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대인은 대부분 스마트폰 중독이다. 물론, 예외는 어디나 존재하지만.

글리머의 주변에서는 아도라가 예외였다. 아도라는 가방 깊숙히 스마트폰을 넣고 다니는 별종 중 하나였지만, 외톨이는 아니었다. 오히려 학교에 나오기만 하면 사람들에게 둘러쌓여서 핸드폰을 확인할 시간도 없었다. 하지만 지금 그 아도라는 핸드폰만 뚫어져라 바라보고 있었고, 글리머가 세 번 그의 이름을 부르기 전까지는 그가 온 것조차 눈치채지 못할 지경이었다. 뭐에 홀린듯이 충혈된 눈으로 핸드폰 화면만 들여다보는 아도라의 목을 글리머는 찌르듯이 눌렀다.

"아도라. 너 나오기 전에 거울은 봤니?"

"아니? 안녕, 글리머! 보우도."

"모기 물린 자국이 이렇게 선명하구만 간지럽지도 않았어? 진짜 어이가 없다. 너 요즘 왜 그래? 남자친구 생겼어?"

"어~아니. 그냥, 옛날 친구를 오랜만에 만났더니 반가워서. 미안, 요즘에 내가 좀 무신경했지?"

이 퀭한 눈으로도 잘생겼다니, 사기 아닌가.

글리머는 자각없이 얼굴을 쓰는 친구를 밀어내며, 상대가 자신이라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아니면 틀림없이 넘어가고 말았을 것이다. 괜히 체대 이성애 치료제라고 불리는 게 아니다. 

"너 내가 아무한테나 그런말 하지 말라고 했지! 그러니까 이상한 오해받는 거 아냐."

"맞아. 글리머는 내 여친이니까 꼬시는 건 그만둬, 아도라."

둘이 항상 찰싹 붙어 있으면서, 누구한테 꼬시지 말라는 건지.

아도라는 잠시 어이없는 표정으로 둘을 쳐다보았지만, 메시지가 왔다는 알림이 울리자 시선은 다시 스마트폰으로 향했다. 글리머가 그보다 빠르다는 것이 문제였지만. 메시지를 보낸 사람의 이름을 확인한 글리머의 얼굴이 굳어졌다.

"캣트라...? 너, 캣트라랑 연락하냐? 계속 찾아다니고 있었어?"

"내 의지로 만난 게 아니야! 저번에 연락한 남자가 데려간 재즈바에서 만난 거라고. 따지고 보면 너네가 계속 그 남자랑 엮을려고 해서 만난거라니까? 그리고 캣트라도 많이 변했어. 너네가 보면 깜짝 놀랄걸? 걔가..."

"아도라."

아도라는 글리머의 눈을 보는 순간, 자신이 지금 주절거리고 있는 말들이 얼마나 쓸데없는 말인지 깨달았다. 그건 글리머의 화를 더 돋굴 뿐이었고, 아도라가 지금 자신이 해야 하는 것이 무엇인지 알고 기민하게 행동했다.

"미안. 좀 더... 글리머 네 감정을 살폈어야 했는데, 내가 성급했어."

"아도라, 내가 너 다른 친구들 만나는 거 한 번이라도 싫어하는 거 봤어? 없잖아. 근데 걔는... 너 꼬셔서 같이 가출해놓고 혼자 사라지고, 잘하고 있던 피아노 놓게 만들고, 내가 너 그 때 얼마나 힘들어했는지 아는데... 내가 걜 좋아해야 하니?"

"...아니."

"걔랑 문자질 하는 게 그렇게 좋아서 입이 귀에 걸린 거였어? ...내가 너 걱정을 왜 했나 싶다. 가자, 보우."

"어? 어..."

'내가 달래볼게, 걱정하지 마.'

이정도를 입모양으로 읽는 것은 일도 아니었다.

보우가 글리머에게 질질 끌려나가고 나자, 과방 안에 드물게 적막이 찾아왔다. '경영 과대 저렇게 화난 거 처음봐...'라며 속삭이는 소리가, 아도라의 귀에도 박혔다. 아는 친구들이 아도라에게 말을 걸러 다가왔지만, 드물게 도저히 그럴 기분이 아니었던 아도라는 과방 문을 나섰다. 문이 닫히는 소리와 겹쳐 난 알림 소리에, 지친 미소가 아도라의 입에 그려졌다.

'그럼 오늘 바로 찾아오던가.'

언제 물린지도 모를 목의 자국이, 비로소 간지러웠다.

*

"아도라 쟤는 진짜 캣트라 일이라면 왜 저렇게 환장하는거야? 진짜 이해가 안되네!"

"진정해 글리머. 심호흡, 심호흡하자."

"내가 지금 진정하게 생겼어? 왜 지 인생을 지가 꼬고 앉아있냐고! 걔량 엮일 때마다 주변이 다 들썩거리는 거 봐놓고도 쟤가 저러는 거 보면 진짜 내가...!"

