만 좀 걸으니 다리가 후들거렸다. 성인 남자 하나를 부축하기엔 힘이 후달렸다. 게다가 계속 엉겨붙는 나재민에 우지현은 숨을 들이켰다. 죽을 맛이다, 진짜.


“…재민아 다리에 힘 주고, 걸어. 택시 잡을 때까지만이라도. 제발.”

“힘이 안 들어가. 졸려.”

“넌 진짜 술 먹지 마라.”


나재민이 예쁘게 웃는다. 우지현은 힘든 와중에도 그게 예뻐 보였다. 그런 자신이 어이가 없어서 피식 웃었다. 그러자 나재민이 웃음기를 지우고 우지현의 얼굴을 붙들어 눈을 맞춘다.


“너, 너 지금 뭐,”

“너 웃는 거,”

“…….”

“진짜 여주 같다.”


아까부터 나재민이 제가 서 있는 바닥을 뜯어냈다. 자꾸 절벽에서 저를 밀친다. 우지현이 저의 얼굴을 잡은 나재민의 손을 떼어내 말했다.


“나는 우지현이야.”


그러니까 그런 실망스러운 표정 좀 짓지 마, 재민아.


-


쪼개질 듯한 머리, 올라오는 토기, 물에 젖은 듯 무거운 몸 그리고 낯선 천장. 나재민이 상체를 벌떡 일으켰다. 그러자 세상이 핑 돌길래 다시 몸을 웅크렸다. 여기가 어디지, 라는 생각이 들기도 전에 익숙한 목소리가 머리 위로 떨어졌다.


“일찍 깼네. 아직 해 안 떴는데.”


나재민은 인사불성이 될 때까지 술을 먹은 적이 손에 꼽는다. 그리고 그 손에 꼽는 순간들마저 자신이 술에 취해 무슨 짓을 했는지 다 기억했다. 술에 절어 갑자기 춤을 추기도 했고, 전봇대와 인사를 하기도 했던 자신을 다 기억해서 아주 고역이었더랬지.


“지현아….”

“일단 좀 씻어. 너 어제 취해서 바닥 엄청 굴렀어.”


그리고 어제는 우지현을 보고 김여주를 떠올렸구나.

정말 하나도 빠짐 없는 기억에 나재민이 고개를 숙였다. 아무렇지 않은 척해야 할지, 미안하다고 해야 할지 도통 감이 안 잡혔다.

씻고 나오자 차려져 있는 콩나물국에 나재민이 수저를 세팅하고 물을 따랐다. 나재민이 묻는다. 미지근한 물? 차가운 물? 우지현이 콩나물국을 국그릇에 담으며 대답한다. 차가운 물. 이제 둘은 식탁에 마주앉아 숟가락을 들었다. 입에 좀 맞아? 완전 맞아. 고마워. 그 대화를 끝으로 아무 소리도 안 났다. 다 먹을 때까지. 설거지는 나재민이 했다. 여기서 더 민폐를 끼칠 수 없다면서. 설거지를 마친 나재민에게 우지현이 묻는다. 이제 뭐 할 거야.


“이제… 집에 가야지. 민폐 그만 끼치려면.”


나재민의 선택은 회피였다. 나재민의 대답에 우지현은 아무 반응도 하지 않다가 그저 무표정하게 대답했다. 그래, 그럼. 너도 피곤하겠다. 집에 가서 쉬어야지.


“근데 재민아. 지금 이 분위기를 보면… 너도 대충 기억하는 것 같아서 묻는 건데,”

“…….”

“여주가 누구야.”


멈칫한 나재민이 눈꺼풀을 파르르 떨었다. 아주 짧은 시간이었다. 우지현이 좋아하는 선홍빛 입꼬리를 올리며 웃는다. 우지현은 이때 깨닫는다. 나는 절대, 김여주가 누군지 알지 못 할 거다.


“…내가 취해서 별 얘기를 다 했나 보네. 미안. 잘 기억 안 난다.”

“…….”

“진짜 고마웠어. 나 가 볼게, 지현아. 연락할게.”