글리머는 할 말을 잠시 잊었다. 자신의 주먹진 손이 보우의 가슴 위에 얹어져 있었기 때문이었다. 화를 잊게 만드는 말랑한 촉감이었다. 사람이 드문 지름길로 다니고 있어 다행이었지, 남이 봤으면 지랄이라며 익명 게시판에 올랐을 것이다. 괜스레 가슴을 톡 치고 입을 가린 글리머의 얼굴을 상기되어 있었다.

"밖이야."

"알아. 근데 이러는 게 제일 빠를 거 같아서. 화 풀렸어?"

"...조금?"

"아도라도 네가 걱정해서 이러는 건 알거야. 우리 조금만 기다려보자, 응?"

화가 설레임마냥 사르르 녹아내리는 것을 느끼며, 글리머는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꺼림직함마저 사라진 것은 아니었다. 고등학생 때도 아도라는 유독 캣트라와 엮이면 나사빠진 행동을 하는 일이 잦았기 때문이었다.

그 전적을 하나하나 꼽으라면 셀 수도 없었지만, 캣트라 다리를 쳐다보는 게 기분 나쁘다며 머리통 두 개 정도는 큰 남학생을 때려눕힌 것이 지금으로선 가장 강렬하게 떠오르는 기억이었다. 그 덩치가 주먹 한 방에 고통스러워 쓰러지는 것도 인상적이었지만, 글리머는 웃음기 없이 창백해진 얼굴로 교무실로 뛰어들어오던 부모님의 얼굴을 잊을 수가 없었다. 워낙 질이 나쁜 놈이라 결국 퇴학당했었지만.

"아도라는... 자기가 캣트라를 어떻게 대하는지에 대해 자각이 없어."

"어떻게 대하는데?"

"꼭... 일진이 자기 깔 대하는 느낌이란말이야."

"깔? 글리머, 표현이 너무 저속한 거 아냐?"

본인이 생각하고 있던 바를 정확히 찔린 글리머는 머리를 쥐어뜯으며 변명하려 했지만, 변명하면 변명할수록 스스로의 머릿속에는 이상한 그림이 완성되고 있었다. 머리로는 부정해도 가슴 한 구석으로는 고개를 끄덕이고 있는 스스로를 죽여버리고 싶었다.

"나도 알아. 하지만 왠지 그런 느낌인 걸 나보고 어쩌라고! 그 단어 말고는 적확하게 표현이 안된단 말이야. 아~아도라는 둔하니까, 계속 그 상태로 있음 좋을텐데."

"확실히 아도라는 너 지금 지친거야, 라고 말하기 전까진 본인이 지친 줄도 모르잖아."

"그치? 괜찮을 거야. 그래, 걱정하지 말아야지. 자, 이제 수업이나 들으러 가자, 보우."

오늘 뭐할거야, 라는 카톡에도 답이 없는 아도라를 글리머는 애써 긍정하며, 화를 애꿎은 소개팅남에게 돌렸다. 따지고 보면 굳~~~이 재즈바를 데려간 그 자식이 원흉이었다. 스스로의 미간이 구겨지는 것을 느끼지 못하며 글리머는 종종 걸음으로 경영학관에 향했다.

'이자식, 수업 끝나면 뒤졌어.'

*

"아."

재즈바로 향하는 버스 안이었다. 습관처럼 두리번거리던 아도라는 어떤 사람과 눈이 마주쳤다. 아는 여자였다. 마주 웃어보인 여자가 비어있던 아도라의 옆자리로 휘청거리며 다가오더니 주저앉았다. 자신 못지않게 친화력이 좋은 여자였다.

"안녕. 나 기억하죠?"

"물론이죠. 하하, 잘 지내셨어요?"

캣트라와 재회한 날, 술을 만들어주던 바텐더 겸 직원이었다. 술에 흐려진 대화였지만 그 속에서도 둘은 굉장히 친밀했고... 그가 캣트라를 모르던 시절을 알고 있는 사람같았다. 하고싶은 말과 해야하는 말에 대한 선이 흐려지려는 아도라의 속을 모르는지, 직업상 사람을 대하는 것이 능숙한 여자가 대화를 주도해 나가기 시작햇다.

"그럼요. 그 동안 왜 안오셨어요? 그 날 안주 많이 남기셔서 다시 오면 서비스 많이 드리려고 했는데."

"제가 술을 잘 못해서요. 그날도 보셔서 아시겠지만."

"아, 그래서 의외였어요. 캣트라는 술 못마시는 여자 싫어하거든요."

"하하. 캣트라가 거기로 친구들을 많이 데려갔나봐요."

"글쎄, 그걸 친구라고 해야하나. 캣트라에 대해 잘 모르시나봐요."

"굉장히 오랜만에 만났거든요. 고등학교 친구였어요."

"아아...그럼 모를 수도 있겠네요. 혼날 수도 있으니 더 말 안해야겠다."

몇 달 간, 캣트라와 친하게 지내면서 알게 된 것은 그가 정말로 여자에게 인기가 많다는 것이었다. 손을 씻고 온 사이 누군가가 끈적하게 말을 걸고 있는 것은 예삿일이었고, 술집이라도 가면 칵테일 밑에 전화번호가 쓰여진 쪽지를 끼워 받는 일은 일도 아니었다. 굳이 캣트라를 구석으로 끌고 가 대화하다 눈물 어린 눈으로 자리를 뜨는 여자도 있었다. 자신도 여자에게 선물을 받거나 편지를 받는 일은 있었지만, 캣트라를 대하는 이들의 행동과 눈빛, 말과 비교하자면 그것은 풋풋하기까지 한 순정이었다.