다시 말하지만 나재민의 선택은 회피였다. 도망치듯 제 집을 빠져나가는 나재민을 보며 생각한다. 방금 나재민이 뱉은 모든 말은 거짓말이다. 기억 안 난다는 것도. 연락하겠다는 것도. 어쩌면 나재민은 저를 피할지도 모른다. 자신은 누군지도 모르는 빌어먹을 김여주가 생각나서. 오늘 일이 죄책감으로 남아서. 고개를 뚝 떨궜다. 눈물이 뚝 떨어졌다. 더 이상 아무렇지 않은 척하진 못하겠더라.

너 다 기억하잖아. 나한테 보기 싫다고 한 것도, 짜증 나게 김여주랑 닮았다고 한 것도.

우지현은 나재민이 당황할 때마다 아주 잠깐이라도 멈칫하는 그 미세한 순간을 잡아낸다. 걔가 눈꺼풀을 파르르 떠는 것도 다 보고 말았다. 잡아내고 싶지 않은 상황에서도.



나재민에게 우지현은 길티 플레져였다. 죄책감은 이미 차고 넘쳐 주정으로 흘러 나올 정도면서, 동시에 가까이 하면 긍정적인 느낌이 저를 둘러싸서, 놓을 수가 없었다. 따뜻함, 다정함, 포근함, 사랑스러움 같은 것들. 캠퍼스에서 앞서 가는 우지현을 불렀을 때 망설임 없이 돌아 웃어 주는 게, 나재민이 혼자 고기를 구울 때면 입에 몇 점씩 넣어 주는 게, 조금만 퀭한 표정을 지으면 귀여운 뽀로로 비타민을 쥐어 주는 게 너무 좋아서, 쉽게 포기할 수가 없더라.


“지현아!”


그러니 죄책감은 조금 묻어두면 안 될까.


“광고 들으러 가는 거 맞지. 같이 가자.”


좀 뻔뻔하게 굴면 안 될까.


“…너 그거 들어? 놓쳤다며.”

“운 좋게 교환했어.”


그때 이후로 처음 만나는 나재민이다. 언제나처럼 행동하는 나재민에 우지현은 잠시 망설이다 웃으며 말했다. 그래, 다행이네. 우지현의 표정을 살핀 나재민이 긴장되는 듯 입술을 몇 번 훑더니 말한다.


“연락 못 해서 미안해. 정신이 없었어.”

“그럴 수 있지. 안 기다렸어. 괜찮아.”


우지현이 체념한 듯 피식 웃었다. 나재민은 구태여 저를 속이려 들지 않는다. 거짓말은 영 꽝이었다. 재능도 없어 보이고. 단지 이런 미세한 말까지 알아채고 들추려 한다면 나재민이 제게서 도망갈 것 같아서, 그래서 참았다. 속이는 사람은 없지만 속아 주는 사람만 존재하는 관계였다.


“이 강의 엄청 비싼 카메라로 사진 찍는대서 고장내면 어떡하나 무섭기도 하고, 기대도 했는데. 그냥 물체랑 카메라 고정하고 우리는 셔터만 누르는 거래.”


조잘조잘대는 나재민의 뒤로 햇빛이 들어찼다. 역광 때문에 무어라 떠들어대는 나재민의 얼굴이 보이지 않았다.


“솔직히 좀 아쉽… 다.”


우지현이 손을 들어 나재민의 머리칼을 넘겨 주며 햇빛을 가려 주었다. 나재민이 당황한 듯 말을 끊어 뱉었다. 우지현이 뒤늦게 대답한다. 그러게. 아쉽네. 무어라 신이 나서 아이처럼 떠들어대는 네 표정을 놓친 게 아쉽다는 말은 뒤로 넣어 두었다. 대신 다른 말을 꺼내들었다.


“이제 네 눈 잘 보인다.”


우지현의 얼굴로 햇빛이 떨어졌다. 눈동자의 가장 깊은 곳까지 보여 넋 놓고 바라봤다. 눈동자가 푸른색이든, 금색이든, 백색이든. 심지어는 온갖 빛나는 보석을 박아 놔도 우지현의 검은색 가까운 눈동자보단 빛나지 못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


나재민 말대로 광고 스튜디오 사진 강의는 아쉬웠다. 고정된 물체와 카메라로 학생들은 셔터만 누르고 빛과 구도에 대해서는 전부 이론으로 배우는 강의. 학생이 괜히 카메라 건드려서 망가지는 것보다 낫긴 했지만 지루한 건 사실이었다. 우지현이 꾸벅꾸벅 고개를 숙였다.