그 모습들을 지켜보는 아도라에게선 두가지 마음이 커져가고 있었다. 우선은 실망이었다. 아도라는 스스로가 굉장히 관대한 사람이라 생각하고 있었지만, 여자들과 즐거운 듯이 대화하는 캣트라를 보며 불쾌한 답답함을 느끼는 자신에게 큰 충격을 받고 있었다.

두번째로는 호기심이었다. 도대체 캣트라가 무슨 마성의 레즈이기에 여자들이 달려드는것이며, 그들과 어떤 일을 했었기에 그러는지 커져가는 호기심을 아도라는 억누를 수 없었다. 이런 저급한 호기심을 느끼며, 아도라는 자신에게 한 번 더 실망했다. 그런 시무룩한 아도라의 얼굴을 여자는 무엇으로 오해한 건지 여자는 아도라의 목을 빤히 쳐다보며 물었다.

"근데 목에 이건 뭐야? 정말 아무것도 모르는 거 맞아요?"

캣트라가 입단속을 주의시킬 만큼 그의 입은 가벼웠다. 아도라는 양심의 삼각형이 돌아가는 것을 느꼈지만, 아주 찰나였다. 아도라는 이미 연기를 할 준비를 끝낸 상태였다.

"그럴리가요. 캣트라 곁에 있는 데 모를 수는 없죠."

"그럴 줄 알았어. 둘이 같이 왔던 날부터 이미 눈치 챘다니까. 그날 잤어요?"

"음...어..."

"에이, 부끄러워하지 말고. 걔 잘하죠? 나도 꽤 이 사람 저 사람이랑 해봤지만, 걔보다 잘하는 사람 없었으니까. 그래도 너무 맘 주지 말아요. 언제 헤어지자고 할지 모르니까. 나랑도 한 일주일갔나?"

심장이 너무 크게 뛴다. 귀가 웅웅거리느라, 여자가 뭐라고 말하고 있는지 잘 들리지가 않는다. 하지만 친구인 자신이 들을 얘기는 아니었다. 아도라는 참지 못하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잠깐...그만. 그만 말해요."

"응?"

"캣트라가 없는 자리에서 이런 말 하는 건... 아닌거 같아요. 전... 죄송해요. 먼저 내릴게요."

"잠깐만요! 내...이런, 이미 늦었네."

황급히 내린 아도라를 버리고, 버스가 출발했다. 지도 어플은 10분을 기다려 다음 버스를 타던가, 20분을 걸어서 올라가라 말하고 있었고, 아도라는 걷는 길을 택했다. 걸어가다 보니 무언가를 부수고 싶단 생각으로 달궈젔던 머리속은 차분해져 있었다. 캣트라에게서 언제 오냐는 카톡이 와있었지만, 답장하고 싶은 기분은 들지 않았다. 멍하니 걷느라 거리가 자신이 알던 그 거리에 온 것도, 누가 자신에게 다가오는지도 모르는 채였다.

'왜 그런 사람이랑...한거야?'

'너를 소중하게 여기지 않는 사람이잖아.'

'그사람 말고 다른 사람들도 너랑...한 걸 그렇게 떠들고 다녀도 너는 괜찮은거야?'

'좀 더 나은 사람이라는 선택지는 없었어?'

'나라면...'

'나라면...'

'나라면...'

"좀 더 소중하게...대해줄텐데."

"멀 소중하게 대해줘? 걸어가면서 잠꼬대하냐?"

"진짜 캣트라야?"

"그럼 가짜겠냐?"

이마에 딱밤을 놓은 캣트라는 평소와 달리 후드집업을 쓴 상태였다. 조금은 어린 시절의 모습과 닮아있어, 아도라는 쓰라린 이마를 문지르며 자신도 모르게 안도했다.

"왜 여기까지 나와있어? 설마 나 데리러 온거야?"

"미쳤냐. 껌 사러 나온 김에 니가 좀비마냥 멍하게 걸어와서 아는 체 좀 한 거야. 넌 김칫국 좀 마시지 마라. 야, 무거워."

맞닿은 체온은 그 때와 같았다. 달라진 건 자신의 마음 뿐이었다. 두근거리느라 빨개진 얼굴을 보이기 싫어, 아도라는 캣트라를 꼭 끌어안은 채 걸었다. 뒤뚱거리는 걸음에 캣트라가 다시 한 번 타박을 하였지만, 무슨 말을 듣는대도 지금은 이대로 걷고 싶은 마음이었다.

"너 어디 아프냐? 열나는 거 같다? 아프면 옮기지 말고 집에가서 약먹고 자."

"아니 그냥... 간지러워서 그래."

"...? 가게에 버X리 있으니까 그거나 바르던가..."

간지러운 열감이 걸음걸음마다 오르는 것을 느끼며, 아도라는 그저 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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