“그렇게 자면 거북목 된다.”

“…….”

“기대서 자.”


나재민이 우지현의 머리를 조심스레 당겨 제 어깨에 묻게 했다. 나재민은 짜증 나게 어깨도 넓었다. 거절할 명분을 찾기 싫어서 잠에 겨운 척 눈을 감았다.


“지현아 너 나재민이랑 사귀어?”


쉬는 시간이었다. 잠깐 자판기 앞에 서서 물을 뽑고 있는 우지현에게 과대가 조심스레 다가와 물었다. 잠시 멈칫한 우지현이 대수롭지 않게 뚜껑을 까며 대답했다. 아니.


“안 사귀어. 왜?”

“진짜로? 아, 별 다른 거 아니고 누가 너 좀 소개시켜 달래서.”


우리 과 과대는 좋게 말하면 배려심 넘치며 착했고, 나쁘게 말하면 피곤하게 사는 구석이 있었다. 어느 과 누구고, 선배고, 혹시 나재민이랑 비밀 연애인 거면 비밀로 해 주겠고, 알아서 잘 변명하고 거절하겠다 등등. 다급하게 얘기하는 과대에 우지현이 물었다.


“내가 안 나가면 너한테 뭐 불이익 있어?”

“어?”

“그 선배 끈질겨? 거절하면 너한테 계속 연락할 것 같아?”

“…어.”

“그럼 할게.”


연락처 줘. 내가 먼저 연락할게. 대충 장단 맞춰 주고 자르면 되는 거지? 그렇게 말하는 우지현에 과대가 생각한다. 나재민이 너를 그렇게 싸고도는 이유를 잘 알겠다고.


“왜 이렇게 늦게 왔어.”

“…그냥.”


우지현이 곤란한 듯 머쓱하게 웃으며 눈을 피했다. 눈치 빠른 나재민은 이게 무슨 뜻인지 안다. 보통이라면 더 캐묻지 않았을 텐데. 그날은 뭐가 그렇게 마음에 걸렸는지, 눈치 없는 척하며 되물었다.


“무슨 일 있었어?”

“아니야. 없었어. 그냥 자판기에서 물 뽑고… 화장실 가고.”


우지현은 거짓말 할 때 눈을 못 마주친다. 어딘가 불안해진 나재민이 무어라 입을 열려다 다물었다. 주제넘는 행동인 걸 알았다.


> 14 과대: 혹시 지금 지현이랑 연락돼? 차라리 거절했으면 했지 잠수 탈 애 아닌 거 아는데 연락 안 돼서 걱정되네 ㅠㅠ


이미 뻔뻔스러운 거 그때도 좀 주제넘게 행동할걸.


> 14 과대: 지현이가 얘기 안 했구나… 내가 소개팅 제안했는데 수락했거든 방금 오빠한테 연락 왔는데 지현이가 안 나갔나봐 연락도 안 돼


나재민은 우지현에게 전화를 걸며 집을 뛰쳐나왔다. 이제 가을이라 제법 쌀쌀한데 반팔 티 차림으로 택시를 잡았다. 어디로 모실까요. 그렇게 묻는 기사님에 나재민이 잠시 망설였다. 멋대로 가도 되나.


“사거리 쪽에 세워 주세요.”


하지만 좀 주제넘게 행동하기로 했다. 친구가 연락이 안 되니까. 걱정되니까. 지현이라면, 지현이도, 이 정도 친절은 베풀어 줬을 거니까.


택시에서 내리자마자 무작정 뛰었다. 기억을 더듬어 이곳저곳 다 뛰어다니다가 드디어 익숙한 길이 나왔을 땐 땀을 뚝뚝 떨구며 뛰고 있었다.

무작정 문을 쾅쾅 두드렸다. 어디서 나오는지도 모르는 조바심, 초조함, 불안감 같은 것들이 쾅쾅 소리를 더 크게 했다. 지현아. 나 재민이야. 안에 있어? 그렇게 한 십 분을 그러고 있을 때쯤 옆집 문이 열렸다. 거참, 요란하네.


“청년 목청 때문에 이 동네 사람들 다 깨겠어.”

“…죄송합니다.”

“옆집 아가씨랑 무슨 사이길래 이렇게 애달퍼?”

“저는….”


말문이 턱 막혔다. 나 도대체 우지현이랑 무슨 사이길래. 나는 우지현한테 무엇으로 정의되길래.


“꼬락서니가 딱 전남친이네.”

“아, 아뇨. 친구예요. 연락이 안 돼서 찾아왔어요. 죄송합니다. 조용히 하겠습니다.”


옆집 사람 미간이 좁혀진다. 무어라 입을 떼려 할 때 드디어 문이 열렸다. 땀에 잔뜩 절어 안색이 파리한 우지현이었다.


“…아주머니 죄송합니다.”

“지현아, 너….”

“넌 들어와. 아주머니 다음에 뵐게요.”


굳게 닫힌 우지현네를 보곤 아주머니가 혀를 끌끌 찼다. 염병. 친구, 이 지럴을 허네.


“…….”

“…….”


집으로 들어온 둘은 말이 없었다. 우지현은 화가 머리 끝까지 나서, 나재민은 여러모로 죄인이라서. 우지현이 마른세수를 하며 묻는다.


“물이라도 줄까. 너 땀 많이 나는데.”

“…걱정했어.”


울컥. 무언가 쏟아져 나올 것 같아서 들고 있던 물컵은 식탁에 탁 내려 놓았다. 목소리는 최대한 차분하게, 표정은 최대한 동요 없게.


“걱정하게 해서 미안. 나 환절기 때마다 아프거든.”

“뭐?”

“저번 환절기는 이렇게까진 안 심했는데, 이번엔 좀… 너 왜 그래.”


나재민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재민아 왜 그래. 어디 안 좋아? 아파?”


우지현이 다가가자 나재민이 뒷걸음질을 친다. 눈이 마주치자 고개를 휙 돌린다. 명백한 회피에 우지현이 깨닫는다.


“…너 지금 나 안 보이지.”


나재민은 지금 나를 보고 있는 게 아니다.


“나 안 보고 있지.”


내 행동 하나하나에 다른 사람을 투영하고 있다. 부정적인 말들이 한데 뒤섞였다. 아까까진 열이 올라 온몸을 도는 피가 들끓는 느낌이었는데, 이젠 너무 차게 식어 얼어붙은 건 아닐까 걱정됐다. 주먹과 고개가 부들거렸다. 주체가 안 됐다. 울컥 무언가 튀어나올 것 같아 개중 제일 안전한 말을 골라 잡아 물었다.


“김여주가 누구야.”

“…….”

“대답해. 대답하라고!”


분명 제일 안전한 말을 붙잡은 거였는데.


“…내 첫사랑.”


또 추락했다.


-


우지현은 천성 자체가 단조로웠다. 심플하고, 시니컬하고, 큰 동요 없고. 바다 같은 사람이다. 돌 하나쯤 던져도 요동치는 것 없이 받아들이고 말았다.

그런 우지현이 몇 주째 잠잠하질 못했다. 나재민이 제게 너무 큰 사람이라, 큰 파도를 몰고 온 탓이었다. 제 머리카락 한 올이라도 보이면 악을 쓰고 피해대는 나재민에 억울해서 멱살이라도 잡고 따지고 싶었다. 적어도 내 앞에서 티 내진 말지. 이렇게 매몰차게 피하진 말지. 나랑 함께 했던 시간이 없던 것처럼 굴진 말지.

온갖 원망을 다 쏟아냈지만 우지현은 안다. 나재민이 티를 안 냈어도, 나재민을 좋아하는 내 관심과 관찰력이 어떻게든 들췄을 거고, 매몰차게 피하지 않는다면 질질 끌려다녔을 거고, 나와 함께 했던 시간은.

사실상 나보단 걔랑 함께 했던 것과 마찬가지였을 테니.

비참하다. 얼굴도 모르는 애한테 좌절감을 느껴야 하는 이 상황이.


-


> 보육원장님: 지현 씨~ 잘 지내요? 원래 이런 연락 안 드리는데 우리 보육원 애들이 그간 지현 씨랑 만들었던 추억이 너무 행복했는지 지현 씨를 많이 찾고 그리워해요. 이번 주말에 한번 와 주시면 안 될까요? 염치 불구하고 문자 남겨요.

> 보육원장님: 그때 같이 하던 재민 씨도 아직까지 해요~


똑같은 날이었다. 나재민은 저를 피하고, 나는 받아들이고. 간만에 온 보육원장님의 연락에 반가운 것도 잠시 재민이의 이름을 보고 거절의 메시지를 썼다. 본가에 올라가기로 했다는 핑계로 엄마를 팔아먹다가 텍스트를 전부 지웠다.


갈게요. 저도 애들 많이 보고 싶어요. <

근데 그 전에 재민이한테 저 간다고 말씀해 주실 수 있을까요? <


보육원 애들도 너무 보고 싶고, 엄마를 파는 파렴치한까지 되고 싶지 않았다. 무엇보다, 나는 나재민을 피할 이유가 없었다.


“…안녕.”


그리고 사실 나재민이 알아서 피할 줄 알았다. 우지현은 저를 반기는 애들 사이에 둘러싸여 행복한 웃음을 짓다가 웃음기를 지우고 나재민을 쳐다봤다.


“원장님께서 말씀 안 전해 주셨어? 나 여기 온다고.”

“전해 주셨어. 근데 그냥….”

“그래. 알았어.”


오늘 잘해 보자. 억지로 웃는 것까진 힘에 부쳐 하지 못했다. 나재민 역시 그런 듯했다.

나재민은 유난스럽게 굴었다. 별로 무겁지도 않은 빵 박스를 옮기는 것도, 바닥을 쓰는 것도, 걸레질을 하는 것도 몸을 빠르게 움직여 자기가 다 해 놓곤 우지현 보고는 쉬란다. 괜히 심사가 뒤틀린 우지현은 쓰레기통을 들곤 쓰레기장으로 향했다. 또 나재민이 부리나케 따라온다.


“지현아 이런 건 내가,”

“너 지금 뭐 해? 너 왜 그래?”

“…….”

“나도 여기 봉사하러 온 거야. 청소도 하고 쓰레기도 다 내가 치울 수 있어. 가만히 앉아서 애들 간식 주고, 동화책만 읽어 주러 온 거 아니야.”

“네가 힘들어 할 것 같았어. 미안해.”


우지현이 헛웃음을 쳤다. 내가 힘들어 할 것 같다고. 뭐 때문에. 나재민은 뭘 말한 걸까. 내가 뭐 때문에 힘들어 할 줄 알고 말한 걸까. 온갖 더러운 게 모인 쓰레기 봉투가, 아니면 나재민 너 자신이. 토기가 올라온다. 욱욱거리며 다 토해내고 싶었다. 우지현이 부들부들 떨리는 목소리로 말한다.


“솔직히 내 입장에선, 네가 겁쟁이로밖에 안 보여.”

“…….”

“전에 있던 일들 사과하기엔 나를 마주하기 무섭고, 안 하자니 죄책감 들고.”

“…….”

“이렇게 또 얼렁뚱땅 넘어가고.”


뚝. 아까부터 어두컴컴하던 하늘에서 비가 한 방울씩 떨어진다.


“너 지금은 나 보이니.”

“…….”

“나 우지현으로 보여?”


차라리 거짓말이라도 하지. 나재민이 고개를 숙인다. 반대로 우지현은 고개를 들어 어둑어둑한 하늘을 쳐다봤다. 먹구름이 잔뜩 낀 게 지금 제 심성 같아서 웃음이 픽 터졌다. 웃음기 가득한 목소리로 나재민을 불렀다. 재민아.


“내가 너한테 왜 이렇게 화내는지 이해 안 되지 않아?”

“뭐?”

“친구가 첫사랑 좀 닮을 수도 있지. 그걸로 네가 나한테 폐 끼친 것도 아닌데. 그냥 나로 추억 좀 되짚겠다는 건데.”

“지현아,”

“이유 알려 줄까.”


빗방울이 점점 더 거세졌다. 이렇게 어두컴컴한 하늘에, 어둑어둑한 마음을 가진 채로 우지현이 말한다.


“내가 너 좋아해서 그래.”

“…….”

“사귈래? 네 첫사랑 잊는 건 못 도와도, 상기시키는 건 해 줄 수 있어.”

“…….”

“닮았으니까. 네가 닮았다며.”


고백할 생각 없었는데. 이렇게 될 줄 몰랐는데.

내 고백이 이렇게,

비참할 줄 몰랐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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